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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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방관.

 

그것은 류봄이 예과 2년, 본과 4년, 인턴 1년, 레지던트 4년, 정신의학과 전문의 6년의 긴 시간동안 터득한 유일한 삶의 방식이었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사회의 부조리함을 수용하고, 도움을 청하는 간절한 손길을 뿌리치는 것에 그녀는 어느덧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가끔 양심의 가책이 들기도 했지만, 방관하지 않는 삶을 살았더라면 이 자리까지 오를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녀는 종종 생각하곤 했다. 그녀는 이제는 경영 부실로 인해 폐교된 지방 사립대학의 의대를 졸업했다. 그 대학에 부속 병원 같은 것은 당연히 없었으므로 졸업이 다가올 무렵 그녀는 타 대학병원에 인턴 지원서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병원인 U대학교 부속 병원에서, 동기들 중 누구보다 빠르게 승진해 30대 후반의 나이에 정신의학과 과장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원칙대로 올바르게 살았더라면 결코 이룰 수 없었던 성과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비오는 날이면 류봄은 종종 새벽에 악몽을 꾸다 깨어나곤 했다. 늘 같은 꿈이었다. 꿈에서 그녀는 정신과 레지던트 3년차였을 때로 돌아가 있었다. 장맛비가 무섭게 퍼붓던 날이었다. 30살의 그녀는 의국의 열린 문틈으로 레지던트 4년차 선배인 C가 당시 정신의학과 과장이었던 P에게 폭력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P는 바닥에 쓰러진 C를 발로 걷어차고 밟으며 환자들 앞에서는 결코 입에 담지 않는 욕지거리를 해대고 있었다. 저 정도로 맞았으면 분명 온 몸에 멍이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류봄은 어느 순간 신음을 참고 있던 C와 눈이 마주쳤다. 이윽고 P도 그녀를 발견했다. P는 점잖게 헛기침을 한 후 류봄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다가와 방문을 닫았다. C가 대한전공의협의회에 P에게 지속적인 폭행을 당해왔다는 민원을 넣은 것은 그 일이 있고 일주일 후였다. 마침 부산의 한 대학병원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던 터라, 한국 최고의 대학병원에서 폭행민원이 접수되었다는 소식은 전국적인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로 지목된 그녀는 경찰 조사에 응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반차를 내고 병원 현관을 나서던 류봄은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P와 마주쳤다. P는 그녀의 어깨에 잠시 손을 얹더니 어깨를 툭툭 치고 병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날 조사에서 류봄은 P가 C를 폭행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며, P는 레지던트들에게 늘 자상하고 친절하게 대해주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C의 주장이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판단했고, P에게 레지던트 폭행 혐의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U 대학교 부속 병원은 정직하고 훌륭한 병원이라는 이미지를 지킬 수 있었다. 그 일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대중들의 뇌리에서 서서히 잊혀 갔다. 병원 내에서 C의 평판은 바닥을 찍었다. 그 일이 있고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C는 치사량의 포타슘을 자신의 정맥에 주사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2년 후에 류봄은 U대 병원의 정신과 전문의가 되었고, 그녀의 커리어는 고속도로 위를 달리다시피 했다. 몇 년 뒤 P가 건강상의 이유로 퇴직하였을 때, 그는 류봄에게 정신의학과 과장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병원 직원 중 아무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누가 봐도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던 삶이었지만, 류봄은 행복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식 의사가 되고 만 1년이 지났을 때 결혼을 했다. 상대는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소개받은 선배 의사였다. 누구보다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던 류봄이었기에, 결혼생활 또한 순조로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결혼하고 1년이 지나도 아기가 들어서지 않자 시부모는 류봄에게 검사를 받아볼 것을 종용했다. 그녀는 불임 판정을 받았고, 그러자 남편 측은 이혼을 요구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벌을 받은 것일지도, 라고 한산해진 진료실에 홀로 앉아 생각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었다. 류봄은 구내식당 대신 병원 근처 상가에 있는 햄버거 프랜차이즈로 향했다. 지난 10여 년 동안 혼자 밥 먹는 것에는 익숙해진 그녀였지만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며 식사를 하는 하얀 가운들 사이에서 묵묵히 홀로 밥을 먹는 것은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 일이었다.

