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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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맣도록

우리가 멎지 못하는 겨울

 

딸기만 남기고 전부 그만두어도

괜찮아

 

쏟아졌다가

사라진다 괜찮은 발자국들은

 

틈틈이

 

으깨진 딸기

우기엔 머리끈이 잠자코 자라났다

상하지 않을 정도로만

 

무르지 말자

 

틈틈이 덩굴과 덩굴

덩굴의 덩굴

인과관계가 새로 쓰이는 시간들

 

얼어붙은 빨강과 빨강

우리는 비를 그렇게 불렀다

얼지 못하는 어둠과

그러나 덫이 목덜미를 부드럽게 죄어오고

 

하나 곧

미묘한 씨앗이 수직으로 소행성을 덮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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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콜론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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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속 뼈가 다 나가자고 채근하는 와중에도 우리는 신문을 읽지.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았다. 정 입맛이 없다면 서로를 먹어보자고. 둘이 아니면 의미 없는 이야기.

 

아프지 말자고. 그래서 살아있지도 말자고. 지켜질 약속들이 표면으로 떠올랐다. 누가 섭섭히 낚아 가는지는 상관없어. 잘 자요. 마지막 꿈은 악몽이길 바랄게요.

 

부푼 어휘들을 누른다. 지혈은 심장 위에서 하라던데. 괜찮아요, 통증은 없을 거예요. 나는 아무래도 숨 쉬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할 거 같아요. 맨몸을 물색했다. 바이탈 사인을 새길 만한 빼곡함. 영영 아물지 못할 곳으로. 상처로 걷자 사라지는 자취들.

 

색이 죽었어요. 모를 수 없지.

 

엄마 나는 말 하지 않고도 우는 법을 알아요. 눈은 잠긴 지 오래. 벌어진 문틈으로 기어나오는 그림자들. 신문에선 폭우를 사실 예보했는데. 긴팔을 입는다. 우리를 나로 다시 얕게 나를 우리로. 대변하지 말아요. 안 아파요.

 

기르는 애완동물이 자꾸만 정성스레 불어나면 절반으로 나뉘는

 

 

 

¹ 나는 더 이상 아프지 않겠습니다. 나는 더 이상 손목을 조각내지 않겠습니다. 손목에 새길 때마다 상처를 위한 상처를 만들어내는 것 같아 우스웠습니다. 그러나 죄다 하룻밤의 결심일 뿐입니다. 결심은 지켜지지 못할 관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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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끝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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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끝나기 전에*
어쨌든 공연은 올려야 한다. 그게 이학년들끼리 비상회의를 소집해 나온 결과였다. 축제까지는 이제 고작 이 주밖에 남질 않았고, 원래대로라면 소품까지 전부 준비되어 들고 동선을 맞춰야 하는 시점이었다. 박스도 몇 번만 더 주우면 그만 주워야 할 정도로 꽉꽉 차 있어야 했다. 그러나 대본조차 나오지 않은 상황은 전년도 축제를 준비한 입장에서 보자면 축제에 공연을 올리고 싶기는 한 건지, 귀신의 집을 운영하려고 하는 건 맞는 건지 의문을 품기 충분했다.
저녁에 삼학년 선배들이 내려왔다. 동아리 시간에 삼학년 기장 선배가 내려와 한바탕 혼이 난 후였다. 수능까지 남은 기간도 동일하게 이 주일이었다. 이학년 기장 Y에게 문자를 받은 순간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머리에 직격했다. 삼학년뿐 아니라 이학년들도 거의 개입하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 이학년들이 매달려 도와주는 것도 모자라 삼학년 선배께서 직접 내려와 상황을 체크하고 최선의 방도를 함께 강구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우리는 선배들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본래 회의를 소집하면 텅텅 비어 있곤 하던 큰 강의실은 어쩐 일인지 이학년과 일학년들로 꽉 차 있었다. 차가운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학년 기장 Y가 울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이년간 걱정 될 정도로 연극부를 위해 헌신한 건 Y였고, 맨 땅에 헤딩을 하려던 일학년들에게 완충작용을 한 것도 Y였고, 의욕 없는 일학년들을 어르고 달래 그나마 대본을 쓰게 시키고 지속적으로 찾아갔던 것도 Y였다. Y는 할 만큼 했고, 짊어질 만큼 짊어졌다.
우리는 둘로 갈라졌다. Y를 위로했고, 그 후의 대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남자작가 H와 배우장 G와 부원 J를 비롯해서 대여섯 명이 모였다. 일학년들은 학교 편의점 앞의 공간에서 저들끼리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우리는 일학년들이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 이상 볼 수 없을 법한 벽 뒤에서 한숨을 쉬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침울하게 타일을 불규칙적으로 밟는 소리만 들렸다.
“대본도 아직 안 나왔다며.”
내가 운을 뗐다.
“일단 장면 전환 아홉 번은 미친 짓이야. 절대 못 올려.”
“너희가 계속 같이 봐 주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
“봐 줬지, 봐 줬는데…….”
약속하기라도 한 듯 우리는 마른세수를 했다. 그 뒤에 나올 이야기는 안 봐도 뻔했다. 우리는 그 전 주 일요일 아침에 모여 비상회의를 했던 적이 있었다. 일학년 기장 S와 다른 부원들 간의 불화에 대한 문제가 주 안건이었다. 한 시간 반 동안 힘 빠진 논쟁이 오갔고, 연극부 특성상 이번 무대를 어떻게든 올린다고 하더라도 불화가 지속된다면 당장 다음 무대인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그 애들이 자생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확신할 수 있었다. 최악의 경우라면 오리엔테이션 무대를 올리지 못하고 동아리는 폐동되고야 말 것이다. 아찔한 감각이 목 뒤편부터 꼬리뼈까지 타고 내려갔다.
“Y는 이제 우리가 손 댈 수 있는 거 없다고 했지.”
“그렇다고 놓고 있을 거야?”
안 될 말이었다. 모두가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나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일단 우리, 내일까지만 도와줘 보자. 내일, 금요일까지 최대한 도와주고, 그래도 대본 안 나오면 그냥 손 떼자.”
어쨌든 공연은 올려야 하잖아. 모두가 동의했다. 각자 화가 나 있거나 안타까워하거나 이해를 할 수 없었거나 슬프거나 혹은 전부를 반복해서 느꼈다. 몇몇은 야간자율학습을 빼고 온다며 교실로 향했고, 몇몇은 짐을 다 들고 온다며 자리를 옮겼고, 몇몇은 편의점 앞 원탁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는 일학년들에게 향했다.

 

일학년들은 몇몇만 남아 재작년 연극 대본을 읽고 있었다. 삼학년 선배들이 도저히 안 되겠으면 아무도 보지 못한 대본을 각색해서 해 보라는 백업 플랜을 내 주시고 가셨던 참이었다. 배우장 G와 나는 대본을 받아 나눠 읽었다. 선배들의 대본은 대사가 깔끔했고, 장면 전환도 없이 한 막 안에 모든 사람들이 들어갔다가 자연스럽게 나왔으며, 사이사이 들어가 있는 개그 요소도 과하지 않고 재미있었다. 작년에 내가 추구하고자 했으나 타깃이 정해져 있는 학교 연극과 정극 사이에서 중도를 찾지 못해 포기했던 스타일이었다. 우리는 읽으면서 연달아 탄성을 질렀고, 심지어 그 대본이 초고라는 걸 전해듣고선 작년 우리의 대본을 떠올리고 얼굴을 가렸다.
“얘들아, 우리 시간이 없거든.”
하도 결론이 나지 않자 내가 말을 뱉었다.
“선배님들 대본으로 연극을 올릴지, 아니면 너희가 대본을 제대로 쓸지 얼른 선택해야 해. 대본 완성하기까지 딱 하루 남았어.”
일학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 분 안에 결정하자. 거의 다 읽었지?”
타임 리밋을 걸어 주고 나서야 목소리가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이학년들은 최선을 다해 도와 줄 생각이었다. 어쨌든 처음 하는 일학년들보다는 한 번의 무대 경험이 있는 이학년들이 조금 더 익숙하게 연습을 이끌어 갈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원래대로라면 일학년들이 시행착오를 거치고 어떻게 해야 최대한의 효율을 끌어낼지를 고민하고 모여서 연습하는 과정이 필요했지만, 지금까지의 결과물로 판단하자면 이 주일 안에 일학년들만 모여 연습하는 건 역부족일 게 빤했다.

 

신강의동에는 빈 강의실이 없었다. 일학년들은 조금 더 힘들고 버거울지라도 자신들 스스로의 연극 대본을 짜서 연극을 올려 보기로 했다. 우리는 그 선택을 존중했다. 일학년들이 짠 초안은 나와 있었고, 우리는 열 막에 달하는 막들을 합치고 관객들이 웃을 수 있는 대사를 집어넣고 개연성과 창의성을 더 부여해야 했다. J가 유에스비를 받아들고 근처 피씨방에서 일학년들이 지금까지 완성한 대본을 뽑아 온다면서 나갔다.
노트북으로라도 그 시간 동안 제1막 정도는 갈아엎어야 했다. 아마 J가 돌아오기까지는 이십 분 가량이 걸릴 것이고, 우리는 그걸 쉬이 버릴 정도로 시간이 남아도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 편의점 앞에 자리를 잡았다. 끊임없이 나는 어떻게 할래? 라는 질문을 던졌고, 돌아오는 대답들을 일학년들이 적었다. 귀신의 집 창문을 막을 박스를 주우러 갔던 일학년 M도 합류했다. 야간자율학습 일교시가 끝난 듯 신강의동에서 편의점 앞으로 각자 교재와 필통을 품에 안은 학생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 무리 가운데에는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동아리 활동을 전면 금지한다고 알려진 선생님 S도 계셨다.

 

“선배, 그런데 야자 때 어디서 해요?”
삼학년 선배들이 저녁시간 막바지가 다 되어 올라간 후에 일학년 한 명이 물었다.
“신강의동 남는 데 없잖아. 그럼 씨유 앞밖에 없지 않아?”
“근데 S쌤이 잡으러 다닐 텐데요….”
“S 선생님?”
“저희 저번에도 담임쌤께 허락 받고 신강에서 연습하고 있었는데 안 된다고 다 돌아가라고 해서 강제 해산 당했거든요.”
그렇지만 상황으로서는 바늘구멍에 들어가라고 해도 네, 하고 들어가야 했다. 시도는 해 봐야 하지 않겠어.
“괜찮아. 어떻게든 되겠지.”

 

그 어떻게든 되겠지, 가 여기에서 발목을 잡을 줄이야. 선생님은 둥그렇게 모여 앉아 있는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는 고개를 숙였다.
“여기 왜 왔어?”
“아, 저희 동아리 연습 때문에요…….”
“누가 야자 빼도 된다고 했어?”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치만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 선생님, 정말 죄송해요. 저희가 너무 급해서요……. 애들 다 담임 선생님께는 허락 맡고 왔는데…….”
선생님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담임선생님께는 여기 다 허락 맡은 거야?”
일학년이고 이학년이고 할 것 없이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우리를 잠시 가만히 지켜보셨다.
“어디서 하게.”
“저희, 방이 없어서, 아마 여기서 해야 할 것 같아요.”
“나 특강 끝나서 204호 빌 거야. 거기서 해.”
우리는 눈을 크게 떴다. 선생님은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우리는 동시에 감사합니다, 하고 허리를 굽히곤 일어섰다. 목소리에 갑작스레 화색이 돌았다. 각자 주섬주섬 자신의 소지품을 챙겼다. 나는 외투를 입었다. 선생님은 저 앞에서 걸어가셨고 우리는 병아리라도 된 듯 그 뒤를 따라갔다. 과연, 204호는 비어 있었다. 우리는 고개 숙여 감사인사를 했다.

 

J는 금방 대본을 뽑아왔다. 뛰어온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는 큰 강의실에 둘러앉았다. 일학년의 의견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가되, 대신 도저히 올리지 못할 것 같다 싶은 부분들은 이학년들이 메워 주기로 했다. 한 시간을 두고 학년별로 대본을 각자 수정한 후 나머지 한 시간을 이용하여 오늘 꼭 끝내야 할 분량을 메우기로 했다.
이학년들의 분위기는 좋았다. 작가고 부원이고 배우이고는 사실 상관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 대본을 회생시킬 수 있을까, 하고 다들 입을 모았다. 그다지 좋지 않은 의견이라도 전부 쏟아내었다. 그렇게 쏟아낸 의견 중에선 건질 것이 꽤 있었고, 한 사람의 의견에 다른 사람의 의견이 덧입혀지고, 반전하고, 거꾸로 보면서 대본에는 빨간 줄이 잔뜩 생겨났다. 장면들의 미시적인 대본들은 차치하고 전체적인 개연성부터가 문제였기 때문에 우리는 큰 갈래들을 잡았다. 일학년들도 저들끼리 의견을 내고 있었다. 평소엔 입을 닫고 있던 부원들도 모여 어떻게 수정할지를 고민했다.
“선배, 이제 합쳐야 할 것 같아요.”
시간을 보고 기장 S가 말했다. 우리는 몸을 돌려 의자를 일학년 쪽으로 향하게 했다. 나와 J가 차례대로 이학년이 수정한 부분을 읊었다. 장면전환 문제부터, 개연성과 타임루프의 강약조절 실패, 두 명의 인물이 오십 분의 연극을 끌어가는 부분까지 어떻게 해야 할지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쓰기 전에 뼈대를 잡는 느낌으로.
“신기하다.”
“뭐가?”
“사실 저희 맨 처음 회상 막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막막했었거든요. 그런데 선배들이 정리해 주시니까 1막부터 3막까지 하나로 합쳐지고, 매끄러워졌잖아요.”
우리는 해 봤잖아. 그렇게 말하는 대신 우리는 웃었다. 미시적인 대본의 대사와 애드리브를 배우장 G의 주도로 고치면서, 일학년들은 그걸 메모했다. 한 시간 동안 아홉 막 중 네 막 가량이 수정되었다. 상당히 빠른 진척이었고, 이학년들은 희망을 보았다. 이대로 대본 쓰면 내일 안에 완성하고 빠르게 연습 들어갈 수 있겠는데.

