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끝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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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끝나기 전에*
어쨌든 공연은 올려야 한다. 그게 이학년들끼리 비상회의를 소집해 나온 결과였다. 축제까지는 이제 고작 이 주밖에 남질 않았고, 원래대로라면 소품까지 전부 준비되어 들고 동선을 맞춰야 하는 시점이었다. 박스도 몇 번만 더 주우면 그만 주워야 할 정도로 꽉꽉 차 있어야 했다. 그러나 대본조차 나오지 않은 상황은 전년도 축제를 준비한 입장에서 보자면 축제에 공연을 올리고 싶기는 한 건지, 귀신의 집을 운영하려고 하는 건 맞는 건지 의문을 품기 충분했다.
저녁에 삼학년 선배들이 내려왔다. 동아리 시간에 삼학년 기장 선배가 내려와 한바탕 혼이 난 후였다. 수능까지 남은 기간도 동일하게 이 주일이었다. 이학년 기장 Y에게 문자를 받은 순간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머리에 직격했다. 삼학년뿐 아니라 이학년들도 거의 개입하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 이학년들이 매달려 도와주는 것도 모자라 삼학년 선배께서 직접 내려와 상황을 체크하고 최선의 방도를 함께 강구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우리는 선배들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본래 회의를 소집하면 텅텅 비어 있곤 하던 큰 강의실은 어쩐 일인지 이학년과 일학년들로 꽉 차 있었다. 차가운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학년 기장 Y가 울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이년간 걱정 될 정도로 연극부를 위해 헌신한 건 Y였고, 맨 땅에 헤딩을 하려던 일학년들에게 완충작용을 한 것도 Y였고, 의욕 없는 일학년들을 어르고 달래 그나마 대본을 쓰게 시키고 지속적으로 찾아갔던 것도 Y였다. Y는 할 만큼 했고, 짊어질 만큼 짊어졌다.
우리는 둘로 갈라졌다. Y를 위로했고, 그 후의 대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남자작가 H와 배우장 G와 부원 J를 비롯해서 대여섯 명이 모였다. 일학년들은 학교 편의점 앞의 공간에서 저들끼리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우리는 일학년들이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 이상 볼 수 없을 법한 벽 뒤에서 한숨을 쉬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침울하게 타일을 불규칙적으로 밟는 소리만 들렸다.
“대본도 아직 안 나왔다며.”
내가 운을 뗐다.
“일단 장면 전환 아홉 번은 미친 짓이야. 절대 못 올려.”
“너희가 계속 같이 봐 주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
“봐 줬지, 봐 줬는데…….”
약속하기라도 한 듯 우리는 마른세수를 했다. 그 뒤에 나올 이야기는 안 봐도 뻔했다. 우리는 그 전 주 일요일 아침에 모여 비상회의를 했던 적이 있었다. 일학년 기장 S와 다른 부원들 간의 불화에 대한 문제가 주 안건이었다. 한 시간 반 동안 힘 빠진 논쟁이 오갔고, 연극부 특성상 이번 무대를 어떻게든 올린다고 하더라도 불화가 지속된다면 당장 다음 무대인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그 애들이 자생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확신할 수 있었다. 최악의 경우라면 오리엔테이션 무대를 올리지 못하고 동아리는 폐동되고야 말 것이다. 아찔한 감각이 목 뒤편부터 꼬리뼈까지 타고 내려갔다.
“Y는 이제 우리가 손 댈 수 있는 거 없다고 했지.”
“그렇다고 놓고 있을 거야?”
안 될 말이었다. 모두가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나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일단 우리, 내일까지만 도와줘 보자. 내일, 금요일까지 최대한 도와주고, 그래도 대본 안 나오면 그냥 손 떼자.”
어쨌든 공연은 올려야 하잖아. 모두가 동의했다. 각자 화가 나 있거나 안타까워하거나 이해를 할 수 없었거나 슬프거나 혹은 전부를 반복해서 느꼈다. 몇몇은 야간자율학습을 빼고 온다며 교실로 향했고, 몇몇은 짐을 다 들고 온다며 자리를 옮겼고, 몇몇은 편의점 앞 원탁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는 일학년들에게 향했다.

 

