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밭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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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늦여름이었을 것이다. 중학생 시절 데면데면하게 지내던 아이에게서 갑작스러운 메일을 받았다. 의례적인 인사말 몇 마디를 건넨 후에 그는 내 근황에 대해 줄곧 전해 들었다며 그 당시 내가 열성적으로 하고 있던 이런저런 비교과활동을 언급하더니 이에 대한 제 코멘트를 덧붙였다.

‘…. 정말 가시밭길을 스스로 기어들어가다니 마조히스트의 기질이 있구나….’

 

더 이상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도 들리지 않는 늦은 밤이었고 방구석에는 낮에 예은이와 함께 체크리스트를 써가면서 꾸려놓은 캐리어가 있었다. 나는 혼자 누워 뒤척거리면서 답장도 하지 않고 곧 잊어버렸던 그 메일을 계속 곱씹고 있었다. 수학여행을 가기로 선택한 것이, 더군다나 한라산 코스를 택한 것이 과연 옳았을까 하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나는 아킬레스건이 선천적으로 좋지 않아 오래 걸을 수 없었고, 그래서 초등학생 때도 중학생 때도 다른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간 동안 학교에 남아 당직 선생님과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그런 주제에 한라산이라니, 대체 무슨 정신이었느냐고 나는 과거의 나에게 물었다. 정상에 올라가면 제주도 전체가 조그마한 디오라마처럼 발아래에 펼쳐지고 주위에는 쉼 없이 노루며 사슴이 뛰어다닌다는 말에 혹했을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 수학여행이니 무언가 특별한 것을 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한라산이 남한에서 제일 높은 산이라는 사실은 기억나지 않았을 것이다. 함께 한라산에 가자고 주변 아이들에게 떼를 썼던(물론 그 중 99%는 단칼에 거절했다) 사람이 나였으므로 탓할 사람도 없었다. 진지한 고려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한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막상 수학여행이 다가오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담당한 파트가 2분도 채 안 되는 장기자랑 춤 연습도 힘에 부쳤고, ‘진짜 한라산을 오르겠다고?’라고 묻는 주위의 불신하는 눈빛도 그제야 의식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딱딱한 캐리어 바퀴가 발에 채일 때마다 나는 완전히 잊은 줄 알았던 메일 내용을 무한 반복 재생하고 있었다. 기억하는 바로 그 메일은 이렇게 끝이 났다. 가장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던 것은 그 마지막 문장이었다.

‘ … 그럼 고생해라. 괜히 주변 사람들 고생시키지 말고. ㅇㅅㅇ’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의 농도가 갑작스럽게 옅어졌다. 아파트의 가로등이 일제히 꺼졌다는 뜻이었고, 곧 해가 뜰 것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일어나 머리를 감았다. 수학여행 첫째 날 새벽이었다.

 

 

2

 

3박 4일의 수학여행 중 한라산 등반은 셋째 날에 배정되어 있었다. 둘째날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방에서 친구들과 초콜릿 소물리에를 표방하며 기념품 가게에서 사 온 초콜릿을 까먹고 있던 나는 한라산 코스 참가자들은 로비로 모이라는 안내방송을 들었다. 로비에서 초코바, 소시지 등 한라산 등반 중에 먹을 간식들을 일인분 씩 나눠 담기 위해서였다. 맨 왼쪽으로부터 4, 3, 2, 1 개씩 담으면 돼, 라는 선생님 말씀에 따라 지퍼백에 간식을 나눠 담았다. 한라산 코스를 신청한 순간부터 줄곧 실감나지 않았던, 이튿날에 한라산을 오른다는 사실이 그제야 실감나기 시작했다.

 

한라산은 등반 가능 시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한라산 코스 아이들은 다른 코스보다 더 일찍 로비에 모여 출발했다. 한라산 정상으로 가는 코스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그 중 우리가 오를 코스는 성판악 코스였다. 전날 지퍼백에 챙긴 간식과 두 병의 물, 점심으로 먹을 김밥을 가방에 넣고 ‘13:00까지는 진달래밭 대피소에 도착해야 백록담까지 등반할 수 있습니다’라고 쓰인 푯말을 넘어 한라산에 입산했다.