 

*

 

우리는 금요일 점심시간에 다시 모였고, 어제 오지 않은 일학년들까지 전부 합류하여 대본 작업에 착수했다. 일학년 부기장 C에게 전날 기숙사 자율학습 시간에 정리한 이학년 회의록을 건네주었고, 배우장 G와 나는 하필 점심시간에 잡혀 버린 미술사 수업을 듣고서 바로 동아리실로 향했다.
희망은 희망일 뿐이었다. 일학년들은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둘로 나뉘어 대본을 쓰고 있었고, 아이디어는 나올 생각을 않았다. 전날의 생기와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고 아주 느리게 대본이 수정되고 있었다.
“왜 나눠서 써?”
내가 물었다. 머리가 아파왔다.
“아, 놀리는 인력 없어야 한다고 해서요….”
“다 같이 모여서 해야지. 저번에도 나눠서 하다가 아무것도 못 했잖아.”
다시 어둠이 찾아오기 시작하는 것만 같았다. 아득해지는 정신과 책상을 함께 붙잡았다. 배에 힘을 주고 목소리 크기를 키웠다.
“얘들아, 다 모여서 쓰자. 얼마나 썼어?”
누군가가 내게 구글 드라이브 링크를 공유해 주었고, 이학년들은 일학년들이 해산하고 난 밤에 구현해 둔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심각한데.”
우리는 말을 아꼈다. 아꼈다기보다는, 할 수 없었다는 말이 조금 더 어울렸다.
“우리 원래 이렇게 하기로 했었어?”
나를 포함한 두엇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얘기해 준 대사고 행동지문이고 반도 안 들어간 거 맞지.”
“반이 뭐야.”
그 와중에도 일학년들은 저들끼리 엔딩을 어떻게 낼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우리는 일학년들을 한 번 넘겨보고 어쩌지, 라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구현된 것은 극히 적었다. 마지막 한 시간에 우리가 함께 짠 애드리브들까지도 사라져 있었다. 어쩌지. 어쩌지.
“그래서 엔딩은 어떻게 할 거야? 아니, 뭐가 문제야?”
일학년들은 엔딩의 분기점에서 팽팽하게 맞서는 중이었다.
“두 개가 문제 아냐? 여자가 기억을 찾는가, 찾지 않는가? 다른 거 얘기하지 말고 일단 하나로 의견 모아. 너희 모일 수 있는 시간 네 시간도 안 남았어.”
후자를 택한 일학년들은 남자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 또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학년들은 그걸 가만히 듣고 있었다. 점점 산으로 가기 시작했다. 남자는 경찰서에서 막무가내로 뛰쳐나가고, 차에 치여 기억을 잃고, 이미 기억을 잃은 여자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아, 머리가 아파왔다. 일학년의 연극이라고는 했지만, 이학년의 책임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학년은 또다시 비상회의에 들어갔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과외를 일요일로 미루고 야간자율학습을 또 재꼈다. 이제 상습범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학년들을 놓아둘 수가 없었다. 꼰대라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물가에 내려놓은 어린아이들 같았다.
동아리실에 도착한 직후 신음 비슷한 탄식을 흘렸다. 도착한 이학년들보다 기다리는 일학년들의 수가 더 적었다. 처음에는 황당했다. 그 다음에는 어이가 없었고, 그 후에는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이학년들은 뒷자리에 앉았고, 일학년들은 앞자리에 앉았다. 화를 내고 싶었는데 온 후배들의 잘못이 아니라 오지 않은 후배들의 잘못이었고, 사실 지금까지 이만큼 온 건 그 자리에 있는 일학년들이 없었다면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그만두어야 할 테였으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얘들아, 봐.”
점심과 5교시를 할애해서, 6막까지 얼추 완성된 상태였다. 심각하게 무언가를 생각하던 J가 입을 열었다.
“일단……, 봐. 우리도 이제 수능 준비해야 하는데 너희 도와주러 나왔지. 그런데 지금 일 학년들 나온 애들 거의 없지. 나오는 애들만 나왔잖아. 이렇게 해서 연극 대본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는 사실 아니라고 보거든.”
일학년들은 잠잠했다. J가 말을 이었다.
“이틀 안에 대본 쓰겠다고 해서 우리가 야자 빼고 나왔어. 이학년들끼리 이야기했을 때 어제 분위기였다면 뭔가 나올 것 같았거든? 다들 부풀어서 갔어. 그래도 뭔가 되긴 하겠다, 하고. 그런데 오늘 점심시간에 가서 봤을 때는 그게 아예 없었어. 왜 그랬을까?”
J가 말을 멈췄다. 적막만이 남아있었다. 내가 말을 시작했다.
“우리는 사실, 화가 나.”
물꼬를 트자 정리되지 않았던 생각들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남아서 오는 게 아니잖아, 이학년이. 너희들 점심시간에 대본 쓴 거 보고 이건 아니다 싶었거든. 우리가 어제 이야기했던 거 반도 안 들어갔잖아. 다 어디로 갔어? 아니. 다 제치고. 연극, 하고 싶긴 한 거야?”
“야, 진정하고, 감정적으로 가지 마.”
J가 나를 말렸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너희들끼리 어떻게 해야 할지 좀 이야기를 해 보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우리 시간 없잖아. 지금부터 연기 연습 시작해도 시간 모자랄 텐데.”

 

일학년들은 결국 재작년 연극 대본을 택했다. 일학년 중 누군가가 나오지 않은 부원들이 뭐라고 하면 어떻게 하냐는 우려를 표했으나, 참석하지 않은 건 자신의 발언권을 포기한 것으로 치자고 했다. 열심히 달려왔던 일학년도 지쳤고, 이학년도 지쳐 있었다. 여분의 대본이 있어 일학년들끼리 돌려 보며 리딩을 시작했다.
“아, 깜짝이야! 인형아, 내가 성격 나빠 보이는 아저씨는 건드리지 말자고 했잖아.”
부기장 C가 목소리를 한 톤 높여 이야기하기 시작한 순간 이학년들은 단번에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C에게 꽂혔다. 누구야? 누구야? 이학년들 사이가 웅성거렸다. C는 계속해서 미친 여자 배역의 대사를 쳤다.
“내가 안 건드렸어, 화 낼 거면 인형한테 화내라구!”
탄성이었다. 정말이지 배역에 딱 맞는 목소리 톤이었다. 여태 걱정했던 것이 조금은 사라지는 것도 같았다.

 

*

 

분명 토요일 아침 아홉 시 정각에 신강의동에서 모이기로 했었다. 그러나 출석률은 여전히 저조했고, 이학년은 또다시 마른세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주요 배역을 맡은 친구들이 와 있었고, 우리는 아쉬운 대로 그 애들이 맡은 배역이 자주 출연하는 부분을 연습하기로 했다. 아직 정해지지 않거나 오지 않은 친구의 배역은 이학년들이 대타를 섰다.
첫 번째 연습이 으레 그렇듯, 그리고 무대를 처음 올라가는 누구나 그렇듯, 연습은 더뎠다. 아침이었고, 연기를 처음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우리의 첫 연습이 생각났다. 비교하자면, 나쁘진 않았다. 어쨌든 작년의 첫 연습보다는 괜찮았다. 이학년은 무대 밖에서 전체 동선을 보았고, 일학년은 그 동선을 외우고 동작을 반복했다.
“S야, 거기선 좀 더 자신 있게 동작해도 될 거 같아. 동선만 다시 맞춰보자.”
“W, 목소리 안 들려! 웅얼거리지 말고.”
지적할 때마다 일학년들은 고개를 끄덕거렸고 더디지만 확실히 나아지고 있었다. 신강의동이 다섯 시에 문을 닫자, 우리는 여자기숙사 아래 주차장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연습을 계속했다. 발음과 연기 톤이 좋아지는 게 확연하게 보였다. 하루 내내 반절을 겨우 해냈다. 그것도 많이 한 것이었다.

 

“선배, 어디 가세요?”
밥을 먹고 과외에 가야 했다.
다음 날 오전의 성과 역시 나쁘지 않았다. 경찰 세 명의 배역을 정했고, 조금 동선이 복잡할 것 같은 부분들의 동선을 깔끔하게 정했고, 된장남 배역을 맡은 일학년 배우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부분들을 고쳤다. 대역이 많았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모양새는 갖추어져가고 있었다. 이 주일 만에 전부 끝낼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조금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다른 부원들은 전부 급식실로 향했고, 나는 시간이 조금 촉박할 것 같아 앞 슈퍼에서 간단하게 라면으로 때우고 가려던 참이었다. 책상 위에는 풀기 위해 가져왔다가 두 문제밖에 건드리지 못한 문제집이 놓여 있었다. 가방에 문제집을 집어넣고 있었는데 기장 S가 곁으로 다가왔다.
“나 과외. 끝나고 바로 올 거야. 왜?”
“아, 아니에요.”
“왜, 왜.”
“아니, 혹시 시간 있으시면 저 연기 연습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 해서요.”
나는 챙겼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근데 선배 밥 먹어야 하잖아요.”
“괜찮아. 어차피 거기서 주스 먹으면 배 차.”
그렇게 말하고선 책상에 엉덩이를 걸쳐 앉았다.
“봐봐. 해 보자. 삼십 분 정도는 봐줄 수 있어.”
상대역 파트를 읽어 주기만 하고 S의 동선과 연기를 유심히 보았다. S가 주가 되는 1막은 거의 완벽한 동선을 갖추고 있었다. 과외에 가기 직전, 나는 박수를 쳤다.

 

과외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학년들은 박스를 모으러 가겠다고 단톡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일학년 M에게 어디로 가야 하냐고 전화가 왔고 신강의동에 들어가 있으라고 일렀다. 어차피 과외는 끝났고, 선생님은 가셨고, 신강의동으로 곧바로 갈 계획이었다.
I를 만난 건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도중이었다. 나는 손을 들어 인사를 했고, I는 잠시 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심각한 얘긴데, 들을래?”
“뭔데, 또.”
“계속 안 나오는 애 있잖아.”
“어. 걔 오늘 나왔어?”
“아니, 근데 내가 운동장 쪽 가다가 걔를 만났거든. 놀고 있더라.”
헛웃음이 터졌다. 모두가 열심히 박스를 줍고 연극 연습을 하고 주말 시간을 전부 빼어 준비하는 통에 놀고 있다니.
“어.”
“붙잡고 물어봤어, 왜 안 나오냐고. 걔가 자기가 못 나온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
“기장이랑 마찰?”
“응, 그것 때문에.”
예상했던 게 맞아떨어졌다. 대본 작성으로 인한 일학년 간의 불화는 생각보다 골이 깊어져 있었고, 연극 연습을 같이 하는 부원들끼리는 이야기할 일도 많은데다가 이학년이 중간에 개입해 중재한 탓에 많이 풀어졌으나 아예 나오지 않은 친구는 풀 요량이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안 나오겠대?”
“어. 귀신의 집은 도와주고 싶은데 자기가 연극에 다시 껴 봤자 자기 의견은 다 무시당할 것 같다고.”

 

이학년들이 박스를 들고 신강의동에 도착했다. 우리는 박스를 조금씩 나누어 들어 창고에 옮겼다. 그러나 박스의 양은 턱없이 부족했다. 신강의동의 벽은 통유리인데, 그걸 일층과 이층 전체에 붙여 새어나오지 않게 하려면 창고가 미어터질 정도로 모아야 했다. 그런데 고작 삼분의 이가 조금 넘을까 말까라니.
결론은 이학년이 박스를 줍자, 였다. 그러나 일학년만 놓아둘 수는 없으니 나와 H, 이렇게 작가 둘이 올라가 일학년들의 연극 연습을 지도하고 나머지 이학년은 전부 쓰레기장에 가서 박스를 모아두자고. 나는 일학년들이 있는 방으로 올라갔고 나머지 이학년은 나와 갈라져 다시 박스를 주우러 향했다.

