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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알같은 벚꽃잎이
펑, 펑.
싱그러운 봄바람에 휘날리면
밤같은 머리칼엔 은하수가 펼쳐지고
녹아진 대지에선 초록빛 설렘이 돋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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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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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제

빈 공간에 꾸역꾸역

욱여넣는다

 

흘러가야할 슬픔이 차오른

공허했던 마음은

 

이리 출렁, 저리 출렁

의미없는 불평을 늘어놓는다.

 

계속해서 차오르는 가슴에

 

 

숨을 참는다

 

목구멍을 넘어 코를 지나

눈 밑까지 올라온 절망은

 

작은 구멍 하나 찾아

폭포수처럼 흘러내린다

 

우우우 우우우우

 

비어가는 심장이 소리 지른다

 

텅 빈 방에 가득한 어둠을 밀쳐내며

저 멀리 울려간다.

 

2,  새벽의 후기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것들이

흘러가버린 과거의 옹이들이

쿡,

눈꺼풀 속에 박혀와

오늘의 하루를 막는다.

 

3,  사랑에게

 

사랑, 그대는 빛나고

사랑, 그대는 아름답다.

사랑, 그대는 번뜩이며 따스하고

사랑, 그대는 부드러우며 차갑다.

사랑, 그대가 부르는 노래는

사랑, 그것을 잃은 이들을 울린다.

 

4, 무제

 

시간은 흐르고 추억도 흐른다

희망을 잃은 어린 아이의 울음도

차디찬 핏빛 강을 따라 흐른다

스러진 생명의 불길을 머금은 강은

우웅 우우웅 슬픔의 절규를 뱉는다

오늘도 저 검은 하늘엔

하얀 달 하나 둥그러니 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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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의 밤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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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하늘

저 홀로 빛나는

아하 오늘은 만월의 밤이어라

 

둥실 두둥실 떠올라

세상 천지에

차디찬 빛을 뿌리는

아하 오늘은 만월의 밤이어라

 

구불구불 산 그림자 저 멀리 쫓아내는

아하 오늘은 만월의 밤이어라

 

저 깊고 깊은 산 속,

저 넓디넓은 마을에서

어둠을 틈타 움직이던 흉악한 금수를 드러내는

아하 오늘은 만월의 밤이어라

 

새벽별 뜨기 전

모두가 빠져든 꿈에서 홀로

그래 홀로 나와 우는 장독대의 눈물을 비추는

아하 오늘은 만월의 밤이어라

 

어화둥둥 저 하늘 중심에

떡하니 들어 앉아 온천지를 굽어보는

아하 오늘은 만월의 밤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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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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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어린 마음이여

모닥불 같은 사랑은 하지 마라.

 

그대 그 여린 가슴

냉기보다 깊은 상처로 채우고 싶지 않다면

 

찰나의 추위가 두려워

어설프게 피워내지 말 것이며

 

죽어가는 불씨에게

마른가지 하나

넣을 듯 말 듯 애태우지 말 것이며

 

따스함에 취해

순간의 안락함에 취해

눈을 감지도 않아야 할 것이다.

 

추위가 찰나이듯

잠깐의 방심이 찰나이듯

작은 불씨가 온 세상을 집어삼키기도

찰나

찰나이기에.

 

조금 커버린 그댄

더이상 모닥불 같은 사랑은 하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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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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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아무도 널 깨워주지 않았다.

 

매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너의 귀를 가득 메우던 목소리도, 그보다 더 먼저 너의 코끝에서 맴돌던 달큰한 냄새도, 너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부드러운 손길도, 너의 볼에 짧게 와 닿던 애정 어린 입술도. 그 어느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낮고 따스한 목소리로, 언제나 다정하게 불리우던 너의 이름도. 애칭도, 그 따스했던 숨결도. 모두 사라져버린 채. 오직 너만이 홀로 남아, 차디찬 어둠 속에 갇혀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너는 천천히 공기를 들이마시고, 다시 내뱉었다. 환기를 하지 않아 탁해진 공기가 바싹 말라버린 너의 목을 긁으며 폐로 내려갔다. 너는 거세게 기침을 하며 본능적으로 주변을 더듬으며 물을 찾았다. 침대에서 책상으로, 바닥으로. 정신없이 헤매던 손이 우뚝 멈춰 선다. 어제 물을 떠다놓지 않은 이유를 기억해낸다. 오늘이야말로 너는 죽어야 하니까.

 

스륵, 손에 들어간 힘이 풀리며 자연스레 일으켜졌던 너의 몸은 다시 풀썩, 침대 위로 쓰러진다. 너는 다시 숨을 깊게 들이쉰다.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온다. 비릿한 냄새가 입 안을 맴돈다. 너는 문득 손을 들어 거칠어진 입가를 만져보다 배짝 말라 앙상해진 두 손을 너의 가슴 위에 올린다. 아직까지 끈질기게 뛰고 있는 너의 심장위에 올린다. 눈을 가리면 세상도 사라진다고 믿는 아기처럼. 두 손으로 심장을 가리면 사라질 거라고 믿는 듯이, 멈춰버릴 거라고 믿는 듯이. 꼭꼭 너의 심장을 가린다. 손바닥으로 전해오는 고동이 자장가인 마냥 다시 졸음이 쏟아진다. 너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깜박, 불이 켜진다. 갑작스레 자리를 잃은 어둠은 갈 곳을 잃은 채 흩어진다. 눈꺼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날카롭고 어색한 빛에 너는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가린다. 다시 깜빡, 어둠이 돌아온다. 너는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낮이 사라진 너의 방 안에 있는 것이라곤 어둠, 슬픔, 공포, 두려움 그리고 어둠, 어둠, 어둠, 흑암뿐이다. 문득, 그날의 기억이 너의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마치 썩어 들어가는 곰팡이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잡아먹고 자라는 암세포처럼. 천천히, 천천히.

