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국민으로서 -일산 대진고 사건을 통해 본 학생의 정치참여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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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국민으로서

-일산 대진고 사건을 통해 본 학생의 정치참여에 대해-

*한글파일 형식상 각주는 괄호 안으로 옮겼습니다.

 

  지금, 시국선언을 하고 대자보를 붙이는 순간

주권자가 일어섰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비정상적인 국정 상태를 바로잡기 위해서다. 국정농단에 대한 분노와 나라를 다시 새롭게 건설하려는 열망으로 타오른 국민들의 촛불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을 환히 밝히고 있다. 그런데 나는 최근에 충격적인 기사 하나를 접했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박근혜 게이트와 관련한 시국선언을 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내리려 한 것이다. 더군다나 시국선언을 나서기도 전 학생들이 동급생들에게 받은 서명용지들을 빼앗아 파쇄 하였다. 학교 측은 미리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시국선언도 집시법에 저촉되는지에 대하서는 논란이 있다. 한 네티즌은 헌법 제 21조의 사항들을 예로 들며 행인들에게 불편을 주거나 교통에 불편을 주는 경우에만 집회를 신고하도록 되어있으며, 또한 시국선언은 집회가 아니기 때문에 신고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시국선언과 집회의 성격에 관해 논의가 필요하다. 더불어민주당 유은혜 의원에 따르면 학교 측에서 별도의 징계를 내리지 않겠다는 답변을 내놓았다고 한다)둘러댔다. 그러나 해당 학생 인터뷰와 교사의 발언 녹취록 등을 근거로 할 때, 학교의 대응은 단순히 집회를 미리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내린 훈계가 아니라 학생의 정치참여 자체를 탄압하고 징계를 내리려는 겁박에 가까웠다. 해당학교 일부 재학생들은 ‘학교의 이름을 내건 행위’인만큼 미리 교사들에게 알렸어야 했다고 학교를 두둔하기도 한다.

 

*관련기사: http://www.huffingtonpost.kr/2016/11/09/story_n_12873286.html

 

하지만 시국선언을 한다는 사실을 학교에 미리 알려 교사들과 상의를 하지 않았기에 징계를 한다는 것은 그저 둘러대기식 변명에 불과하다. 그 학생들이 미리 알렸다면 선생님과 학교가 하라고 내버려두었겠는가? 당연히 못하게 막았을 것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사태 때도 이와 같은 일이 전국의 일부 학교에서 이미 일어난 바 있고, 따라서 해당 학생들은 시국선언을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몰래 해야겠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애초에 '상의'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학교의 이름을 건 행위’는 조심스러워야 한다. 자칫하면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학생과 선생님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시국선언이 앞서 말한 ‘명예실추’와 ‘피해’에 해당되는가? 그렇지 않다. 그런 점에서 나는 학생들의 시국선언이 학교의 이름을 건 행위가 합당하다고 본다.

 

일산 대진고는 우리 집 바로 앞에 있는 곳이다. 중3때 1지망 고등학교로 쓴 곳이고, 아는 친구가 다니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점이 뭐가 중요하겠느냐마는, 다른 먼 지역의 학교에서 일어난 소식으로만 접하던 일이 바로 집 앞 고등학교에서 버젓이 일어났기에 상당히 충격적이다. 흔히 사용하는 ‘피부로 와닿았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게 맞겠다.

 

최순실 국정농단을 비롯한 박근혜 게이트가 현재진행형인 지금, 중고등 학생들의 역할과 그 가치는 더욱더 커지고 있다. ‘대구 여고생 발언’과 ‘중고생들의 시위’를 비롯한 수많은 학생들의 목소리와 대자보가 그 증거다. 나는 이러한 상황에서 일산 대진고에서 일어난 징계 사건은 명백히 학생-청소년의 참정권, 발언권, 표현의 자유권 등을 학교와 교사 기득권층이 제도와 권력을 통해 억압하려한 ‘인권침해’라고 규정하겠다.