일학년들은 몇몇만 남아 재작년 연극 대본을 읽고 있었다. 삼학년 선배들이 도저히 안 되겠으면 아무도 보지 못한 대본을 각색해서 해 보라는 백업 플랜을 내 주시고 가셨던 참이었다. 배우장 G와 나는 대본을 받아 나눠 읽었다. 선배들의 대본은 대사가 깔끔했고, 장면 전환도 없이 한 막 안에 모든 사람들이 들어갔다가 자연스럽게 나왔으며, 사이사이 들어가 있는 개그 요소도 과하지 않고 재미있었다. 작년에 내가 추구하고자 했으나 타깃이 정해져 있는 학교 연극과 정극 사이에서 중도를 찾지 못해 포기했던 스타일이었다. 우리는 읽으면서 연달아 탄성을 질렀고, 심지어 그 대본이 초고라는 걸 전해듣고선 작년 우리의 대본을 떠올리고 얼굴을 가렸다.
“얘들아, 우리 시간이 없거든.”
하도 결론이 나지 않자 내가 말을 뱉었다.
“선배님들 대본으로 연극을 올릴지, 아니면 너희가 대본을 제대로 쓸지 얼른 선택해야 해. 대본 완성하기까지 딱 하루 남았어.”
일학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 분 안에 결정하자. 거의 다 읽었지?”
타임 리밋을 걸어 주고 나서야 목소리가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이학년들은 최선을 다해 도와 줄 생각이었다. 어쨌든 처음 하는 일학년들보다는 한 번의 무대 경험이 있는 이학년들이 조금 더 익숙하게 연습을 이끌어 갈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원래대로라면 일학년들이 시행착오를 거치고 어떻게 해야 최대한의 효율을 끌어낼지를 고민하고 모여서 연습하는 과정이 필요했지만, 지금까지의 결과물로 판단하자면 이 주일 안에 일학년들만 모여 연습하는 건 역부족일 게 빤했다.

 

신강의동에는 빈 강의실이 없었다. 일학년들은 조금 더 힘들고 버거울지라도 자신들 스스로의 연극 대본을 짜서 연극을 올려 보기로 했다. 우리는 그 선택을 존중했다. 일학년들이 짠 초안은 나와 있었고, 우리는 열 막에 달하는 막들을 합치고 관객들이 웃을 수 있는 대사를 집어넣고 개연성과 창의성을 더 부여해야 했다. J가 유에스비를 받아들고 근처 피씨방에서 일학년들이 지금까지 완성한 대본을 뽑아 온다면서 나갔다.
노트북으로라도 그 시간 동안 제1막 정도는 갈아엎어야 했다. 아마 J가 돌아오기까지는 이십 분 가량이 걸릴 것이고, 우리는 그걸 쉬이 버릴 정도로 시간이 남아도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 편의점 앞에 자리를 잡았다. 끊임없이 나는 어떻게 할래? 라는 질문을 던졌고, 돌아오는 대답들을 일학년들이 적었다. 귀신의 집 창문을 막을 박스를 주우러 갔던 일학년 M도 합류했다. 야간자율학습 일교시가 끝난 듯 신강의동에서 편의점 앞으로 각자 교재와 필통을 품에 안은 학생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 무리 가운데에는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동아리 활동을 전면 금지한다고 알려진 선생님 S도 계셨다.

 

“선배, 그런데 야자 때 어디서 해요?”
삼학년 선배들이 저녁시간 막바지가 다 되어 올라간 후에 일학년 한 명이 물었다.
“신강의동 남는 데 없잖아. 그럼 씨유 앞밖에 없지 않아?”
“근데 S쌤이 잡으러 다닐 텐데요….”
“S 선생님?”
“저희 저번에도 담임쌤께 허락 받고 신강에서 연습하고 있었는데 안 된다고 다 돌아가라고 해서 강제 해산 당했거든요.”
그렇지만 상황으로서는 바늘구멍에 들어가라고 해도 네, 하고 들어가야 했다. 시도는 해 봐야 하지 않겠어.
“괜찮아. 어떻게든 되겠지.”

 

그 어떻게든 되겠지, 가 여기에서 발목을 잡을 줄이야. 선생님은 둥그렇게 모여 앉아 있는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는 고개를 숙였다.
“여기 왜 왔어?”
“아, 저희 동아리 연습 때문에요…….”
“누가 야자 빼도 된다고 했어?”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치만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 선생님, 정말 죄송해요. 저희가 너무 급해서요……. 애들 다 담임 선생님께는 허락 맡고 왔는데…….”
선생님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담임선생님께는 여기 다 허락 맡은 거야?”
일학년이고 이학년이고 할 것 없이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우리를 잠시 가만히 지켜보셨다.
“어디서 하게.”
“저희, 방이 없어서, 아마 여기서 해야 할 것 같아요.”
“나 특강 끝나서 204호 빌 거야. 거기서 해.”
우리는 눈을 크게 떴다. 선생님은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우리는 동시에 감사합니다, 하고 허리를 굽히곤 일어섰다. 목소리에 갑작스레 화색이 돌았다. 각자 주섬주섬 자신의 소지품을 챙겼다. 나는 외투를 입었다. 선생님은 저 앞에서 걸어가셨고 우리는 병아리라도 된 듯 그 뒤를 따라갔다. 과연, 204호는 비어 있었다. 우리는 고개 숙여 감사인사를 했다.

