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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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연달

 

 

 

연아. 기억나?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난 너를 처음 본 순간 느꼈어. 저런 애들이 얼굴을 알리고, 저런 애들이 성공을 하는구나. 연습실 거울을 통해 본 너는 그만큼 빛났어.

 

 

연아. 기억나? 우린 누군가의 우상이 되고 싶었잖아. 그래서 십 대를 쏟아 붓고 이십 대를 갈아 넣었잖아. 영원은 아니지만 우린 꽤 긴 시간을 약속했고 나는 네가 내 사람이라고 확신했어.

 

 

연아. 기억나? 아무 이유 없이 우린 한밤중에 연습실을 뛰쳐나왔잖아. 세상은 온통 어두운데 또 그만큼 밝았어. 예쁜 반달이 떠 있더라. 너는 아무 말이 없었고 그 정적이 너무 무거워 나도 쉬이 말을 꺼내지 못 했어. 그냥 손장난만 쳤지. 왼쪽으로 둥근 반달이 뭘까, 손으로 몇 번 모양을 만들어 보고 나서야 알았어. 하연, 달. 연아 네 이름이랑 비슷해서 그런 장난을 쳤더니 너는 진지하게 받아치더라. 하현달이야. 알고 있다는 말을 하기도 무색해서 그냥 달을 봤어. 계속, 계속. 너무 낯설더라. 달 너무 예쁘지 않아? 별로. 퉁명스럽게 나온 말에 너는 아차 싶었는지 말을 덧붙였어. 별이 더 예뻐.

 

 

연아. 기억나? 너는 별이 될 거라고 말해 버릇했잖아. 스타가 곧 별이니 무슨 말장난인가 싶었지만 이젠 알 것 같아. 넌 백댄서로 삼 년을 있었다고 했지. 넌 스스로 빛을 내고 싶었던 거야. 다른 사람들 빛을 반사해 내는 건 지긋지긋했을지도 모르지.

 

 

연아. 기억나? 그날 밤 있잖아. 나는 200g이 쪄서 울고 너는 족발이 먹고 싶다고 울던 그날. 엄마한테 짐을 받아야 한다며 나갔다 온 네 손에는 양념도 안 된 삶은 돼지껍질이 들려 있었어. 우린 그걸 차마 씹지도 못 하고 입안에서 몇 번 굴리다 미련이 생기기 전 변기에 뱉었어. 흐물흐물 다 풀어진 돼지껍질이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걸 한참이고 보다가, 그러다가 밖으로 뛰쳐나온 것 같아. 그래도 그날은 어떠한 이유도 없는 날이었어. 항상 고개를 드는 탓에 아무 것도 아니라 치부해버린 그런 감정들 속에서 우리는 함께했잖아. 꿈을 같이 꿨잖아.

 

 

연아, 기억나? 너는 어느 순간부터 나한테 웃어주지 않았잖아. 넌 내게 오는 칭찬들을 부러워했지만 난 그런 너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어. 내가 가진 것들은 얻을 수 있는 거지만 네가 가진 건 그보다 한 단계 위의 것들이니까. 연아 다시 말하지만 난 너를 처음 봤을 때 너 같은 애들이 얼굴을 알린다고 생각했어.

 

 

연아. 기억나? 우리가 별것도 아닌 일로 말다툼했던 날. 정말 별것도 아니었어. 지금은 그게 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너는 많이 날카로웠고 나도 좀 지쳐 있었어. 언성이 높아졌고 너는 날 밀쳤지. 내 뒤에 계단이 있다는 걸 네가 의식한지 안 한지는 모르겠어. 중요한 건 드라마에서도 나오면 비웃을 법한 일이 진짜로 일어났다는 거지. 눈을 뜨니 너와 눈높이 차이가 한참 나더라. 그만큼 굴렀겠지. 연아 우린 꽤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왜 내 기억 속에선 대부분이 침묵일까. 너랑 나는 네가 끝내 자리를 뜰 때까지 그저 쳐다만 보고 있었어. 나는 그날 내 발로 병원을 갔어.

 

 

연아. 기억나? 다음날 사장님이 모두를 불러놓고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보라 했잖아. 너는 아무 말 않았고 나는 그냥 발을 헛디뎠다 했어. 계단에서 구른 것 치고는 멀쩡했으니까. 내 말이 끝나자 너는 내게 조심 좀 하라 했어. 나는 웃으며 그러겠다 했지. 알아. 우린 안 미쳤어. 미칠 수 없었지. 우린 항상 다수에 속하는데 어떻게 미칠 수가 있겠어? 사실 그 정도는 양호한 거야. 난 네가 내 뺨의 흉터만을 남긴 것에 감사해. 더 안 좋은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었겠지. 네 손톱 위 매니큐어처럼 도톰한 상처를 보여주며 나는 회사를 나갔어. 이것도 알아. 같잖은 이유인 거. 그냥 네가 밀어냈으니까, 밀려줘야 할 것 같았어. 넌 나를 살짝만 밀어냈는데 난 너랑 갈수록 멀어졌어. 다른 궤도를 탄 거지. 우리가 있던 궤도는 너무 좁았던 거야. 그 살짝의 엇나감으로 길이 이렇게 틀어질 줄 몰랐지. 정신 차리고 볼 땐 내 이상에서도 밀려난 후였지만 도리어 마음이 편했어. 벗어나니 알겠더라. 우린 발광 중이었어. 그렇지만 발광한다고 다 별은 아니잖니. 요즘 들어 네가 날 궤도에서 밀어낸 게 일종의 선물 같다는 생각을 해.

 

 

연아, 내 연아. 넌 빛났어. 그런데 그게 네 빛은 아니었던 거지. 너는 항상 별이 되고 싶어 했지만 결국 달에 그친 거야. 행성도 아닌, 위성. 네 빛인 척 하지만 다른 항성을 졸졸 따라다녀야 하는 것을 알아. 그래, 달은 예쁘지. 어쩌면 별보다 더 아름다울지도 몰라. 연아. 내 연아. 하지만 결코 별은 아닌 것을 어쩌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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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일 22 시 전
* "그래서 십 대를 쏟아 붓고 이십 대를 갈아 넣었잖아." : 목적어가 필요해 보이는 문장입니다. * "난 네가 내 뺨의 흉터만을 남긴 것에 감사해." – "난 네가 내 뺨에 흉터만 남긴 것에 감사해." * 안녕하세요 이꼴님. 작품 잘 읽었습니다. 이 작품에는 좀더 분명한 서사가 필요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과 나. 이 둘의 관계가 애증으로 얽혀 있는 관계인 건 알겠는데 그 애증의 시작과 과정이 지나치게 몇 개의 암시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싶어요. 경쟁관계인지 우정을 나눈 관계인지(물론 둘 다이겠지만), 그 둘의 에피소드가 잘 보이지 않은 채 뺨에 흉터를 내고 계단에서 밀치는 등의 사건들이 전개되는데 그 사건의 내력 또한 잘 보이지 않네요. 가령… Read m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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