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잉위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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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 하고 신호등의 붉은 불이 파란 불로 바뀌었을 때, 그는 비틀비틀, 힘없는 걸음걸이로 횡단보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횡단보도의 중간쯤에서 그는 빠르게 달려오는 어느 여자와 부딪혔다.
그는 땅을 바라보던 고개를 들어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정장을 입은 채 옅은 화장을 하고 숄더백을 맨 여자였다.
사원증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아마 회사에 늦은 것이리라.
그 여자는 황급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녀는 이미 횡단보도를 거의 다 건너고 있었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은 많았다. 왜 하필 그와 부딪혔을까.
다른 사람들도 많았는데 왜 하필.
그는 그 사실에 대해 어떤 초월적인 존재의 악의마저 느꼈다.
형형색색으로 물든 가로수들, 가을에 어울리는 화사한 정장을 입고 출근길에 오른 사람들.
가을이라는 계절에서 느껴지는 모든 것이 이 거리에 담겨있다.
이 바쁘고 활기찬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는 그 뿐이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화사한 정장이 아니었으며, 목적지 또한 그들과 달랐다.
여은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쏟아지는 아침햇살은 기분을 좋게 하기는커녕 우울함만을 부추길 뿐이었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역방향으로 걸었다.
이 거리는 두 갈래로 나뉘어있는데, 한쪽으로 가면 상가와 아파트 단지가, 다른 한쪽으로 가면 수많은 기업들의 본사가 있다.
그러니 아파트 단지에 사는 사람들은 이 거리를 지나 출근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은현은 번화가의 활기가 닿지 않는 변두리의 원룸에 살았다.
그 때문에 가까이에 편의점 하나 없어 생필품을 사기 위해서는 번화가의 중심으로 들어가거나, 거리로 나와 상가로 가야했다.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것은 둘 다 마찬가지였기에 거리가 가까운 곳을 택하는 것이 합당한 선택일 것이다.
집 밖에 나가는 것을 꺼리는 그라고 해도 살아가기 위해 생필품이 필요하다.
그래서 한 번에 한 달 분량의 물건들을 주문하지만, 오늘 다 떨어지고 말았다.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 없이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또 다시 택배로 주문하면 되는 것이라 생각은 했었지만, 신용카드는 신용 등급이 낮아 소량 결제밖에 할 수 없었고 체크카드엔 돈이 들어있지 않아 사용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돈을 입금해주는 것은 일주일 후다.
가진 것은 약간의 현금밖에 없었다. 일주일 동안이라도 먹을 게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거리가 가까운 마트로 가고 있었다.
필요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거리를 오가는 분주한 사람들을 보며 그는 또다시 마음속에 눌러오던 어떤 것이 솟구쳐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항상 집 밖을 나와 사람들을 바라보면 이렇다.

그는 이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시작이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하고 있었다.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그는 회사나 학교에 늦어 뛰어가던 사람들에게 바보 같다는 감상을 품을지언정 지금과 같이 밖에 나오는 것을 싫어하진 않았다.
그 시절의 그는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언제부터 이렇게 변했나, 하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는 확실하게 답할 수 있다.
첫 번째로 입사한 회사에서 해고당했을 때부터였다.
그는 어렸을 때 주위의 기대를 받으며 자랐다. 그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래서 명문대에 들어갈 수 있었고, 그의 앞길에는 성공이 보장되어 있을 터였다.
그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모두가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다.
그가 첫 번째로 입사한 기업은 대기업이었다.
그에게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결과는 노력을 배신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앞으로 계속 될 거라고 믿던 성공가도에, 변환점이 찾아왔다.
입사한지 3개월 후, 직장 상사와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그 상사가 말도 안 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불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직장 내 큰 문제로 번졌고, 그는 사직서를 제출할 것을 강요당했다.
기업에서 사내 직원들과 트러블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그것이 현재 그가 겪고 있는 모든 것들의 시작이었다. 그 일이 있은 이후로도 취업은 됐지만, 그는 한 직장에 1년 이상 있어본 적이 없다.
어떤 직장이든, 문제가 생겼다.
계속되는 실패에 그는 집 안으로 숨어버렸다.
실패가 반복되자 주위의 시선 또한 변했다.
주위의 변한 눈빛보다, 기대에 보답하지 못했다는 죄책감보다, 여은현이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10분 정도 걷자, 소형 마트가 보였다.
그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인스턴트식품들, 가격이 싼 채소 몇 개, 계란을 돈에 맞게 바구니에 담아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는 직원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저 직원은 출근시간이 지난 지금 추레한 옷을 입고 나타난 그를 어떻게 생각할까.
분명 직업이 없는 백수라는 것을 바로 눈치 챌 것이다. 속으로 비웃겠지.
그런 생각들이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산을 마친 직원이 돈을 건네받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다음에 또 오세요.”
