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후의 나와 머리카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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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1 ~ 2018. 1

 

 

두 번째로 머리를 기른다. 첫째는 타의에 의해서, 둘째는 자의에 의해서다. 내가 머리를 기르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결같은 머리 모양이 지겨워, 염색을 못하니까 머리라도 길러, 어떻게든 머리카락에 변화를 줘보자는 심정으로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지금은 짧은 편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내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내려와 풍성해질 것이다. 그러고 보니 첫 번째로 머리를 기른 지 십 년이 되어간다. 한 아홉 살인가, 식구들의 권유로 나는 별 생각 없이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아픈 사람, 병든 사람, 머리카락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모발을 기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증이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나는 내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기쁨에 무작정 머리를 길렀다. 머리 기르는 일은 참 별거 아니라고,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남자가 머리 기르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모르고 있었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머리가 길면 여자, 머리가 짧으면 남자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나는 내가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부정했지만, 길을 가다 짧은 머리를 한 사람을 보면 무조건 남자라 인식하게 된다. 이런 의식과 관념은 아주 옛날부터 비롯된 것이고 우리 머릿속 깊이 내재해있는 거라,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 머리 기른 남자에게 머리는 여자만 기르는 것인데, 왜 네가 기르냐 물어오면 불쾌해질 수밖에 없다. 머리가 길어서 여자로 알았다고 하거나 화장실에 들어가다 깜짝 놀라 나가라 하는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당황해하고 부끄러워하게 된다. 나는 길고 긴 몇 년 동안 그런 일을 숱하게 겪어왔다. 남자화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낯선 아저씨들이 “공주님은 저기로 가야지” “니 여자고 남자고?” 하고 말을 건네면 한없이 창피해지곤 했다. 별로 크게 의식할 일도 아니고 그들의 반응도 당연한 것이었는데, 왜 그렇게 민망했는지 모른다. 중년 남성에게 대들 수도 없었다. 여자 아니라고, 남자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매번 반복되는 사람들의 반응이 두려웠다. 그래서 소변도 눈치봐가며 봐야했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냥 나오기 일쑤였다. 물론 한참동안 소변기에 서서 소변을 보지 못하는 나의 행동은 오래전부터 있었던 아주 나쁜 습관이었다. 남들에 대한 두려움, 피해의식 때문에 그런 버릇이 더 심해지지 않았나 유추해볼 뿐이다. 피해의식이 생길 이유도 없는데 말이다. 그런 일이 계속되자 나는 남자화장실을 꺼리게 되었다. 대신 여자화장실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여자화장실에 들어가면 상관하는 사람도 없고, 아주 편하게 볼일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남자화장실엔 아저씨, 청년, 청소부 등 간섭하는 사람이 많지만 여자화장실엔 그럴 사람이 없었다. 모두 같은 여자 대하듯 지나쳤다. 오히려 편했다. 여자가 아닌데 여자화장실에 간다는 사실이 처음 얼마간은 어색했으나 익숙해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머리를 기른 뒤 나는 길을 갈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여자애’ 소리를 들어야했다. 낯선 여자아이 둘이 나를 보면서 귓속말로 키득거리고, 식당 주인 할머니가 정말 남자 맞냐고 내 사타구니 부분을 더듬기도 했다. 지인을 만날 때마다 여자 같다는 말을 들었고 처음 만나는 사람들 모두 나를 여자로 봤다. 나는 화내지 못하는 내가 싫었다. 사람들이 나를 여자로 대할 때마다 대들고 싶었고 화내고 싶었다. 그러나 너무 소심한 나는 또박또박 여자가 아니라고 설명해줄 용기조차 없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참고 지나갈 뿐이었다.

 

나는 남자가 머리 기른다는 사실이, 아니 내가 머리 기른다는 사실이 뿌듯하지 못했고 지긋지긋하기만 했다. 거울에 비친 나는 영락없는 아홉 살 여자아이였다. 어깨도 넓지 않고 수염도 없는 앳된 나는 누가 봐도 여자아이의 모습이었다. 내 정체성에 혼란이 온 것이었을까? 한창 예민할 시기에,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어, 아니 분명 나는 당당한 남자였는데 타자의 착각이 나를 헷갈리게 한 것이었을까?

 

처음엔 이발비를 아끼려 머리 기르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모발 기증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나는 누구를 위해 머리를 기른 걸까? 아픈 사람들을 위해? 머리를 기르라는 부모님을 위해?

 

 

9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나를 위해 머리를 기른다. 기증하려 기르는 것도 이발비를 아끼려 기르는 것도 아니다. 궁금한 것이 있다면 이것 하나뿐이다. 아홉 살 머리 기른 소년과 달리 열여덟 살 머리 기른 청년을 본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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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월 16 시 전
안녕하세요? 모로님. 첫 만남이네요. 반갑습니다. 글 올리고 오래 기다리셨겠어요. 항상 생각을 많이 하시는 분인 것 같아요. 기억을 되짚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습관은 글을 쓰는 창작자에게 많은 도움이 됩니다. 앞으로 어떤 장르의 글을 쓰든 깊이 있는 글을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아홉 살 즈음, 우연히 길게 기른 머리카락으로 어린 아이때 겪은 세상의 편견과 상처에 대해 서술하고 십년이 지난 뒤 이제 다시 그 세상에 부딪혀 보고자 하는 마음을 잘 이야기 해 주었네요. 몇 가지 제 의견 드릴게요. -'두 번째로 머리를 기른다.'는 문장은 전체 내용의 중심 역할을 하는데요. 의미상으로 봤을 때는 두 번째로 머리를 '길게' 기른다는 거겠죠. 머리카락을 기르는 것은 태어났을때부터… Read m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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