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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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름이 유독 따가웠다. 구름을 비집고 흐르는 빛이 발끝에 스쳤다. 집 오는 길의 해 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아슬아슬하게 타임세일에 맞춘 후 아이스크림 코너에서 눈을 떼지 못한 진성이 결국 한 무더기 산 아이스크림 봉지를 붕붕 돌리며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거리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돌멩이 하나를 툭 걷어찼다. 하나, 둘, 셋, 넷. 돌멩이는 정확히 네 번 튀어 오르고 말았다. 다시 차고 싶었는데 이미 돌멩이를 지나쳐버린 후라 진성은 깔끔하게 포기했다. 노을이 전깃줄에 앉아 진성을 응시했다. 더워, 그는 제 후드티를 붙잡고 펄럭였다. 피부에 닿는 바람이 건조한 것 같으면서도 축축하고 더웠다. 부채질을 하느냐 마느냐는 별 차이가 없었다. 이렇게 더운 건 처음이다. 진성에게는 36년째의 여름이었다. 다시 말하면 36년 동안 처음 맛보는 더위였다. 한산하고 잔잔한 오후 일곱 시의 여름이다. 이따금씩 스쳐지나가는 사람들도 조용하고 뒤에 걸린 석양까지 침묵을 유지했다.

더워요?

서빈이 물어왔다. 처음과 끝이 정갈한 어조였다. 진성은 막대 아이스크림을 빨며 응, 하고 긍정했다. 그래봤자 우물거리는 말이 가까웠다. 또 다시 말이 멈추고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아이스크림이 녹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넌 더위 잘 안 타서 좋겠네. 아이스크림 탓에 발음이 뭉개졌다. 서빈은 용케도 알아듣고 대답을 흐렸다. 거리에 걷는 소리가 울렸다. 미묘하게 즐겁다고 진성은 생각했다.

당신은, 좋아요?

목적어가 없는 말이다. 무엇이 좋은지조차 되묻지 않고 진성은 다시 그래, 하며 대답했다. 시선 너머 집이 보였다. 무더위에 아스팔트가 불 위에서 요리하는 팬처럼 자글자글 끓으며 익어간다. 진성이 오른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이 잔뜩 든 봉투를 품에 안았다. 차갑고 눅눅하다. 벌써 흐물흐물했다. 그러나 걸음은 더 이상 빨라지지 않는다. 한 입 남은 아이스크림 조각이 혓바닥에 올라간다. …다 먹어버렸네. 진성은 아쉬운 눈초리를 흘기며 대수롭지 않게 막대를 봉투에 넣었다. 서빈도 왼손에 쥐고 있던 큰 쇼핑백을 오른손으로 옮겨 잡았다. 팔이 아프거나 힘들어서가 아니라 진성이 왼쪽에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조금씩 부딪치던 봉투와 가방들의 소리가 뚝 없어졌다. 새들이 노을처럼 전깃줄에 앉아서 짹짹거렸다. 일정한 규칙도 없이 마구잡이로 들려오는 소리들을 즐기면서 노니는 발걸음이 이상하게 가벼웠다.

 

 

 

2.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그에 따라 나른해지는 시간이 늘었다. 이렇다 표현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휘휘 내젓는 손에 감겨오는 공기마저 덥고 무거웠다. 공기에 짓눌려 몸을 일으키기가 힘들었다. 집 밖으로 나가는 횟수가 부쩍 줄었다. 활동범위가 집 안으로 고정됐다. 진성뿐만 아니라 바깥에 나도는 사람들을 보는 게 반가울 정도였다. 물마다 얼음 서넛은 집어넣고 마시는 진성을 서빈이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날의 온도보다 눈빛에 다 녹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뜨거웠다. 옷의 길이도 점점 짧아졌다. 헐렁헐렁한 반바지 사이로 허벅지가 훤히 드러났다. 옷이 짧잖아요. 서빈이 괜한 참견을 했다. 진성이 손을 까닥였다. 신경 쓰지 마. 역시나 돌아오는 말이 뻔했다.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가 있어요. 불만스러웠지만 서빈은 더는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커튼이 주홍으로 물들었다. 인공적인 오렌지 사탕의 단맛이 날 것 같았다. 열어둔 창 사이로 이따금씩 바람이 불어 커튼이 휘날렸지만 전혀 시원하지 않았다. 뉴스에서 한여름이 시작되었다 보도되고 나서 고작 열흘 만이었다. 진성은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로 멱을 감는 날이 많아졌다. 수건으로 제대로 닦지도 않고 나오는 날이면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였다. 땀 때문이 아니라 습기 때문에 피부가 질척거렸다. 진성은 병적일 정도로 물을 끼얹어댔다. 소금물처럼 끈적이는 것들을 물로 쓸어내고 나서야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선풍기가 끊임없이 돌아갔다. 전기세가 얼마나 나오는지 경악할 일이었다. 무의미하게 틀어둔 텔레비전에서는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귓가에 찬연하게 울렸다. 하얀 소금기와 진성의 피부. 무엇이 더 짜고 달지 서빈은 조용히 혀끝에 올려놓고 우물거렸다. 진성은 알면서 묵인했다. 들이마시는 여름 냄새는 녹슨 물비린내와 풋풋하고 떫은 풀 냄새가 섞여 났다. 대강 표현해보자면 그렇다. 풀벌레 우는 소리도 죽은 날에 진성이 입맛을 쩝쩝 다시며 “이 냄새는 어쩐지 식욕을 돋워.” 뜬금없이 말했다. 그다지 대답을 바라지 않는 눈치라 서빈은 뒤의 할 말을 찾을 수고를 덜었다. 그 뒤 마신 물에서 그런 냄새가 났던 것도 같았다. 하루가 그렇게 지나갔다. 혹서만 아니라면 평화롭고 조용한 날들이었다. 그야말로 관 속 같았다. 더운 날들의 지속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삼일이 지나고 시간은 계속 앞만 보고 흘러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느긋했다. 여름에 숨이 막힌 개미떼들을 흉내 내는 것 같았다. 그것이 멸망의 단초였다. 종말과 종결의 전초였다. 무지한 사람들만 모르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3.