“…네.”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 뒤, 여은현은 황급히 음식들을 가지고 온 캐리어 안에 쑤셔 넣고는 도망치듯 마트를 빠져나왔다.
그 직원의 친절이, 그를 조롱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직원의 미소는 비웃음이 아닌 호객행위의 일종이며, 직원이 그저 평범한 고객 중 한 명인 여은현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질리 없었음에도.

여은현은 캐리어를 질질 끌며 집으로 향했다.
출근 시간이 지나자 거리는 한산했다. 단풍이 든 가로수길, 횡단보도, 계속 직진,
그리고 구석진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눈에 익은, 좁고 음침한 샛길이 보였다.
이곳은 고층 건물과 낮은 빌라의 사이에 난 길로, 고층 건물이 들어오는 햇빛을 모두 막아 낮에도 어둡고 습한 곳이었다.
다만 구조상 해 질 녘 어스름한 빛은 들어올지도 모르지만,직접 본 적은 없다.
이 길을 지나야만, 그가 거주하고 있는 원룸이 나온다.
그는 잠깐 심호흡을 한 뒤, 숨을 참고 발을 내딛었다.
그의 눈앞에 날벌레 터널이 펼쳐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루살이다.
이 샛길은 볕이 들지 않는 것도 모자라, 하루살이들 떼의 서식지였다.
도대체 어디에 물이 있어 군락이 형성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곳에 와봤을 때, 길을 막고 있는 하루살이들을 보고 기겁을 했었다.
어쩌면 그 때문에 그가 계약했던 원룸의 값이 원룸치고 쌌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벌레를 싫어했을 뿐더러, 꼭 이 길을 지나야 원룸으로 향한다는 것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원룸을 옮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원룸이면서 이정도로 값싼 곳은 찾기 어렵다.

여은현은 신경질적으로 눈앞을 가로막는 하루살이들을 쳐냈다.
보잘 것 없는 하루살이조차 그를 비웃듯이 위잉위잉, 소리를 내며 그의 앞길을 방해하기만 했다.
그는 최대한 빠르게 길을 통과했다.
다행히도 그는 안경을 썼기 때문에 눈에 들어올 일은 없지만, 숨을 쉬거나 입을 벌렸다간 하루살이가 들어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샛길을 통과한 뒤 일분 정도만 더 들어가면 그가 살고 있는 원룸이 나온다.
그가 집을 떠나 원룸에서 살기로 결정한 이유는 당연하게도 젊은 날의 치기어린 결정이 아니었다.
현재 자신의 모습을 부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는 외아들인 그에게 많은 열정을 쏟았다.
유명 강사의 학원에 보내주었고, 다양한 참고서를 사주었으며,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해주려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꽤나 많은 돈을 그에게 투자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일련의 모든 행동들은 모두 다 그가 성공하리라는 믿음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열정이 보답 받지 못했을 때에도,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그를 위로해 주었다.
그것은 여은현에게 있어 왜 성공하지 못했냐며 욕을 하고 화를 내는 것보다 더한 치욕이었다.
그의 아버지 또한 그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아버지는 온화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온화함이 때로는 그를 더 비참하게 만든다는 것을, 아버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집을 나왔다. 부모의 곁에 있기 꺼려졌으니까.
집을 나오겠다는 결정을 했을 때, 그의 부모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위잉위잉, 하는 하루살이들의 시끄러운 날개 짓 소리가 끝났다.
드디어 샛길을 빠져나와 볕이 드는 곳으로 나온 것이다.
계속 앞으로 걸어서, 그는 드디어 원룸에 도착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자 익숙한 라면냄새가 풍겨왔다.
그는 캐리어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대충 음식들을 냉장고 안에 우겨넣고는, 물을 끓여 컵라면을 먹었다.
여은현의 평상시 식사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낮에는 아침 겸 점심으로 컵라면을 먹는다. 저녁에는 인스턴트 밥과 간장, 계란을 먹는다.
그는 다 먹은 컵라면을 대충 쓰레기통에 던져놓았다.
그리곤 침대에 드러누워 TV를 켜 멍하니 바라보다가, 노트북을 켜서 게임을 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밤이 찾아왔고, 그는 새벽까지 상념에 잠기다가 잠이 들었다.
그게 그의 일상적인 하루였다. 그리고 오늘도, 그 일상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그런 자신의 삶에 환멸을 느끼다가도, 그 ‘일상‘을 깨뜨리는 것은 두려워했다.
여은현은 자신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또다시 의미 없는 하루를 보냈다는 것이었다.
깜깜한 밤, 침대 속에서 그는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깊은 나른함 속으로 빠져갔다.

여은현은 알람을 맞춰놓지 않아도 오전 11시쯤엔 스스로 눈을 떴다.
딱히 11시 보다 더 늦게 일어나거나, 더 빨리 일어나더라도 특별히 변하는 것이 없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 아침은 달랐다.
소리가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소리는 집요하게도 끈질겨서, 여은현은 잠에서 깼다.
