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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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여행자와 베테랑 여행자의 공통점은 바유로 간다는 것이다.

창밖을 보던 유진은 문득 그 문장을 기억해냈다. 언젠가 여행블로그에서 본 글이었다. 블로그 주인의 말을 빌리자면 바유는 바유 이외의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곳이었다. , 나라, 도시와 같은 말들이 바유의 뒤에 따라왔지만 그것은 바유의 일부일 뿐, 바유를 온전하게 설명하는 말이 될 수 없었다. 바유는 오로지 바유였다. 유진은 그 말을 좋아했다. 바유를 좋아했고 바유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가본 적도 없는 곳을 사랑하다니, 그건 말이 안 되잖아. 언젠가 그녀에게 그런 멍청한 말을 한 사람이 있었다. 그게 아니라고, 그녀는 말하고 싶었지만 상대를 설득시킬 자신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설득당하는 것은 그녀 쪽이었다. 그런 환상의 섬 같은 곳이 존재할리가 없잖아. 가보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 말하는 거야? 그녀는 그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바유에 왔다.

창밖으로 펼쳐진 바유의 풍경에 집중했다. 수평선과 그 위로 떠오르는 커다란 구름이 보였고 잔잔한 바닷물 위에서 자국을 남기며 나아가는 고기잡이배가 있었다. 창 너머로 보이는 바유는 마르틴 감독 영화인 [바람의 방향]의 첫 장면을 닮았다. 바유의 풍경을 가장 정확하고 아름답게 스크린으로 옮겼다는 평을 받는 영화였다. 하지만 흥행에 실패한 영화이기도 했다. 유진이 보기에도 [바람의 방향]은 놀랍도록 지루하고 난해한 영화였다. 처음 오 분 간은 바유의 풍경을 무차별적으로 보여주더니 느닷없이 주인공들의 섹스장면으로 넘어간다. 십 분 정도 그러고 나면 다시 바유의 풍경을 보여주는데 이번에는 여주인공의 헐떡이는 숨소리만 바유의 풍경 속에서 계속 되는 식이다. [바람의 방향] 이후로 마르틴은 더 이상 새로운 영화를 찍을 수 없었다. 그런 게 영화라면 유진은 자신도 얼마든지 감독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유진은 몸을 움직여 창문에서 멀어졌다. 침대에 걸터앉은 뒤, 시도해야만 할 것들과 시도해봐야 할 것들이 적힌 수첩을 배낭에서 꺼내 펼쳤다. 그녀는 바유로 오며 일정에 대해 대략적으로라도 정해둔 것이 없었다. 미리 정한 것은 오는 시간과 돌아가는 시간뿐이었다. 대신 해봐야 할 것들과 해야만 할 것들을 생각한 뒤, 필기해 배낭에 달린 주머니에다 넣어 두었다. 해봐야 할 것에는 바다에서 수영하기와 갓 잡은 생선 사먹기, 지나가다 문득 가로수를 흔들어보기, [바람의 방향]의 배경이 되는 장소들 찾아가 보기 같은 것들이 있었다. 모두 충동적으로 생각나는 것들을 적은 것이었고, 지금 와서는 굳이 안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드는 일이었다. 그녀는 한 장을 더 넘겨 시도해야만 할 일들을 훑어보았다. 바유의 시장에서 산 식재료로 직접 저녁 해먹기와 히치하이킹이 목록의 전부였다. 그녀는 볼펜을 들고 잠시 고민했지만 목록이 늘어나지는 않았다.

