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한 맺음 – 드라마 '도깨비'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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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타 드라마 속 커플들과 다르게 도깨비내외의 사랑이 더욱 애틋해지는 까닭은 모든 순간, 불완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 속 도깨비는 더 이상 얻을 게 없다. ‘영원불멸의 삶’이라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장치는 도깨비를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이게 만들며 어떤 드라마보다 현실적인 주인공으로 전환시킨다. 가벼운 웃음과 무거운 성찰은 도깨비 또한 신과 다를 바 없는 능력을 지녔지만 ‘결국 인간’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도깨비가 제어하지 못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죽음과 사랑이다. 도깨비는 도깨비신부가 등장하기 전까지 늘 죽음을 갈망하며 신을 원망하기만 했다. 하지만 신부를 찾게 되는 순간 고민한다. 죽음을 두려워한다. 결국 신은 가혹했다. 삶을 살아갈 의지를 빼앗으나 이를 저버릴 용기조차 주지 않았다.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지도록 해놓고 다시 삶을 앗아가려 한다. 완벽해 보이는 김신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지은탁과의 사랑조차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는 무능력자임을 깨닫는다. 다시 살아가고자 한다. “돌아서 한 번 더 보려는 것이 불멸의 삶인가, 너의 얼굴인가. 아, 너의 얼굴인 것 같다.” 결국 도깨비에게 의지가 생긴다.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두 가지를 다 가져보겠노라고. 사랑과 삶을 모두 지켜보겠노라고 다짐한다. 그리고 살아간다. 네가 죽을지, 내가 죽을지 모르는 오늘을.

그림책 ‘나는 죽음이에요’의 한 글귀가 생각났다. ‘삶과 나는 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가까운 곳에 늘 함께 있어요’. 김신이 불멸을 벌로만 생각했던 이유는, 우리네 삶이 그렇듯 죽음을 먼 미래로만 느꼈기 때문이라 짐작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무의미한 하루의 연속을 보내는 도깨비와는 다르게 인간은 후회 없는 매일을 위해 노력한다는 점이다. 그랬기에 도깨비의 900여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많은 걸 깨닫고 성찰한 듯 말하지만 도깨비는 그 시간동안 성장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삶을 저버리려는 자들을 구하는 장면을 보고 감명받지만, 그저 도깨비의 이기심이 아닌가. 누구보다 삶을 끝내고 싶어하는 자가 다른 사람을 살리고, 그 사람의 새로운 생을 원동력으로 900여년을 버텨오는 동안 김신의 살고 싶어 살았던 것이 아니므로. 김신에게는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은 죽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나,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 또한 살아야 할 이유가 되지 못해 김신의 삶은 고려시대 무신으로 멈춰있었다. 지은탁과 만나는 순간부터 김신의 시간은 다시 흘러간다. 무정하게도 시간은 시한부선고를 받았다. 길어봐야 인간의 생만큼의 시간만이 더 주어진 것이고, 너무 일찍 생을 마감한 김신에게 그만큼의 시간만이 더 흘러봤자 한 인간의 삶이 아닐 바 없다. 그렇기에 신은 공평하다. 신은 너무 일찍 생을 마감한 김신이라는 인간에게 다른 사람과 같은 생을 살 기회만을 더 주었을 뿐 다른 능력은 아무 쓸모없는 겉치레였으니 말이다. 신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감정 중 사랑 없는 삶을 살아간 김신이라는 인간을 애도했다.

그럼에도 미련하게 무지한 도깨비기에 더 오랜 가호를 받았다. “당신이 세상에서 멀어질 때, 누군가 세상 쪽으로 등 떠밀어 준다면 그건 신이 당신 곁에 머물다 간 순간이다.” 도깨비는 사람들에게 말하나, 실은 그 시간동안 신은 도깨비에게 신부를 보내주며 세상을 살고 싶게 만든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고민할 때 늘 사랑이 걸린다. 삶의 끝맺음에 있어서 사랑을 맺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그들의 사랑은 언제 강제로 끝날지 모르기에 늘 애틋하고, 불완전하게 위태롭다. ‘사랑 없는 불멸’은 ‘지옥’일 뿐이다. 삶의 경계에서 위태로운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고, 죽음 앞에서는 무력하며, 그럴수록 지은탁처럼 악착같이 살아보지 않겠냐고. 다른 드라마에서도 말하듯 우리 모두는 ‘완생을 꿈꾸는 미생’이 아닌가?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행복한 오늘이었으면 한다.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일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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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내쉬지 못한 채 소녀여 어찌 타르를 들이마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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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내지 않으려 이미 너덜너덜한 것을 꽈악 깨물고

