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변(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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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사립 고등학교가 예산이 부족하다고 푸념할 때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되는 법이다. 이번 경우만 봐도 그렇다. 동아리 예산마저 모자라다고 축제 동아리 부스 운영 지원금을 문화상품권 두 장으로 퉁칠 땐 언제고, 교내 교육활동 성과발표를 빙자한 문집을 만드려 하고 있지 않는가. 발행 부수며 소요 예산을 보아하니, 전교생에게 문집을 한 권씩 돌리려는 계획임이 분명하다. 어쩌다보니 그 문집 한 귀퉁이에 내 글도 한 편 실리게 되었다. 문예부의 실권자인, 늘 열정과 의욕이 넘쳐나시는 나의 국어 선생님께서는 그 사실을 알려주시며 특이한 부탁을 해오셨다.
"…..창작 후기를 써 달라고요?"
"뭐, 창작 후기라고 볼 수도 있겠네. 왜 이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 소설의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었는지, 그런 걸 써주면 돼. 우리는 그걸 "작가의 변(辯)"이라고 부를 거야. 그리고 옆에다가 똥(便) 그림을 그리는 거지. 크하하핫!"
그리하여 나는 고작 일주일밖에 되지 않는 방학의 귀중한 한나절을 반납하고 학교에 나와 이른바 '작가의 변'을 쓰게 된 것이다.

 

문집에 실릴 내 글은 3월에 열린 교내 소설 공모에서 입상한 작품으로, 평범한 어느 소녀가 오지랖 넓은 친구를 만나 인생이 마구 꼬이는 이야기를 담은, 본격문학이라기보다는 초등학교 고학년을 위한 동화에 가까운 소설이었다. 쓸 당시에는 희대의 걸작처럼 보였는데 다시 읽어보니 진부하디 진부한 소설이었다. 플롯이 너무 단순한 탓에 동기랄 것도 없어 보였다. 거의 1년 전에 쓴 글인데, 창작 동기는 커녕 무슨 글이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는게 정상 아닌가, 라고 생각하며 나는 종이컵에 담긴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이 코코아로 말하자면 매점의 계절 한정 상품으로, 이번 달 매점 아저씨 매상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어 나는 코코아 컵을 입에서 반쯤 떼었다. 가끔씩 눈썹을 덮던 갈색 앞머리에 아래로 약간 처진 눈꼬리. 길쭉한 팔다리와 길쭉한 얼굴…. 그건 당신이었다.
……그래, 이 소설을 쓰게 된 건 당신 때문이었지.
아니, 당신이 더 이상 내 여기에 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었지.

 

당신과 나는 그 초등학교의 젊은 교사들이 장난으로 "쟤들은 아주 그냥, 평생 붙어 살겠네"라고 놀릴 정도로 각별한 친구였다. 나는 중상위권 성적의 눈에 안 띄는 조용한 학생이었고, 당신은 경력 많은 할아버지 교사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의 개구장이였으니 당신과 나의 우정은 분명 타인들의 눈에 신기하게 보였을 것이다. 엇비슷한 부류끼리 모여 유유상종하는 게 인간관계의 본질이라고 누군가 말했지만, 그건 나이가 좀 들어서 세계를 보는 시선이 좁아지고 정형화된 뒤에야 할 만한 일이었다. 어린 아이들은 집이 가깝다거나, 엄마들끼리 아는 사이라거나, 놀이터에 오는 시간이 비슷하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당신과 나는 그렇게 맺어진 친구였다. 우리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고, 나의 할머니는 당신의 어머니와 놀이터 정자에 앉아 간간히 대화를 나누었으며, 동생들끼리도 나이가 같아 함께 어울렸으니, 그때의 어린 우리는 친구가 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초등학교 졸업반인 육학년이 되어서도 같은 반이 되었고, 여전히 가깝게 지냈다. 그즈음 나는 일 년만 더 있으면 중학생이 된다는 사실에 부쩍 어른이 된 것만 같은 설렘을 만끽하고 있었다. 아마 그래서였는지 문득 나는 당신에게 장래희망이 무어냐고 물었다. 어린 당신은 경찰이 되고 싶어했고, 오랜 친구로서 나는 당신이 꿈을 이루기를 바랐다. 어린 나의 식견으로, 경찰대학은 동네의 모든 엄마들이 선망하는 서울대학에 버금가는 대학이었으므로, 나는 당신이 성적을 좀 올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방과 후에 공부를 가르쳐 주겠다고 제안했다. 아니, 제안했다기보다는 강요했다. 당신은 당황한 듯 하였으나 선선히 나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날부터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다 푼 문제집을 꺼내 내가 쓴 답안에 하나하나 화이트칠을 하곤 했다. 그렇게 답안을 가린 문제집을 한 뭉치 복사해서 당신에게 풀라고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때로는 알록달록한 색연필로 테두리를 한 종이에 직접 문제를 만들어 당신에게 건네기도 했다. 당신의 답안을 채점하고 당신이 모르는 문제를 가르쳐 주며 나는 홀로 뿌듯해 했다. 어쩌면 먼 훗날 경찰 제복을 멋있게 차려 입은 당신이 경례를 붙이며 내게 감사 인사를 하는 장면을 상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신은 언제부터인가 울적한 얼굴로 수업에 들어왔다. 때로는 우리의 수업을 빼 먹고 당신과 내가 살던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서 홀로 그네를 타고 있기도 했다. 그럴수록 나는 당신을 닥달했다. 당신이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린 이 문제지를 만드느라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썼는지, 당신이 갈망하는 경찰이 되는 것이 요즘 같은 세상에 얼마나 하늘의 별따기 같은 일인지, 나는 소리 높여 떽떽거렸다. 당신은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바라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당신의 성적은 점점 떨어져 교사들의 걱정을 살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나와 당신은 냉랭하게 멀어져 버렸다. 우리는 가급적 서로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등하교 시간을 조정했다. 당신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졸업식 날이었다. 꽃다발이며 졸업장을 양 손 가득 든 채 모퉁이를 돌다가 서로 맞닥뜨린 것이었다. 나는 어색한 눈길로 당신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내 손에 쥐인 꽃다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나서 우리는 마치 애초에 모르던 사람들처럼, 인사 한마디 나누지 않고 저벅저벅 서로의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 이후로 나는 더 이상 당신을 만날 수 없었다.