 

 

  1. 학생의 참정권과 ‘미성숙함’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공화국이다. 헌법 제 21조에서는 모든 국민의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며, 헌법 제24조와 제25조 역시 국민의 정치적 기본권을 보장하고 있다. 국민이 주권을 가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참정권’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국민들은 참정권을 행사하여 대변인을 뽑고(대의민주주의), 그 대변인들이 올바르지 못한 길로 가고 있으면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국민’에는 선거권을 가지고 있는 만 19세 이상 성인뿐만 아니라 학생-청소년(미성년자) 역시 포함된다(세계적으로 선거권을 만 18세 이상으로 낮추는 추세이다. 최근에 국회에서도 이와 관련한 선거법 개정 법안이 발의되었다). 그러므로 학생 역시 참정권을 가지고 있는 똑같은 대한민국 국민이다. 앞서 말한 일산의 대진고 는 이러한 넓은 의미에서의 학생 참정권을 침해하였다. 학생들은 비록 학교에 소속되어 있지만, 학생 이전에 대한민국 국민이다. 고작 학교라는 조그만 단체의 ‘규칙’ 따위가 헌법이 보장한 권리를 억누를 수 없다. 그리고 ‘학생인권조례’의 존재를 잊어서는 안 된다.

 

김상곤 전 경기도 교육감은 전국 시도교육청 중 제일 먼저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였다. 이후 서울특별시와 인천시, 광주광역시, 전라북도 등이 잇따라 학생인권조례를 발표하였다(이 지역들을 제외하고 다른 지역은 아직 학생인권조례가 미비한 현실이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제 16조 제 1항은 ‘학생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 대하여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제 2항에선 ‘학교는 학생이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는 경우 부당하고 자의적인 간섭이나 제한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라고 규정한다(더불어민주당 유은혜 의원 블로그 ‘대진고 사건’ 관련 게시물 참조). 일산 대진고는 이 역시 위반했다. ‘부당하고 자의적인 간섭이나 제한’을 했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일산 대진고는 대한민국 국민의 기본권 중 하나인 참정권과 대한민국 학생-청소년이 가진 권리 중 하나인 의사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였다. 비단 이 학교뿐만이 아니다. 대구의 한 학교에서도 박근혜게이트와 관련하여 교내에 게시된 대자보를 게시한 학생의 허락도 없이 즉각 훼손하고 없애버렸다. 해당 학교 교장은 “학생들은 아직 미성숙하기 때문”이라고 철거 이유를 설명했다. 대진고 사건에서도 학교 측 해명 중에 그와 비슷한 내용이 있었다. 여기서 ‘학생’의 ‘미성숙함’이란 대체 뭘 의미하는 것인지 짚고 넘어가야 한다. 간단하게 말해 이 말은 기존 기성세대의 편견에 뿌리를 둔 ‘청소년혐오’적 표현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미 법과 조례로 보장된 학생의 참정권과 의사표현의 자유권을 ‘미성숙함’이라는 그럴 듯한 단어 하나로 일체 부정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네이버 사전에 따르면 미성숙함의 정의는 ‘아직 성숙하지 못함’이다. ‘성숙함’의 의미는 세 가지로 정의된다. 첫 번째로 ‘생물의 발육이 완전히 이루어졌음’, 두 번째로 ‘몸과 마음이 자라서 어른스럽게 됨’, 세 번째로 ‘경험이나 습관을 쌓아 익숙해짐’이라는 뜻이다. 어디를 찾아봐도 ‘만 19세 이상 성인’ 같은 나이를 기준으로 삼고 있지 않다. 물론 그와 비슷한 ‘생물의 발육의 완전함’이라는 의미가 있으나 그것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의미가 이 단어의 본질적 뜻임을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이뤄졌던 학생의 참정권 탄압 사례들을 돌이켜보라. 학교에서 말하는 성숙함이란 나이와 신분만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아직 학생 주제에’, ‘미성년자가 어른들 일에 뭘 나서느냐’, ‘학생은 학생의 위치에서 학생의 본분이나 다 하라’. 이것이 학교(와 기성세대)가 학생들에게 말하는 성숙함이다. ‘성숙하다’라는 단어의 본래 의미를 완전히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더 깊게 내려가 본다면 이러한 현실은 ‘청소년’이라는 약자에게 가진 편견과 기성세대가 생물학적 성인으로서 갖는 위계적 권력이 만연한 상황에서 생긴 ‘청소년혐오’의 한 양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의 관점에서 앞선 사례들을 다시 살펴보겠다. 우선 해당 고등학교는 시국을 이 지경으로까지 몰고 온 기성세대로서의 책임을 외면하였다. 이어 시국선언이라는 필연적이고 합당한 행위를 탄압한 학교는 정신적으로 미성숙하기 때문인 것이 틀림없다. 반면 학생들의 시국선언은 현 상황에 부합하며 또 필요한, 국민으로서 당연한 정치적 행위이다. 정신적으로 성숙한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누가 성숙하고 누가 미성숙한가? 성인이라고 다 성숙한 것이 아니며, 학생이라고 다 미성숙한 것이 아니다. 만약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말 나이와 신분만으로 성숙한지 여부가 결정된다면, 애초에 이 지경까지 우리나라가 파탄으로 내몰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사회가 지금까지 얼마나 성숙함의 의미를 왜곡했는지를, 또 청소년혐오를 무기삼아 성숙한 국민들의 참정권을 억압해왔는지를 깨닫고 반성해야한다(김진태 의원은 최근 국정감사 때, 11월 5일에 있었던 중고생들의 집회를 종북으로 몰아붙이며 종북주의 교사의 사주를 받은 것이 틀림없다면서 이적단체성을 조사하라고 법무부 장관에게 말하였다. 본 글의 논지에서 약간 벗어난 내용이지만 마찬가지로 청소년혐오를 바탕으로 한 기성세대의 청소년 정치참여 탄압의 사례이기 때문에 일러둔다).

