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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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귤

 

책가방이 흐물거리며 어깨에서 벗어났다. 비에 젖은 왼쪽 어깨에서 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것을 그대로 놓아두었다.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는지 모를 만큼 오랫동안 현관에 서 있다가 이선아의 왈가닥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언니, 학교 다녀오더니 정신도 거기에 빼 두고 왔어?”

“어? 얜 또 무슨 미친 소리야.”

“상식적으로 일단 들어와서 얘기하지? 지금 눈 풀렸는데?”

이선아가 한쪽 눈가를 찡그리더니 팔짱을 꼈다. 한심하다는 눈빛. 아주 한 살 차이라고 봐 줬더니 기어오르지? 괜히 팩 소리를 지르고 신발을 황급히 벗었다. 바닥이 미끄러워 넘어질 뻔 했지만 나름 무사히 착지했다. 그 광경을 전부 지켜보고 있던 이선아의 눈빛은 변함없었다. 비 다 맞고 잘 하는 짓이다, 어? 나는 이선아를 째려보곤 방안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아 시끄러워! 뭐 어쩌라고! 문 그렇게 닫지 말라고! 무슨 상관이야!

마구 정돈이 되지 않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기며 옷장을 열었다. 젖은 옷을 갈아입으려다 왼쪽 어깨에 아직까지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아 옷들을 뒤적이던 손을 멈추었다. 내 손을 어깨에 대어 보았지만 같은 온기를 느낄 수 없었다. 심지어 비슷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대로 옷장 문을 밀어 닫고 미끄러지듯 침대에 앉았다. 보송한 이불이 젖은 생쥐 꼴과 어울릴 리는 없었지만 뭐 어때.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온기는, 자꾸만 선배를 떠올리게 되는 매개체인 것이다. 무의식적인 회상일까. 동아리를 가입하게 된 이유였던 선배. 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동아리를 선택하라는 종이와 홍보 책자가 함께 날아왔고, 신입생이었던 우리는 쉬는 시간마다 책상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동아리에 대해 재잘거리기 바빴다.

“너 어디 갈 거야?”

“몰라, 이 학교는 동아리가 왜 이렇게 많아서 사람 결정장애 오게 만들어!”

나는 그대로 의자에 늘어져 심드렁하게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동아리 활동. 맡기면 열심히 할 자신은 있었지만 중학교 때의 동아리를 생각하면 온몸이 일순간 부르르 떨려 왔으니까. 삼 년간 열심히 일구었던 동아리에서의 좋은 추억이 없어서였는지, 아니면 항상 억압만 받아 왔기 때문이었는지 아직도 동아리라고 하면 일단 경계하고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근데 우리 동아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냥 정하래?”

“아, 선배들이 각 반마다 돌아다니면서 홍보하긴 한다던데 아직 우리 한 명도 안 왔잖아.”

그러게, 우리 반만 소식이 늦나? 말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한쪽으로 갸웃거리던 현수가 동아리 홍보 책자를 닫고 날 향해 물어왔다.

“으음… 진아야, 넌 뭐 관심 있는 거 있어?”

“그으다지… 글쎄, 잘 모르겠는데….”

말꼬리를 늘이는 것이 특기라도 되는 듯이 웅얼웅얼거리며 나 좀 잘게, 하고 대충 대답한 나는 다음 시간을 위해 책상에 엎드렸다. 한국사 시간 전에 자 두지 않으면 수업 중에 잘 확률이 백 퍼센트다. 그러나 편안한 자세는 몇 초도 넘기지 못하고 방해받았다. 잠이 들기 직전 잠시만 얘들아 여기 좀 봐 줘! 하는 명랑한 여자 목소리가 아이들을 강제로 기상시켰다.

“야 누구 왔…”

“동아리 홍보 왔나 봐! 저 남자애 엄청 잘생겼지!”

현수가 가리킨 쪽을 보자 과연, 여학생과 남학생 하나가 무언가를 들고 교단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오른쪽 눈을 비볐다. 시야가 좀 더 또렷해지자, 남학생이 들고 있는 것이 동아리 홍보용 피켓이라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선배 아냐?”

“어?”

“명찰 색이 다르잖아.”

“어, 그러게?”

