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스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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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싶었다. 슬퍼서가 아니라 그냥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시험이 끝난 교실은 시끄러웠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앉아있었다. 아이들은 각자 핸드폰을 하고 나는 책을 읽었다. 문제가 될 만한 상항이 아니었다. 아니, 그래서 문제가 되었다.

 

나는 책으로 얼굴을 가렸다.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울컥하며 뜨거운 덩어리가 목구멍에서 소리 없이 넘어갔다. 나는 그 자리에서 끅끅대며 울어버리고 싶은 걸 참으려 갖은 애를 다 썼다. 당황스러웠다. 이유가 뭐지? 나는 끊임없이 눈을 깜빡이며 진정하려 애썼다. 교실은 평화로웠다. 숨이 막혔다.

 

침착해, 지금 울면 미친놈 취급받을 거야, 그러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아니야, 나는 스스로에게 대답하며 어떻게 해야 진정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뜨거운 홍차, 혼자 있기, 책 읽기(구체적으로 상황에 맞는 책은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일 거야, 라고 생각했다.) 젠장, 집에 가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고, 오늘은 체험학습을 가는 날이라 오후 4시는 돼야 끝난단 말이야! 절망감에 빠지려는 찰나 그제야 학교에 가기 전 아무렇게나 집어 든 책이 두 권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로써는 유일한 해결책이었기 때문에 나는 망설임 없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별로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숨을 쉬기 힘들었다. 책 속의 주인공들은 모두 자신에게 잘못한 인물에게 맹목적으로 사과를 요구하고 있었다. 역겨웠다. 모두가 사과를 요구하기만 한다면, 도대체 사과는 누가 하냔 말이야. 아무도 자신을 선량한 피해자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은 결백한 약자고 타인은 악랄한 강자이다. 나는 실제로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사람조차 이러한 생각만을 품고 있을까 봐 무서웠다. 그리고 혐오스러웠다.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체험학습이 있는 날이었다. 장소이동과 점심 모두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나는 장소이동방법과 점심 메뉴를 친구들과 상의하며 내내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시답지 않은 이야기로 낄낄거리면서도, 나는 기침하는 척하며 눈물을 삼켜야 했다.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배가 아팠다.

 

체험학습으로 간 곳에서 들은 강의의 내용은 간단했다. 꿈을 캐스팅 당해야 한다는 것과, 남들에게 져주며 함께 가라는 것. 나는 유명한 오디션 프로그램을 예시로 설명하는 그 사람에게 캐스팅은 수천만의 사람이 경쟁, 즉, 남을 짓밟고 올라가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 사람의 요지는 결국 얼렁뚱땅 말을 한 뒤, 어쨌든 청년들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효과적인 방법을 알아냈고, 강의를 듣는 맨 앞자리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무시, 나는 그를 철저히 무시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심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혼자 남았다는 해방감은 들지 않았다. 눈물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나는 고요한 집안에서조차 울 수 없었다. 벗어놓은 옷을 정리하고 티비를 봤다. 웃기는 장면이 나오면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나는 울 수도, 홍차를 마실 수도 없었다.

 

그다음 날, 나는 먹었던 모든 것을 게워냈다. 점심 약속으로 고기 뷔페에 가기로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나는 화장실에 처박혀 토하고 또 토했다. 마치 그렇게 구역질을 계속하다 보면, 시험이 끝나고 거의 매일 같이했던 수많은 외식을 다 지워버릴 수 있을 것처럼. 머리가 아팠고, 반사적으로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나는 내 상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여전히 펑펑 울어버릴 수는 없었다. 왜 울고 싶은지, 왜 울고 싶은데 울지 못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도서관에 가서 카프카의 책을 빌렸다. 집에 오는 내내 꺽꺽거리면서 헛구역질을 해댔다.

 

제가 출구란 말을 무슨 뜻으로 쓰는지 똑바로 이해받지 못할까 걱정이 됩니다. 저는 이 말을 가장 일상적이고 가장 빈틈없는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저는 일부러 자유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방을 향해 열려 있는 자유라는 저 위대한 감정을 뜻하는 게 아니거든요.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나는 헐떡거리며 책을 읽었다. 그제야 내 상황이 조금 이해가 됐다. 나는 시험이 끝나는 동시에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라 다만 출구 찾은 것뿐이었다. 12년 동안의 학교생활을 통해 나는 자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자유가 아니라 출구를 찾기 위해 교화됐을 뿐이었다. 나는 조련 된 원숭이 패터처럼 원숭이 시절, 그러니까 자유롭던 시절로 되돌아갈 수 없을뿐더러, 그것을 제대로 기억조차 할 수 없다. 내가 학교를 떠난다 한들, 자유 따위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시끌벅적하게 웃고 떠드는 아이들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출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구멍을 통해 나가면 잃어버린 것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면서 모순적으로 나를 잃어버린 것이다. 출구를 향해 좁은 구멍에 몸을 욱여넣으며, 나는 변해버린 것이다.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나뿐이다. 나는 이것을 무의식적으로 깨달아 버린 것이다. 속이 쓰렸다.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그리하여 저는 배웠습니다, 여러분, 아, 배워야 한다면 배우는 법, 출구를 원한다면 배웁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배우는 법입니다. 회초리로 스스로를 감독하고, 지극히 조그만 저항만 있어도 제 살을 짓찧었습니다. 원숭이 본성은 둘둘 뭉쳐져 데굴데굴 쏜살같이 제게서 빠져나가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저의 첫 스승 자신이 그것으로 하여 거의 원숭이처럼 되어버려, 곧 수업을 포기하고 정신병원으로 보내져야 했습니다.

 

나는 무서웠다. 누군가를 미치게 할 만한 어떤 본성이 내게도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비워내며 나는 계속 구역질을 했다. 모든 것이 역겨웠다. 나는 반쯤 조련 된 동물의 어리둥절해진 미혹(迷惑)을 눈길에 담고 있었다. 어지러웠다. 메스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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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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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갔습니다.

 

여행을 갔다 왔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비행기에 타고 있더군요. 알 수 없는 언어들이 사방에 흩어지고, 비행기는 흔들렸습니다. 내 옆엔 동생이 앉아있었고, 기대에 가득 찬 얼굴이 보였으나, 귀가 먹먹해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먹먹한 게 꼭 귀만은 아니었어요. 창가에 앉아있진 않았지만, 그래서 하늘이 보이진 않았지만, 날고 있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어요. 온몸에 가득 찬 낯설면서도 익숙한 이 기분, 7년 만이었네요, 비행기를 다시 탄다는 거, 비행기를 탈 때마다 신기한 경험을 하곤 했어요. 늘 내가 겪어보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곤 했죠,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한때 한국 땅을 밟을 때마다 그런 기분을 느꼈던 적이 있었어요. 얇은 얼음 위에서 보고 있던 흐릿한 공간에 풍덩 빠진 기분이랄까요. 날카로운 얼음 조각들이 얼굴을 스치고, 등을 돌리면 멀리서 바라보던 풍경이 코앞에 일렁이는, 그런 기분.

 

깜깜한 하늘을 배경으로 알 수 없는 간판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흔들리는 이층 버스와 발끝에 닿는 가방만이 모든 걸 실감 나게 했죠. 차창에 비친 내 모습이 이상했어요. 여행을 할 때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됩니다. 언어를 바꿀 때마다 성격이 바뀌는 것처럼. 어둠에 겹쳐진 내 얼굴과 바깥풍경이 묘했습니다. 비틀리고 섞인 이질감, 나는 그런 이질감을 자주 겪었고, 모순적이지만 그런 이질감에서 자주 편안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어느새 나는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역시, 지금 떠올리는 그때를 이해하긴 힘듭니다. 나는 내가 아니었어요. 꼭 무언가에 취한 것 같은, 비틀거리는

 

여행을 하는 내내, 알아듣기 힘든 말들을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었습니다. 노래하는 듯, 흥얼거리는 듯,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좋아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어절이 공기에 둥둥 떠다닐 때, 그 특유의 리듬과 높낮이를 좋아합니다. 나에게는 그것 또한 음악으로 들리니까요. 습한 공기 위에 여러 목소리가 섞여 갖가지 색깔이 보이고, 나는 그 색깔 사이로 내 목소리를 끼워 넣었습니다. 수다는 늘 즐겁죠. 네, 그렇길 바라면서요.

 

제복을 갖춰 입은 근위병들이 구두 소리를 내며 교대식을 하는 것을 구경했습니다. 피곤함에 잠겨 나른한 기분으로 구경했던 근위병들의 구두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있습니다. 일정한 간격으로 울려 퍼지던 소리. 또각, 또각. 사진기의 찰칵거리는 셔터 음과 관광객들의 여러 목소리 중에 어렴풋이 들렸던 한국말. 근위병들의 옷은 모두 새하얬어요. 총을 들었다 내렸다. 무섭기보단 우스꽝스러운, 나는 진짜 관광객이 된 기분에 조금 씁쓸했습니다.

 

여러 가지 모양의 돌들이 모여 있는 공원도 구경했어요. 바닷가라 습한 바람에 머리가 자꾸 날렸고, 우글거리는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삭막한 느낌이었습니다. 울퉁불퉁한 바닥에는 화석들과 작은 분화구 모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습니다. 바닷가에 이끼가 끼어있는 초록색 바위들을 보며 들었던 기분은, 지금은 전혀 떠오르지 않네요.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은 바다라는 거대하고 추상적인 느낌뿐입니다. 메마르고 갈라진 땅들에서조차 나는 바다를 느꼈습니다. 바다를 풀어서 설명할 수는 없어요. 바다를 느끼는 방법은, 그 방법은 나조차도 정확히 알 수 없으니까요.

 

찻집에서 시음용으로 따라준 차를 마셨습니다. 진한 향기, 차는 자기주장이 강해요. 온몸에 느껴지는 뜨거우면서도 진한 향, 그 차가 주장하는 단 한 가지는 자기가 진짜라는 거였어요. 진짜 차는 다릅니다. 싸구려 티백과는 다르죠. 그들은 죽어있고, 심지어 물보다 할 줄 아는 말이 없어요. 나는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차의 수다를 들었습니다. 직설적이지만 부드럽게 마무리를 할 줄 아는 기분 좋은 담소였습니다.

 

아빠는 그곳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했어요. 내 미래에 관한 이야기, 나는 한국도 아니고, 예전에 살던 나라도 아닌, 전혀 낯선 이곳에 살게 될지도 몰라요. 익숙함이 낯설고, 낯섦이 익숙한 걸요. 어느 쪽이든 상관없습니다. 난 새로운 글자를 익혀야 할 거예요. 그림 같던, 읽을 수 없는 간판들을 읽게 될지도 모르죠. 언어는 이해하는 순간 매력이 사라집니다. 글자 역시 그렇고요. 고개를 젓는 내가 지었던 표정을 기억해 낼 수 없어요. 그곳엔 거울이 없었으니까요. 혹시 느껴지나요? 내 글 속에서 나는 표정을 드러내는 사람일까요?

 

모르겠어요. 기억이 흩어지고 있어요.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선 창가 자리에 앉았어요. 이곳에 다 적지 못한, 여러 가지 복잡한 사건들이 내 몸에 응축되어 가득 찼습니다. 창밖에 구름들은 여러 가지 모양이었고, 그 경계 사이로 두 가지 색깔의 하늘이 보였어요. 옅은 하늘과 짙은 하늘,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비행기 속에 내가 있었어요. 믿어지지 않는 일이에요. 정말

 

돌아온 순간 모든 건 사라져요. 나는 이제 모든 게 익숙한 곳으로 돌아왔어요. 키보드의 타닥 소리를 들으며 글을 쓰는 지금의 표정 또한 알 수 없지만, 당분간 떠날 일은 없을 것 같은 이곳의 편안함이 온몸을 휘감고 있어요. 그리고 익숙함이 참

 

낯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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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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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의 심장은 질기다.
바퀴자국이 시커멓게 나고
번들거리는 피가 말라 비틀어질 때까지
샛노란 눈에 담긴 서슬퍼런 호흡은
끝까지 그렇게 두근거린다.