나는 오늘도 헐어버린 입안에서 온갖 검붉은 것을 쏟으나

다만 살아야하기에 튀어나오려는 역한 것들은 도로 밀어넣어

미소지으며 그 복숭아는 참으로 달구나 하겠다

연명할 수 밖에 없는 삶을 떠올릴때면

무심하도다 하늘도 참 역겹구나 축복없는 삶을 주어 삶을 저버릴 용기조차 주지 않는 이 자신의 천명은 대체 무엇이냐 노하며 묻겠지만서도 오늘도 나의 신체에선 붉은 선혈이 아닌 검은 타르만이 묻어 흘러내리는데 누구에게 탓할 수 있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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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실 (부제 : 몇 평 안되는 작은 방은 나무들의 무덤인 줄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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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올라가기 위해

시선을 아래에 얼마나 두고 있었는지 몰라

 

어쩌면 식물원보다 더 많은 나무가

이 좁은 공간 속에 꽉 들어차 있을지도

 

벚꽃 휘날리는 봄 한창에

은행나무를 기르겠다고 버둥대는 저들이 처연합니까

나무로 만들어진 책상들을 나무로 꽉꽉 채우고 또 나뭇잎을 이곳저곳 덕지덕지 붙여

 

글쎄, 잘 모르겠다니까요

저 달려가는 시간을 잡으려면

얼마나 더 뛰어야만 하는지

 

그래서일까요,

피톤치드 가득해야 할 이 공간에서

숨이 이다지도 턱턱 막히는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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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 없는 세상에서 품은 시 : 시인 동주, 안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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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로써 들어 가며 그 말로써 하여 가며

 

“한 겨례의 문화 창조의 활동은 그 말로써 들어 가며 그 말로써 하여 가며 그 말로써 남기나니 : 이제 조선말은 줄잡아 반만 년 동안 역사의 흐름에서 조선 사람의 창조적 활동의 말미암던 길이요, 연장이요, 또 그 성과의 축적의 끼침이다.”
– <시인 동주> 20쪽

 

드러나지 않는 생각들을 사유하여 예고운 말들로 풀어내면 활자들은 비로소 제 의미를 찾아 너울댄다. 조금의 끼적임 속에도 감정은 깊이 침잠해있다. 모든 모국어 속에는 그 민족의 역사적 얼이 담겨 있다고 했다. 『우리말본』이 제목에서부터 하릴없는 울림을 주는 까닭은 모국어가 조선어라고 불리는 시대에서 국어로도 불리지 못하는 우리 언어, 우리말을 공부한다는 사실을 각성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줄줄이 설명하지 않아도 늘 뭉클함을 지니고 공부하게 되는 까닭은 그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임을.

 

‘시인, 동주’는 단지 동주 한 사람이 겪어온 수난일지가 아니다. 동주의 삶, 동주의 글은 조국이 식민지로 있는 나라를 위해 강제 징병된 소년을, 정신대로 끌려갔던 무고한 소녀를, 조선인이기에 죄인이었던 그 모든 아픈 청춘들을 기록한 일기다. 윤동주는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고통을 가장 온전히 표현한 인물이었다. 윤동주에게 언어란, 조선어가 금기되었던 시기에 소중히 품은 애국심이었으며 그 자체로 지켜야 할 조국이었다. 처음에 단지 주변을 묘사하고 멋스러운 표현으로 퇴고하는데 목적을 두었던 동주의 시는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을 담고, 조국을 담았으며 후엔 생각을 이어나가는 매개체가 되어 삶을 지탱했다. 그 시대의 모든 이팔청춘들이 그러했듯 시대의 아픔은 자신의 서러움이었으나 억압할수록 강해지는 게 청춘들의 독립의지였다. 동주는 글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함을 끊임없이 한탄하고 부끄러워한다. 나라를 지키는 방법이 남들과 다르다 해서 어떻게 그 애국의지가 남들보다 적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보통의 걸사들의 삶은 동경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동주의 생활을 읽고 있노라면 가슴 한켠이 아릿하다. 조선어로 시를 썼다는 이유로 수감되어 표현 못할 고초를 당하고 마음에 품고 고이 숨겨왔던 시들을 다시 일본어로 번역해야만 했던 그 수치스러움. 윤동주와 송몽규, 문익환, 정병욱 등 우리의 언어를 사랑했던 문인 독립 운동가들의 삶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일제 헌병들은 동 섣달에도 꽃과 같은, 얼음 아래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 청년을 죽이고 제 나라를 망치었다. 일제 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뱉을 것뿐이나, 무명의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 <시인 동주> 302쪽