 

그날, 두 개의 불꽃이 바람결에 사그라졌다, 폭설주의보로 마비되었던 교통이 서서히 풀리던 2월의 밤. 화기애애한 저녁식사시간을 흩트리며 울려온 전화 벨소리에 너의 부모님은 얼마 전 새로 산 검정색 차키를 들고 몸을 일으키며 두터운 잠바에 팔을 꿰었다. 어딜 가냐는 너의 투정어린 질문에 살며시 입가에 검지를 들어보이고선 맑은 미소로 집을 나섰었다. 몸을 돌리며 너에게 웃어보이던 순간 허리 언저리에서 풍성하게 찰랑거리던 그 머리카락을 너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막 결혼한 신혼부부인 마냥. 아니 오랜 짝사랑 끝에 마침내 새로 탄생한 초짜 커플인 마냥 조심스럽게 맞잡은 두 손에, 두 얼굴에 어린 맑은 웃음들에 너는

 

“그럼 도넛도 사와! 이번에 새로 생긴데!”

 

라는 짧은 말로 너의 엄마에게, 아빠에게, 잘 다녀오라 손짓했었다. 그날 엄마와 아빠는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후,’

 

너는 공연히 숨을 길게 내뱉으며 생각했다.

 

‘그날 집에 어떻게 돌아 왔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수면바지를 입은 채로 장례식장에 가진 않았을 텐데’

 

조금이라도 기억해보려 애썼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네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은 오직 검은 고철덩어리와 아스팔트에 새겨진 그을음. 그리고 거칠던 검정색 상복뿐이다.

 

이불을 끌어올려 얼굴을 덮는다. 축축한 이불이 너를 부드럽게 짓누른다. 숨이 막혀온다. 숨이 막혀온다. 습한 공기가 너의 목을 타고 흘러간다.

 

그래, 그건 그저 흔한 사고 중 하나였다. 빠르게 찾아오는 밤에 미처 치우지 못한 눈이 얼어 생긴 사고였다. 언덕길에 있던 트럭이 미끄러져 신호 대기 중이던 5대의 차량을 치어버린, 사망자가 5명에 부상자가 9명이던 사고였다. 누구의 잘못도 물을 수 없는 사고였다. 굳이 죄를 묻자면 갑자기 차가워져버린 날씨의 잘못이었다. 야속한 하늘의 죄였다. 늦은 밤에도 양심적으로 신호를 준수한 너의 부모님의 잘못이 아니었다. 최대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핸들을 무리하게 꺾어 전복되어버린 트럭운전사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래서 TV소리를 덮으며 요란하게 울려오는 전화벨 소리에,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믿지 못할 말들에 수면바지에 슬리퍼차림으로 다급히 달려 나간 너는, 검정색 고철덩이로 변해버린 차량 앞에 주저앉아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기에. 너는 울 수도, 화낼 수도, 누군가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원망할 수도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너는 그저 너의 도톰한 수면바지가 축축이 젖어들 때 까지 하염없이 그 차디찬 도로위에 주저앉아있을 뿐이었다.

 

‘그 절차들을 오빠가 다 밟았지. 혼자 외롭게 싸워야 했지.’

 

도와줘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넌 도와줄 수 없었다. 너는 그저 손을 잡고 끌면 끄는 대로, 말을 걸면 말을 거는 대로, 말하라면 말하라는 대로. 그렇게 움직이는 빈껍데기가 되어있을 뿐이었다.

 

너는 너를 덮고 있는 두껍고 축축한 이불을 걷어내며 몸을 일으킨다. 새삼스럽게 탁한 공기가 목을 타고 흐르자 따끔한 통증이 연이어 올라왔다. 고개를 들어 방 안을 둘러본다. 허공을 부유하는 먼지 사이로 익숙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이리저리 흩어져 바닥을 가득 메운 물건들 사이로 깨진 유리 조각이 반짝 빛난다. 애석하게도 너는 죽지 못했고 너의 심장은 여전히 끈질기게 요동치고 있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뛴다. 째깍째깍 시간은 흐른다. 그 날도, 빠르게 흘러갔다. 놓쳐버린 화살처럼, 쌩하니, 쏜살같이.

 

너는 다시 그날을 생각했다. 어두컴컴한 주변 도로, 4차선 도로를 가득 채우던 커다란 등불들.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를 울려대던 경찰차, 너의 맨발에 느껴지던 차디찬 아스팔트의 감촉, 너를 가로막던 굳센 팔들. 허공을 가르던 너의 목소리, 사이렌 소리, 그리고 차량 안 이리저리 흩어진 형형색색의 도넛들. 눈을 감았다 뜨니 너는 장례식장에 와있었고 2박 3일짜리 장례식은 순식간에 끝났다. 검은 상복을 입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흑발을 가지런히 빗어 흰 리본으로 묶은 채 너는 기계처럼 끊임없이 고개를 숙이고, 또 숙였다. 너는 장례식장의 입구에 앉아 끊임없이 밀려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며, 너조차도 터져 나오지 않는 울음을 끊임없이 터트리는 이름 모를 친척들을 보며, 넓은 객실 구석에 앉아 어디선가 찢어온 종이 한 장을 펼쳐놓고선 인절미도 아닌 떡에 콩고물을 묻히려 노력하던 익숙한 얼굴들을 보며, 너의 앞에 있는 빈 술잔을 끊임없이 채웠다. 목으로 넘어 들어가는 쓰라린 감각 없이는 살아있는 것 같지 않아서, 도저히 이 현실이 믿어지지 않아서. 몇 번 느껴보지 못한 취기를 불러일으키려 너는 끊임없이 마시고 또 마셨다. 애석하게도. 엄마를 닮은 너의 신체에 취기가 돌기엔 설호가 술병을 뺏어들기 전까지 밀어 넣은 몇 병의 소주와 맥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너는 쓰라린 속을 쥐어뜯으며 옆은 미소를 띠고 끊임없는 방문객들을 맞아야 했다. 하얀 가면을 쓴 늑대들을 맞이해야만 했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장례식이 끝난 뒤엔 뭘 했더라.’

