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글틴 문학의 종언(글틴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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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빛 좋는 개살구, 글틴

오래토록 이어진 사이버문학광장 글틴의 쓰면서뒹굴뒨굴은 청소년의 문학기반을 더 견고하였다. 수상작 선정과 작품의 첨삭 및 조언은 글틴에 몸담은 이들에게 큰 양분이 되었다. 이를 통해 일부는 성인이 돼 등단을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일부는 관련 역량을 통해 각종 전문분야로의 취업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졸업생. 우리는 재학생. 찌찌뽕. 그들과 우리의 차이를 가르는 선을 약간 넘겨 짚자면 그것을 문학캠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의문이 든다. 왜 우리는 그 즐겁고 보람찬 문학캠프를 겪을 수 있게 도와주지 않는 것인가. "캠프를 겪지 않은 자 진정한 글틴일 수 없다!(2018. 4. 1. 상산의 신령 '체'의 발언 중)"는 말처럼, 캠프의 유무는 글틴 문학의 화합이자 시너지이며 그 무엇도 대신될 수 없는 궁극적 결산이고, 이 결산 없이는 글틴 문학의 본질적 의미는 퇴색돼 버린다. 관료적이고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어른들'의 변명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글틴캠프 없이는 문장 글틴 쓰면서뒹굴뒹굴의 경험을 효율적으로 극대화 할 수 없는 것이다. 휘황찬란하게 다 그려놓은 용에 '눈'이 찍히지 않은 것과 같다. 세월로 인해 백안으로 '틴'을 벗어나는 자. 그 얼마나 슬프고 흉칙한가. 우리는 이를 '글틴 문학의 종언'(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차용)이라 부르기로 하자. 승천하지 못하는 '백일장 키드'(전삼혜 소설에서 용어 차용)의 설움을 알아보자.

 
2. 글틴캠프라는 슬픈 전설

우리에게 글틴 캠프는 전설로 남아 있다. 고전문학의 대가 조동일(동국대) 선생은 전설의 전승 범위가 국부적이고, 주인공은 비범하며, 전승태도는 신빙성 있으며, 관련한 구체적 증거와 비극적인 결말을 특성으로 갖는다고 하였다. 과거 글틴캠프는 각 분과 수상자라는 비범한 참여자인 일부 시기의 존재들만 참석하였으며, 그 일정이나 활동은 검색포털을 통해 사진으로 증거가 박제화 돼 있고, 그들의 존재가 후대 글틴의 아쉬움으로 남았다는 점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맺는다. 캠프가 전설이 된 것은 아름다운 옛 이야기가 아니라 슬프고 안타까운 현 주소이자, 가능할 수 있는 일이 전설로 지칭될 수밖에 없는 허탈함이다. 이 허탈을 극복하고자 한다. 역사가 짧은 미국은 어벤져스라는 영웅집단으로 결핍을 극복하고자 하고, 유럽은 판타지에 의뢰하며(해리포터, 크툴루신화 등), 중국은 역사(삼국지, 무술 등)에 의존한다. 그리고 현역 글틴은 만우절을 통해 억압 받은 욕망을 발산한다. 그 욕망은 글틴캠프. 전설로 지칭됐으나 사실 현존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앞서 설명한 전설과 궤를 달리 한다는 걸 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선 어른들의 각성과 변화와 시행의 약속이 필요하다. 그들의 의지와 캠프의 실현을 촉구한다! 각성하라! 각성하라!

 

 

3. 글틴캠프라는 마중물을 달라!