 

언어는 지도에도 표시되어있지 않은 조선이란 나라를 온전히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생활은 궁핍해져가기 일쑤였고 가난에 거리에 나앉는 사람들은 늘어났다. 조선의 땅에서 부유하게 사는 조선인들은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거리에서도 일본어가 더 많이 들렸으니 마음 편히 찾아갈 수 있는 고향이란 이상향일 뿐이었다. 당시 유일하게 이질감 없이 편히 느껴지는 게 바로 언어였을 것이다. 창씨개명으로 이름이 바뀌었을 때에도 꿋꿋이 글을 고집하던 이유를 짐직 예상해본다.

 

언어는 민족성을 유지하는데 큰 기여를 했을 것이며 글은 그만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철학을 담고, 사유를 담고……. 시에는 그 이상의 것도 눌러 담을 수 있었으며 윤동주는 세계를 담았다. 아름다운 우리의 풍경은 우리의 표현으로 가장 잘 작성되어 남을 수 있었고 남루한 주변 환경에 잠식당한 슬픔은 글로써 풀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동주는 세계 여러 나라의 글들을 읽으며 새로운 사상을 접하고 희망을 품었다. 선배 문인들의 애절한 시어들로 위로를 얻었다. 시를 대하는 동주의 태도가 바뀐 것은 존경하던 문인들이 핍박받고 교도소에 수감되던 상황이 아닌 문인협회가 만들어진 때였다.

 

“동주는 결심했다. 잘못된 전쟁을 지지하고 동포들의 고달픈 삶을 외면하는 것이 문학의 길이라면, 가지 않으리라. 감투와 명성을 탐하고 궤변으로 자신의 행동을 미화하는 자들이 문인 이라면, 되지 않으리라. 하나의 시어를 찾기 위해 수없이 버리고 취하는 연마의 과정이 저렇게 쓰이는 것이라면, 더 이상 쓰지 않으리라.”
– <시인 동주> 127쪽

 

시작-詩作을 멈춘 윤동주의 고뇌도 깊었으나 형무소에서 자신의 시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윤동주는 무너져 내렸다.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상황에서도 끝까지 시를 놓지 않으려 노력했던 동주는 결국 생체 실험으로 눈을 감게 된다. 결국 윤동주는 말로써 들어가며 말로써 하여가던 농도 짙은 삶을 살았던 것이다.

 

조국 없던 이십 칠년 이 개월에 반점을

 

동주의 삶은 하나의 시였다. 늘상 시들이 그러하듯 동주의 시들에서의 온점 또한 이지러진 글들을 정리하는 문장 부호였을 뿐 그 온점이 시의 마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동주의 삶은 하나의 짧은 시였다. 이십 칠년 이 개월뿐이 되지 않는 짧은 시에서 윤동주는 영원한 온점이자 마침표를 찍었으나 훗날 이 또한 시에서의 온점처럼 반점이 되었다. 윤동주는 그의 소중한 작품들을 남기고 떠났으며 생전 그가 남긴 다수의 작품들은 광복 후 70여년이 된 우리에게도 구원을 선사한다.

