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체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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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체이탈

― 아무에게나 없는 사람

 

 

나는 필름 속의 얼굴로 살아가요. 당신이 거울 앞에서 눈감을 때마다 찍히는 영정. 언제나 죽은 몸이지만 죽어본 적은 없어요.

 

매일 당신이 잠드는 방 벽지에는 필라멘트들이 박혀 있어요. 전등을 끄는 것으로 이곳의 달이 사라져도, 별들은 가까스로 빛날 테지만. 그것이 나의 초점이 되는 일은 영원히 비밀이에요. 우리는 흩날려도 언제든지 되돌아올 수 있는 체온이지만, 잠든 몸을 빌려 입고 선풍기를 꺼요.

 

반대로 깍지를 끼고 잠에 드는 건, 내가 당신에게 선물한 습관이에요. 버릴 수 없어서 무거워진 두 손의 감각으로 방문을 열어요. 집에는 양말들이 잠들어 있고, 고양이는 내게 꼬리를 바짝 세우지만. 그들은 언제든지 당신을 떠날 수 있어요.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를 떠나지 못하고, 머무르는 일은 머무를 사람에게 떠맡겨요.

 

나의 사인(死因)은 불면증이에요. 필라멘트 한 알을 입에 넣고 잠드는 것으로 병은 낫겠지만. 당신이 병실에 누워 잠들지 못할 때, 나는 시체가 없는 관 속을 오래 보고 있어요. 빛줄기가 그곳에 대신 누워 있고, 영정사진에는 아무것도 찍혀 있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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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개월 3 일 전

별환님의 표현들은 참 멋져요! 제가 배울점이 많은 걸 느껴요. 다른 글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4 개월 9 일 전
시적 전개나 흐름이 안정적이군요. 재밌게 봤어요. 어릴 땐 꿈을 꾸는 게 유체이탈이 아닐까 생각하곤 했습니다. 여러모로 공감 가는 시였습니다. 시적화자의 사유를 잘 풀어놓았고 병실 안이 '시체가 없는 관 속' 같다는 것도 상상이 됩니다. 삶과 죽음이 맞물리면서 '아무에게나 없는 사람'이라는 부제처럼 죽은 듯 잠든 자신을 볼 수 있는 (유체이탈한) 사람도 별로 없을 듯 해요. '불면증'이 죽음의 원인이라면 화자는 의식적으로 몸 밖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싶군요. 그러나 마지막 구절 '빛줄기가 그곳에 대신 누워 있고, 영정사진에는 아무것도 찍혀 있지 않아요'는 모호하게 다가온답니다. 생각해봐야 할 것은 '유체이탈'로서 창작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고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입니다. 그 의미가 시의 확장력을 만들어줄 텐데 이… Read m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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