 

*

 

문자가 온 것은 6교시 쉬는 시간이었다.
박스가 관련된 급하고 중요한 일이니 저녁시간에 모두 모여 달라는 2학년 기장 Y의 말에 온갖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누수가 되었나? 아니면 박스가 너무 부족한가? 사야 하나? 아니면 이사장님이 또 박스를 가지고 뭐라고 하셨나? 할 수 있는 생각은 다 해 봤지만 나 혼자 궁리한다고 해서 될 일은 하나도 없었다. 저녁시간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그리고 귀를 의심했다. 일학년들에겐 전날 박스를 많이 주워 간 것 때문에 폐지 줍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클레임을 걸었다, 그러나 잘 해결 되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알고 있기만 해라, 그리고 이 일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해라, 거기까지만 이야기했다.
“경찰?”
“그러게. 민원이 들어와서 그렇게 됐네.”
Y가 굳은 표정으로 웃었다.
“그래서 박스 주우러 간 이학년 명단을 넘겨야 할 것 같아. 사실 일학년들이 같이 가긴 했는데, 그래도 일학년들한텐 이렇게 심각한 거 얘기 안 하고 싶어서.”
우리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길바닥에 버려진 쓰레기를 주워간 것도 죄가 되는가? 누군가에게 소유권이 있는가? 여러 가지 감정이 한 번에 밀려왔다가 사라졌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우리가 잘못한 거냐는 물음을 수십 번 하고, 또다시 침묵했다. Y가 해산이라고 외쳤을 때에도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연습은 재개되었다. 우리는 신강의동 1층의 공연장을 사용했다. 공연장은 우리가 축제 날 공연을 올릴 대강당과 비교하면 비좁았고, 동선을 제대로 맞추려면 무대뿐 아니라 무대 아래의 공간까지 같이 사용해야 했지만, 이층부터 수능이 며칠 남지 않은 선배님들을 생각하면 이것이 최선이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이어지는 연습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이학년들은 돌아가면서 일학년들에게 조언을 했다. 이학년 전체가 야간자율학습을 빠질 만큼 시간이 남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와 J는 특강과 과외가 없는 이상 항상 나왔고, 나머지 부원들은 짬짬이 하루에 한 번씩은 와서 이십 분에서 삼십 분 가량 보고 조언을 하고 갔다. 점점 탄탄해지는 연기가 보였다. S는 어떻게든 연기를 소화하고 싶었는지 대본에 톤과 높낮이를 표시했다. 처음에는 삐걱거렸던 N과 W의 커플 연기도 꽤 물이 올랐다. 경찰 셋 중 한 명은 계속 나오지 않았지만 둘의 호흡이 굉장히 좋았고, 미친 여자를 연기하는 C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나오지 않은 경찰 배역을 맡은 U가 자신은 못 하겠다고 선포한 것은 화요일이었다. 나는 과외에 가야 했고, 1교시와 2교시를 전부 과외에 쏟은 채 3교시에 신강의동으로 향했다. 분위기가 싸했다. 모두가 입을 닫고 있었고, N이 나를 데리고 뒤쪽으로 가서 심각한 표정으로 소곤거렸다.
“선배, U 걔 사고 쳤어요.”
“무슨 일이길래.”
“U가 계속 못하겠다고 해서 그럼 네 배역은 어떻게 할 거냐고 D가 좀 세게 몰아붙였거든요. 못하겠다고 하면 다냐고, 지금 펑크 난 건 플랜을 만들든 뭘 하든 하고 가야 할 거 아니냐고.”
“어.”
“근데 U가, 아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씨발 좆같네! 하고 나갔어요.”
나는 관자놀이를 습관적으로 눌렀다.
“근데 거기 J선배 계셨단 말이에요…….”
“J 있었는데 그렇게 얘기하고 나간 거야?”
총체적 난국이었다.
배우 한 명의 자리가 펑크가 났고, 더 이상 들어갈 수 있는 일학년은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나나 J나 거기 들어가 연기를 할 수도 없는 스케줄이었다. 연기를 하겠다는 말은 그 날부터의 야간자율학습을 전부 빼고 연기에 집중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는데, 그럴 수 있는 시간도 없었고, 배역 자체가 후반부의 흐름을 잡아가는 무게추 같은 역할이었기 때문에 가볍게 그래, 그럼 내가 할게, 라고 할 수 있는 실정도 아니었다.
J는 이학년 부기장 E에게 연락을 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에 짓눌렸다.
E는 해 줄 수 있다고 했다. 정확히는 조금 더 생각해보고 연락을 준다고 했지만, 결국에는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N이 위태로워 보였다.
그 애는 U에 대해 말할 때부터 날카로워져 있었는데, 결국 자신의 화를 참지 못했는지 연극 연습 중 뛰어다니는 부원들에게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곧바로 미안해, 사과를 하긴 했지만 영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그 애는 맨 마지막으로 연습실에서 나왔다. 나는 N을 기다렸다가 다가가서 등을 도닥였다.
“괜찮아?”
“선배, 트랙 돌 수 있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삼십 분 안 쉰다고 해서 죽진 않으니까.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우리는 운동장으로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위의 공기는 가볍지 않았다.
“기숙사 통금 아홉 시 오십 분이라서 그때까진 가야 해.”
“아, 알아요.”
N이 입을 열었다. 주로 힘들다는 이야기를 했다. 연극 자체는 힘들지 않은데, 하는 친구들만 하는 걸 보는 것도 힘들고, 그러다 보면 안 나오는 친구들이 미워지기 시작하고, 그걸 그 친구들한테 풀어야 하는데 나오질 않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그저 트랙을 빙빙 돌면서 들어 주기만 했다. N은 배우였고, 기타 기장이나 부기장 같은 보직은 맡고 있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스트레스가 상당해 보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N은 모든 활동에 성실하게 임했다. 학기초 쪽대본을 읽으면서 조별로 짧은 연극을 해 볼 때도 그랬고, 대본을 쓸 때도 그랬고, 한 번도 연습에 불참한 적 또한 없었다. 화가 나요. 나도 그래. 무책임해요. 맞아. 이 화를 U한테 풀어야 하는데 애꿎은 애들한테 풀었잖아요. 괜찮아. 걔네도 이해할 거야.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잘하고 있어.”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게 다였다.

 

*

 

공연 막바지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축제가 사흘 남은 시점이었다. S가 수위 아저씨께 허락을 받아 대강당을 쓸 수 있었다. 일학년들은 소품을 준비했고, 의자와 가구들을 이용해서 필요한 큰 인테리어들을 만들었다.
밤공기가 찼다. 오늘도 어김없이 특강인 친구들은 있었고, 일학년들을 대신해서 내가 대타를 뛰었다. 작년 뮤지컬 이후 대강당 단상에 올라가는 건 간만이었다. 대강당에서 동선을 맞추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마 이후로는 계속 대강당에서 동선을 맞추게 될 것이었다. 일교시부터 낭비되는 시간 없이 연습을 시작했다.
일학년들은 또다시 무대 위에서 빛났다. 매일이 힘들고 지치는 일의 연속이었고 연습이 끝나면 나는 무대에 서는 것도 아니고 일개 작가로서 조언을 해 주는 것밖에 없었는데도 침대에 눕자마자 잠을 잘 정도로 피곤했으나 일학년들이 열심히, 잘 해주는 게 너무 고마워서 조금 더 나은 무대를 올릴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서 도왔다.

 

“선배들은 안 올라오세요?”
N이 물었다.
“원래 이학년은 안 올라가는데.”
“그래도 올라오시면 좋겠는데…….”
못내 아쉽다는 투였다. 때마침 이학년 기장 Y가 들어왔다. 나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Y, 이학년 이번 무대에 올라갈 생각 없어?”
“왜?”
“일학년이 올라와달라고 해서.”
“그래, 그럼.”
이학년의 대부분은 처음에 고개를 내저었다. 작년의 축제와 올해의 오리엔테이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거였다. 그러나 결국에는 무대에 올라가기로 했다. Y는 사람을 이끄는 매력이 있다. 내가 누구를 봐서 해 주는 거야, 라는 말에서 누구를 맡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건 굉장히 큰 힘이고 이번에도 역시 위력을 발휘했다.
우리가 출연하는 분량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일학년 연극이니 당연했다. 마지막 커튼콜에 올라가 업다운 펑크를 두 벌스 정도 추고 급하게 뛰어 내려가기로 했다. 우리는 춤을 배웠고 단숨에 이학년이 일학년에게 조언하던 구도에서 일학년이 이학년을 가르치는 구도로 역전되었다. 한 번의 연습을 할 때마다 이학년들은 몰려오고 흩어지고 주저앉기 일쑤였고 다시 연습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한 명이 꼭 틀렸고 우리는 그럴 때마다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다들 맑았다.

 

바깥에선 불꽃놀이가 한창이었다. 삼 학년 선배들이 마지막 야자를 끝내고 축하하는 의미에서 하는 학교의 전통 같은 것이었다. 색색깔의 불꽃들이 하늘에 터지고 있었다. 작년에는 볼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연극부 연습이 너무 늦게 끝나서 불꽃놀이가 끝나고 급하게 기숙사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학년들도 처음 보는 불꽃놀이였겠지만, 연극부 이학년들 또한 대부분 불꽃놀이를 처음 봤다. 다들 입을 벌리고 하늘을 바라봤다.
“이제는 너희 차례야!”
선배가 외쳤다. 우리는 하늘에 별자리처럼 터지는 불꽃들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목소리가 난 곳에서는 선배들이 불꽃을 들고 있었다. 한 교실에서는 삼 학년 선배들 전부가 손에 작은 불꽃을 쥐고 흔들었다. 갑자기 울음이 날 것만 같았다. 나는 이제 고등학교 삼 학년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연극부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

 

정말 무엇을 하고 있는가.
수능은 연기되었고, 우리는 귀신의 집 준비를 하느라 박스로 신강의동의 빛이란 빛은 전부 막아둔 채로 일 주일을 보냈다. 일학년들은 수능 전날 만반의 준비를 했으나 일주일이 밀린 탓에 전처럼 모든 시간을 투자해서 연습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일주일은 조용히 지나갔고, 또다시 영원히 가지 않을 것 같았던 수능 전날이 다시 왔고, 우리 학교는 수능 시험장으로 지정되어 2교시까지밖에 수업을 진행하지 않았다.
연극부는 열한시에 모였다. 박스와 테이프와 가위를 손에 쥐고 노동을 했다. 박스가 어느 정도 모였고 귀신의 집을 할 만큼은 되었다는 판단을 했다. 그러나 일주일간 떨어진 부분이 꽤 많아 보수를 해야 했다. 신강의동의 일층 계단참과 일층 뒤편 통유리가 전부 떨어져 나가 있었다. 이 년째 하는 일이고, 그간 일 년의 공백이 있었지만 사흘을 고생한 경험은 쉽게 몸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지 박스를 붙이는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삼 층에서 암막커튼을 내렸다. 꽤 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층고가 족히 오 미터는 되어 보이는 곳에 박스를 붙여 빛을 막았다. 이학년 연극부원들은 친구를 한둘씩은 데리고 왔고, 그래야 시간 내에 끝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수능 당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로소 고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섯 시에 신강의동으로 가야만 했다. 울적했지만 단순노동은 어느 정도의 우울을 잊게 해 준다. 몸을 생각 없이 쓰다 보면 많은 게 잊힌다. 그렇게 잊어버린 중요한 게 몇 개나 될까. 그런 생각들도 테이프와 신문지와 함께 던전을 창조하는 기분으로 가벽을 세우다 보면 이내 사라져 있었다.

 

축제 당일은 어쨌든 왔다. 제발 빨리 오게 해 달라고 빌었지만 일 주일이나 미뤄져 죽을 것 같았던 시간들이 종식되는 순간이었다.
조례를 빠지고 신강의동에서 내내 보수를 했다. 아침 빛과 저녁 빛이 달라서 전날 보이지 않던 곳에서 빛이 계속 새어들어왔다. 이층에는 빛이 새는 곳이 있었고 거길 신문지로 메워야 했다. 작년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어제 부순 난방기의 플라스틱 배출구를 우리는 지뢰라고 불렀다. 그걸 밟는 순간 청량한 소리를 내며 부서지는데, 줄곧 우리는 지뢰를 밟았고 번번히 난방기 안에 허벅지까지 빠지기 일쑤였다.
J가 일 층 보수를 해 달라고 부탁해서 W와 함께 내려갔고, 일층 뒤편을 전부 보수했다. 사람의 창의력은 뭔가 부족할 때 생기는 게 틀림없다. 처음에 서로의 허리를 잡아 주며 천장을 보수하던 우리는 이내 테이블 하나에 의자 하나를 올려서 보다 편하게 보수할 수 있게 되었다. 대개의 경우 내가 올라가려고 했는데, 그건 W가 다치면 일차적으로는 선배인 내 책임이고 이차적으로는 연극부 전체의 책임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연극까지는 채 삼십 분도 남지 않았다. N의 메이크업을 맡아 해 주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다급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정문으로 뛰어갔고 수위 아저씨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여기 왜 안 열려!”
“아, 선생님, 저희 오늘 귀신의 집요!”
“으엥, 오늘 축제여?”
“네, 오늘 밤까지만 쓸게요, 선생님!”
떨어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했을까. 불을 껐을 때 모든 틈에서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한 건 연극이 끝난, 조금 더 나중의 일이었다.

 

일학년들은 정신없이 준비를 했다. 이학년들이 귀신의 집을 보수하는 동안 배우들은 다시 한 번 최종 리허설을 했다. 우리는 일학년들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나름대로 노력했고, 가는 내내 일학년들은 추위인지 긴장인지 모를 무언가에 떨었다. 작가들에게 올라가라고 말해 두고, 조명 담당 작가에게 길을 안내해주고 나니 일학년들은 파이팅 할 새도 없이 무대 뒤에서 핀마이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우리는 커튼콜에 무대 위로 뛰어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가장 앞자리의 복도 쪽으로 붙어 연극을 보기 시작했다. 기장과 부기장이 바람잡이를 하는 동안 스태프들이 모든 소품들을 준비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핀마이크를 차고 말하면 안 되는 걸 몰랐는지 이야기 소리가 그대로 들려오고 있었다. 이학년들은 무대 아래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시 무대를 바라보았다. 또다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무대로 시선을 옮겼다.
막이 올랐다. 그 후부터 모두가 적막이었고, 무대 위의 배우들만 있었다. 배우들이 움직이는 순간마다 우리가 함께 수십 번이나 연습했던 광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아니, 배우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무대 위의 장면과 무대 아래의 장면이 동시에 빛나는 게 보였다. 배우들과, 작가들과, 스태프들이었다. 그리고 이학년들이었다. 모두가 같은 숨을 깊게 들이켜고 있었다.

 
* 심규선 노래제목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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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흔

 

빛이 꼭 은신한 뱀 같았다. 며칠 전 촬영의 대가로 얻은 손목의 통증과 불면이 두통을 몰고 왔으나, 무영이 앓는 환시를 전부 설명할 수는 없었다. 출사 날마다 빛은 사정거리 내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독사 꼴을 했다.