 

류봄은 치킨 버거 세트를 주문했다. 점원은 이번 달 프로모션입니다, 라고 말하며 버거와 캐릭터 열쇠고리를 함께 건넸다. 하얀 바탕에 까만 눈, 역삼각형 모양의 까만 코를 가진 토끼 캐릭터였고, 몸통에는 햄버거 프랜차이즈의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무심히 테이블에 열쇠고리를 내려놓고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던 류봄은 자기 쪽을 바라보던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U대 병원 로고가 박힌 환자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아 소아병동 환자인 것 같았다. 류봄은 아이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다시 햄버거를 집어 들었다. 자신은 평생 낳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었을까, 3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류봄은 아이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게임중독 청소년이나 자폐를 가진 어린이들이 진료실을 찾아오면 괜히 서랍에 넣어두었던 초코바를 꺼내 쥐어주곤 했다.

 

“아줌마, 이 토끼 뭔지 알아요?”

햄버거를 먹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던 류봄은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어느새 소아병동 아이는 류봄 맞은편에 양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아니, 모르는데, 라고 류봄은 대답했다.

“그러면요, 여기 이거는 얘 입이게요, 코게요?”

아이는 류봄이 코라고 생각했던 토끼 얼굴의 역삼각형 모양을 가리키며 물었다.

“코 아니야?”

“뗑! 이건 얘 입이에요!”

아이는 즐겁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아… 난 이게 얘 코인 줄 알았어. 입이라기엔 너무….. 부자연스러운데”

“그거는 얘가요, 슬퍼도 안 슬픈 척 웃고 화나도 안 화난 척 웃고 있어서 그래요. 얘는 맨날 이렇게 웃으면서 방방 뛰어다니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은 얘가 맨날 행복한 줄 알고 좋아해요. 저도 약간 그렇거든요. 그래서 얘가 저 같아서 좋아요.”

류봄은 아이를 자세히 살폈다. 아무리 높게 잡아도 초등학생 이상으로는 안 보이는 아이인데, 그런 어린 아이 입에서 어째서 저런 말이 나올까. 저 애의 삶도 순탄치 않았나보다, 하고 류봄은 생각했다.

“이름이 뭐야?”

“얘 이름은 오버액션토끼에요.”

“말고, 네 이름말이야.”

“저는 이세민이에요! 저 병원에 엄청 오래 있었는데요, 아줌마 지나다니는 것도 몇 번 봤어요. 아줌마 의사죠?”

류봄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 열쇠고리 너 가질래, 라고 세민에게 물었다. 아이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래도 돼요? 저도 아까 하나 받았긴 한데요, 병원에서 만난 친구가 있거든요. 그 친구도 하나 주고 싶었는데, 치킨 버거 세트를 한 개 더 사먹을 돈이 없었어요.”

“그럼 이거 가져가서 친구 줘.”

“감사합니다! 제 친구 이름은 안수하에요! 나중에 수하도 소개시켜 드릴게요.”

류봄은 명랑하면서도 어딘가 슬퍼 보이는 이 아이가 마음에 들었다. 아이는 의자에서 일어나 배꼽인사를 하고 가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류봄은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이의 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류봄이 이세민이라는 아이와 그 아이의 친구를 만나게 된 것은 그 날로부터 일주일 정도가 지난 후였다. 점심을 먹으러 진료실 밖으로 막 나가던 류봄은 문 앞에 서 있던 두 아이를 발견했다.

“아줌마! 오늘부터 길 건너 돈까스 가게에서 왕돈까스 시키면 오버액션토끼 인형을 준대요! 같이 가실래요?”

“음…. 그럴까? 내가 사 줄게.”

“아니에요, 우리도 돈 있어요. 돼지저금통 깨 왔는데….”

그 돈은 더 좋은 데에 쓰렴. 나는 이십 분 일하면 왕돈까스 세 접시 살 돈을 벌 수 있단다, 라고 말하며 류봄은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 맞다! 아줌마, 얘가 저번에 제가 말씀드렸던 수하에요.”

처음 뵙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너무 스산하게 들려 류봄은 걸음을 멈추었다. 빼빼 마른 아이의 홀쭉한 얼굴에는 다크 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 아이는 무엇이 불안한지 연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어디가 아픈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자폐가 있는 아이일수도 있겠다고 류봄은 생각했다. 류봄은 돈까스를 먹으며 아이를 계속 지켜보았다. 아이는 전반적으로 주변 환경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지만, 세민과 이야기를 할 때는 밝게 웃었다. 그래도 의지할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녀가 생각할 찰나였다.