 

문득, 토기가 올라왔다. 너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화장실을 향해 달려갔다. 속에 든 것들을 게워냈다. 더 비워낼게 없는데도 몸은 계속 비워내길 원했다. 너는 초록색 쓸개즙이 변기물에 쓸려 내려갈 때 까지 한참을 변기에 쭈그려 앉아 있다가 겨우 일어나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핑 현기증이 돌았다. 아직 기억해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그때, 너는 너의 그 얇은 두 손으로 너의 엄마를 닦았다. 중학생 철없던 시절 이후로 처음 보는 엄마의 몸은 이리 저리 찢겨 마치 너덜너덜해진 인형 같았다. 어릴 적 기억도 나지 않는 이유와 감정으로 찢어버린 친구의 곰 인형 같았다. 그제야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똑, 얼어버린 엄마의 몸 위로 너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너는 흰 명주 천으로 너의 엄마를 깨끗이 닦았다. 너의 눈물로, 그 따스한 생명의 흔적으로 사그라진 불꽃의 잔해를 말끔히 닦았다. 흰 삼베옷으로 온 몸을 감싸자 창백해진 피부와 흐트러진 흑발이 오동나무 관 뚜껑에 가려졌다. 어릴 적 부모님이 서로 나눠가졌다던 반지와 목걸이는 차마 태울 수 없어 함께 꿰어 너의 목에 걸었다. 두 생명의 중압감이 너의 어깨를 짓누르는 듯 했다. 검정색 리무진에 관을 실고 화장터에 도착해 관이 불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후에야 너는 겨우겨우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았다.

 

너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잘그락, 목에 걸린 반지들이 다시 소리를 냈다. 너는 나직이 되뇌었다.

 

“걱정 마, 잊을래도 잊을 수 없으니까.”

 

너의 목소리는 메아리조차 치지 않는다. 의미 없이 흩어져버린다. 너는 문득, 시계가 보고 싶어졌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너는 주위를 둘러본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째깍째깍 소리를 찾아 몸을 일으킨다. 물건 사이사이로 조심스럽게 내딛는 발에 날카로운 통증이 밀려온다. 입 밖으로 뛰쳐나오지 못한 신음을 삼키며 주저앉는다.

 

‘아파……,’

 

여기저기서 밀려오는 출처 없는 아픔이 닫혔던 슬픔의 문을 열어젖힌다. 홀로 이겨내야 하는 아픔이 익숙지 않은데 익숙한 감각이 볼을 따라 흘러내린다. 째깍째깍 소리는 계속 너를 부른다.

 

‘하아’

 

떨리는 숨을 내뱉는다. 이윽고 너는 다시금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본다. 처참하게 깨진 시계가 널 부른다. 시계는 멈춘 채 소리만을 울린다. 두근두근, 마치 너의 심장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초침이 소리를 따라 떨린다. 빈껍데기가 되어 움직이는 너처럼. 너는 무거운 숨을 내쉬며 침대에 걸터앉는다. 붉은 발자국이 너의 흔적을 따라 이어진다. 꽤 깊게 베인 듯 붉은 선혈이 그치지 않고 흐른다. 너는 침대 옆 서랍을 열고 붕대를 꺼내 상처를 엉성하게 감싼다.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차갑게 식은 두 손에 너의 작은 얼굴을 묻는다. 익숙한 온기가 손을 타고 흘러 너의 무릎을 적신다. 가냘픈 신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운다. 그 순간, 익숙한 노크 소리가 너의 소리를 덮는다. 기억들이 흐려지기 전에, 되새긴다.

 

화장터에서 정신을 잃은 뒤로 사흘을 꼬박 앓았다. 네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세장짜리 부모님의 유언장이 완성된 후였다. 태어나서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는 너의 집이, 그날 부모님이 나섰던 그 집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던, 직접 가본적은 없는 거창한 빌딩들이, 건물들이, 어릴 적 진로의 날이면 꼭 한 번씩 찾아가던 회사가, 너의 설호의 이름으로 바뀐 후였다. 엄마와 아빠의 숨결이 사라진 후였다. 엄마는, 아빠는, 그 흔한 영상편지 하나 남기지 않은 채 그렇게 먼 길을 떠났다. 그제야 너는 울었다. 재가 되어버린 부모님을 위해. 스러져버린 그들을 위해, 사흘 밤낮을 꼬박 울고, 탈진해 쓰러지고, 다시 사흘 밤낮을 내리 울고. 너는 너의 검은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너의 죄가 없는데도, 아무도 원망할 사람이 없어서 너는 너를 용서하지 못했다. 마치 너에게 죄가 있는 듯이.

 

‘세상과의 단절’

 

그게 너에게 내리는 너의 형벌이었다. 방안에 딸린 화장실에서 씻고 침대에서 자고, 매 끼니마다 꼬박꼬박 방문 앞에 놓여있는 식사들을 버렸다. 그렇게 너의 일상을 버렸다. 불행히도, 항상 옆방에서 지켜보고 있는 설호 덕에 영양실조로 다 죽어가다가도 너는 언제나 다시 살아나 그 축축한 이불을 덮고 누워있었다. 비릿한 냄새가 일주일간 방을 떠나지 않을 만큼 피를 흘리다가도, 누군가의 피를 몸에 담은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럴 때마다 너는 비명을 질렀다. 목에 걸린 두 쌍의 반지가, 두 겹의 목걸이 줄이, 너무나 무거워 너는 고개를 수그렸다. 갈라지다 못해 터져버린 입술에서 새어나온 피가 흰 이불을 물들일 때에도 너는 그렇게 울부짖고 있었다. 울고 있었다. 꺼지지 않는 불꽃에, 사그라져버린 불꽃에, 너는 하염없이 무너져 내렸다. 절벽을 향해 달려가는 브레이크 없는 기차처럼. 하지만 세상은 너를 그저 슬퍼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네가 3번째로 침대 위에서 깨어나 비명을 지르던 날, 두 번째로 손목에 붕대가 감싸진지 거진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창밖으로 곡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와 다시 생각해보면 그건 도박으로 전 재산을 날려놓고선 유산 한 푼 남겨주지 않은 누나가 야속하다며 농성시위를 벌이던 외삼촌의 소리였다. 내 아들이 내게 이럴 리 없다며 문 앞에서 누워 움직이지 않던 친할머니의 소리였다. 큰 고모의 소리였다. 사촌들의 소리였다. 그 소리들은 네게 나오라고 울부짖었다. 뭔가 잘못되었노라고. 하지만 너는 나가지 않았다. 그들은 말했다.

 

‘내 아들이 내게 이럴 리가 없어, 내가 어떻게 길렀는데!!’