 

J는 금방 대본을 뽑아왔다. 뛰어온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는 큰 강의실에 둘러앉았다. 일학년의 의견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가되, 대신 도저히 올리지 못할 것 같다 싶은 부분들은 이학년들이 메워 주기로 했다. 한 시간을 두고 학년별로 대본을 각자 수정한 후 나머지 한 시간을 이용하여 오늘 꼭 끝내야 할 분량을 메우기로 했다.
이학년들의 분위기는 좋았다. 작가고 부원이고 배우이고는 사실 상관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 대본을 회생시킬 수 있을까, 하고 다들 입을 모았다. 그다지 좋지 않은 의견이라도 전부 쏟아내었다. 그렇게 쏟아낸 의견 중에선 건질 것이 꽤 있었고, 한 사람의 의견에 다른 사람의 의견이 덧입혀지고, 반전하고, 거꾸로 보면서 대본에는 빨간 줄이 잔뜩 생겨났다. 장면들의 미시적인 대본들은 차치하고 전체적인 개연성부터가 문제였기 때문에 우리는 큰 갈래들을 잡았다. 일학년들도 저들끼리 의견을 내고 있었다. 평소엔 입을 닫고 있던 부원들도 모여 어떻게 수정할지를 고민했다.
“선배, 이제 합쳐야 할 것 같아요.”
시간을 보고 기장 S가 말했다. 우리는 몸을 돌려 의자를 일학년 쪽으로 향하게 했다. 나와 J가 차례대로 이학년이 수정한 부분을 읊었다. 장면전환 문제부터, 개연성과 타임루프의 강약조절 실패, 두 명의 인물이 오십 분의 연극을 끌어가는 부분까지 어떻게 해야 할지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쓰기 전에 뼈대를 잡는 느낌으로.
“신기하다.”
“뭐가?”
“사실 저희 맨 처음 회상 막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막막했었거든요. 그런데 선배들이 정리해 주시니까 1막부터 3막까지 하나로 합쳐지고, 매끄러워졌잖아요.”
우리는 해 봤잖아. 그렇게 말하는 대신 우리는 웃었다. 미시적인 대본의 대사와 애드리브를 배우장 G의 주도로 고치면서, 일학년들은 그걸 메모했다. 한 시간 동안 아홉 막 중 네 막 가량이 수정되었다. 상당히 빠른 진척이었고, 이학년들은 희망을 보았다. 이대로 대본 쓰면 내일 안에 완성하고 빠르게 연습 들어갈 수 있겠는데.

 

*

 

우리는 금요일 점심시간에 다시 모였고, 어제 오지 않은 일학년들까지 전부 합류하여 대본 작업에 착수했다. 일학년 부기장 C에게 전날 기숙사 자율학습 시간에 정리한 이학년 회의록을 건네주었고, 배우장 G와 나는 하필 점심시간에 잡혀 버린 미술사 수업을 듣고서 바로 동아리실로 향했다.
희망은 희망일 뿐이었다. 일학년들은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둘로 나뉘어 대본을 쓰고 있었고, 아이디어는 나올 생각을 않았다. 전날의 생기와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고 아주 느리게 대본이 수정되고 있었다.
“왜 나눠서 써?”
내가 물었다. 머리가 아파왔다.
“아, 놀리는 인력 없어야 한다고 해서요….”
“다 같이 모여서 해야지. 저번에도 나눠서 하다가 아무것도 못 했잖아.”
다시 어둠이 찾아오기 시작하는 것만 같았다. 아득해지는 정신과 책상을 함께 붙잡았다. 배에 힘을 주고 목소리 크기를 키웠다.
“얘들아, 다 모여서 쓰자. 얼마나 썼어?”
누군가가 내게 구글 드라이브 링크를 공유해 주었고, 이학년들은 일학년들이 해산하고 난 밤에 구현해 둔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심각한데.”
우리는 말을 아꼈다. 아꼈다기보다는, 할 수 없었다는 말이 조금 더 어울렸다.
“우리 원래 이렇게 하기로 했었어?”
나를 포함한 두엇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얘기해 준 대사고 행동지문이고 반도 안 들어간 거 맞지.”
“반이 뭐야.”
그 와중에도 일학년들은 저들끼리 엔딩을 어떻게 낼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우리는 일학년들을 한 번 넘겨보고 어쩌지, 라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구현된 것은 극히 적었다. 마지막 한 시간에 우리가 함께 짠 애드리브들까지도 사라져 있었다. 어쩌지. 어쩌지.
“그래서 엔딩은 어떻게 할 거야? 아니, 뭐가 문제야?”
일학년들은 엔딩의 분기점에서 팽팽하게 맞서는 중이었다.
“두 개가 문제 아냐? 여자가 기억을 찾는가, 찾지 않는가? 다른 거 얘기하지 말고 일단 하나로 의견 모아. 너희 모일 수 있는 시간 네 시간도 안 남았어.”
후자를 택한 일학년들은 남자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 또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학년들은 그걸 가만히 듣고 있었다. 점점 산으로 가기 시작했다. 남자는 경찰서에서 막무가내로 뛰쳐나가고, 차에 치여 기억을 잃고, 이미 기억을 잃은 여자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아, 머리가 아파왔다. 일학년의 연극이라고는 했지만, 이학년의 책임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학년은 또다시 비상회의에 들어갔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과외를 일요일로 미루고 야간자율학습을 또 재꼈다. 이제 상습범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학년들을 놓아둘 수가 없었다. 꼰대라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물가에 내려놓은 어린아이들 같았다.
동아리실에 도착한 직후 신음 비슷한 탄식을 흘렸다. 도착한 이학년들보다 기다리는 일학년들의 수가 더 적었다. 처음에는 황당했다. 그 다음에는 어이가 없었고, 그 후에는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이학년들은 뒷자리에 앉았고, 일학년들은 앞자리에 앉았다. 화를 내고 싶었는데 온 후배들의 잘못이 아니라 오지 않은 후배들의 잘못이었고, 사실 지금까지 이만큼 온 건 그 자리에 있는 일학년들이 없었다면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그만두어야 할 테였으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얘들아, 봐.”
점심과 5교시를 할애해서, 6막까지 얼추 완성된 상태였다. 심각하게 무언가를 생각하던 J가 입을 열었다.
“일단……, 봐. 우리도 이제 수능 준비해야 하는데 너희 도와주러 나왔지. 그런데 지금 일 학년들 나온 애들 거의 없지. 나오는 애들만 나왔잖아. 이렇게 해서 연극 대본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는 사실 아니라고 보거든.”
일학년들은 잠잠했다. J가 말을 이었다.
“이틀 안에 대본 쓰겠다고 해서 우리가 야자 빼고 나왔어. 이학년들끼리 이야기했을 때 어제 분위기였다면 뭔가 나올 것 같았거든? 다들 부풀어서 갔어. 그래도 뭔가 되긴 하겠다, 하고. 그런데 오늘 점심시간에 가서 봤을 때는 그게 아예 없었어. 왜 그랬을까?”
J가 말을 멈췄다. 적막만이 남아있었다. 내가 말을 시작했다.
“우리는 사실, 화가 나.”
물꼬를 트자 정리되지 않았던 생각들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남아서 오는 게 아니잖아, 이학년이. 너희들 점심시간에 대본 쓴 거 보고 이건 아니다 싶었거든. 우리가 어제 이야기했던 거 반도 안 들어갔잖아. 다 어디로 갔어? 아니. 다 제치고. 연극, 하고 싶긴 한 거야?”
“야, 진정하고, 감정적으로 가지 마.”
J가 나를 말렸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너희들끼리 어떻게 해야 할지 좀 이야기를 해 보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우리 시간 없잖아. 지금부터 연기 연습 시작해도 시간 모자랄 텐데.”

