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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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의 기억

 

 

숨을 쉴 수 없을 때 머리를 처박는 법을 배웠다.

 

─너 도서관 안 가?

─거기 자리 맡기 힘들잖아.

─그래도 더 집중은 잘 되잖아.

─으음, 그냥 기숙사에서 할래. 귀찮아.

 

기숙사는 조용했다. 으레 방문을 뚫고 복도에서 들리던 수다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아이들은 모두 실어증을 앓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의적으로 입을 다물고 책상 앞에 몸을 붙인 채 펜을 놀리는 행위의 연속이었다. 망가져가는 오른손에 고무줄을 감았다. 프로그래밍 된 알고리즘에 따라 움직이는 마리오네트처럼 반복되는 세계는 시계와 닮아있었다. 문득문득 치솟는 생각이 있었다. 시계초침을 부러뜨리고 싶다. 언제나 같은 리듬의 삶에서 벗어나 죽음의 문을 두드리고 싶다.

다섯 명이 함께 지내는 호실에는 사람의 온기가 남아있지 않았다. 열댓 권의 책들을 의자 밑에 쌓아두고, 그 책들이 한 번씩 손을 거치고 나서야 자신의 호실로 잠시 돌아가 책을 바꾸어 올 뿐이었다. 수학과 과학 책을 잔뜩 가져와 무리의 일원으로서 의무를 다하던 시절이었다. 언어를 머릿속에 C언어처럼 입력하고 올바른 답을 도출하기 위해 잠을 줄였다. 비정상적인 일상생활이 되풀이되었다. 언제나 같은 결과를 이끌어내었고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같은 교재를 잡았다. 책을 바꾸기 위해 호실로 들어가던 찰나, 숨이 들이켜지지 않았던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출력값이었다.

내뱉은 단어들이 없어 들어올 것도 없었다고 판단했을까. 아니면 쓸모없는 몸뚱이가 연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까. 어느 쪽이든, 공기의 유입을 폐가 거부하는 중이었다. 나는 바람 빠진 풍선인형처럼 침대 옆에 주저앉았다. 숨을 들이켜기 위해 하늘을 보고 막힌 공깃구멍을 뚫기 위해 애썼다. 침대 위에 있던 이불이 끌어내려지고, 삶을 갈구하는 몸짓만을 반복했다. 목을 쭉 빼고 어떻게든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처절했다. 죽음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무렵들과 삶의 밧줄을 추악히 그러쥐는 몸뚱이가 겹쳐보였다. 역겨웠다. 그렇게 생의 중단을 꿈꿔왔으면서. 나는 발버둥치기를 멈추고 무릎 사이로 머리를 처박았다. 숨구멍이 트여 죽음의 수갑에서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침대에서 벗어나는 것이 힘든 날이 있다. 할 일들은 자습실 책상 위에 형체를 갖추고 쌓여 있는데, 마치 아지랑이처럼 금세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에 빠져 버리는 날. 몸을 웅크린 채 심장소리를 듣는 중이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찰나들이 연속적으로 찾아온다. 몸이 떨리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제어하면 발끝부터 슬금슬금 기어 올라오는 것들이 있다. 마치 환청처럼, 아른아른. 세상의 아름다운 인식과 상반되는 추악한 섬뜩함.

밖으로부터 차가운 공기가 들어와 문 쪽을 바라보았다. 룸메이트가 슬리퍼를 끌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애는 자신의 노트북을 침대 위에 던져두고 여러 색깔의 책을 챙겼다. 방 안에서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시간은 단 일 분이 되지 않았다. 오직 따뜻한 공기뿐이 남은 기숙사 방 안에서 나는 도망가는 나를 보았다. 고장 난 눈으로 세상을 보고 망가진 팔로 귀를 막아버린. 내가 도피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물처럼 밀려왔다. 알고 있었던, 그러나 결코 알고 싶지 않았던. 다분히 의도적이었지만 믿고 싶지 않았던. 직시하자 숨이 막혀오기 시작했다.

