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제노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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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A, B, C, D, 소년

배경: 교외의 어느 아파트 단지

 

A, B, C는 아파트 놀이터 정자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 때 D가 아파트 안에서 황급히 나와 이야기에 끼어든다.

 

D: 모두들 어찌 이렇게 태연합니까? 지금 이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A: (의아한 듯이) 무슨 소리 말씀이오?

D: 302호 남자가 또 마누라와 아들을 때리고 있지 않소. 부인이 흐느끼고 아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소. 지금 그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B: (김빠진 목소리로) 아아, 난 또 뭐라고. 그건 만날 벌어지는 일이 아니오. 나는 2년 전에 이사 왔을 때부터 매일 밤마다 저 소릴 들었소. 새삼스럽게 무슨?

C: 또 한 바탕 대거리를 하는 모양이지, 그놈의 집구석.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니까.

D: 어제 시장에 갔다가 302호 여자를 봤는데, 다리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더군요. 이쯤 되면 가정 폭력 아닙니까? 아무래도 경찰서에 신고해야 할 것 같은데….

B: 아니,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있을까. 형씨, 원래 남의 집안싸움에는 끼어들려 해선 안 된다오. 어쭙잖게 부산떨다가 불똥 튀면 당신만 손해지!

A: 진짜로 심각한 일이라면 우리가 아니라도 누군가 다른 사람이 신고하겠지, 뭐.

C: 아아, 당신, 진짜로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오?

D: (어물쩍거리며)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지 않는다면 나 혼자 신고를 할 필요는 없겠지요, 뭐…. (무대 암전된다)

 

 

무대, 암전된 채로 배경이 정자에서 소년의 방 안으로 바뀐다. 웅크린 소년의 실루엣 보이고,

 

소년: (독백하듯) 이제 그는 더 이상 술에 취할 수도, 골프채를 들고 엄마를 개 패듯 때릴 수도 없겠군요. 나는 방금 나의 아버지 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목사님은 다른 사람을 죽인 이는 살아서는 감옥에 가고, 죽어서는 지옥에 간다고 하셨지요. 이제 나는 감옥에, 지옥에 가게 되는 건가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내가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는 머지않아 엄마를 죽였을 거니까요. 이제 나에게 돌을 던질 여러분은 이미 우리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계셨겠지요. 그렇지만 아무도 엄마와 나를 도와주지 않았어요. (피 묻은 손을 들어 보이며) 그러므로 이건 아무래도 피할 수 없었던 결말인 거예요!

 

 

무대, 다시 밝아지고 노란색 접근 금지 테이프가 붙어 있는 302호 현관 앞에 A, B, C가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C: 이 집에서 대관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오?

A: 모르셨소? 302호 아이가 자기 아비를 죽였다오. 부엌칼을 들고 남자를 마구 찔렀더랬지.

B: 퇴근한 그 집 여편네가 바닥에 흥건한 피와, 그 옆에 차분히 웅크리고 앉아 피 묻은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소년을 발견했더랬지.

C: 맙소사! 이제 집을 팔 수도 없겠군! 집값이 미친 듯이 떨어질 테니! 그 소년은 대관절 몇 살이었소?

D: (무대 뒤편에서 불쑥 등장하며) 열한 살이었소! 초등학교 사학년이었단 말이오!

A, B, C는 동시에 깜짝 놀란 듯 D를 바라보고, 서로에게 무언가를 속삭인다.

A: 아아, 당신이었군. 경찰이 취조라도 하러 온 줄 알았잖소.

D: 당신네는 느끼는 바가 없소? 이 사건에 대해서?

C: 우리가 무엇을 느껴야 하지요? 당신 말은 우리가 이 사건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뜻이오?

B: 누군가 한 사람이 경찰에 302호 남자가 식구들에게 폭력을 휘두른다는 걸 신고했다면 됐을 것 아니오?

D: 그렇지만 당신은 신고를 하지 않았잖소!

A: 당신도 신고를 하지 않았잖소!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소?

D: 그야… 여러분이 하지 않겠다기에….

B: 이제 이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우리는 이 사건에 대해 책임이 없음이 명확합니다. 누군가는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신고를 했어야 했어요. 다만 그 누군가가 우리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일동 정지한다. 무대, 암전되고 스포트라이트가 정지해 있는 B를 비춘다. 이윽고 스포트라이트는 A, C, D 순으로 옮겨간다.

 

 

무대, 완전히 암전된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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