 

처음에는 평범한 돌길이 이어졌다. 양 옆으로 빽빽이 나무가 심겨져 있다 뿐이지 동네 길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길이었다. 한라산도 별거 아니네, 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조로운 길이라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한참을 걸어 나온 표지판에는 아직 우리는 초급 단계의 등산로에 있으며, 차후 중급 단계와 고급 단계의 등산로를 모두 거쳐야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 각 단계가 끝날 무렵에 대피소가 한 개씩 있었는데, 기상 상황이 악화되었을 때 사람들이 잠시 머무를 수 있게 만든 곳이었던 모양이었다. 초급 단계 등산로가 가장 길이가 길기는 했지만, 아무리 걸어도 일정한 간격마다 세워진, 남은 시간과 간 거리를 알려주는 표지판에 적힌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처음의 목표는 함께 한라산 코스를 신청한 친구 K와 속도를 맞추는 것이었다. 첫 이십 분 정도동안은 실현 가능한 목표였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K의 날랜 걸음을 따라잡는 것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빠른 보폭으로 걸어가는 그를 따라잡으려고 엉성하게 뛰어가 봐도 그가 있던 위치에 내가 도달하자 K의 실루엣은 잔인하리만치 멀어져 있었다. 초반부터 마구 뛰니 메고 있던 크로스백(등산을 하려면 역시 배낭을 챙겨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한라산에서 실감했다)이 점점 더 무겁게 느껴졌다. 결국 나는 K를 좇는 것을 포기하고 내 속도에 맞춰 걷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러자 혹시 내가 일행의 끄트머리일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지만 뒤를 돌아보니 다행히 저 멀리서 실루엣으로 수학 선생님과 한 무리의 아이들이 보였다. 나는 앞으로 돌아 다시 걸었다.

 

한참을 그렇게 걷다 보니 나는 내 가시범위 내에서 홀로 되었다. 잠시 멈춰서 앞뒤를 살펴보았지만 누군가 멀어지는 소리도 가까워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내가 걸으면서 작은 돌을 차는 소리에 섞여 정체모를 조그만 소리만이 들렸다. 아마 나뭇잎이 서로 부딪히며 뒤척거리는 소리였을 것이다. 속삭임 같기도 부스럭거림 같기도 해 계속 귀를 기울이게 되는 소리였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한동안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길이 뻗어나가는 데로 걸어 나갔다. 혼자 걸어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해 주는 소리였다. 하산할 때 그 30분 남짓한 길을 다시 지나가게 되었다. 그 때 국어 선생님께서는 나와 다른 친구를 그 길 구석에 세워두고 일 분 동안 눈을 감고 있으라고 하셨다. 등산하는 길에 들었던 소리가 증폭되어 고요하면서도 왁자지껄하게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3

 