천변에서의 촬영은 지난해 겨울 이후로 처음이었다. 무영이 눈가를 가볍게 찌푸렸다. 갈색 홍채가 투명하게 비칠 만큼 날이 좋았다. 무영은 물에 반사되는 빛이 일렁이며 그림자를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길게 응시했다. 강물 위에서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오리배를 타고 있었다. 볕을 받은 빨간 줄이 무영의 손목을 한 바퀴 휘감아 마치 실팔찌처럼 보였다.

아픔을 몇 번이나 더 찍을 수 있을지를 무영은 흐릿하게 가늠했다. 한 번. 운이 좋다면 두 번까지. 무리해서 찍으면 손목이 온전치 못하리라는 걸 무영은 알았다. 사실 지금 잘린다 한들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현상흔이 깊었다. 무영이 한숨을 쉬자 빛을 가려낸 손바닥 아래로 피사체와 피사체의 보호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앳된 여자아이와 한 쌍의 부부였다.

“안녕하세요.”

무영이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목에 걸린 카메라를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여자가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무영은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리본을 매단 여자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영의 볼 양쪽에 의례적인 웃음으로 만들어진 보조개가 움푹 팼다.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는 자신의 상반신만한 코커스파니엘을 품에 안고 있었다.

“최대한 즐거운 감정을 담아 주세요. 천변에서 강아지랑 놀게 둘 거예요.”

“강아지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여자가 잠시 여자아이 쪽을 바라보다가 길고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를 침묵은 매미 소리에 묻혔다. 여자는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따가운 볕 때문일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지는 알 수 없었다. 갈색 아이브로우로 진하게 그린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어느 쪽이든 괜찮아요.”

사이를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은 일처리에 능숙한 십일년차 사진사였다. 무영의 손이 카메라 전체를 훑고 지나가는 동안 여자는 여자아이의 갈색 머리를 다시 매만졌다. 마지막이라고 신경 쓴 흔적이 역력했다. 남자는 자신의 딸아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남자가 딸아이의 손에 빨간 막대사탕을 쥐어주고 나서야 무영에게 눈짓을 보냈다. 선배의 목소리가 언뜻 스치는 것 같았다. 날이 좋은 날에는 노출값을 줄여야지. 감정을 놓치면 안 돼. 무영은 조리개를 조금 더 닫고 테스트 컷을 찍었다.

무영은 시시때때로 뒤바뀌는 초점을 좇았다. 피사체는 강아지를 따라 달렸다. 점박이는 샛초록색의 여름 잔디로 뛰어들었다. 피사체가 강아지를 겨우 따라잡고서 품에 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웃음소리에 묻혔다. 강아지의 꼬리가 쉴 틈 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무영은 여자아이의 가장 즐거운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셔터에 손을 올렸다. 무영의 미간에 얼핏 주름이 잡혔다가 풀어졌다. 여자아이가 이를 내보이며 환하게 웃다가 갑작스럽게 강아지와 함께 사라졌다. 강아지와 피사체의 발자국만이 남은 잔디엔 빛만 쏟아졌다. 무영은 무심하게 잔디밭을 힐끔 곁눈질하고 카메라 덮개를 닫았다.

“감사합니다.”

“사진은 현상하는 대로 보내드릴게요.”

피사체의 즐거움은 제대로 찍힌 것 같아요. 아마도요. 무영은 눈을 감았다. A컷으로 나온 거 확인하면 그만큼 더 입금해 드릴게요. 여자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이 뭉텅했다. 손목에 나 있던 빨간 줄과 같은 현상흔이 눈 위에 선명히 새겨졌다. 피부가 선분 정중앙부터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

 

박제된 천재를 아시오?

무영은 촬영 후 현상을 마치고 비로소 통증이 몸을 덮칠 때마다 이상의 구절을 외웠다. 모든 사람은 천재이기에 박제되기를 바라는 걸까, 아니면 박제되어서라도 천재로 기억되기를 원하는 걸까. 무영은 통증을 무시하지 못하고 몸을 뒤척였다. 한낮에 찍은 사진을 자정에 현상했다. 눈썹을 지나 눈꺼풀을 가로지른 새빨간 줄은 선명히 무영의 눈을 옥죄었다. 박제된 천재를 아시오. 눈 안쪽이 불이라도 붙은 듯 뜨거웠다.

선분은 유한하지만 직선은 무한하대. 이무영. 너는 선분이 되고 싶어, 직선이 되고 싶어? 선배가 물었던 질문에 무영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던 적이 있었다. 직선이요. 선배는 네 감정이 전부 죽은 순간에야 직선이 어울리기 시작할 거라고 이야기하면서 카메라 렌즈를 닦았다. 선배의 시선이 흘긋 무영의 첫 번째 선분에 머물렀던 것도 같았다. 직선, 선분, 직선. 그러고 보니 선배도 직선으로 죽었었지.

 

잠시 현상흔의 통증이 잦아들어 가까스로 잠들 수 있었던 사이, 무영은 죽은 여동생을 만났다. 여동생은 사진에 박제되기 삼 년 전처럼 여전히 검은 머리카락이 길었고, 내려간 눈매가 깊었으며, 한여름 날씨에도 얇은 면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여동생은 평소처럼 무영에게서 초콜릿을 빼앗아 가고, 무영은 그걸 쫓아간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직감한다. 꿈이구나.

여동생은 무영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요구했다. 자신의 죽음만큼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맡기고 싶다고 했다. 무영은 거절하려고 했다. 그러나 악몽이 늘 그렇듯, 곧 무영의 고개가 멋대로 끄덕여졌다. 여동생이 햇살 아래 선다. 거기에서 찍을 거야? 무영의 입이 위아래로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것만 같은 목소리가 성대를 울리며 흘러나왔다. 안다. 이것은 마리오네뜨 인형극이다. 나는 목각인형이고, 연극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된다.

공연은 어느덧 막바지로 치달았다. 무영은 초승달 아래에서 자신을 보고 환하게 웃는 여동생을 렌즈에 가득 담았다. 오늘 초승달인데. 보름달 될 때까지 기다렸다 찍는 건 어때. 여동생은 잔잔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이 가장 행복해. 오늘이 아니면 나, 죽지 못할 것 같아. 무영은 가지 말라는 말 한 마디조차 하지 못하고 셔터를 눌렀다. 피날레. 이건 단지 한 편의 연극일 뿐이다. 모두가 인형일 뿐이다. 나조차도.

 

무영이 잠에서 깨어난 건 햇빛이 방 안쪽까지 길게 침범한 후였다. 또다시 같은 꿈이다. 무영은 눈두덩을 아무렇게나 눌렀다. 관자놀이가 아파왔다. 그러나 반복은 모든 일에 대하여 사람을 무뎌지게 한다. 익숙해지면 평상시로 돌아오기 위해 추슬러야 하는 시간과 정신력을 아끼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다. 이걸로 일흔다섯 번. 아니, 여섯 번인가. 아무렴 어때.

무영은 선배가 줄곧 말해왔던 직선과 선분에 대한 논증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꿈을 떨쳐내기 위해서라도 의식적으로 다른 행동을 해야 했다.

무영은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현상흔이 확연히 직선에 가까워졌다. 내가 아픔을 마지막으로 찍은 게 언제였더라. 이렇게까지 깊어질 정도로 감정이 격했던 피사체가 있었던가. 무영은 천번에서 즐거움을 찍은 대가로 생긴 눈의 현상흔을 매만졌다. 무명의 등과 배에는 무수히 많은 점이 별자리처럼 수놓아져 있었다. 허벅지에는 가늘고 일정한 원이 자리를 잡았다.

무영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옷걸이에 걸린 모자를 낚아채듯 눌러썼다. 현상통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지만 현상한 사진을 보내야 하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제 박제한 여자아이의 부모는 아마 사진이 도착하는 즉시 다른 사진사를 찾아가 자신들 또한 자신들의 딸처럼 박제해 달라고 할 것이다.

 

“아저씨.”

가느다란 바람 소리에 가까운 소음이었다. 무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를 보았다. 가느다란 다리로 간신히 땅을 지탱하고 서 있는 소녀다. 무영은 몸을 완전히 돌려 소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소녀는 마른 소리를 내었다. 나? 무영은 소리 없이 입을 작게 벌리고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진다. 비가 올 것만 같다. 바람이 윙윙거리며 세차게 불기 시작했다. 몸 이곳저곳에 새겨진 현상흔들이 각자 벌어지는 느낌이 났다.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자꾸만 휘청거리려고 했다. 그러나 넘어지는 대신 소녀의 가느다란 머리카락만 흔들렸다. 무영은 짙고 검은 눈썹만 살짝 찡그릴 뿐이었다.

“나는 죽고 싶지 않은데요.”

소녀는 입을 몇 번 더 뻐끔거렸다.

“갇혔어요, 저.”

무영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사진 찍는 분이시잖아요.”

“내가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렇게 말하며 무영은 모자를 더 푹 눌러썼다. 사진사라는 걸 들키기 싫어 카메라도 들고 나오지 않았고 현상된 필름은 이미 우체국에 맡긴 지 오래였다. 그런데 어떻게? 소녀의 까만 두 눈이 채 가리지 못한 손목의 현상흔에 머물렀다. 무영은 의식적으로 손목을 가렸다.

“도와주세요.”

“도와줄 방법도 없고.”

“사진을 찍는 방법을 배우면, 죽지 않아도 되잖아요.”

소녀의 목소리가 불규칙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겨울밤 미처 떨어지지 못한 낙엽 같기도 했는데 건드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만 같아 무영은 말을 평소보다 신중하게 골라야만 했다.

“어……, 꼬마야.”

“체이예요. 이체이.”

“그래, 체이야.”

“아저씨. 급해요.”

무영이 한숨을 내쉬고 한동안 둘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체이는 무영의 무감하고 곤란해 보이는 눈을 들여다보았고, 무영은 체이의 목소리를 한참이나 곱씹었다. 시선이 아무리 얽혀들어도 생각은 어긋났다. 무영이 한 발자국 물러나자 체이가 침을 삼키고 입술을 물었다. 목의 얇은 살갗 뒤로 울대가 들썩이는 게 보였다. 현상흔이 무심하게 아파와 무영이 눈두덩에 손을 올리자 비가 갑작스레 쏟아졌다. 빗방울이 무영과 체이의 주위를 사정없이 난타했다. 폭우였다. 소리가 크게 확대되어 들렸다. 비의 마찰음, 번개와 곧 뒤따르는 천둥, 그리고 앞에 서 있는 체이의 숨소리까지.

 

무영은 체이에게 수건을 던지듯 건넸다. 견주자면, 물에 빠진 생쥐가 조금 더 나을 것도 같았다. 체이는 수건을 가까스로 그러쥐고 당장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닦았다. 무영은 체이의 앞에 여동생이 즐겨 입던 프린팅 티셔츠와 청바지를 두었다. 체이는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욕실로 들어갔다.

문 잠기는 소리와 함께 무영은 미끄러지듯 벽에 기대어 앉았다. 얼굴을 몇 번이고 문질러 마른세수를 해도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진을 알려달라니. 그것은 곧 지금껏 맺었던 관계들로부터 모조리 고립되겠다는 것과도 같은 말이었다. 무영은 전화기에 저장된 연락처 목록을 생각하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어느 용감한 누가 자의로 카메라를 쥐는가. 샤워기에서 물이 떨어지는, 언젠가의 폭우와 닮은 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

 

장례는 생각보다 빠르고 간단하게 진행되었다. 사진 한 장 없이 고인의 이름 세 글자만 단출히 적혀 있었다. 무영은 식장 입구에서 나누어 주는 흰 가면을 썼다. 오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저 사진사의 장례식이라고 식장 앞에 붙여두기만 하면 되었다. 사진사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본 사람에겐 행운이 깃든다는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자연히 몰릴 것이었다.

무영은 선배가 죽어 곧 묻힐, 아니 잠길 곳을 바라보았다. 사각 연못의 가장자리에는 무영처럼 흰 가면을 쓴 사람들이 잔뜩 줄지어 섰고, 사람들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구름이 짙어 빛 한 점도 반사되지 않았다. 무영은 뱀이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사진사는 어디가 잘려서 죽었대?”

“목이라던데.”

“운 좋네.”

“안 아프게 단번에 간 거지.”

사진사가 아닌 사람들이 사진사의 사인을 어림했다.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이 타의로 인한 죽음에 대하여 가볍게 말하고 있었다. 마치 세계적인 모델이나 가수들의 사생활을 일회성 가십거리로 소비하듯. 구역질 나.

“꽤 유명한 사진사라던데. 왜 작년인가 세 살짜리 최연소 피사체 있잖아….”

“뉴스에도 나오지 않았어?”

“그 어린애만 떴지 사진사야 누가 신경이나 쓰게.”

무영은 어쩌면 곧 자신이 듣게 될지도 모르는 말들을 전부 넘겼다. 사진사는 천한 직업이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는 명언의 예외였다. 사진사는 스스로의 자살을 결심할 수 없다. 단지 다른 사람들이 의뢰하는 감정을 찍어야만 할 뿐이다. 그 감정에 할당되는 신체 일부가 잘렸을 때에야 비로소 죽을 수 있다. 어쩌면 불운한 영생이다. 카메라를 잡은 사람들의 끝은 언제나 같았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예상했다는 듯이 우비를 썼다.

무영은 선배의 관을 잡았다. 묵직했다. 아무런 무게도 없이 사라지는 여느 사람들과는 달랐다. 부패되더라도 남아있는 게 어디야. 선배는 드물게도 밝은 사진사였다. 무영은 연못에 연결된 다리를 따라 걸어 관을 옮기면서 선배가 했던 말들을 다시 떠올렸다. 선배는 후회 안 해요? 후회할 일은 아니지. 누군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날 기억할 텐데. 세상에선 우리더러 더러운 사람이라고 해요. 그러라고 해, 우리만 떳떳하고 행복하면 되는 거 아냐? 선배는 그렇게 말하곤 눈꼬리를 접어내려 환하게 웃었다. 그 때 눈을 감아 버려야 할 정도로 밝은 빛이 났었던 것도 같았다.

