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란드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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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의 안에 살았다. 그는 내가 밖으로 나올까 봐 언제나 전전긍긍하며 나를 숨겨두었다. 나는 절대 환영받을 수 없는 존재였으니까. 그가 나를 눈치 챘을 때 그는 깨달았을 것이다. 나는 영원히 떼어놓을 수도, 분리할 수도 없는 존재라는 걸. 나는 꽃을 피워낼 날을 고대하며 그의 안에서 조용히 줄기를 뻗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일부였고, 그는 나였다. 우리는 온전히 하나였다.

*

 

아줌마가 음료수 잔을 건네주었다. 오렌지 주스였다. 거실에 앉아 티비를 보며 나는 누나를, 아줌마는 딸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우리 가족과 누나네 가족은 아주 예전부터 친했다.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나는 누나네 집에서 보낸 시간이 많았는데, 그 때문인지 누나네 집은 우리 집만큼이나 편안한 곳이었다. 현관 도어락을 푸는 소리에 뒤이어 또각또각 누나의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누나를 반기기도 전에, 누나의 한 마디 말에 온 집안은 살얼음판이 된다.

“저 임신 했어요.”

누나의 목소리가 온 집안에 메아리치듯 울리는 것 같았다. 누나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동그란 풍선처럼 제 몸집을 부풀리며 점점 커졌다. 커지고, 커지고, 더 커다래져서 마침내 뻥, 하고 터져버렸다. 저 임신했어요. 아줌마가 멍하니 누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줌마는 고개를 돌려 아저씨가 앉는 자리의 소파를 바라본다. 아저씨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잊은 것처럼 보였다. 너무 놀라서, 아무 생각도 안 나는 상태인 것 같았다.

“영준이 왔구나? 들어가자. 내 방에 있어.”

나는 뒤돌아선 누나의 등이 한없이 멀고 낯설게 느껴졌다. 내 앞에 있는 건 분명 누나가 맞는데, 겉모습만 비슷한 타인인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누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왜 나마저 이런 상황에 말려들게 한 건지, 수많은 의문이 저 밑바닥에서 피어올랐다. 나에게 누나는 어린 시절을 함께한 친한 친구이자 가족, 그리고 내 비밀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여기, 이거야. 내가 준다고 했던 것.”

누나가 내 손에 자그마한 화분 하나를 올려주었다. 나는 손바닥보다 작은 화분을 이곳저곳 살폈다. 아주 이상한 식물이었다. 위로 삐죽삐죽 솟은 잎들은 얼핏 선인장의 한 종류처럼 보이기는 했으나, 완전히 그 종이라고 보기엔 어색한 감이 있었다. 게다가 그 이상한 식물의 아래에는 기름진 흙이 아니라 예쁜 자갈이 깔려 있었다. 어항 바닥에나 쓰는 색색의 자갈 위에 그 식물은 홀로 우뚝 서 있었다.

“틸란드시아라고 해.”

누나 말을 들으며 화분을 살피다가 식물이 내 손길에 조금 움직여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보니 그 식물은 자갈에서 완전히 분리되도록 되어 있었다. 뿌리가 없었다.

“신기하지? 뿌리를 내리지 않는 식물이야.”

“그러고도 살 수 있는 거야?”

“그럼. 적당한 수분과 햇빛이 필요하다는 건 다른 식물들과 같아. 뿌리로 양분을 흡수하지 않을 뿐, 자신만의 생존 방식을 찾은 거지.”

누나는 틸란드시아에 대한 얘기를 줄줄 읊으며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스스럼없는 행동이었다. 나에게도 익숙한 상황이었다. 누나는 한참을 틸란드시아에 대해 얘기했지만 내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장마철엔 환기를 자주 시켜줘야 해.”

“누나.”

“응?”