 

 

  1. 역사엔 언제나 학생이 존재했고, 존재하며 존재할 것이다

역사를 써온 것은 영웅이나 유명 정치가, 예술인, 사업가들이 아니다. 역사의 중심은 항상 학생-청소년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유명 정치가들도 청소년 때부터 정치참여를 해오면서 의식을 발전시켜 갔다. 반면 현재 우리나라 사회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청소년’과 ‘정치’를 마치 서로 마주하면 안 되는 상극인 물질마냥 여기고 있다. 대자보를 붙이거나 시위를 하고, 집회와 시국선언을 하면 쉬쉬해왔고 어쩌면 술담배나 학교폭력보다 더 금기시 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청소년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도 존재할 수 없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곧 그 나라의 미래이고 발전을 지속해나갈 주역이기 때문이다. 주역을 무시하는 사회는 기득권과 과거의 망령에 얽매여 퇴보를 거듭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이미 우리나라는 퇴보 중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대표적인 학생의 정치참여 사례는 1929년에 있었던 ‘광주학생항일운동’을 꼽을 수 있다. 발단은 일본인 학생이 기차에서 한국인 여학생을 성희롱한 일이다. 그에 대한 한국인 학생들의 반발이 생겼고 학교간의 패싸움으로 이어졌다. 그 뒤 광주에서 고등학생들의 가두시위가 전개되었고,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일본 제국주의 타도’, ‘무산계급 혁명’, ‘민족해방’ 등을 내세운 대규모 시위로 확산되었다. 이 운동은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3.1운동이나 6.10만세운동과 같이 일부만 참여한 게 아니라 ‘조직적’으로 대중운동을 주도해나갔다는 사실에 의의가 있다. 광복을 거쳐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학생들의 정치참여는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1987년의 6월 민주항쟁과 1960년 4.19혁명에서 학생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에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산발적인 시위를 진행해나갔다. 1960년 3.15부정선거를 앞두고는 야당의 유세현장에 가지 못하도록 정부가 일요일에 등교조치를 취한 데 대한 저항으로 2월 28일,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또한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부독재 시절에도 학생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 시절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주소영 학생의 일기장은 당시 정권의 살인적 독재와 탄압을 비판하고 민주화를 염원하는 내용으로 빼곡하다(용용군, ‘광주여행, 오월의 광주 (3)5.18 민주화운동기록관’, 네이버 블로그, 2016.06.07). 이처럼 대한민국의 독립과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데 있어 학생들은 지속적으로 저항과 개혁을 주도해왔다. 그들의 정치참여는 지금의 대한민국을 세우는 디딤돌로 자리 잡았다. 그만큼 학생-청소년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불행하게도 지금 우리 사회와 사람들은 이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는 것 같다.

