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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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본 기린의 목이 길었기 때문에 나는 눈을 떼지 못했어 나와 달랐거든 발이 네 개, 목은 길고, 먹는 건 풀뿐이야, 멍도 너무 많았지 엄마의 옷소매를 끌어당겨 엄마의 귀에 내 입을 갖다대고 소곤거렸어 쟤는 엄마 배에서 나올 때 많이 아팠을 거라고 엄마가 웃었어 꺼이꺼이 숨소리가 넘어갈 듯이 웃었지 나는 입을 비죽 내밀었어 엄마가 손가락으로 눈밑에 묻은 눈물을 닦고 말했어 쟤는 너 때문에 멍들었다고 내 눈은 커졌고 입술은 떨렸고 다리도 떨렸는데 뒷걸음질 치다가 발을 헛딛어서 엉덩이를 땅바닥에 찧었어아마 눈시울이 붉어졌을 거야 눈이 뜨거웠으니까 나는 울면서 미안해 미안해 외쳤는데 너는 이해했는지 내게 그늘 되어주던 나무의 나뭇잎들을 먹기 시작했어 이걸로 너와 나는 같다는 것이었을까 눈을 들었어 내 머리 위에 있는 너의 턱을 보니까 눈물이 멈췄고 나는 손을 뻗어 너의 턱을 만졌지부드럽더라 너의 털을 뽑았어 너는 나를 보더니 다시 목을 곧게 세우고 다른 기린들과 어울렸어나는 차를 타고 집에 오면서 그 하얀 털들을 손에 꼭 쥐고 잠 잤다고, 엄마한테 들었지

동물원을 갔다와서

차 뒷자석에서 꾸벅꾸벅 졸며 자는 내 딸 손에 쥐어진 하얀털을 보았어 엄마처럼 숨이 넘어가듯이 웃어볼까 생각해봤어 내 딸은 나랑 똑같더라고 나는 손으로 그녀의 맨들맨들한 턱을 깨지 않도록 살짝 꼬집어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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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월 9 일 전

헉 표현들이 참 마음에 들어요! 머릿속으로 상황들을 그대로 떠올리면서 읽었어요ㅎㅎㅎ
화자는 '기린'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화자의 엄마 또한 너 때문에 쟤가 멍들었다며 화자를 탓하고요. 그래서 기린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왜인지 화자의 가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사람은 기린의 몸에 멍이 든 것처럼(기린 몸에 있는 점을 멍이라고 표현한 부분도 참 좋았답니다) 신체적이나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듭니다. 그것에 대해서 화자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고, 그것에 의해 마음의 한 구석이 갉아먹히기 시작한 것 같기도 해요. 앗 물론 개인적인 상상과 추측일 뿐입니다ㅎㅎ 시 재밌게 잘 읽었어요. 기린P님의 닉네임과 이 시가 어떠한 관련이 있는 건지 궁금하네요. 잘 읽고 가요:)

1 개월 20 일 전
닉네임과 제목이 같다는 게 흥미롭네요. 아마도 기린에 대한 특별한 정서가 있지 않을까 싶군요. 동물원을 갖다온 시적화자가 딸의 손에 있는 하얀털을 보고 화자와 경험(비슷한 상황)을 풀어놓은 이야기 구조입니다. 그런데 저는 왜 기린인가 궁금해요. 목이 길어서 '엄마 배에서 나올 때 많이 아팠을 거라고' 말하는 화자에게 엄마가 장난으로 '재는 너 때문에 멍들었다'고 화자를 속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왜 그랬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엄마가 배가 화자를 낳을 때 배가 아팠던 것을 떠올리고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동물원에서 동물의 털을 뽑을 수 있는지 현실적인 의문이 생긴답니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으면 비유가 살아나지 않죠. 화자가 딸(그녀는 성숙한 느낌이 듭니다)의 턱을 살짝 꼬집듯 기린의 턱을 만지고 털을… Read m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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