‘누나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지, 우린 가족이잖아’

‘형님 자녀들 진짜 야속하네요, 어떻게 그 많은 재산을 꿀떡 삼키고선 친척 생각도 안한대요?’

‘저 것들은 부모 돈 먹으려고 태어난 것들이야, 혹시 몰라, 돈 먹으려고 일부러 죽였는지’

‘저 집 딸 봤어요? 장례식 내내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는 거? 진짜 독해요’

 

원망소리가, 원망소리가, 너의 귀 사이로 파고들었다. 삐용삐용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너의 심장을 찔러 쪼갰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비명을 질렀다. 차마 말을 할 수 없어 울부짖었다. 오랫동안 자르지 않아 날카로워진 손톱으로 몸을 할퀴고 잡아 뜯어 억지로 손톱이 동글동글하게 깎일 때까지, 방문을 박차고 들어온 설호가 널 붙잡고 울부짖을 때까지 너는 그렇게 너의 온 몸을 잡아 뜯었다.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듯이.

 

똑똑똑, 나지막한 노크소리가 너의 기나긴 생각을 끊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야”

 

더없이 자상한 목소리가 문을 넘어 너의 방안을 울린다. 너는 여전히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깊은 숨소리와 함께 너의 신음을 삼킨다. 다시

 

“희야, 오빠 들어가도 될까?”

 

공허한 방을 울리는 목소리에, 너의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너는 무거운 이불을 다시금 끌어올린다. 끼익, 낡은 문이 내뱉은 비명소리와 함께 밀려들어 오는 어색한 온기를 피해 너는 축축한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널 쫓아온다. 걸어오다 걸어오다 침대 옆에 멈춰 선다. 미처 이불 속에 숨기지 못한 너의 붕대 감긴 발에 목소리는 깊은 한숨을 내쉰다.

 

“일어나, 상처 치료하게”

 

너는 움직이지 않는다. 침묵의 정적이 다시금 흐른다.

 

“설희야”

 

너는 움직이지 않는다. 너는 속으로 생각한다.

 

‘그 목소리가 아니야. 그 다정한 목소리가 아니야.’

 

너는 순간 속에서 무엇인가 울컥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하도 자주 올라와, 속을 비워버린 줄 알았던. 슬픔, 너는 두 손으로 입을 가로막는다. 슬픔이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되새긴다.

 

‘그 목소리는 더 이상 없어.’

 

네가 너의 검은 방 안에 틀어박혔을 때, 설호는 방을 나서야했다. 세상을 거부한 널 위해 세상에 서야했다.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너의 어깨를 톡톡, 다정히 두드려주기도 전에 서로 꼭 끌어안고 마음껏 울어보기도 전에. 설호는 상복을 벗자마자 정장을 꺼내 입고선 법정 앞에 서야했다. 추석 때마다 환한 미소로 맞아주시던 할머니께 뺨을 맞고, 물로 온 얼굴이 흠뻑 젖고, 친척들에게 온갖 욕설을 들어야했다. 엄마와 아빠가 가장 사랑하던 회사가 너와 설호의 이름으로 바뀌었을 때, 엄마와 아빠의 모든 흔적들이 합법적으로 먼지가 되었을 때, 부모님이 남긴 모든 숙제를 끝냈을 때, 그때가 되어서야 설호는 겨우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슬퍼할 수 있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설호는 이불 속에 숨어있는 널 붙들고 울었다. 한 겨울이라 춥다며 엄마가 꺼내준 이불이 축축이 젖어 들어올 때 까지 울고 또 울었다. 그 이불속에서 너도 울었다. 그날,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옅은 신음소리들이 너의 방 안을 채웠다.

 

저벅 저벅 다시 발소리가 울린다. 깊은 숨소리가, 네 것이 아닌 공기의 떨림이 들린다. 이내 오빠가 침대 끝에 걸터앉은 듯, 삐걱 소리와 함께 침대가 기울어진다. 따스한 손길이 너의 발목을 잡는다. 너는 그 손길을 거세게 차버리고선 차디찬 이불 속으로 두 발을 숨긴다.

 

너는 이불 속에 웅크린 채 누워있다. 몸을 계속해서 웅크리다 보면 이 세상에서 지워질 수 있다고 믿는 듯이, 그 작은 몸을 계속해서 웅크린다.

 

문득 생각이 깊어진다.

 

너의 오빠는 언제나 따스한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렇듯이, 고작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막 태어난 너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던 사람이었다. 언제나 늦게 들어오는 부모님을 대신해 칭얼거리는 너를 달래며 밤을 새우던 사람이었다. 가끔 선생님께 사탕이라도 받은 날이면 소중히 주머니에 넣은 채 널 향해 뛰어와 아직 이빨도 나지 않은 너에게 사탕을 까주던 사람이었다. 개를 그렇게 무서워하면서도, 너를 단단히 품에 안고서야 멀리멀리 도망치던 오빠였다. 너를 지키는 영웅이 꿈이던 오빠였다. 지금도, 세상을 거부한 널 위해 세상을 억지로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바보 같아’

 

너는 속으로 되뇌었다. 오빠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너의 귓가에 울린다. 툭, 투둑, 가뜩이나 축축한 이불을 다시금 적셔온다. 물기 젖은 목소리로 오빠는, 설호는 네게 말했다.

 

“이러고 있다고 그 일이 안 일어난 게 되는 건 아니잖아”

 

두터운 손바닥이 널 둘러싼 이불더미를 흔든다, 널 흔든다. 너는 힘없이 흔드는 대로 흔들린다.

 

“희야, 설희야, 설희야”

 

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아무런 움직임도 보여주지 않은 채, 그냥 여전히 몸을 조금씩 웅크리고 있다. 마법이 풀려버린 나무 인형처럼, 사람이 되지 못한 피노키오처럼. 계속해서 널 흔들던 설호는 이내 너의 위에 엎어진다. 묵직한 느낌이 너의 위에 더해진다.