그는 아직도 끊어지지 않는 그 소리의 정체를 찾아내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휴대전화의 벨소리였다.
너무나 오랜만에 듣는 벨소리였다.
그에겐 전화를 걸어 대화를 나눌 친구가 없다.
그는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10시 37분을 막 넘어가는 참이었다.
어머니에게서 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막 일어난 터라 목소리가 잠겼다.
“은현이니?”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서려있었다.
“네. 어머니.”
“뭘 하다가 이제야 전화를 받는 거야! 설마 아직까지 자고 있었던 건 아니었겠지?”
“…죄송해요.”
어머니는 잠시 씩씩거리다가 금세 화를 가라앉히곤 사무적인 태도로 말을 이었다.
“…뭐, 아무튼 집에 대학 동창회 초대 편지가 왔다. 팔 일 후야. 네가 저번 동창회에도 안 나갔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번 동창회에는 나가야 해.”

그것은 권유가 아닌 통보였다.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그는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 친구가 없었다.
그 시절엔 그저 어머니가 원하던 대로 공부에 매달렸던 데다가, ‘인간관계’라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많은 학업 문제들을 풀어온 그라고 해도, 인간관계에는 명확한 답이 없었다.
삶 속의 문제는 정해진 답이 없을 뿐더러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난다.
그는 그 문제를 풀 수 없었다.
그가 염원하던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조금 달라서, 지인 정도의 관계인 사람들은 있었으나 그들 역시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니 그가 동창회에 나가고 싶어 할 리가 없었다.
막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시간낭비라는 이유로, 회사에서 해고당한 이후로는 그들을 바라볼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그리고 어머니도 그에게 동창회에 가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제 목소리가 당황으로 조금 떨리는 것을 느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째서요?”
어머니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유하가 네가 동창회에는 나오지도 않고, 코빼기도 볼 수 없다고 하더구나. 그래서는 안 돼.”

여은현은 그 말을 듣고 상황을 파악했다.
정유하가 문제였다. 그는 정유하에 대해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정유하는 또 다시 그에게 고난을 겪게 했다. 언제나 그녀와 엮이면 그렇다.
그는 얼굴을 보지 못한지 꽤 지난 정유하를 떠올렸다.
여은현과 정유하는 소꿉친구다.
부모 간에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어렸을 때 함께 놀았었다.
그대로 끝났다면 그냥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을 테지만, 고등학교에서 또 같은 반이 됐다.
정유하는 온화하고,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끈기 있게 매달렸으며, 의외로 감정 표현이 확실하며, 특히 그에 대해서 짜증이 날 정도로 오지랖이 넓었다.
때때로는 제가 누나라도 되는 것 마냥 훈계를 하 기도 했는데,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기에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도 대학생이 되면 끝날 줄 알았건만, 아니었다.
그가 합격한 대학교는 명성 높은 대학이었는데, 그 대학교에 정유하 역시 합격한 것이었다.
정유하가 성적이 좋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같은 대학교에 다니게 된데다 과까지 같은 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정유하가 뭐라고 하던 동창회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의 말에 반박했다. “정유하를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다고 그러시는 거라면, 나중에 만나도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동창회에 가 봤자 도움 될게 없을 것 같은데요. 동창회는 사정이 있어서 못 간다고 하면 …” 그러나 그 말은 끝까지 말할 수 없었다. 그의 어머니가 말을 막았기 때문이다. “내 말의 요지는 그게 아니야. 너도 알잖니? 너는 사람들과 교류를 해야 해.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야. 계속 그러고 있어서는 안 돼. 여러 말할 필요 없이, 너는 가서 네가 계속 대기업에 다니고 있다고 말해도 된다는 거야. 나가서 경험을 해 봐. 이번 다음부터는 나가라고 강요하지 않으마. 내 마지막 부탁이다. 계좌에 돈은 충분히 넣어놨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비교당하지 않게 차리고 가.” 그의 어머니는 그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의 자그마한 반항은 작은 반향조차 불러일으키지 못한 채 무시당했다. 통화가 끝나 바탕화면으로 돌아온 휴대전화에는 부재중 전화가 있다는 아이콘과 함께 LED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부재중 전화를 확인해보니 총 열 번 왔었는데, 모두 어머니에게서 온 전화였다. 여은현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사실, 처음에는 바로 거절할 생각이었다. 정 안되면 간다고 말하고 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말을 들으니 그렇게 간단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그는 지금껏 어머니의 말을 거역한 적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가 한 말들은 모두 합리적이었고, 타당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따르지 못했던 말이 있다면, 그건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말 뿐이었다. 