 

여자의 비명은 동화적이다.
품에 안길 왕자는 없다.
그녀는 전화를 걸며 울먹거리고
악셀을 밟던 새하얀 다리를 덜덜 떤다.

 

불쌍해
고개를 돌린채 여자가 중얼거리고
고양이는 길건너 쓰레기통에 있을
말라붙은 생선가시를 생각한다.
여자의 손수건에선 복숭아 냄새가 난다.

 

고양이의 털은 억세다.
도로에 엉겨붙은 피비릿내를 뚫고
고양이는 여전히 주린 배를 채울 궁리를 한다.

 

딱딱하게 굳은 눈을
여자는 바로보지 못한다.
뻣뻣한 털뭉치를 치우는 뒷모습조차
겁에 질려 보지 못한다.

 

여자는 고양이를 죽였다.
충혈된 눈과 모래낀 손톱으로 사는
고양이들이 참 많이도 죽었다.

 

여자는 연약한 손으로 다시 핸들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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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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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여름은 온통 빨간 색이었다.

 

나는 주전자에 물을 쏟아 붇는다. 투명하고 찰랑거리는 것이 솨아 솨아 소리를 내며 주전자 바닥을 내리친다. 불을 올리고 찻잎을 개량하고 컵에 뜨거운 물을 부어 예열을 한다. 토요일 새벽이다. 공기가 맑다.

 

주말의 새벽은 본디 잠의 것이어야 하지만 난 구태여 이 한 도막의 시간을 빼내어 고요함을 만끽한다. 알싸한 어둠이 바닥에 짙게 깔리고 어쩐지 모든 것이 투명한 이 순간, 주전자 안에 물이 부글대는 소리, 비닐을 열고 찻잎을 꺼낼 때 나는 부스럭 소리, 끓어오른 물속으로 찻잎을 쏟아 넣을 때 나는 퐁당 소리가 오롯이 귀에 들어온다. 나는 잡음에 섞이지 않은 이 하나하나의 소리를 좋아한다. 새벽에만 느낄 수 있는 묘미다.

 

찻잎이 제법 우러나오면 나는 컵에 담긴 뜨거운 물을 쏟아내고 주전자에서 우러나온 찻물을 컵에 쪼르르 따른다. 투명한 컵에 비친 색깔이 붉다. 나는 컵의 끝부분에 하얗게 맺힌 물방울들과 그 위로 몽실몽실 올라오는 반투명한 수증기를 신기하게 쳐다본다. 컵 끝에 코를 바짝 갖다 대면 뜨겁고 축축한 물방울들이 코에 훅 끼친다. 물방울들 하나하나에는 차향이 베어 나온다. 기분이 좋다. 차는 어쩐지 사람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이 있다.

 

목구멍으로 뜨거운 차가 흘러내린다. 온 몸에 힘이 풀리고 나는 몽롱해진다. 혀끝에는 쌉쌀한 차향이 얇게 쌓인다.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나서듯, 나는 불현 듯 과거의 그 무언가를 떠올릴 듯도 하다. 어둠에 반쯤 잠긴 몸을 천천히 일으키면, 내안에는 따뜻한 홍차가 가득하다. 코끝에는 아직 차향이 붉게 남아있다. 여름이어도 새벽은 시원한 탓에, 따뜻한 몸과 차가운 공기가 맞부딪혀 제법 기분 좋은 온도차를 만든다. 나는 홍차 한잔을 천천히 마시고, 펜을 집어 든다.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이다. 그것이 시였든 소설이었든 무엇이든 나는 기분 좋게 끄적이는 것이다.

 

어느 해 여름은 온통 빨간 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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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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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이이이

-..신호가 강해지고 있어!

-..전기…추가…이거..

-안 돼!..깨어나려고..있어…빨리 마취제…

나는 여러 가지 소음을 들으며 깨어났다. 지독한 냄새가 났고, 온몸이 무거운 것이, 꼭 이미 죽은 몸에 영혼이 달랑달랑하게 매달린 느낌이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으어어억!!

나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는 온통 사람이 아닌 이상한 괴물들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온 몸을 버둥거리며, 이 끔찍한 악몽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어서 환자를 진정시켜!

-약물 투여가 잘못된 건가?

-호흡이 격해지고 있어, 이러다간 몸에 무리가 갈 거야!

나는 온 몸이 묶여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머리가 아파왔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나는 버둥거림이 둔해지는 것을 느끼며, 서서히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어때, 정신이 좀 들어?”

나는 낯선 목소리에 눈을 떴다. 아니, 사실 낯선 목소리였지만, 너무나도 다정한 목소리에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 뻔 했다.

“..여기가 어디죠?”

나는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눈앞에 괴물은, 도저히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온 몸은 다코야키처럼 노란빛이 도는 갈색이었고, 검은 색 흰자에 흰 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체격은 인간이랑 비슷했지만, 그 이외에는 공통점을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차라리 사람크기의 문어라고 하는 것이 더 맞았다. 팔다리 모두 1쌍씩 있긴 했지만, 마치 문어처럼 흐물거렸다. 제일 기괴한 점은, 사람이라면 목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에 이상한 촉수들이 빙 둘러서 징그럽게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아가미처럼, 그것은 그 괴물이 숨을 들이쉬었다 내쉴 때마다 올라갔다 내려갔는데, 정말이지 끔찍한 광경이었다. 나는 소리 지를 기운조차 없었기 때문에, 그저 맥없이 질문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만약 내가 도망가려고 하면, 전에처럼 기절시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곳은 프레티나 행성의 병원이야. 블루, 너를 영영 보지 못 하는 줄 알았어.”

그는 마치 나를 당장이라도 와락 안을 듯이 쳐다보았다. 나는 두려움에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당신은 누군 신데요? 프레티나 행성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인간이고, 지구에서 왔어요.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어요. 집에 보내주세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자꾸 떨려왔다. 내가 경계하는 눈초리로 바라보자 괴물은 마치 상처받은 것 같은 표정을 짓고서 말했다.

“블루, 너를 지구에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애초에 너무 위험한 탐사 계획이었어, 기억 입력 장치가 우주선이 불시착하면서 망가졌나봐, 원래는 위장 잠입을 위해 인간생활의 기본정보만 집어넣었어야 하는데, 에러가 나서 네가 프레티나 행성에서 살았던 기억이 다 지워진 것 같아.”

“네?”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괴물을 쳐다보았다.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혼란스러워하자 괴물은 말없이 내게 거울을 건네주었다. 나는 여전히 미심쩍은 느낌을 지우지 못한 채, 천천히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으아아아아!”

나는 하마터면 거울을 떨어뜨릴 뻔 했다. 거울 안에는 방금 전의 괴물과 똑같이 생긴, 징그러운 촉수를 꿈틀거리는 이상한 생물체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생겼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아니야! 이건 내가 아니야! 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 에요! 나 집에 갈래요. 집에 보내줘요!”

나는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끈적끈적하고 누런 액체가 눈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손(손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으로 그 끈적끈적한 액체를 미친 듯이 닦아 냈다. 머리가 아팠고, 역겨움에 자꾸 헛구역질이 나왔다. 괴물은 떨리는 내 어깨를 붙잡고 진정시키려 애썼다.

“블루, 미안해, 지금 막 깨어난 환자한테 이렇게 충격을 주면 안 되는데, 네가 다시 살아 돌아왔다는 게 너무 기뻐서 그만 급하게 와버렸어, 하지만 확실하게 말해 줄 게 있는데, 넌 인간이 아니라 프레티나인이야. 나랑 같이 지구탐사계획을 세우던 프레티나인이라고, 날 봐, 내가 누군지 정말 기억나지 않는 거야?”

나는 한참을 그 프레티나인인지 뭔지 하는 외계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도 역시 누런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슬퍼보였고, 지쳐보였다. 나는 그의 눈에서 진심을 보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기억의 제일 구석에도 그나, 이 프레티나라는 행성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미안해요, 전혀 기억나지 않아요.”

나는 한결 진정된 말투로 그에게 대답했다. 그의 새하얀 눈동자는 묘하게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래 괜찮아, 괜히 무리해서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다가 더 안 좋아 질 수도 있어, 오늘은 이만 갈게, 푹 쉬어.”

그는 침실 옆 서랍장 위에 놓인 휴지 곽에서 휴지를 몇 장 뽑아 나에게 주고는, 천천히 뒤를 돌아 병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아니, 사실 걸어갔다기보다는, 흐물거리는 다리로 미끄러져 갔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손잡이를 돌리던 그는, 갑자기 뒤를 돌아서 내게 말했다.

“아, 그리고 존댓말 쓸 필요 없어.”

나는 그의 목소리가 아주 슬프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그가 떠난 뒤에도 나는 한참을 잠들지 못했다. 나는 그가 주고 간 휴지로 눈물을 닦았다.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은은한 들꽃 냄새가 풍겨왔다. 프레티나라는 행성에도 들꽃이 필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한심해서 헛웃음을 지었다. 어찌나 눈을 세게 비볐었는지, 눈꺼풀이 퉁퉁 부어있었다. 그가 사라진 후에 병실에는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침대 바로 왼편에는 진녹색 커튼이 처져 있었고, 오른편에는 창문이 있었지만 날이 어두운 탓에 바깥 풍경은 잘 보이지 않았다. 새하얀 이불 위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수놓아져 있었고, 휴지에서 나는 향과 비슷한 향이 났다. 침대 맡에는 조그만 가습기가 틀어져있었다. 나는 이불을 바짝 당겨 코끝까지 덮었다. 가볍게 몸을 누르는 느낌에 기분이 좋아졌다. 병실은 너무 평온해서, 도저히 내가 지구에서 한참은 떨어져 있을 이상한 행성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외계인을 보았던 것도 마치 어릴 적 꿈처럼 아스라했다. 나는 천천히 숨을 쉬었다. 이불이 코에 바짝 붙어있어서 뽀송뽀송한 느낌이 났다. 천천히, 나는 잠이 들었다.

 

퍽퍽

으윽

-시발, 미친년아 죽어

퍽퍽

-미안해, 흑흑

-뭐? 큭큭 야 얘가 미안하덴다

-개웃기네, 너 잘못한 거 없어

 

그냥 재밌어서 이러는 거야.

 

온몸이 땀에 젖어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날이 밝아있었다. 나는 순간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잊어버리고 황급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진녹색 커튼과 온통 새하얀 벽들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침대 맡에 무릎을 꿇은 채 침대보에 머리를 묻고 자고 있는 외계인을 보고 나서야, 어젯밤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가 처한 상황들이 하나 둘 씩 떠올랐다. 내가 깨는 소리에 놀랐는지, 그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비틀거리며 다시 주저앉았다. 아마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앉아있어서 다리가 저렸나보다. 그는 침대를 붙잡고 마치 다리를 다친 사람이 휠체어에 타듯 천천히 일어났다.

“일어났어?”

그는 피곤해 보이는 목소리로 애써 밝게 말했다.

“네.”

나는 그가 내게 왜 이렇게 친절을 베풀까 궁금해 하며 대답했다.

“악몽을 꾼 것 같던데.”

“그냥, 지구에 있었을 때 꿈을 꿨어요.”

나는 잠결에 경솔하게 말을 꺼낸 것에 대해 후회했다. 내게서 ‘지구’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그의 눈에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호기심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눈빛은 너무 순식간에 걱정의 눈빛으로 되돌아와서, 나는 내가 착각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구? 지구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모르네요. 이름이 뭐에요? 내 이름은 이연지에요, 그쪽이 계속 블루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뭐 그게 편하면 그렇게 불러도 돼요.”