 

“희야……, 제발……, 응?? 아니면 얼굴이라도 보여줘”

 

낮은 흐느낌이 너의 귀를 울린다, 너의 머리를 울린다. 부족한 공기에 너의 머리가 조금씩 욱신거리기 시작한다. 계속해서 너의 머리를 울리는 목소리에 너는 몸을 부르르 떤다. 희야 희야 희야, 완벽하지 않은 너의 이름이 너를 덮는다. 물에 젖은 솜처럼 끈덕지게 달라붙는 목소리는 쌓이고 쌓여 너의 숨통을 막는다, 너는 거친 숨을 내뱉는다.

 

“……, 이젠 우리 둘밖에 없어 희야”

 

순간, 너의 머릿속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떠오른다, 한 달인지, 두 달인지 모를, 너를 이 공허한 방 안에 가둔 그 날이. 너는 고개를 거세게 흔들어 기억을 쫓아낸다. 짙은 슬픔의 감정이, 감당해 낼 수 없는 아픔이, 너의 목을 졸라온다. 그 무거운 목걸이 줄이 점점 조여 온다. 너의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 희야?”

 

너는 참다못해 이불을 박차고 일어난다. 핏발이 선 두 눈이 너를 바라본다. 누군가를 닮은 흑색 눈동자가 너를 바라본다. 너는 쉬다 못해 갈라지는 목소리로 울부짖는다.

 

“제발 좀 닥쳐, 닥치라고!!!”

 

너의 목소리의 잔상이 흩어진다. 텅 빈 방에 다시금 침묵만이 맴돈다.

 

“이런다고 바뀌는 게 없다는 거 나도 잘 아니까 좀 닥치라고,”

 

너는 다시 한 번 비수 같은 말을 내뱉은 채 고개를 돌려버린다. 다시금 흐르는 정적에, 왠지 모르게 차올라 오는 죄책감에 너는 한숨을 내쉬며 거칠게 머리를 헝클어트린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에 너의 얼굴을 가린다.

 

‘안다고 이해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머리로만 살 수 있다면.’

 

부들부들 몸의 떨림이 가라앉자 너는 두 손으로 너의 머리칼을 추스르며 고개를 든다. 흑색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본다. 그 안에서 너를 본다. 슬픔을 마주하기 싫어 너는 고개를 돌린다.

 

“난……, 난 오빠처럼 못하겠어,”

 

흑색 눈동자가 흔들린다. 너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 손에 묻는다.

 

“희야 그래도 살다 보면……,”

 

너의 목소리가 다시금 커진다. 비명을 지르는 듯 소리친다.

 

“살다 보면, 살다 보면!! 괜찮아지는 게 아니라 잊어버리겠지, 그냥 그 순간이 기억에서 지워지겠지, 그러다가 어쩌다 한 번 기억나는 밤이면 눈물로 밤을 지새워야하겠지, 행복하게 웃다가도 죄책감에 휩싸여 다시 울어야 하는 삶들이겠지!! 그게 괜찮은 거라고 생각해??”

 

죽어버린 너의 눈동자가 설호를 비춘다. 굳어진 설호의 입술을 빤히 쳐다보던 너는 절래절래 고개를 젓는다. 거세게 고개를 흔들며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와 함께 다시금 말한다.

 

“아냐 오빠…… 그거 괜찮은거 아니야. 아니라고”

 

너의 몸이 다시 부들부들 떨린다. 아무것도 찢을 수 없는 손톱이 너의 살을 눌러온다. 꽈악. 주먹을 쥔다. 너는 가장 비참한 목소리로 이어서 말한다.

 

“날 도우려하지마, 동정도 하지 마. 오빠도 알잖아, 내가 웃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설호의 입술이 우물우물 벌어진다. 너는 손을 뻗어 그 입을 가로막는다. 우물우물 소리 없이 외친다. 움직이는 입술이 진심을 그려낸다.

 

‘이제 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오빠뿐이잖아.’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너는 너의 말이 잘 전해졌다는 것을 느낀다. 설호가 반박하지 못할 것도 알아차린다. 너는 손을 내린다. 흑색 눈동자를 쳐다본다. 이리저리 요동치던 눈동자는 결국 널 피한다. 너는 생각했다.

 

‘죽음’

 

문득, 너의 머릿속에 심장이 멎어버린 네 모습이 떠올랐다. 제때 너에게 달려오지 못한 설호의 모습도. 매일같이 꿈꿔온 순간. 하지만 애석하게도 너는 죽기에는 미련이 너무 많았다. 세상을 끊어내긴엔 겁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너의 서툰 자살시도는 언제나 설호가 집에 있는 순간에 이루어졌다. 어두운 방에서 다시 눈을 뜰 때마다 내지른 비명 속엔 아직 안도감이 남아있던 거였다.

 

아직, 아직 이었던 거였다. 결국 넌, 아직 죽고 싶지 않은 거였다. 다시금 익숙한 감각이 볼을 따라 흘러내린다. 너는 황급히 그 감각을 닦아낸다. 뜨거운 눈물에 너의 손이 축축이 젖어든다. 그런 너를 보는 설호의 입술이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듯 우물거리다 멈춘다. 너는 그런 입술을 빤히 쳐다보다 답답하다는 듯 거센 한숨을 쉬며 다시 너의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트린다. 비명을 지른다. 발악을 하며 온 몸을 뒤튼다.

 

인정할 수 없었다. 충분히 괴로운 나날을 보낸 줄 알았는데. 죽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나. 도대체 얼마나 더 괴로워야, 눈을 뜨는 순간을 진심으로 저주할 수 있게 될까. 나는 그만큼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던 거였나.

 

'이보다 더 큰 고통이 있을까, 나는 견딜 만해서 살고 싶은 걸까'

 

너는 끊임없이 몸을 뒤틀고 쥐어뜯고 발악한다. 그런 너를 설호의 억센 팔이 잡아 붙든다. 너는 손톱을 세워 설호의 팔을 쥐어뜯는다. 억센 팔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너는 다시 눈을 감는다. 부들부들 떨리던 온 몸이 순식간에 멈춰버린다. 잠깐 끊어진 의식의 끈이 간신히 잡힐 즈음 너는 눈물 젖은 얼굴로 설호의 품에 안겨있었다. 그런 너의 얼굴을 물수건으로 정성스레 닦고 있다. 설호는 너의 영웅이었다. 한설호, 한설희, 처음 배운 글자로 삐뜰빼뜰 서로의 이름을 나란히 써보았을 때, 너와 너의 오빠의 이름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는 설자돌림이 너무나 자랑스러웠었다. 남들과는 다른 사이가, 오빠의 애정 어린 표현들이 너에겐 가장 큰 자랑거리이자 너의 인생의 중심이었다.