 

일학년들은 결국 재작년 연극 대본을 택했다. 일학년 중 누군가가 나오지 않은 부원들이 뭐라고 하면 어떻게 하냐는 우려를 표했으나, 참석하지 않은 건 자신의 발언권을 포기한 것으로 치자고 했다. 열심히 달려왔던 일학년도 지쳤고, 이학년도 지쳐 있었다. 여분의 대본이 있어 일학년들끼리 돌려 보며 리딩을 시작했다.
“아, 깜짝이야! 인형아, 내가 성격 나빠 보이는 아저씨는 건드리지 말자고 했잖아.”
부기장 C가 목소리를 한 톤 높여 이야기하기 시작한 순간 이학년들은 단번에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C에게 꽂혔다. 누구야? 누구야? 이학년들 사이가 웅성거렸다. C는 계속해서 미친 여자 배역의 대사를 쳤다.
“내가 안 건드렸어, 화 낼 거면 인형한테 화내라구!”
탄성이었다. 정말이지 배역에 딱 맞는 목소리 톤이었다. 여태 걱정했던 것이 조금은 사라지는 것도 같았다.

 

*

 

분명 토요일 아침 아홉 시 정각에 신강의동에서 모이기로 했었다. 그러나 출석률은 여전히 저조했고, 이학년은 또다시 마른세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주요 배역을 맡은 친구들이 와 있었고, 우리는 아쉬운 대로 그 애들이 맡은 배역이 자주 출연하는 부분을 연습하기로 했다. 아직 정해지지 않거나 오지 않은 친구의 배역은 이학년들이 대타를 섰다.
첫 번째 연습이 으레 그렇듯, 그리고 무대를 처음 올라가는 누구나 그렇듯, 연습은 더뎠다. 아침이었고, 연기를 처음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우리의 첫 연습이 생각났다. 비교하자면, 나쁘진 않았다. 어쨌든 작년의 첫 연습보다는 괜찮았다. 이학년은 무대 밖에서 전체 동선을 보았고, 일학년은 그 동선을 외우고 동작을 반복했다.
“S야, 거기선 좀 더 자신 있게 동작해도 될 거 같아. 동선만 다시 맞춰보자.”
“W, 목소리 안 들려! 웅얼거리지 말고.”
지적할 때마다 일학년들은 고개를 끄덕거렸고 더디지만 확실히 나아지고 있었다. 신강의동이 다섯 시에 문을 닫자, 우리는 여자기숙사 아래 주차장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연습을 계속했다. 발음과 연기 톤이 좋아지는 게 확연하게 보였다. 하루 내내 반절을 겨우 해냈다. 그것도 많이 한 것이었다.