아감구멍을 막아버린 기분이었다. 해부 직전의 개구리처럼 축 늘어져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무방비함. 스멀스멀 올라오는 무력감은 놓아두면 무기력으로 부피를 불린다. 죽음은 그다지 멀리 있지 않다. 주위에서 몸을 숨기고 낚아채 갈 희생양들을 기다리고 있다. 목각인형의 관절부에 매달린 실이 조금만 느슨해지면 죽음은 다가온다. 너는 지금 도피를 하고 있어, 그럼 죽음으로의 도피는 어떨까? 자각할 수도, 인지할 수도 없는 영원한 도피 말이야. 죽음은 끊임없이 속삭인다. 맴돌고 있는 상념 중 어느 것을 잡아채는 것이 최선의 선택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숨을 쉴 수 없었다. 나는 배운 대로 머리를 처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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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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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의 밤

 

비상구의 녹색등이 어스름했다. 깜빡거리는 꼴이 꼭 아까 걸었던 길의 신호등을 닮았다. 자꾸만 혜진의 생각이 났다. 그 애의 때 탄 교복 셔츠, 밑단이 조금 뜯어진 치마, 거듭 비어져 나오던 그림자, 그걸 필사적으로 가리려던 얇은 손가락 마디까지. 나는 내 손가락 마디를 만져보았다. 그 애처럼 얇진 않을 것이다. 자잘한 상처들조차 없다. 지금쯤 상처들은 더 커졌을까. 많이 다쳤을까. 아니면…. 나는 의식적으로 손가락을 뜯었다. 상처가 닮아간다고 해도 달라지는 걸 없다는 걸 알면서,

 

부럽다.

어?

너희 부모님은…

유서를 쓰던 혜진은 말을 늘이는 걸 끝으로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볼펜 딸깍이는 소리도 멈추었다. 그 애의 구겨진 교복 틈으로 오래된 풋사과의 색깔이 보였다. 이따금씩 혜진은 학교에 나오지 않을 때가 있었다. 우리 반에서 혜진을 둘러싼 소문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사실일지 아닐지 모르는 가십거리에 힘을 실어주는 건 다시 등교한 혜진의 뺨에 나 있는 스크래치 자국이었다. 나는 잠시 혜진의 몸을 가리고 있는 교복을 바라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쓰고 있던 유서 한귀퉁이를 구겼다가 다시 폈다. 거기서 더 진전될 리가 없었다. 창문 사이로 들어온 빛이 물처럼 출렁였다. 자꾸만 그 애의 갸날픈 몸이 팔레트같이 보였다. 그 애가 힘주어 깨문 입술은 빨간색 물감이 상한 것 같았다.

 

아주 폭력적인 생각인 것을 알고 있다. 그 애한테도, 나한테도. 그렇지만 그 애보다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교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혜진의 아빠라는 사람이 불쑥 나타나 손목을 잡아끌었다. 혜진의 앙다문 입술이 그리고 있던 수평이 일그러지는 걸 봤다. 몇 번이나 내 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목에 힘을 주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손을 뻗었지만 닿지 못했다. 결국 그 애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난 더디게 나아가는 몸을 재촉했다. 가로등의 전기가 금세 나갈 것만 같이 보였다. 깜빡거리는 불빛을 따라 그림자가 함께 깜빡거렸다. 위태로움을 눈앞에서 보는 것은 늘 어려웠다. 나는 고개를 똑바로 한 채 앞만 보기 시작했다. 소리가 자꾸만 귀 안에서 메아리쳤다. 너희 부모님은…. 그 애가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안다. 혜진과 난 닮아도 한참이나 닮아있었다. 적막을 싫어했다. 목소리가 파묻히는 걸 두려워했으며 작은 소음에도 깜짝깜짝 놀라기 일쑤였다. 다른 점이라면 혜진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온통 어둡고, 나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온통 밝다는 것 정도였다. 지금 내 생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영양가 없는 생각들. 전부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죽고 싶어. 나도.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 그만 살고 싶지? 어. 우리 같이 죽자. 어? 언젠간 외국으로 떠서 안락사 같이 하자고. 그거 비싸잖아. 그러게. …. 그럼 그냥 같이 뛰어내리자. 언제? 스무 살 되기 전에. 그래놓고 안 죽을 거잖아. 유서 오백 장 되는 날 그 때 죽자. 그래. 같이 죽자. 그래.

뭐가 문제지? 우리는 언제나 유서를 같이 썼고 펜을 비웠다. 그걸 교환해 읽고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 애의 유서는 온통 빨간색이었다. 피로 유서를 쓴 것도 아닌데 읽다 보면 세상이 계속해서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 색깔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글로 자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사건들이 터진 채로 곪아가고 있었고 절박한 절규들이 그 틈을 메웠다. 그에 비해 나는 그저 평범한 고등학생일 뿐이었다. 잘못된 점이 없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다정한 부모님과 그럭저럭 괜찮은 친구들과의 관계. 풍족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은 재정적인 지원들과 감정적인 응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안정했고 죽음을 꿈꾸었다. 미쳐도 내가 단단히 미친 거였다.