나는 내 목소리가 자연스러웠기를 바라며 말했다.

“아, 내 이름은 오렌지야, 줄여서 오니라고 불러도 되고.”

풋,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저렇게 괴상하게 생긴 외계인의 이름이 오렌지라니. 그리고 오렌지를 도대체 어떻게 줄이면 오니가 되는 거지? 게다가 오렌지 자체도 그렇게 긴 이름도 아닌데 왜 줄이는 거야? 순간 여러 가지 의문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는 내가 웃자 같이 싱긋 웃었다. 벌어진 입 사이로 크고 긴 치아들이 고르지 못하게 나있어서, 마치 심해의 식인 물고기를 보는 느낌이었다.

“아침 먹으러 가자. 여기 온 뒤로 뭐 제대로 된 거 먹지도 못했을 텐데.”

“그래요 오니.”

그가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혼자 일어나서 침대에서 내려왔다. 바닥에 차가운 촉감이 느껴졌다. 그제야 내가 신발을 신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옷은 환자복을 입고 있었지만, 발은 맨발이었다. 발끝에는 마치 오징어나 낙지 발 같이 빨판이 여러 개 있어서, 빨판을 빠르게 붙였다 땠다 해서 바닥을 미끄러지는 것처럼 걸어야 했다. 그는 어색하게 손을 거두며 길을 안내했다. 잊고 있었던 허기가 떠올라 정신이 몽롱해졌다.

 

“이게 뭐에요! 이걸 어떻게 먹으라는 거예요!”

나는 금방이라도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 이상한 스프를 바라보았다.

“왜? 네가 제일 좋아하던 건데?”

오니는 새하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재잘거렸다. 스프는 아마존의 늪지 색깔이었고, 군데군데 굳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은 건더기들이 떠다녔다.

“이렇게 징그러운 걸 어떻게 먹어요!”

나는 그릇을 저만치 멀리 밀어냈다. 그런데 그릇을 밀어내자마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방금 무슨 소리 나지 않았어?”

오니는 마치 5살짜리 꼬맹이처럼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즐겁담. 나는 못마땅하게 오니를 째려보다가, 황급히 그릇을 도로 가져와서 한 숟갈을 떠 보았다. 초록색 걸쭉한 액체가 부글거리며 숟가락 위에서 흘러내렸다. 나는 눈을 꼭 감고 그 끈적끈적한 스프를 삼켰다.

 

괴로움에서 벗어나

도망치고만 싶어요.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스프를 삼키자마자, 구슬픈 단조로 노래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오니는 나를 보며 말했다.

“신기하지?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속마음을 노래하는 스프야. 이 스프를 먹으면 네가 제일 간절히 바라는 일이 뭔지 알 수 있지.”

“하지만 이건 스프잖아요, 어떻게 맛이 아니라 노래로 들릴 수 있죠?”

나는 너무나 신기해서 스프를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스프는 따뜻하다는 것 외에는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괴로움에서 벗어나

도망치고만 싶어요.

 

괴로움에서 벗어나

도망치고만 싶어요.

 

단조롭지만 슬픈 멜로디가 귀안에 가득 차올랐다. 오니는 내 표정이 어두워 진 것을 보고는, 애써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아마 오니에게는 이 노래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지구에서는 이런 스프 없었어? 고정관념을 좀 버려 봐, 여기는 다른 행성이라고, 여기서 당연히 여기는 게 지구에선 말도 안 되는 일이 될 수도 있고, 지구에서 당연히 여기는 게 여기에선 말도 안 되는 일이 될 수도 있는 거지.”

나는 오니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그거 정말 멋진 일인데요?”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오니는 나를 마주보며 웃었다.

“중요한건, 네가 무엇을 믿느냐야.”

삐뚤빼뚤한 이빨이 더 이상 무섭지 않게 느껴졌다. 마치 오래전부터 오니를 알고 지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웃음이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스프를 먹기 시작했다. 식당에는 우리 외에도 다른 외계인들이 바글바글했다. 마치 서양인들의 외모가 비슷해 보이는 것처럼, 수많은 외계인들이 다 오니처럼 보였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요리를 하는 오니, 앞치마를 두른 채 접시를 나르는 오니, 빈자리를 찾아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는 오니,

그리고 내 앞에서 음식을 먹고 있는 오니

나는 한참을 말없이 노래하는 스프를 먹었다.

 

식당은 병원 바로 밑에 층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바깥풍경을 아직 보지 못했다. 스프를 먹고 몸 상태가 좀 나아진 나는, 오니에게 바깥 산책을 나가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깨어 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제발요 오니, 어쩌면 바깥 풍경을 보다가 예전 기억이 떠오를 수도 있는 거잖아요.”

나는 일부러 ‘예전 기억’ 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오니는 약간 흔들리는 표정이었다.

“하여튼 예나지금이나 똑같다니까, 계속 너한테 이렇게 휘둘리면 안 된다고 다짐하지만, 결국 원하는 대로 해줄 수밖에 없으니 원, 그래 잠깐만 나갔다 오자.”

“정말 고마워요 오니!”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병실 안을 뛰어다녔다.(어지럼증에 금방 멈춰서긴 했지만)아무것도 없는 병실에서만 몇 시간을 있었더니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오니는 그의 외투를 벗더니, 얇은 내 환자복 위에 걸쳐 주었다. 오니의 옷은 카키색에 뻣뻣한 털로 뒤덮여 있었는데, 나는 그 옷이 어떤 불쌍한 괴물을 가죽 채 벗겨내서 만들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외투를 벗은 오니는 딱 달라붙는 검은색 티를 입고 있었는데, 옷 밖으로 튀어나온 갈비뼈들이 기괴했다. 그렇다고 딱히 말라서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새삼 그가 외계인 이라는 것이 실감났다.

“블루!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나는 흐려진 정신을 다시 돌려 오니를 쳐다봤다.

“추우니까 딱 30분만 갔다 오자고, 알겠지?”

나는 그의 눈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외계인에게 걱정을 받다니, 내가 생각해도 정말로 어이가 없었다. 그동안 어떤 사람한테도 받지 못했던 관심과 애정이었다. 나는 괜히 코끝이 찡해지는 기분에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그래요, 그러죠 뭐, 빨리 길이나 안내해줘요.”

오니는 커다란 손을 휘적거리며 앞장서 걸어갔다.

 

“우와! 하늘이 다 오렌지 빛이에요!”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 채 소리를 질렀다. 사실 프레티나의 하늘은 오렌지색이라기에는 조금 붉었고, 딸기색이라기에는 조금 노랬고, 레몬 색이라기에는 조금 어두웠다. 아무튼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오묘한 색이었다.

“정말 예쁘지? 우리 엄마가 날 낳은 날, 하늘을 보면서 내 이름을 지었데.”

“정말 신기해요.”

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 화창한 날이었고, 다홍빛 하늘에는 새빨간 태양이 두 개나 떠 있었다. 심지어 은색 빛의 달도 하나 떠 있어서, 정말이지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나는 이 비현실적인 풍경에 매료되어 한참을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았다.

“오니, 괜찮아요?”

내가 갑작스럽게 그 황홀한 기분에서 벗어난 건, 오니의 슬픈 눈 때문이었다. 오니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오니 부모님은 분명 다 좋은 분들이겠죠?”

내가 갑자기 왜 그런 말을 꺼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하늘이 너무 예뻐서, 그 하늘색을 보며 아이의 이름을 지었을 부모에 대해 궁금했는지도 모르겠다. 오니는 잠시 멈칫하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고아야.”

나는 오니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차가움을 느꼈다. 그동안의 자상함과 대비돼서, 그 차가움은 몇 배로 더 시리게 느껴졌다.

“네 부모님도, 내 부모님도, 다 돌아가셨잖아. 그래서 지구탐사프로그램에서 우리를 받아 준 거고.”

“오니…”

나는 지구에 있는 내 부모님을 떠올렸다. 아빠와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싸움이 잦다가, 작년에는 끝내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었다. 아빠와 헤어진 뒤 엄마는 매일 술과 담배에 찌들어 살았다. 나는 방 안에서 문을 잠근 채 엄마의 술에 젖은 고함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 곤 했다. 그런 부모님은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생각해 왔는데, 나는 오니의 말에 깊게 배인 상처를 들으며, 예전에 했던 생각이 어쩌면 잘못됐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아, 미안, 요즘 피곤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예민해졌나봐.”

오니는 고개를 돌린 채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한참을 말없이 걷기만 했다. 오렌지 빛 하늘과 은빛 나무들은, 시간이 멈춘 듯 한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눈 끝을 스치는 풍경이 마치 벽 위에 그려진 그림 같았다. 그래서 하염없이 걷다보면, 어느 순간 쿵, 하고 머리가 벽에 부딪힐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풍경은 황홀했고,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나는 반쯤 취한 기분으로 오니에게 말을 걸었다.

“지구에 있었을 때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어요.”

나는 그 끔찍했던 생활을 떠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별로 고통스럽지 않았다. 지구에서의 생활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마치 한여름 밤의 꿈처럼, 스쳐지나간 영화 예고편처럼, 기억의 저편에서 점점 무뎌지는 기분이었다.

“부모님은 제가 어릴 때부터 사이가 안 좋으셨고, 저는 부모님의 고함 소리를 잊으려 항상 옥상에 올라가 별을 봤어요, 새까만 하늘의 별들이 마치 수 만개의 눈 같았어요, 자세히 보면, 바람 때문에 별이 움직이거나 깜빡이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마치 그 별들이 나를 바라보면서, 나를 부르는 기분이었어요.”

마치 한 입 가득 부드러운 카스테라를 물고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몽롱한 기분으로 말을 이었다.

“외계인이나 천체물리학에 관심이 많은 아이는 괴롭히기 아주 쉬워요. 내가 생각해도 나는 괴짜였고, 아이들이 나를 이상하게 본 것도 원망하지 않아요. 그저 맞을 때 얼굴이랑 팔다리 부분에 멍이나 들지 않으려 죽을힘을 다해 피했는데, 어느 날부터 얼굴에 멍이 늘어나기 시작했지 뭐에요. 근데 정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더라고요. 순간 너무 허무해졌어요. 나는 도대체 누가 날 걱정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엄마? 학교 선생님? 맞는 것 보다 괴로운 건 무관심이었어요. 마치 매일 구역질을 하고 다시 삼키는 기분이었어요.”

바람에 은회색 잎사귀들이 흔들리며 은방울이 흔들리는 것 같은 맑고 깨끗한 소리가 났다. 나는 잠시 그 소리에 귀 기울였다. 오니는 나보다 조금 앞에서 걷고 있어서, 나는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또 옥상이었어요. 매일 밤 올라가 별을 보곤 했으니 유난 떨 것도 없었지만, 그날따라 기분이 정말 이상했어요. 나는 천천히 난간을 향해 걸어갔어요. 바람이 찼고, 이대로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과, 침대로 달려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고 싶은 마음이 반반이었어요. 사는 게 그만큼 귀찮았나 봐요, 별로 고민하지는 않았어요, 나는 천천히 몸을 허공에…”

“그만!”

오니가 너무 갑자기 뒤를 도는 바람에 하마터면 그와 정면으로 부딪칠 뻔 했다. 그의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지구는 지식과 문명이 발달한 행성이잖아. 그들의 문서에 그렇게 적혀 있었는걸, 학교에서도 그들만의 법률을 정해서 여러 가지 불합리한 것들을 개선한다고 나와 있었는데?”

오니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 있어서, 나는 그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당황스러운 나머지 한 두 걸음 정도 뒷걸음질 친 후 말했다.