병증을 알았다. 과학자들은 치료제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인간이란 참으로 대단한 존재들이었다. 역시 황량한 폐허에서 이 찬란한 문명을 이룩해낸 이들이었다. 폭염 한 달 째, 뉴스에서 여자 아나운서가 보도했다.

 

[지구의 온도를 급격하게 낮추는 약을― 지구온난화는 물론― 인류는 지금까지처럼 해낼 것입니다―]

 

서빈은 뉴스를 경청했고, 진성은 여전히 일을 나갔다. 팔랑팔랑 신문 넘어가는 소리만 들렸다. 진성은 뉴스보다 신문을 더 선호했는데 폭염 때문에 끊긴 신문이 오랜만에 다시 배달온 날이었다. 신문에서도 똑같은 글자가 써져 있었다. 피곤한지 진성이 팔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뉴스에서는 지겨운 과학자들의 인터뷰가 한창이었다. 같은 뉴스가 윙윙 계속해서 돌아갔다. 아직도 해? 진성이 물었다. 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성은 시선을 돌리다 갸우뚱 거렸다. 아랫배 쪽에 뭉근한 것이 가득 들어차 근질거렸다. 벅벅 긁자 선이 짙게 그려졌다. 그런데도 아직 몇몇 낱말들이 모여 뭉쳐 있었다.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불안의 주기가 일정하게 찾아왔다. 모두가 이 열병에서 벗어나길 원한다. 너무 오래 지쳤다. 온 나라에서 더위를 호소하고 있었다. 진성은 생각하는 것을 관두었다. 깊게 궁리하는 것은 취향이 아니었다. 서빈이 가늘게 눈을 접으며 진성을 낱낱이 살폈다. 무기력한 기색이 가득이었다. 서빈은 뉴스를 끄고 진성을 관찰한다. 느리게 눈을 깜박일 때 속눈썹 하나 떨림까지 빠지지 않고 지켜보는 것, 아주 뜨거운 음식을 삼켰을 때처럼 목구멍 부분이 화했다. 이런 게 바로 사랑이지 않을까 하고 서빈이 생각했다. 더위가 이성을 앗아간 모양이었다. 눈길이 거스러미 올라간 입술 위로 닿아도 진성은 노랫소리를 흥얼거리고만 있었다. 서빈이 하는 일이 부정한 적은 거의 없었다. 햇빛에서는 썩어가는 과일의 향이 난다. 서빈이 허기를 느꼈다. 뭉근 과즙을 베어 물고 뱃속으로 넘기고 싶은 마음을 집어삼킨다. 불빛이 빨갛게 웃었다. 서빈은 직감했다. 내가 나를 망치고 이 사람을 망치겠구나. 자꾸만 비실비실 웃음이 나왔다. 도덕이 부도덕으로 뒤바뀐다. 감사하게 여겨야 할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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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월 24 일 전
* " 진성에게는 36년째의 여름이었다. 다시 말하면 36년 동안 처음 맛보는 더위였다." – "진성에게는 36번째 여름이었다. 다시 말하면 36년만에 처음인 더위였다." * "그래봤자 우물거리는 말이 가까웠다." – "그래봤자 우물거리는 말에 가까웠다." * " 진성은 아쉬운 눈초리를 흘기며 대수롭지 않게 막대를 봉투에 넣었다." – "진성은 아쉬운 눈초리를 흘리며 대수롭지 않게 아이스크림 막대를 봉투에 넣었다." * "팔이 아프거나 힘들어서가 아니라 진성이 왼쪽에 했기 때문이다." – "팔이 아프거나 힘들어서가 아니라 진성이 왼쪽에 있기(섰기) 때문이다." * "피부가 질척거렸다." – 어떤 상황인지는 짐작이 가지만 질척거리다는 표현은 다소 과장된 것 같아요. 질척거리다는 (진흙이나 반죽이) 물기가 많아 매우 차지고 진 느낌이 든다는 의미거든요. 고민해보시길. * (감각적인) 묘사가… Read m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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