막상 이유를 물으려니 말문이 턱 막혔다. 무엇을 먼저 물어야 하는지 혹은 무엇을 묻지 말아야 하는지. 나 나중에 꼭 여기에 갈 거야! 지금보다 훨씬 앳된 누나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때 누나가 보여준 엽서에는 한적한 바다가 그려져 있었다. 그 엽서를 바라보는 누나의 눈동자가 기묘하게 반짝였었다. 누나는 외출할 때 항상 부모님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누나는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고, 어딘가를 가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런 누나를 잘 알았기에 처음으로 어딘가에 갈 거라고 말 한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았다. 왜 하필 그 장면이 지금 떠오른 것인지. 누나는 책상 의자에 앉아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를 한참 마주 보다가 먼저 시선을 돌린 건 나였다.

“일주일에 물 두 번?”

일단은 물러서자. 어차피 먼저 얘기해 줄 눈치도 아니었다. 이런 때의 누나는 어떤 식으로 꼬여내도 입을 열지 않곤 했다. 한 번 입을 다물면 절대 벌리지 않는 거북이처럼. 나는 종종 그런 상태의 누나가 섭섭했다. 이제는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불안하게 둥 둥 뛰는 심장은 가라앉지 않았다. 누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안도의 의미 같았다. 나는 손 안의 작은 화분을 꼭 붙잡았다. 갑자기 나타난 이상한 식물이 내가 잘 알았던 누나의 흔적이라도 되는 듯이.

 

 

교실 창가에는 반 아이들이 키우는 식물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종류는 갖가지였다. 선인장과 허브, 무슨 먼지를 먹는다는 식물까지. 초등학교 때나 키워봤던 강낭콩도 있었다. 학기 초에 정해진 우리 반의 환경미화 주제는 푸른 교실이었다. 각자 자신이 키울 식물을 하나씩 가져와야 했다. 나는 누나에게 받은 틸란드시아를 가져다 두었다. 화분을 가져가야 한다고 말했더니 누나가 주겠다고, 집으로 오라고 했던 거였다.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틸란드시아는 서로 비슷비슷한 식물들 사이에서 아주 눈에 띄었다. 내가 틸란드시아를 가져왔던 날, 아이들은 창가에 달라붙어 너도 나도 구경하기 바빴다. 그 소란은 식물의 주인이 나라는 걸 안 순간 수그러들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여전히 식물에 관심이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영준아, 옷 안 갈아입어?”

반장이었다. 다음 시간은 체육이었고, 아이들은 체육복을 갈아입고 있었다. 나는 창가 옆 내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체육 선생님께 말씀드렸어. 몸 안 좋다고.”

“내일 애들이 피씨 방 가자던데, 너는?”

“야, 관 둬. 걔가 언제 게임하는 거 봤냐?”

옆에서 옷을 갈아입던 아이가 한마디 했다. 딱히 악의가 있는 말은 아니었지만 괜히 신경이 쓰였다.

“나도 갈게.”

말을 꺼낸 반장 또한 내가 그리 대답할 줄은 몰랐는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매번 빼던 녀석이 웬일이냐는 얼굴이었다. 왜 그랬지. 아이들은 우르르 운동장으로 몰려 나갔다. 곧 종이 쳤고, 소란스럽던 복도도 조용해졌다. 나는 책상 서랍에서 문제집을 꺼냈다. 왜 그랬냐고. 내가 언제부터 게임 같은 거 했다고. 사각 사각, 펜의 잉크가 종이의 흰 여백 위에 여러 숫자들을 새겨낸다. 바삐 굴러가는 머릿속에 여러 목소리가, 문장이 중첩된다. 나중에 꼭, 임신, 여기에, 했어요, 갈 거야!