 

‘아직도?’

 

너는 설호의 손길을 뿌리치며 일어난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문가를 가리킨다.

 

“나가”

 

“희야……,”

 

너의 떨리는 목소리에 흑색 눈동자가 다시금 촉촉하게 젖어 들어간다. 너는 그 눈동자를 외면한 채 다시 소리 지른다.

 

“나가라고!!!! 나가, 나가나가나가나가나가!!!!”

 

고개를 마구 저으며 소리를 지른다, 고개를 숙인 채 눈물만 흘리는 설호를 바라보며 너는 다시금 칼날을 내뱉는다.

 

“아니면 내가 나갈까?!!”

 

너의 입에서 나온 말에 흑색 눈동자가 흔들린다, 설호의 얼굴이 충격으로 얼룩진다. 너는 머리를 추스르며 침대에서 일어난다. 먼지 쌓인 윗옷을 꺼내 억지로 팔에 꿴다. 비틀비틀 너의 몸이 흔들린다. 발바닥이 욱신거린다.

 

“그러네, 내가 나가면 되겠네, 내가 나갈게 오빠. 설마 이 근처에 고층 건물 하나 없겠어??”

 

너는 이루어지지 않을 일을 들어 협박한다. 되도 않는 거짓말에 절로 부들부들 떨리는 몸뚱아리가 싫어 너는 팔을 꽉 움켜쥔다. 억센 팔이 너의 흔들리는 손을 잡아당긴다, 너는 거칠게 침대 위로 엎어진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시선 사이로 우뚝 서있는 설호가 보인다. 거대한 슬픔이 보인다. 이내 설호가 말했다.

 

“그만해……, 내가 나갈 테니까.”

 

아팠다. 순간 너도 모르게 눈에 고인 습기에 너는 억지로 몸을 움직여 다시 축축한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한숨 소리와 주저하는 목소리가 울리다 이내 다시 문이 비명을 지르며 움직였다.

“힘들면……, 언제든지 문 두드려, 오빠 방 알잖아.”

 

너는 속으로 생각했다.

 

‘너무 잘 알아서 문제지’

 

이불에 어색하게 남은 설호의 온기에 너는 몸을 움츠린다. 이 집에는 아직 추억이 너무나 많이 남아있다. 너는 남아있는 온기를 벗 삼아 깊은 잠에 빠진다.

 

시간감각이 사라진 방에서 너는 다시금 눈을 뜬다. 유리조각이 빛을 받아 번쩍거린다. 너의 눈꺼풀을 파고든다. 너는 이불을 걷고 일어난다.

 

‘뭐지’

 

비틀비틀 발걸음을 옮긴다, 문득 발을 보니 엉성한 붕대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큼지막한 반창고가 상처를 가리고 있다. 너는 너도 모르는 사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가 다시 차가운 겨울로 돌아간다. 네 몸을 감싸고 있는 악취에 너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린다. 비틀비틀 걸음을 옮겨 화장실로 향한다.

 

순간 풀려버린 다리에 너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진다. 얼얼한 통증이 무릎을 감싼다. 아무도 달려오지 않는다. 너는 새삼스럽게 올라오는 슬픔을 꾹 눌러 삼키며 천천히 일어난다. 화장실의 문을 연다.

 

탁, 너를 알아채고 환하게 불을 켜는 전등에 너는 눈을 찡그린다. 낯선 빛이 너의 눈을 찔러온다. 너는 애써 거울을 외면하며 물을 튼다. 쏴아 맑은 소리와 함께 따스한 물결이 너를 감싸며 흘러내린다. 톡, 토톡. 부드러운 물결이 오랜 추위에 굳어진 너의 몸을 녹인다. 뜨거운 물에 피어오른 수중기가 거울을 가렸다. 망설이던 너는 희다 못해 창백한 너의 왼손을 뻗어 거울을 닦았다. 희뿌연 거울 속에 너의 얼굴이 떠올랐다. 초췌한 얼굴을 본다. 아빠를 닮은 말끔한 눈썹을, 엄마를 닮은 짙은 쌍까풀과 긴 속눈썹을. 아빠를 닮은 높은 코를, 엄마를 닮은 갸름한 얼굴형을, 입술을, 하얀 피부를. 그들을 닮은 너를. 너는 너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어루만지고 어루만지며. 너의 손이 눈물이 아닌 물줄기에 퉁퉁 불어오를 때까지 수중기로 뿌옇게 덮여가는 거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너는 온기에 녹은 근육을 쭉 펴며 화장실을 나선다. 갑작스러운 현기증에 비틀거린다. 흔들리는 시선사이로 말끔해진 바닥이 보인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너는 책상을 향해 달려간다. 쿠당탕 소리를 내며 넘어진다. 너는 두 팔로 기어 책상의 밑을 본다.

 

아직 남아있었다. 지울 수 없는 행복이.

 

금간 유리 사이로 미소 짓고 있는 어린 네가 보인다. 너를 안고 있는 설호가 보인다. 그런 설호의 양 어깨에 손을 얹고 있는 설호를 닮은 여인이 보인다, 널 닮은 남성이 보인다. 너의 부모님이 보인다. 너는 황급히 손을 들어 입을 가로막는다. 터져 나오지 못한 신음이 입안을 맴돈다. 뜨거운 눈물이 방바닥을 적신다. 너는 비명을 지른다. 굳어버린 손가락 마디가 비명을 지르며 움직인다. 바닥을 마구 내리친다. 고개를 내젓는다. 너는 익숙한 그 이름, 네가 처음 내뱉은 그 단어를 부르짖는다. 울음에 섞여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단어를.

 

“엄마”

 

너는 다시금 심장을 쥐어뜯으며 울부짖는다.

 

“아빠”

 

너는 한동안 그렇게 울며 비명을 질렀다. 겨우 가라앉은 목이 다시금 갈라진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말라버린 너의 입에 다시 비릿한 향기가 감돈다. 그렇게 너는 또 한 번의 어둠을 맞이했다.