찌뿌듯한 허리에 손을 대고 꾹꾹 눌러댔다. 책상에 늘어져 새로 출현한 두 명의 이방인들을 바라봤다. 왜 하필이면 이 시간에 와서 잠도 자지 못하게 난리인 건지. 잡담도 잠시, 남학생과 여학생이 동시에 안녕, 하고 인사를 했다. 눈을 깜빡였다. 잠자기 직전 봐서 잘 보지 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에서 설명하는 선배는 상당히 멋져 보였다. 선배는 칠판에 커다랗게 신문편집부, 라고 쓰더니 손을 털었다.

“우린 신문편집부야. 학교 신문을 만들고 발간하는 일을 해. 이사장님의 총애를 받고 있는 동아리라서 지원금도 빵빵하고! 작년에는 지원금 백만 원으로 회식도 갔었어, 만든 신문은 여러 대학교에 보내지니까 대학 진학을 그쪽으로 고려하는 친구들에겐 유리하겠지?”

그 후로 선배는 계속해서 신문편집부에 대한 얘기를 했다. 지금도 잘 기억나지 않는 선발 인원이나 커리큘럼 같은 것들. 선배의 머리 색깔이나 눈동자, 하다못해 교복을 어떻게 입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아주 미미하던 귤 향기만이 남아있었다. 동경일까, 하는 마음으로 신문편집부에 지원했고 우연인지 다행인지 합격자 명단엔 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말을 걸어보지 못했던, 앞에 서기만 하면 콩닥거리는 가슴에 급히 원고만 제출하고 돌아와야만 했던 그런 선배.

 

“많이 남았어?”

“음 조금요, 원고 네 개만 고치면 돼요….”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기장이라는 이유로 남아서 부원들의 글을 봐 줘야 한다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었지만, 관례라며 선배들은 어깨를 두드리고 가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없던 능력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나는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선배들은 전부 가신 줄 알았는데? 내 옆에 선배가 앉아 있었다. 숨을 황급히 들이마시고 놀라 선배를 바라보았다.

“어, 서, 선배 안 가셨어요?”

“응, 일단 나도 기장이니까?”

“아.”

침묵이었다. 둘이 이야기를 한 적도 없었고, 부기장 선배가 내게 대부분의 일을 가르쳐줬으니 어색한 것이 당연했다. 갑자기 공기가 낯설게 느껴져 나는 어물어물 말꼬리를 흐리고 원고를 바라보았다. 커서가 깜박였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쉬이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몇 번이나 백스페이스를 누르고, 교정 버튼을 눌렀다가, 이건 아닌데, 하고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선배가 옆에 있다는 사실에 뻣뻣하게 굳어 버리고. 아, 바보 이진아!

“도와줄까?”

“네?”

“그거.”

선배의 손가락이 노트북 화면을 가리켰다. 새삼 손가락이 길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진아야?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마치 온몸에 심장을 달아 놓은 것 같이 쿵쿵거렸다. 그러니까.

“어, 네! 조, 조금만 부탁드릴게요.”

선배는 자신의 노트북을 켜더니 유에스비로 담아간 파일로 작업을 시작했다. 선배의 옆모습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분명 입을 다물고 있는데 선배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선배의 집중하는 모습. 선배는 집중하면 입술을 내미는 버릇이 있구나. 무의식중에 난 내 입술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선배가 갑자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황급히 노트북으로 시선을 옮기고 숨만 간신히 쉬고 있었다.

“이쪽은 끝.”

“어, 벌써요?”

노트북에서 시선을 떼질 못했다. 점점 고개는 내려가고, 애초에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눈은 갈 곳을 잃고.

“아직 못 끝냈어?”

선배의 목소리에 선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배는 기지개를 펴고 있었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원위치로 돌아왔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 작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선배의 눈빛에 물음표가 달려 있었다. 나는 뺨을 긁적이며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거의 다 끝났어요. 이제 메일만 보내면 끝이에요.”

메일 창을 클릭하려는데 선배의 말이 손목을 잡았다.

“아, 메일 보내지 말고 내일 동아리 시간에 바로 나눠줘.”

“그래도 되요?”

“원래 그래 왔으니까요?”

선배가 내 말투를 따라하듯 말꼬리를 올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곧 학교 문 닫아, 가자. 하는 목소리에 난 뻣뻣하게 일어나 고개를 끄덕였다.

 

“비 오네?”

“어, 비 와요? 우산 안 가져왔는데….”