 

유서를 써야 했다. 아까 다 쓰지 못했는데 펜과 종이는 혜진에게 있었다. 피씨방의 문을 열었다. 시계가 아홉 시를 가리켰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 본체를 켰다. 교복을 입은 앳된 남학생들은 게임을 했고, 컵라면을 옆에 쌓아두고 포커를 치고 있는 아저씨도 있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숨을 쉬었다. 내가 죽기 전에 뽑아 놓을 유서를 써야 했다. 글은 내가 되고 나는 글이 된다. 순간마다 활자들과 함께 간신히 호흡했다. 죽고 싶어서 유서를 쓴다. 죽음을 미루기 위해서 유서를 쓴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몰랐다.

나는 감정을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한글 파일에 빨간 줄이 자꾸 보였다. 흑백으로 이루어진 파일에 긁힌 흔적은 환영받지 못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그걸 지웠다가 되돌리기 버튼을 눌렀다. 그게 혜진의 상처와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온전치 못했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절대로 바로잡을 수 없었다. 그 애는 나를 지지대로 삼고 있었을까? 난 그걸 오래오래 바라보다가 다시 글을 썼다. 빨간 줄이 자꾸만 그어졌다. 내버려두었다. 혜진의 상처는 피부에 있었다. 어쩌면 내 상처는 나일지도 몰랐다. 화면에 상처가 늘어갔다. 어느 순간 손을 멈추었다. 의자를 돌려 다른 사람들의 모니터 화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그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나는 커서가 깜빡이는 것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들의 세계를 구경했다. 모니터가 일제히 꺼지기 전까지는.

 

열 시였다. 미성년자는 나가라는 알바생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발소리 여럿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꺼진 모니터 앞에서 아이들이 몰려나가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혼잡했다. 각자의 세계가 엉키듯. 전원을 내려버린 순간에 아흔 아홉 대 정도의 컴퓨터가 꺼졌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동시에 아흔 아홉 명의 사람이 죽어버리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나는 쓰고 있던 내 유서가 전부 날아갔다는 걸 알아챘다.
자살할 날까지 하루가 더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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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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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료수

 

 

현아, 오늘 아침으로 토스트를 먹었어. 토스트기에 식빵을 넣어둔 걸 깜빡해서 이미 식었더라. 다시 구웠을 땐 조금 타긴 했지만 그나마 먹을 만 했어. 햇빛은 어쩐지 사람을 나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단 말이야. 토스트기를 누르고 기다리는 시간 동안 나도 모르게 정신을 까무룩 놓는 모양이야. 아침에 일어나는 게 그렇게 힘든 것도 아닌데 말이야. 오전의 나른함은 묘하게 이질감을 불러일으켜. 다시 자지 않으려고 이불을 개고, 창문을 열고. 나답지 않게 부산스러움을 조금 떨고서야 제대로 된 토스트를 먹을 수 있었어. 네가 맛있다고 했던 딸기잼을 펴 발랐어. 따뜻한 딸기 냄새가 좋아서 잠깐 행복해졌고, 짧은 순간에 너를 생각했어. 계란프라이를 해서 올려 먹을까 하다가 설거지거리가 늘어난다는 생각에 금방 고개를 저었고, 대신 검은색 잉크를 유리컵 가득 채워서 마셨어.

 

성당 앞을 지나다가 잠시 걸음을 멈췄어. 스테인드글라스가 여러 색으로 반짝였어. 빛이 쏟아지듯 내렸고, 한여름의 열기가 아지랑이를 피웠는지 성당이 이리저리 흔들렸어. 성모 마리아 상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고 문득 무서워졌어. 몸이 굳었어.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것 같아서 뒤로 돌아 걸었어. 걸음이 점점 빨라졌어.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리가 뛰고 있더라. 내 폐를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조금 당황스러웠어. 잠깐 숨을 고르다가 다락방으로 올라갔어. 거기 다다르는 순간 다리가 풀려서 주저앉고야 말았어. 원고지가 날 보고 웃는 중이었어.

 

언젠가 너한테 잉크를 어떻게 마시는지가 궁금하단 질문을 했었지. 네가 환하게 웃으면서 유리컵에 반절정도 담겨있던 잉크를 내게 권했던 걸 기억해. 나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고 너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가 네 입으로 컵을 가져다댔어. 검은 물이 출렁일 때마다 네 속눈썹이 가녀리게 떨렸었던 것도 같았어. 그 때는 말갛게 웃는 네 얼굴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었어. 나는 그걸 따라하려고 많이도 애를 썼었지. 넌 그 입술로 내게 피와 잉크가 비슷하다고 했었고 나는 내 오른팔을 슬그머니 가렸어.