순간 손목이 시큰거리는 통증에 펜을 떨어트린다. 나도 모르게 펜을 쥔 손에 힘을 가득 주고 있었던 걸 뒤늦게야 알았다. 공책 위에 펜의 잉크가 동그랗게 얼룩을 만들었다. 뒷장에도 잉크가 번져 공책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새카맣고 둥글게 남은 얼룩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낙인마냥 공책에 들러붙었다. 공책을 가방 안에 넣어버렸다. 교실은 깊은 물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고요했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하늘을 보니 정말로 물속에 잠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머리도 옷도 이렇게 축축한 걸까. 틸란드시아는 내 자리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놓아두었다. 누나에게 받아온 그대로, 아직 물도 한 번 주지 않았다. 물을 주고 싶지 않았다. 누나가 이상해진 날 건네받은 이상한 식물은 첫 만남부터 좋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땀이 나 이마에 달라붙는 앞머리가 불쾌했다. 창문을 열어도 꿉꿉한 바람만 밀려들 뿐이었다.

“야, 패스하라고 새끼야!”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이 축구를 하는 중이었다. 곧 여름이긴 했지만 날이 흐린 탓에 쌀쌀했는데도 아이들은 반팔에 반바지였고, 간혹 아예 웃통을 벗은 아이들도 보였다. 스탠드에는 아무도 없었다. 반 아이들 모두 축구에 한창이었다. 평범한 남자 고등학생의 모습이란 저런 것일지도 몰랐다. 그럼 나는? 고개를 저어 떨쳐내려 했다. 그래도 떨어지기는커녕 더 끈끈하게 달라붙어 왔다. 그럼 아이들 속에 속하지 못한 나는. 고개를 돌리다 운동장 한 편의 모래사장을 보게 되었다.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아 초라했지만 어렸을 때 나는 모래사장에서 항상 놀았었다.

누나는 친화력이 좋은 사람이다. 친구라곤 누나밖에 없는 나와는 달리, 학년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누나는 친한 친구들이 많았다. 누나와 단둘이 노는 걸 좋아했던 나는 우리 둘 사이에 누군가 끼어드는 것을 싫어했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못했다. 나는 그 날 누나와 모래사장에서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누나는 누나 역이고 나는 나였다. 그러던 중 누나와 친한 여자 아이들이 아는 체를 해왔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때에는 질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언니, 언니 하며 누나를 잘 따르고 누나도 그 애들을 받아주는 모습이 질투가 나서 그랬던 것이라고. 그 단어는 생각보다 쉽게 입 밖으로 나왔다. ‘언니.’ 파란 사탕을 빨아먹으며 곁에서 걷던 누나가 내 부름에 우뚝 멈춰 섰었다. 마주보았을 때 반쯤 벌린 입술 사이로 누나의 파래진 혓바닥이 보였다. 누나는 잠시 그렇게 나를 바라보다가 파란 혓바닥을 입 안으로 쏙 숨기며 웃었다. 누나가 그 때 뭐라고 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 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그 단어를 뱉어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우연을 가장한 부름. 그 단어를 뱉으며 가슴에 올라앉은 무엇도 뱉어낸 것처럼 후련했지만 뱉어놓은 만큼의 무게를 다시 가슴에 얹어놓은 것 같았다. 누나의 파란 혀를, 마찬 가지로 파랗게 물든 혀를 숨기며 빤히 바라봤던 순간. 나는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오는 단어를 삼킨다. 가슴이 파랗게 물든다. 창문을 닫고 블라인드를 친다. 누나는 정말 떠날지도 모른다.

 

 

학교가 끝난 후 집 반대 방향으로 서둘러 걸었다. 누나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누나 회사에 도착할 생각이었다. 말 해줄 때까지 기다리자니 누나가 언제 떠나 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불쑥불쑥 찾아와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누나에게 회사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연락했다. 누나는 평소와 달리 조금 당황한 것 같더니 알았다고 대답했다. 누나는 회사 앞에서 먼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엔 누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칠 뻔했다. 도수 없는 안경에 마스크까지 끼고 있어서, 누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왜 그런 걸 하고 있냐고 묻기도 전에 이유를 알아버렸다. 눈가의 상처는 안경으로도 전혀 가려지지 않았다.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아도 빤했다. 누나는 어릴 때도 종종 그런 상처를 달고 나타났다. 하굣길에 약국에서 산 밴드를 붙여주는 건 언제나 내 몫이었다. 누나가 집에 가자며 팔을 끌었다. 누나가 이렇게 살아갈 바엔 이곳을 떠나는 게 정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어떤 결정이든 누나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

“어떻게 할 거야?”