시원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여름 날씨를 한풀 꺾이게 해 줄 비였다. 난 책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우산이 없으니 비닐이라도 쓰고 가야지. 책가방에 방수가 되는 비닐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쪼그려 앉아 책가방 안을 보고 있는데 무언가가 등을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선배였다.

“뭐 해? 뭐 놓고 온 거 있어?”

“비 오니까요…?”

선배가 당황하는 모습에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선배는 눈을 깜빡이다가 낮게 웃더니 자신의 우산을 가리켰다. 같이 쓰고 가자. 얼결에 고개를 끄덕여버린 나는 숨을 들이켰다. 선배는 자연스럽게 우산을 펴고 손짓을 했다. 다시 심장이 쿵쿵, 쿵쿵 하고 뛰기 시작하고. 힘이 풀려 휘청거리는 다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넘어진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엔 이미 늦었다. 몸은 이미 앞으로 기울었다. 점점 빨라지는 가속도를 몸이 느끼고 있다. 눈을 질끈 감은 순간, 어깨에 닿은 따뜻한 온기,

조심해야지, 하고 입술에서 흘러나온 다섯 음절과 아찔하던 귤 냄새를 나는 기억한다.

 

옛날에 친구가 말해 줬던 것이 떠올랐다. 꽃 하나를 따다가 꽃잎을 하나씩 떼면서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를 번갈아 되뇌는 일종의 점. 왜 하필 지금 떠올랐을까? 선배는 집에 들어가면 연락을 한다고 했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젖은 어깨를 만져도 선배의 온기와 같은 온기를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나의 질문에 대한 답 또한 도출되지 않는다. 손으로 눈을 꾹 눌러본다. 아직도 귤 냄새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언니, 엄마가 귤 먹으라고 사 놨대!”

“가져다 줘!”

“아, 진짜 언니는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못 가져가? 좀 일어나! 그러니까 살이 찌지!”

“나보다 몸무게 많이 나가는 사람은 입 다무세요.”

이선아가 툴툴거리며 귤을 담은 접시를 내팽개치듯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동글동글한 귤들이 조금씩 흔들렸다. 차가운 귤을 손에 쥐었다. 그러고도 가지 않고 있는 이선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선아는 나를 째려보더니 언니가 그러면 그렇지, 라고 툭 말을 내뱉고는 끙 하는 소리와 함께 일어났다. 문이 눈앞에서 쾅 닫혔다. 한결 아늑해졌다.

귤껍질을 벗겼다. 손톱 아래에 귤의 흰 부분이 껴서 몇 번이고 다른 손톱으로 긁어내야만 했다. 주황색 귤 알맹이가 보였다. 문득 다시 꽃잎점이 생각났다. 나도 모르게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를 되뇌고 있었다.

깐 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알맹이 하나를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좋아한다. 다른 알맹이를 연이어 떼어냈다.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이게 뭐라고 가슴팍에서 콩콩대는 소리가 들리는지.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그리고 좋아하지 않는다. 마지막 알맹이가 좋아하지 않는다에서 멈추었다.

잠시 온 몸의 사고회로가 정지된 듯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야! 이 귤은 중간에 터진 부분이 있으니까 무효야! 혼자 속으로 외치곤 흩어져 있는 알맹이들을 입안에 밀어 넣었다. 입을 움직여 귤을 꼭꼭 씹었다. 그 선배에게선 꼭 이 향이 났지. 다른 귤을 손에 쥐었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이 귤은 작으니까 무효야. 이건 껍질에 파랗게 멍이 들어 있으니까 무효야.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이 귤은 맛이 시니까 무효야.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다. 이건 모양이 일그러져 있으니까 무효야. 무효야, 무효야, 무효야. 이쯤 되면 귤이 나를 농락하는 건지, 아니면 괜한 오기이자 객기인지 모를 지경이다. 한 번쯤은 좋아한다, 가 나올 수 있는 거 아냐?

마지막 귤에 손가락을 찔러 넣는 순간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었다. 진동을 타고 귤 냄새가 방안에 가득 퍼졌다. 나는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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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시계를 본다. 자정이 겨우 넘은 시각. 방 안에 자의로 갇혀있는 시간은 얼마나 길었지. 얼추 가늠해도 십오 일 남짓이다. 달이 뜨는 열다섯 번의 순간을 도축하듯 무시했다. 여자는 손을 뻗어 자신의 원고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프린터에서 막 나온 원고가 아직 따뜻하다. 열다섯 번의 밤과 열다섯 번의 낮을 쏟아 부은 작품이다. 꺼 두었던 휴대폰을 켰다. 편집장에게 연락을 했다. 여자는 오랜만에 듣는 자신의 목소리에 놀랐고, 편집장은 여자에게서 연락에 온 것을 놀라워했다. 여자는 막 마무리지은 원고를 봐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명랑하게 귀에 꽂혔다. 저 편집장은 항상 명랑했지. 당장 내일이라도 좋으니 근처에서 만나자는 말에 여자는 동의했다. 급작스럽게 잡힌 약속이었다.