30분 정도 지나 해발 고도를 알리는 비석 앞에 모여 뒤로 오는 아이들 수를 세고 있던 국어 선생님과 서너 명의 아이들을 만났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오른손으로 받쳐 들고 걷고 있던 크로스백을 보시더니 들어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처음에 나는 사양했지만 선생님께서는 한 번 힘이 빠지면 돌이킬 수 없다며 계속 설득하셨다. 그래도 역시 내가 메고 가야겠다고 말하려던 찰나 한 무리의 남자아이들이 개선부대처럼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지나갔다. 그 순간 그들의 함성 소리에 기가 꺾여 계속 고집을 부리려던 패기가 사라졌다. 자칫 이러다가 조 전체가 지체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시간 후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점심을 먹을 때 먼저 와 밥을 먹고 있던 K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네 가방을 쌤이 들고 온 거야?”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K는 농담조로 반칙이네, 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괜히 능력도 안 되면서 한라산에 오른다고 했나, 라는 후회와 부끄러움이 들며 종전에 일어난 다른 사건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가방을 선생님께 드리고 나는 한 손에 얼음물을 들고 계속 걸어가다 B를 만났다. 그는 물이 거의 다 떨어지고 얼음덩이만 남아있던 내 물병을 보더니 자기 물을 좀 부어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거절했다. 다시 목마르기 전까지 남은 물이 얼음을 좀 녹여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산을 올라갈수록 목이 말라 남은 물을 다 마셔버렸고, 점점 기온이 낮아지던 탓에 얼음은 좀처럼 녹지 않았다. B는 이미 저만치 앞서 간 상태였고, 얼리지 않은 물 한 병은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가방 안에 있었다. 초급 코스와 중급 코스 사이의 대피소에서 물을 채워 넣어야 했었겠지만 멈춰 쉬면 뒤처질 것 같아서 바로 중급 코스 등산길로 들어갔던 것이다. 진달래밭 대피소에 들어갈 때까지 나는 전날 오전부터 냉동실에 넣어 꽁꽁 언 얼음에서 한 방울 씩 떨어지는 물을 삼켜가며 걸었다.

 

나는 타인들보다 뒤처지거나 남의 신세를 지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다. 다른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은 늘 쉬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을 하거나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항상 어려웠다. 한 친구는 가끔 나에게 왜 그렇게 아등바등 사는지 물었다. 그때마다 나는 이런 삶의 방식이 있다면 저런 삶의 방식도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하곤 했었다. 한라산에 올라 그 아이가 했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진달래밭 대피소에는 육개장 한 종류의 컵라면만을 팔았다. K와 나는 선생님께서 사 주신 라면 한 컵을 나눠 먹었다. 익히 알던 육개장과는 조금 다른 맛이 났다. 기압 때문인지 면발도 더 탱탱하게 느껴졌다. 중학교 때 에베레스트를 다녀오신 음악 선생님께서 대피소에서 먹었던 신라면 맛이 생생하게 기억난다는 말을 하셨다. 그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의 뜻을 한라산을 오른 후에야 이해하게 되었다.

 

 

4

 

점심을 먹고 대피소를 나와 고급 코스에 접어들었다. 고급 코스는 그 이름에 걸맞게 험준했다. 주변의 등산객들은 등산 스틱으로 돌을 조심스럽게 디디며 걸었다. 나는 배낭은 물론 등산스틱도 없었으므로 그 사람들이 밟은 돌을 유심히 보고 디디려고 노력했지만, 여러 번 발을 헛디디기도 했고 넘어지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고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 몸으로 느껴졌다. 험한 돌길이었던 등산로가 나무 계단으로 바뀌었다. 원형으로 굽어 올라가는 나무 계단을 삼십분 정도 올라가자 사방을 빽빽하게 채운 나무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산 아래가 굽어 보였다. 절벽을 메운 보라색 꽃 뭉텅이 아래로 제주도 전체가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광경인 양 조그맣게 보였다. 산들바람을 맞으며 그 길을 걷는 것은 기묘하고도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아름답다’의 말뜻을 시각적으로 나타내면 이러한 느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기분 좋게 불었던 바람이 점점 강해졌다. 정상에서 1km 정도 남은 지점부터 바람은 한겨울에도 겪어 본 적이 없는 강도로 불어 닥쳤다. 바람에 휩쓸려간다는 말의 뜻을 알 것 같았다. 언젠가부터 등산로에는 계단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굵은 밧줄이 묶여 있었다. 그것 또한 여기저기 나무 지지대가 빠져 그리 믿음직스럽지 않은 모양새였지만, 등산객들은 그 줄에 매달려 기어가듯이 얼마 남지 않은 정상으로 올라갔다. 행여나 모자가 바람에 날아간다면 영영 찾지 못할 것 같아 나는 한 손으로 모자를 잡고 다른 손으로 밧줄을 잡고 올라갔다. 미련한 선택이었다. 바람이 밧줄을 잡은 손 쪽으로 불어왔고, 나는 순식간에 줄을 놓치고 밑으로 쓸려 내려갔다. 내가 인간 폭탄이 되어 기어 올라오는 사람들을 도미노처럼 산 아래로 무너뜨리기 직전에 누군가 뒤에서 나를 잡아 끌어올려주었다. 산타할아버지처럼 숱 많은 수염을 늘어뜨린, 아마도 노르웨이 계통으로 보이는 덩치 큰 서양인이었다. 그가 영어를 알아들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나는 최대한 크게 감사를 표하고 얼마 남지 않은 길을 마저 기어올랐다.