“물론 학교폭력위원회니 뭐니 그런 것들이 있긴 하죠, 하지만 그런 제도들이 모두 제대로 돌아가는 건 아니잖아요. 프레티나에서도 그러지 않았나ㅇ…”

나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오니가 갑자기 나를 안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어깨는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오히려 당황스러운 건 나였다.

“아아 블루, 내가 너한테 얼마나 끔찍한 일을 겪게 한 걸까, 애초에 네가 간다고 할 때 말렸어야 하는 데,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죽으려고까지 했어.”

그의 눈물이 끈적끈적하게 옷에 젖었다. 바람에 나뭇잎들은 여전히 맑은 소리로 살랑거리고 있었다. 나는 오니의 등 뒤로 오렌지 빛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는 오니의 등을 천천히 토닥이며 말했다.

“괜찮아요, 오니, 이제 이렇게 프레티나로 돌아왔잖아요.”

그런데 말하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나는 순간 끔찍한 상상을 하며 두려움에 잠긴 목소리로 오니에게 말했다.

“그런데요 오니, 내가 죽으려고 옥상에서 뛰어내렸는데,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거죠?”

“너 같은 경우에는, 특파원이었기 때문에 일정고도에서 정찰 팀이 너를 계속 관찰하고 있다가, 뛰어내리려고 하니까 내려가서 우주선에 태운 것 같아. 어쩌면 인간위장장치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네 기억이 지워졌을 수도 있겠다.”

오니는 마치 혼이 나간 것만 같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그는 내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꽉 주더니, 순간 손을 확 놓고 정신이 나간 것처럼 휘청거리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오니!”

“30분 지났어, 빨리 돌아가자 블루.”

오니는 성큼성큼 걸어와 거칠게 내 손을 잡고 뛰다시피 걷기 시작했다. 나는 질질 끌려가는 기분으로 같이 걸었다. 연주황 빛이던 하늘은 어느새 어두워져 초코 캐러멜 색이 되었다.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안했다.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왠지 현실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다시 그 지옥 같은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엄마의 고함소리가 귀에서 웅웅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오니의 손을 더 꽉 잡았다. 우리는 황급히 병원으로 돌아왔다.

 

“블루 난 네가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상관없어, 나랑 기억을 공유하자 블루.”

침대에 들어가 막 이불을 덮었을 때였다. 오니가 갑자기 너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처럼 깊은 목소리였다.

“기억을 공유한다고요?”

오니는 마치 지구가 자전하냐는 당연한 질문을 들은 것처럼 얼빠진 표정을 짓다가. 이내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니까 기억을 공유하는 건, 지구에서 혼결? 결혼? 아무튼 그 비슷한 관계를 맺는 것 같은 거야. 우리는 촉수를 통해서 서로의 기억을 공유해. 기억을 공유하는 상대는 평생에 한 명 뿐이고, 만약 한 쪽이 원하지 않는 상태에서 기억을 공유하게 되면, 두 프레티나인의 뇌에 엄청난 자극이 가해져 둘 다 그 자리에서 즉사하게 되지, 그러니까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아도 돼.”

나는 순간 깜짝 놀랐다. 결혼이라고? 나 방금 프로포즈 받은 건가?

“하지만 오니, 굳이 기억을 공유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급하게는 요.”

나는 내 말이 완곡한 거절처럼 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프레티나가 좋았고, 오니가 좋았다. 만약에 내가 누군가와 기억을 공유하게 된다면, 여지없이 오니일 것이다. 오니는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처음 오니를 만났을 때도 오니는 그런 표정을 지었었다. 갑자기 그를 향한 연민이 차올랐다. 그는 오랫동안 상처를 받아온 것 같았다.

“블루, 기억을 공유하고 나면, 두 프레티나인은 서로 텔레파시가 가능해져,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그 외계인이 무얼 느끼는지, 어디 있는지, 무슨 생각하는지를 알게 되는 거지, 난 네가 지구에서 그 끔찍한 고통을 혼자 겪게 내버려뒀어. 앞으로는 그러고 싶지 않아. 지구탐사프로그램에서 언제 또 무슨 실험을 강요할지 몰라, 기억을 공유하기 전에 네가 또 사라져버리기라도 한다면 난 내 자신을 절대 용서하지 못할 거야. 제발, 블루.”

오니의 눈에는 간절함과 다급함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실은 숨 막히는 침묵만이 가득했다. (사실 골골대는 가습기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긴 했지만)

“좋아요 오니.”

나는 오니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날이 어두워 자세한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나는 오니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고마워.”

오니가 천천히 다가왔다. 꿈틀거리는 촉수가 더 이상 징그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생각보다 불쾌하지 않았다. 마치 손을 잡는 느낌이었다. 촉수가 서로 엉겨 붙어 하나로 연결 되었다. 오니는 눈을 감았고, 나도 오니를 따라 눈을 감았다. 발밑에 바닥이 사라지고, 공중에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캄캄하던 시야가 걷히고, 희미한 빛이 여러 갈래로 나타나 이리저리 움직였다. 가느다란 직선의 빛은, 곡선으로, 면으로, 공간으로 바뀌었다. 마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블루!”

저 멀리 오니가 보였다. 나는 반가움에 손을 흔들려 했지만, 오니를 향해 걸어온 다른 외계인으로 인해 다시 손을 내려야 했다. 사방이 새하얀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책상 위에는 온갖 실험비커와 서류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오니 옆에는 내가, 아니 블루가 서있었다. 블루는 분명 오니가 거울로 보여주었던 내 모습이었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꼭 다른 존재처럼 느껴졌다. 블루는 두꺼운 서류파일을 들고 있었고, 쌀쌀맞은 표정으로 오니를 째려보았다.

“지금 바빠, 지구에 대한 자료를 아직 더 정리해야 한단 말이야.”

“미안, 하지만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잖아, 점심 먹으러 가자!”

“됐어, 너 먼저 먹으러 가.”

“노래하는 스프 먹으러 갈건대도?”

“아 정말 귀찮게 하네.”

블루는 신경질적으로 파일을 집어던지고 뛰쳐나갔다.

“같이 가!”

오니는 해맑게 웃으며 문이 닫히기 직전 다시 문을 밀고 나갔다. 나는 오니가 지금보다 조금 젊어 보인다는 생각을 얼핏 했다. 오니가 문을 닫자마자 공간은 마치 종이접기 하듯 쭈그러들더니, 공간에서 면으로, 면에서 선으로, 또다시 면으로, 또다시 공간으로 변했다. 어느새 그곳은 전혀 다른 공간으로 바뀌어 있었고, 오니와 블루도 조금 나이를 먹은 것 같았다.

커다랗고 동그란 테이블에 외계인들 열댓 명이 빙 둘러 앉아있었고, 각자 펜과 메모지를 가지고 있었다. 책상 한가운데는 간단한 다과(말린 곤충이나 운석조각들)가 차려져 있었지만,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외계인들의 표정이 모두 심각한 걸로 보아, 무슨 회의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오니의 눈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오니 바로 왼쪽에는 블루가 앉아있었다.

“지구라는 행성은 고지능의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체계화된 법과 질서를 가지고 있으며, 문명과 과학기술이 뛰어납니다. 그들과의 교류는 우리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할 것이며, 어쩌면 범죄와 전쟁으로 얼룩진 우리 행성을 구제해 줄지도 모릅니다.”

오니의 건너편에 앉아있는, 가장 권위가 높아 보이는 외계인이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지구에 잠입하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합니다. 혹여 잘못해서 정체가 탄로 나면 어떡합니까? 찾아보니까 인류는 이미 몇 십 년 전에 외계인의 시체를 해부한 적이 있다면서요?”

“그건 다만 항간에 퍼져 있는 소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니는 손에 피가 나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합니다! 왜 하필 블루가 가야 하는 겁니까! 이건 그냥 외딴 행성에 가서 죽으라는 것 밖에 더합니까?”

“진정해 오니.”

“블루는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우리 중에 제일 강한 프레티나인으로 검증됐습니다. 그녀가 지구에 가기를 원하기도 했고요. 우리는 그녀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오니는 새하얗게 질린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거짓말! 너넨 우리 목숨 파리새끼 한 마리보다 소중하게 여기지도 않잖아! 고아들 길거리에서 빵 한 조각 주고 데려와 놓고선, 뭐? 너네는 이제부터 우리 소유니까 언제든 죽을 각오를 해? 그게 어린애들한테 할 소리야? 당신네들은 미쳤어! 죄다 거짓말이잖아!”

오니의 얼굴은 거의 터질 것 같았다. 오니는 마치 경호원처럼 보이는 외계인 둘이 그의 양팔을 잡고 질질 끌고 갈 때까지 소리 지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화면이 바뀌고, 또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그 장소는 마치 우주선 내부 같았다. 어쩌면 예비 훈련장 비슷한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블루, 꼭 가야해?”

오니는 꼭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블루를 바라보았다. 블루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난 빵 한 조각에 목숨을 판지 오래야, 더 이상 이렇게 사는 아이가 늘게 해선 안 돼, 지구는 우리보다 도덕적이고 이상적인 법률을 가지고 있데, 적어도 문서상으로는 그래, 그들의 과학기술은 우주공학분야에서는 우리보다 약하지만, 네트워크 기술은 우리보다 뛰어난 부분도 부분 부분 있어. 지구는 우리 행성에 큰 발전을 가져올 거야.”

블루는 조금 슬픈 표정으로 덧붙였다.

“적어도 내 동생들은 그런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겠어.”

“너 동생도 있었어?”

오니가 놀랐다는 듯이 물었다.

“엄마 아빠 돌아가시고 흩어진지 오래야. 보육원에서 도망쳐 나올 때 동생들은 차마 같이 데리고 나올 수 없었어.”

블루의 표정은 조금 슬퍼보였다.

“블루, 나랑 기억공유를 하자. 나도 너처럼 부모한테 버림받고, 여기서 별별 멸시와 차별을 받으며 자라왔어, 나보다 널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프레티나인은 없어.”

“오니, 몇 번을 더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나는 딱히 누구랑 기억을 공유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 게다가 그들 말대로,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몰라, 끔찍한 기억은, 어쩌면 우리 스스로만 가지고 있기도 벅찰 거야.”

“하지만 블루”

“그만, 그만해”

블루는 오니를 차갑게 쏘아봤다. 오니는 블루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블루는 오니를 밀어내고 우주선의 문을 닫았다. 오니는 힘없이 뒤돌아서 걸어갔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우주선이 발사되는 굉음이 들려왔다. 땅이 흔들렸고, 풍경 전체가 흔들거렸다. 나는 어지럼증을 느끼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너 누구야!”

나는 눈앞이 온통 흐릿해서 눈을 비볐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었나보다. 나는 쓰러진 상태에서 고개를 들어, 오니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오니.”

오니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는 블루가 아니야, 아무리 기억이 지워졌다고 해도, 무의식의 깊은 어느 부분에는 기억이 남아있어야 하는데, 네게는 전혀 프레티나에 대한 기억이 없어, 게다가 블루가 지구에 간 건 5년 전인데, 네게는 10여 년 전 기억도 아주 세세하게 남아있어, 우리가 주입한 기본 정보 정도가 아니라, 직접 살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정보야. 너 도대체 누구야!”

오니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방을 뛰쳐나갔다.

“오니! 오니!”

나는 마구 소리를 질러댔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날 수 없었다. 머리를 커다란 볼에 넣고 마구 흔드는 기분이 들었다. 내 주변에는 촉수들이 말라비틀어져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아, 이래서 기억공유를 한 프레티나인이랑 밖에 못한다는 거구나, 나는 바스러진 촉수들을 보며, 마치 나 자신 같다고 느껴졌다. 오니에게 한 없이 배신감이 느껴졌다. 뺨에 차가운 바닥의 촉감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나도 모르게 정신을 잃었다.