흰 가면을 쓴 사람들이 마치 유령처럼 다리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무영은 쥐었던 밧줄을 서서히 풀었다. 관이 천천히 내려갔다.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관이 물밑으로 잠기기 시작했다. 폭우가 수면을 때리는 소리만 끝없이 되돌아왔다. 무영이 밧줄을 완전히 놓자 사람들은 일제히 뒤로 돌아 가면을 벗어 관이 안치된 연못 속으로 던졌다. 가면이 물 위로 둥둥 떴다.

무영은 쉴 새 없이 내리는 폭우에 가면이 이쪽저쪽으로 기우는 연못을 오래 응시했다. 문득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다음 생이 있다면 선배는 거기서도 사진을 찍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물론 무영은 환생을 믿지 않았다.

 

*

 

“비가 그칠 때까지만이야.”

무영은 못을 박았다. 체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는 조금 큰 옷을 입은 채로 무영의 시선을 묵묵히 받아내기만 할 뿐이었다. 창밖으론 금방 그칠 것 같지도 않은 비가 퍼붓고 있었다. 안 그래도 무채색인 세상에 채도도 명도도 전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어쩌다 이 여자아이를 집까지 들이게 되었나.

“사진사에 대해 뭘 알고 온 건진 모르겠지만,”

무영이 운을 뗐다.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낭만적인 직업이 아니야.”

“…….”

“외롭고 아파. 당연히 몸도.”

“……."

“너는 감당 못 해.”

“제가 죽기를 바라세요?”

내내 함묵하던 체이의 젖은 목소리를 끝으로 방 안에 묵직한 침묵이 깔렸다. 무영은 미간을 좁혔다. 체이는 그 새까만 눈을 무영에게 꽂았다. 혼자의 적막과 사람이 함께 있을 때의 적막은 다르다는 걸 무영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가볍지 않은 공기의 무게에 무영은 내내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눈 한가운데의 불그스레한 줄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무영은 제 눈을 한 번 신경질적으로 쓸었다.

“자칫하다간 이렇게 된다고.”

“저를 찍었던 사진사는 배가 잘려서 죽었어요, 아저씨.”

무영은 한순간 숨을 들이켰다.

“그럼 넌 지금 여기 있으면 안 되잖아.”

그러나 무영의 앞에서 단단히 눈을 마주하는 이체이는 결코 허구의 인물이 아니었다. 뱀 따위의 환상도 아니었고, 온기와 목소리와 숨결을 가지고 살아 숨 쉬는 사람이었다.

“네.”

체이는 덤덤했다. 생각보다 간결하게 이체이가 답했다.

“갇혔다고 말했었잖아요.”

사진에. 체이는 입을 다물었다. 무영이 습관처럼 목덜미의 현상흔으로 손을 가져가 긁었다. 가능할 리 없었다. 사진에 찍힌 사람들은 죽는다. 그 감정을 지닌 채로. 벗어난 사람은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무영은 온통 혼란스러운 눈으로 체이를 응시했다. 체이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굽혀 티셔츠에 새겨진 순록 프린팅을 망가뜨렸다. 입술이 몇 번이고 떨리더니 단어를 씹어 뱉듯 숨을 토했다.

“그러니까 나한테 사진 알려줘요, 아저씨.”

 

*

 

신발을 벗자마자 무영은 작은방의 문고리를 돌렸다. 집이 아무리 잠잠해도 체이가 있는지를 확인하게 된 건 새로 들인 습관이었다. 첫 번째 피사체를 박제했던 날 밤 체이는 간신히 집으로 돌아와 소리도 없이 쓰러졌다. 현상흔의 여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이는 다음날 아침 무영을 깨우지도 않고 사라졌다. 카메라 가방은 사라져 있었다.

체이의 몸에는 점차 현상흔이 늘어갔다. 몇 년을 찍은 무영에 버금갈 정도는 아니었으나, 붉은 선이 다 아물기도 전에 더 깊은 선이 본래의 흉을 가로지르며, 때로는 덧입혀지듯 생겨났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크레바스 같기도 했고, 랑게르 열선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작위로 그어버린 흉터 같기도 했다. 금세 팔다리엔 낙인이 빼곡했다. 체이는 그대로 출사를 멈추지 않았다. 어쩌면 그건 이체이 혼자만의 자해 방식일지도 몰랐다.

이체이는 출사를 나갈 때면 꼭 흰 크롭티에 짧은 반바지를 입고 흰 샌들을 신고 나갔다. 현상흔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맨살을 드러내고, 이어폰을 귀에 박아넣고 걷는 체이는 묘하게 당당해 보이기도, 까칠해 보이기도 했다. 보통 한두시간이면 끝나는 촬영을 온종일 끌었다. 한 번의 인물 셔터 찬스를 위해서 하루를 모두 소비한다는 것을 무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체이는 어느 정도 출사에 병적으로 재능이 있었고 벌어오는 돈으로 월세의 반을 충당했다.

 

그 시각, 이체이는 한창 피사체 나나를 관찰하고 있는 중이었다. 귀에 꽂은 이어폰의 볼륨을 최대로 높인 채였다. 더 프리티 레크리스의 마이 메디슨이 쉴새없이 반복재생되었다. 테일러 맘슨의 전자음 같은 목소리가 체이의 고막을 때렸다.

나나는 뺨이 유난히 붉고 광대뼈 부근에 콕콕 박힌 주근깨가 사랑스러워 삐삐를 연상케 하는 열다섯 살짜리 여자아이였다. 체이는 다른 사진사들이 피사체라고 부르는 것들에게 전부 이름을 붙였다. 그것 때문일지, 현상하면 유난히 시안기가 많이 도는 독특한 느낌 때문일지는 모르겠지만 체이에게는 부유한 상류층으로부터의 러브콜이 끊이질 않았다. 세 번째 출사에서 팔과 허리에 현상흔을 달고 유명 정치가의 여덟 살배기 딸을 촬영한 사진이 의뢰인들의 마음에 썩 들어, 의뢰인 자신들의 위신도 세울 겸, 사진도 자랑할 겸하여 중앙지에 기고를 한 후부터였다. 무영의 신예 시절보다는 사정이 확실히 나았다.

정오가 막 지난 시간이었다. 길 한복판의 이체이는 한 손엔 테이크아웃 아메리카노를 들고, 다른 한 손은 목에 건 카메라 가방 위에 올린 채로 나나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곧 체이는 다 마시지도 않은 아메리카노를 바로 옆 쓰레기통에 넣고 나나에게 다가갔다. 대개 보호자는 천박한 사진사와 자신들이 의뢰한 피사체가 오랜 시간 함께 있는 걸 탐탁찮아 한다지만 체이는 나나의 부모 되는 사람들에게 둘만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했다. 나나의 부모는 흔쾌히 허락하고 예상 촬영 종료 시간을 물었다. 그 대신 메모리 원본을 달라고 했다. 체이는 고민 없이 동의했다.

나나는 몸을 한쪽으로 기울였다. 보도블록의 끄트머리 한 줄만 밟으며 걷다가 체이가 저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아채자 나나는 눈꼬리를 휘어 웃곤 몸을 홱 돌렸다. 체이는 나나의 뒤편으로 바짝 붙어 발걸음을 모방했다. 나나가 걸으면 체이도 걸었다. 나나가 뛰면 체이도 뛰었다. 나나의 발자국이 난 곳에 나이치곤 작은 발자국이 또다시 겹쳐졌다. 체이를 향해 혀를 길게 내민 나나가 몸을 다시 잽싸게 돌렸다. 지치지도 않는지 뛰려고 자세를 잡은 나나의 뒤통수에 체이가 아이스크림 먹을래? 하고 외친 건 한순간이었다. 나나가 갑자기 브레이크가 걸린 자전거처럼 멈춰섰다. 다시 체이가 내가 살게, 라고 소리질렀다.

 

“왜 죽게?”

차도 가까이의 벤치에 앉아 욱신거리는 발목을 흔들며 체이가 물었다.

“왜라뇨?”

나나가 조금 간격을 두고 헐떡이다가 반문했다. 방금 뛰어 뺨이 더욱 붉었다.

“네가 죽고 싶다고 해서 부모님이 사진사 불러준 거 아냐?”

“음. 반쯤은 맞는데요.”

나나가 마른 침을 삼키고 아이스크림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근데 꼭 죽고 싶어야 죽는 거예요?”

“대개 그렇지?”

“언니는 사진사라면서 요즘 트렌드도 몰라요?”

체이는 별다른 반응 없이 제 앞을 지나가는 차들만 눈에 담았다.

“트렌드?”

“공부 안 하죠?”

“재미없잖아. 아, 흘렸다.”

나나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재빨리 눈꼬리를 접어내려 웃어내었다. 체이는 별일 아니라는 것 같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이스크림의 바닐라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엄마아빠가 어릴 때부터 빨리 죽는 게 좋다고 했었어요.”

“왜?”

“그냥? 옛날에 진짜 어린 꼬마애 하나 찍혔을 때요. 실시간 검색어 일 위에 걔 이름 오르고 그랬잖아요.”

개미들이 벤치 다리를 타고 줄지어 오르는 걸 나나는 보았다. 체이가 흘린 아이스크림으로 천천히 몰려들고 있었다.

“좋아하죠, 명예. 엄마도, 아빠도. 어차피 죽을 거니까 말하는 건데, 나한테 관심 있는 사람은 언니가 처음이에요. 아니, 어, 나한테만.”

나나는 제 옆을 지나가는 개미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입은 여태 웃고 있는 채였다. 하나. 둘. 셋. 나나의 눈이 무감하게 빛났다. 아니 빛났나? 나나는 다시 아이스크림을 한 입 크게 베어물었다. 뺨이 볼록해졌다가 점차 완만해졌다.

“이렇게 무책임하게 기를 거면 낳지를 말지.”

나나가 푸념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심일지 아닐지, 체이는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나 넌 죽고 싶은 거야?”

“죽고 싶진 않은데. 근데 내가 안 죽고 싶다고 해서 안 죽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체이의 입술이 몇 번이고 달싹였다. 까만 눈이 나나의 이미 죽은 것 같은 눈과 맞물렸다. 나나는 될 대로 되라지, 식으로 개미들을 계속해서 눌러 죽였으나 개미들은 앞선 개미가 남긴 페로몬을 따라 계속해서 대열을 유지하고 있었다. 개미들. 개미들. 레밍들. 이체이는 개미들의 다리에서 레밍의 뜀박질을 본다. 이체이는 그게 싫어서 고개를 들었고, 하지만 팔차선 도로에서 지정 속도로 달리고 있는 차들도 레밍이었다.

 

나나는 레밍이었다. 나나의 부계 양육자는 중앙지검에서 일하는 성공한 레밍이었고, 사치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나나의 모계 양육자는 금융회사에서 안정적인 과장 자리에 안착한, 역시 성공한 레밍이었다. 레밍 사이에서 레밍이 태어나는 건 유전법칙에 의해 아주 자연스럽고 지당한 일이었다. 나나의 친가 쪽은 대대로 판검사를 지낸 집안이었다. 나나의 외가 쪽은 그다지 유서가 깊진 않았지만, 어쨌건 자수성가하는 데는 성공했다. 성공한 레밍은 다른 레밍에게 자신이 어떻게 성공했는지를 전수했다. 레밍은 그 레밍을 모방하고, 성공한 레밍이 되어 다른 레밍을 지도하고, 그 레밍은 다른 레밍을….

지루한 얘기는 그만두자. 그러니까 여태 나나는 레밍이 아닌 삶을 산 적이 없었다. 성공한 레밍들은 자신의 혈족 레밍이 의사가 되기를 바랐다. 여태 자신의 조부가 그러했고 부친이 그러했고 자신이 그러했듯, 그리고 자신의 배우자가 그러했듯 명예로운 삶을 살길 바랐다. 다 너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 종종 레밍들은 나나에게 그렇게 말하곤 했다.

나나는 아침 여섯 시 정각에 일어나 침구를 반듯하게 정리하고 단정하게 아침을 먹었다. 모든 또래 아이들이 그렇듯 등교시간에 맞추어 학교에 갔다. 칠 교시 수업이 끝나면 가방을 들쳐 메고 영어학원으로 향했다. 두 시간 동안 영어를, 그 옆 건물로 옮듯 건너가 또 두 시간 동안 수학을, 한 블록 하고도 반 정도를 더 걸어 다시 두 시간 동안 과학을. 그곳의 아이들은 이름이 없었다. 불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정께에 학원가에서 튕겨나오듯 집에 돌아오면 나나는 늦은 저녁을 먹고 새벽 세 시까지 올림피아드 준비를 했다.

성공한 레밍의 바람은 어느 날 바뀌었다. 무영의 선배가 찍은 사진이 엄청난 찬사를 받으면서부터였다. 밝게 웃는 세 살배기 어린애가 고무오리와 함께 이를 다 내보이고 웃으며 찍혀 있었다. 그 애의 부모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진사를 고용할 만큼 돈이 없는 사람들은 가장 순수한 웃음이 담긴 그 애의 사진을 종교로, 교리로, 예언으로 삼아 신봉하기 시작했다.

그 애의 부모는 헌금의 명목으로 돈을 걷었다.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다음 생엔 지금처럼 가난하게 태어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 신도들의 눈을 가렸다.