 

“선배, 어디 가세요?”
밥을 먹고 과외에 가야 했다.
다음 날 오전의 성과 역시 나쁘지 않았다. 경찰 세 명의 배역을 정했고, 조금 동선이 복잡할 것 같은 부분들의 동선을 깔끔하게 정했고, 된장남 배역을 맡은 일학년 배우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부분들을 고쳤다. 대역이 많았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모양새는 갖추어져가고 있었다. 이 주일 만에 전부 끝낼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조금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다른 부원들은 전부 급식실로 향했고, 나는 시간이 조금 촉박할 것 같아 앞 슈퍼에서 간단하게 라면으로 때우고 가려던 참이었다. 책상 위에는 풀기 위해 가져왔다가 두 문제밖에 건드리지 못한 문제집이 놓여 있었다. 가방에 문제집을 집어넣고 있었는데 기장 S가 곁으로 다가왔다.
“나 과외. 끝나고 바로 올 거야. 왜?”
“아, 아니에요.”
“왜, 왜.”
“아니, 혹시 시간 있으시면 저 연기 연습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 해서요.”
나는 챙겼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근데 선배 밥 먹어야 하잖아요.”
“괜찮아. 어차피 거기서 주스 먹으면 배 차.”
그렇게 말하고선 책상에 엉덩이를 걸쳐 앉았다.
“봐봐. 해 보자. 삼십 분 정도는 봐줄 수 있어.”
상대역 파트를 읽어 주기만 하고 S의 동선과 연기를 유심히 보았다. S가 주가 되는 1막은 거의 완벽한 동선을 갖추고 있었다. 과외에 가기 직전, 나는 박수를 쳤다.

 

과외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학년들은 박스를 모으러 가겠다고 단톡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일학년 M에게 어디로 가야 하냐고 전화가 왔고 신강의동에 들어가 있으라고 일렀다. 어차피 과외는 끝났고, 선생님은 가셨고, 신강의동으로 곧바로 갈 계획이었다.
I를 만난 건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도중이었다. 나는 손을 들어 인사를 했고, I는 잠시 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심각한 얘긴데, 들을래?”
“뭔데, 또.”
“계속 안 나오는 애 있잖아.”
“어. 걔 오늘 나왔어?”
“아니, 근데 내가 운동장 쪽 가다가 걔를 만났거든. 놀고 있더라.”
헛웃음이 터졌다. 모두가 열심히 박스를 줍고 연극 연습을 하고 주말 시간을 전부 빼어 준비하는 통에 놀고 있다니.
“어.”
“붙잡고 물어봤어, 왜 안 나오냐고. 걔가 자기가 못 나온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
“기장이랑 마찰?”
“응, 그것 때문에.”
예상했던 게 맞아떨어졌다. 대본 작성으로 인한 일학년 간의 불화는 생각보다 골이 깊어져 있었고, 연극 연습을 같이 하는 부원들끼리는 이야기할 일도 많은데다가 이학년이 중간에 개입해 중재한 탓에 많이 풀어졌으나 아예 나오지 않은 친구는 풀 요량이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안 나오겠대?”
“어. 귀신의 집은 도와주고 싶은데 자기가 연극에 다시 껴 봤자 자기 의견은 다 무시당할 것 같다고.”

 

이학년들이 박스를 들고 신강의동에 도착했다. 우리는 박스를 조금씩 나누어 들어 창고에 옮겼다. 그러나 박스의 양은 턱없이 부족했다. 신강의동의 벽은 통유리인데, 그걸 일층과 이층 전체에 붙여 새어나오지 않게 하려면 창고가 미어터질 정도로 모아야 했다. 그런데 고작 삼분의 이가 조금 넘을까 말까라니.
결론은 이학년이 박스를 줍자, 였다. 그러나 일학년만 놓아둘 수는 없으니 나와 H, 이렇게 작가 둘이 올라가 일학년들의 연극 연습을 지도하고 나머지 이학년은 전부 쓰레기장에 가서 박스를 모아두자고. 나는 일학년들이 있는 방으로 올라갔고 나머지 이학년은 나와 갈라져 다시 박스를 주우러 향했다.