 

세계적으로도 청소년들의 정치참여는 활발하다. 올해 프랑스에서는 정부의 노동법 개혁에 반대하는 시위가 격화되며 진행 중이다. 대학생, 근로자 등뿐만이 아니라 100곳이 넘는 고등학교가 휴교를 하면서까지 고등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프랑스는 시민들이 이끈 여러 혁명을 통해 입헌군주제, 공화정, 전제정치 등 많은 정치적 변혁을 겪으며 민주주의 제도를 일찍이 성립해나갔다. 그런 역사 배경 때문인지, 프랑스는 고등학생을 포함한 다양한 계층의 정치참여가 활발하다. 우리나라에서도 박근혜 정부가 노동법 개혁을 시도했고, 이는 노동자들의 반발과 ‘쉬운 해고’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은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지조차 의문일 정도였다. 2014년부터 이어져오고 있는 홍콩의 민주화 시위도 눈 여겨봐야 한다. 홍콩은 중국정부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을 주장하고 있다. 역시 고등학생들부터 대학생까지 젊은 계층이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판국이다. 시위의 배경이나 전개과정은 다를 지라도,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광주학생항일운동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네이버 검색, 블로그 참조).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현재 우리사회가 거꾸로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구의 피와 땀으로 세운 나라인지 알면서, 정작 학교를 비롯한 기성세대들은 그 역할과 가치를 무시하고 억누른다. 과거에도 학생-청소년들의 정치참여를 막으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있었다. 위계와 권력이 있는 곳이면 항상 비판과 저항이 있고, 반대로 그것을 탄압하고 짓밟으려는 기득권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기득권은 적을 만들거나 논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적극적으로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그것이 지속되면 방관과 침묵, 외면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그들은 젊은 학생들의 비판과 정치참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세계는 지금까지 학생들이 정치참여를 하며 목소리를 냈기 때문에 조금 더 나아진 것이다. 고작 학생들이 참여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 회의적인 사람들도 많다. 즉각적으로 새롭고 거대한 변화가 현실에서 일어나기는 힘들다. 하지만 중요한 건 조금이라도 ‘나아진다는’ 점이다. 그 나아짐이 계속 되다보면 언젠가는 이상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1. ‘우리 학교’는 학생의 참정권을 보장하고 있을까.

과연 우리가 다니는 학교는 우리의 참정권을 보장하고 있는가? 학생인권조례를 두고 있는 지역은 몇 개 되지 않는다. 경기도, 인천, 서울, 전라북도, 광주 등 다섯 곳의 교육청에 불과하다. 아직도 전국적으로 규정상으로나마 학생의 참정권을 보장해주는 곳이 얼마 없다는 의미다. 교육부가 전국적으로 시행령을 공포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미미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몇몇 지역에서는 학생들 스스로 인권조례를 제정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였으나 해당 학교 교칙에 의해 징계를 받았다고 한다(나무위키 참조). 그렇다면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어있는 지역의 학교들은 어떨까. 나는 제일 먼저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한 경기도 고양시의 일산에 있는 한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다.

 

2014년부터 3년째 학교를 다니면서 우리 학교에 대자보가 나붙거나 시위, 집회 등이 열린 것을 본 적은 없다. 혹시 시도를 했는데 취소되거나 은폐되어서 모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상당히 ‘고요’한 편이었다. 학교 교지를 통해서 소극적으로 참여할 수는 있었다. 나는 3년째 교지편집부에 몸을 담고 있는 덕분에 교지를 통해 역사교과서 국정화나 한일위안부합의에 관한 비판적인 글을 쓸 수 있었다. 미약하게나마 정치참여를 했다고 생각한다(사실 그것도 쓰면서 혹시 학교나 담당선생님이 뭐라고 하지는 않을까 내심 마음 졸였던 것도 사실이다. 학교가 나름 진보적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데도). 그러나 내가 쓴 글의 주제가 갖는 심각성에는 한참 모자라고 거리가 있는 행동이다. 나 역시 후회되는 것도 반성해야 할 것도 많다. 어쩌면 지금까지 성장해오면서 세뇌 받은 기성세대의 편견과 청소년혐오가 무의식적으로 자리 잡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자리 잡았을 것이다. ‘고등학생인 주제에’ 나서는 것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 주변에서 받을 따가운 시선. 작년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시위 때에도 또래 고등학생들의 목소리를 신문으로 접하면서 ‘그래도 학생인데 무슨’, 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동급생들의 서명을 받거나 피켓을 제작하는 등의 행동은 머릿속으로만 그려보았을 뿐 행동으로 옮긴 적은 없다. 나 같은 생각을 가진 학생들이 아마 대부분일 것이다(아니라면 정말 다행이다). 그래서 우리 학교에서는 여태껏 그런 대자보나 시위 등을 보지 못했던 것이리라.

