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완전한 사랑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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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완전한 사랑의 언어

<스펙트럼 분석기> 도국

 

 

사랑은 안타깝게도 누군가를 오해하는 일일 것이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해가 불가능할 때 우리는 차라리 오해해버린다. 감정이 관련된 일에서 특히 더 그런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건 우리가 고작 언어에 기대어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감정 앞에서 언어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사랑’한다고 말해도 거기에 ‘사랑’은 없다. ‘사랑’이라는 모양의 문자가, 공기의 울림이 있을 뿐이다. 연인에게 끊임없이 사랑하느냐고 물어 사랑을 확인받고도 또 되묻는 것은 비단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때의 달콤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도 진심인지 의심이 들고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도 마찬가지. 그러나 말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다면 어떨까. 도국의 <스펙트럼 분석기>다.

 

희동은 헤어디자이너다. 그의 말을 빌려 헤어디자이너를 정의해보자면, 여자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다. 이것만 보면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뿐만은 아니다. ‘손님에게 아낌없이 칭찬해주고, 따뜻한 손길로 빗어주고, 고작 20분이지만 아름다움과 함께 즐거움도 드리는 엔터테이너’다. ‘엔터테이너’라고 했지만 이건 오히려 연인을 닮았다. 희동의 바람기는 직업병일지도 모르겠다. 반면 나비는 정반대의 인물로 그려진다. 사랑에 인색하다. 어쩌면 사랑이 나비에게 인색하다. 타인에게 자신의 머리를 맡겨본 적도 없어 희동이 머리를 감겨주자 버둥거리며 온몸으로 거부감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러나 몸에 힘을 빼고 희동의 손길을 느끼기 시작하자 ‘기분 좋음’을 전혀 숨기지 못하고 여과 없이 겉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마지막 인물, 그저 그런 사랑이야기를 벗어나게 만든 관찰자인 ‘우리들’이다(독자의 시선이기도 하다). ‘우리들’을 어떤 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극중에서는 전지전능한 존재로 보인다. 나비의 목소리를 희동과 함께 듣는다. 희동을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며 희동과 나비가 어디에 있던 그들을 볼 수 있다. 심지어는 희동이 자신의 ‘이상함’을 느끼고 제령의식을 받는 도중에도 ‘우리들’은 그걸 본다. 그러나 극중에서 의지를 가지고 이야기를 이끌어나가거나 직접 다른 인물과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다. 그저 보고, 이따금 희동과 대화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둘의 관계를 방해하기는 충분했다. 아무리 타인의 시선이 피사체의 내부에서 새로운 감정으로 변모하는 것이라 해도, ‘시선을 보내는 것’ 자체를 무시할 순 없다. 아마 희동이 스스로를 이상하게 느낀 것은 자신의 시선이 ‘우리들’에게 닿아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시선이 자신을 겨누고 있어서일 것이다. 본인은 몰랐다 해도 말이다. 시선의 수만큼 오해가 생긴다. 작가는 ‘우리들’이라는 인물을 통해 독자를 작품 속의 직접적인 관찰자로 내세우며 그걸 다시 강조한다. 그와 동시에 드러나는 오해가 하나 더 있다. 사랑이 오로지 1대1 관계라는 오해. 그러나 그건 불가능하다. 심지어 모두가 죽고 단 둘이 남았다 해도 희동이 느끼는 시선은 여전할 것이다. 이것은 희동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 또한 사회에서 벗어나도 예컨대 ‘인간적’이라는 시선을 느껴 인간적으로 행동하려 노력하고 말 것이니까.

 

나비 또한 희동과 비슷한 과정을 겪는다. 목소리를 되찾은 후, 자신이 퍼플래빗임을 선언하고 여배우가 되어 많은 사랑을 받지만 그들이 보내는 사랑과 시선은 앞서 말했듯, 오해와 규정일 뿐이다. 그 과정에서 나비는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닌 ‘들어주는’ 희동이 아니면 안 된다고 느낀다. 물론 이 또한 아직 언어를 통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더 이상 나비의 곁에 희동은 없다. 사과를 하고 싶어도 사과를 들어줄 상대가 없는 것이다. 희동의 집으로 찾아가지만 그의 달력은 5월에 멈춰져 있다. 나비가 희동을 떠난 달이다. 나비는 결심한다. 희동이 언제 어디에 있던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듯 그가 언제 어디에 있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살 것이라고. 그건 사랑을 당당하게 돌려받으라는 희동의 말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나비는 희동과의 추억으로 무대를 가꾸는 코미디언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기어이 희동은 한 줄기의 빛으로 나비를 발견한다. 자신이 보고 싶던 나비의 삶으로 살고 있는 간나비를. 희동은 ‘당신이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웃어 보인다. 나비도 자신과 똑같이 생각할 것을 알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나비에게도 희동은 한 줄기의 빛이 되었다. 이제 둘에게 대화는 필요 없다. 나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희동이 ‘듣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우리’는 듣지 못 한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둘을 보는 ‘우리들’의 시선 또한 끝나는 것은 당연하다. 둘의 대화는 이미 완벽하니까, 끼어들 자리란 있을 수 없다.

 

많은 독자들에게 이 작품의 서사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그래야한다. 그게 작가의 의도였을 테니까. 나 같아도 그렇게 썼을 것이다. 따라서 스토리에 관한 이야기는 최대한 접어두었다. 억지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 또한 예의가 아니다. 이것은 희동과 나비의 이야기이지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이해하려 할수록 오해로 가득 차게 된다. 설령 (애초에 불가능 하겠지만)엘리베이터의 문을 비집고 들어가 둘을 관찰하고 마음껏 오해한다고 해도 둘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이다. 그들의 관계에서 타자는 이제 완벽한 이방인이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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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월 13 일 전

노송휘님이 링크한 웹툰을 보고, 글틴 회원 여러분께서 이 글에 댓글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4 개월 1 일 전
노송휘 님이 쓴 글의 앞부분은 매력적입니다. 언어를 매개로 할 수밖에 없는, 사랑의 ‘이해-오해’에 대한 견해는 독자로 하여금 이 글을 끝까지 읽어보고 싶게 만듭니다. 노송휘 님 덕분에 저도 이 웹툰을 보게 되었는데요. (사실 저에게는 이 작품의 내용보다는 그림체가 훨씬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말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다면 어떨까.”라는 노송휘 님의 물음에 이 작품이 많은 답을 해줄 수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노송휘 님이 지적하고 있는 대로, 희동은 나비가 말하고 싶은 것(실제로 발화되지는 않지만 내면에서 이미 언어화 된 목소리-'6화'에 나오지요)을 듣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노송휘 님이 이 작품에 대해 쓴 평은 뛰어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서두에서 제시한 문제를 세련된 방식으로 풀어나가는… Read m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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