게다가 방금 전 어머니의 호소도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어머니는 그가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듯 했다. 그리고 사실 동창생들이 지금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떻게 지내나 궁금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직업이 없었다. 나가서 후회만 하고 올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두 가지 상반되는 욕구가 있었다. 이 방을 나와 길거리의 활력 넘치는 사람들처럼 살아가고 싶은 욕구가 있었고, 더 이상 실패를 경험할 필요 없이 이 삶을 영위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었다. 그는 지금껏 후자의 손을 들어왔지만, 이번에는 전자가 이겼다. 대학 동창회라지만 사실은 과 동창회이고, 어머니가 말하지 않았던가. 여전히 대기업에 다니고 있다고 말해도 좋다고. 그러니까 분명 괜찮을 것이다. 유일한 걱정거리는 동창회에 올 것이라 생각되는 정유하가, 그가 지금 백수라는 것을 안다는 것뿐이었다. 애초에 그가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는 자신의 처지에 비참함을 느끼면서도 침대에서 빠져나와 입고 있던 너저분한 옷을 벗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일주일 후라고 해도, 대기업에 다닌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준비해야 할 것이다. 여은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인가 한숨은 버릇이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 것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는데, 느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그렇지만 정유하에 대해 걱정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할 정유하를 생각하니, 조금은 기대가 된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충분한 돈을 계좌에 넣어주었다. 그 돈으로 그가 동창회의 다른 사람에게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몸을 단정히 하는데 육일이 소요되었다. 무직이 된 이후로 전혀 관리를 하지 않은 제 몸 때문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미용실에 가서 오랫동안 대충 잘라온 머리를 다듬고, 불규칙적인 식사와 한 쪽으로 치우친 식단에 나빠진 피부는 6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꾸준히 사놓고 쓰지 않던 로션과 스킨을 꺼내 발랐고, 그럼에도 눈에 띄는 거친 부위는 BB크림을 살짝 발라 가렸다. 옷은 항상 입고 다니던 평범하고 값싼 옷이 아닌, 고급 브랜드의 옷을 샀다. 동창회라는 장소에 너무 과하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게 입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한 결과, 셔츠, 니트, 너무 두껍지 않은 코트에 까만 정장 바지라는 조합이 완성되었다. 예전부터 사용하던 멈춰버린 고급 손목시계의 배터리를 갈아 손목에 차고 몸에는 자극적이지 않은 향의 향수를 뿌렸다. 여기까지가 주어진 시간 동안 여은현이 최대한 자기 자신을 다듬은 한계였다. 이제 그는, 기업들의 본사가 모여 있는 도심으로 향했다. 사실, 그는 육일 동안 겪은 바쁜 생활도 의외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거절당한 회사를 여전히 다니고 있다고 말하러 가는 길이 아니었다면 정말 오랜만에 즐거웠을지도 모른다고.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해도 우울함을 떨칠 수 없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그는 설렘을 느꼈다. 그는 모임 장소를 향해 걸었다. 동창회 장소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코트 속 지갑에 남은 돈을 챙겨 넣은 상태였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지금의 자신을 백수로 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위축 될 이유는 없었지만, 위축되는 느낌과 무언가 솟구쳐 올라오는 것처럼 답답함은 별개였다. 속이 좋지 않다. 그는 불쾌감을 애써 무시하며 레스토랑의 입구에 섰다. 이제 이 문을 열면, 동창생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는 계속 한 가지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행동하자. 그들은 분명, 성공했을 것이다. 만약 ‘성공’하지 못했더라도 번듯한 직장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가 거짓말을 했을 때, 정유하가 눈치 없이 끼어들면 끝이다. 정유하가 그가 사직서를 냈다는 사실을 안 것은 그가 알려준 게 아니었다. 그가 군대에 다녀오고 그가 금융기업의 Think Tank로서 입사했을 때, 그는 다시 그녀와 만나게 되었다. 정유하는 그가 다니던 기업과 협력 관계에 있는 기업의 자산운용사였다. 공적으로 서로 만날 수밖에 없는 자리였기에, 그가 사직서를 냈을 때 그녀는 바로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심호흡을 한 뒤 문을 열었다. 간판에서부터 조금은 느껴지긴 했지만, 조명이 살짝 어둡다. 그러나 그 어두움은 레스토랑의 분위기와 너무도 잘 어울려 그가 사는 원룸의 음침함과 비교하기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는 레스토랑 안을 배회하며 동창생들을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조금 당황스러우면서도, 어떤 생각이 떠오르며 스스로에게 한심함을 느꼈다. 레스토랑을 헤매며 동창생들을 찾고 있다니, 멋없는 일이다. 아마 평범한 사람들이 이 상황이라면 바로 카운터에 물어보았을 것이다. 