나나는 그 애보다 네 살이 많았다. 양육자들은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아무튼 너는 최초여야지. 어디서든 너는 처음이어야지. 나나는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너는 최대한 일찍 죽어야 한다. 부계 양육자 레밍은 그렇게 말했다. 너도 명예로워져야지. 모계 양육자 레밍이 덧붙였다. 언제부턴가 나나의 양육자 레밍들은 나나를 나나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야. 어쨌든 나나는 죽은 지 오래였는데.

 

그러니까, 나나의 모든 순리는 모계 양육자와 부계 양육자에 의해서 건설되었다. 나나는 가끔 그 순리가 코 작은 그물처럼 느껴져 발버둥치려고 들었으나, 곧 그물이 터지면 금붕어인 자신은 적자생존의 원칙에 따라 죽을 것임을 불과 일곱 살의 봄부터 알고 있었다.

나나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아이처럼 굴었다. 가끔은 순진한 척 하기도 했고, 가끔은 미운 다섯 살처럼 되도 않을 논쟁을 하다가 눈꼬리를 축 내려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아이처럼 눈을 깜빡이기도 했다. 나나는 내내 나른하다가 앙칼지지만 미워할 수 없는 고양이처럼 입꼬리를 바싹 올렸고, 어깨를 으쓱하다가 세상을 다 가진 듯 웃음을 터트리며 나 너 좋아해,를 연발했다. 정말이야. 나 너 좋아해. 나나는 열다섯 번째 생일에도 여전히 스스럼없이 사랑스러웠다.

“이제 너도 죽을 때 안 됐니?”

부계 양육자가 초에 불이 붙은 생딸기 케이크를 앞에 두고 말했다. 나나는 큰 눈만 껌뻑였다.

“왜, 계속 말했었잖아.”

모계 양육자도 말을 보탰다. 나나의 집엔 모든 불이 꺼져 있었다. 촛불만 위태롭게 연기를 내며 타고 있었다.

“네가 죽어야 우리도 죽지.”

부계 양육자가 말하는 사이 촛농이 케이크에 떨어졌다. 나나는 순간 불 꺼진 집안의 적막을 좀 더 오래 느끼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휩싸였다. 나나는 말을 아꼈다. 양육자들은 나나의 대답을 무언으로 부추겼다. 그러나 나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나는 침묵이 마치 정전된 집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수재민이었다. 지금 밖에는 어마어마한 비가 퍼붓고, 그 비는 저 아랫마을을 다 덮고 나서 지금 자신이 사는 집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왜 피난가지 않아? 저기 밖에 사람들이 아무도 없어. 다 잠겨 죽은 거야. 다. 한 명도 남김없이. 그런데 우리는 왜 지금 앉아 있지? 왜? 나 익사는 취향 아닌데. 존중해 줘. 왜 우린 나가지 않아? 양육자들의 손끝에서 찰랑거리는 물이 보였다. 이내 물은 나나의 청바지를 적셨고, 나나의 속옷을 적셨고, 마침내 나나의 맨살에 축축하게 닿았다. 왜? 우리는? 나나는 끊임없이 생각하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점점 양육자들의 눈빛이 사나워지는 게 느껴졌다. 나나는 늑대와 동화되는 중인 양육자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건, 그래. 쓰나미다. 밖이 물에 잠긴 게 아니라 쓰나미가 집 안쪽부터 발발한 거였다. 단층이 맞물려 진동이 생긴 거였고, 그래서 모든 전기가 끊긴 거였고, 또다시 모두가 죽은 거였다. 그럼 나는 어디로 도망가야 하지? 나는 어디로 도망가야 하지? 나는 어디로 도망가야 하지? 나는? 나나는 아, 하고 입밖으로 새된 소리를 냈다. 그러죠 뭐. 나나는 습관처럼 재빨리 미소를 지었다. 나나의 허리까지 차올라 케이크를 떠다니게 만들던 물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나나는 유년부터 그랬듯 나른하게, 그러나 물이 다 없어졌다는 착각 속에서 쓰나미에 휩쓸렸다. 그제서야 양육자들의 입에서 생일 축하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왜?”

체이가 물었다. 나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벤치에 몸을 기대었다. 나나의 눈이 수두룩하게 죽어버린 개미 떼를 향했다. 그러나 개미는 개미집에서 끝도 없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었다.

“어, 제 삶이 아니잖아요.”

“살아 있는 건 너 아냐?”

“부모님이요, 나 말고. 나는 껍데기라니까.”

나나는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 통에 신경질이 난 것 같이 보였다. 체이는 그러나 이해해야만 했다. 미간을 찌푸린 체이의 얼굴을 나나가 빤히 응시하더니 지금껏 죽인 개미 시체들을 벤치 밑으로 쓸었다. 한창 환하게 꽃피는 것만 같은 낯이었다. 그러니까 나나야, 너는 왜 죽고 싶니. 체이는 입술을 쓸었다.

“언니, 카메라는요?”

체이가 카메라를 꺼냈다. 슬슬 테스트 컷을 찍어 봐야 했다. 더 어두워지면 현상할 때 색감이 모조리 망가질 수도 있었다. 체이는 나나가 죽인 개미들을 오브제 삼았다. 빛이 너무 적게 들어왔다. 체이가 조리개를 조금 더 열었다.

“나도 볼래요.”

체이는 나나에게 카메라를 넘겨주었다. 손간, 체이는 차라리 나나가 자신을 찍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셔터를 눌러 줘, 나나. 예쁘지 않아도 좋아. 그러나 나나는 뷰파인더에 눈을 대고 근방의 풍경을 한 번 보더니 체이에게 다시 돌려줄 뿐이었다.

“이런 느낌이구나.”

나나는 또 웃었다. 체이는 카메라를 받아들었다.

“나쁘진 않은데요?”

“뭐가?”

“내가 나올 사진, 그려봤어요.”

체이가 받아든 카메라를 만지작거렸다. 나나의 죽은 눈은 아이러닉하게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마침 따뜻하고요.”

나나가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나나야.”

체이가 나나의 이름을 불렀지만 나나는 듣지 못한 척 했다. 도시소음들만이 체이와 나나의 사이를 꽉 채우고 있었다. 나나가 다시 담담하게 입을 열기 전까지.

“어쨌든 이것들처럼 이유 모르고 죽는 것보단 낫잖아요.”

나나가 채 아래로 쓸려가지 않은 개미들의 흔적을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모래 털듯 털었다. 손가락에 끈질기게 엉겨붙어있던 개미들이 떨어져 나갔다.

“이유가 고작 그거야?”

“뭐 어때요. 어차피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건데.”

체이는 나나를 바라보았다. 나나의 발랄한 갈색 눈은 여전히 죽어 있었다. 입술을 쭉 빼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찍어요, 언니. 언니도 돈 받고 하는 일이잖아. 뭐 찍어야 하는진 들었죠?”

차가 클랙션 소리를 내면서 빠르게 지나갔다. 체이와 나나는 동시에 차도로 시선을 옮겼다.

“왜요, 나 언니 좋아해요. 진짜야.”

나나가 발작처럼 차도로 뛰어들었다. 체이는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

 

“이체이.”

체이는 고개를 들어 무영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흐리멍텅한 눈이 꼭 썩은 물고기 눈깔 같았다. 체이는 대답하지도 않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기만 했다. 한쪽 손은 축 늘어져 있었는데, 별다를 바 없을 다른 쪽 손으론 카메라 가방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뼈가 다 툭툭 튀어나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육안으로도 보였다. 무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너 얼굴.”

“알아요.”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얼굴에 사선으로 붉은 줄이 한 가닥 생겨 있었다. 체이의 목소리엔 뼈대가 없었다.

“피사체 뭐 찍었는데.”

“나나요.”

지금은 가늘지만 점차 두꺼워질 그 선을 무영이 착잡하게 바라보았다. 체이는 찍은 감정에 대해선 입을 열지 않았다. 무영이 항의하듯 입을 벌렸으나 체이가 먼저 말을 가로챘다.

“아, 내일 아침엔 저 기다리지 마세요. 촬영 있어서 일찍 나가요.”

“촬영 한 번 나가면 베테랑들도 며칠은 쉬어, 이체이. 하물며 너 지금 반 년도 안 된 애가 일주일에 서너 건을 찍는다고?”

현상흔이 욱신거리기라도 하는지 체이는 얼굴을 감싸고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카메라 가방을 내려놓지도 않고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무영은 간신히 가쁜 숨을 이어가는 체이를 간격을 두고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사진사의 업이다. 무감한 눈에 언뜻 연민이 스쳐간 것도 같았다.

“할 수 있어요.”

“당장 네 몸 하나도 못 가누잖아.”

“할 수, 있어요.”

“고집부리지 마, 이체이.”

체이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전등빛이 체이의 얼굴에 그어진 사선을 환하게 비추었다. 붉은색이 뚜렷하게 보였다. 무영은 그것조차도 뱀 같다고 생각했다. 무심결에 주먹을 쥐었다. 이것은 환각이었다.

“아저씨 저는 속죄해야 해요. 죽게 놓아둔 거, 내가 아파서라도 미안해해야 해요.”

체이는 자신이 담은 나나와, 나나와 함께 사라지던 속도위반 중형 세단과, 나나의 부모에게 건네준 메모리를 차례로 생각했다. 체이의 낯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피사체들은 스스로 죽겠다고 자청한 거야.”

무영 자신의 말의 높낮이에 따라 뱀이 구불거렸다. 위협적으로 다가와 무영의 바로 앞에서 멈춰섰다. 뱀의 찢어진 눈이 번들거리며 무영을 직시했다. 체이가 말을 이었다.

“행복하게요. 그리고 피사체가 아니고 나나예요.”

“어떤 감정이든, 걔가 원하던 대로. 넌 그 소원을 이뤄준 거고.”

“소원이요?”

체이의 한쪽 입꼬리가 뒤틀리듯 올라갔다.

“소원요?”

다시 물었다.

“의뢰했잖아. 걔는 찍히는 데 동의했고.”

무영의 대답은 간결하고 간단했다. 정론이었다. 체이는 나나, 를 발음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나나의 얘기는 하지 말자. 나나의 얘기는 하지 말자.

“나도 행복하게 박제되고 싶었어요.”

체이의 안쪽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체이의 낯에 기묘한 표정이 일렁였다가 사라졌다.

“내가 찍혔을 때 난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는데요.”

뱀이 입을 쩍 벌렸다. 물릴 것이다. 무영은 반사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눈을 비볐다. 뱀은 없었다. 체이의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무영의 행동에도 반응하지 않은 채였다. 아래로 비뚜름하게 내려간 입매가 움직이지 않았다. 무영은 사진 속의 세계를 몰랐다.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었다. 결국 무영은 침묵을 택했다.

“결국 도피잖아요.”

“체이야.”

“거기는 온통 까만데, 아무도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게 발목을 잘라요.”

체이가 침을 삼켰다.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두 다리가 처음 만난 그 날처럼 위태로웠다. 일단 앉아. 무영은 들릴 듯 말 듯 말했으나 체이는 여전히 두 다리를 붙박여 서서 말을 이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더 주거나 방향을 바꾸면 산산조각 날 것만 같은 날선 이야기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계속 도망가기만 했던 사람들이, 외면할 수 있다고 믿었던 미래의 감정들을 한꺼번에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터져요.”

“…….”

“처음엔 환상이에요. 아저씨 마약 해 본 적 있어요? 나도 없어요. 근데 딱 그 느낌이에요. 몸이 막 뜨는 거 같고, 심장이 아플 정도로 빨리 뛰고, 그 다음엔 세상이 다 그냥, 다, 어, 빛으로만 보이고, 내가 갑자기 너무너무 자랑스러워지고… 내가 이 세상 전부를 쥐고 있는 것 같고, 그러다가 묘한 성취감에 도취되고… 근데 어느 순간 숨을 쉬려고 해도 공기가 안 들어가요. 나오는 건 있는데 들어가는 건 없어서 폐가 쪼그라드는 기분인데, 그 다음엔, 그 다음엔, 그 다음엔…….”

체이의 목소리가 점점 몽롱해졌다. 나나 같았다. 그 다음엔 체이 같았다. 또다시 나나 같았다. 그 다음엔 체이였다. 무영은 나나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도 모르는데 체이가 나나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발목에서 피가 나요. 나는 그게 아픈 줄도 몰랐어. 어, 내 발목이 잘렸네. 딱 그 생각. 잘렸네. 잘렸네. 잘렸어? 그 순간부터 아프기 시작해요. 내가 내 눈으로 내 발 나뒹구는 거 본 순간. 아저씨, 발이 잘리면 온몸이 차가워지기 시작하는 거 알아요? 어, 나는, 아주아주, 몽땅, 뜨거워질 줄 알았거든요… 얼어붙는 것 같아요, 피부고 내장이고 머리고 다 상관없이, 안쪽부터 말린 미역 부푸는 것 같이 온몸이 부푸는데, 내 몸이 얼음이 된 것 같고, 벽돌로 내려치지도 않았는데 금이 가는 것, 어, 같고…, 옆에서는 터져요, 펑, 펑펑펑, 펑펑…, 비명도 못 지르고. 사람들 머리 터지는 거 봤어요? 그 안에 뭐 있는 줄 알아요?”

이제 체이의 입술까지 하얗다. 체이의 목소리는 점점 더 몽롱해졌고, 점점 더 나나를 닮아갔고, 발음이 뭉개져 알아듣기 힘들어졌다. 눈은 또 꿈을 꾸는 것만 같았는데, 무영이 숨을 멈춘 몇 초 후에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물에 적혈구 넣어 두면 물이 안쪽으로 꾸역꾸역 들어가 부풀어서 터지는 것처럼 그렇게 죽어요, 아저씨.”