“아줌마, 저 화장실 가고 싶은데 같이 가주시면 안돼요?”

류봄은 세민과 함께 일어섰다. 화장실 문이 닫히자마자 세민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줌마, 수하 좀 도와주세요.”

“도와…..달라니?”

“수하가 그러는데요, 이상한 아저씨들이 매일 수하를 끌고 가서 머리에 이상한 모자를 씌우고 이상한 통에 집어넣는데요. 또 막 이상한 약을 먹여서 재워놓고 몸에 이상한 짓을 한데요. 수하가 막 아프다고 하고 그만하라고 해도 아저씨들은 들어주지도 않는데요. 거기 수하 엄마가 같이 있을 때도 있는데, 수하 엄마는 수하가 도와달라고 해도 그냥 보고만 있는데요.”

“그냥 MRI 찍고 마취 수술 한 거 아닐까? 그건 이상한 짓이 아니라 치료의 한 부분이야.”

“아니에요! 저도 수하도 MRI도 찍어 봤고 마취도 해 봤는데, 그거랑 진짜 다른 거예요! 자기를 실험용 쥐처럼 다룬다고 수하가 그랬어요.”

“수하는 어디가 아픈데?”

“음…. 뭐라더라… 인격 장애? 그런 게 있고요. 팔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데요. 이상한 아저씨들이랑 실험하고 나면 더 아프다고 그랬어요?”

“혹시 수하가 망상 증세를 보이고 있는 게 아닐까? 망상이 뭐나면…. 없던 일을 있는 것처럼 느끼는 건데…”

“아니에요! 그 아저씨들 저도 봤단 말이에요. 점심 먹고 나면 또 수하를 데리고 갈 걸요? 아줌마, 그 아저씨들 좀 막아 주시면 안돼요? 이러다가 수하한테 큰일이 날지도 모른단 말예요.”

류봄은 도움을 요청하는 세민의 간절한 눈빛을 애써 피했다. 아이의 말을 믿어도 될 지부터 확신이 들지 않았다.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어쩔 것인가. 이런 일에 나서는 것은 류봄이 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세민은 의사를 잘못 찾아온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류봄은 세민에게 수락도 거절도 아닌 애매한 말을 건넸다.

 

그러나 세민의 말이 전부 사실이었음을, 류봄은 곧 알게 되었다.

“소아병동에 안수하라는 애, 소문 들었어?”

의국 앞을 지나가던 류봄은 안쪽에서 들려오는 안수하라는 이름에 걸음을 멈추었다. 류봄은 홀린 듯 안으로 들어갔다. 텅 빈 의국에는 레지던트 몇 명이 모여 앉아 있었다. 류봄은 커피를 타 마시는 척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지만, 그녀를 의식한 레지던트들이 거의 속닥거리다시피 대화를 이어갔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약물, 의료사고, 인격 장애, 실험, 연구 같은 단어들만이 드문드문 들려왔으나, 그 단어들만으로도 사건의 경중을 파악할 수 있었다. 류봄은 원두를 내리며 슬금슬금 레지던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강호민 연구원이랑 박민철 쌤?”

한 레지던트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는 류봄의 눈치를 살피더니 제 입을 틀어막았다. 류봄은 그만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몸을 돌렸다. 흥분한 레지던트들은 어느새 류봄의 존재를 망각한 듯 했다.

“미쳤다…. 박민철 그 인간은 인간쓰레기를 넘어서 핵폐기물 아니냐?”

“글니까, 나 인턴 때 말야, 그 인간이….”

강호민과 박민철은 류봄도 아는 작자들이었다. 전자는 약사 출신 연구원, 후자는 같은 병원 소속 의사였다. U대 의대 부설 연구소 소속인 강호민과는 병원과 연구소가 함께 하는 망년회나 단합회 때 몇 번 마주쳤는데, 류봄은 그의 모습이 마치 혀를 날름거리는 독사와 같다고 생각했다. 박민철은 여러모로 P 교수를 닮은 인간이었다. 게다가 무능력하기까지 해서 근래에도 의료사고를 일으켰다고 들었다. 듣자 하니 그 콤비가 안수하를 모르모트로 삼아 수상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일에 엮이면 괜히 귀찮아지기만 할 것이라고 류봄의 이성이 속삭였다.

