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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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눈가에 뿌옇게 서린

세월의 안개가 나를 가린다.

당신이 밝혀놓은 등불마저도

희미한 깜빡임이 되어 마지막 숨을 뱉는다.

 

당신은 고장 난 시계를 타고

기나 긴 여행을 떠난다.

걸어 온 시간을 거슬러, 거슬러

당신의 이마에 깊게 패인

세월의 상처를 하나씩 잊어가며

당신은 어린 아이가 되었다.

 

당신의 품 안에 낡은 시계는

그렇게 멈추어 버렸다.

 

심지는 파르르 떨리며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당신이 나를 위해 밝히던

등불은 한 순간, 그러나

서서히 숨이 멎었다.

 

멈추어버린 당신의 시간에 부딪쳐

날카로운 금속음이 서럽게 울어댔다.

설움에 못 이겨 산산히 부서진

당신의 시간이, 세월이 내게로 쏟아졌다.

 

그 찬란함에 눈이 멀어

간신히 잡고 있던

당신의 손을 놓쳐 버렸을 때

당신은 일그러진 시간의 방랑자가 되어

길 잃은 어린아이가 되어

나와 다른 시간 속을 걸어 사라져버렸다.

 

자욱한 세월의 안개 속으로. 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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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를 사랑한 장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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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를 본 적 있나요?

어린 왕자를 보거든 전해주세요. 너무 슬퍼말라고. 사라진다는 것이야말로 기억 속에 나를 새겨 넣는 방법이라고. 그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겠다고 전해주세요. 그가 너무 슬퍼하지 않게. 그의 눈에서 넘쳐 흐른 눈물에 아주 작은 소행성 B612가 잠겨 사라지지 않도록.

 

내가 아주 작은 이곳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 캄캄한 어둠 속에서 무엇보다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어린왕자가 있었어요. 차가운 밤공기가 서릴 때는 내 앞에 서서 그 작은 몸으로 바람을 받아내던 어린 왕자. 나의 향기를 마음에 품고 싱그러운 미소로 나를 자라게 하는 어린왕자. 그는 나의 세상이었어요. 그가 없이 나는 살아 갈 수 없으니까요. 그가 매일 같은 시간에 주는 물이 없다면, 커다란 몸을 흔들며 말을 건네는 바오밥 나무가 없다면, 따스하고 다정한 그가 없다면 나는 살 수가 없으니까요.

 

나는 어렸어요. 작은 가시들은 나를 지켜내기에 너무도 허술하고 부족했죠. 나는 수없이 많은 가시 돋힌 말들로 나를 지켜내고자 했어요. 나의 가시 가득한 말에 상처 받을 그를 알지 못했어요. 그가 언제까지나 나의 앞에서 바람을 막아주고 나의 가시까지도 안아줄거라는 꿈 속에서 혼자 살아갔어요.

 

나는 어리석었어요. 어린왕자가 어느새부턴가 내게 웃음을 보이지 않았을때, 매일 같은 시간 내게 주던 물을 어느새부턴가 건너뛰기 시작했을때. 나는 알았어야만 했어요. 내게서 마음이 떠나간 그를. 내게 지쳐가기 시작한 그를. 그때라도 여린 잎사귀로 그의 몸에 박힌 수많은 가시들을 뽑아내고 꽃잎들로 그 자리를 덮어 어린왕자를 안아주었어야만 했어요.

 

오늘, 어린왕자가 나를 떠나갔습니다. 이 작은 행성을 벗어나 머나먼 우주로 긴 여행을 떠났습니다. 어린왕자를 나를 위해 작은 유리병을 내게 씌워주고 내게 입을 맞추어주었습니다. 나는 끝내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를 사랑했다고. 내 가시 돋힌 말들로 감추려 했던 것은 사랑한다는 그 간단한 말이었을 뿐이라고. 그 말이 그리도 힘겨워 그를 힘들게했다고.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나는 말하지 못했습니다. 멀어져가는 그에게 끝끝내.

 

어린왕자는 너무 어렸어요. 나의 오만한 표정 뒤에 숨긴 불안한 마음을, 나의 가시 돋힌 말로 숨긴 사랑을. 그를 위해 있는 힘껏 뿜어대던 향기를. 매일 밤 그가 잠든 사이, 그를 위해 한껏 몸치장하던 나를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아아. 그는 알지 못했어요. 그가 나를 위해 피워주던 모닥불이 나를 태울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듯이 나를 지키기 위해 씌워준 이 유리병이 나를 죽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어요. 어린 왕자가 떠난 여행 속에서 그는 결국 알게 되겠죠. 이 세상의 장미는 나뿐이 아니라는 것을. 어느 곳에서는 흐드러진 수만 송이가 그를 맞이하겠죠.

 

괜찮아요. 잘되었어요. 조금씩 시들어가는 모습을 그가 보지 않아서 다행이예요. 어린왕자의 슬픈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니 다행입니다.

