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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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키

 

형은 두 번째로 태어났고 나는 두 번째에 태어났다. 형의 형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고 했다. 형은 장남 아닌 장남이었고 나는 둘째 아닌 둘째였다. 내 이름은 형의 형과 같았다.

형의 형이 있었다는 사실은 할머니가 밥을 먹으며 무심코 말했다. 말을 하고 스스로 놀라 눈을 깜박이다 못 들은 걸로 하라며 티브이를 틀었다. 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 나왔다. 나는 티브이 속 그들과 같이 웃으며 밥을 목에 넘겼다. 밥그릇이 숟가락으로 긁히는 소리가 너무 크게 났다. 형은 그 사실을 원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무심히 밥을 넘겼고 애니메이션이 지루해진 나는 형의 형 얼굴을 상상했다. 어떻게 생겼을까. 이름이 무엇이었을까.

이름은 형이 알려줬다. 내 이름이었다. 그럼 내가 두 명이야? 형은 인상을 썼다. 닥쳐. 욕하지 마. 닥치라고.

나는 그래서 항상 입을 다물었고 숨이 차오를 때마다 약하게 숨을 내쉬었다. 형은 항상 먼저 입을 열었다. 앞선 너는 어떻게 생겼을까.

우린 앞 다퉈 스케치북에 형의 형 얼굴을 그려나갔다. 곱슬머리를 그리고 파란 옷을 입히고 집을 그리고 구름을 그리고 웃는 해를 그리고 다했지만 우리는 끝내 얼굴을 그려 넣지 못했다. 형은 고민하다 어디서 배워왔다고 얼굴에 십자가를 그렸다. 십자가의 얼굴을 가진 또 다른 나는 어딘가 성스러워 보이기도 죄성을 지닌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며칠 뒤 그림은 쓰레기통에서 나왔다. 네 갈래로 찢겨져 있었다. 엄마가 청소를 하고 난 이후였고 엄마는 실수라고 말했다.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실수를 찢겼다는 그림이 엑스 자 모양이 되려면 얼마나 많은 우연이 겹쳐야 하는지 생각했다. 그 날 이후 우린 형의 형을 잊었다. 나는 그때 이후 노트에 무언가를 적는 습관이 생겼다.

오랜 시간이 지나 내일이면 이제 내가 어른이 된다. 형은 어른이 되고 나서 집을 나갔고 나는 이제 혼자 방을 쓴다. 문득 형의 형 생각이 났다. 조각난 그때 이후 생각나지 않던 형이 문득 생각났다. 노트를 꺼내 그때부터 적기 시작했던, 새로 알게 된 것들을 적는 공간에 글을 적어내렸다.

* 치매에 턱관절을 움직이는 게 좋다는 말에 할머닌 껌을 반으로 쪼개 씹었다.

* 아버진 내게 부재에 관해 걱정을 하지 말라고 문자를 한다.

*식판을 보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 수 있다.

……

*감사와 고마움 사이

*우린 여전히 그림과 낙서 사이에 있다

우린 여전히 그림과 낙서 사이에 있다. 그때 형의 행동이 크로키였다는 것을 훗날 알았다. 영원히 알 수 없는, 하지만 언제라도 들어갈 수 있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 안에 내 얼굴을 그려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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