우리가 왜 글틴 캠프를 원하는가. 캠프를 꿈꾸는 건 전례의 효과와 결과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글틴이 청소년의 문학증진을 위하는 것이라고 할 때 가장 효과적고 중심적인 행사기 때문이다.  물론, 앞세대에선 해준 걸 뒷세대에선 해주지 않는 차별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도 가미돼 있다.(쌤들 받으시는 월급 갑자기 줄어들면 기분이 어떨까요!?) 기본적으로 전국구의 인원이 온라인(글틴)을 통해 조우하고 교류하게 되는데 이는 시공간을 달리함으로인한 기본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특별한 만남을 기획하는 것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글틴의 존재 이유를 더 명확하게 하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더불어 물리적 공적(학업) 한계를 지닌 글틴은 그런 만남이 언제나 즐겁고 유익할 거라는 판단과 기대에 가득 차 있다. 글틴 대개가 원하고 연간 단위의 행사라는 점에서 캠프가 주최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글틴의 이러한 결핍과 욕망은 다른 방향으로 불출되는 양상을 보인다. 글틴과 무관한 문학단체(대산재단, 학원, 과외 등)에 소속된다거나,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을 통해 교류하는 식이다. 그러나 책임 있는 감독이 지속되지 않거나 부재하는 점에서 이러한 형태의 대체는 불안하거나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나마 이런 소속이라도 된 글틴은 문학관과 작품, 생활을 수시로 교류함으로써 부정확하고 불안한 선에서 성장하고 용기를 얻을 수 있지만, 홀로 글을 쓰는 글틴은 이마저도 경험할 수 없어 작품의 비교나 조언 등을 얻기가 쉽지 않다. 예고 문예창작과의 재학생의 특별한 사례는 차치하고, 결국 전국 곳곳의 모든 문학키드에게 혜택과 도움을 주기 위하는 예술위원회의 근본적인 존립근거는 글틴캠프 하나로 해결할 수 있는 많은 가능성과 함께 불투명해 지는 것이다.

단지 캠프 하나가 그런 걸 다 채워줄 수 있느냐 반문할 수도 있다. 그 말이 맞다. 고작 며칠 동안 모든 게 다 충족되진 못하는 게 맞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간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매년 반복되는 캠프가 수많은 백일장키드의 '마중물'이 된다는 점이다. 마중물은 깊은 지하네서 물을 퍼내는 펌프가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부어주는 물이다. 이 물이 없으몀 수백번의 펌프질로도 물이 안 올라오겠지만, 몇 바가지의 마중물만 있으면 끊임 없이 물이 솟구치게 된다. 글틴 캠프란 이런 마중물과 다름이 없다. 매회 만나는 글틴은 친분을 넘어 교류를 견고히 하게 되고, 새로이 유입되는 글틴에겐 꿈과 희망의 장소가 이미 구축돼 있는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그 성과가 캠프를 겪은 졸업생을 통해 속속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마중물을 주지 않는다는 건 물줄기를 포기하겠다는 것이고, 그 펌프를 고사시키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형법」에선 작위의무자의 행위 뿐만이 아니라 부작위의무(방임, 아기에게 젖을 주지 않아 살해하는 등) 역시 범법행위로 취급하고 있다. 다만, 형벌권이 접하는 부분이 아니라는 점에서 도덕적인 방임이자 방관이라는 점이 형법과 다를 뿐이다. 그러니까 글틴캠프를 주최하지 않는 건 윤리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또 글틴캠프의 미주최는 글틴을 정신병에 걸리게 하는 것과 같다. 철학자 라깡은 인간의 정신을 이드와 에고, 슈퍼에고로 구분하였다. 범박하게 이드를 무의식, 에고를 의식, 슈퍼이고를 세계/한계/법칙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글틴캠프가 초자아로, 글틴을 자아로, 글쓰기의 욕망과 꿈을 에고로 대입할 수 있겠다. 여기서 중요한 건 글틴캠프가 없어서 에고(글틴)가 슈퍼에고 자리까지 차지하는 것인데, 정신분석학에서 우울의 증상을 바로 '에고 = 슈퍼에고'의 상태로 보았다. (쓰면서뒹굴뒹굴도 역할을 하긴 하지만) 글틴캠프가 슈퍼에고로써 에고(글틴)을 끌어주고 조절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볼때, 캠프의 부재는 글틴을 고아로 만드는 것과 같으며 우울증 환자로 방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4. 본질이 중요하지 형식이 중요하진 않아