그는 동창회가 과 동창회 치고는 꽤 대규모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카운터로 향했다. 직원은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빛이 약한 이곳에 잘 어울리는 운치 있는 파란 조명이 그녀의 옆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직원에게 말을 건넸다. “저, 이곳에서 동창회가 있을 텐데요. 어느 테이블인지 알려 주시겠습니까?” 긴장 때문에 어투가 이상하게 나온 것을 깨달았지만, 직원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켜가며 대답해 주었다.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가장 큰 테이블 예약 석에서 동창회가 진행 중입니다.” 그는 가볍게 몸을 숙여 감사를 표하고, 직원이 가리킨 장소로 향했다. 가보니 확실히 정말 큰 테이블이 예약 석에 드리워진 장막 틈으로 일부분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는 펼쳐진 막을 살짝 걷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제대로 찾아온 것을 알 수 있었다. 동창생중 한명이 그를 알아보더니 상쾌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더니 조금은 과장스럽게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아아, 은현이 왔구나!” 그는 그 동창생의 이름이 무엇인지 기억할 수 없었다. 살갑게 구는 녀석이었다. 얼굴은 확실히 기억나는데. 이 녀석은 대상이 누구든 친절하다. 모여 있는 동창생들의 얼굴을 훑어보니, 정유하는 없었다. 그에게 있어 그건 다행이었다. 그는 일부러 미소를 지었다. 분명 지상 최고로 어색해 보이는 웃음일 거라고, 그는 단언할 수 있었다. 그는 아무나 대답해 달라는 식으로 전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녕. 오랜만이네. 나는 어디에 앉으면 될까?” 좋아. 의도하진 않았지만 꽤 온화한 느낌의 물음이었다. 대답해 준 것은 처음에 그를 맞이해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동창생이었다. “여기 앉아.” 그때에서야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는데, 대학생 때와 변한 게 없었다. 사람 좋은 인상도 그대로였다. 입고 있는 옷은 모두 고급이었다. 여은현은 그가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그에게 말을 건 동창생의 옆자리였다. 다시 주위를 둘러보니 꽤 많은 인원이 모여 있었다. 모두 동창회 자리라고 허세라도 부리는 건지, 명품으로 가득 꾸미고 온 모습들이다. 여은현은 여유롭게 보이도록 노력하며, 시간을 확인했다. 시작까지 1분 남았다. 정유하는 아직까지 오지 않았다. 그는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지만, 애써 진정시키며 계획을 세웠다. 그는 자신의 사교성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친한 동창은 없었지만, 그래도 몇 명은 서로 왕래가 있었으니,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 될 것이다. 그런 생각들의 연쇄는 동창회의 시작을 알리는 회장의 말에 멈췄다. 여은현은 건성으로 박수를 치고, 고급스러운 유리잔에 담긴 물로 목을 축였다. 그냥 맹물이었는데도, 빛을 받아 고급스러운 주황색으로 물드니 풍미마저 느껴지는 듯 했다. 그런데 정유하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그에 대해 생각 하고 있을 때, 회장이 소식을 전했다. “유하는 사정이 있어서 못 온다고 하네. 시간을 내려고 해도 낼 수가 없었대.” 그는 그 소식에 기뻤다. 그가 백수라는 걸 아는 유일한 사람이 오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조금은 김이 샜다. 처음엔 그들끼리 대화를 나눴지만, 곧 주제가 그에 대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는 처음으로 동창회에 참여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대화의 방향을 튼 것은 그의 왼쪽에 앉은 그 동창생이었다. “너무 서로들 얘기하지 말고, 은현이는 처음 온 거니까, 다시 서로 소개하자.” 드디어 시작이다. 첫 번째로 말을 건넨 것은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한 동창생이었다. “정말 오랜만이다. 요새 어떻게 지내?”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어떻게 지내냐니. 진짜로 궁금해서 물었을 리 없다. 그저 주제에 편승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 목적을 위해서 라곤 하지만, 그는 그 동창생이 저렇게 친절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에 놀랐다. 언제나 불쾌한 표정만 보여주던 녀석이었다. 그는 저 녀석이 저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걸 보면, 자신도 분명 천연덕스럽게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는 대답했다. “그냥,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어.” 그 짧다면 짧다고 말할 수 있는 작은 대화를 시작으로, 질문 공세가 펼쳐졌다. ‘애인은 있어?’ 아니. 등등, 위와 같은 시시한 질문들을 잔뜩 던져댔다. 그러다가, 어느 동창생이 그에게 물었다. “회사 분위기는 어때?” 그는 제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마치 귓가에서 말이 달리는 것처럼. 빠르고, 크게. 분위기를 묻다니. 여은현은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냥 상투적인 말을 해주면 된다. 그러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의 직업을 알고 이런걸 묻는 거지? 그는 지금껏 동창생들과 연락을 한 적이 없었다. 아마 정유하가 알려줬을 것이다. 그러니 알고 있는 거겠지. 그러면, 정유하가 그가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는 것은 알리진 않았을까, 하는 불안이 그를 감쌌다. 물론 그는 정유하에 대해 그것까지 말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메마른 제 입술을 핥았다. 