“그거 물어보려고 일부러 온 거야?”

“누나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으니까 그렇잖아. 왜 그랬어.”

“그러게.”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누나는 내가 원하는 대답은 하나도 들려주지 않았다. 마치 남의 일을 얘기하는 것처럼 태연하고 느긋한 모습에 내가 더 답답해졌다. 집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골목길, 결국 나는 끝끝내 먼저 묻고 싶지 않았던 말을 꺼냈다.

“떠날 거야?”

누나는 그제야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입 밖으로 내뱉어놓고 보니 누나가 정말 나도 모르는 새 훌쩍 떠나 버릴 것만 같아 서러워졌다. 울지 않으려 입술을 짓씹었다. 누나의 곤란한 표정은 내 질문이 정답이라는 걸 알렸다. 가슴이 죄여오는 걸 느끼며 한 번 더 물었다. 아니라는 대답을 원했지만 그런 말이 나올 리 없다는 건, 되묻는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떠날 거지? 그렇지?”

누나의 침묵은 긍정이었다. 그 후 나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붙일 수 없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집에 들어가는 누나의 등을 오래도록 바라보고만 있었다.

 

친구들을 따라 피씨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 하루 종일 잠기운에 비실거리다가 얼떨결에 끌려온 게 잘못이었다. 아까라도 내뺄걸. 후회는 의자에 앉아 눈치를 보며 본체 전원을 키고, 아이들이 많이 한다는 게임에 접속했을 때 확실해졌다. 나는 그 흔한 게임 아이디조차 하나 없었다.

“뭐 해, 안 들어 와?”

게임 아이디를 만들까, 하는 생각도 했다. 이대로 게임 아이디를 만들고, 방과 후면 아이들과 피씨방에 몰려 가 게임을 하고, 그렇게 할까. 남처럼. 평범한 남자애들처럼. ‘남자애들은 그래야 하는 거야. 알겠니?’ 뭐에 홀린 것처럼 회원가입 창을 켰다가, 이름을 적고, 생년월일을 선택하고, 성별을 선택하는 란에서 멈췄다. 남, 여. 남자 아니면 여자. 절반의 선택지.

“너 아직 아이디도 없냐?”

옆 자리 아이의 간섭에 화들짝 놀라 나는 회원가입 창을 꺼버렸다. 의문이 가득한 아이의 어깨를 툭 치며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미, 미안. 나 학원 있던 것 깜빡했다. 먼저 갈게.”

나는 컴퓨터 본체 전원을 눌러 강제종료 시켰다. 카드키를 카운터에 반납하고 도망치듯 나가는 나의 등 뒤로 게임을 시작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흐리더라니, 사거리의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을 때 기어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길을 가던 사람들의 우산이 하나 둘 펴지고, 우산이 없는 사람들은 바쁘게 나를 스쳐갔다. 신호등이 몇 번인가 색을 달리했다. 빨간 불에서 푸른 불, 다시 푸른 불에서 빨간 불로. 나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한참을 걷다가 갑자기 배가 아파 와서 하는 수 없이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가는 동안 복통이 멈췄으면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진 것 같았다. 이마에서 흐르는 것이 빗물인지 식은땀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열이 나는 것도 같았다. 익숙한 건물들과 골목이 보일 때쯤, 횡단보도 신호를 눈앞에서 놓쳐 버렸다. 배는 아파오고, 2분 남짓한 시간을 기다리자니 그 전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근처 공원으로 들어서자마자 화장실 건물을 볼 수 있었다. 마침 잘 되었다 싶어서 들어가려던 나는 자리에 우뚝 설 수밖에 없었다. 화장실은 남녀가 분리되어 있었다. 나는 눈앞의 화장실 표지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치마를 입은 빨간 표지판과 바지를 입은 파란 표지판. 각각 여성과 남성을 대변하는 기호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결국 아픈 배를 부여잡고 돌아섰다. 다음 신호는 절대 놓칠 수 없었다. 집에 가야지. 집으로 가야지. 이마에서 식은땀인지 뭔지 모를 액체가 흘러 속눈썹에 맺혔다. 더운 날도 아닌데 내게는 끔찍하게 더웠다.