 

*

 

문자가 온 것은 6교시 쉬는 시간이었다.
박스가 관련된 급하고 중요한 일이니 저녁시간에 모두 모여 달라는 2학년 기장 Y의 말에 온갖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누수가 되었나? 아니면 박스가 너무 부족한가? 사야 하나? 아니면 이사장님이 또 박스를 가지고 뭐라고 하셨나? 할 수 있는 생각은 다 해 봤지만 나 혼자 궁리한다고 해서 될 일은 하나도 없었다. 저녁시간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그리고 귀를 의심했다. 일학년들에겐 전날 박스를 많이 주워 간 것 때문에 폐지 줍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클레임을 걸었다, 그러나 잘 해결 되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알고 있기만 해라, 그리고 이 일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해라, 거기까지만 이야기했다.
“경찰?”
“그러게. 민원이 들어와서 그렇게 됐네.”
Y가 굳은 표정으로 웃었다.
“그래서 박스 주우러 간 이학년 명단을 넘겨야 할 것 같아. 사실 일학년들이 같이 가긴 했는데, 그래도 일학년들한텐 이렇게 심각한 거 얘기 안 하고 싶어서.”
우리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길바닥에 버려진 쓰레기를 주워간 것도 죄가 되는가? 누군가에게 소유권이 있는가? 여러 가지 감정이 한 번에 밀려왔다가 사라졌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우리가 잘못한 거냐는 물음을 수십 번 하고, 또다시 침묵했다. Y가 해산이라고 외쳤을 때에도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연습은 재개되었다. 우리는 신강의동 1층의 공연장을 사용했다. 공연장은 우리가 축제 날 공연을 올릴 대강당과 비교하면 비좁았고, 동선을 제대로 맞추려면 무대뿐 아니라 무대 아래의 공간까지 같이 사용해야 했지만, 이층부터 수능이 며칠 남지 않은 선배님들을 생각하면 이것이 최선이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이어지는 연습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이학년들은 돌아가면서 일학년들에게 조언을 했다. 이학년 전체가 야간자율학습을 빠질 만큼 시간이 남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와 J는 특강과 과외가 없는 이상 항상 나왔고, 나머지 부원들은 짬짬이 하루에 한 번씩은 와서 이십 분에서 삼십 분 가량 보고 조언을 하고 갔다. 점점 탄탄해지는 연기가 보였다. S는 어떻게든 연기를 소화하고 싶었는지 대본에 톤과 높낮이를 표시했다. 처음에는 삐걱거렸던 N과 W의 커플 연기도 꽤 물이 올랐다. 경찰 셋 중 한 명은 계속 나오지 않았지만 둘의 호흡이 굉장히 좋았고, 미친 여자를 연기하는 C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나오지 않은 경찰 배역을 맡은 U가 자신은 못 하겠다고 선포한 것은 화요일이었다. 나는 과외에 가야 했고, 1교시와 2교시를 전부 과외에 쏟은 채 3교시에 신강의동으로 향했다. 분위기가 싸했다. 모두가 입을 닫고 있었고, N이 나를 데리고 뒤쪽으로 가서 심각한 표정으로 소곤거렸다.
“선배, U 걔 사고 쳤어요.”
“무슨 일이길래.”
“U가 계속 못하겠다고 해서 그럼 네 배역은 어떻게 할 거냐고 D가 좀 세게 몰아붙였거든요. 못하겠다고 하면 다냐고, 지금 펑크 난 건 플랜을 만들든 뭘 하든 하고 가야 할 거 아니냐고.”
“어.”
“근데 U가, 아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씨발 좆같네! 하고 나갔어요.”
나는 관자놀이를 습관적으로 눌렀다.
“근데 거기 J선배 계셨단 말이에요…….”
“J 있었는데 그렇게 얘기하고 나간 거야?”
총체적 난국이었다.
배우 한 명의 자리가 펑크가 났고, 더 이상 들어갈 수 있는 일학년은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나나 J나 거기 들어가 연기를 할 수도 없는 스케줄이었다. 연기를 하겠다는 말은 그 날부터의 야간자율학습을 전부 빼고 연기에 집중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는데, 그럴 수 있는 시간도 없었고, 배역 자체가 후반부의 흐름을 잡아가는 무게추 같은 역할이었기 때문에 가볍게 그래, 그럼 내가 할게, 라고 할 수 있는 실정도 아니었다.
J는 이학년 부기장 E에게 연락을 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에 짓눌렸다.
E는 해 줄 수 있다고 했다. 정확히는 조금 더 생각해보고 연락을 준다고 했지만, 결국에는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N이 위태로워 보였다.
그 애는 U에 대해 말할 때부터 날카로워져 있었는데, 결국 자신의 화를 참지 못했는지 연극 연습 중 뛰어다니는 부원들에게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곧바로 미안해, 사과를 하긴 했지만 영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그 애는 맨 마지막으로 연습실에서 나왔다. 나는 N을 기다렸다가 다가가서 등을 도닥였다.
“괜찮아?”
“선배, 트랙 돌 수 있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삼십 분 안 쉰다고 해서 죽진 않으니까.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우리는 운동장으로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위의 공기는 가볍지 않았다.
“기숙사 통금 아홉 시 오십 분이라서 그때까진 가야 해.”
“아, 알아요.”
N이 입을 열었다. 주로 힘들다는 이야기를 했다. 연극 자체는 힘들지 않은데, 하는 친구들만 하는 걸 보는 것도 힘들고, 그러다 보면 안 나오는 친구들이 미워지기 시작하고, 그걸 그 친구들한테 풀어야 하는데 나오질 않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그저 트랙을 빙빙 돌면서 들어 주기만 했다. N은 배우였고, 기타 기장이나 부기장 같은 보직은 맡고 있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스트레스가 상당해 보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N은 모든 활동에 성실하게 임했다. 학기초 쪽대본을 읽으면서 조별로 짧은 연극을 해 볼 때도 그랬고, 대본을 쓸 때도 그랬고, 한 번도 연습에 불참한 적 또한 없었다. 화가 나요. 나도 그래. 무책임해요. 맞아. 이 화를 U한테 풀어야 하는데 애꿎은 애들한테 풀었잖아요. 괜찮아. 걔네도 이해할 거야.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잘하고 있어.”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게 다였다.