쇠 맛이 느껴졌다. 너무 세게 깨문 탓이었을까. 분명 아까 목을 축였는데도, 목이 말라 목소리가 갈라져 나올 것만 같았다. 한마디만 하자. 긴장감이 그의 몸을 죄었다. 그는 애써 무심한 듯 말하려 했다. 그는 질문을 던진 동창생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좋아.” 입안 가득히 쓴맛이 퍼졌다. 동창생들의 표정을 관찰했는데,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딱히 이상하게 들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의 옆에 앉은 동창생은 대답을 듣곤 낮게 웃었다. “그렇구나.” 술 몇잔이 들어가자 동창들은 묻지도 않은 자기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교사, 대학원생, 증권회사, 전자 기기 업체의 직원, 등. 다양했다. 그의 옆에 앉은 동창생은 대학 강사였다. 그는 눈을 내리 깔았다. 나는 뭔가, 하고 그 자신에게 물었다. 분명 대학교 시절에는 그가 그들보다 더 성적이 좋았고 더 우수했는데. 그는 제 스스로에게 진저리를 쳤다. 여은현의 내면에는 그들을 시기하는 그가 있었고, 그들을 동경하는 그가 있었다. 그는 어느 쪽이 자신의 진짜 속마음인지 알지 못했다. 이어지는 상념의 틈으로 동창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목소리는 밝았고, 모두 즐거워 보였다. 그는 깊은 소외감을 느꼈다. 여은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그의 한숨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옆에 앉은 동창생이 그에게만 들리는 성량으로 말을 걸었다. "술잔 비워. 오늘은 실컷 마시자." 그 말을 끝으로 그 동창생은 다시 제 술잔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그는 술을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는 동창회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조용히 식사하는데 집중했다. 너무 빨리 먹어서 멀뚱멀뚱 앉아 있는 것은 곤란했기에, 천천히 먹었다. 한 접시, 두 접시, 세 접시를 비웠을 때, 드디어 동창회가 끝났다. 동창생들은 2차까지 가려는 모양이지만, 그는 여기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동창생 몇 명이 예의상 그를 붙잡았지만, 그는 정중하게 이제 가겠다는 의사를 표현하고 그들과 헤어졌다.

드디어 동창회에서 벗어났지만, 그는 제 마음을 덮쳐오는 죄책감과 자괴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 감정이 그를 놓아주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다. 그리고 그 일들은 모두 그가 선택해서 한 것이었다. 거짓말을 한 것도, 동창회에 참여한 것도, 그리고 회사에서 사직서를 쓴 것도. 그러나 여은현은 그 모든 제 스스로 한 것들을 후회했다. 그리고 후회하는 자신이, 그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어리석은 사람의 전형이라는 점에서, 그의 마음에 비수를 꽂아 넣는 것만 같은 고통을 느꼈다. 그러다가 문득 동창회가 끝났으니 어머니에게 알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제 휴대전화를 꺼내 막 전화를 걸 것처럼 손에 쥐다가 다시 코트의 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다. 지금은 다른 사람과 대화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원룸을 향해 다시 길을 되돌아 힘없이 걸었다. 그에게 있어 제논의 역설은 사실이었다. 그가 아무리 빠르고 우수한 아킬레우스라도, 느려터진 거북이조차 100M의 차이를 두고 먼저 출발하는 거북이는 따라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여은현은 그 '차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길가에 기업들의 본사가 보였다. 그가 어느 큰 빌딩 앞을 지날 때, 누군가 뒤에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야! 여은현!” 뒤돌아보니, 정유하였다. 그녀는 말쑥한 정장을 차려 입은 상태였다. 막 퇴근하던 길이었던 듯하다. 정유하는 달려와 그의 곁을 나란히 걸으며 말했다. “동창회에 갔다 오는 길이지? 네가 왔다는 말, 들었어. 나도 가고 싶었는데, 오늘 업무가 바빠서 못갔어. 만난 것도 오랜만인데, 잠시 어디 가서 함께 회포를 푸는 건 어때?” 여은현은 일부러 싸늘하게 말했다. 그를 동창회에 참석하게 해 놓고 정작 그녀는 참여하지 않았다는 작은 원망에서 온 것이었다. “별로. 난 너랑 풀 정이 없는데.”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 너무 그러지 말고.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예전에 나한테 했던 말 있잖아. 그때는 아무 반박도 못했지만, 이제 찾아냈거든. 네가 잠시 시간을 내 주면, 이야기 해 줄게.” 그는 그 말을 듣고 잠시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에서는 한 치의 허풍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은현은 그가 정유하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그 말을 두 번에 걸쳐 했었다. 첫 번째는 학창시절, 타인을 비웃기 위해 했었던 말이었으며, 두 번째는 해고당한 뒤 자조하며 했었던 말이었다. 그리고 그 두 번 모두 정유하는 반박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 스스로 생각해도 그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수학의 기초적인 사실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에도 해당되는 사실. 그는 그 반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맹렬한 호기심을 느꼈다. 지금의 그에게는 자신의 논리에 반박할 수 있는 ‘사실’이 필요했다. 그에게 있어서 그건 그의 삶에서 어디가 문제였는지를 그에게 알려줄 수 있는 유일한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그는 잠시 머뭇머뭇 하다가 대답했다. “…좋아. 그럴까.”