 

 

 

  나는 사람들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갔어. 휴일 오후의 시내였고, 여름이었어. 따가운 햇살만큼이나 살갗에 들러붙는 낯선 이의 피부가 불쾌했지. 일행과 함께 에어컨 바람이 잔뜩 새어나오는 옷가게에 들어갔어. 무언가 사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더위도 피할 겸 구경도 할 겸 해서 들어온 곳이었지. 의미 없이 이 옷 저 옷 뒤적이다, 나는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했어. 그건 프릴이 잔뜩 달린 스커트였어. 옷을 입어보면 사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 번 입어보고 싶었지. 일행도 잔뜩 부추겼어. 한 번 입어봐. 예쁠 것 같은데, . 나는 스커트를 쥐고 못 이기는 척 일행의 손에 떠밀려 탈의실에 들어가. 아래를 꽉 죄고 있던 바지를 벗어 옷걸이에 걸쳐두고, 스커트의 지퍼를 내려 다리를 넣어.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탈의실을 나오면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행은 나를 보며 엄지를 치켜세우지. 눈짓으로 정말 괜찮으냐고 물으면, 일행은 나를 탈의실 앞에 있는 거울을 보게끔 돌려세워. 거울 속의 나는 아주 예뻤어. 스커트 아래로 뻗은 다리엔 털 하나 없이 매끈했고, 팔은 가늘었지. 어깨 아래로는 봉긋하게 곡선을 그리는 가슴이 있었고, 머리카락은 그 가슴을 가릴 만큼 길었지. 나는 여자애였어. 그리고 일행은, 누나, 누나였어.

 

 

 

빗방울이 창문에 와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다. 이마 위엔 미적지근하게 식은 물수건이 올라와 있었고, 방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니 머리가 핑 도는 게 몸살이 난 것 같았다. 오후 한 시였다. 학교를 안 갔구나. 어제 저녁 비를 맞으며 한참을 돌아다니다 간신히 집까지 찾아왔던 것은 기억이 나는데, 현관에 도착했을 즈음부터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지금 상태를 알만도 했다. 안간 게 아니라 못 갔다는 게 맞는 거겠지. 내일은 갈 수 있을까. 나는 교복이 아니라 집에서 입는 잠옷을 입고 있었다. 몸이 이런 상태라면 내가 직접 옷을 갈아입었을 리 없었다. 씻기고 옷을 갈아입힌 것은 아버지일까. 순간 알 수 없는 한기가 느껴져 몸을 쓸었다.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꿈에서 보았던 장면이 재생되었다. 기억은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동시에 사라져갔지만 내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를 복기 하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명치를 얻어맞은 것처럼 헉,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내가 무슨 꿈을 꾼 건지, 그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이불을 걷고 일어섰다. 자는 내내 땀을 흘린 건지 온 몸이 축축해서 씻고 싶었다. 땀에 전 몸을 이끌고 화장실로 갔다. 온 몸이 말을 듣지 않아 몇 번이고 넘어질 뻔 하며.