 

한라산의 정상, 즉 백록담에서도 바람은 세차게 불었다. 나는 계단에 앉아 간식을 까먹고 있던 아이들에게로 달려갔다. 산타할아버지 수염의 외국인은 제 집 마루인양 익숙하게 나무 계단에 앉아 페이퍼백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정상에 도착한 수학 선생님은 대자로 누워 주무시고 계셨다. 나는 바람을 헤치고 분화구 쪽으로 다가가며 푸른 물이 반짝거리는 백록담 주위로 노루며 사슴이 평화롭게 노니는 모습을 드디어 보게 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백록담 물은 말라 진갈색 바닥이 드러나 있었고, 당연히 노루나 사슴은 보이지도 않았다. 애초에 한라산을 오른 것이 백록담의 아름다운 광경을 보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실망할 법도 했는데, 그러한 광경을 보고도 아쉽지가 않고 도리어 기쁘고 뿌듯하기만 했다. 나는 백록담에서 눈을 돌려 내가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았다. 끝없이 이어진 길고 아득한 길이었다.

 

 

5

 

내려오는 길도 지겨우리만치 멀었지만 올라가는 길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발을 따라 몸이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후발대와 함께 그 아이들이 등산객들이 버리고 간 페트병이며 비닐 조각을 줍는 것을 도우며 걸어 내려갔다. 국어 선생님과 아이들이 쇼핑백(놀랍게도 쇼핑백 또한 산에 버려져 있던 것들이었다)에 쓰레기를 꽉 채워 들고 오는 것을 보고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말이야…. 사람들이 내 걱정을 해 주는 걸 원하지 않아. 그럴 때마다 초라해진 기분이 들거든.”

멍하게 걷다가 들려온 말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올라갈 때 발을 다친 아이의 목소리였다. 옆의 친구가 그를 걱정하며 한 말에 대한 대꾸였던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걸어 내려가며 한라산을 오르기 전의 내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지 돌이켜보았다.

 

오래전 받은 메일의 내용이 다시 떠올랐다. 가시밭길, 그 아이는 메일에 가시밭길이라고 써 놓았다. 수학여행에서 한라산을 오르기로 한 것은 내 능력에 비해 과분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애가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메일을 보낸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 말은 대충 맞아 들어갔다. 나는 여전히 가시밭길에 제 발로 기어 들어가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만의 가시밭길은 아니었다. 아마 내가 훗날 혼자 한라산을 올랐다면 나는 정상을 보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고 내려왔을 것이다. 선생님께서 가방을 들어주시지 않으셨다면, K가 고급 코스를 내려갈 때 한 걸음 앞서 걸어가며 길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산타 수염의 서양인이 그 슬로프에서 나를 붙잡아주지 않았다면, 나는 백록담을 끝내 보지 못했을 것이고 어쩌면 산 아래에 다시 발을 붙이지도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 아이가 예견한 것처럼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며 가시밭길을 걸어 올랐다. 하지만 가끔은 다른 사람의 도움은 절대 받지 않겠다고 고집부리지 않고 타인의 손을 빌리는 것도 괜찮다고, 이제는, 조금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오래도록 묵혀 놓은 그 메일에 답장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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