 

*

 

공연 막바지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축제가 사흘 남은 시점이었다. S가 수위 아저씨께 허락을 받아 대강당을 쓸 수 있었다. 일학년들은 소품을 준비했고, 의자와 가구들을 이용해서 필요한 큰 인테리어들을 만들었다.
밤공기가 찼다. 오늘도 어김없이 특강인 친구들은 있었고, 일학년들을 대신해서 내가 대타를 뛰었다. 작년 뮤지컬 이후 대강당 단상에 올라가는 건 간만이었다. 대강당에서 동선을 맞추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마 이후로는 계속 대강당에서 동선을 맞추게 될 것이었다. 일교시부터 낭비되는 시간 없이 연습을 시작했다.
일학년들은 또다시 무대 위에서 빛났다. 매일이 힘들고 지치는 일의 연속이었고 연습이 끝나면 나는 무대에 서는 것도 아니고 일개 작가로서 조언을 해 주는 것밖에 없었는데도 침대에 눕자마자 잠을 잘 정도로 피곤했으나 일학년들이 열심히, 잘 해주는 게 너무 고마워서 조금 더 나은 무대를 올릴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서 도왔다.

 

“선배들은 안 올라오세요?”
N이 물었다.
“원래 이학년은 안 올라가는데.”
“그래도 올라오시면 좋겠는데…….”
못내 아쉽다는 투였다. 때마침 이학년 기장 Y가 들어왔다. 나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Y, 이학년 이번 무대에 올라갈 생각 없어?”
“왜?”
“일학년이 올라와달라고 해서.”
“그래, 그럼.”
이학년의 대부분은 처음에 고개를 내저었다. 작년의 축제와 올해의 오리엔테이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거였다. 그러나 결국에는 무대에 올라가기로 했다. Y는 사람을 이끄는 매력이 있다. 내가 누구를 봐서 해 주는 거야, 라는 말에서 누구를 맡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건 굉장히 큰 힘이고 이번에도 역시 위력을 발휘했다.
우리가 출연하는 분량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일학년 연극이니 당연했다. 마지막 커튼콜에 올라가 업다운 펑크를 두 벌스 정도 추고 급하게 뛰어 내려가기로 했다. 우리는 춤을 배웠고 단숨에 이학년이 일학년에게 조언하던 구도에서 일학년이 이학년을 가르치는 구도로 역전되었다. 한 번의 연습을 할 때마다 이학년들은 몰려오고 흩어지고 주저앉기 일쑤였고 다시 연습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한 명이 꼭 틀렸고 우리는 그럴 때마다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다들 맑았다.

 

바깥에선 불꽃놀이가 한창이었다. 삼 학년 선배들이 마지막 야자를 끝내고 축하하는 의미에서 하는 학교의 전통 같은 것이었다. 색색깔의 불꽃들이 하늘에 터지고 있었다. 작년에는 볼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연극부 연습이 너무 늦게 끝나서 불꽃놀이가 끝나고 급하게 기숙사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학년들도 처음 보는 불꽃놀이였겠지만, 연극부 이학년들 또한 대부분 불꽃놀이를 처음 봤다. 다들 입을 벌리고 하늘을 바라봤다.
“이제는 너희 차례야!”
선배가 외쳤다. 우리는 하늘에 별자리처럼 터지는 불꽃들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목소리가 난 곳에서는 선배들이 불꽃을 들고 있었다. 한 교실에서는 삼 학년 선배들 전부가 손에 작은 불꽃을 쥐고 흔들었다. 갑자기 울음이 날 것만 같았다. 나는 이제 고등학교 삼 학년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연극부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

 