 

시간은 째깍째깍 빠르게 흘러갔다. 방 안에 감돌던 냉기는 나날이 조금씩 스러져갔고,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고통이 조금 옅어지는 듯 했다. 설호는 아빠의 가방을 들고, 엄마의 차를 타고 회사로 출근했다. 이젠 아빠와 엄마가 앉아있던 사무실에 앉아, 의자 하나를 빼내 더 넓어진 책상에서 엄마가 하던 일들을 하고, 아빠가 만다던 사람을 만났다.

 

그렇게 1주가 지나고 2주가 지나고 한 달 반이 지났다. 너는 여전히 너의 방에 있었지만 일주일 전에는 방의 전구를 갈았다. 휘청거리는 의자에 올라서서 네 손으로 직접 갈았다. 깜빡깜빡 소리와 함께 환한 빛이 너의 방 안을 가득 메운다. 2주 전에는 축축한 이불은 얇은 봄 이불로 바꾸었다. 침대에 누울 때면 예전의 눅눅한 냄새보다는 삐그덕 침대의 스프링 소리와 함께 사그락사그락 이불소리가 먼저 너의 귓전에 울렸다.

 

한 달 전에는 너의 방을 청소했고, 가족사진을 새 액자에 담아 원래 자리에 걸어놓았다. 한 달반 전부터 너는 일어나 밥을 먹고, 방 문 앞에서 너의 오빠를 배웅했다.

 

하지만 그 시간동안 너의 커튼은 변함없이 굳게 닫혀있었다.

 

자연스럽게 떠진 눈에 너는 이불을 걷고 일어난다. 뜨거운 물에 몸을 씻고 쭈욱 쭉 몸을 늘리며 스트레칭을 한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불이 꺼져 어두워진 방에서 시계는 9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다. 방을 가르는 얇은 선에 너는 고개를 돌린다. 두꺼운 커튼 사이로 가로등빛인지 햇빛인지 모를 맑은 빛이 내리쬔다, 날카로운 창인마냥 길게 늘어진 빛은 방바닥을 가르며 밝게 빛난다. 너는 무엇에라도 홀린 듯 창문을 향해 걸어갔다. 한발자국, 두발자국. 문득 너의 머리칼을 흩날리는 바람에 너는 깜짝 놀라며 몸을 떤다. 잠깐의 정적이 지나자 너는 달려가 커튼을 움켜잡는다. 차디찬 바람이 너의 귓전을 스치고 지나간다. 너의 손이 부르르 떨린다.

 

‘창문은 닫혀있을 텐데’

 

이내 너는 손을 놓고 주춤주춤 물러난다.

 

‘착각이겠지’

 

하지만 왠지 모를 무엇인가가 너를 부른다. 주춤주춤 다시 창문을 향해 다가가지만 이내 몸을 다시 돌린다.

 

‘밤이면 어떻게 해’

 

왠지 모를 두려움에 너는 털썩 주저앉았다, 미련에 다시 일어났다, 저벅저벅 텅 빈 방 안을 맴돌았다.

 

돌아가는 시선 사이로 책상 위에 걸린 액자가 보인다. 어디선가 들어온 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는 엄마의 미소를 본다. 잠시 멈춰있던 너는 이내 몸을 돌려 커튼을 열어젖힌다. 맑은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두터운 커튼이 너의 귓전을 스친다. 창밖의 벚꽃나무는 어느덧 자신의 빛을 힘껏 뽐내고 있었다. 이내 너는 창문의 걸쇠를 열고 힘껏 양 옆으로 밀어낸다. 열어젖힌 창문 사이로 쏟아지는 찬바람에 너는 얼굴을 찡그렸다. 회상도, 아픔도, 이제는 접어둬야 할 날이었다.

 

너는 크게 기지개를 폈다. 쭈욱 쭉, 온 세상을 너로 채울 듯이. 하염없이 몸을 웅크리던 시절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거칠게 열린 문으로 들어온 설호가 무거운 첫 발자국을 떼기까지, 너도 모르게 터져 나온 웃음이 방 안을 가득 채울 때 까지, 너는 계속해서 쭈욱 쭉, 너의 몸을 폈다.

 

 

-작년 겨울, 몰아치는 생각을 따라 폭풍처럼 글을 써낸 후 더없이 부족한 제 솜씨가 부끄러워 제목조차 짓지 못하고 숨겨놓았던 글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연 폴더에 홀로 남아있던 이 글이 왠지 모르게 안쓰러워져서, 이제는 제목이라도 붙여줘야 할 것 같아 글을 올립니다. 부족하지만 아직 움직이고 있는 이 이야기에 걸맞는 제목을 붙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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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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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용기가 생겨 이렇게 글을 씁니다.

아니, 이제야 미련이 떠나서, 진드기처럼 끈질기고 끈질기게 내게 달라붙어있던 그 미련이 드디어 떠나가서, 한 자락의 추억과 한 조각의 기억을 연필로 삼아 이제야 글을 씁니다.

정말 길고 긴 세월이 흘러갔지요. 봄바람에 아련히 흩날리던 벚꽃 잎. 그 벚꽃 잎에게 빼앗겼던 내 마음을 도로 찾아오기까지 두 번의 봄을 흘려보냈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마지막 청춘의 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마음이라는 것의 존재에 어색하다 못해 기이하기까지 합니다. 온 몸을 타고 흐르는 낯설지만 익숙한 감각에 나는 오랜만에 내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기로 했습니다. 손을 곱게 펴고 심장 옆자리 어딘가에 있는 적당한 무게감을 지닌 그것을 조심히 꺼내듭니다. 내 작은 두 손안에 소중히 쥐어봅니다. 손 안을 꽉 채우며 폭 들어오는 것이, 따스한 온기가 손바닥에서부터 찌릿찌릿 퍼져오는 것이, 이리저리 흉한 상처로 뒤덮인 것이, 마치 험한 바람 모르고 제멋대로 날개를 펼치다 툭, 떨어져버린. 첫 비행에 자그마한 두 날개가 처참히 꺾여버린, 가엾고 가엾은 어린 새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짠해옵니다. 이상하게 눈가가 시려옵니다. 아직 눈물을 덜 흘렸다는 뜻일까요.