 

이제 나는 사라지겠죠. 나의 가시는 볼품없이 떨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가 사랑하던 나의 아름다움은 한 줌의 향기로만 남아 이 유리병 안에 가득 차겠죠. 이것이 내가 어린왕자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입니다. 숨이 막혀옵니다. 힘없이 떨어져가는 꽃잎이 보입니다. 안녕,

 

안녕. 나의 어린왕자. 슬퍼 말아요. 사랑했어요. 고되고 기나긴 여정이 끝나고 이 곳에 돌아왔을 때 내가 반겨 주지 못해 미안해요. 나의 향기만은 이 작은 행성에 남아 있을거예요. 나도 기나긴 여행을 떠날 뿐이예요. 당신이 다시 이 곳에 돌아오듯 다시 꽃씨가 되어 당신을 찾을게요.

 

어린 왕자를 본 적 있나요?

 

홀로 서럽게 울고 있는 어린왕자를 보거든 전해주세요.

 

가시 없는 장미가 되어 다시 오겠다고.

 

슬퍼말라고. 그의 기억 속에 아름다운 향기로 남아 영원히 살겠노라고  전해주세요. 나의 어린왕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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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꽃을 올리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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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의 이름 앞에

흰 국화를 올리지 않겠다.

 

하얗게 잊혀져 가기에는

당신이 너무도 빛났기에

나는 붉은 장미를 올리겠다.

나는 동백 가지를 올리겠다.

 

당신이 끝내 보지 못 한

조국의 태양은 붉은 당신을

품에 안고 떠올랐다.

우리가 잊어 간 새벽에.

 

아니,  나는 당신의 이름 앞에

꽃을 올리지 않겠다.

 

당신의 눈물로 물들어 푸른

당신의 피로 얼룩져 붉은

태극기를 올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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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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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아져 버린 연은

하늘로 올라가 버리는 것이

숙명이기에

 

연을 놓친 어린아이의

눈가를 닦아줄 새 없이

하늘을 날아오릅니다.

 

내가 밟고 지나친

장미들이 붉은 눈물로

땅 위를 수놓아도

운명을 거스를 힘이 내겐 없습니다.

 

운명이란 이름에

비겁하게 숨어버린 나

끊어진 연처럼

비겁하게 도망쳐버린 나

 

 

저 멀리 사라져가던 내가

지쳐버려 나무 위에 쉬어 갈 땐

조용히 내려 주세요.

 

그대 곁에 조용히 남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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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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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같은 밤

달빛 한 가득 모아다가

그대 품에 놓아 두고 싶어라.

 

돌아가는 발걸음 구름 위를 걷는 듯.

두 손에 가득한 달빛 위로

아른거리는 아름다운 임.

 

아아. 저기 저 다리는

내 임의 다리인데

옆에 누운 이 누구오리까.

 

갈 곳 잃은 달빛은

산산이 부서져

내 눈가에서 반짝거리네.

 

갈 곳 잃은 두 발은

내 임 잃은 이승을 넘어

찬란한 오색운 위에서 춤을 추네.

 

슬프고 아름다운 밤.

내 임 잃은 나는

어디로 가오. 어디를 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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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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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릿광대, 곡예사, 조련사, 사자.

모두가 즐거운 서커스.

즐거워야 하는 슬픈 서커스.

사자를 돌보던 어릿광대.

어릿광대를 돌보던 곡예사.

곡예사를 잡아둔 조련사.

 

웃어야 하는 어릿광대.

아름다워야 하는 곡예사.

행복해야 하는 서커스.

조련사는 사자를 길들여.

어두운 상자 안에 가둬놔.

어릿광대가 찾아 헤매도록.

 

사자를 길들인 조련사.

어릿광대가 물었어.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요?

사자가 대답했어.

조련사가 대답했어.

곡예사가 대답했어.

 

어둠이 날 삼키도록 두었어.

사자가 대답했어.

너는 어릿광대니까.

조련사가 대답했어.

당신은 잘못이 없어요.

곡예사가 대답했어.

 

서커스의 막이 올랐어.

불은 켜지고 관객은 가득해.

사자가 어릿광대를 물어뜯어도

어릿광대의 웃음은 지워지지 않아.

조련사는 크게 소리쳤고

관객들은 크게 환호했어.

 

서커스의 막이 내리고,

불은 꺼지고 관객은 없어져.

공중그네는 덩그러니 놓여있어.

곡예사가 내려오고 다시 불이 켜져.

환하게 웃고 있는 어릿광대를

곡예사는 품에 꼭 안아.

 

사자와 조련사가 떠나 간 무대 위엔

웃음이 지워진 눈물투성이 어릿광대.

예쁜옷 벗겨진 상처투성이 곡예사.

모두가 즐거운 서커스.

즐거워야 하는 슬픈 서커스.

그렇게 막이 내린 나의 서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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