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밑의 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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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마지막 겨울. 운동장에 깔린 인공잔디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았다. 밟으면 사각 하고 소리가 날까. 그렇게 생각하며 한쪽 발을 내딛었지만 살짝 미끄러짐과 동시에 끽 하고 고무 마찰음이 들릴 뿐이었다.
삼백육십오 일 초록색인 인공잔디가 깔린 운동장. 그 주위를 빨간 우레탄 트랙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 주위를 이름 모를 침엽수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방과 후 유진이와 나는 운동장 청소를 했다. 눈까지 내리기 시작한 한겨울, 유진이는 벙어리장갑을 끼고 나왔었다. 하지만 청소하는 데 불편하다며 그 다음날부터는 평범한 털장갑을 끼고 나왔다. 나는 늘 맨손이었다.
“이 나뭇잎. 그 뭐더라, 삼엽충처럼 생기지 않았어?”
나무 밑을 지나가며 청소를 하고 있을 때, 바닥에 떨어진 얇은 나뭇가지에 붙어있는 침엽수의 잎들을 보고 유진이가 말했다.
나는 그 나뭇잎을 들여다보았다. 내 기억속의 삼엽충은 징그럽게 생겼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징그럽다기보다 하나의 무리처럼 느껴졌다. 이 열 종대로 늘어선 무리.
“잘 모르겠어. 삼엽충은 오히려 번데기를 닮지 않았나?” 나는 말했다.
유진이도 그 나뭇잎을 들여다보았다. 뭔가를 열심히 생각하는 듯이 보였다.
“음, 생각해보면 그럴지도.”
유진이는 그 나뭇잎 무리를 하나 주워들고는 흙과 먼지를 털어내려는지 후 하고 바람을 불었다. 맥없이 떨어져나가는 나뭇잎 무리를 보며 아, 하고 작게 짧은 외마디 소리를 내더니 새로 하나를 주워들어 살짝 흔들어서 먼지를 털어낸 후 코트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그 사이에 끼워 넣었다. 내가 어디에 쓸 거냐고 물어보자 책상유리 밑에 넣어둘 거라고 답했다. 네잎클로버도 아니고 이런 낙엽에 무슨 의미가 있기에 그러나 싶었다. 오히려 코팅을 해서 책갈피로 쓸 것이라고 하면 나름대로 납득했을 것이다. 그런데 책상유리 밑에 넣어둘 거라니. 여태까지 봐왔지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난 그것의 의미를 그녀가 떠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그것도 단순히 추측에 지나지 않지만.
청소를 마친 우리는 청소도구를 조회대 밑 창고에 넣어두고 열쇠로 문을 잠갔다. 늘 드는 생각이지만 열쇠로 잠금장치를 풀거나 잠글 때, 딸깍 또는 달칵 혹은 덜컥거리는 느낌은 기분 좋았다. 저 세 가지는 비슷한 것 같지만 엄연히 다르다. 그 사실을 친구들에게 호소했지만 다들 웃기만 할 뿐이었다. 배를 움켜잡으며 웃은 녀석도 있었던가.
우리는 뒷정리를 마치고 열쇠를 선생님께 드린 후에야 하굣길에 올랐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나는 휴대전화로 SNS를 확인했다. 늘 비슷한 내용이 올라오는 SNS지만 이상하게 질리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반면에 유진이는 문고판 책을 읽고 있었다. 나도 얼마 전까지는 책을 읽었었다. 아니. 우리 반 모두가 책을 읽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순전히 유행과 분위기 탓이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며 너도 나도 책을 읽었었다. 하지만 다들 금방 질려 얼마 안 되어 반은 평소처럼 돌아왔다. 수다를 떨거나, 또는 장난을 치거나, 혹은 쪽잠을 잤다. 하지만 원래 책을 좋아하고 곧잘 읽던 유진이는 계속 책을 읽었다. 유진이의 가방 안엔 책이 두 권 이상은 들어있었고, 주머니에는 항상 똑같은 문고판 책이 한 권 있었다.
신호가 바뀔 무렵, 유진이는 책에서 눈을 떼고 살짝 고개를 들더니 반가운 사람을 만난 것처럼 웃으며 어딘가로 달려갔다. 나는 유진이가 어디로 가는지 대충 짐작을 하며 그녀를 따라갔다. 유진이는 곧 쭈그리고 앉더니 뭔가를 주웠다. 너무 타올랐는지 갈색으로 그을은 단풍잎이었다. 나는 유진이의 손을 붙잡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유진이를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에서였다. 그때도 유진이는 낙엽을 모았다. 놀다가도 형태가 온전한 낙엽을 발견하면 그쪽으로 달려가는 유진이가 처음엔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매년 가을과 초겨울마다 그러는 모습을 봐오니 어느새 익숙해졌다. 오히려 나까지 같이 달려 나가 낙엽을 주웠다. 처음 유진이 옆에서 같이 낙엽을 주웠을 때, 유진이는 날 경계하는 듯 했다.