 

당신과 내가 살던 동네는 이웃의 여러 마을과 하나의 학군으로 묶여 있어, 우리는 서로 다른 중학교로 배정 받았다. 중학생이 된 이래로 나는 당신이 학교 폭력 사건에 연루되었다거나, 흡연으로 물의를 일으켰다거나 하는 진위를 알 수 없는 소문 외에는 당신의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었다. 그 소문 속의 당신은 내가 익히 알아온 밝고 어리숙한 아이와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고, 나는 어쩌면 그게 내 탓인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내 순진한 선의가 당신에게는 잔혹한 폭력이었음을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초등학생이 경찰대 대비 공부를 해서 무슨 소용이었겠는가. 당신은 깐깐한 과외 교사가 아니라 싱거운 농담과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필요했을 텐데. 그런 생각에 나는 때때로 울적해지곤 했다.

 

고교 비평준화 지역인 우리 지역에서는 특목고에 합격한 이들을 제외한 모든 학생들이 자신이 지원한 고등학교에서 고입선발고사를 치러야 했다. 입학 정원보다 지원자가 많을 시에는 불합격생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결국 정원 미달인 먼 고등학교에 등록할 수 밖에 없었는데, 선생님들은 이를 비꼬듯이 '유학'이라고 불렀다. '유학생'을 가급적 만들지 않는 것이 그즈음 모든 중3 담임 선생님들의 목표였다. 고입 시험 날에는 선생님들이 지역의 20여개 고등학교에 나눠 찾아가 마치 수능날의 학부모들 처럼 제자들을 응원하곤 했다. 나는 화이팅을 외치는 담임 선생님께 손을 흔들어 보이며 수험생 명단에서 내 이름을 찾으려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 명단에서 나는 당신이 진학한 중학교 이름 옆에 쓰인 당신의 이름을, 내내 찾고 싶었던 당신의 이름을, 보았다.

 

이제 당신에게 치졸한 사과라도 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나는 시험을 치는 내내 두려우면서도 설렜다. 당신이 내 사과를 듣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어떤 말을 털어놓을지 나는 줄곧 상상했다. 그러나 며칠 후에 발표된 고등학교의 최종 합격자 명단에 당신의 이름은 없었다. 나는 당신이 새벽에 집을 나서야 하는 먼 고등학교로 '유학가게' 되었다는 것을 당신과 별로 닮지 않은, 당신의 동생으로부터 들었다. 우리가 지원한 고등학교는 시 변두리의 외곽 지역에 있어 아이들이 그다지 선호하는 학교는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허탈하면서도 의아해했다. 입학 후에 나는 우연히 그 해의 불합격생은 겨우 세 명이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학생부 종합 전형'의 확대로 우수한 상위권 학생들이 학생부를 꼼꼼하게 적어주기로 유명한 그 학교로 몰려들었던 것이었다.
세 명만 지원자가 적었었더라면 나는 당신을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어쩌면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었을지도.
……….딱 세 명만 다른 학교로 지원했었더라면.

 

그래. 나는 당신과 나를 생각하며 이 소설을 썼었지, 엄청 시니컬한 기분으로. 나는 이미 식은 코코아를 양손으로 잡고 들이켰다. 교무실의 몇몇 선생님들과, 지구과학실의 과학 심화반 아이들과, 텅 빈 교실의 나 밖에 없는 학교는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당신 생각을 하지 않은지도 무척 오래되었다,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어쩌면 당신과 나는 영영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지금껏 여러번 마주쳤는데 서로 알아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어린 우리가 해 저무는 놀이터에서 공기놀이를 하던 시절로부터 우리는 너무 멀리 와 버렸으므로. 내가 많이 변했듯이, 당신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므로. 그러나 마주쳤는데도 알아보지 못했다면 그건 만나지 않은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어쩌면 평생 전하지 못할 미안한 마음을 담아, 결코 당신에게 닿지 못할 문집에, 당신을 향한 반성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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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개월 1 일 전

글 잘읽었습니다! 여운이 긴 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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