 

‘엄마가 병원 앞에 식당을 열었어요. 아줌마, 오늘 꼭 놀러오세요! -이세민-’

진료실 문에 붙어있는 도화지를 발견한 류봄은 흠칫 놀랐다.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던 탓이었다. 쪽지에는 아이가 크레파스로 그린 것 같은 조약한 약도가 그려져 있었고, 그 밑에는 류봄과 두 아이, 그리고 예의 토끼 캐릭터로 추정되는 난해한 그림이 있었다. 그림에서 안수하와 이세민은 풍선을 손에 들고 밝게 웃고 있었고, 류봄의 등에는 하늘색 날개가 그려져 있었다. 류봄은 한 손으로는 오버액션토끼의 손을, 다른 손으로는 세민의 손을 잡고 있는 그림 속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런 그림 따위는 재빨리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리라고, 지금 대체 뭐 하는 거야, 하고 류봄의 이성이 말했다. 이 식당에서 세민과 그 모친을 만나게 되면 꼼짝없이 사건에 관여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류봄의 손은 이성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뭐야, 너 이런 사람 아니잖아, 그녀의 이성이 악을 쓰다시피 말했다. 갑자기 들려오는 빗소리에 류봄은 반사적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장맛비가 내리고 있었다. 7년 전 그날만큼이나 세찬 비였다.

 

“우와, 아줌마! 오셨네요!”

축하 화환의 꽃이 아직 싱싱한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세민의 낭랑한 음성이 류봄을 반겼다. 류봄은 자신이 조악한 지도 하나를 가지고 무섭게 퍼붓는 장맛비를 뚫고 이 식당까지 왔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이제 어쩔 셈이냐, 이성이 조소하듯이 물었다.

“아줌마 배고프시죠? 저기 앉으세요! 우리 엄마는 제육볶음 잘해요.”

세민이 홀로 뛰어 들어가 의자를 빼 주었다.

“뛰어다니지 마, 세민아. 그러다 다칠라.”

류봄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때 인턴 생활을 같이 했던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였다. 그는 류봄을 발견하더니 약간은 떫은 표정으로 목례를 건네고 고개를 돌렸다. 자세히 둘러보니 식당에는 소아병동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이곳은 어느새 그들의 단골집이 된 모양이었다. 연구소 사람들도 몇몇 보였다.

“저…. 제육볶음 정식 하나 주세요.”

네, 제육 정식 하나 맞으시죠, 하고 부엌에 있던 여자가 나와 주문을 받았다. 세민의 모친인 모양이었다. 류봄 또래의 여자로 보였으나, 손이 거칠었고 얼굴에는 오래 누적된 피로의 흔적이 보였다. 그렇지만 병원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재롱을 부리는 세민을 바라보는 눈에는 아이에 대한 사랑이 가득해 보였다. 류봄은 음식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들어가려는 여자를 불러 세웠다.

“세민이 어머니 맞으시죠? U대 병원 정신의학과 과장 류봄입니다.”

“아…. 세민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수하…. 도와주신다고 하셨다고…..”

자신의 애매한 답변을 세민은 긍정이라고 받아들인 모양이라고 류봄은 생각했다. 결국 이렇게 흘러갈 일이었던 것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수하가 어떤 연구에 이용되고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 점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으신가요?”

여자가 세민의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와 세민이가 처음 수하를 만난 것은 4년 쯤 전입니다. 수하는 자폐가 있는 아이였는데, 약물 치료를 받고 있었지요. 몇 달 전에 병원 측의 실수로 수하가 잘못된 약물을 처방받게 되었어요. 일종의 의료사고….이지요. 그런데 그 약물이 뜻밖에 수하의 증세를 완화시켰다고 했어요. 다른 자폐 환자들에게서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는데, 수하에게서만. 그러자 U대 의대 연구소에서 수하를 연구대상으로 삼고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 연구가 정상적인 연구는…. 아닌 것 같아요.”

“정상적인 연구가 아니라니요?”

