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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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

 

 

이곳에서는 전철의 경적 소리가 자주 들린다. 그래서 철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자주 탈선한다.

 

젖은 양말을 신은 날에는, 해수면 위에 남겨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수평선은 수평선으로 흐르고, 끝은 끝을 내딛었다.

 

그럼에도 나는

걷지 않았다

 

지나치는 사람들을 지나치고 있었다. 그러다 같은 방향으로 걷는 사람들이 뒤처지는 일들이 있었다. 나는 뒷걸음질 칠 수도 없었다.

 

그림자의 자세는 편하고 게을러 보였다. 그것은 아무래도 이불 없이 잠에 든 것 같았다. 내가 살아 있어서, 그는 조금 추울 것이다.

 

끝이 더 이상 끝을 내딛지 않고

멈춘 걸음을 옮길 수 없을 때에는

그림자 위로 드러누웠다

 

눈을 떴고

이불을 발로 걷어냈지만

발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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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을 따라하는 나의 앵무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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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을 따라하는 나의 앵무새

 

 

 

안녕. 네가 죽고 새장에서는 시체 썩은 냄새가 난다. 아직도 너의 친구는 부재를 느끼지 못하고, 나의 흐느낌을 따라하다가 문득 외로워지는 모양이다. 너는 이제 잃어버린 날개로 잘도 날아간다. 활주로는 괴로움의 연속이었구나. 그곳을 비행하는 너를 떠올리면 내가 가라앉는 기분이 든다.

 

너의 무덤에서 묻혀버릴 편지를 썼다. 다시는 번역되지 않을 너의 언어로. 우리는 살아 있어도 많은 대화를 했지만. 그건 언제나 일방적인 나의 질문의 연속이다. 또 그 질문에 대답하는 나의 지저귐이다. 거울도 따라하지 못하는 목소리를 너는 곧잘 따라했다. 이제는 너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리겠지만.

 

안녕. 나는 잘 지낸다. 나에게 주어진 무게로 가라앉는 발자국과 흩날리는 날숨이 있다. 그곳의 무게는 어떠니. 죽은 너는 무게가 없어서, 무덤의 중력으로 살아가고. 너의 꿈을 꿀 때마다 이불은 무거워진다.

 

너의 이름을 불렀다. 누군가 그 이름을 따라 불렀지만, 들어도 들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곳은 나만 남겨진 새장이니까, 이불로 고립된 나의 무덤이니까. 나는 죽어서라도 너를 만날 수 있을까.

 

안녕. 잘 지내란 말은 못하겠다. 나는 잘 못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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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보러 온 사람들은

모두 죄인이 되는 나라였다

예비 범죄자들이 내 입을 빌려

범죄의 사유를 고백했고

혀 속으로 뛰어들면

풍덩

 

얼굴은 영안실이 되었다

시체들이 목구멍 깊이 가라앉았고

시선이 닿지 않는 곳까지

수심이 깊어지고 있었다

 

돌고래가 미간 사이를 헤엄치고 있었다

그것은 허리의 반동이 필요한 움직임이었고

입술이 파문처럼 흔들리며

무죄를 밝힌 사람들이

인중 위를 헤엄치고 있었다

 

죄인들이 늘어나는 것보다

사형수들이 먼저 생겨나고 있었다

그것들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감으려 해도 감을 수 없는 눈이었다

 

그러나 방관도 죄가 될 수 있는 나라여서

나의 포승줄은

수평선까지 끌어올린 이불이었다

알리바이가 없는 용의자

 

나는 전해야 할 고백이 많아졌다

그것이 무기징역과 함께 벌이 되었다

 

눈 감는 순간까지 달은 지지 않았고

눈을 감았다 뜨면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었어요, 죄송합니다

 

느슨한 이불 속에서

눈물에 젖은 입술이

자꾸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낮달처럼 눈빛이 희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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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저를 소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인이라고 합니다. 당연하게 손을 잡고. 당신의 손은 참 따듯합니다. 객실의 문이 열리고 우리는 전철을 탑니다. 무작정 떠납니다. 어디서 어디로 떠나는지도 모르는 채. 설레거나 떨리지는 않으십니까. 모든 게 처음이라고 느껴지지는 않으십니까. 저에겐 당신을 잃을 것 같은 불안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불안도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영원할 것 같습니다. 전철은 멈추지 않고. 당신은 아직도 저의 손을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보이지 않고, 손이 보이지 않고. 잃어버렸습니다.