등부터 뜨거운 물을 끼얹었다. 어지러운 머리는 감기 때문일 거라고 되뇌며 넘어지지 않기 위해 두 다리에 힘을 준다. 때수건에 거품을 내 다리부터 문질러 올라오다가 가슴에서 문득 멈춘다. 꿈속의 봉긋한 곡선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거울에는 밋밋한 가슴과 넓은 어깨를 가진 남자가 나를 마주보고 있었다. 지우개로 틀린 식을 북북 지워버리듯, 때수건으로 괜히 가슴을 힘주어 문지른다. 따갑다. 가슴이 홧홧하게 달아오른다. 피부에 자잘한 생채기가 생긴다. 수증기 때문에 시야가 흐려 자꾸 헛것이 보인다. 샤워기로 뿌연 거울을 씻어 내렸다. 그 속에 창백하게 질린 내 얼굴이 있었다.

 

 

벨을 눌렀다가 아직 누나가 집에 도착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아무도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아줌마도 안 계신 모양이었다. 나는 잠깐 고민을 하다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비밀번호를 알고 있으면서도 벨을 먼저 눌러보는 건 오랜 습관이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다가 현기증이 일어 벽을 겨우 잡아 지탱했다.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은데다 몸살 기운 때문에 제대로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계속 집에 혼자 있자니 미칠 것 같아 누나를 찾으러 온 것이었다. 이 일에 대해 얘기를 할 수 있는 건 누나밖에 없었다. 익숙하게 누나 방문을 열고 들어가 침대에 비스듬하게 누웠다. 이런 때에는 내 방보다 누나의 방이 더 안정이 되었다. 그대로 잠이 들어버릴 것 같아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새삼 누나의 방을 둘러보다가 서랍을 열어본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임신 테스트기. 그 물건 자체가 이상하지는 않았으나 테스트기에 나타난 선은 하나였다. 그 선 하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도 남았다.

 

눈을 떴을 때 방 안은 여전히 어둑했다. 서랍에서 그것을 발견한 후 어떻게 내 방으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희미하다. 나는 깜박 선잠에 들었다가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다시 깼다. 정신은 들었지만 몸은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가만히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방문이 열리고, 거실의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곧 눈꺼풀 위로 서늘한 손이 내 이마를 짚는 것이 느껴졌다. 내 체온이 높아서 그 손이 아주 차갑게 느껴졌다. 함께 밀려들어온 바깥바람과 향수 냄새로 누나의 손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누나는 찬 물수건을 내 이마 위에 다시 올려주었다. 나는 간신히 한 쪽 눈꺼풀만 들어 올려 누나를 확인했다. 누나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이불을 덮어주며 더 자, 하고 속삭였다. 누나의 걱정스런 얼굴이 눈꺼풀에 희미하게 남았다. 언젠가 그런 누나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던 것도 같다.

 

 

어렸을 때 나는 엄마를 따라 항상 여탕에 갔었다. 나는 또래에 비해 발육이 더뎠고, 작고 여린 몸은 여자 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 날은 누나네와 함께 목욕탕에 갔었다. 옷을 벗어서 락커 안에 넣어놓고 누나와 함께 먼저 목욕탕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갔다. 미닫이문을 사이에 두고 락커룸과 목욕탕은 서로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문을 열면 후덥지근한 열기와 습한 공기가 온 몸을 감쌌고, 그 안에는 싸구려 공용 샴푸나 비누의 향도 섞여 있었다. 우리는 미지근한 물에 들어가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동네의 작은 목욕탕이라 주로 어르신들이나 아줌마들이 많았다. 누나와 함께 여탕에 온 것이 즐거워서였을까 나는 언니, 언니 하고 누나를 불렀다. 그에 동네 아줌마들은 깔깔거리며 저 애 말하는 것 좀 보라며 나를 가리켰다. 어렸던 나는 그 웃음에 더 신이 나 까르르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도, 엄마의 얼굴이 점점 굳어져갔던 것도 나는 알지 못했다. 그 날 나는 머리카락도 제대로 말리지 못 한 채 엄마의 손에 이끌려 집에 돌아왔다. 엄마는 내 어깨를 붙잡고 거듭 강조해서 말했다. 언니라고 부르면 안 된다고, 그런 건 여자애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넌 남자애니까. 남자애들은 그래야 하니까. 어깨를 붙잡은 엄마의 손아귀 힘이 너무 강해서, 나는 겁에 질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도 엄마는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다시는 나를 데리고 여탕에 가지 않았다.