체이의 발음이 다시 또렷해졌다. 그리고 마지막 숨을 토하듯 글자 하나씩을 꾹꾹 눌러 뱉어냈다. 둘 사이에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나나도 그렇게 죽었겠지. 영원이 아니었지. 막지도 못했지. 다 알고 있는데. 말해주지도 못했지. 바람이 유리창을 흔드는 소리만이 그 사이에서 머물렀다. 무영은 마른 입술을 축였다.

“너는, 어떻게 살아났는데.”

“터지기 직전에 굴렀어요.” 체이는 이제 담담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눈을 감았다가 뜨는 게 그렇게도 버거워 보일 수가 없었다. 그 눈꺼풀이 한 번 내려갈 때면 다시 올라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무작정 보이는 빛으로요. 저기 가면 살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고요.”

체이가 쓰게 웃었다. 잠시 정적을 지키더니 카메라 가방을 벗어 바로 옆에 두었다.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고 무영을 곧게 바라보았다. 시계 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사람이 절박해지니까 뭐라도 해야겠다 싶더라고요. 거기서 사람들은 차례로 터지고…, 나만 살아남았을 거예요.”

거기서 나온 사람은 아직 한 명도 만나지 못했으니까.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건 무영도 체이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둘 다 굳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발목은.”

“있더라고요. 흔적은 남아 있지만.”

나오니까, 별로 아프지도 않았어요. 가끔 욱신거리긴 하는데. 체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바지 밑단을 걷어 올렸다. 발목양말 위로 숱하게 그어진 날붙이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무영은 숨을 멈췄다. 자신의 현상흔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법한 두껍고 깊은 상처들. 이것은 뱀이다. 잡아먹힐 것이다. 백사가 무영의 머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무영은 체이의 흉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체이의 목소리는 잔뜩 지쳐 있었다.

“그러니까 날 좀 놔두세요.”

체이는 그 말을 끝으로 자신의 카메라를 챙겨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힘없이 닫혔다. 이체이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꼭 유언 같았다. 무영은 자신의 앞에 세워진 문만을 하염없이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

 

이체이는 다음 날 촬영이 끝나고 비틀거리며 돌아왔다. 비밀번호 전자음. 문 여는 소리. 곧이어 발자국 소리가 차례로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체이를 본 무영은 체이에게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시계의 짧은 바늘은 새벽 두 시를 갓 넘어가고 있었다. 체이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얼굴의 사선 모양 상처는 한층 더 깊어져 있었다.

얼굴이 잘리면 어쩌지. 무영이 완전히 헛되지는 않은 생각을 했다.

체이의 손에서 신문이 떨어졌다. 정확히는 체이가 신문을 내팽개쳤으나 힘없이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체이는 그러든 말든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문도 닫지 않은 채였다. 곧이어 무게감 있는 무언가가 이불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잠이 들었나. 쓰러졌나. 아니면 죽었나. 작은방으로 쫓아 들어간 무영은 다급히 체이의 입술에 손가락을 대었다. 채 다물리지 않은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숨이 느껴졌다. 무영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간 병적으로 피사체를 찾아다녔다. 현상을 맡기고 우체국에서 등기를 보낸 후 돌아와 죽은 듯이 잠만 자다가 휴대폰 진동에 퍼뜩 깨어나 또다시 촬영 약속을 잡는 일정이 반복되었다. 이체이는 그랬다. 지금껏 무영이 본 이체이는.

발목의 흉터를 생각했다. 발목의 뱀을 생각했다. 제 머리가 분명 백사에게 잡아먹혔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니 단단히 붙어 있었다. 뱀이다. 이체이의 발목을 자른 게 누구라고 했더라? 아니, 무엇이라고 했더라? 뱀이던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신문에는 무엇이 있었지? 이체이와 닮은 사람이 치이는 사진. 무영은 자신이 그간 찍었던 피사체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웃고, 울고, 아프고…, 모두가 감정을 영구보존하길 원했는데 그런 세계 따위는 없었다. 오직 터지는 것뿐이었다. 그러다가 무영은 자신의 여동생을 떠올렸다. 무영의 손목에 그어진 현상흔이 격렬하게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무영이 이체이를 내려다보았다. 채 놓지 못한 카메라는 체이에게 안겨 이불 위에 놓여 있었다. 뒤척이지도 않고 잠든 이체이의 몸에는 무수한 용서를 갈구하던 흔적들이 있었다. 목덜미부터 발끝까지, 맨살이 드러나는 곳이면 현상흔이 없는 곳을 찾기 드물었다.

무엇이 새로 생긴 현상흔이고 무엇이 원래 있던 현상흔인지가 구별되지 않았다. 시선은 어느덧 발목에 머물렀다. 무영이 체이의 카메라를 집어들어 뷰파인더에 눈을 가져다대자 카메라 안에서 뱀이 이빨을 드러내고 경계했다.

넌 모든 감정을 단번에 느꼈지. 다시 한 번 사진 속에 갇히면 터지지 않을 거다. 손목이 끊어질 것 같이 아팠다. 현상흔이 깊게 패여 있었다. 잘릴 것만 같았다. 무영이 카메라의 초점을 맞췄다. 뱀이 무영의 눈을 물었다. 렌즈에 비친 체이는 불규칙적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무영은 남은 한쪽 눈으로 체이를 응시했다. 버겁게 카메라를 드는 손이 심하게 떨렸다. 너는 더 이상 속죄하지 않아도 된다. 무영은 숨을 멈춰 몸을 고정시켰다. 무영의 손목에 새겨진 빨간 줄 너머로 이체이는 자꾸만 얄팍해지는 숨을 뱉었다.

무영이 셔터를 눌렀다. 카메라가 바닥으로 떨어져 부서진 파편들이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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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량 보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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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광케이블을 목에 걸고 이불 속을 여행하는 계절이야 잘 수 없다면 뒹굴기라도 할 천박한 장마 붕 터질 것만 같은 부랑자들을 태우기만 하면 풍선이 떠오르지

 

매주 토요일 열네시엔 두 손을 뒤로 감추고 기도를 해 우리의 식도에 꽃이 돋아 뭐든 영영 야위도록 해 주세요 아니다 맞아 여긴 앙상하게 재배되어 부풀고 있어 내 숨 대신 쉴래 가장 사랑스러운 별아

 

부르고 싶었던 언어들이 멸종하나 우리는 그걸 언제쯤 과거로 지칭해야 하나 지문은 이해당하고 반쯤은 날아가 없어지네 나의 열여덟과 너의 열여덟 앞에서

 

명백한 실수를 그림자에 바르면 그건 더 이상 실수가 아니라고 우리는 침을 튀겼고 가끔은 공기를 거꾸로 밟아 뒤집히기도 했어 초침만 없었더라면 아무도 죽지 않았을 텐데 먼지를 고치려고 섣불리 진동하지 선생님 제 일기장을 들춰보셨군요

 

너무 무거워 목이 꺾일 거야

 

열네시야 열네시야 지우개 똥을 뭉치며 합창하자 동글동글 동글동글 동글동글 우리는 반구를 모자처럼 쓰고 정의를 교수대로 떠밀지 열네시야 열네시야 발톱의 비밀 일기장을 이제부턴 열네시라고 부를 거야

 

선생님 저는 누구도 버린 적이 없어요

매일매일 모두에게 버려지면서

 

새벽에는 창문 밖 사냥개들의 가사를 볶아다 도시락을 싼다 죄다 토해버리라지 뜨거워지자 눈이 부시자 다함께 풍선은 얼어붙지 말자고 올바르게 둥글어지고 우리는 얼어붙자고 우비를 벗으며 풍선 안에서 부레를 터트린다 너의 푹 젖은 자물쇠와 안녕 나의 하나뿐인 햇빛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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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적 불안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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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 점으로 절단될 때 우리의 소란이 적막으로 포장될 때 사람의 감정이 가느다란 충돌같이 얇아질 거란 걸 예감할 때 뱃지의 도색이 깔끔하지 않게 매달려 있을 때 인간일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잠잠히 짐을 싸서 이 행성을 떠날 때 우리의 사랑은 늘 거기 없었고 다만 토성의 고리 사이에서 얼어붙어 형체도 없이 시야에서 잠적했다는 걸 오래된 라디오에서 들었을 때 현상을 집합적으로 나열하고 정작 감정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이미지만 그려낼 때

 

시인은 열망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도 냉소해야 합니다

선생님, 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고 난 당신은 간신히 뜨겁게 울었습니다 우리의 리시안셔스가 시들기 시작하는 걸 보았습니다 아무리 낯설어도 낯설 수 없어야 하는 손끝과 시시때때로 뒤바뀌어 엉키는 당신의 표정들은 도무지 소리내어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서로를 구원할 수 없는 슬픈 이족보행동물들의 울음이 창틀에 금을 내고 깨지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부풀어 오르다가 삐걱이는 다리의 마지막처럼 무너지지 말고 꼭 우리가 초래한 재앙을 당신 혼자 삼키지 말고요 난 나의 열망을 잃지 않았다고 나직하게 비명하면서 눈을 안대로 가렸습니다 녹아내리면서 유동적인 불안들을 자꾸만 이것은 미래를 위한 식물이라는 단순한 유희로 치환하면서

 

우리의 안구에 빗금처럼 습기가 들어찰 때 손목에 남은 양호한 흉터가 거의 망각의 축복을 받았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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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밈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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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된 뮤지컬이 햇빛처럼 쏟아지는 밤마다 고양이가 조향한 향수를 마셨어 고민처럼 외줄타기를 하다가 어느 수식어가 가장 어울릴지 눈에 넣어 보는 우리의 시선들

 

동공이 커져서 빛이 죄다 번지면 옷장에서 한 입 베어물다 만 이빨 자국을 머리핀처럼 꽂고 다 찢긴 손목 위에 말라붙을 그림을 그릴 거야 심장을 하트 모양으로 도려내 뺨에 붙이고 다 터진 실핏줄이 보이면 그 위로 하얗고 자글자글한 욕설들이 단조롭게 흩어져 눈밑을 반짝 장식하겠지

 

호우주의보가 경보로 또 폭설경보로 치환되던 시간엔 우리가 참아 오기만 했던 가장 아름다운 구절들을 입지 않을래 잔혹하기 때문에 익사할 수밖에 없었던 감긴 눈꺼풀 안쪽에서 몸을 웅크리고 나날이 부풀어가던 열대어들까지도, 실어증을 앓는 우리의 손끝은 뻐끔거리고 아직도 향수 냄새가 고양이 털처럼 남아있어

 

난 앞에 벌려 둔 채도들을 수습할 생각이 없어 이를테면 그건 우리의 시신들을 각자 챙겨 화장터로 업고 가는 일 다만 한 손바닥 크기의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입을 모아 노래를 부르는데 우리는 녹아내리면서도 서로에 서로를 꼬리물듯 찍어 맛보는데

 

웃을 수가 없어서 당신의 미소를 잠깐 훔쳐 발랐어요 잠잠히 매달린 재난이 혹은 재앙이 너무 눈이 부셔서 숨을 쉴 수가 없었지 무도회에 쓰고 갈 가면이 필요해서 얼굴은 더 이상 얼굴이 아니었고,

 

나는 유리병 속에 담겨서 온통 향기롭게 찰랑거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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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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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의 기억

 

 

숨을 쉴 수 없을 때 머리를 처박는 법을 배웠다.

 

─너 도서관 안 가?

─거기 자리 맡기 힘들잖아.

─그래도 더 집중은 잘 되잖아.

─으음, 그냥 기숙사에서 할래. 귀찮아.

 

기숙사는 조용했다. 으레 방문을 뚫고 복도에서 들리던 수다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아이들은 모두 실어증을 앓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의적으로 입을 다물고 책상 앞에 몸을 붙인 채 펜을 놀리는 행위의 연속이었다. 망가져가는 오른손에 고무줄을 감았다. 프로그래밍 된 알고리즘에 따라 움직이는 마리오네트처럼 반복되는 세계는 시계와 닮아있었다. 문득문득 치솟는 생각이 있었다. 시계초침을 부러뜨리고 싶다. 언제나 같은 리듬의 삶에서 벗어나 죽음의 문을 두드리고 싶다.

다섯 명이 함께 지내는 호실에는 사람의 온기가 남아있지 않았다. 열댓 권의 책들을 의자 밑에 쌓아두고, 그 책들이 한 번씩 손을 거치고 나서야 자신의 호실로 잠시 돌아가 책을 바꾸어 올 뿐이었다. 수학과 과학 책을 잔뜩 가져와 무리의 일원으로서 의무를 다하던 시절이었다. 언어를 머릿속에 C언어처럼 입력하고 올바른 답을 도출하기 위해 잠을 줄였다. 비정상적인 일상생활이 되풀이되었다. 언제나 같은 결과를 이끌어내었고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같은 교재를 잡았다. 책을 바꾸기 위해 호실로 들어가던 찰나, 숨이 들이켜지지 않았던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출력값이었다.

내뱉은 단어들이 없어 들어올 것도 없었다고 판단했을까. 아니면 쓸모없는 몸뚱이가 연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까. 어느 쪽이든, 공기의 유입을 폐가 거부하는 중이었다. 나는 바람 빠진 풍선인형처럼 침대 옆에 주저앉았다. 숨을 들이켜기 위해 하늘을 보고 막힌 공깃구멍을 뚫기 위해 애썼다. 침대 위에 있던 이불이 끌어내려지고, 삶을 갈구하는 몸짓만을 반복했다. 목을 쭉 빼고 어떻게든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처절했다. 죽음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무렵들과 삶의 밧줄을 추악히 그러쥐는 몸뚱이가 겹쳐보였다. 역겨웠다. 그렇게 생의 중단을 꿈꿔왔으면서. 나는 발버둥치기를 멈추고 무릎 사이로 머리를 처박았다. 숨구멍이 트여 죽음의 수갑에서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침대에서 벗어나는 것이 힘든 날이 있다. 할 일들은 자습실 책상 위에 형체를 갖추고 쌓여 있는데, 마치 아지랑이처럼 금세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에 빠져 버리는 날. 몸을 웅크린 채 심장소리를 듣는 중이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찰나들이 연속적으로 찾아온다. 몸이 떨리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제어하면 발끝부터 슬금슬금 기어 올라오는 것들이 있다. 마치 환청처럼, 아른아른. 세상의 아름다운 인식과 상반되는 추악한 섬뜩함.