 

객실마다 계절이 달랐습니다

봄에 두고 온 당신을

겨울에서야 추억합니다

잘린 손이 아직 따듯합니다

 

그런데 저는 어디로 가는 중입니까. 어디까지 사라지는 중입니까.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아무것도 몰라서, 우리는 아무렇게나 불려 집니다. 전철은 지하로 흘러갑니다. 조명이 없는 객실은 밤인지 아침인지 알 수가 없어요. 봄인지 겨울인지도, 계절이 없는 곳입니다. 아니. 계절을 잃어버린 곳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불러야 할까요.

 

누가 우리의 이름을 지어줍니까. 또 불러줍니까. 없는 얼굴을 얼굴이라 하고, 없는 이름을 이름이라 하는. 우리는 언제까지 우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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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장 옆에는 티브이가 있고

티브이 앞에는 소파가 있다

 

티브이에는 죽은 사람들이 노래를 하고

소파에는 죽지 않은 사람이 잠꼬대를 한다

 

새장에는 앵무새가 있고

사람의 말을 따라한다

 

아닐 때도 있었다

 

빛이 들지 않는 새장에서

잠꼬대를 하는 앵무새

 

소파에서 죽은 사람이

티브이 속으로 들어간다

 

눈을 감고

 

티브이는 검은 화면으로 소파를 비춘다

죽지 않은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다시 눈을 뜬다

조용히 깨어 있는 앵무새

 

누구의 말도 따라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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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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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당신을 만난 해변은 낮과 밤이 공존합니다. 그러나. 맞물리지 못한 계절처럼, 우리는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나의 손목은 밤의 주머니를 비집고 들어갑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붙잡습니다.

 

우리는 함께 걷습니다. 당신은 하늘을 바라봅니다. 별은 꼭 구멍 같다고 합니다. 구멍 너머에는 불 켜진 방이 있을 것 같다고. 나는 하늘을 봅니다. 아침의 별은 흑점처럼 떠 있습니다.

 

해수면에는 우리의 모습이 비칩니다. 저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림자보다 선명한 당신이 있습니다. 흑점 깊은 곳까지 헤엄쳐 내려가면, 우리의 계절이 맞물릴 것 같습니다.

 

 

화장실 욕조에서 눈을 뜹니다. 맨몸인 나를 바라봅니다. 익사체, 라고 되뇌입니다. 그러나. 기억나지 않습니다.

 

조명이 너무 눈부셨습니다. 흐린 눈을 씻어내고, 거울을 봅니다.

그림자가 나를 마주보고 있습니다

 

욕실은 낮과 밤이 공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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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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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검은 기억들이 종이처럼 팔랑거렸어, 투명하고 희미하게, 불 꺼진 방처럼. 나는 그것들을 겹치고 뒤섞었어. 가능한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그것들을 모아 두루마리처럼 둥글게 감았어. 렘으로 가는 수면은 짧고 어두웠다.

 

 

복도를 다 걷지도 않았는데 영사기가 보였어, 라고 생각하는 순간 스크린 속에 검은 기억들이 빛을 쏟아내고 있는 중이었어. 나는 순간적인 순간마다 필름이 끊어진 것처럼 기억을 잃었다.

 

 

나는 빛 속을 걸었어, 걷다가 걷다가, 문득 날기도 하는. 이야기는 반복 없이 당연하게 흘러갔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러나 아무도 없는. 아무도 없어서 나는 아무나 붙잡고 대화를 했어. 너희들은 언제 나와 소리 없이 대화를 할 거니? 우린 배우처럼 잘도 연기를 한다. 그제서야 너희들은…… 너희들은 어디갔니?

 

 

스크린 밖으로 밀려나는 것들은 흰 벽 속에서 깨끗하게 지워졌어. 표백은 죽어가는 과정이구나. 색이 뒤섞인 곳에서 너는 점점 하얗게 희미해졌어, 나를 바라보는 너의 동공부터 너의 전부까지. 우린 이렇게 죽고, 하얗게 서로를 잊어버리겠구나.

 

눈물은 색이 모두 빠진 채

투명하고 희미하게 흘러서

왜 우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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