그리고 10분 후, 그는 정유하와 함께 인근의 카페에 앉아있었다. 전에도 온 적이 있는 곳이었다. 현대적이면서도, 벽돌로 된 것처럼 꾸며진 벽과 거기에 걸린 식물들이 친환경적인 느낌을 준다. 의자가 두 개 있는 작은 테이블에 마주앉아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주문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정유하가 코코아 카푸치노를 주문하고 빨리 주문하라는 식으로 쳐다보자,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그는 빨리 그 반박 이라는 걸 듣고 싶어 초조했다. 그는 계속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커피가 오기만을 계속 기다렸는데, 1초가 1분 같았다. 그렇게 5분정도 기다리자, 드디어 벨이 울리고, 정유하가 커피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마셨다.
쓴 맛에 마시는 커피긴 하지만, 꽤나 쓴 맛이 인상적이었다. 여은현은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입을 열었지만, 정유하가 더 빨랐다. “너, 계속 이대로 살 거야?” 여은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놀랍게도, 그녀의 표정엔 그를 향한 비난도, 경멸도 담겨있지 않은 것 같다. 무감정한 표정은 아니었으나, 그저 그녀의 눈에서 어떠한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상대를 아래로 보고, 도와주어야 할 상대라는 것처럼 바라보는 것이 아닌, 조금은 다른 느낌의 감정이었다.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카페의 주황빛이 감도는 조명이 그녀의 눈을 더욱 빛나게 했다. “네가 하고 있는 행동은 잘못됐어. 회사에 사표 내고서 처음에는 열심히 다른 직업을 찾다가, 이젠 그러지도 않잖아. 몇 번 실패했다고 이번에도 실패할 거라는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 돼. 너는 지금,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어.” 그는 타인의 입으로 듣는 자신을 평가받는 것은 가혹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은 저렇게 쉽게 말할 일이 아니었다. “누군 몰라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네가 일일이 알려주지 않아도, 그런 것 쯤은 이미 알고 있어.”
정유하는 자신이 주문한 카푸치노를 몇 모금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묘하게 흥분한 것 같았다. “그럼, 왜 실천하지 않는 거야?” 그건 사실, 그녀의 말 대로였다. 지금껏 실패해 왔으니 이번에도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 그가 스스로의 자존심을 버리고 입사했던 보잘 것 없는 기업에서 해고당한 뒤, 그는 자신감을 잃었다. 또 다시 시도하고 실패했을 때, 그는 지금보다 더 우울감에 빠질 것이다. 그는 그것을 버틸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어쨌든, 네가 알아야 할 일은 아니야.” 정유하는 그 주제에 대해 한 마디도 물러서지 않으려 작정을 한 건지, 말 한마디도지지 않으려 했다. “알아야겠는데? 짐작은 되지만 네가 스스로 말하는 걸 들어야겠다고. 스스로 말해봐. 그리고 너는 지금 네가 얼마나 한심하게 구는지 알아야 해.”
직설적인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더 분한건, 반박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사회생활은 내게 너무 힘겨웠으니까.” 정유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회포를 풀자고 한 건, 너에게 반박하지 못했던 말을 반박하려고만 했던 게 아니었어. 너는 예전에 나에게 도대체 어떻게 네가 성적이 좋은 거냐고 물었었지? 너는 내가 놀기만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난 줄곧 노력해왔어. 옛날부터, 지금까지 쭉. 하교하고 나면 바로 다른 사람의 두 배를 더 공부했고, 게임을 하거나 드라마를 보는 대신 교과에 관련된 책을 읽었어. 그러니까 성적이 올랐지. 그리고 지금, 회사에서도, 계속 열심히 하고 있어. 퇴계 이황은 ‘박기후인’이라 했어. 나에게는 엄격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후하게 대하라는 뜻이지. 회사 생활을 하려면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과 잘 어울려야 해. 그런데 사회생활이 문제라면서도 해결하려고 노력도 하고 있지 않잖아. 화가 나. 나는 그렇게 노력해서 대학에 합격했는데, 널널하게 합격한 너는 왜 이렇게 노력도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거야!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아? 내가 다니는 기업에서 특별 사원을 모집하고 있어. 내가 볼 때, 너는 능력이 있어! 그리고 나도 널 도와줄 수 있는 만큼 도와줄 거야. 그런데 지금의 너라면 시도조차 하지 않고 포기할 게 분명해!” 여은현은 반박할 수 없었다. 그저 선생님에게 혼나는 어린 아이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왜인지 변명하고 싶었다. “나도 노력은 했어. 했는데…, 내 노력은 보상을 주지 않았어! 나는 너와 달라.”
그는 스스로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정유하처럼 노력하지 않았다.