그것은 곧 자신의 몰골이 어떤지 확인해야 한다는 이야기와도 같았다. 여자는 자신의 방에서 비척비척 나갔다. 스탠드의 옅은 불빛에 익숙해져 있던 여자의 눈은 강한 빛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어지러웠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떨리는 다리가 위태롭다. 여자는 화장실의 불을 켰다. 그곳에서 여자는 낯선 사람을 만났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머리카락은 부스스하고 다크서클은 뺨 중간까지 내려왔다. 이미 죽은 것 같아 보이는 눈에는 생기가 없었고 팔다리는 보름 전보다 훨씬 말라 뼈의 결합부가 도드라져보였다. 여자는 자신임을 확인하기 위해 오른손을 올렸다. 거울 안의 자신은 왼손을 올렸다. 그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매끄럽던 원고와 상반된 피부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여자는 눈을 깜빡였다. 삐걱거리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원고를 끝낸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컨디션 조절이다. 최대한 빨리 자야 내일의 만남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 여자는 다년간의 회사원 생활과 외부업체의 미팅 경력으로 첫인상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알았다. 최소한 만남에서 대화의 주도권을 가질 수 있을 정도의 인상을 남겨야 한다. 여자는 곧바로 문을 열어 둔 채로 이부자리를 폈다.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은 온통 암흑이었다. 채도 낮은 유채색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도저히 잠을 잘 수 없다. 양을 세어 보아도, 수면유도영상을 보아도, 잔잔한 노래를 들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여자의 몸에는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다. 중력을 이기지 못하는 행동거지들이 그것을 여실히 보였다. 다만 최면이었다. 약간의 방어기제성질을 띤 여자가 이불 속에서 빠져나왔다. 자신의 피부를 걱정하며.

여자는 연필을 잡았다. 나무 향기가 났다. 여자는 종이에 무얼 그릴까 생각했다. 저 밤하늘의 별들과 달이 춤을 추는 것을 그릴까, 아니면 자신의 추레한 몰골을 그려버릴까. 박제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지. 여자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떠올렸다. 인물들. 방금 쓴 원고의 인물들을 그려야겠다. 마디마디가 또렷한 손가락이 희게 떨렸다.

소중하다는 것은 끌어안고 싶다는 것이다. 소중하다는 것은 지키고 싶다는 것이다. 소중하다는 것은 닮고 싶다는 것이다. 소중하다는 것은 동화되고 싶다는 것이다. 소중하다는 것은…. 여자는 열거된 모든 속성에 해당되는 인물을 그린다.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 그녀의 곱슬거리고 부스스한 머리카락과, 생기 없는 눈에 애써 반사된 빛과, 무의식적으로 부풀리는 가슴의 데포르메를 그린다. 연필이 수명을 깎아나가며 인물을 형상화한다. 자그마한 입과, 마른 몸뚱이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처럼 튼튼하게 자리 잡고 있는 두 다리와, 개뼈다귀같이 생긴 두 팔을 그린다. 애써 입혀 두었지만 어울리지 않는 흰색 교복 블라우스와, 체크무늬 넥타이와, 보풀이 일어난 조끼와, 시금치 색의 재킷과, 그 아래로 뻗어나가 뱀처럼 흐늘거리는 회색 치마를 그린다. 종이 안에서 살아난 인물이 자신의 창조주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여자는 소설 속에서 이 깡마른 아이가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창조한 아이이고 동시에 자신이 죽인 아이이기도 했다. 가장 극단적인 서사를 부여한 소설에서 가장 잔혹하게 죽은. 살아난 아이가 종이 속에 갇혀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의 초점 없는 눈에서 살의가 보였다. 여자는 문득 이 아이가 자신에게 보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순간적으로 박힌 감정은 점점 몸뚱이를 불려나갔다.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의자가 다시 삐걱이며 노래했다. 공기가 무거워 아감구멍을 점점 틀어막았다. 여자는 간신히 숨을 쉬다가 칼을 들었다.