밖으로부터 차가운 공기가 들어와 문 쪽을 바라보았다. 룸메이트가 슬리퍼를 끌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애는 자신의 노트북을 침대 위에 던져두고 여러 색깔의 책을 챙겼다. 방 안에서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시간은 단 일 분이 되지 않았다. 오직 따뜻한 공기뿐이 남은 기숙사 방 안에서 나는 도망가는 나를 보았다. 고장 난 눈으로 세상을 보고 망가진 팔로 귀를 막아버린. 내가 도피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물처럼 밀려왔다. 알고 있었던, 그러나 결코 알고 싶지 않았던. 다분히 의도적이었지만 믿고 싶지 않았던. 직시하자 숨이 막혀오기 시작했다.

아감구멍을 막아버린 기분이었다. 해부 직전의 개구리처럼 축 늘어져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무방비함. 스멀스멀 올라오는 무력감은 놓아두면 무기력으로 부피를 불린다. 죽음은 그다지 멀리 있지 않다. 주위에서 몸을 숨기고 낚아채 갈 희생양들을 기다리고 있다. 목각인형의 관절부에 매달린 실이 조금만 느슨해지면 죽음은 다가온다. 너는 지금 도피를 하고 있어, 그럼 죽음으로의 도피는 어떨까? 자각할 수도, 인지할 수도 없는 영원한 도피 말이야. 죽음은 끊임없이 속삭인다. 맴돌고 있는 상념 중 어느 것을 잡아채는 것이 최선의 선택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숨을 쉴 수 없었다. 나는 배운 대로 머리를 처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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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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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의 밤

 

비상구의 녹색등이 어스름했다. 깜빡거리는 꼴이 꼭 아까 걸었던 길의 신호등을 닮았다. 자꾸만 혜진의 생각이 났다. 그 애의 때 탄 교복 셔츠, 밑단이 조금 뜯어진 치마, 거듭 비어져 나오던 그림자, 그걸 필사적으로 가리려던 얇은 손가락 마디까지. 나는 내 손가락 마디를 만져보았다. 그 애처럼 얇진 않을 것이다. 자잘한 상처들조차 없다. 지금쯤 상처들은 더 커졌을까. 많이 다쳤을까. 아니면…. 나는 의식적으로 손가락을 뜯었다. 상처가 닮아간다고 해도 달라지는 걸 없다는 걸 알면서,

 

부럽다.

어?

너희 부모님은…

유서를 쓰던 혜진은 말을 늘이는 걸 끝으로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볼펜 딸깍이는 소리도 멈추었다. 그 애의 구겨진 교복 틈으로 오래된 풋사과의 색깔이 보였다. 이따금씩 혜진은 학교에 나오지 않을 때가 있었다. 우리 반에서 혜진을 둘러싼 소문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사실일지 아닐지 모르는 가십거리에 힘을 실어주는 건 다시 등교한 혜진의 뺨에 나 있는 스크래치 자국이었다. 나는 잠시 혜진의 몸을 가리고 있는 교복을 바라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쓰고 있던 유서 한귀퉁이를 구겼다가 다시 폈다. 거기서 더 진전될 리가 없었다. 창문 사이로 들어온 빛이 물처럼 출렁였다. 자꾸만 그 애의 갸날픈 몸이 팔레트같이 보였다. 그 애가 힘주어 깨문 입술은 빨간색 물감이 상한 것 같았다.

 

아주 폭력적인 생각인 것을 알고 있다. 그 애한테도, 나한테도. 그렇지만 그 애보다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교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혜진의 아빠라는 사람이 불쑥 나타나 손목을 잡아끌었다. 혜진의 앙다문 입술이 그리고 있던 수평이 일그러지는 걸 봤다. 몇 번이나 내 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목에 힘을 주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손을 뻗었지만 닿지 못했다. 결국 그 애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난 더디게 나아가는 몸을 재촉했다. 가로등의 전기가 금세 나갈 것만 같이 보였다. 깜빡거리는 불빛을 따라 그림자가 함께 깜빡거렸다. 위태로움을 눈앞에서 보는 것은 늘 어려웠다. 나는 고개를 똑바로 한 채 앞만 보기 시작했다. 소리가 자꾸만 귀 안에서 메아리쳤다. 너희 부모님은…. 그 애가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안다. 혜진과 난 닮아도 한참이나 닮아있었다. 적막을 싫어했다. 목소리가 파묻히는 걸 두려워했으며 작은 소음에도 깜짝깜짝 놀라기 일쑤였다. 다른 점이라면 혜진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온통 어둡고, 나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온통 밝다는 것 정도였다. 지금 내 생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영양가 없는 생각들. 전부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죽고 싶어. 나도.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 그만 살고 싶지? 어. 우리 같이 죽자. 어? 언젠간 외국으로 떠서 안락사 같이 하자고. 그거 비싸잖아. 그러게. …. 그럼 그냥 같이 뛰어내리자. 언제? 스무 살 되기 전에. 그래놓고 안 죽을 거잖아. 유서 오백 장 되는 날 그 때 죽자. 그래. 같이 죽자. 그래.

뭐가 문제지? 우리는 언제나 유서를 같이 썼고 펜을 비웠다. 그걸 교환해 읽고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 애의 유서는 온통 빨간색이었다. 피로 유서를 쓴 것도 아닌데 읽다 보면 세상이 계속해서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 색깔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글로 자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사건들이 터진 채로 곪아가고 있었고 절박한 절규들이 그 틈을 메웠다. 그에 비해 나는 그저 평범한 고등학생일 뿐이었다. 잘못된 점이 없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다정한 부모님과 그럭저럭 괜찮은 친구들과의 관계. 풍족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은 재정적인 지원들과 감정적인 응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안정했고 죽음을 꿈꾸었다. 미쳐도 내가 단단히 미친 거였다.

 

유서를 써야 했다. 아까 다 쓰지 못했는데 펜과 종이는 혜진에게 있었다. 피씨방의 문을 열었다. 시계가 아홉 시를 가리켰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 본체를 켰다. 교복을 입은 앳된 남학생들은 게임을 했고, 컵라면을 옆에 쌓아두고 포커를 치고 있는 아저씨도 있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숨을 쉬었다. 내가 죽기 전에 뽑아 놓을 유서를 써야 했다. 글은 내가 되고 나는 글이 된다. 순간마다 활자들과 함께 간신히 호흡했다. 죽고 싶어서 유서를 쓴다. 죽음을 미루기 위해서 유서를 쓴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몰랐다.

나는 감정을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한글 파일에 빨간 줄이 자꾸 보였다. 흑백으로 이루어진 파일에 긁힌 흔적은 환영받지 못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그걸 지웠다가 되돌리기 버튼을 눌렀다. 그게 혜진의 상처와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온전치 못했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절대로 바로잡을 수 없었다. 그 애는 나를 지지대로 삼고 있었을까? 난 그걸 오래오래 바라보다가 다시 글을 썼다. 빨간 줄이 자꾸만 그어졌다. 내버려두었다. 혜진의 상처는 피부에 있었다. 어쩌면 내 상처는 나일지도 몰랐다. 화면에 상처가 늘어갔다. 어느 순간 손을 멈추었다. 의자를 돌려 다른 사람들의 모니터 화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그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나는 커서가 깜빡이는 것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들의 세계를 구경했다. 모니터가 일제히 꺼지기 전까지는.

 

열 시였다. 미성년자는 나가라는 알바생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발소리 여럿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꺼진 모니터 앞에서 아이들이 몰려나가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혼잡했다. 각자의 세계가 엉키듯. 전원을 내려버린 순간에 아흔 아홉 대 정도의 컴퓨터가 꺼졌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동시에 아흔 아홉 명의 사람이 죽어버리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나는 쓰고 있던 내 유서가 전부 날아갔다는 걸 알아챘다.
자살할 날까지 하루가 더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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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 오늘 아침으로 토스트를 먹었어. 토스트기에 식빵을 넣어둔 걸 깜빡해서 이미 식었더라. 다시 구웠을 땐 조금 타긴 했지만 그나마 먹을 만 했어. 햇빛은 어쩐지 사람을 나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단 말이야. 토스트기를 누르고 기다리는 시간 동안 나도 모르게 정신을 까무룩 놓는 모양이야. 아침에 일어나는 게 그렇게 힘든 것도 아닌데 말이야. 오전의 나른함은 묘하게 이질감을 불러일으켜. 다시 자지 않으려고 이불을 개고, 창문을 열고. 나답지 않게 부산스러움을 조금 떨고서야 제대로 된 토스트를 먹을 수 있었어. 네가 맛있다고 했던 딸기잼을 펴 발랐어. 따뜻한 딸기 냄새가 좋아서 잠깐 행복해졌고, 짧은 순간에 너를 생각했어. 계란프라이를 해서 올려 먹을까 하다가 설거지거리가 늘어난다는 생각에 금방 고개를 저었고, 대신 검은색 잉크를 유리컵 가득 채워서 마셨어.

 

성당 앞을 지나다가 잠시 걸음을 멈췄어. 스테인드글라스가 여러 색으로 반짝였어. 빛이 쏟아지듯 내렸고, 한여름의 열기가 아지랑이를 피웠는지 성당이 이리저리 흔들렸어. 성모 마리아 상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고 문득 무서워졌어. 몸이 굳었어.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것 같아서 뒤로 돌아 걸었어. 걸음이 점점 빨라졌어.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리가 뛰고 있더라. 내 폐를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조금 당황스러웠어. 잠깐 숨을 고르다가 다락방으로 올라갔어. 거기 다다르는 순간 다리가 풀려서 주저앉고야 말았어. 원고지가 날 보고 웃는 중이었어.

 

언젠가 너한테 잉크를 어떻게 마시는지가 궁금하단 질문을 했었지. 네가 환하게 웃으면서 유리컵에 반절정도 담겨있던 잉크를 내게 권했던 걸 기억해. 나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고 너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가 네 입으로 컵을 가져다댔어. 검은 물이 출렁일 때마다 네 속눈썹이 가녀리게 떨렸었던 것도 같았어. 그 때는 말갛게 웃는 네 얼굴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었어. 나는 그걸 따라하려고 많이도 애를 썼었지. 넌 그 입술로 내게 피와 잉크가 비슷하다고 했었고 나는 내 오른팔을 슬그머니 가렸어.

 

불규칙적으로 생긴 상처들을 볼 때면 숨이 막혀왔어. 아주 진부하게 말이야. 언제나 맞이하는 감정이었지만 늘 새롭게 날 때렸어. 현아, 내 오른팔을 본 적이 없지. 네가 알고 있지 못했던 이야기를 난 지금에서야 고백해. 잉크를 마시는 널 생각하며 피를 마셨어. 피비린내가 점점 옅어지는 것 같았어. 농도가 옅어진 피는 수채화 물감과 닮아있었어. 그럴 때면 난 유화가 그려진 캔버스의 그 거친 표면을 쓰다듬곤 했어. 눈을 비비고 다시 유화 물감처럼 피가 검붉게 진해질 때까지. 그 피가 멎을 때까지 난 반대 손으로 꾸역꾸역 원고지를 채웠어. 딱지가 앉아 피가 더 이상 나지 않는 순간이 잉크가 굳는 순간이었어. 현아, 난 이렇게 글을 썼어.

 

현아, 네가 처음 잉크를 전해줬던 날을 기억해. 입술과 입술 사이 그 작은 틈으로 잉크를 밀어 넣던 순간을 기억해. 그건 아주 달면서 썼고, 차가우면서 뜨거웠고, 단조로우면서 화려했었지. 넌 내게 어떻냐고 물었고 난 바보같이 입에서 소리를 내는 법을 잊었어. 그 전날 꿈에서 봤던 성당 앞 동상처럼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가 없었어. 네게서 항상 나던 냄새가 났어. 잉크 냄새. 네 손에서 나는. 난 그게 아주 새빨갛다고 생각했어. 피와 비슷하단 이유를 알 것만 같았어. 그리고 네가 잉크에 중독되었던 이유도. 현아, 마치 어른들이 술에 의존하고, 마약을 원하는 것처럼 말야. 속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글을 썼어. 내 정신은 잠시 몽롱함 속에 맡겨두고, 위벽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통증 속에서 그걸 무시하며 활자를 하나하나 새겨 넣었어. 네가 그랬듯이 말야.

 

그래서 웃는 원고지를 보는 순간 그 옆의 잉크를 입안에 털어 넣고 말았어. 그 다음에 다가올 고통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어. 네 목소리가 어스름 사이로 들려왔어.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잉크를 펜촉에 적셔 네 이야기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했어. 원고지를 아무리 찢어도 네게 어울리는 글이 나오질 않았어. 네 말간 얼굴 하나, 조곤조곤한 목소리 하나를 묘사하는 게 불가능처럼 느껴졌어. 어쩌면 현아, 나는 잉크가 아니라 네게 중독되었을지도 모르겠어. 손에 잡을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널 계속해서 그려봐. 글을 쓸 수밖에 없는 네가 지금껏 너를 써 왔어. 네가 날 이끌었고, 내가 널 한껏 닮아갔듯이.

 

잉크가 전부 사라져서 책상을 열었는데 거기엔 아직도 너를 위한 잉크들이 빽빽이 쌓여있어.

현아, 어쩌면 나는 네 곁에 가고 싶은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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