“대답해 봐. 너는 왜 다시 한 번 시도해 보지 않는 거지?” 여은현은 정유하가 그렇게 지적해 주지 않아도 그런 자신을 한심해 했다. 그는 변화를 원했지만, 동시에 변화를 두려워했다. 그는 스스로의 실패를 뼈저리게 느끼며 내뱉은 말, 그가 사실이라 믿는 그 말을 말했다. 그는 이미 정유하가 그 말을 반박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부정당하기를 바라며 내뱉은 말이기도 했다. 그에겐 제 등을 떠밀어 줄 손이 필요했다. 전에도 했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와 장소도, 대상도 똑같았다. 여은현은 정유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유하는 여자치고는 키가 컸기에, 딱히 시선을 맞추기 어느 한 쪽이 올려볼 필요가 없었다. 그는 비뚤게 웃으며 말했다. “1/∞은 0에 가까이 수렴할 뿐, 0은 되지 못해. 나는 그냥 그런 인간이었던 거야. 목표로 했던 0에 닿을 수 없는 인간.” 정유하는 그 말을 듣고는 그에게 안타까움을 느끼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담겨 있었다. “네가 잊고 있는 게 있어. 그건 네가 말하는 개념보다 더 기본이 되는 거지. 는 1이야. 1보다 언제나 조금씩 부족하지만, 그 순환소수는 1에 도달했어.”
그는 그 순간 그와 다른 이들 사이, 100m의 ‘차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 말은, 그의 등을 밀어주기에 충분했다.

그 말을 끝으로, 정유하와 특별한 대화는 없었다. 그저 정유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선택을 보겠다는 듯이 반응을 살폈다. 그 침묵은 그가 할 일이 있다며 자리를 벗어날 때까지 계속 됐다. 카페를 빠져나온 뒤, 그는 몇 분간 가만히 서 있었다는 것을 깨닫곤 원룸으로 향했다.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 않았으니, 해가 완전히 져 밤이 오기 전에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드디어 돌아가는 원룸이었다. 카페에서부터 한참을 생각하던 것이지만, 정유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간과해오던 것이었다. 계속되는 생각의 연쇄에 느려진 걸음이라도, 이제 구석진 골목길만 지나면 도착이었다. 골목길의 입구에 선 순간, 보인 풍경에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골목길은 해 질 녘 어스름한 황혼을 바탕으로, 하얗게 빛나며 휘날리는 자그마한 덩어리들로 가득했다. 참고 있던 숨을 저도 모르게 쉬어버릴 정도였다. 빛 덩이 중 하나가 그의 근처로 다가오자, 위잉위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와 지금 그가 들여다보고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를 통해, 그 빛 덩이의 정체를 깨닫고는 그는 다시 한 번 놀랐다. 그것들은 하루살이였다. 노을빛은 들어온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렇게나 보잘 것 없는 하루살이 인데도, 햇빛을 받으니 날개에 비쳐 눈부시게 빛나다니. 그 광경은 시선을 빼앗기 충분한 것이었다. 책이었는지, 생물 수업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지만, 하루살이에 대해 그가 알고 있던 지식이 떠올랐다. 하루살이는 유충인 상태로 1년을 보내고 성장하여 성충이 되면 채 하루도 살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니 하루살이들은 온 힘을 다해 위잉위잉, 합창을 하며 그 잠깐을 살아간다. 그는 하루살이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기억에 새겼다. 그것은 그의 생각을 굳히는데 충분했다.
확고해진 생각은 결심으로 이어졌다. 집으로 돌아가 할 일이 생겼다. 정유하는 그에게 직장에 대해 생각이 있으면 자신에게 전화를 걸라고 말했다. 취업 준비를 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 시간이 싫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취업에 성공했을 때 변화해 있을 자신을 떠올렸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떠올렸다. 자신의 동창생들을 떠올렸다. 걸리는 시간은 그의 상상 속 모든 것을 현실에 구현하기 위해 걸리는 시간이니, 아깝지 않았다. 애초에 지금까지 그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했던가.
여은현은 그 빛 무리를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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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일 19 시 전
*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 않았으니, 해가 완전히 져 밤이 오기 전에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이 문장을 읽고 잠깐 고개를 갸우뚱 했습니다. 지금 여은현은 동창회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 아니었나요? 정유하가 업무가 늦게 끝나 참석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보아 주말은 아니었을테고, 그렇다면 평일 저녁 동창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일텐데, 게다가 정유하와 차를 마시기까지 했으니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 않았다는 건 뭔가 어색합니다. 노을빛에 하루살이떼가 밝게 빛나는 장면을 그리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랬다면 앞에 좀더 정교한 장치가 필요해 보입니다. 또 전개에서 여은현은 아침 출근길에 마트에 가는 길 아닌가요? 그 뒤에 보면 여은현은 늘 오전 11시 쯤 일어난다는 진술이 나오는데 그럼 출근 시간에… Read m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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