 

*

흡!

나는 갑자기 숨이 막히는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쑤시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여기가 어디지? 나는 주위를 둘러보려 했지만, 온몸이 묶여 있는 탓에 크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치 처음 프레티나에 와서 수술대에 묶여있던 때 같았다. 지금은 지구일까 프레티나일까? 머리가 너무 아팠다.

“블루,”

나는 너무나도 익숙한 그 목소리에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미안해,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한 것 같아. 낯선 행성에 처음 와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투성이인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넌 날 믿어줬는데, 나는 그저 네가 블루가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 화가 났어.”

오니는 내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너 엄청 괴롭게 살아왔더라, 말로만 들었을 때랑, 실제로 기억을 봤을 때랑은 차원이 달랐어, 오히려 넌 담담하게 말한 편이었지, 지구에서 몇 대 정도가 아니라, 죽기직전까지 맞았던데?”

“익숙해진지 오래에요.”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니는 한참을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 눈에는 깊은 슬픔과 체념이 담겨있었다.

“난 네가 나한테 친절하게 대하는 게 너무 좋았어, 예전에 블루는 눈길 한 번 쉽게 주는 법이 없었는데 말이야. 그래서…널 보내기가 더 싫어지고 있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오니?”

“너는 블루가 아니야, 네가 사는 세상은 프레티나가 아니라 지구이고, 너의 영혼이 지구가 아닌 프레티나를 더 좋아하기 시작했다면, 아마 지구로 돌려보내는데 아마 좀 충격적인 일을 저질러야 할 거야, 웬만하면 돌아가려고 하지 않을 테니 말이야.”

오니는 또 다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꾸만 눈물이 났다.

“아니요 오니, 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제발, 여기에서 계속 있게 해주세요.”

“네가 블루의 몸에 들어온 거라면, 블루는 이미 죽었을 거야. 시체에 들어간 영혼이 며칠이나 살 수 있을 것 같아? 난 네가 행복하길 바라, 지구에 돌아가서도, 가끔 날 생각해 줄 거지?”

오니는 무언가 단단히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그는 커다란 칼을 들어올렸다.

“안 돼 오니! 제발, 제발 그만해!”

하지만 그는 결심을 굳힌 듯 전혀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는 마치 먹잇감을 사냥하는 맹수처럼 몸을 크게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내려왔다. 짧은 찰나였지만,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길게 느껴졌다.

“흐으”

나는 충격과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제대로 된 비명도 내지 못한 채, 허파에 있는 공기를 한꺼번에 내뱉었다. 배에는 온통 뜨뜻한 피가 느껴졌다. 오니의 칼은 정확히 내 배 정중앙에 꽂혔고, 오니의 얼굴에는 내 피가 묻었다.

“나 너무 혼란스러워, 마치 진짜로 블루를 죽인 것 같아, 하지만 넌 지구에 돌아가는 것 일 뿐이니까,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겠지?”

나는 흐려져 가는 의식을 붙잡으려 애쓰며 말했다.

“오니…”

커튼은 내려졌고, 난 의식을 잃었다.

 

삐삐삐삐

나는 또 다시 깨어났다. 머리가 아팠지만,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주변에는 온갖 기계장치가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고, 입 부분에는 산소호흡기가 연결되어 있었다.

“연지야.”

내 눈앞에는 울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나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보았다. 어딘가에 묶여있지 않았고, 피부는 매끈하고 창백했다. 온 몸이 다코야키처럼 노란빛이 도는 갈색도 아니었다. 나는 평범한 인간 이었다. 지구로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엄마…”

나는 엄마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긴 했었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엄마…”

그러나 그 의구심을 완전히 떨쳐버리기도 전에, 나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엄마는 내 손을 잡고 하염없이 울었다.

“엄마가 미안해, 좀 더 신경 썼어야 하는데, 네가 자살하려고 할 정도로 힘들어 하는 줄 몰랐어,”

나는 엄마의 작은 품에 머리를 기댄 채 끅끅대며 울었다.

엄마, 나 돌아와 버렸어요. 이 지옥 같은 현실로, 쳇바퀴 돌 듯 또 다시…

오니가 미친 듯이 보고 싶었다.

 

 

**

“각오는 돼 있겠지?”

오니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를 지금까지 키워준 책임자가 서있었다. 지구 탐사 프로젝트의 책임자.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고 무심했다. 오니는 그의 목을 부러트리고 싶었다.

“당연하죠.”

그 둘의 사이에는 블루의 시체가 피를 흘리며 누워 있었다.

“넌 끝까지 비이성적이구나, 그녀를 살려뒀더라면, 지구에 대한 자료를 훨씬 더 많이 알아낼 수 있었을 텐데.”

오니는 그를 노려보았다. 병실 전체의 공기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웃기지마, 시체에 영혼을 담는 기술이 아무리 발달했더라도 일주일 이상 못가는 걸 누가 모를 줄 알고? 애초에 누군가 기억공유를 통해서 지구의 자료를 얻어냈어야 하는 거고, 그 뒤에 불쌍한 인간의 영혼은 블루의 썩어가는 시체 안에서 서서히 죽어갔겠지. 난 블루도 잃었고, 이제 그 누구와도 기억 공유를 할 수 없어. 당신들이 내 삶을 망가트렸어!”

“멍청한 놈”

책임자는 벌레라도 쳐다보듯 하는 오니의 시선을 똑같이 되받아쳤다. 오니는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블루를 죽이고 그 불쌍한 여자애를 블루의 몸에 집어넣은 거지! 왜냐면 블루가 아니면 난 기억공유를 하지 않을 테고, 그러면 지구의 자료는 구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야! 당신네들이 그럴 줄 알았어! 블루를 지구를 보내는 척 하면서, 실은 죽여 버린 거야! 당신네들도 지구에 누군가를 파견하기에는 겁이 났나보지? 혹여 지구에 우리의 존재가 탄로 날 까봐 말이야!”

“그녀는 블루가 맞아. 그저 우리가 프레티나에서의 기억을 잠시 떠오르지 못하게 한 것뿐이지.”

“헛소리 집어치워!”

“그녀의 뇌는 한꺼번에 그렇게 많은 정보를 저장하지 못해, 견뎌내지 못할 거라고!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기억을 마비시키고, 약효가 풀리면서 천천히 떠오르게 하려고 했어!”

“하..하지만 그녀의 10년 전 지구에서의 기억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자세했다고, 그녀를 지구에 파견 한 건 5년 전인데 말이야.”

오니의 목소리는 마구 흔들렸다.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한심한 놈, 우리가 입력한 기본정보를 토대로 그녀의 뇌가 세부사항을 만들어 나간 거지. 그게 진짜 삶이었는지는 너도 모르는 거잖아. 10년 전의 기억들은 그녀의 삶이 아니라, 그녀의 뇌가 만들어낸 가짜 기억일 뿐이야!”

“아니야…말도 안 돼.”

오니는 무릎을 꿇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얼굴에 묻은 피와 땀이 눈물과 범벅돼 흘러내렸다.

책임자는 차갑게 말했다.

“너는 블루의 기억 중 지구에 관련된 내용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록 하는 걸로 블루에 대한 죄 값을 치러야 할 거야, 그게 블루의 마지막 소원이었을 테니까. 그 뒤에는 물론 평생을 감옥에서 썩겠지.”

말을 마친 그는 화를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거칠게 문을 열고 나갔다. 오니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한참을 울었다.

 

 

 

***

“꼭 목숨을 걸 필요는 없어 블루.”

블루는 책임자의 목소리에 싱긋 웃었다. 그는 블루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블루의 지식과 재능을 아쉬워하는 것이다. 블루는 자꾸 헛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럼 다른 방법이 있어요?”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 그럼 계획을 한 번 더 정리하죠. 지구에 자살한 사람 중 죽기 직전의 한 영혼을 빼 와서 내 몸 속에 넣는 거 에요. 그럼 그 ‘인간’은 오니와 기억공유를 할 테고, 오니는 그 기억 공유로 얻은 지구에 관한 정보를 기록하는 거 에요. 그러려면 내가 죽어야겠죠? 역겨운 당신네 윗분들은, 지구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어 하긴 하지만, 자신의 목숨이나, 인생의 한 번 뿐인 기억공유를 희생하기는 싫어하니까, 하는 수 없이 나와 오니가 희생해야 하는 거죠.”

“잠깐, 어떻게 그 ‘인간’이 오니와 기억공유를 할 거라고 확신하는 거지? 그 인간이 꼭 오니와 사랑에 빠질 거라는 보장은 없는 거잖아.”

“왜냐면 오니는 누구보다 좋은 프레티나인이니까요.”

블루는 살짝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이런 생활을 하지만 않았다면, 난 진작에 오니랑 기억공유를 했을 거 에요. 어쩌면 우리는 좋은 부부가 됐을지도 모르죠. 자살 직전의 괴로움에 빠져 있던 사람은, 아마 오니의 친절함 앞에 오래 버티지 못할 거 에요. 아무도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나도 무너졌는데.”

블루는 울컥하는 감정을 애써 눌렀다. 사실 오니가 기억공유를 하자고 할 때마다 블루는 흔들렸다. 가족을 잃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오니는 밝고 쾌활했다. 블루는 어쩌면, 어쩌면 그와 함께하면 행복할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때 마다, 그녀의 동생들이 떠오르곤 했다. 보육원에서 음식을 조금 더 달라고 했다가 기절 직전까지 맞은 블루는, 도망치기 전 한참이고 그녀의 동생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혹여 잊어버릴까, 얼굴에 구멍이라도 뚫을 기세로 닳고 또 닳도록 보았다. 둘 째 동생의 속눈썹 수까지 아직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녀는 행복 할 수 없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지구에 대해 더 열심히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도 이 믿음이 온전히 옳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런 일에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믿은 이상, 옳아야만 했다. 지구에 인간들이 이상적이고 도덕적인 사회체계를 형성하고 있어서, 타락해 가는 그녀의 행성을 구제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그녀의 동생들을 거지같은 생활에서 벗어나게 해줘야만 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총구를 머리에 겨눴다.

“아 맞다, 오니한테는 내가 자원해서 죽었다고 말하지 마요. 알겠죠?”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블루는 정말이지 뼛속까지 혐오감이 치밀어 올랐다. 책임자는 자신에게 이익이 오지 않으면 단 한 치의 관용도 베풀지 않았다. 전형적인,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프레티나인 이었다.

“만약 내가 자원해서 죽었다고 하면, 그는 그가 기억공유를 ‘인간’이랑 하게 해서 지구의 자료를 빼내게 한 사람이 저라는 걸 알게 될 거고, 이용당했다는 배신감에 평생 저를 저주하며 살 거예요, 아니, 최악의 경우 그 자리에서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죽어버릴 수도 있겠죠. 그렇게 되면 지구에 대한 자료는 전부 물거품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길 바라시는 건 아니죠?”

책임자는 굳은 표정으로 한참을 서 있었다. 마치 영원할 것만 같은 침묵이 깨지고, 그가 대답했다.

“알았네, 비밀은 지켜 줄 테니 빨리 일을 실행해, 내가 옆에 있으면 불편할 테니 나가있어 주겠네.”

그는 나갔고, 금속성 문은 기괴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하아,

블루는 벌써 영혼이 반쯤 사라져 버린 기분으로 한숨을 쉬었다.

“평생 동안 거짓말을 하며 살아왔는데, 죽기 전에 진실을 말해버리면, 나는 오니한테 거짓된 외계인으로 남을 테고, 만약 끝까지 거짓말을 한다면, 진실로 남게 되겠지?”

