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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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꿈을 꾸었다. 이번에는 세계가 멸망하는 꿈이었다.

 

그는 궁핍함을 물려받고 태어났다. 부모세대부터 사치는 포기하고 의식주에만 신경을 써도 몇 안 되는 가족이 굶는 일이 꽤 많았다. 평생 자신의 부모를 거울삼아 결혼을 죽어도 하지 않겠다던 그가 아이를 가졌다. 아이에게도 가난이 물려질 것이 두려웠지만 그는 아이를 포기할 수 없었다. 작은 생명체가 제 아내 품에서 꼬물거리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더욱 그랬다. 저자신이 집안을 일으켜 세우리라 다짐했다. 그래서 악착같이 돈을 벌었고 자신은 최소한의 욕구만 해결해가며 가족에겐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그가 한창 말라가던 때의 일이었다. 그는 꿈을 꾸었다. 꿈에선 처음 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다른 말없이 번호를 읊어댔다. 처음엔 멀뚱멀뚱 서서 듣기만 했던 그가 이것이 심상찮은 ‘계시’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 그는 꿈에서 깨어났다. 그는 기억이 나는 대로 종이에 목소리가 들려준 번호를 받아 적고 근처 구멍가게로 달려갔다. 그 누구도 설마 그가 당첨되리라는 생각하지 않았다. 구멍가게 주인마저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지금껏 모든 것들을 자기 힘으로 충당하며 살아왔고 애초에 이런 식의 기적에 기댈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는 1등 복권에 당첨되었다. 어마어마한 액수의 주인이 바로 자신이 된 것이다. 그는 스스로도 믿을 수 없었다. 그가 거액의 돈을 받고 처음 한 일은 바로 빚을 청산하는 일이었다. 그 후엔 언젠가 큰돈이 생긴다면 사고 싶었던 것들, 하고 싶었던 일들을 가족과 함께 돈 걱정 없이 마음껏 누렸다. 한마디로 사치가 많아졌다. 그는 돈이 많아 행복했다. 그러나 그 행복도 잠시. 아들이 병에 걸리고 나서부터 그의 가정은 점차 나락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아들의 병은 불행하게도 현시대까지 치료법을 발견치 못한 불치병이었다. 그도, 의사도, 아들도 병의 원인을 몰랐다. 아들은 계속 말라갔고 그는 돈이 많았지만 불안해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 그는 잊고 있던 꿈을 떠올렸다. 꿈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떠올리고 그것을 필요로 했다. 하루에 열다섯시간도 더 잠을 청하며 그 목소리가 들려오길 바랐다. 아내가 아들의 병을 수발할 동안 그는 불편한 마음으로 누워서 잠을 청했지만 한동안은 아무런 계시가 없었다. 한동안은. 반나절을 꼬박 잠들었다가 깨어나려 비몽사몽할 때에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그 전과 같은 것이었다. 이번엔 장소와 시간, 인상착의를 알려주고는 그는 꿈에서 깨어났다. 그는 깨고 나서 계시를 받은 시각이 얼마 남지 않은 걸 깨닫고 부랴부랴 준비를 시작했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잠을 잔 것이었지만 그 지푸라기가 동아줄이 되어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역시나 그 시각 그 장소에서 만난 인연이 아이의 병을 완치시켜주었다. 그는 의사로서 마침 아이의 병에 대해 외국학교와 협력으로 연구조사를 하던 중이었고 개발 중인 아이에게 투여했더니 그 병이 나았더라는, 동화 같은 이야기였다. 어쨌든 아이는 살았고 그들 가족은 다시 화목하게 살 수 있었다. 그가 다시 꿈을 꾸기 전까지.