여자의 칼은 펜이다. 빨간 잉크가 펜에서 똑똑 흘러내렸다. 잉크가 종이 속 아이의 뺨을 적셨다. 마치 상처가 난 것처럼 잉크가 종이의 결을 타고 빠르게 퍼져갔다. 생각할 시간조차 없이 여자는 그림에 손을 뻗었다. 아이의 뺨에서 시작된 상처가 주위로 번져갔다. 여자가 아이의 뺨을 그었다. 뺨과 눈과 피부를 전부 그어 긁어냈다. 꽃이 피어나는 기괴한 아름다움. 종이를 잉크로 적시고 있는 행위일 뿐인데도 여자는 그 속에서 근육을 본다. 거기에 온갖 장기들이 있다. 하나의 근육세포마다 생명이 있다. 거의 아사한 생명이 있다. 아이가 죽어간다. 여자는 숨을 다급하게 들이켠다. 힘이 빠진 손에서 펜이 굴러 떨어진다. 잉크가 튄다. 아이가 완벽하게 죽었는지 여자는 확인하지 못했다.

 

죽었던가?

그 애가 정말 죽었던가?여자는 눈을 감고 다시 소설을 떠올린다. 몇 번이고 퇴고해서 이젠 거의 외울 수 있을 법한 그 소설을. 완전히 죽음에 도달했던가. 자신이 쓴 소설 속의 한 구절을 여자는 웅크린 채 작게 읊조려본다. 나는 무가치함을 느낄 수 있다. 음수로 치닫는 가치가 몸통을 뚫고 지나간다. 피부에서 맥박이 선명히 뛴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자마자 죽어가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달콤한 꿈을 꾸다가 죽고, 누군가는 심장마비로 죽는다. 누군가는 스스로 목을 조르고, 누군가는 차에 치여서 죽는다. 그러니까 나처럼 피부가 전부 벗겨져 피와 함께 죽어가는 것도 죽음의 일부일 뿐이다. 지극히 작은 파편일 뿐이다.

나는 죽기 위해 소설을 썼던가, 아니면 살기 위해 소설을 썼던가? 살기 위해 약속을 만들었다. 살기 위해 다음날을 기약했다. 숨쉬기 위해 먼 미래의 일을 구체화시켰다. 내가 정말 삶을 갈구하는가? 여자는 입술을 세게 깨문다. 그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 무감각했다. 원래 이렇게 무감각했던가? 자신의 무릎을 껴안고 여자는 제게 또 묻는다. 너는 죽고 싶니, 살고 싶니?

문득 여자는 시계를 본다. 세 시 하고도 절반이 지났다. 편집장을 생각했다. 자신의 원고를 생각했다. 바닥을 칠 몸 상태를 생각했다. 몇 시간 후 자신이 앉아 있을 엔제리너스 카페의 의자를 생각했다. 여자는 자신의 얼굴을 생각했다. 이미 피부가 뒤집어진 자신의 얼굴에 종이 위에 그렸던 여자아이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붉은색마저 얼굴 전체에 도포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이가 죽기 직전의 모습으로 말을 걸었다. 너는 죽고 싶니, 살고 싶니? 여자는 가늘게 뜬 눈을 깜빡이다가 긴 막대기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여자의 손이 시선을 따라갔다. 손에 금속제의 느낌이 선명하다. 칼날이 스탠드의 빛을 반사시켜 약하게 반짝거렸다. 여자는 칼을 제 우둘투둘한 뺨에 가져다대었다. 잉크가 흘러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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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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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

 

여자가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구불거리는 검정색 머리를 노란 고무줄로 질끈 동여맨 채였다. 여자의 손에 불거져 나온 힘줄처럼 머리카락이 툭 비어져 나왔다. 손가락의 끝에 가려진 검은 글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래산업 마케팅홍보팀 윤미정. 마케팅홍보팀, 하고 여섯 음절을 입안으로만 굴려보다가 저 깊은 곳에서 끓는 활자들에 여자는 입술을 잘근 물었다. 저기요, 여기 장사 안 하나요? 네, 나가요! 비린내가 풍기는 밖을 향해 소리친 여자는 끙 소리와 함께 일어났다. 여자의 투박한 손에서 벗어난 명함은 여자가 입은 앞치마의 앞주머니에 자리를 잡았다.