유진이의 집에 처음 놀러갔을 때, 유진이의 방에 놓인 책상은 갈색이었다. 그 책상은 나무로 만들어진 것도, 갈색 페인트가 칠해진 것도 아니었다. 책상 옆면과 부속품으로 있는 책장은 흰색이었으니까. 책상유리 밑이 온통 갈색 낙엽으로 빈틈없이 메워진 것이었다. 낙엽이 책상유리 밑을 점령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나라면 어안이 벙벙했을 테지만 초등학생인 나는 마냥 신기해했다.
“내 보물이야!”
유진이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멋지다고 칭찬했다.
책상유리 밑을 점령한 낙엽들은 단풍, 은행, 플라타너스 등, 내가 아는 것도 있었지만 난생 처음 보거나 이름을 모르는 것들도 있었다. 그 낙엽들은 모두 갈색이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머리카락이 희끗거리게 되고 이윽고 백발이 되는 것처럼.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고 있는 우리에게 유진이의 아버지가 과자와 주스를 가져다 주셨다. 나는 양손으로 컵을 잡고 홀짝홀짝 마셨다.
“저 낙엽들 좀 버리라고 해도 도저히 말을 듣지를 않는구나.”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낙엽을 바라보는 유진이의 아버지에게 나는 항의하듯이 말했다.
“왜냐면 유진이의 보물인 걸요!”
그 말을 들은 유진이의 아버지는 “그래, 유진이에게 보물이면 나한테도 보물이지” 라고 말하셨다.
그 뒤로도 우리는 낙엽을 주우러 다녔다. 하지만 본래 흥미가 없는 것은 금방 질리기 마련이다. 이전에는 낙엽을 주워놨다가 유진이를 만나면 새 낙엽을 주웠다며 자랑했지만 나 또한 낙엽 줍기에 금방 흥미를 잃어 그러지는 않게 되었다. 그래도 유진이와 함께라면 곧잘 낙엽을 주우러 나갔다. 낙엽을 주우러 간다는 생각보다 유진이와 놀러간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자 그마저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안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유진이와는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
나는 한 번도 유진이의 어머니를 뵌 적이 없었는데, 나 스스로 그 이야기가 오가지 않도록 조심했다. 결국 그것이 화제로 올라왔는데 다름 아닌 유진이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냈다.
“울 엄마, 내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어. 그래선지 사진을 보지 않으면 얼굴도 잘 기억 안 나더라. 그런데 그 사진마저 잃어버려서, 지금은 거의 기억도 안 나지만.”
처음으로 들은 유진이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고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비밀을 들은 듯했다. 괜스레 유진이에게 미안해져 눈물을 흘렸었다.
언젠가 유진이에게 낙엽을 줍는 이유를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유진이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음, 글쎄. 말하기 좀 그런데.”
유진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배시시 웃었다. 나도 캐물을 만큼 궁금한 건 아니어서 더 이상 묻진 않았다.
우리는 고등학교도 같은 곳으로 진학했다. 일반 사립 고등학교였다. 유진이는 여전히 낙엽을 주웠고, 나는 그것을 묵인하며 지냈다.
“사 반에 허유진이란 애. 좀 이상하지 않아?”
일 년이 거의 끝나가는 십일 월 말, 같은 반 친구들과 수다를 떨던 중 A가 말했다.
주변이 “맞아. 어린애처럼 낙엽이나 줍고 다니던데.” “좀 바보 같아.” 라며 동의했다.
나는 분위기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유진이는 여전히 내 친구였고, 지금 같이 있는 학생들도 친구지만, 유진이와 그들은 친구가 아닌 것이다.
“그러고 보니까 너, 허유진하고 친하지 않아?” C가 내게 물었다.
나는 뭐라고 답할지 고민했다. 유진이는 내 친구가 맞지만 분위기상 그렇다고 밝히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결국 내 인생 가장 잔인하고 후회되는 선택을 했다.
“내가? 미쳤냐?”
