쭉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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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정이

쌀을 양은냄비에 불려놓았다. 쌀에서 하얀 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돌렸다. 손이 벌게질 때쯤 뺐다. 손은 물기로 번들거렸다. 서서히 쌀은 가라앉고 쭉정이가 올라왔다. 나는 쭉정이가 올라온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 여기까지였다.

“태연아, 같이 가자.”

녀석이 손을 건네 왔다. 숲은 울창했고 나무의 가지는 길게 뻗어 기지개를 펴는 듯했다. 나는 빛이 들지 않은 그림자 아래에 있었다. 내 몸은 저 나무의 가지들처럼 축 처져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피어 난지 얼마 안 된 새싹처럼 아무렇게나 흩뿌려져있었다. 나와 달리 녀석의 얼굴에는 빛이 반짝거렸다. 생기어린 얼굴이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얼굴이었다.

“됐거든, 나도 혼자 갈 수 있어.”

나는 부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일어섰다. 땀을 잽싸게 훔쳤다. 단체복은 땀에 찌들어있었다. 나는 녀석을 힐끔 쳐다봤다. 녀석은 벌써 저만치 나아가있었다. 같이 가자고 했으면서. 나는 으윽, 소리를 내며 녀석을 앞질러 나갔다. 녀석은 그 당시 나의 자그마한 라이벌 이었다.

형의 손가락을 보며 피아노를 배웠고 형의 나비넥타이를 보며 성악을 시작했다. 내가 형이 입은 단체복을 보고 컵 스카우트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엄마는 내가 금방 그만 둘 줄 알았다고 했다. 그래서 내게 형이 입던 단체복을 물려줬다. 늘어난 멜빵바지에 어깨선이 맞지 않은 목 때 낀 파란셔츠. 나는 가끔 단체복을 입고 학교에 갔다. 형은 나를 보자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게슴츠레 형을 쳐다봤다. 나를 부러워하고 있는 거야. 내가 너무 멋져서. 그럴 때마다 형은 가시 돋친 말투로 내가 끝까지 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포기 할 거라고. 하지만 나는 엄마와 형의 예상을 깨고 형처럼 조장까지 했다. 형같이 반짝이는 뱃지는 없었지만 조장은 조장이었다. 내가 엄마와 형의 예상을 깨고 버틸 수 있었던 건, 녀석 때문이었다.

녀석은 특별히 잘생기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피아니스트와 성악가처럼 나비넥타이가 잘 어울리는 아이였다. 웃음이 보기 좋은 아이, 부모들이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런 녀석이 항상 내게 껌 딱지처럼 달라붙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항상 웃고는 했다. 하하 호호. 나는 그 웃음소리가 싫어 귀를 막고 고개를 푹, 숙이고 싶을 때가 많았다. 녀석은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항상 싱글벙글했다. 나도 딱 한번 녀석에게 웃어줬던 때가 있었다. 스카우트의 조장들만 가는 졸업여행. 녀석과 내가 한 조가 된 처음이자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그때 녀석의 콧대를 눌러주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었다.

이윽고 우리 조는 캠핑장에 도착했다. 나를 포함해 6명이 이루어진 조였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텐트부터 쳤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 우리는 각자 저녁밥을 준비해야 했다. 그게 이 여행의 하이라이트였다. 직접 음식을 준비하는 것. 녀석은 텐트 주변에 모기향을 뿌리느라 바빴다. 나는 재빨리 조원들을 불러 모았다.

“각자 가져온 재료들을 꺼내자.”

나는 쌀과 김치를 꺼냈고 다른 애들은 여러 가지 밑반찬을 꺼냈다. 고기며, 상추며, 새우젓이며, 하나같이 바비큐를 위한 것이었다. 녀석이 가져온 것은 그릴이었다. 고기를 구울 줄 안다고 했다. 초등생주제에 고기는 무슨 고기. 나는 녀석을 힐끔 곁눈질한 후 밥을 할 줄 안다고 했다. 그래서 양은 냄비를 가져왔다.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그 녀석의 그릴에 비해 내 양은냄비는 초라해보였다. 녀석은 싱긋, 웃고 나는 지지직, 눈빛을 보냈다.

녀석이 설치한 그릴의 달궈지기 시작했다. 녀석은 나뭇가지를 가지러 어디론가 향했다. 사람들은 녀석이 가져온 그릴에 관심이 많아보였다. 녀석이 아빠와 캠핑을 자주 간다고 말하던 게 생각났다. 나는 이러다가 내가 준비한 밥이 밉보이면 어쩌지, 이번만큼은 지기 싫은데 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 나는 쌀 봉지에서 벌레가 보였다. 쌀벌레였다. 나는 화들짝 놀라 벌레를 버리려다가 딱 좁쌀만한 것이 그릴의 반짝거리는 은박지위에서 잘 보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사건은 그로부터 10분 후 터졌다. 누가 처음 소리를 쳤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릴주위로 몰려왔다. 그 안에는 녀석도 있었다. 녀석은 그릴위에 죽어있는 벌레를 보고 당황해 울기 시작했다. 내건 깨끗한데, 정말이야. 녀석의 울음은 그칠지 몰랐고 나는 녀석이 우는 걸 처음 봤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걸 처음 보는 느낌이었다. 하늘에서도 물이 내리는구나. 우는 녀석을 등지고 그릴을 바라봤다. 그릴 위에는 내가 놓은 쌀벌레가 새까맣게 타고 있었다. 그 주변엔 내가 가져온 쌀알들이 곳곳이 놓여있었다. 쌀알을 치울까 했지만 곧 그만뒀다. 시간이 지날수록 쌀이 타는 냄새가 점점 났다. 마치 밥의 김이 빠지는 것처럼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났다. 사건은 선생님이 프라이팬을 들고 오는 걸로 끝났다. 그날, 나는 내가 가져온 밥을 안치지 못했다.

그때 이후로 나는 더 이상 녀석과 만날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다른 중학교를 올라가며 멀어졌고 나도 서서히 녀석을 잊어갔다. 녀석은 내 기억 속에서 영원히 이름 없는 ‘녀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내게 밥을 안쳐달라고 부탁한 날. 내가 못하겠다고 하자 어렸을 때 컵 스카우트에서 배운 게 어디로 갔냐며 나를 달달 볶던 그 날. 나는 쌀을 씻었다. 쌀에서 하얀 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돌렸다. 손이 벌게질 때쯤 뺐다. 손은 물기로 번들거렸다. 손등에 물을 맞추고 냄비를 끓이려던 찰나, 서서히 냄비위로 무언가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쭉정이였다. 쭉정이를 보며 그때가 떠올랐다. 녀석의 그릴이 생각났고 녀석의 울음이 생생히 들렸다. 하지만 녀석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무언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을 해야 하는데. 나는 엄마를 불러 쭉정이를 걸러내는 법을 물었다. 엄마는 그것도 기억하지 못하냐면서 나를 채근했다. 졸업앨범. 앨범을 보면 녀석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 엄마의 말을 귓등으로 들은 채 천천히 졸업앨범이 어디 있는지 생각했다. 졸업앨범 속 나비넥타이가 잘 어울리는 녀석은 아직 나를 기억할까. 나는 녀석에게 쭉정이를 건지는 법을 알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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