정말 무엇을 하고 있는가.
수능은 연기되었고, 우리는 귀신의 집 준비를 하느라 박스로 신강의동의 빛이란 빛은 전부 막아둔 채로 일 주일을 보냈다. 일학년들은 수능 전날 만반의 준비를 했으나 일주일이 밀린 탓에 전처럼 모든 시간을 투자해서 연습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일주일은 조용히 지나갔고, 또다시 영원히 가지 않을 것 같았던 수능 전날이 다시 왔고, 우리 학교는 수능 시험장으로 지정되어 2교시까지밖에 수업을 진행하지 않았다.
연극부는 열한시에 모였다. 박스와 테이프와 가위를 손에 쥐고 노동을 했다. 박스가 어느 정도 모였고 귀신의 집을 할 만큼은 되었다는 판단을 했다. 그러나 일주일간 떨어진 부분이 꽤 많아 보수를 해야 했다. 신강의동의 일층 계단참과 일층 뒤편 통유리가 전부 떨어져 나가 있었다. 이 년째 하는 일이고, 그간 일 년의 공백이 있었지만 사흘을 고생한 경험은 쉽게 몸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지 박스를 붙이는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삼 층에서 암막커튼을 내렸다. 꽤 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층고가 족히 오 미터는 되어 보이는 곳에 박스를 붙여 빛을 막았다. 이학년 연극부원들은 친구를 한둘씩은 데리고 왔고, 그래야 시간 내에 끝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수능 당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로소 고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섯 시에 신강의동으로 가야만 했다. 울적했지만 단순노동은 어느 정도의 우울을 잊게 해 준다. 몸을 생각 없이 쓰다 보면 많은 게 잊힌다. 그렇게 잊어버린 중요한 게 몇 개나 될까. 그런 생각들도 테이프와 신문지와 함께 던전을 창조하는 기분으로 가벽을 세우다 보면 이내 사라져 있었다.

 

축제 당일은 어쨌든 왔다. 제발 빨리 오게 해 달라고 빌었지만 일 주일이나 미뤄져 죽을 것 같았던 시간들이 종식되는 순간이었다.
조례를 빠지고 신강의동에서 내내 보수를 했다. 아침 빛과 저녁 빛이 달라서 전날 보이지 않던 곳에서 빛이 계속 새어들어왔다. 이층에는 빛이 새는 곳이 있었고 거길 신문지로 메워야 했다. 작년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어제 부순 난방기의 플라스틱 배출구를 우리는 지뢰라고 불렀다. 그걸 밟는 순간 청량한 소리를 내며 부서지는데, 줄곧 우리는 지뢰를 밟았고 번번히 난방기 안에 허벅지까지 빠지기 일쑤였다.
J가 일 층 보수를 해 달라고 부탁해서 W와 함께 내려갔고, 일층 뒤편을 전부 보수했다. 사람의 창의력은 뭔가 부족할 때 생기는 게 틀림없다. 처음에 서로의 허리를 잡아 주며 천장을 보수하던 우리는 이내 테이블 하나에 의자 하나를 올려서 보다 편하게 보수할 수 있게 되었다. 대개의 경우 내가 올라가려고 했는데, 그건 W가 다치면 일차적으로는 선배인 내 책임이고 이차적으로는 연극부 전체의 책임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연극까지는 채 삼십 분도 남지 않았다. N의 메이크업을 맡아 해 주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다급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정문으로 뛰어갔고 수위 아저씨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여기 왜 안 열려!”
“아, 선생님, 저희 오늘 귀신의 집요!”
“으엥, 오늘 축제여?”
“네, 오늘 밤까지만 쓸게요, 선생님!”
떨어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했을까. 불을 껐을 때 모든 틈에서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한 건 연극이 끝난, 조금 더 나중의 일이었다.

 

일학년들은 정신없이 준비를 했다. 이학년들이 귀신의 집을 보수하는 동안 배우들은 다시 한 번 최종 리허설을 했다. 우리는 일학년들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나름대로 노력했고, 가는 내내 일학년들은 추위인지 긴장인지 모를 무언가에 떨었다. 작가들에게 올라가라고 말해 두고, 조명 담당 작가에게 길을 안내해주고 나니 일학년들은 파이팅 할 새도 없이 무대 뒤에서 핀마이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우리는 커튼콜에 무대 위로 뛰어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가장 앞자리의 복도 쪽으로 붙어 연극을 보기 시작했다. 기장과 부기장이 바람잡이를 하는 동안 스태프들이 모든 소품들을 준비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핀마이크를 차고 말하면 안 되는 걸 몰랐는지 이야기 소리가 그대로 들려오고 있었다. 이학년들은 무대 아래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시 무대를 바라보았다. 또다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무대로 시선을 옮겼다.
막이 올랐다. 그 후부터 모두가 적막이었고, 무대 위의 배우들만 있었다. 배우들이 움직이는 순간마다 우리가 함께 수십 번이나 연습했던 광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아니, 배우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무대 위의 장면과 무대 아래의 장면이 동시에 빛나는 게 보였다. 배우들과, 작가들과, 스태프들이었다. 그리고 이학년들이었다. 모두가 같은 숨을 깊게 들이켜고 있었다.

 
* 심규선 노래제목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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