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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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온몸을 으스러뜨리고 지나갈 적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그것을 붙잡는다. 뼛속까지 사무치는 시린 통증을 나는 가만히 느낀다. 어룽거리는 초의 잔상이 감은 눈 위로 잔잔히 떠오른다.

 

욕실에서 나온 여자가 머리맡에 앉는다. 여자는 이불을 걷어내며 내 얼굴을 내려다본다. 나는 눈을 뜨고 여자의 초췌한 눈가, 메마른 두 뺨, 유난히 붉은 입술, 귀 뒤로 넘긴 단발머리를 차례로 훑는다. 그녀는 아내를 닮았다. 온갖 일을 등에 짊고 수척해진 낯. 밤이면 차고 쓴 공기를 몰고 와 바닥에 풀썩 고꾸라지던 야윈 등. 그럼에도 잊지 않고 입술에 챙겨 바르던 선홍빛 루주. 나는 홀린 듯 손을 들어 여자의 입술을 문지른다. 뜨겁고 거친 감촉이 두 손가락 끝에 와닿는다. 붉은 루주가 여자의 입가에 노을 지듯 번지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아내가 붉은 입술에 달고 살던 욕지거리를 떠올린다. 술 없어? 나는 여자의 어깨를 밀어낸다. 탁자에 와인이 있어요. 여자가 주섬주섬 자리를 고쳐 앉는다. 탁자 언저리를 바라보는 여자의 눈빛이 얼린 동태의 것인 마냥 흐리터분하다. 여자는 고분고분하지만 내게 숨 쉴 틈 없이 고통을 상기시켰다.

여자는 안다. 내가 취하고 나서야 침실에 들어올 것을. 그녀는 총살당한 시체처럼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 있을 것이다. 넋 놓은 얼굴을 한 체. 나는 침대로 성큼성큼 걸어가 여자를 끌어낸다. 영문을 모르고 허우적거리는 여자의 팔을 붙잡는다.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 같은 여자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여자의 눈동자에 아내의 초상이 있다. 저것은 누구의 것인가? 흐릿한 맨 정신이 눈시울을 적시고 적막한 마음을 흐너뜨렸다. 차라리 취하고 싶다, 속으로 읊조리며 나는 여자의 헐벗은 몸뚱이를 짓누른다. 발갛게 피가 몰린 허벅지 주변 살갗이 상반되게 희다. 여자는 몰아치는 태풍 속 꽃송이처럼 함부로 흔들리며 간드러지는 비명을 내지른다. 여자의 비명 속 고통을 마주할 때 느끼곤 했던 뼈마디가 서늘해지는 쾌감이 끊어질 듯이 늘어진다. 여자의 두 뺨 위로 뜨거운 촛농이 후드득 떨어지는 것을 나는 당혹스럽게 바라보았다. 아내의 무기력한 발걸음, 아내가 사박스럽게 몰아붙일 때 꼭 조이고 싶었던 그녀의 가느다란 목덜미, 언제나처럼 근심을 옆에 뉘고 자는 듯 보였던 아내의 마지막, 사는 것을 원망했지만 살기 위해 아등바등 애써왔던 아내,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이토록 고통 받고 있는가. 나는 파르스름하게 질린 여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번진 루주로 엉망이 된 여자의 입술이 순간 표독스럽게 움직였다.

"오늘은 된 거죠? 돈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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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월 7 시 전
* " 온갖 일을 등에 짊고 수척해진 낯." – "온갖 짐을 등에 짊어져 수척해진 낯." * "여자가 주섬주섬 자리를 고쳐 앉는다." – "여자가 주섬주섬 자리에서 고쳐 앉는다." * "여자의 눈빛이 얼린 동태의 것인 마냥 흐리터분하다." – "여자의 눈빛이 언 동태 마냥 흐리멍텅하다." : '흐리터분'은 '(생각이나 기억이) 똑똑치 않고 어렴풋하다'라는 의미입니다. * 넋 놓은 얼굴을 한 체." – "넋놓은 얼굴을 한 채." : '체'와 '채'는 엄연히 다른 의미입니다. * 그는 "무엇을 위해 이토록 고통 받고 있는" 건가요? 아내는 어디로 갔죠? 이 작품에서 아쉬운 것은 구체성입니다. 다시 한 번 읽어 보시면 깨닫겠지만 이 작품에는 추상적인 단어와 묘사들이 자주 눈에 띕니다. 특히 처음의… Read m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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