“우리 세민이…. 만성 골수성 백혈병을 앓고 있어요. 세민이는 거의 서너 살 때부터 병원생활을 했어요. 골수성 백혈병은 완치가 가능하다고들 하는데, 세민이는 아직도…. 그래서 백혈병과 관련된 신약이 개발되었다고 할 때마다 임상실험에 참여하기도 했었는데…. 수하가 당하고 있는 실험은 그런 실험과는 달라 보였어요. 조금 더 위험하고 이상한…. 병원 갈 때마다 수하를 만나는데, 하루하루 아이 얼굴이 야위어가는 게 보여요.”

“…… 그렇군요.”

“수하 어머니를 만나 얘기를 나눠 보았는데, 그분은 수하를 짐처럼 생각하시는 분이라….. 오히려 잘 되었다고 느끼시는 것 같아요.”

“……”

 

맞은편 식탁에서 국밥을 먹던 두 연구원이 어느 순간 류봄이 앉은 테이블로 건너왔다.

“그래서 저희는 해당 연구의 목적이 과연 무엇인지, 연구과정에서 연구 대상인 안수하 양을 대상으로 비윤리적인 행위가 발생하지는 않았는지 규명하려고 합니다. 저희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 문제를 공론화시켜 연구의 진행을 중단시키고, 안수하 양에게 적절한 치료와 교육을 제공하는 데에 있습니다.”

세민 모친의 말을 곱씹고 있던 류봄은 그들이 자신의 테이블로 넘어 온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들려오는 담담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렇군요. 그런데 누구시죠, 하고 류봄은 물었다.

“아, 인사가 늦었습니다. U대 의대 연구소 소속 류혁진입니다. 이쪽은 제 밑에서 일하고 있는 신임 연구원 한도윤 양입니다.”

류혁진이라는 남자가 류봄에게 명함을 건네며 저희를 도와주신다고 들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네, 할 수 있는 한 돕겠습니다. 제가 어떤 일을 하면 되지요?”

“선생님은 병원 내에서 입지가 확고하시지요. 그리고 기자나 의료계 인사들과도 면식이 있으시고요.”

“네….. 그렇다고 할 수 있겠죠.”

“수하를 대상으로 어떤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지, 그 연구가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 외부에 알려주십시오. 연구소는 폐쇄적인 곳입니다. 외부인들은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고 있어요. 가능하시겠습니까?”

“그 정도라면…..”

“이곳은 강호민 연구원처럼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절망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이 판치는 곳입니다. 수하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외부의 힘이 필요합니다.”

“……..”

“메일 주소를 알려주십시오. 지금까지 저희가 캐낸 해당 연구 관련 자료와 수하 양의 능력에 관한 보고서를 보내드리겠습니다. 험난한 싸움이 될 것입니다. 보내드린 자료를 읽어보신 후에 다시 모여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요”

“네, 알겠습니다. 메일주소는…. 여기 있습니다.”

류봄은 주머니를 뒤져 한동안 꺼내보지 않았던 명함을 꺼내 류혁진에게 건넸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정말 감사드려요, 류봄 선생님.”

한도윤이 말했다. 류봄은 그녀의 눈빛이 어딘가 세민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꼭 진실을 밝혀낼 겁니다, 라고 말하며 류혁진이 악수를 청했다. 류봄은 그의 손을 힘껏 잡고 흔들었다.

 

장맛비에 사람들의 발이 묶인 것인지, 오후의 진료실은 한산했다. 류봄은 한참 동안 류혁진의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니, 그녀의 이성이 중얼거렸다. 류봄은 책상 한 귀퉁이에 앉혀놓은 토끼 인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왕돈까스를 먹고 얻은 것이었다. 아마 그렇지 않을까, 하고 류봄은 이성의 물음에 답했다. 문득 선배 C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가 죽은 후 몇 년이 지났음에도 류봄은 단 한 번도 그의 묘소에 찾아가지 않았다. 그건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이번에야말로 그를 찾아가야겠다, 술과 꽃을 사가야지, 그의 묘 앞에 무릎을 꿇어야겠다, 류봄은 두서없이 생각했다. 그가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을지,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류봄은 문득 알고 싶어졌다. 어리고 미성숙했던 자신은, 그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 아니, 그건 불가능할 것이다. 어째서 자신은 그토록 근시안적이고, 어리석었을까. 남은 생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고, 류봄은 생각했다.

 

‘띠리링’

새로운 메일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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