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엘리베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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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는 아파트의 가장 긴밀한 내면

거울에 둘러싸여 교묘하게 신분을 가린

얼굴들은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다

낯선 상태로 한 공간에 묶인 채

 

바깥에 지나가버린 숫자의 잔상이 남아있는 동안

우리는 어쩌면 게임을 하는 중일지 모른다

여기 사람들과 무작위의 이름을 나눠 가졌어

몰래 적막이 손을 뻗으면, 나는 얼음이 되고

상대가 끝을 외칠 때까지 끝나지 않는 게임

 

내 손짓은 계속 낯설어지다 빨간 음소거로 치환되고

달콤하고 투명한 오렌지가 되는 상상을 해봐

꼭 냉장고 속에 갇혀있는 것처럼,

나는 상대의 이름도 말도 이해하지 못한다

천장의 조명에서 번져 나오는 빛이

먼지가 가득한 거미줄로 향하면

그 위에 매달린 벌레들의 겉면은 텅 빈 껍데기일까

조용한 오렌지를 끝으로 텅 비어버린 엘리베이터의 잔해일까

 

보이지 않는 눈과 대화하는 느낌을 안다면,

그건 우리가 둥글어졌다는 증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모두 엘리베이터를 향하는데

버튼 없이는 여길 빠져나갈 수 없고 뭐든, 나는 할 수 없는 일들

깜박이는 천장에선 서로의 손을 잡을 수 없어

나는 이 게임을 이어가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어지고

작은 엘리베이터 속에서 나는 어린이용 발판에 올라서

상승하는 속도로 다시 작아지는 중이다

소리가 소리를 또 다른 층으로 보낼 때까지

집어삼키면서, 나는 작아지고 상대는 천장까지 자라나

버튼마다 오렌지가 뚝뚝 떨어지는 엘리베이터 안은

향기로운 눈들이 게임을 계속하는 곳

끊어진 손들엔 누군가의 과즙을 묻히고

서로의 넓이만큼 사탕 조각을 깨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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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일 8 시 전
안녕하세요 새올님 저와 인사한 지 얼마 안 되는 것 같은데 보여주는 시마다 재미있네요. 이 시를 보는 순간, 이미지가 확 그려지면서 오렌지의 가운데 흰 대가 생각났고, 그 대를 엘리베이터라고 상상한 새올님의 생각도 좋았습니다. 저도 가끔 평일 낮에 집에서 작업을 하면 이 아파트엔 아무도 없는 것 같고 엘리베이터가 오르내리는 소리만 듣거든요. 이 아파트에서 유일하게 긴, 관을 통과하는 것, 유일하게 위 아래층 구분없이 비어있는 것이 엘리베이터가 아닌가 생각해봐요. 그렇다면, 새올님이 첫연에서 얘기한 "가장 긴밀한 내면"이라는 말이 더 설명이 되죠. 버튼 없이는 여길 빠져나갈 수 없고 뭐든, 나는 할 수 없는 일들와 같은 문장을 읽을 때는 더욱 놀랐어요. 버튼 없이 나갈 수 없다는 말이… Read m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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