 

 

다음 날 눈을 뜨자 몸은 훨씬 개운했다. 또 무슨 꿈을 꿨던 것 같기도 한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평소 학교 가는 시간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서 느긋하게 머리를 감고 말린 다음 화장실을 나가려 했을 때였다.

“걔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 속 한 번 안 썩이고 잘 크더니…. 영준이가 안 좋은 영향 받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띄엄띄엄 끊겨 들렸지만 무슨 얘기인지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누나에 대한 얘기가 분명했다. 누나네 부모님에게 전해들은 것인지 아니면 누나에게 직접 들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문 열 타이밍을 놓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 채 문에 기대어 있었다.

 

집에서 들고 온 플라스틱 통에 틸란드시아를 넣고 화장실로 향했다. 드디어 물을 좀 줘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내가 물을 주지 않고 며칠 방치했기 때문인지 줄기 끝 부분이 조금 말라비틀어진 것도 같았다. 세면대에 통을 넣고 수도를 틀었다. 물이 차오르는 플라스틱 통을 바라보았다. 물이 차자 틸란드시아가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누나는 누나가 뱉어낸 풍선에 달려서 위로, 더 위로 올라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한참 멍하게 서 있다 물이 넘치는 것도 몰랐다. 세면대고 화장실 바닥이고 넘쳐흐른 물로 흥건했다. 물이 튀어 양말도 다 젖었다. 어딘가에서 불어온 바람에 축축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플라스틱 통을 들고 반으로 돌아갔다. 물이 넘치지 않게, 조심조심 걸어서.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진 골목에 들어섰을 때, 나는 대문을 열고 나오는 누나와 마주쳤다. 누나는 제 몸 만 한 여행용 트렁크를 끌고 있었다. 누나는 나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누가 봐도 몰래 떠나려던 행색이었다. 섭섭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가는 거야? 나한텐 말도 없이?”

“나중에 연락하려고 했지.”

나는 입을 삐죽이다가 누나의 트렁크를 대신 잡아끌었다.

“데려다줄게.”

누나는 트렁크의 손잡이를 넘기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며 무슨 말을 먼저 할 지, 무슨 말을 하지 않을 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 행선지를 물었을 때, 누나는 고속버스 터미널로 갈 거라고만 말했다. 거기서 뭐든 끊어 타고 이곳을 벗어날 거라고. 버스에 오른 후 제일 먼저 휴대폰의 전원을 껐다. 어찌 되었든 해 지기 전에 집에 들어가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버스가 터미널로 향하는 동안 버스 안의 사람은 점점 적어져 결국에는 둘만 남게 되었다. 조금 망설이다가 내가 꿈을 꿨는데, 하고 입을 열었다. 내가 더듬더듬 뱉어놓은 활자는 버스가 터널에 들어가며 어둠에 잠겼다. 누나는 계속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이야기를 마침내 다 끝냈을 때까지도, 또렷하게.

 

우리는 버스 종점인 고속 터미널에 하차했다. 내가 잠깐 편의점에 간 사이 누나는 고속버스 표를 끊어왔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누나 지갑 위에 튀어나온 버스 표 귀퉁이를 보고 출발까지 30분이 남았음을 겨우 알았을 뿐이다. 우리는 터미널 의자에 나란히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산 너머로 희끄무레한 태양빛이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시간이 꽤 많이 지난 것 같았다.