 

뭐 드릴까요?

여기 바지락은 어떻게 해요?

킬로에 만 오천 원이에요.

왜 이렇게 비싸요? 저기는 만원이던데.

자연산이라…. 그래두 맛은 있어요. 내가 여기에 생합이랑 이것저것 얹어드릴게.

아… 네에, 좀 둘러보고 올게요.

 

유모차를 끌고 온 가족은 여자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수산시장의 비린내 사이로 사라졌다. 엄마 손을 잡고 나온 초록 티셔츠의 남자아이가 한 번 뒤돌아보았을 뿐이었다. 여자는 자신의 또 다른 손을 내려다보았다. 분홍색 고무장갑에는 물에 떠다니는 희뿌연 잔여물들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여자는 오늘도 같은 생활을 반복했다. 명함을 만들었으나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외려 저 직위와 동떨어진 제 신세를 눈앞에서 직시할 수 있었을 뿐이다.

 

미정인 무슨 일을 해? 그러니까…. 말을 어물어물 늘이며 여자는 저와 위로 두 살 차이 나는 남자의 말을 회피했다. 집안 식구들이 전부 모인 설날 윷자리에서 굳이 직업을 물어보는 저의가 무엇일까. 미정은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만 이리저리 움직였다. 구불구불 굽이치는 손가락이 다른 쪽의 손바닥을 긁어댔다. 미영인 공무원이구, 미선인 치과에서 일하고. 태형인 이번에 승진한다고 했나? 응,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하하하….

인위적인 웃음소리에 잠시 여자는 숨을 멈췄다. 집안 식구들의 눈빛이 전부 제게 자신이 든 가위처럼 날아와 온몸에 꽂히는 것 같았다. 느낌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자는 제 몸에 구멍이 나진 않았는지 더듬어야만 했다. 태주는 뭘 하지? 아, 아직 취준생? 아직도? …. 제 남동생은 대답하지 못했다. 여자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애꿎은 빨간색 윷말만 반들거리도록 매만졌다. 폭격기처럼 내리꽂히는 비폭력으로 포장한 폭력적인 이야기들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뒤따랐다.

그래서 미정인 무얼 한다구? 다시 한 번 물어오는 끔찍한 목소리에 여자는 손 마디마디가 허옇게 질리도록 힘을 주다가 고개를 들어 아주 새된 소리를 내뱉었다. 미, 미래산업 마케팅팀에서…. 순간 경멸의 눈빛에서 호의와 질투가 섞인 눈빛으로 속성이 바뀌는 것을 여자는 눈치챌 수 있었다. 얼른 고개를 숙인 여자는 겨우 말을 끝맺었다. …일하고 있어요.

 

비린내가 현실을 일깨운다. 여자는 오늘 새벽에 경매시장에서 공수해 온 바다생물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사무치는 부끄러움이 여자의 피부를 야금야금 타고 오른다. 여자는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고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제 팔뚝을 교차해 붙잡았다. 순간의 가족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바다생물이었다. 미영의 질투 어린 눈빛은 꽁치를 닮았고, 미선의 반지 낀 손가락은 갈치를, 태형의 웃는 대가리는 고등어를, 모든 이야기를 주도했던 태철의 혀는 장어를 닮아있었다. 태주는 플랑크톤을 빼닮았다. 노력만큼 증식하지만 결국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순식간에 먹이로 전락하는. 꽁치와 갈치와 고등어가 플랑크톤을 입속으로 쓸어넣는 광경이 눈앞에 그려졌다. 장어가 그 주위를 맴돌며 어떤 생선을 자신의 저녁으로 삼을지를 가늠했다. 팔기 위해 내어둔 상품들이 역겨워지기 시작했다. 여자는 앞주머니에 들어 있는 명함을 다시 떠올렸다. 순간 바다생물 축에도 끼지 못하는 자신이 서러워졌다.

정말 하고 싶어 했던 일이 무엇이었더라. 여자는 어릴 적 자신의 꿈을 떠올렸다. 우주 비행사가 되어 우주에 존재하는 별에 모조리 자신의 발자국을 찍는 것. 기체로 이루어진 행성이 있다는 것을 알 만큼 커서는 의대에 진학해 부검의가 되어 사람 살을 찢고 그 안의 장기들을 탐색하는 것을 꿈으로 삼았었지. 실업계 고등학교를 지원한 후로는 그저 취업을 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 있었고. 성적으로 도출된 현실을 직시한 후로 어쩌면 하고 싶은 모든 것을 망각했는지 모르겠다. 지금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겨우 고무장갑과 생선머리뿐인데.