 

그 꿈에선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고 했다. 날짜와 시각만을 듣고 그는 다시 꿈에서 깨어났다. 이제는 전혀 의심 없이 꿈의 계시를 따랐다. 그의 꿈만은 미래를 알고 있었다. 그는 꿈에서 깨어나고부터 멍하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만 멸망으로부터 벗어날 길을 궁리했다. 오랜 생각 끝에 그는 집근처의 숲 한구석에 컨테이너를 가져다 놓았다. 그 컨테이너는 그가 마련한 최선의 해결책으로, 그는 이것을 방주라 불렀다. 세상에 멸망이 닥쳤을 때 오로지 계시를 받은 자신과 이곳에 있으면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에 마련한 장소였다. 멸망의 날 전까지 그는 그 컨테이너에 모든 생필품들을 가져다 놓고 몇 년은 그의 가족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그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그는 가족을 데리고 방주를 찾았다. 엄마의 손을 붙잡고 방주에 발을 들이려하지 않는 아이를 어떻게든 끌고 가려 했지만 아이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아내는 아이를 보듬으며 그를 질책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내가 아이의 손을 붙잡고 그에게로부터 도망쳤다. 그러나 산속 지리를 정확하게 꽤뚫고 있는 그의 시선을 피해 둘이 도망가는 일은 불가능했다. 조금 뛰다가 그들은 그에게 덜미를 잡혔고 그의 손에 이끌려 컨테이너 안에 가둬졌다. 모든 것은 그가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그는 꿈의 이야기를 풀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벌벌떨 뿐이었다. 그는 그들을 내내 진정시키려다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이내 화를 내기도, 물건을 집어던지기도 했다. 그러다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이내 사과를 건넸지만 그들은 순식간에 바뀐 그의 태도에 더욱 공포감을 느꼈다. 그가 보지 않을 때마다 그들은 탈출을 꿈꿨다. 그러다 잡히면 맞고 사과 받는 일을 반복했다. 그 좁은 공간에서 무수히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어느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그는 잠에서 깨어났고 아들과 아내의 이름을 불렀지만 방주는 고요했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그들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소파의 남은 온기로 깨달았다. 바로 몸을 일으켜 우비와 장화를 꺼내 입었다. 단단하게 단추를 여민 그는 손전등하나와 산새를 헤칠 쇠막대하나를 집어 들고 방주를 나섰다. 비가 생각보다 많이 내리고 있었다. 얼굴이 온통 비로 젖어 시야확보가 어려웠다. 그는 그들이 갈 법한, 적당히 경사진 산을 올랐다. 내려가진 않았을 것이다. 빗속에서 산은 오르는 것보다 내려가는 일이 더욱 험난했으니. 쇠막대로 가지를 쳐내며 산을 오를 때에, 그는 흔적하나를 발견했다. 진흙에 빠진 아들의 운동화였다. 그는 그것을 집어 들고는 그들의 방향을 짐작해 몸을 틀었다. 산새가 험해졌지만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는 화가 치밀었다. 비가 우비를 파고들고 속옷까지 적셨고 장화에는 이미 물이 차서 질퍽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며칠밤새 샤워도 하지 못한 그는 찝찝한 기분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쇠막대를 이리저리 휘둘렀다. 가지를 쳐냈고 공포를 물리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다 무언가 얻어걸리면 그게 동물이든 나무든 간에 마구 내리쳤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았고 전등은 이미 빗물에 고장이 나버린지 오래였다. 소리를 질러도 빗소리에 묻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발에 차이는 썩은 나무덩이를 무자비하게 내리쳤다. 그 모습은 마치 먹잇감의 목숨을 끊어놓는 짐승과도 같았다. 어쩐지 기분이 풀리는 듯 했다. 그는 날이 밝으면 그들을 다시 찾아보기로 하고, 오늘은 방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익숙한 산새 따라 수월하게 도착한 방주에서 그는 옷을 벗어던지고 음식 몇개를 까먹고는 금세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는 한기를 느꼈다. 이미 새벽이었다. 아내와 아들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아침으로 엊저녁과 같은 음식을 먹었다. 그는 멍하니 좁은 방주를 가득채운 음식과 물들을 바라보았다. 혼자라면 세계에 멸망이 닥치고서도 몇 년은 먹고 살 수 있는 많은 양의 것들이 한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는 어제 벗어놓았던 우비로 시선이 갔다. 낮이면 시냇가에 내다 빨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장화에는 물이 잔뜩 차있겠지. 그는 음식을 꾸역꾸역 넘기고 문 앞으로 다가섰다. 장화 속을 들여다보았다. 예상대로 물이 찰박거리고 있었다. 그는 새벽공기도 들이 켤 겸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나무사이로 해가 뜨고 있었다. 가라앉은 안개와 찬 공기로 분위기가 스산했다. 그는 장화를 엎었다. 말릴 요령으로 문 앞에 비스듬히 세워두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아 뒤적이는데, 장화 앞코에 묻은 검붉은 자국을 보았다. 그는 바로 몸을 수그리고 앉아 장화를 둘러보았다. 앞코뿐 아니라 밑창 전체가 붉었다. 짐승의 피를 밟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는 그것을 집어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설마……. 그가 중얼거렸다. 그는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 우비를 가지고 나왔다. 뒤집힌 옷 바깥쪽에 핏자국이 흥건했다. 그는 담배를 쥐고 있던 손을 떨었다. 우비를 꼭 쥐고 있다가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만진 양 손을 뗐다. 그는 눈을 굴렸다. 어제 자신이 내리친 것은 나무동이가 아니던가. 짐승이라도 죽인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사람을……. 그는 외투를 챙겨 입는 것도 잊고 어젯밤 기억을 더듬어 산을 올랐다. 짙은 안개와 자잘한 가지들을 헤치며 익숙한 흙물을 밟았다. 구겨 신은 운동화가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다시금 아이의 운동화를 발견했다. 그곳에서 방향을 틀었다. 조금 걷자 발에 무언가 채였다. 어제 산길을 헤집다 내팽개치고 돌아온 쇠막대였다. 반 쯤 흙에 파묻힌 쇠막대는 중간이 휘어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걸 뽑아들었다.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피가 흘러 내려오고 있었다. 아니기만 을 바랐다. 그가 죽인 것이 무엇이든, 생명체만은 아니길 바랐다. 그는 피가 흐르는 방향을 거슬러 바닥만을 보고 조심히 걸어 올라갔다. 멀리서 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뒷목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리고 고개를 든 순간. 잔뜩 뭉개지고 빗물에 퉁퉁 부르튼 시체위로 쇠막대가 떨어졌다. 그는 어제가 바로 그 멸망의 날이었음을 깨달았다. 짙게 내린 안개가 서서히 걷혔다. 그는 무릎을 꿇었다. 핏물이 바지를 적시는 줄도 모르고 하릴없이 울기만을 했다.