부인하는 건, 물을 한 잔 마시는 것만큼 쉬웠다. 결국 나는 타협을 한 것이다. 어느새 전교생에게 유진이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따돌리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번에도 타인의 시선이 원인이었다. 나도 유진이와 거리를 두게 되었고 유진이보다는 다른 친구들과 지내는 시간이 더 늘었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도 유진이 쪽에서 다른 친구들 쪽으로 옮겨갔다. 그래서인지 유진이가 이상해졌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원래 유진이는 조신하고 온화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물이 얼음이 되듯 조신했던 성격은 소심하게 되었고 온화했던 성격은 여리게 되었다.
삼 학년이 되고 구 월 모의고사를 본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같이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크림색이었을 타일은 오래 되어 살구색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유진이가 반대편에서 달려오더니 우리를 스쳐지나갔다. 그때 처음 유진이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나는 왠지 물에 젖어 들러붙은 옷을 입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화장실에 간다고 둘러대고 유진이를 좇았다.
유진이는 계속 계단을 올랐다. 그러고는 옥상으로 오르는 계단을 올랐다. 그 계단은 철책으로 가로막혀 있었지만 높이가 낮아 마음만 먹으면 쉽게 넘을 수 있었다. 유진이도 그걸 넘으려 했다. 하지만 분명 옥상으로 나가는 문은 잠겨있을 것이다.
“유진아.” 나는 유진이를 불러 세웠다.
유진이는 철책을 넘으려던 것을 멈추고 나를 향해 돌아보았다.
“너, 네 반 애들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네가 적정 돼서 따라왔어.”
유진이의 미간이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더니 철책을 휙 넘어버리고는 계단을 올랐다. 나는 유진이를 좇아 철책을 넘고 계단을 올랐다.
“허유진. 왜 그래.”
유진이는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짧은 틈을 두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 눈 한 번 깜빡일 시간 동안이었지만 눈시울이 붉은 눈은 나를 노려보고 있었고 입은 힘을 주어 다물어져 있었다. 그리고 곧 얼굴은 풀어지고 슬픈 미소를 띠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유진이는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여기, 아무도 안 오거든. 그래서 가끔 슬플 때 혼자 와 있어.” 그렇게 말하고는 적갈색 창틀에 걸터앉았다.
나는 맞은편 벽에 기대었다. 한 손으로는 팔꿈치를, 나머지 한 손으로는 치맛자락을 매만졌다. 구 월의 벽은 시원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끈적거린다고나 할까. 벽의 온도가 낮은 것은 확실했다.
“이런 거,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 불현 듯 유진이가 말했다.
나는 유진이를 바라보았으나 머리카락에 가려져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뭐가 안 좋은 건데?”
“나한테 말 거는 거. 그거 하지 마.”
머리가 뜨거워 졌다. 기분이 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관지로 들어오고 나가는 공기가 온풍기에서 나오는 바람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처럼 더웠다. 그렇게 느껴졌다. 그 말, 무슨 뜻이냐고 묻자 명료하게 답이 돌아왔다.
“네가 불편해서.”
무언가를 검색하고 생기는 딜레이가 생긴 것처럼 멍하니 있었다. 유진이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말했다.
“오해하진 말아줘. 너만 불편하다는 게 아니야. 그냥 사람들이 불편해. 너도, 선생님도, 학생들도, 점원들도, 행인들도, 나도.”
나는 유진이가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나는 유진이와 한 번도 말을 섞지 않았다. 말을 섞을 일이 생긴다면 온갖 핑계를 대어 그 상황을 피해갔다. 결국 유진이와의 십 여 년의 인연은 이렇게 끊어지나 싶었다.
초, 중, 고등학교를 함께했던 우리는 결국 대학교에서 갈라지고 말았다. 유진이는 서울로 대학교를 갔고 나는 지방 국립대학교에 들어갔다.
어느덧 대학교 사 학년이 되었다. 일요일 저녁, 남자친구와 영화를 보고 길을 걸으며 아까 봤던 토끼인형의 성별에 대해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휴대전화가 울렸다. 유진이의 아버지였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었다. 딱히 유진이의 아버지가 나에게 연락할 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전화를 건 사람이 유진이가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여보세요.” 나는 전화를 받았다.
똑같이 여보세요라는 말이 들려왔다. 중년 남성의 목소리, 유진이의 아버지였다. 나는 습관적으로 잘 지내셨어요, 어쩐 일이세요, 라고 말했다. 유진이의 아버지는 대답을 피하고 대화를 열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대화는 생기를 잃어갔다. 누가 보더라고 억지로 대화를 이어나가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나는 최대한 빨리 전화를 끊고자 했다. 옆에 남자친구도 있고, 유진이의 아버지와 전화를 하는 게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진이의 아버지는 최대한 대화를 이어나가고자 애를 쓰셨다. 고등학생 때 유진이에게 들은 말이 있었다. 우리 아빠, 곤란한 이야기를 꺼낼 때 앞에 말을 많이 해, 라고.