“궁금한 게 많을 텐데 다 알려주지 못 해서 미안해. 미리 걱정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

누나는 거기까지 말한 후 잠시 숨을 골랐다. 나는 조용히 누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까 네 얘길 듣다가 그 때 일이 어렴풋이 생각났어. 왜, 네가 나한테 처음 언니라고 불렀을 때 있잖아. 그 때는 이렇게 말 해주지 못 했던 것 같아서.”

누나도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누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너는 그냥 너잖아.”

심장이 내려앉았다. 분명 별 것 아닌 이 한 마디를, 나는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네가 뭐라고 부르던 상관없어. 마찬가지로 네가 무슨 모습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누나가 타야할 버스가 플랫폼에 들어왔다. 버스 앞 차창에는 내가 모르는 낯선 지명이 적혀 있었다. 누나의 트렁크를 실어주려 버스 짐칸에 다가갔다가 바람에 날린 매연을 잔뜩 맞으며 눈물을 찔끔 흘렸다. 코는 매웠고, 목은 간지러웠다. 옷소매로 눈물을 찍어냈다.

“연락할게. 이메일이든 편지든. 휴대폰은 놔두고 왔으니까 기다리지 말고.”

“이제 안 돌아와?”

“글쎄. 가 봐야 알지 않을까.”

누나는 작은 가방 하나 말고는 든 것이 없었다. 언제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채비였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보는 환한 웃음이 후련함의 의미로 여겨지기도 했다. 누나는 버스에 오르기 전, 마지막 인사를 하며 내게 말했다.

“나는 저쪽에 가서도 잘 지낼 거야. 그러니까 너도 그러겠다고 약속해 줘. 넌 나 없이도 충분히 혼자 잘 할 수 있어.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서로의 길을 걸어가자.”

누나는 창가 쪽에 앉았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려 창가에 다가갔다가, 굳게 마음을 먹고 입술을 뗐다.

“언니, 잘 가.”

창에 가로막혀 소리는 전해지지 않았지만 입 모양으로 충분히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정말 마지막이었다. 누나는 낯선 곳으로 떠났다. 그리고 나는 그 날 저녁, 부모님께 연락도 없이 늦었다고 된통 혼이 났다.

 

 

          틸란드시아

  • 물은 일주일에 2~3회
  • 직사광선에 주의하고 통풍을 신경 쓸 것.
  • 온도에 민감하니 가급적이면 맨 손으로 만지지 말 것.
  • 주기적으로 물에 담가줄 것. 시간은 한 시간 이내.

 

10월 말쯤이 되면 이 작고 빈약한 식물의 한 가운데서 화려한 보랏빛의 꽃이 핀다고 했다. 꽃이 피면 지금의 볼품없는 모습과는 완전 다르겠지. 틸란드시아가 그렇게 달라졌을 즘엔 나도 어딘가 지금의 모습과는 달라져 있지 않을까. 틸란드시아에 분무기로 물을 주다가 문득 조금 자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에게 처음 받았을 때보다 큰 것 같았다.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않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잘 자랄 수 있는 식물, 틸란드시아가 자라나는 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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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월 14 일 전
* "한 번 입을 다물면 절대 벌리지 않는 거북이처럼." – "한 번 입을 다물면 절대 열지 않는 거북이처럼." * "그럼 아이들 속에 속하지 못한 나는" – "그런 아이들 속에 속하지 못한 나는" * "내 체온이 높아서 그 손이 아주 차갑게 느껴졌다." – "그 손이 아주 차갑게 느껴졌다." : 윤별님의 '현상흔'을 읽고 쓴 댓글에서 한 말과 같은 말을 해주고 싶어요. " = "얼굴이 잘리면 어쩌지. 무영이 완전히 헛되지는 않은 생각을 했다." – "얼굴이 잘리면 어쩌지. 무영은 생각했다." : 뭔가 강요하고 있다는… . 이 소설을 읽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왜 그런 느낌이 드는 걸까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이미 글을 꼼꼼히 읽은… Read m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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