블루는 오니의 고백을, 고백할 때 마다 지었던 어색한 거절의 표정들을 떠올렸다. 사실 누구보다도 기억공유를 하고, 아픈 기억을 보여주고 싶은 그녀였는데 말이다. 하지만 오니는 그 진실을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블루는 떨리는 손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 소리는 로켓 발사음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로켓은 이대로 지구에 도착하고, 인간의 영혼을 내 몸에 담게 되겠지? 블루는 고통에 몸부림 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흉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제작된 총알은 아주 작지만 예리했다. 그것은 아마 블루의 두개골 한 가운데에 박혀 블루가 블루였을 때의 기억을 지워내고, 블루를 죽일 것이다. 그녀는 서서히 무뎌지는 기억 속에서 마지막으로 그녀의 동생들을 떠올렸다.

 

 

 

<에필로그>

“오늘 기분은 어떠니?”

연지는 하얀 색 가운을 입은 정신과 상담의사를 무신경하게 바라보았다.

“많이 괜찮아졌어요.”

그녀는 빨리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렸다. 치료가 끝나고 친구들을 만나러 가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자살시도 이후 연지의 엄마는 학교를 찾아가 조용히 전학절차를 밟았다. 돈도, 권력도 없는 그녀가 연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였다. 다행히도 연지는 전학 간 학교에서 잘 적응했고, 괜찮은 친구들도 여럿 사귀었다. 그녀의 엄마는 꼬박꼬박 심리 상담실에 연지를 집어넣었지만, 연지는 그런 엄마의 조바심이 영 성가셨다. 언제부터 그렇게 신경 써 줬다고.

“아직도 외계인에 관련된 생각이 나니?”

움찔, 연지는 잠시 흔들렸다. 희미하게 오니와, 프레티나에 관련된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잠깐 뿐, 연지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어렸을 때 했던 철없는 상상일 뿐인걸요,”

창 밖에는 오렌지 빛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사실은 현상이지만 진실은 믿음이다. 따라서 진실은, 당신이 사실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블루의 묘비 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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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가 너무 긴건 아닌가 걱정되네요…눈치보다 올려 봅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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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통을 잃어버린 날(or연필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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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가 되려면 아직 30분이 남았다. 나는 벗어 던진 교복 위에 신경질적으로 누웠다. 얇은 면티를 입은 등 뒤로 옷가지들이 울퉁불퉁하게 느껴졌다. 나는 빗질하지 않은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짜증이 폐와 심장에 가득 찬 기분이어서, 숨 쉴 때마다 그 짜증이 뜨거운 입김과 함께 새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학원 차는 6시에 오고, 학원 수업은 7시에 시작한다. 나는 아직 숙제를 다 하지 못했다. 이번 달에 새로 등록한 수학 학원이었고, 4번째로 등록한 학원이었다. 혼자서 열심히 해 보겠다고 싹싹 비는 것은 조금도 반영되지 않았다. 나의 거처는 오직 내 전교 석차의 자릿수가 세 자리이냐 두 자리이냐에 따라 달라졌다. 째깍째깍, 초침이 지나간 자리에, 갓 죽은 시간이 비적 거렸다. 나는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의해 조종당하는 것처럼 기계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5시 35분, 학원 차가 오기까지는 아직 25분이 남아있었고, 차에 타서 내내 숙제를 계속한다면 아마 수업 시작인 7시 이전에는 충분히 숙제를 마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맥없이 벌어진 가방의 입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휘적거리며 숙제를 찾았다. 저 깊숙이 책들 사이에 눌려 꾸깃꾸깃해진 프린트가 밭은 숨을 겨우 내쉬고 있었다. 나는 프린트가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그것을 꺼냈다. 필통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방 안을 돌아다녔다. 바닥에 널브러진 교복이 자꾸 발에 치였다. 나는 책상이며 서랍이며 선반이며 구석구석 필통이 있을 만한 부분을 쑤시고 다녔지만, 그 어디에서도 필통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시계는 어느새 40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초침이 한참 째깍거리며 치켜 올라가는 것이, 마치 시계가 입꼬리를 올리며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온몸에 열이 올랐다. 화가 마지막 머리카락 끝까지 차올랐을 때, 시간은 어느새 45분이었다. 나는 그제야 필통이 사라진 것 이외에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집 안에 펜이 모두 사라진 것이었다.

사실 필통이야 학교나 학원에 두고 왔을 수도 있어서, 없다고 해도 별로 이상할 것은 없었다. 자기 물건도 잘 못 챙기느냐고 타박을 들어 온 지는 이미 오래다. 그런데 단순히 필통뿐 만이 아니라, 집안 전체의 모든 필기구가 싹 다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책상 위에 잡다한 펜과 지우개 조각들을 모아두는 연필꽂이가 모두 사라져 있었다. 나는 초조한 마음에 거실이며 서재이며 이곳저곳을 마구 다니며 필기구를 찾으려 했지만, 그 흔한 HB연필 한 자루 찾을 수 없었다. 느긋하던 마음은 점차 녹아내렸다. 땀이 온몸에 차올랐다. 심장박동 소리가 귀에 들려오기 시작하고, 위 안에서 뜨거운 액체가 거꾸로 치솟는 느낌이었다. 5시 50분, 학원 차가 오기까지는 10분밖에 남지 않았다.

 

애미애비 능욕하는 년

순간, 나는 온몸에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아 어깨를 움츠리며 뒤를 돌았다. 당연히 집 안에는 나 혼자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 낮고 쉭쉭거리는 목소리는 아마 환청일 것이다. 아니, 나는 확실히 그것이 환청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몇 년 전에, 그러니까 내가 12살 때 이미 들었던 목소리이었으니까 말이다.

 

침착해

심장 소리와 시계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머리를 날카롭게 찔렀다. 5시 55분, 나는 식은땀에 푹 젖은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손바닥이 거친 청바지에 쓸려 시뻘겋게 부어올랐지만, 별로 아프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서 머리채를 잡아 뜯었다. 어떡하지? 당황스러운 마음에 눈물도 나지 않았다.

 

병신 같은 년

낮고 기분 나쁜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나는 갑자기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에 빠졌다. 5시 56분, 목소리가 자꾸 들려왔다. 개 같은 성적으로 무슨 작가 한다고 설쳐 대, 지방대 갈 거면 대학 가지 마 이 새끼야! 조그맣던 목소리가 점차 커져서 고막이 찢어질 것 같았다. 나는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띵!

5시 57분, 기타가 갑자기 허공으로 날아와 내 발등을 찍었다. 그제야 나는 이것이 끔찍한 연극의 재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공연은 기립박수는커녕, 단 한 번의 환호성도 받지 못했지만, 정말이지 성실하게 앙코르 공연을 해 왔다. 나는 어느새 12살짜리 꼬마가 돼 있었다. 나는 기타를 던진 사람에게 멱살을 잡힌다. 고함이 윙윙거리며 귓가를 맴돌지만, 정작 무슨 소리인지는 잘 들리지 않는다. 눈물 때문에 눈앞이 온통 뿌예져 그 사람의 표정을 알 수 없다. 나는 마치 구겨진 프린트처럼 맥없이 흔들리며 밭은 숨을 내쉰다. 5시 58분, 나는 머리채를 잡힌 채로 이리저리 끌려다닌다.

 

한심한 년, 뭐라도 하란 말이야!

나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눈앞에는 새하얀 프린트가 놓여 있었다. 숙제를, 숙제를 해야 한다. 나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필기구 없이 숙제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5시 59분,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마치 멈춰버릴 것 같았다.

 

그 순간, 내 눈에 은회색 연필깎이가 보였다. 칠흑 같은 연필 구멍이 마치 눈동자 같았다. 뭐라도 하라고 쓰레기 같은 년아! 연필깎이가 나를 향해 고함을 질러댔다. 알겠어요. 알겠다고요. 나는 12살짜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반항을 해보았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한심했지만, 몇 년이 흐른 지금도 자꾸 도돌이표처럼 어려지는 건 정말이지 막을 길이 없었다. 학원 숙제를 하지 않는다면 학원은 집으로 문자를 보낼 테고, 그다음에 내가 받을 폭언과 폭행은 안 봐도 뻔했다. 나는 한참 연필 구멍을 노려보았다. 연필깎이는 쉴 새 없이 나에게 고함을 질러댔다. 자그만 연필깎이에서 어떻게 그런 어른의 목소리가 나올 수 있는지 궁금했다. 연필깎이에 넣을 만한 가느다랗고 기다란 게 필요해, 뭐라도 깎아서 숙제를…

 

주체 없이 흐르던 눈물을 닦던 나는 순간 울음을 멈췄다. 터질 듯이 쿵쾅대던 심장이 차갑게 식어 멈춰 버린 것 같았다. 시계가 째깍 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허옇고 삐쩍 말라비틀어진 내 검지를 바라보았다. 검지 뒤에 흐릿한 형체로 연필깎이의 구멍이 얼핏 보였다. 나는 천천히, 손가락을 그 구멍에 집어넣었다. 내가 미쳤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숙제를 해서 고함을 듣지 않아야겠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손가락 끝에 차가운 금속재질의 날카로운 칼날이 느껴졌다.

 

6시

나는 뭔가에 홀린 듯 연필깎이의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손톱과 살들이 짓뭉개져 마구 갈렸다. 피는 어느새 책상 위에 흥건하다 못해 바닥까지 흘러내려 발가락에 끈적끈적하고 뜨뜻하게 엉겨 붙었다. 나는 비명을 질러댔지만, 고막이 터졌는지 비명은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내 귀에는 오직 연필깎이에 고함만 들렸다.

쓰레기 같은 년.

내가 숙제를 못 하면, 또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른다. 어쩌면 수많은 날 중 어느 평범한 날에 그랬던 것처럼, 허리띠로 온몸을 때릴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온몸에 공포가 타고 올라와 나는 이미 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손잡이를 잡은 손에 땀이 차오르고 덜덜 떨렸지만, 마치 회전궤도에 들어선 톱니바퀴처럼 회전을 멈출 수 없었다. 검지에 모든 신경이 죽기라도 했는지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손잡이가 헛돌기 시작하자, 나는 천천히 검지를 구멍에서 빼냈다. 검지는 피에 젖은 채 새파랗게 죽어있었고, 제멋대로 덜덜 떨렸다. 나는 책상에 맺힌 피가 굳기 전에 얼른 검지에 찍어 프린트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다급한 나머지 손가락이 제대로 뾰족하게 깎였는지 어쨌는지 확인할 여유조차 없었다. 나는 그저, 이제 숙제를 할 수 있다는 것과 고함이 멈췄다는 것이 너무 행복했다. 오늘은 고함을 듣지 않을지도 몰라, 숙제를 다 할 수 있을 테니까. 피에 젖은 글씨들이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우읍

나는 헛구역질을 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온몸에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는 뜨거워진 몸을 휘청거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얼굴에는 눈물 자국과 눈곱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나는 뜨거워진 몸에도 불구하고 정체 모를 한기를 느끼며 시계를 쳐다보았다.

 

8시 20분

나는 내 눈을 뽑아버리고 싶었다. 아니야, 분명 잘못 봤을 거야. 나는 아직 잠에 취해 헛것을 본 것이길 바라며 몇 번이고 시계를 확인했다. 8시 20분, 초침이 째깍거릴 때마다 시곗바늘이 명치를 찌르는 것 같았다. 학원수업이 끝나는 시간은 9시, 내 집에서 학원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분이었다. 혹시 시계가 고장 난 것은 아닐까 핸드폰 시계를 확인해 봤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나는 핸드폰에 난잡하게 흩어진 부재중 전화나 카톡 알림을 맥없이 바라보았다. 학원버스 기사의 전화부터 학원 선생님, 친구 여러 명의 연락 중 나는 한 친구의 문자를 확인했다.

-야, 너 어디임? 학원쌤 빡쳐서 너네 집에 전화함.