또 다시 미련이 나를 붙들기 전에, 이 얇디얇은 용기가 툭, 끊어져버리기 전에, 그렇게 이 작고 불쌍한 것에 또 다시 새로운 상처가 생겨나기 전에. 애써 고개를 흔들며 가이없는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꺼내어봅니다.

사랑했습니다. 그래요, 나는 그대를 사랑했습니다. 아니 사랑했을 겁니다. 흩날리는 벚꽃 잎을 사랑했었으니, 찬란하게 쏟아지던 4월의 햇살을, 적막이 맴돌던 점심시간의 빈 복도를, 이따금씩 들려오던 노랫소리를, 따스한 햇살과 함께 팔랑이며 날아 들어오던 작은 꽃잎을, 그 꽃잎이 앉았던 자리를, 그 모든 순간들을 사랑했었으니 아마도 나는 그대를 꽤나 열렬히 사랑했었을 겁니다.

언젠가 그대 내게 물어보시려나요? 그 사랑 어찌하여 사라졌느냐고. 어째서 밤하늘의 달빛처럼 아스라이 스러졌느냐고, 그때 그 감정, 그 설렘, 그 소중했던 모든 것들은 어디로 흩어졌느냐고. 만약 그대 그렇게 내게 물어보신다면 나는 아무 말 없이 나의 손을 열어 내가 쥐고 있던 그것을, 아직 미약한 열기를 내뿜고 있는 잿덩이를 보여드리리다. 그걸 보신다면 아마 그대도 나를 이해해주실 테지요. 태양처럼 활활 타오르던 것이 제 열기를 이기지 못해 처참히 스러져버린 것을 보신다면 날 불쌍히 여겨주실 테지요.

아픔만 남았냐고 물어보신다면 그건 아니었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잃은 것이 많지만 얻은 것도 있으니. 제 사랑은 짝사랑이 아니었죠. 그저 혼자 하는 외사랑 이었습니다. 처음이었기에 서툴렀고, 세상엔 비밀이 있노라고 믿고 있었지만 어느새 모두가 아는 사랑을 하며 나는 세상엔 비밀이 없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습니다. 사람의 감정이 이리도 쉽게 하나의 유흥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습니다. 밤을 새워가며 쓴 편지가, 부들부들 떨리던 나의 목소리가, 온 학교를 떠돌아다니던 나의 발자국이, 그렇게나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알아낸 게 많으니 앞으로는 이런 일은 없을 테지요.

뽕나무밭이 바다가 되듯, 흐르는 세월 앞에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을 내 그대를 사랑하며 깨달았습니다. 심장이 벅차오르는 감정에, 일평생을 나와 함께해온 버릇들이 한순간에 바뀌어가는 순간들에, 말 한마디로, 눈짓 한 번으로,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신기하고도 애처로운 감각들에. 나는 이 감정이 영원할 줄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대가 보시듯,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붉은 고동으로 온 몸을 울리던 그 마음은, 이제 그저 하나의 잿덩이가 되었을 뿐입니다.

아직 완벽히 스러지지 않았지만, 뭉개지지 않았지만, 흩날리지 않았지만, 사라지지 않았지만. 세월이 흘러갔기에 이리 펜을 듭니다. 마지막 남은 흔적마저 훌훌 털어버리려 글을 씁니다. 미련이 떠난 자리에 새로움을 채우고자, 아니 내가 잃어버렸던 나를 찾고자. 나는 서툴렀던 과거를 괜스레 꺼내봅니다. 가슴 아픈 순간들에 손위에 있던 마음이 순간 두근, 두근. 서러움의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쓰라렸던 상처의 아픔을 꺼내듭니다.

무릎을 적시던 슬픔의 눈물, 바보같이 웃던 미소 속으로 썩어 들어가던 고통, 그리고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 때의 봄, 텅 빈 복도에 홀로 외로이 늘어져있던 그림자 한 자락을 꺼내듭니다. 주섬주섬 하나하나 정성들여 접고선 철을 모르고 내리는 하이얀 봄눈에 곱게 쌉니다. 그리곤 그것을 조심히 들어 올려 내 공허 속 어딘가에 있을 금고에 슬며시 집어넣습니다. 내 팔이 뻗을 수 있을 만큼 길게 뻗어 깊숙이 밀어 넣습니다. 그리곤 문을 쾅 닫고, 다이얼을 돌리고, 비밀번호를 삑삑 요란하게도 누릅니다.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아 어딘가에서 본 듯한 굵직한 쇠사슬을 한 아름 가져다가 칭칭 두릅니다. 주먹만 한 자물쇠를 철커덕 잠급니다.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 쇠사슬이 한 줌의 먼지가 되고, 각진 쇠금고가 닳고 달아 둥그레질 즈음이면 내 마음은 다시 어린아이의 생동감 넘치는 그것으로 두근두근 뛰어오르겠지요. 그 때까지 나는 아직 남아있는 그대의 파편들을 치우며 이 내 손안에 담긴 마음을 찬찬히 바라보려 합니다. 깎아내고 깎아내다가 흉만 남은 이 돌멩이가 다시 태산 같은 바위가 될 때쯤이면 맑게 웃으며 그대에게 슬쩍 말해볼 수도 있겠지요. 그런 시절도 있었노라고, 나 그대를 사랑하며 홀로 울고 웃고, 가슴아파하던 시절도 있었노라고. 그리 담담하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 전까지 나는 이 내 초라한 마음을 찬찬히 바라보려 합니다. 익숙지 못한 외지에 가서 고생하고 돌아온 이 내 마음을, 처음 맞이한 쓰라린 경험에 검댕을 묻히고 깊숙이 숨어버린 이 내 마음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으려 합니다. 시커먼 잿덩이가 다시 한 번 붉은 고동소리를 울릴 때까지, 다시 한 번 한 송이의 흩날리는 벚꽃이 나의 마음을 앗아갈 그 때까지, 어린 새가 바람을 타고 힘차게 날아오를 때까지. 그대를 잊어내려 합니다. 아뇨, 난 그대를 잊었다 말하렵니다. 함께하던 설렘이 스러졌듯, 그대 향한 내 마음도 과거의 추억으로 흘러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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