대충 세수와 양치만 한 유진은 1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아침은 뷔페식으로 제공되었다. 그녀는 접시 가득 샐러드를 담아서 창가자리에 앉았다. 튀긴 생선을 곁들이려다 그만두었다. 속이 거북했다. 그녀는 샐러드를 씹으며 자신의 처한 상황을 돌이켜보았다. 날씨는 나쁘지 않았고 샐러드의 맛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괜찮지 않은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바유에는 공항이 없었기에 바유의 땅을 밟기 위해서는 무조건 배를 타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심한 배 멀미를 앓았고 그게 오랫동안 바유에 오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배 위에서 할 수 있었던 일은 토를 하거나 녹초가 되어 누워 있는 것뿐이었다. 누적된 피로 때문인지 첫 날, 그녀는 짐을 풀곤 곧바로 잠에 들었다. 이제 겨우 첫 날을 보낸 거잖아. 초조해할 필요 없어.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바유에서 떠나기까지 오 일이나 남아 있었다. 포크를 잠시 내려두고 고개를 들어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한가운데의 음식이 잔뜩 놓인 긴 테이블과 주변으로 작은 테이블이 자리 잡은 단조로운 구조였다. 세 명의 투숙객이 테이블을 하나씩 차지한 채 음식을 먹었다. 당연하게도 유진이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고개를 더 돌리자 어저께 숙소를 안내해주었던 남자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무얼 하는 건 아니고 그저 볼록한 배 위에 손을 얹은 채 식당 내부를 유심히 살폈다. 곧 유진과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남자는 이를 드러내어 웃어보였다. 잠깐 의아해하던 유진은 곧 바유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바유에 있었다. 드레싱의 땅콩향이 입과 코로 번졌다.

 

준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오랜 소파생활로 늘 목이 뻐근했고 경직된 자세 때문에 잠에서 깨면 팔다리가 쑤셨다. TV에서는 계속해서 무어라 떠들어댔지만 준은 소리를 들을 뿐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잠에서 깨는 순간은 늘 그랬다. 사고가 멈춘 것처럼 글을 읽거나 소리를 들어도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준은 허리를 세운 채 몽롱함이 사라질 때까지 눈을 감고 기다렸다. 곧 허기가 천천히 뱃속을 채우려들었다. 갈수록 또렷해지는 배고픔을 준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대로라면 굶어 죽을 거야. 준은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여덟시였다.

준은 TV를 끄고 소파 등받이에 걸쳐져 있던 티를 입었다. 아버지가 경찰들에게 체포된 이후로 준은 TV 소음 없이는 잠들지 못했다. 벌써 한 달째였다. 아버지가 모아서 숨겨뒀던 돈도 다 떨어졌고 냉장고에 남아 있던 음식도 모두 먹어치워 버렸다. 더 이상 아무것도 안 하며 잠만 잘 수 없는 노릇이었다. 준은 경찰이 들이닥쳤던 그 날, 숲 속으로 던져버렸던 열쇠를 찾기 위해 집밖으로 나갔다. 숲으로 열쇠를 던져버리는 것은 아버지가 준에게 알려준 것이었다. 자동차는 숲 깊은 곳에 숨겨두었다. 혹여 찾아낸다 해도 견인차가 들어갈 만한 공간이 없었다. 열쇠만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던져버리면 되었다. 자동차와 지식이 아버지가 준에게 남긴 전부였다. 준이 가진 전부이기도 했다.

집을 나온 준은 숲의 입구에 섰다. 집은 정확히 숲과 평야의 경계에 있었다. 한 발 간격을 차이로 숲과 아닌 곳의 차이는 확연했다. 준은 숲을 노려보았다. 곧 열쇠를 던졌던 방향을 기억해냈다. 사이렌 소리 사이로 열쇠가 떨어지는 소리까지 정확히 들었다. 나뭇가지 어딘가에 걸려 있는 것은 아닐 터였다. 준은 짐승처럼 바닥에 엎드려 손바닥으로 풀 위를 더듬으며 돌아다녔다. 이미 몇 번 해 본 일이었다. 상당히 오래 걸리는 일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 반복된 훈련의 결과였다.