뚜둑

그동안 버텨왔던 이성의 끈이 끊어져 버렸다. 퇴근 시간은 멀지 않았다. 꿈에서와 달리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차갑게 가라앉은 마음으로 천천히 일어났다. 베란다에서 내 방도 그리 멀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그러나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방문까지의 거리가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차가운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연 순간, 나는 갑자기 익숙한 느낌에 소름이 돋아 재빨리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손가락이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나는 이 손잡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는….

나는 천천히 뒤돌아섰다. 책상 위에는 은회색 연필깎이가 놓여있었다. 필통이나 다른 필기구도 놓여있었나? 하지만 그런 건 나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성큼성큼 연필깎이를 향해 다가갔다. 차가운 플라스틱이 손에 닿았다. 나는 연필깎이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주위는 아주 고요했다. 나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스읍, 숨을 한껏 들이마신 뒤, 나는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듯 연필깎이를 내던졌다.

연필깎이는 산산조각이 났다. 바닥에 연필찌꺼기가 쏟아져 사방으로 날렸다. 나는 분을 못 이겨 마구 발길질을 해댔다.

쓰레기 같은 년!

쓰레기 같은 년!

연필깎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소리 묻히길 바라며 더 큰 고함을 질러댔다. 칼날에 발이 찍혔는지 발바닥에 피가 맺혔다. 나는 머리를 마구 쥐어뜯었다.

“닥쳐! 닥치라고!”

나는 처음으로 연필깎이에게 반항을 했다. 알 수 없는 희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연필깎이의 잔해가 눈에 선명하게 박혔다. 더 이상, 더 이상은 참지 않을 것이다.

 

삐삐삐삐

그러나 희열도 잠시, 나는 현관문을 여는 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눈앞에는 산산조각이 난 연필깎이가 비참하게 놓여 있었다.

“너 이리 나와 이 새끼야!”

“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커다란 은회색 연필깎이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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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올릴까 말까 많이 고민했지만 시랑 소설 둘다 써놓고 시만 올리는 것은 뭔가 거짓말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결국 올려버렸네요.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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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팔이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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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눈물팔이 소녀가 살았다
소녀는 길거리에서 눈물을 팔며
사람들에게 외쳤다

여기보세요
젊은 아비의 아이가 죽었어요
그것도 세살짜리 외동딸인데
불쌍하지 않나요?

이건어때요?
빛더미에 파묻힌 한 청년
홀어머니를 모시고
힙겹게 사는데
이런
사고를 당해 불구가 되었군요

슬프지 않나요?
눈물이 나나요?
당신이 흘린 눈물의 양 만큼
값을 지불해줘요

그러자 사람들이 말했다
널리고 널린 눈물장사
이젠 슬프지도 않아요
싸구려 감성으로
누구를 울리려 하나요?

더 잔인하고
더 자극적이고
더 불쌍하고

더 많이 맞고
더 많이 괴롭힘당하고
더 많이 외면당하는
그런 이야기를 원해요
그런 이야기를 해줘요

당황한 소녀는 더 악독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냈다
흉악하고, 간사한세상에게 무차비하게 당하는 주인공을 보며
사람들이 다시 말했다

그래요
이게 우리가 원했던 이야기
하지만 어쩌죠?
아직도 부족해요

더 더 더
심한 이야기
괴로운 이야기

착한 동정심을 느끼며
한없이 눈물을 흘릴수 있는
그런 이야기 말이에요

소녀가 말했다
당신들이 흘리는 눈물은
눈물이 아니에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나는 한낱 장사꾼 일 뿐
당신들의 마음을 빼앗을 미친 이야기들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죠

차가운 겨울날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달콤한 소녀의 목소리는 오늘도 살랑인다

눈물팔아요 눈물팔아요
세상에서 제일 슬픈
눈물 팔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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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on mars-직감과 증거, 선과 악,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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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에서의 삶, 이라는 제목을 보고 당신이 이 드라마에 대해서 무슨 상상을 할지 모르겠다. 공상과학이나, 판타지 드라마를 상상했다면 그것은 크나큰 오해이다. 사실 이 드라마는 화성은 커녕, 외계인 한 명 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판타지와는 거리가 먼, 1970년 대의 영국의 작은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상상하기 힘든, 옛시절의 폭력과 차별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당신은 그 시절에 대해 화성보다 더 멀다고 느끼게 될 지도 모른다.

간단히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샘 타일러 라는 경찰이 자동차 사고를 당해서 기절을 했다가 깨어났더니, 난데없이 2000년대에서 1970년대로 가게 되었다는, 어쩌면 터무니 없는 이야기 이다. 주인공은 미친 걸까? 사고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진 걸까? 아니면 진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것일까. 주인공은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몰라 혼란스러워 하고, 마치 다른 행성에 온 것 같다는 독백을 한다.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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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사고에서 깨어나 보니, 어느새 복장도, 차량도, 주위의 풍경도 모두 2000년대에서 1970년 대로 바뀌어 있다.)

정신을 차린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 샘 타일러는 자동차 사고를 확인하러 온 다른 경찰에게서 자신이 2000년대 사람이 아닌 '하이드'라는 곳에서 자원해서 이 지역으로 오게 된 형사라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억울하고 분하지만 어찌어찌 새 경찰서에서 근무하게 된 샘은,  끊임없이 2000년대를 그리워하며 돌아가고 싶어 한다. 원리 원칙을 철저히 지키며, 아무리 심증이 확실한 범인이라도 증거 없이는 체포를 하지 않는 그와 달리, 1970년대의 경찰들은 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증거 없이 의심가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잡아 넣으며, 뺨을 때려가면서까지 자백을 받아내는, 무질서하고 폭력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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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백을 하지 않는 용의자의 뺨을 때리는 샘의 상사  진 헌트)

이 뿐만이 아니다. 흑인과 여성, 이주민들과 아시아인들에 대한 차별과 멸시를 하는 모습을, 이 드라마는 조금의 미화도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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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야만적이고 거친 사람들 때문에 매일 절망과 우울에 빠져 사는 샘에게, 어느 날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멀쩡하게 돌아가던 티비에서,  아무도 받지 않는 전화에서, 혹은 지직거리는 라디오나 경찰 무전기에서, 2000년대의, 그러니까 샘이 원래 존재하던 현실세계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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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게 나오던 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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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치지직거리며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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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통해 샘과 우리는, 간접적으로 샘이 2000년대 사람이고, 현재에는 혼수상태에 빠져 1970년대로 보이는 가상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현실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깨어나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인공 샘 타일러는, 하는 수 없이 계속 1970년 대에 머물며,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경찰서를 바로잡고자 끊임없이(정말 안쓰러울 정도로)노력한다. "중요한 것은 디테일한 부분에 있어!" "서류 파일을 정리해서 목록을 만들고 목격자를 찾아 진술을 확보해!" "그만해요 보스!"를 외치며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그는, 처음에는 비웃음을 사지만 점차 동료들의 신임을 얻으며 경찰서를 변화시킨다.  그러나 그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는 않았다.  뛰는 샘 타일러 위에 나는 진 헌트라고 했던가, 그에게는 엄청난 고집과 자신만의 독특한 수사 신념을 가진, 그의 상사인 진 헌트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둘은 매 회마다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싸워대며, 심지어 주먹다짐까지 서슴치 않는다. 보통 진 헌트는 증거가 부족하더라도 빨리 범인을 잡아서 희생자를 줄여야 한다는 측이고, 샘 타일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증거와 법을 따라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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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처음에는 완전히 샘 타일러의 의견에 찬성하는 쪽이었다.(아마 이 드라마를 보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지 않았을까?)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는 경찰서에서, 나는 샘 타일러와 같은 염증과 혐오를 느꼈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아주 섬세하고도 자연스럽게, 1970년대 사람들의 인간적이고 순박한 면모를 서서히 보여주기 시작했다.  거짓 자백으로라도 범인을 잡아 넣는 이유는, 그 만큼 그 시대가 법과 질서가 지켜지지 않는 혼란한 시기였기 때문에 희생자를 줄이기 위한 진 헌트의 최선의 선택이었고, 악당을 잡기 위해 더 악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순응한 결과였다. 물론 법은 중요하고, 원리 원칙 또한 중요하다. 허나 그 까다롭고 다양한 '원칙'을 지키느라 그 원칙이 존재한 본래의 이유, 그러니까 범인을 잡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역할이 희미해져 버리는 것이다. "이건 불법 이잖아요!"라고 절규하는 샘에게, 진 헌트는 이렇게 말한다,"나에게 법이란 범인을 감옥에 집어넣고, 내 거리에서 더이상 희생자가 나오지 않게 하는 거야 이 멍청아!" 실제로 증거가 없어 풀어준 범인으로 인해 총을 맞은 여자가 혼수상태에 빠지자,  분노한 진 헌트는 샘의 멱살을 잡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도로에 묻은 그녀의 피를 다 닦아! 왜냐하면 내가 직접 그녀의 아버지의 눈을 보고, 네가 그녀의 피를 닦았다고 이야기하고 싶거든!  그놈들은 오늘 보물상을 털었어야 했었어! 난 그걸 알고 있었다고! 그런데 네놈이 잘난척 하느라고 풀어줬잖아!"

"우리는 증거가 없었잖아요!"

당연한 말을 외치는 샘이지만,  어쩐지 그의 목소리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 드라마는 그렇게 끊임없이, 그리고 집요하게 선과 악의 경계선에서 우리에게 질문한다.  감옥에서 나오면 또 다시 살인을 저지를 살인자의 감형을 위한 정신이상 진단서를 없애야 할까? 살인 사건에 말려들었고 알리바이도 없고 의미심장한 증거도 있지만, 그동안 믿어왔던 그의 동료를 고발해야 할까? 확신을 가지고 자신만만하던 샘 타일러는,  점점 1970년 대의 암흑을 이해하게 되고, 심지어 2000년대의 삶보다 더 좋아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뇌 수술로 종양을 제거하게 되고,  담당 의사와 같은 이름과 목소리의 새로운 형사가 '하이드'에서 발령이 와서, operation(수술, 또는 작전의 중의적인 의미)을 마무리 하려면, 그의 상사인 진 헌트의 불법적인 수사를 고발하고,  그(cancer: 악과 종양, 역시 중의적인 의미), 진 헌트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고 말하게 된다.

"아프죠? 그건 이게 바로 현실이기 때문이에요!"

울먹이며 그에게 매달리는 동료들을 저버리고, 과연 샘 타일러는 현실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현실과 비현실, 선과 악의 경계의 정확한 기준이 있긴 한걸까?

생각없이 보기 시작한 이 드라마는 나에게 많은 질문과 고민을 안겨주었다. 특히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포스터를 보며 세 사람 모두 자기 자신이라고 한 진 헌트라는 샘의 상사는, 내가 지금 껏 생각해온 정의로운 리더에 대한 생각을 뿌리 채 뽑아 버렸다. 또한, 섬세한 내면연기를 통해 혼란스러운 심리상태를 고스란히 전달해 준 샘 타일러 역 배우의 연기 또한 일품이었다. 이 드라마는 영국 드라마 특유의 우울함과 영상미가 아주 잘 드러난 드라마이며,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하였기 때문에, 복고적인 의상이나 음악이 우리나라 응답하라 시리즈처럼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허나 제일 훌륭한 점은, 앞서도 여러번 설명했다 시피 1970년대의 낭만과 야만을 정말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가감없이 묘사했다는 점과, 선과 악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을 깨 주었다는 점이다. 사실 이 드라마의 정점은 결말에 있지만 더 이상의 스포일러를 막기 위해 말을 줄이겠다. 하지만 정말 충격적이고 신선한 결말이었다는 점만은 꼭 이야기 하고 싶다.

