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정하는 동물, 규정당하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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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정하는 동물, 규정당하는 인간

<3인칭> 꼬마비

 

인간을 ‘규정하는 동물’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끝없이 무언가를 규정하고 정립하고자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이다. 권종원의 말처럼 이미 규정된 무언가와 “다른 것은 틀린 것”이다. 그리고 ‘틀린 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 두려운 것이 된다. 1) 미지(未知)를 두려워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수렵시절을 살던 우리의 오랜 조상들은 두려워함으로서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우리의 유전자에는 이미 미지, 그러니까 ‘아직 규정되지 않은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감각이 깊게 새겨져 있는 것이다. 2) 언제든지 ‘옳은 것’과 ‘틀린 것’의 위치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규정되지 않는 무언가’(틀린 것)가 규정되는 순간 앞서 ‘규정된 무언가’(옳은 것)는 새로운 규정을 거치거나 폐기된다. 그 순간 ‘틀린 것’은 ‘옳은 것’이 되고 ‘옳은 것’은 ‘틀린 것’이 된다. 물론 둘 모두 ‘옳은 것’이 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새로운 규정의 단계를 거치며 이전에 있던 표준은 위협을 느끼고 실제로도 상처 입는다. 부분적으로나마 폐기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옳은 것’이 될 순 없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를 ‘옳은 것’으로 규정하는 순간 ‘틀린 것’이 될 가능성으로 내던져진다. 불안한 인간은 예민하다. 인간이 그토록 ‘다른 것’을 배척하려드는 이유이다.

 

이런 모습을 가장 많이 보이는 사람은 당연 권종원이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굳게 믿고 있는 인물이다. 일본의 공항에서 (날 리가 없는)간장 냄새를 맡으며 인천공항에선 (마찬가지로 날 리가 없는)김치냄새가 나는 것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의 그런 모습들은 노조기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가장 먼저 노조기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그렇다. 그는 타인에게 설명하듯 자신과 노조기의 관계를 말하는데, 학창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한다는 말을 서두로 한다. 그는 둘의 과거를 설명하며 “그런 일이 일상다반사”인 “시절”이라거나 “암묵적인 룰” 같은 단어들을 사용해 의도적이든 아니든 자신은 규정된 사회의 안쪽에, 노조기는 바깥쪽에 둔다. 그리곤 “그나저나 너도 참, 고딩 때도 그러더니 지금도 여전하네.” 말하는 식으로 노조기를 공격하지만 도리어 돌아오는 “너야말로 여전하다.”는 노조기의 말에 불편함을 느낀다. 끝에 가서 스스로에게 ‘김치냄새’를 맡지만 그건 자기반성이나 자아성찰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잘 숨겨둔 김치봉투에 구멍이 나 냄새를 들키고 말았다는 부끄러움과, 봉투에 구멍이 난 상황에 대한 분함이 아닐까. 그마저도 타국인 일본이 아니었다면 맡을 수 없는 냄새였을 것이다. 그러나 노조기가 규정하지 않는 인물이라던가, 표준을 전복시키는 인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노조기는 다수에 포함된 소수, 혹은 이미 규정된 소수다. 스스로를 전혀 의심하지 않고도 자신이 ‘옳음’을 믿을 수 있는 위치이다. 본질적으론 권종원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표준에 의심이 들도록 상황을 전개시키는 인물은 누구인가. 바로 나카지마 후미히메와 수정(수진)이다. 후미히메는 베트남과 일본, 한국의 피가 섞인 혼혈이고 수정은 흔히 말하는 ‘업소여성’이다. 이들은 규정되어 사회에 속하는 대신 사회로부터 대상화된다. 하지만 그런 지점에서 “우리도 입으로 밥 먹어요.”라는 수정의 말은 힘을 갖는다. 모든 규정과 대상화 이전에 인간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수정의 이 말은 울림이 있다. 이 울림에 이끌려 노조기는 스스로를 바꾸려고, 후미히메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말은 노조기-후미히메 관계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노조기의 “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녀가 AV배우라는 걸 나중에 알아서.” 이 말에 ‘(성적)대상화는 나쁘고 (피해자로)규정하는 건 괜찮은가?’하고 직접 묻는 것이다. 만약 노조기가 ‘몰카’라고 착각하지 않았다면, 그가 후미히메를 우연히 본 것이 AV가 아닌 증명사진이었다면 그는 후미히메를 위해 일본까지 왔을까? 이런 한계 속에서 노조기-후미히메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그 한계를 극복한 것이 노조기-수정의 관계일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수정이 규정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오타쿠들을 하나의 개체처럼 다루며 그들을 구경한다.

 

하지만 사실 이야기 속에서 누군가를 규정할만한 힘을 가진 인물은 없다. 처음에 말했듯 인간을 ‘규정하는 동물’이라고 부른다면 개인은 ‘규정당하는 인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개인은 스스로를 규정할 힘조차 갖지 못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개인의 규정이 힘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규정하는 건 사회다. 바로 3인칭 시점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 독자들이다. 작가는 극중에서 서술자를 적절히 바꾸며 그 사실을 상기시킨다. 권종원이 서술을 맡아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동안은 ‘다른 성별에 대한 존중과 이해가 부족한 인물이 등장’한다는 경고문이 가리키는 인물이 노조기라고 독자들은 착각했다. 그러나 권종원의 서술이 끝나는 순간 실은 권종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앞서 권종원이 노조기를 규정했던 말들은 힘을 잃게 된다. 독자가 생각(규정)하는 표준과 권종원은 다르(다고 믿)기 때문이다. 불안한 인간의 불안한 믿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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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월 18 일 전
노랑님의 「규정하는 동물, 규정당하는 인간」은 꼬마비의 웹툰 '3인칭'을 감상&비평한 글입니다. 우선 이 글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미리 당부하고 싶은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작가가 밝히고 있는 대로 '3인칭' 은 “만18세 이상 이용 가능한 성인용 컨텐츠”라는 것입니다. ‘글틴’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운영되는 사이트임을 염두에 두시면 좋겠습니다. 미성년자가 이용할 수 없는 작품에 대해서는 감상&비평 게시판 활용을 자제할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어쨌든 이 글에 한에서는 게시판 관리자로서 코멘트를 하겠습니다. 노랑님은 한 편의 비평을 완성할 수 있는 글쓰기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규정성’이라는 키워드로 이 웹툰을 일관되게 해석한 솜씨는 일품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웹툰에 대해 궁금증이 드는 것은 이런 부분입니다. "이 웹툰의 그림체는 왜 이분화되어 있는가?… Read m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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