장사는 계속되었다. 여자는 사람들을 응대했다. 그런데 왜 몸에서 살짝 비린내가 배어 있는 것 같지? 어, 어… 마케팅, 시장조사 때문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니까. 여자는 바다생물들 앞에서 자의적으로 말했던 변명거리를 되씹었다. 비겁하고 유치하다. 갑자기 여자는 이 좁은 수산시장에 바다생물들이 찾아올까 더럭 두려워졌다. 여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여자의 시선이 수산시장 곳곳을 누볐다. 여자에게 체화된 기술은 집중하지 않아도 일을 수월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생선 비린내와 아주 시끄러운 흥정 소리, 수산시장 한구석에서 미묘하게 나는 담배 냄새, 언성을 높여 싸우는 두 남자와 같이 사소한 일들은 별반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자의 눈은 희끄무레한 동태의 썩은 눈깔과, 수산시장의 빨갛고 초록색이고 파란색인 파라솔과, 간이 테이블에 앉아 소주를 마시고 있는 남자와, 그 남자의 젓가락에 집힌 종류 모를 회와, 물에 흥건히 젖은 도마와, 그 위에서 운명을 저주하고 있는 횟감과, 찰박거리며 물장난하는 포니테일의 어린아이와, 그것을 저지하는 자기 또래의 여성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여자는 대게 십 킬로를 주문한 중년의 남성에게 포장한 대게를 건네주었다. 한 명의 손님치곤 상당히 많은 돈을 받아들었다. 앞주머니에 돈을 접어 넣었다. 앞주머니에서 반들거리는 종이의 재질이 만져졌다. 때와 땀이 묻지 않은 순수한 종이의 감촉. 여자는 순간 소름끼치는 이질감에 명함을 꺼내 땅에 던졌다. 마케팅홍보팀 아래에 적힌 자신의 이름이 낯설었다. 생명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무생물처럼. 여자는 고무장화를 신은 발의 뒤꿈치로 명함을 몇 번이고 짓이겼다. 무생물을 깨고 나오는 신선한 흥정소리를 여자가 목청껏 외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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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항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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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식을 내밀지 말아요

어떤 별을 대입해도 값이 같잖아

우주먼지의 빙산 위에서 난 손톱을 물어뜯고

삐뚤삐뚤해진 손톱 면을 따라

도려내어진 우주 한귀퉁이가 잡히네요

 

답이 하나로 정해진 식을 우주로 던집니다

사실 모든 문제엔 정답이 없을지도 몰라

한없이 정답에 가까운 것들만 존재하는 공간

정답으로 달려가지만

여전히 정답이 되진 못한 편린들의 절규

 

우주를 아주 작게 축소시키면

별 사이의 거리는 없는 것이에요

붉은 별과 푸른 별이 키스할 때 우리의 극한값은

모든 감정이 되고

당신이 강요하는 흑백 귀퉁이를 찢을 수 있는 시절

우리의 맞잡은 손이 꿈틀거릴 때

모든 오답은 정답이 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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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래 안에서 물 냄새를 그리워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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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란 소우주를 들여다보자
여기 작은 바다가 있다

 

숨을 들이켜 온 바다를 품은
당신의 안에 웅크리고 앉아
쏟아지는 짠물에 질식사할 준비를 하고
함께 떠밀려오는 별조각들,
나는 멈추어버린 시간 속에서
당신의 파편들을 발굴해내어

 

진화의 시류에 가담하지 않은
당신은 퇴화했습니까
모두가 뭍으로 기어나올 때
물을 찾아 긴긴 여행을 떠나고

 

캄캄한 당신의 내부
나는 눈을 꼭 감았다 뜨며
당신이 삼킨 플랑크톤들을 손에 움켜쥡니다
빛나는 별들의 잔해가 남아있기에
퇴화와 진화의 기로에서
어느 쪽의 물 냄새가 더 짙을지를 가늠한다

 