아버지는 이따금 준에게 던졌던 열쇠를 찾는 훈련을 시켰다. 그 때는 열쇠가 아니라 열쇠고리뿐이었지만. 아버지가 준에게 열쇠고리를 보여주고 숲을 향해 던지면 준이 그것을 찾아온다. 그게 훈련의 거의 전부였다. 준은 그 순간이 오면 한껏 긴장했다. 열쇠를 찾을 때까지는 잠을 자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준은 열쇠가 떨어진 방향을 노려보았고 아버지의 출발 신호가 떨어지면 곧바로 그곳을 향해 달렸다. 표지 없는 위치는 잠깐만 눈을 돌려도 금세 잊혀졌다. 온통 풀과 나무뿐인 숲에서는 더 그랬다. 몇 번을 반복하자 준은 열쇠고리를 곧잘 찾아냈고 아버지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 준의 눈을 가린 채 열쇠고리를 던졌다. 준은 소리만으로 열쇠고리의 위치를 가늠해야했다. 그 다음은 커다란 스피커로 노래를 재생시킨 채 던지는 것이었다. 준 뒤에 스피커가 있었던 첫 날, 준은 가늠되지 않는 열쇠가 있을 곳 대신 집을 향해 달렸다. 아버지가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가방 안에다 닥치는 대로 음식을 집어넣었다. 냉장고에 있던 음식을 모두 챙겨 숲으로 달아나며 준은 아버지가 서 있던 쪽을 확인했지만 아버지는 애당초 준을 쫓을 생각이 없었는지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그 날부터 준은 나무 위에서 생활했다. 나무 위의 삶은 나쁘지 않았다. 고단한 집안일도 아버지처럼 위협이 되는 것도 없었다. 이따금 초식동물만이 준이 올라 있는 나무 밑으로 지나다닐 뿐이었다. 지루할 때면 준은 돌을 던져 초식동물을 맞춰보았다. 초식동물이 듣기 싫은 울음소리를 내며 주위를 살피면 준은 소리 없이 낄낄거렸다. 밤이 되면 기분 좋은 바람이 불었고 나뭇잎의 어두운 아랫면 사이로 하늘을 보았다. 준은 그 광경이 마음에 들었다. 지루하지 않았다. 문제는 음식이었다. 가져온 음식은 고작 일주일만에 바닥나버려 다시 음식을 훔쳐야 했다. 그 일을 세 번 반복할 때쯤 아버지의 손에 목덜미를 붙잡혔다. 아버지는 다짜고짜 준을 때리기 시작했다. 준은 배낭을 맨 채 엎드려서 두 팔로 머리를 감쌌다. 한참을 때리기만 하던 아버지는 이 섬은……. 하고 입을 열었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준은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바라보았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잠시 준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말을 끝마치지 않고 준의 앞에 빵을 던졌다. 곧바로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준은 아버지의 방문을 바라보다 빵을 먹었다. 입 안 가득한 피 때문에 빵의 맛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이후 준은 이따금 숲으로 갔다. 가출은 아니었다.

준은 곧 열쇠를 찾아냈다. 열쇠를 찾는데 두 시간이나 걸렸다. 예상보다 오래 걸렸지만 초조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가 생기기 않았다면 차는 제자리에 있을 것이고 여행자들은 늘 거리에서 차를 불러 세웠다. 그들 중에서 적당히 고르면 되는 것이었다. 준이 느끼기에 바유의 좋은 점이라곤 도처에 히치하이커들이 널려있단 것뿐이었다. 준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단 맛이 났다.

 

바유가 히치하이커들의 천국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들의 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바유는 중심의 우거진 숲과 이외의 광활한 평야로 이루어진 섬이다. 본래 말이 많은 섬이기도 했지만 바유의 사람들은 넓은 평야를 이동하기 위해 더 많은 말을 길러야 했다. 바유에서 말은 모두에게 필수적인 이동수단이었고 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동물이었다. 말은 바유 사람들의 공유재산이었다. 바유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허락받지 않고 도처에 널린 말을 잡아다 탈 수 있는 것이었다. 이미 누군가 타고 있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히치하이킹처럼 그들은 길가에 서서 달리고 있는 말을 세워 함께 탔다. 이에 관련된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 운송회사였던 Z사는 일찍이 관광지로써 바유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바유와의 택시독점계약을 추진했다. 계약에 방해될 것은 없었고 머지않아 바유에는 Z사의 택시가 다녔다. 하지만 수입은 바닥을 쳤고 관광객 수가 늘어나도 마찬가지였다. Z사가 바유의 히치하이킹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블로그 주인은 오래 전에 활동을 그만 두었다. 남아 있는 그의 글들만 이따금 들어오는 초보 여행객들에게 바유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었다. 그 글을 접한 여행객들의 반응은 대부분 비슷했다. 자신의 환상이 실재한다고 증명하려는 듯, 바유에 대한 정보들을 찾아다니다 곧 사실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바유에는 단 한 마리의 말도 살지 않았다. 바유의 히치하이킹 문화는 12대 시장이었던 미하일의 아이디어였다. 관광산업을 통해 바유를 키우고자 했던 미하일은 꾸민 이야기와 거짓말들로 바유를 치장하고 홍보에 나섰다. 지금 와서는 그의 거짓말 대부분이 사라졌지만 히치하이킹 문화만은 여전했고, 바유의 사람들 또한 히치하이킹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진실을 알게 된 이후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바유에 대한 관심을 거두거나 더욱 바유를 사랑하게 되거나. 유진은 후자였다. 어쨌건 히치하이킹이 활발한 것은 사실이었고 바유의 매력은 겨우 히치하이킹 하나만이 아니었다.