물론 모든 드라마가 그러하듯 이 드라마에도 약점과 아쉬운 점이 있다. 이 드라마가 2006년, 그러니까 거의 10년 전에 나온 드라마이기 때문에, 시체에 대한 표현이 조잡하고 유치하다. 마치 피가 아닌 빨간 페인트를 몸에다 칠해 놓은 듯한 느낌이다. 또한 점점 자극적인 내용을 쫓는 요즘 드라마에 비하면, 이 드라마는 전개가 더디기 때문에 다소 소소하고 지루한 감이 있다. 마지막으로,  1973년도에 샘 타일러는 4살이었는데, 그에 비해서 그가 만들어낸 1973년은 4살짜리의 기억 치고는 지나치게 사실적이고 현실적이다.  물론 이 단점들은 내게 다른 장점을 가릴 정도의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마지막으로 샘 타일러가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로 평을 마무리 하고 싶다. 어쩌면 이 짧은 한마디가, 드라마 전체의 주제를 잘 나타내지 않았나 싶다.

"내가 살아 있다면, 그것은 느낄 수 있기 때문이고, 그리고 살아있는게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매일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살아있다고, 느낄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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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난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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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새빨간 토마토를 먹던 날

몽글몽글하고 따끈한 토마토를

아이는 화장실에서 홀로 토하며 울컥, 온몸으로 울었다.

여인이라는 주홍글씨를 가슴에 오롯이 새긴 채

아이는 축하받지 못한 유년기를 졸업했다.

 

문득 여인의 삶이란

가끔 창문을 보며 가련하게 눈물을 흘리는 거라고

아이는 연필 끝을 꾹꾹 눌러 마음에 썼다.

여인의 삶이란, 문득 그러한 것이라고

 

아이의 침대는 늘 행복하지 못했다.

낡은 1인용 소파를 요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아이가 자기 전 볼에 닿는 입맞춤에 갈급한 것도

아주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갓난여인은 늘 자기 전 입맞춤을 받았다.

헐벗은 갓난사내와 새벽의 끝자락을 서툴게 구기면서도

그녀의 촉각은 입맞춤의 순간에만 곤두섰다.

비록 격정의 몸부림이 가련한 눈물에 비할 바야 있냐마는

청초한 마음만큼은, 자고로 그러한 것이라고

여인은 생각했다.

 

사랑받지 못한 여인의 사랑은 서툴다

부모의 차가운 피는 그녀의 자궁에서 뜨겁게 자라 토마토가 되었다.

여인은 토마토를 먹지 않는 날에 사내와 어린 사랑을 했다.

겸손한 농부처럼 묵묵히, 그러나 꾸준히

 

여인의 밭이 가물기 시작했다.

그녀의 배는 메말라가는 토마토 농사에도 불구하고

도축용 돼지처럼 점점 불러오기 시작했다.

어쩌면 열 달 뒤, 정말로 도축될지도 몰라

여인은 두근거리는 배를 감싸 안은 채 1인용 소파에서 몸을 웅크렸다.

 

일 년치 토마토를 한꺼번에 수확하던 날

팔딱거리는 피투성이 토마토를

여인은 화장실에서 홀로 안아들며 울컥, 온몸으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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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째 눈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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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돌아온 뒤로 7번째 눈사람을 만들었다.

나는 눈이 오는 것이 언제나 즐겁고 좋다. 멍청하고 철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아직 그렇다. 딱히 동심이라거나, 감수성이 풍부해서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그저 어렸을 때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집착 정도랄까? 거의 5년 동안 눈을 못 보고 살았으니 그럴 만도 하지 싶다. 친구들은 언제나 눈에 대해 부정적이곤 한다. 특히 버스를 타고 오는 친구들은, 그저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 정도의 취급을 한다. 사실 얼어붙은 빙판길을 40분 내내 친구와 펭귄처럼 뒤뚱거리면서 걷는 것은 절대 평탄치 않았지만, 그런데도 휘청 휘청 거리는 서로의 모습이 우스워 한참을 낄낄거리며, 지나가는 친구마다 구걸해 1,000원짜리 호떡을 사 먹는 것은, 꽤 유쾌한 경험이었다. 돌아오지 않았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 다시 눈을 보지 못했을지도 몰라, 사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나는 눈이 오는 것이 어색하고 꿈같아 연신 눈을 비벼대곤 한다. 사방이 온통 새하얗다는 건, 참 비현실적인 것 같다. 눈이 부셔서 잠시 눈을 꾹 감았다가 뜨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사라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며칠 전에 엄마와 함께 입시학원에 상담차 찾아갔었다. 히터가 너무 세게 틀어져 있어서인지, 마치 은행에서처럼 번호표를 뽑고 대기를 하는 학원의 어마어마한 포스 때문이었는지, 나는 얼이 나간 채 한참을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안경을 쓴 차분한 말투의 한 여자분이 종이에 열심히 메모하며 내가 갈 수 있는 대학과 그렇지 않은 대학에 대해 저울질하기 시작했고. 검은색 잉크 펜은 마치 춤이라도 추듯 종이 위를 날아다녔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날렵하고 거침이 없던지, 대학 이야기에 얼이 나가 있지만 않았다면 펜 종류를 물어보는 멍청한 질문이나 할 뻔했다. 엄마는 특유의 커다란 눈으로 펜 끝을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이따금 나는 알아차리지 못한 점들에 대해 질문을 하곤 했다. 한참을 설명을 듣다가 내가 뱉은 말은 겨우 안녕히 계세요. 였고, 집에 오는 길에 엄마는 피곤하다는 나를 옷가게에 끌고 가서 잠바를 하나 사 주었다. 춥게 다니지 말라며, 나는 학원과 옷가게에서 엄마나 나한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게 참 무서웠다.

 

눈이 녹아 회색빛으로 바뀐 질척한, 아마 흙먼지 맛 슬러시가 있다면 딱 그 모습일 것 같은, 눈은 아닌데 눈이 아닌 것도 아닌 질퍽한 얼음덩어리를 밟으며 등교를 할 때면, 아이보리색 신발은 금세 젖어서 회색빛으로 변하며 무거워진다. 발에 감각이 없어질 때쯤 학교에 도착하지만, 갈아 신은 실내화 역시 밤새 사물함에 있었기 때문에 차갑긴 매한가지다. 무감각한 발로 4층까지 올라가면서 만큼은 친구도 나도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밭은 숨소리와 가끔 가방을 고쳐 매는 소리만 들려올 뿐

 

나도 안다.

외국어 특기자로 갈만한 대학은 점점 줄어들고, 경쟁은 점점 더 치열해지며, 해봤자 외고 애들이나, 고등학교 때 유학 경험이 있는 애들이 가겠지, 어중간한 시기에 돌아온 나는, 어중간하게 공부도 따라잡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종합학원을 보내달라고 빽빽 거릴 수도 없는,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라는 거. 근데 참 묘한 게, 별로 그게 신경 쓰이지 않는다. 아직은 별로 와 닿지 않는다고 하는 게 맞겠지, 사실, 아직도 뭔가 실감이 나지 않는 부분이 많다. 내가 한국고등학교에 다니며,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돌 이름을 듣고 산다는 게, 마치 오지 않는 눈처럼,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외에는, 나에게 전혀 와 닿지 않던 것들인데. 어쩌면 그래서 적응이 안 되고, 붕 뜨는 느낌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청승맞다고? 글쎄, 수년째 적응이 안 되는 거 보면. 내가 조금 느린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눈을 꾹 감았다가 뜨면, 이 모든 것이 다 사실이 아닌 게 되어버릴 것만 같은 낯선 기분이 든다.

 

대여섯 번 씩 학교를 옮긴다는 것은 나한테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이후에, 더는 학교를 옮겨 다니지 않으면서부터 시작했다. 나는 일시적이고 단편적이었던 친구 관계가 끝없이 길어지는 것이 너무나도 어색했다. 학기말이 되면 나는 언제나 학교를 옮길 것을 대비해 마음에 준비를 하고, 조금씩 아이들과 거리를 두곤 했다. 그것이 학교를 옮겨 다니면서 최대한 덜 상처받는 방법이었으니까, 그런데 새 학기가 되고, 다른 반이 되었어도 인사를 하게 되는 옛 친구는 나에게 예상치 못한 관계였고, 딱 1년 치 친구만 사귀어왔던 나는, 그 이상의 관계가 깊어졌을 때, 어디까지 나를 내보여야 하는지를 몰라서 참으로 난감했다. 12월 초인 지금, 나는 또다시 복잡 미묘한 생각이 든다. 당장에 어딘가로 전학을 가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인데, 지금 만나는 친구를 내년에도 만나기 시작하고, 그 아이가 나에게 가족 이야기, 고민 이야기, 점차 점차 더 깊은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떻게 위로해야 하지? 또 나도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해야 하는 건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친구는 거리를 느끼며 섭섭해 할 것이다. 왜 나는 너한테 속마음까지 다 이야기 하는데, 너는 그저 일상적이고 단편적인 이야기만 계속하는 거니? 정도랄까? 사실 전학을 다니는 동안은 그런 이야기를 한 친구도, 할 친구도 없었다, 그것이 쓸쓸해 보인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글쎄, 나는 별로 그런 친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친구 관계가 딱 그 정도까지에 서만 유지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이제 와서 속에 있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그러니까 이런 인터넷상이 아닌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것이 영 꺼림직하고 싫다. 내색하지는 않지만, 그런 기분은 참 묘하고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것이다.

 

겨울방학이 시작되면 아마 입시 상담을 했던 그 학원에 가게 되겠지? 나는 아마 1시간씩 버스를 타고 다녀야 할 것이다. 학기 중에 다니던, 20분 정도 버스를 타고 다니던 다른 학원이 떠올라 나는 기분이 씁쓸해진다. 멀리 학원 다니며 고생한다고, 자격증 시험에 한 번에 붙어서 다시 학원에 안 오길 바란다고 웃으며 말하던 원장 선생님이 생각난다. 내 또래 아들이 있다고 매일 저녁까지 사주시고, 그것도 모자라 떡이며 아이스크림이며 간식을 잔뜩 주시던 분이셨는데. 또 그 학원에 원어민 선생님도 아주 좋으신 분이셨다. " 자 그럼 우리 '수업이가' 한번 시작해 볼까요?"라는 말 한마디로 나를 빵 터지게 하셨던, 조사 사용이 조금 어색하셨던 분.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곳보다 먼 곳으로 학원에 다니게 되었구나, 아마 그렇게 큰 학원에서 가족 같은 분위기를 낼 수는 없겠지,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끔찍한 쉬는 시간을 보내게 될 거야. 노는 애들이 많을 수도 있지 않을까? 쓸데없는 걱정이 깊어진다. 어쩌면 학원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버스에서 한동안 우울해 할지도 모르겠다. 원래 좀 청승맞은 구석이 많은 편이니까

 

눈이, 눈이 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은 내린다. 내가 진로와 학원과 교우관계에 찌들어 꾀죄죄한 정신상태로 살아갈 때도, 눈은 새하얗게 내린다. 어쩌면 나는 머리를 비우고 마냥 어려지고 싶어서 눈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눈사람을 만드는 장갑 끝 손이 얼어서 감각이 없어질 때쯤에, 나는 정말이지 꾹꾹 눌러 담았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나는 완성된 눈사람을 한참을 말없이 쳐다보고, 이름을 지어준다. 어쩌면 이 눈사람이야말로 내가 한국에 살고 있다는 증거일 테니까. 뽀드득거리는 눈에 발가락이 시려오고,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목도리로 감싼 채, 나는 운동장 끝에서 서서히 가로질러 집으로 향한다.

 

나는 매년 겨울 눈사람을 만들며, 이곳에 적응하는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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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맞춰 보세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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