 

이와 같이 비교적 소극적인 정치참여 매체인 학교교지조차 학생들의 정치참여를 위한 통로가 되기가 쉽지 않다. 이것이 현재 우리학교 학생들이 처한 정치참여 현실이다(내가 모르는 우리학교 학생들의 정치참여 측면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 점이 한계임을 밝힌다). 제 3 매체(교지)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지금 시점에선 우리 학교가 학생의 참정권을 완전히 보장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기는 어렵다. 앞으로 대자보나 시위 등으로 정치참여의 단계가 발전하게 되면 그때 확실히 드러나게 되리라 생각한다.

 

당신의 학교는 어떠한가. 당신의 학교는 어느 단계에 머물고 있고 어떠한 상황인가? 그것에 대해 우리는 성찰해보아야 한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곳이 우리의 권리를 빼앗고 탄압하고 있지 않은지, 우리가 스스로 권리를 내던진 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 바로 오늘 이웃 학교에서, 저 멀리 섬에 있는 학교에서 대진고 사건과 같은 일들이 벌어지지 말란 법은 없다.

 

 

  1. 학생 정치참여권 보장과 의식 제고

학교는 학생의 정치참여에 대한 기본 권리를 절대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그것이 이 글의 제목이고 주제이자 내용이다.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이 원칙을 우리 사회의 대부분 학교는 지키지 않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한다. 학교 내에 대자보를 붙이고, 학생들에게 서명을 받고, 학교 내외에서 집회와 시위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우리가 갖고 있음을 모르는 학생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 행위를 하면 혼나거나 징계를 받는 것으로 아는, ‘위반행위’라는 인식도 적지 않다. 지금 학생은 학교의 주인이라는 주체의 위치가 아니라 객체의 위치에 놓여있는 셈이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학생의 참정권을 보장해줄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본다.

 

첫째, 학교는 학생에게 학생이 가질 수 있는 기본 권리들(참정권을 포함한)을 규정하고 이른바 ‘00고교 학생 권리장전’을 공포하여야 한다. 나조차도 지금 우리 학교에서 학생으로서 내가 가지는 권리가 무엇인지 뚜렷이 알지 못한다. 그저 수업권, 동아리 조직의 자유? 그런 것밖에 모른다. 우리들은 학생으로서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금칙행위들만 알고 있을 따름이다. 학생이 어떠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명확한 규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규정을 학생들이 인식할 수 있게끔 교훈이나 급훈처럼 각 반, 복도에 게재하여야 한다. 규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참정권을 비롯해 그동안 소외되어 왔던 학생 인권이 특히 주요 내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집회 및 시위 신고제이다. 교내에서 집회 및 시위를 할 경우 담당교사에게 신고를 하여 날짜와 시간, 활동 등을 보고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다른 학생들의 활동과 겹치지 않도록 하고, 집회 및 시위를 교내에 알려 다른 학생들도 참여할 수 있게끔 학교 측에서 격려하도록 하는 것이다. 현재 학교 밖에서 일반 시민들이 집회 및 시위를 할 경우 경찰에 집회 신고를 하여야 한다(시국선언도 해당되는지 논란이 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이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기에 학교 측에서 도움을 주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절차는 학교 측에서 학생의 참정권을 절대적으로 보장하는 전제 하에 학생과 교사 간의 신뢰가 구축되어 있는 상황에서만 가능하다. 자칫하면 ‘검열’로 악용될 수 있으니 말이다. 지금 상황에서 이렇게 써놓고 보니 실현이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럼에도 충분히 시도될 가능성이 있으며, 이와 같은 절차적 문제 역시 고려해야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학생 스스로의 의식 개선도 절실하다. 학생이기 이전에 대한민국 국민이기 때문이다. 명백히 잘못된 점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고 남의 일, 어른들의 일이라고 미뤄둔다면 그 대가는 후에 고스란히 돌아오기 마련이다. 당장 집회에 참가하고 시위행진을 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먼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조그맣고 소극적인 참여부터 하는 거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적극적인 참여로 발전하여 ‘내가 사는 곳은 내가 바꾸는’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아니면 가족이나 친구, 지인을 따라 가는 것도 좋다. 다만 그때 주의해야 할 것은 반드시 ‘고민’을 해봐야 한다는 점이다. 그 집회가 어떤 것을 목적으로 하는지 사실 파악을 하고, 그럼으로써 나와 사회에 이익이 되는지, 필요한 것인지 등등의 최소한의 고민을 거쳐야 한다. 그런 최소한의 고민과 사실 파악조차 하지 않고 무작정 주변 사람들을 따라 움직이는 순간, 바로 ‘SNS 정치꾼’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1. 정치적, 사회적 잠에서 깨어나야