유진은 휴대폰과 지갑, 수첩만을 가방에 넣고 숙소를 나섰다. 일단 시가지를 벗어날 때까진 무작정 걸을 생각이었다. 걷다가 건물이 보이지 않게 되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걷던 방향으로 나아가는 자동차를 기다릴 것이다. 그녀는 히치하이킹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자신의 앞에 선 자동차의 색깔과 차종, 운전자의 성별을 예상해보았다. 무엇 하나 확실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없었지만 그녀가 느끼는 기대감만은 선명했다.

마을을 나가기 위해선 시장을 거쳐야 했다. 오전이었음에도 시장은 이미 시끄러웠다. 손님이 많은 것은 아니었고 그저 시끄러울 뿐이었다. 상인들은 소리를 질러야만 길 위에 듬성듬성 서 있는 여행객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것 마냥 행동했다. 몇몇은 시끄러운 나팔을 불어대기도 했는데, 그 앞을 지나며 유진은 귀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파는 게 특이하거나 가치 있어 보이는 물건들은 아니었다. 식재료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돌덩어리, 모자, 양산 같은 것들이 나열된 물건의 거의 전부였다. 그녀는 물건들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일단 관심을 보이는 것 같다 싶으면 상인들은 길을 막아서고 흥정을 시도했다. 말이 통하지 않았음에도 손가락 두어 개를 세우며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그녀는 서둘러 시장을 벗어났다. 지긋지긋한 시장만큼은 여느 여행지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건물의 밀도가 점점 옅어지더니 마침내 시가지를 벗어날 수 있었다. 도시 밖으로 나온 유진은 먼저 수첩 사이에 넣어두었던 지도를 펼쳤다. [바람의 방향]의 배경으로 쓰였던 장소들은 미리 표시해둔 지도였다.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눌 수 있었는데, 어느 쪽부터 둘러볼지는 아직 정해두지 않았다. 유진은 가장 먼저 잡아타는 차가 가는 방향부터 둘러볼 예정이었다. 지도를 확인하는 동안에도 유진의 옆으로 간간히 자동차 몇 대가 스쳐 지나갔다.

 

당황하지 말아라. 준은 아버지에게서 배웠던 것들을 곱씹으며 차를 몰았다. 상대를 당황시키고 우리는 절대 당황해선 안 된다. 자동차의 미세한 떨림이 핸들을 잡은 손을 통해 준에게 전해졌다. 고르지 않은 길 때문에 차체가 덜컹거릴 때면 준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누군가 자신을 놀라게 하려고 길 곳곳에다 파놓은 함정 같았다. 준은 마음을 가다듬고 희미한 기억에 집중했다. 의지할 것은 아버지의 가르침뿐이었다.