“저, 무슨 일 있으세요?” 참다못한 나는 결국 그렇게 물었다.
둘 사이에 침묵이 끼어들었다. 이윽고 다시 입을 열어 두 마디를 내뱉듯이 말하셨다.
유진이가 죽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며 방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싶었다. 하지만 틀림없이 선명하고 정확한 발음으로 들렸다. 유진이가 죽었다고.
사인은 자살이라고 했다. 경찰도 그렇게 결론을 지었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렇다고. 하지만 유서 한 장 없었다고 한다.
어떻게 자살 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유진이의 아버지가 아무렇지 않을 것 같지도 않고, 나도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리 유쾌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건 아마 서로를 ―유진이의 아버지와 나, 둘 다 칼로 찌르는 행동일 것이다.
남자친구와는 나중에 다시 만나자고 하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머릿속이 태풍이 몰아닥친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검은 원피스로 갈아입고 귀고리와 목걸이도 풀었다. 남자친구도 같이 가겠다고 했지만 괜히 그에게 유진이의 죽음에 대한 설움을 풀어버릴 까봐 끝내 거절했다.
장례식장 입구에 서는 순간까지도 나는 유진이가 죽었다는 것이 실감되지 않았다. 빈소가 있는 삼 층 까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갔다. 사 층에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은 참 짧았다. 뭔가를 생각하기에는. 참회의 기도는 더더욱.
또각 거리는 구두 소리가 공허하게 흩어졌다. 사람이 거의 없어 들려오는 소리라곤 두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뿐이었다.
조문객은 거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만든데 있어 내가 한 몫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빈소에 들어가서 먼저 유진이의 아버지께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린 후, 흰 국화를 헌화하고 두 번 절을 했다. 그리고 한 걸음 물러서서 유진이의 아버지와 맞절을 했다.
장례식장에 계속 있으려니 내가 마치 교회 안에 숨어들어온 범죄자인 듯한 기분이 들어 서둘러 나가려고 했다. 막 나가려던 찰나에 뒤에서 유진이의 아버지가 불러 세웠다. 잠시 말동무가 되어달라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거절하기 어려웠다. 유진이와 닮은. 아니, 유진이가 닮은 그 아버지의 눈동자와 눈매는 나로 하여금 유진이가 떠오르게 했다. 유진이의 부모와 유진이의 친구였던 여자는 벽에 기대고 앉아 대화를 나눴다. 그냥 유진이의 아버지가 벽에 기대어 앉으시기에 나도 따라서 벽에 기대고 앉았다. 대화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유진이의 이야기가 오갔다.
“유진이가 그렇게 낙엽에 집착한 이유, 알고 있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옛날에 한 번 물은 적이 있었는데, 대답 안 해주더라고요. 저도 캐묻지는 않았지만.”
“난 대충 알 것 같다. 유진이가 엄마 없이 컸잖냐. 그러고 보니 유진이 엄마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준 게 단풍잎 책갈피였지. 너도 봤으려나 모르겠다. 그, 가운데에 단풍잎 모양 구멍이 난 책갈피. 그거 유진이 엄마가 직접 만들어서 유진이한테 준 거거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나는 그 책갈피를 본 적이 있었다. 유진이가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문고판 책에 끼워 사용하던 건데, 코팅한 단풍잎 가운데에 같은 모양으로 구멍이 나있었다. 신기하게도 처음 봤을 때부터 마지막으로 봤을 때까지 타오르는 듯한 붉은색을 유지했다.
“그래서 유진이가 낙엽에 집착하는 건가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은 좀 달라.” 그렇게 말하시고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쉬시더니 말을 이으셨다. “유진이 엄마는 유진이가 돌이 지난 해 가을부터 매년 낙엽구경을 하러 나들이를 갔었거든. 유진이 엄마가 죽은 해에도 갔었어, 제 몸을 무리해서라도. 그래서 낙엽은 마지막으로 생긴 제 엄마에 대한 기억이 아닐까 싶다.”
나는 아, 하고 소리가 나오려던 것을 간신히 삼켰다. 그리고 마치 멀리서 날아온 무언가에 머리를 세게 부딪힌 것처럼 정신이 얼얼했다. 유진이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한 적은 있어도 왜 그러는지는 생각해본 적은 있던가. 아마 없었을 것이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느냐 정작 봐야할 걸 보지 못한 것이다. 나에겐 부끄럽기만 했던 행동이 유진이에겐 어머니와의 추억 중 하나였던 것이었다. 나는 콧등이 시큰해 지는 것을 느꼈다.