눈을 감는다
곧 작은 바다의 썰물이 시작될 것이다
당신이 물에 젖어 있었던 이유를 온몸으로 껴안고
수염 사이로 드러나는 아주 작은 빛
소우주와 우주의 사이에 모로 눕는다
파도가 데려다 줄 미지의 공간을 간소히 예측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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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성의 잔해를 따라가는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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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조각이 하나 둘 뜨기 시작하는 하늘은

여전히 영하의 온도를 유지한다

나는 북극성의 위치를 손가락 사이로 가늠하다가

섬겼던 신앙을 꾹 눌러 터트려버리고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탐험가처럼

너의 나이테를 셈하면서 차가운 몸뚱이에 성호를 그어

맨몸으로 앞에 나서길 바랐던 시절

간음한 신부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는

몸에 걸칠 면포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전부였던 바다를 끄집어내는 토악질

내 안에선 별빛이 무수히 버려지고 있었다

 

체온이 없다

존재의 여부가 불확실한 그림자들이 북극성으로 내달리고

이따금씩 어제쯤의 생각을 해

가장 사랑해야 할 것들과 하나뿐인 심장

놓지 못해 심장을 잘게 잘라 쪼갰던

나는 너를 따라서 소멸하고 있는 거지 사실

우린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가잖아

 

나의 닿지 못했던 항성에

그림자들의 그림자들이 새겨지는 중이다

네가 그림자들을 사랑한다면 너는

찢긴 먼지조각으로 부러질 운명이라 속삭이며

어릴 적 둘렀던 빨간 목도리의 실을

아직 풀지 못한 채로 만지작대고만 있는 내가

너로부터 쏟아지는 빛 아래에서

간신히 숨을 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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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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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역겨운 사람과 이어진 줄을 끊어버리자

가위와 칼과 손톱과 이빨을 견주다간 갉아먹기로

우리가 공유하던 시간은 이제 없어지는 거야

흔적 없이 녹여버리기를 원했다 꾸욱 눌린

파랑새의 대가리가 으스러져 두개골이 삐죽 튀어나오고

깃털만 남기고 비둘기를 박제하도록

한 입 크게 베어물면

붉고 푸르고 짭조름한 원통형에 앞니가 박힌다

채 자라지 않은 두 개의 백상아가 부딪히자

엄마 나는요,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자신이 없어요

탯줄을 갉아먹는 태아다

이제 우린 단절되었다

운명은 여기에서 교체되는 것

ㅡ너는 이곳에서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니

난 죽음을 목격한 적이 없으므로 두렵지 않다

쓰레기통 뚜껑이 강하게 수축하는 순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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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외상에 내가 다칠 수 없고 (외상 1차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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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에게 아프다고 말했다
가로로 찢어진 상처
쓸린 자욱이 어스름하게 남아있다

 

찢긴 구멍 사이에 몸을 뉘이면
아무래도 안정적으로 숨을 쉴 수 있다
피가 점점 차오르는 시절
가시적인 우리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아주 폭력적인 언어로 입을 열자면
비교수식어의 첨단을 달리고 있다
어떤 약이 흉터 없이 아물게 할 수 있나요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
그러니까 마ㅇ,
나는 그렇게 어물어물 끝을 흐리곤
곧 입을 다무는 것이다

 

너의 찢어진 상처와는 달리
나의 상흔은 보이질 않으므로
언제나처럼 멀쩡한 사람 흉내를 낸 후
웃는 삐에로 가면을 뒤집어쓴다

 

그리고 나는 네게 약을 발라줍니다
내가 안정적이라고 말했던
그 공간을 손수 꿰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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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우리를 낙오시키는 중이고 (학교 1차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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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낙오되는 중이다
사람의 손길이 그립다
여기저기 획일화된 체취가 묻어있는데
사람 냄새 대신 공업용 스프레이 냄새
기계화된 나의 손가락이 어딘가로 뻗쳐
누구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두에게 무감각하므로

낙오되는 중이다
우리가 우리에서 너와 나로
갈라서는 과정으로

근원을 모르는 타성이 머리채를 쥐고
완전히 목숨을 끊어내는 중이다
삶의 경계선에서 뒤돌아보는 행위는
우리의 책상을 한 번 쓸어보는 것
움푹 팬 상처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들끓는다
나는 그것을 안타까이 여기면서도
방해되잖니
하고 손가락을 대어 입을 다물게 만들어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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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담실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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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부터 2월까지 운영한다고 했는데 아직 플랫폼이 완성되지 않은 건가요, 아니면 저만 못 찾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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