준이 아버지의 작업에 처음 따라갔을 때, 그는 뒷좌석에 올랐다. 평소에는 준 대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잡동사니들로 채워놓던 곳이었다. 히치하이커를 태울 때, 작업을 위해서는 반드시 뒷좌석이 아닌 앞좌석에 태워야만 했다. 준은 아버지가 시킨 대로 뒷좌석을 모두 차지하고 누웠다. 자는 척 하기 위해 눈을 감고 있으면 차의 떨림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앓는 짐승 같았다. 차라리 짐승의 뱃속에 있다고 생각하면 편안해졌다. 준이 어둡고 축축한 짐승의 위를 상상하는 동안 차가 멈춰 섰지만 아버지와 여행객의 짧은 대화가 들렸을 뿐, 차에 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곧이어 다시 차가 멈췄고 이번에는 차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차체가 잠시 기울어졌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그제야 긴장되었다. 자신이 할 일은 없다고 스스로 다독여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여전히 짧고 서툰 영어로 여행객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언제 왔는가, 언제 돌아가는가. 질문은 그런 것들이었다. 준은 아버지가 여행객에게 했던 질문의 발음을 모두 기억하려고 애썼지만 긴장한 탓인지 전혀 집중되지 않았다. 곧 아버지는 시동을 끄고 품에 들어 있던 칼을 꺼내서 여행객 앞으로 들이밀었다. 준은 조용히 상황을 살폈다. 여행객은 한 손을 귀 옆으로 들어 보이고 나머지 손으로 가방을 옮기고 있었다. 준은 여행객에게서 가방을 낚아채 안을 확인했다. 휴대폰, 지갑, 귀중품이나 전자제품만 챙기고 나머지는 가방 채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그 사이 아버지는 여행객을 차 밖으로 밀어내고 다시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후로 준은 항상 뒷좌석에서 아버지의 작업을 지켜보았다. 아버지는 대체로 가까운 곳을 가는 사람과 일주일 이상 섬에 남을 사람들을 상대로는 작업하지 않았다.

도시에 도착한 준은 시간을 확인하고 차를 돌려 다시 숲 쪽으로 움직였다. 얼마 가지 않아 준의 시야에 히치하이킹 하는 여자가 보였다. 유진이었다. 준은 그녀 앞에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렸다. 어디까지 가시나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서툰 발음과 미소를 유지했다. 마을 쪽만 아니면 돼요. 지도를 내려다보며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대답했다. 준은 팔을 뻗어 조수석 쪽 문을 직접 열어주었다. 유진은 어렵지 않게 차에 올라탔다.

준은 그녀에게 여러 질문들을 했다. 말이 많고 친절한 현지인. 아버지는 그게 여행객들이 원하는 운전자의 모습이라고 준에게 가르쳤다. 그런 모습을 보이면 한껏 긴장한 채 창밖을 바라보던 경계를 지우고 곧 함께 수다를 떨었다. 준은 눈을 돌려 유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유진은 그의 말에 대답을 했지만 시선은 자신의 무릎에 펼친 지도에 고정되어 있었다. 준은 입을 다물었다. 차는 점점 더 인적이 드문 곳으로 나아갔다.

어느 쪽으로 가고 있나요? 이윽고 고개를 든 유진이 물었다. 지도를 보며 자신이 돌아다닐 루트 정리를 막 끝마친 참이었다. 그러나 준은 유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슬쩍 바라보더니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그제야 유진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창밖을 바라보았지만 어디에도 이정표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스탑, 카. 당황한 유진은 정확한 문장을 만들지 못하고 그렇게 말했다.

스탑. 카. 나우!

차가 멈췄다. 준은 품속에서 칼을 꺼내 유진 앞으로 들이밀었다. 유진의 얼굴 위로 두려움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준은 가방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소리쳤다. 유진이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자 칼로 가방을 툭툭 건드렸다. 유진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준의 품에 안겨주었다. 준은 유진에게 칼을 겨눈 채 남은 손으로 가방을 뒤졌다. 휴대폰과 붉은 지갑, 끈이 달린 수첩이 전부였다. 흔한 카메라 하나 없다는 것에 준은 실망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가방을 모두 확인한 그는 유진에게 나가라고 말했다. 유진이 차 문을 열자 그녀의 등을 찬 다음 가방을 던졌다. 가방은 바닥에 고꾸라진 유진의 위로 정확히 떨어졌다. 준은 서둘러 조수석 문을 닫고 숲으로 향했다.

오 일이랬다. 오 일만 조용히 지내면 유진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갈 것이고 경찰들은 수사를 그만둘 것이다. 늘 그랬다. 수사는 형식적이었으며 그나마도 신고자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고 나면 없던 일이 되었다. 경찰과 마을 사람들은 준과 아버지에게 바유의 이미지를 갉아먹고 사는 기생충이라 했지만, 그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문제는 바유 자체에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시장에 자리를 잡아도 삶이 안정되는 것은 아니었고 호객행위와 구걸은 큰 차이가 없었다. 물고기를 낚으며 사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바유에서는 누구도 보장된 삶을 살 수 없었다. 바유의 모든 인간은 위태롭게 바유에 기생해 있을 뿐이었다.