 

태어날 때부터 조국이 없었던 그에게 애국심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아마 빼앗기고 싶지 않은 삶의 의지와 결합해 독립이라는 더 큰 갈망을 품지 않았을까. 많은 억압 속에서 일본은 끊임없이 조선어를 통제해왔다. 자신이 비로소 자신이 될 수 있는 시간인 시 쓰는 시간조차 빼앗기기 싫었던 게 아닐까. 깊은 내면의 바닥까지 닿아 신을 마주하였을 때 동주는 더 큰 애국심을 가졌을 것이다. 같은 민족이 굶주리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스스로에 대한 괴리감, 스스로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 사랑하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오래 지키고 싶다는 사명감. 같은 민족으로서, 다른 민족에게 억압받고 핍박받는 그 모든 상황을 동주는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생각을, 어질러진 활자들을 제 자리에 배열하며 숨을 불어넣는 시인. 자신에게서 느껴지는 독립의지를 우리말로 기록하는 일, 그것이 동주의 천명이었다.

 

청춘과 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 지금 교회당 꼭대기 /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 처럼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윤동주 , 십자가

 

궁극적으로 <시인 동주>는 어두운 암흑 그 중심에서도 문득 싱그럽게 빛났던, 찰나의 청춘들의 이야기다. 동주에게나 병욱에게나 또 그 어느 조선 청년에게나, 고단하고 막막한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에도 문득 싱그럽게 빛나는 찰나의 순간이 있었음을, 그 모든 조선 청년들의 청춘이 있었기에 조선의 겨울은 매섭지만 봄꽃의 씨앗들을 품어낼 수 있었다. 동주는 초봄의 햇살이었다. 매서운 칼바람에 굴복치 않겠다 눈을 녹였으며 선한 꽃을 틔워냈음을 기억하자. 동주도, 시를 품었던 그 소년들도, 내일을 알 수 없는 미래에 괴로워하고 가족들에게 늘 미안함과 고마움을 지니고 살았음을 기억하자.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저마다의 십자가를 품은 청춘들의 길은 신이 함께한 길이었음을.

 

“시인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슬픔과 절망에 잠긴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하며, 다른 사람의 아픔을 돌아보지 않는 잔혹한 말들도 여전합니다. 이 책에서 다시 그려본 시인의 삶과 시가,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시인 동주> 318쪽

 

“모든 20대는 자기 시대의 십자기를 졌고 지금의 20대도 지고 있고 다음의 20대는 또 다른 십자가를 지게 될 것이다.”
– 유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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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_알프레드 디 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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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를 잃어버리는 순간이 있다. 자신의 모습에 괴리감이 드는 순간이 있다. 얕은 관계들 속 수많은 비난은 끊임없는 선택-타인속의 나와 독립적인 내 의견 사이의-과 선긋기를 반복시킨다. 사회 대다수와 떨어진 소수 의견들은 비정상으로 판단된다. 다름은 죄악으로 치부되고 우리는 남들과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을 꺼려한다. 마침내는 스스로 입을 닫는다.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은 다분히 일상적인 시어들을 ‘타인을 신경쓰지 않고’ 행동하라고 요구한다. 이 시의 미장센-개인의 삶에는 타인의 간섭이 필요 없다는 일련의 흐름-을 통해 독자 자체가 주체적인 삶을 살라는 메시지를 깨우치도록 유도한다. 이 시가 독자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는 이유는 인간 자체가 정서적, 정신 분석학적으로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회피하고자 하는 상황을 그대로 돌파하였기 때문이고 또한 타인에게는 사랑받길 원하면서 정작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를 묻는,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못하는, 다분히 모순적인 난제를 제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인간관계를 통해 나 스스로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다분히 상처를 받으며 무의식중에 타인에게 맞추는 삶을 선택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수동적이고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는, 그래서 괴리감을 느끼는 필자이므로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으로 하여금 이 시는 누구나 완벽하지 않다, 고. 스스로를 사랑하라, 고. 외면해야 할 것은 스스로의 목소리가 아닌 타인의 목소리다, 고 읽혀진다. 필자는 스스로와 다른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춤추고, 사랑하고, 노래하고, 일하고, 사는 일상적인 행동들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당신의 삶이 진정 당신이 원한 삶이 맞는 것인가, 또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하고.

 

필자는 완벽하지 않은 자신을 미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 의견 없이 연명하던 삶은 터무니없이 비약적이었다고 반성한다. 결국 이 시의 2행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 제목이 된 이유는 ‘사랑하라‘가 전체 시를 포괄하는 내용임과 동시에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이 시인이 사람들을 향해 궁극적으로 외치고자 하는 말이었음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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