스스로를 성숙한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누구나 알고 있는 당대의 유명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평생 동안 내가 확실히 안 것은 한 가지밖에 없다. 그건 나는 진리를 모른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했다(안광복,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 웅진 지식하우스, 2007). 그처럼 성숙함이란 끊임없이 계발해나가야 하는 자기 삶의 숙제와도 같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노인이 되도록 여전히 미성숙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어린 학생인데도 이미 성숙한 어른일 수 있다. 나이와 경험은 성숙함의 지엽적인 요건에 불과할 뿐, 주요 요건이 될 수 없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그 많은 ‘성숙한’ 어른들이 만든 이 사회는 왜 성숙하지 않은가?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성숙함이란 옳지 않은 일을 옳지 않다고 말하고 바꾸어 나가려는 노력을 할 수 있음, 이다. 이번 일산 대진고 사건은 다시 한 번 대한민국 사회의 미숙한 ‘학생-청소년 정치참여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제 우리 학생들은 정치적, 사회적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목소리를 낼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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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개월 25 일 전
안녕하세요, 써주신 글 잘 보았습니다. 좋은 글입니다. 작금의 사태에 학생의 정치참여가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글이 글틴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저는 이런 점에는 좀 의문이 갑니다. 일단 학생이 항상 역사의 중심이였단 점에는 의구심이 갑니다. 민중이 역사를 바꾼 사례는 과거 진나라의 진승·오광의 난 이래로 각종 민중 봉기들, 프랑스 혁명, 동학 농민운동, 신해혁명, 러시아 혁명 등등 사례가 무수히 많았습니다. 다만 저는 학생들이 중심이 되기 시작한 일은 좀 나중의 일, 즉 근대적인 교육시스템이 발전하기 시작한 때부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건 좀 시덥잖은 트집잡기 일수도 있지만 중간에 나무위키를 인용하신 부분은 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나무위키 자체적으로도 신빙성이 떨어진다하며 이러한 행위는 교차검증이 불가한 신문고적… Read more »
8 개월 18 일 전
아그책 님 반갑습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부당한 사태에 대한 비판적 개입이 인상적인 글이었습니다. 아그책 님 자신이 청소년이기에, 청소년의 정치 참여를 부정하는 학교의 처사에 특히 분노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 글을 읽으면 아그책 님이 느꼈던 문제의식이 생생하게 전해져옵니다. 저 또한 시국선언을 했다는 이유로 학교 측이 학생들에게 징계를 내리려고 했다는 보도를 접하고 황당했습니다. 아그책 님의 언급대로, 저는 학생들이 정치적 주체로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표출하고 행동할 권리를 마땅히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그책 님은 이 글을 열심히 쓴 것 같습니다. 우선 문제제기부터 해결책까지 제시하는 논리적 흐름이 일관됩니다. 그것을 서술하는 문장도 비문 없이 안정적이고요. 다만 몇 가지 검토해볼 부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청소년혐오’라는 규정에 대하여 :… Read m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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