그렇다면 글틴캠프가 어떻게 재개될 수 있을까. 그것은 청소년이 해야 할 업무가 아님으로 알 수가 없다. 참석해본 적도, 주최해본 적도 없으니까. 캠프 주최에 돈이 들어가고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며, 그 과정이 필요하다는 상식은 당연히 있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필요성은 충만하다는 것을 이미 길게 주장하였고, 결국 실천으로 행동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말은 쉽다. 겪지 않아서 모른다. 문제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문제를 우리 틴에게 구체적으로 공고하고 거론라며, 의지의 문제가 아닌 제약의 문제임을 공고히 한 적이 있던가. 글틴은 사이트의 대상자지만, 동시에 함께 하는 주인이자 동반자다. 학교가 교직원의 전유물이 아니라 학생과 함께 하는 공동체인 것처럼 글틴도 마찬가지라는 것. 따라서 실천되지 않는 것은 설명하고 논의해나가면 되는 것일 뿐, 마치 없었던 것처럼 묵과하거나 단순한 제한사항을 게시하는 것으로 매듭지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통 안 된다는 건 예산의 문제로 치부한다. 그러나 중고교부터 대학까지. 회사가 아닌 거의 모든 단체와 모임은 결국 회비 등 차출을 통해 자금난을 해결한다. 그리고 앞서 모임의 본질이 중요한 것이라 설명하였다. 삐까번쩍한 호텔이 아니더라도 글틴이 함께 할 수 있는 어떤 공간과 몇 박의 시간만 가능하다면 충분히 웃을 수 있다. 글틴캠프가 부재되는 건 글틴의 무관심과 어른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결국 실천하지 않고 할 의지가 없는 것은 아닌지 다시 돌이켜 봐야 한다.

 

 
5. 만국의 모든 글틴들이여, 단결하라!(카를마르크스 공산당선언의 구호에서 차용)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자본증식욕망을 통해 부르주아가 많은 것을 독점하고 앗아가는 것을 다수의 프롤레타리아가 단결하여 전복시키길 기도하고 예상했다. 하지만 보기 좋게 좌절되었다. 그는 이데올로기가 프롤레타리아에게도 주입되고, 그렇게 현실과 자신의 상환을 왜곡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세상은 변해가고 매번 다른 시대의 사조와 매번 자본주의의 한계와 변화가 주장되나 실상은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글틴캠프를 위한 이 단결, 주장이 보기 좋게 좌초될 게 뻔한 부스레기 같은 글 쪼가리로 치부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글틴(일부)은 왜 4월 1일(만우절)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성의 끈을 놓고서야 이런 주장을 할 수 있게 됐을까. 이 글과 이 말 자체가 농담과 픽션과 유희가 되었을 때야 이 이야기를 '거론'할 수 있게 된 걸까. 우리는 평소에도 부모님과 선배와 선생님 등 많는 윗사람에게부터 고개숙이고 지시 받으며 복종하길 제도적이고 인적으로 강요 받으며 지낸다. 앞으로도 전승되고 바뀌지 않을 박정희 새마을운동식 유교주의는 우리의 발목을 잡고, 우리의 욕망을 억누를 것인데 말이다.

그런 압박의 분위기가 조금 약해져서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미투 운동을 통해 거론되지 않을 것 같았던 약자의 당연한 권리가 마치 혁명처럼 번지는 걸 보면서, 그리고 대통령이 탄핵되고 구속되며 재판 받는 사건을 보면서, 우리가 꿈꾸는 문인의 존재가 벌인 비열한 성추문과 각종 권력적 작태를 보면서 조금은 더 당당해져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꿈을 꾼 것 같기도 하다. 조금은 발목이 가벼워져서, 조금은 키가 더 클 수 있을 것 같아서.

고로, 조금 더 꿈꾸고자 다소 거칠게 욕망을 분출하고 행복을 꿈꾸어보았다.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엔 원전의 '아우라'가 사라진다고 했지만, 우리는 복제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면서도 '문학'이라는 예술을 통해 개개인의 '아우라'를 피워올리려 고군분투하고 있다. 단지 캠프의 유무 따위로 글틴이 원하는 삶을 지속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한다. 가서도 외톨이가 될 수도 있고, 즐거워도 미래는 암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간의 의미를 결코 잃어버릴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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