 


지난번에 써주신 조언 듣고 최대한 반영해 보았습니다!

제 문제점을 고쳐보려고 많이 생각하고 노력해서 써보긴 했는데 어떨진 잘 모르겠어요ㅠㅠ

부족한 점이 보인다면 다시 따끔하게 충고해주세욥!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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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일 4 시 전
세계라는 것은, 제가 생각했던 스케일 큰 (지구라던지 우주라던지)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가족을 가리킨 것이었군요. 마지막 묘사로 보면 아무래도 그는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죽인 것 같은데… 어디선가 들었던 괴담이 생각나요. 남편이 아내와 아들?을 살인사건으로 잃었는데 알고보니 자신이 몽유병 상태에서 그들을 죽였다는… 하여간에 섬뜩하네요. 세번째, 네번째 문단은 (구성으로 치면) 절정과 결말 부분을 담으신 것 같아요. 머릿속에서 상황이 그려져서 읽는 동안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답니다. 그 점이 정말정말 좋았어요. 그렇지만 그에 비해 첫번째 문단은 이유를 설명하기에 급급했다는 느낌이 조금 있네요. 후반부처럼 묘사가 없고 그저 진술로만 흘러가는 것 같아요. 개연성과 설정을 자연스럽게 추가하기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쉽게 되지 않기는 하지만 다른 방법을 시도해보시는 걸 권해드리고… Read m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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