 

준의 자동차가 떠나고 유진은 한참동안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왔던 길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해했다. 준이 가져간 것 중 딱히 중요한 물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휴대전화는 어차피 곧 새로운 기종으로 바꿀 생각이었고 지갑 또한 현금이 약간 들어 있을 뿐이었다. 카드와 비상금은 모두 숙소에 있었다. 거기다가 수첩과 가방은 돌려주었으니 그녀가 잃은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고 있는 동안 차 몇 대가 그녀를 지나쳤다. 때때로 멈춰 서서 이것저것 묻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금세 떠나버렸다. 도시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희미하게 바다냄새를 풍겼다. 곧 그녀는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비가 내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바다의 비는 바다냄새가 났다. 남은 오 일중 하루는 비가 와주지 않을까. 그녀는 가방을 메고 도시 쪽으로 걸었다. 또 다시 모르는 누군가의 차를 얻어 탈 자신은 들지 않았다. 긴장이 풀리자 졸음이 쏟아졌다.

숙소로 돌아온 그녀는 곧바로 잠에 들었다.

꿈 속에서 그녀는 길을 잃었다. 어두운 숲이었다.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마을이 나올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걸었다. 땅 위로 노출된 나무뿌리는 어디를 가나 비슷한 모양새였다. 같은 곳을 빙빙 돌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는 누군가를 원망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도대체 누구를 원망해야하는지 알 수 없었다. 목이 말랐고 신발을 벗어 확인하지 않아도 발은 상처투성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나무가 제 의지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그쯤이었다. 유진은 쉽게 눈치 채지 못했지만 곧 알아차렸다. 그녀 앞의 나뭇가지들이 아치모양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나무들 사이의 길을 그녀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곧 길의 끝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준이었다. 준은 칼을 든 채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고 그녀는 도망치려고 했지만 두 발이 뿌리에 묶여 있었다. 곧 그녀의 앞에 선 준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칼을 들어 그녀의 발목을 감싼 뿌리들을 내리쳤다. 내려치기를 거듭할수록 칼날이 뿌리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지만 쉽게 끊어지지는 않았다. 그녀는 준을 바라보았다. 준의 턱에서 떨어진 땀이 바닥에 떨어져 흙에 흡수되었다.

유진은 눈을 떴다. 새벽이었다. 그녀는 누운 채 고개를 돌려 창 쪽을 바라보았다. 창백한 하늘이 보였다. 막 해가 뜨고 있어 숙소의 벽이 푸르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벽 한 쪽에 걸어두었던 바람막이에는 준의 신발 밑창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불을 끌어올려 목까지 덮었다. 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경찰서로 가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보란 듯이 여행을 끝마칠 것이다.

 

준은 음식으로 가득 찬 냉장고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첫 작업에 대한 죄책감은 조용히 사라졌다. 중요한 건 결과였다. 아버지는 늘 그렇게 말했고 죄책감은 냉장고를 가득 채우지 못했을 때 느껴야하는 것이라고 준에게 가르쳤다. 준은 냉장고 문을 닫고 대신 유진의 지갑을 열었다. 지폐 두 장이 남아 있었다. 어째서인지 여행객들은 늘 비슷한 양의 돈을 지갑에 채우고 돌아다녔다. 아버지라면 담배를 사는 데 모두 썼을 돈이었지만 준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준은 지갑을 닫고 뒷주머니에 지갑을 넣었다.

소파로 간 준은 TV를 켰다. 준의 흥미를 끌만한 방송은 없었지만 전원을 끄지 않고 켜두었다. 간혹 준이 알지 못하는 언어가 섞여 들렸다. 준은 아버지의 행방을 생각했다. 바유의 주민들은 국가로써 바유의 독립성을 주장했지만, 사실 국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모든 행정적 절차들은 바유가 소속된 국가에 기대고 있었다. 중범죄로 체포된 아버지라면 육지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은 후 교도소에 수감될 것이었다. 이미 삼 년을 교도소에서 살다 온 아버지였다. 이번에는 좀 더 오래 있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준의 미래일지도 몰랐다.

