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빛났던 당신의 얼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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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빛났던 당신의 얼굴은

나는 당신의 비상을 보았다. 오직 나만이 당신의 증인이다. 당신은 날개를 쭉 벋은 채 창공을 가로질렀다. 쏟아지는 햇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반짝거렸다. 이윽고 당신은 당신의 몸으로 태양을 가렸다. 나는 그 아래에 있었다. 당신의 모습이 역광으로 검게 물들고 있었다. 그것이 인류최초의 비행이었다. 지금도 믿어의심치 않는다. 당신은 하늘 높이 날아, 영겁처럼 긴-어쩌면 찰나일지도 모르는- 시간을 만끽했다. 나 역시 마치 꿈결 속에 있는 듯했다.

아직도 고향의 옛 집에 머무는 동안이면 창고에서 자주 시간을 보냈다. 당신의 흔적이 남아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내가 갈무리한 당신의 날개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 날 내가 옮겨다놓은 모습 그대로 여기에 남아있었다. 여기서 날개를 보며 당신과의 추억을 안주 삼아 브랜디를 마시는 것이 늙은 내 취미였다. 추억 속의 당신은 이제 나보다 쉰 살은 어렸다.

당신은 하늘을 동경하는 이카루스이자 총명한 기술자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당신은 이미 양력을 발견하고 날개를 설계 중이었다. 당신은 내게 그 설계도를 보여주며 말했다. "저 푸른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어. 새처럼, 바람처럼." 당신의 동경은 나까지 끌어들인 우량한 것이 되고 말았다. 나는 당신의 비행을 보기 위해 당신의 곁을 지켰다. 그때 나에게 당신은 한 마리 새처럼 보였다. 날개를 잃어 잠시 무리와 하늘을 떠난 한 마리 새가 아닐까. 나는 곧잘 당신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슬슬 취기가 올랐다. 그만 본채로 들어갈까 하는 차에 문이 열렸다. 시원한 바람이 콧잔등에 닿았다. 손자 녀석이 바닥을 끼익끼익 울리며 달려들어왔다. 넘어질 뻔하면서까지 급하게 구는 것이 중한 용무가 있는 듯했다. 손자는 숨 고르는 일도 잊고 나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가까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쭉 뒤로 빼자 그제야 글씨가 읽혔다. '1차 세계대전의 숨은 영웅들' 저자 란에 써있는 이름이 친숙했다. 옛 전우의 이름이었다.

"여기 나오는 아서 경이 정말 할아버지예요?"

손자가 물었다. 책 표지에 그려진 복엽기 사진을 보고 있자니 취기가 훅 올라왔다.

"그래, 내가 바로 제임스 아서 경이다!"

콧김을 뿜으며 과장스러운 군인 말투로 말했다. 손자가 눈을 빛내며 책에서 소개하는 일화에 관해 물어댔다. 나는 경험담을 바탕으로 적당히 부풀려서 손자에게 대답을 들려주었다. 손자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모두 피한 세대였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이미 모든 것은 과거가 되어갔다.

"그럼 이 조형물에도 뭔가 있는 거죠?"

손자는 당신의 날개로 다가갔다. 나는 말리지 않았다. 손자는 당신의 날개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당신의 흔적은 누군가의 관심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뭔가 적혀 있는 것 같아요. 다 헤지고 번져서 잘 모르겠는데, 아마 J. A……."

손자가 중얼거렸다.

"얘야, 네 큰엄마가 부르는 것 같구나. 가봐야하지 않겠니?"

내가 말했다. 손자가 덜컥 고개를 들었다. 불쾌한 침묵이 감돌았다. 손자는 잠시 내 눈을 바라보더니 순순히 창고를 나갔다. 손자에게 안 좋은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자각하면서도 끓어오르는 심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허리가 찌르르 아파왔다. 나이가 나이임에도 사람은 이런 유치한 일을 저지르고 마는 것이었다.

당신은 마지막에 와서야 일을 망설였다. 사람이 직접 날개를 달고 시험 비행을 해야 일이 끝났다. 하지만 추락할지도 모르는 날개를 메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일을 할 만한 미치광이는 당신밖에 없었다. 당신은 생각보다 덜 미쳐 있었는지, 예정일을 하루 앞두고 나를 찾아왔다. "네가 대신 해줄 수는 없겠어? 말했잖아. 너도 새처럼, 바람처럼, 하늘을 날고 싶다며!" 나 역시 두렵기는 매한가지였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자 당신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결국 무슨 대답을 하긴 했을 것인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반백년이 지난 일이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나는 술잔을 바닥에 내려놓고 당신의 날개로 다가갔다. 발을 들어 손자가 보았던 비밀을 짓밟았다. 전쟁터에서 군홧발로 그랬던대로. 허리가 계속 아파왔지만 발길질은 멈추지 않았다. 당신의, 그리고 나의 날개가 부수어져갔다. 무슨 상관인가. 이런 흔적이 없대도 내가 당신의 증인이다.

당신은 분명히 하늘을 날았다. 새처럼, 바람처럼. 그것이 틀림없는 인류 최초의 비행이었다. 당신이 태양을 가리고 역광으로 물들었던 때의 그 모습만은 똑똑히 기억났다. 반백년이 흘러도 마찬가지였다. 그 기억 속에서 나는 당신이고 당신은 나였다. 나는 오직 그때만을 상상했다. 당신의 얼굴이 잠깐 빛났던 때, 그래서 검게 물들었을 때, 당신의 얼굴을 상상했다. 그때의 당신은 무엇을 보고있었을까. 하늘을? 나를? 당신은 어째서 추락하고 말았는가. 그 탓에 나에게 진정한 하늘이란 여전히 당신의 빛났던 얼굴이다. 아주 어둡게 빛났던, 당신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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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현
26 일 9 시 전

이번 신동엽 백일장 주제 중 하나로 쓰신건가요?

22 일 9 시 전
잘 읽었습니다. 퇴고를 하셔서 그런지 비문이나 어색한 표현들은 거의 없는 것 같네요.^^ 우선 말씀하신대로 이 소설은 단편에 비해 분량이 상당히 짧습니다. 단편보다 짧은 분량에 이야기를 제대로 담는 일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걸 저도 최근에 자주 느끼고 있어요. 압축의 미란 함부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제대로 깨닫고 있는 중인 거죠.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에 대해 제가 느낀 걸 말씀드릴게요. 우선 플롯에 대한 이야기에요. 아무리 짧은 소설이라도 플롯은 중요합니다. 이 소설은 과거의 어떤 한 지점을 회상하고 있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중요한 배경이 되는 시간은 과거일까요 아니면 현재일까요? 이런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소설에서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전개되고 있는데 그(과거나… Read m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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