“아저씨. 사실은….”
유진이의 아버지는 손을 들어 내 말을 막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상자를 하나 가지고 돌아오셨다. 그리고 그걸 내게 건네며 말하셨다.
“이거, 유진이의 유품인데. 버리는 것보다 너한테 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받아줬으면 좋겠다.”
나는 상자를 받아들고 한참을 망설였다.
“유진이한테 너는 마지막까지 친구였잖냐. 받아줘.”
‘너는 마지막까지 유진이의 친구였다’ 가 아니라 ‘유진이한테 너는 마지막까지 친구였다’ 라고 하신 게 마음에 걸렸다. 순전히 우연일 수도 있지만. 결국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손거울, 장신구, 안경 따위가 있었다. 맨 밑바닥을 들춰보니 작은 일기장이 두 권 있었다. 한 권은 어디선가 본 듯 익숙한 기분이 들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유진이가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문고판 책이었다. 아니, 여태까지 문고판 책이라 생각해온 것이 사실은 누군가의 일기장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일기장을 꺼내 첫 페이지를 열었다. 그곳엔 짧은 문구가 하나 적혀 있었다.
태양 같은 정열
냇물 같은 끈기
앞으로 앞으로
나는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어느 페이지에 책갈피가 끼워져 있었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색을 띤 단풍잎 책갈피. 유진이의 책갈피였다.
나는 처음부터 일기장을 천천히 읽어갔다. 일기는 유진이의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유진이의 어머니의 것이리라.
아저씨, 유진이에게 유진이의 어머니의 마지막 기억은 아마 이 일기장이 아닐까요.
그 말은 속 안에 고이 감춰두었다.
나머지 한 권도 일기장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유진이의 어머니의 것이 아닌 허유진 본인의 것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그 일기장을 펼쳤다.
그 일기장 첫 페이지에도 같은 필체로 아까와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내용은 처음엔 마른 낙엽처럼 건조할 뿐이었지만 한 사람이 등장하면서 색채를 띄어갔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내 안에서 뭔가가 응어리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눈물이 되어 눈에 투명한 막처럼 고이더니 곧 흘려 내렸고, 이윽고 오열로 변해 터져 나왔다. 그제야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나는 횡단보도 앞에서 일기장을 읽으며 신호가 바뀌길 기다렸다. 전광판과 조명들이 거리를 환하게 비추고 있어 밤임에도 책을 읽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이윽고 신호가 바뀌자 나는 읽고 있던 책에 ‘타오르는 듯한 붉은 단풍잎 책갈피’를 끼우고 책을 덮었다. 그러고는 가던 길을 재촉했다. 따뜻한 봄바람이 나를 한 바퀴 휘감고 지나갔다. 끈적이는 여름바람보다, 메마른 가을바람보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겨울바람보다 훨씬 포근하고 부드러운 봄바람이 내겐 더 반가웠다.
막 횡단보도를 건너려던 찰나, 시야 한구석에 뭔가가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공원 벤치 위에 이제는 남아있을 리가 없는 샛노란 은행잎이 잠시 쉬어가는 행인처럼 앉아있었다. 그 행인을 쫒아내듯 불어온 바람에 떠밀려간 은행잎은 이윽고 밤의 거리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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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개월 13 일 전
* "유진이는 그 나뭇잎 무리를 하나 주워들고는" – "유진이는 그 나뭇잎 무리 중 하나를 주워들고는" * "흙과 먼지를 털어내려는지 후 하고 바람을 불었다." – "흙과 먼지를 털어내려는지 후 하고 입김을 불었다." * "무언가를 검색하고 생기는 딜레이가 생긴 것처럼" – "무언가를 검색하면 생기는 딜레이처럼" ; 하나의 문장에서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쓰면 가독성이 떨어집니다. 되도록 같은 단어를 연거푸 쓰는 것을 주의하세요. * 따뜻하고 슬픈 이야기네요. 잘 읽었습니다. 이 글은 그리 새롭지 않은 구도의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한때 친했던 친구가 떠나고서야 그의 진심을 알게 된다는 얘기는 흔한 소재이며 구도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중등부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안정된 호흡으로 작품을 끝까지 끌고 나간 힘을… Read more »
11 개월 13 일 전

이 소설을 씀에 있어서 아카데미에서 들었던 내용들이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키지 않은 것들도 있지만(간결체가 아닌 만연체를 썼다든지, 사람을 죽였다든지) 단어와 묘사 등을 신경쓰라는 말이 정말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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