준은 눈을 감았다. 잠을 자기 위해서였지만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유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겁에 질린 유진의 눈빛과 칼을 쥔 자신의 손이 눈앞에서 정교하게 재생되었다. 준은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벌레 몇 마리가 시야에 나타났다가 곧 사라졌다. 고개를 들어 냉장고 쪽을 바라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일시적인 해결일 뿐 눈을 감으면 유진의 얼굴이 다시 떠오를 것이다. 준은 몸을 일으켰다. 차라리 잠자지 않는 편이 나았다.

준은 TV앞에 올려두었던 유진의 휴대전화를 들었다. 비밀번호는 걸려 있지 않았고 배터리도 넉넉하게 남아 있었다. 준은 가장 먼저 휴대전화의 언어를 바꾸었다. 그 뒤 휴대전화 속 정보들을 익숙하게 뒤졌다. 늘 하던 일이었다. 물건들을 빼앗은 후, 아버지가 중고시장에 내다 팔기 전까지 모든 전자기기들은 준의 장난감이었다. 시간을 흘려보내기에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근 일주일간의 통화기록은 없었다. 문자메시지 몇 통이 있었지만 언어설정을 바꾼다 해도, 메시지 속 내용들은 여전히 모르는 언어였다. 나머지는 바유의 시장과 부두를 찍은 사진 몇 장과 동영상 파일 하나였다. 사진들을 살펴보던 준은 마지막으로 동영상 파일을 열었다. [바람의 방향]이라는 타이틀이 준이 모르는 언어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곧이어 바유의 풍경들이 재생되었지만 준은 그것이 바유란 것을 알지 못했다. 익숙했지만 바유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면은 주인공들의 섹스씬으로 전환되었다.

휴대전화에 포르노를 저장해두다니. 준은 유진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화면 속의 남녀는 점점 과격해졌다. 둘의 숨소리와 TV소리만이 방안에 가득했다. 준은 화면에 시선을 둔 채 천천히 바지를 내렸다. 차가운 공기가 하반신을 통해 느껴졌다. 바유의 공기는 해가 지면 빠르게 식었다. 준의 손도 마찬가지로 차가웠다. 남녀는 준이 모르는 언어로 서로의 귀에다 무어라 속삭여댔다. 준은 그들의 입술을 바라보며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곧 다시 화면이 넘어갔다. 바유의 숲 한 쪽이었다. 준은 한눈에 그곳이 바유란 것을 알아보았다. 이따금 아버지를 피해 도망치던 곳이었다. 돌연 준은 휴대전화를 던졌다. TV에 맞은 휴대전화는 TV의 화면을 깨뜨리고 바닥에 떨어졌다. 휴대전화는 액정이 깨져 검은 화면만 띄웠지만 소리는 여전했다. TV소리 사이로 들리는 여자의 숨소리가 꼭 비명 같다고, 준은 생각하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준은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람이 불어 흔들리는 어두운 숲뿐이었다.

 

 

 

 

(과거 업로드 했던 글을 퇴고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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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개월 23 일 전
* "토를 하거나" – "토하거나" : '토하다'는 동사로만 존재합니다. 많은 분들이 '토'를 명사라고 생각하시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입니다. 물론 '토'라는 명사가 있기는 하지만 그건 전혀 다른 의미의 명사입니다.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 지난 번에도 느꼈지만 노랑님은 글을 참 잘 쓰시는 분이에요. 인물이 가진 정서를 단 몇 개의 문장으로 표현하는 능력은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죄책감은 냉장고를 가득 채우지 못했을 때 느껴야 하는 것"이라든가 차의 엔진 소리를 앓는 짐승의 소리라고 표현한 문장들은 정말 좋았습니다. 그러나 작품이 평가받기 위해서는 '완결성'에 대한 측면도 무시할 수가 없어요. 지난 번 작품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작품 또한 완결성이 아쉽습니다. 유진과 준, 이 두 인물의 시선을 교차시키며 이야기를 엮어가는 것은… Read m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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