 

불규칙적으로 생긴 상처들을 볼 때면 숨이 막혀왔어. 아주 진부하게 말이야. 언제나 맞이하는 감정이었지만 늘 새롭게 날 때렸어. 현아, 내 오른팔을 본 적이 없지. 네가 알고 있지 못했던 이야기를 난 지금에서야 고백해. 잉크를 마시는 널 생각하며 피를 마셨어. 피비린내가 점점 옅어지는 것 같았어. 농도가 옅어진 피는 수채화 물감과 닮아있었어. 그럴 때면 난 유화가 그려진 캔버스의 그 거친 표면을 쓰다듬곤 했어. 눈을 비비고 다시 유화 물감처럼 피가 검붉게 진해질 때까지. 그 피가 멎을 때까지 난 반대 손으로 꾸역꾸역 원고지를 채웠어. 딱지가 앉아 피가 더 이상 나지 않는 순간이 잉크가 굳는 순간이었어. 현아, 난 이렇게 글을 썼어.

 

현아, 네가 처음 잉크를 전해줬던 날을 기억해. 입술과 입술 사이 그 작은 틈으로 잉크를 밀어 넣던 순간을 기억해. 그건 아주 달면서 썼고, 차가우면서 뜨거웠고, 단조로우면서 화려했었지. 넌 내게 어떻냐고 물었고 난 바보같이 입에서 소리를 내는 법을 잊었어. 그 전날 꿈에서 봤던 성당 앞 동상처럼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가 없었어. 네게서 항상 나던 냄새가 났어. 잉크 냄새. 네 손에서 나는. 난 그게 아주 새빨갛다고 생각했어. 피와 비슷하단 이유를 알 것만 같았어. 그리고 네가 잉크에 중독되었던 이유도. 현아, 마치 어른들이 술에 의존하고, 마약을 원하는 것처럼 말야. 속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글을 썼어. 내 정신은 잠시 몽롱함 속에 맡겨두고, 위벽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통증 속에서 그걸 무시하며 활자를 하나하나 새겨 넣었어. 네가 그랬듯이 말야.

 

그래서 웃는 원고지를 보는 순간 그 옆의 잉크를 입안에 털어 넣고 말았어. 그 다음에 다가올 고통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어. 네 목소리가 어스름 사이로 들려왔어.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잉크를 펜촉에 적셔 네 이야기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했어. 원고지를 아무리 찢어도 네게 어울리는 글이 나오질 않았어. 네 말간 얼굴 하나, 조곤조곤한 목소리 하나를 묘사하는 게 불가능처럼 느껴졌어. 어쩌면 현아, 나는 잉크가 아니라 네게 중독되었을지도 모르겠어. 손에 잡을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널 계속해서 그려봐. 글을 쓸 수밖에 없는 네가 지금껏 너를 써 왔어. 네가 날 이끌었고, 내가 널 한껏 닮아갔듯이.

 

잉크가 전부 사라져서 책상을 열었는데 거기엔 아직도 너를 위한 잉크들이 빽빽이 쌓여있어.

현아, 어쩌면 나는 네 곁에 가고 싶은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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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지지 않은 그림자는 표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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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하게 빠져들었어야만 했다

 

손을 잡았던 날들과 사람들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파노라마처럼 그려지는 흔적들
팔찌 안에 숨겨두었던 날붙이의 악보들을 연주하는
나는 외로움에게 위로받았다

 

외로웠던 적이 있는 사람은 약속을 하지 않지
새끼손가락이 다가올 때 사라지던 별 조각들
가냘파 부러질 수 없다는 걸 안다 이미 흐르고 있었으므로

 

그래서 나는 죽음을 갈구한다는 시를 언젠가 썼던 것도 같다

 

기억이 나지 않는 아득한 어제가
지독한 추위를 던지며 등을
떠민다

 

묻어두었던 기억들이 유일하게 고개를 쳐들던 시간은 점점이 깨어지며
거기 마른 얼음 바닥에 뺨을 대고 있던
홀로 살아가는 우연의 연속이 너는 언제까지 녹아내릴 거냐고 물었다
그림자는 갈라지지 않았는데 갈라지는 법을 배우지 않았는데 자신의 피부를 스스로 가르는 법을 배우지 못했는데

 

발자국이 시간 위에 머물면서 태어난 기억을 소거한다
장미에게 필요 없는 잔가지들을 쳐내며

 

어린왕자가 자신의 발목을 자른다

 

네가 세 시에 온다고 하면 나는 두 시부터 도망치고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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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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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나날은 달을 맞는다
직선이 콘크리트 바닥을 가늘게 따라

 

거길 걸었다
달빛이 녹아 만들어진 웅덩이로
신발코를 길게 적시면서

 

번지는 빛과 물드는 사람들
각각의 노랑
정리된 개념들을 색칠하는 것처럼

 

한가운데를 지나며
숨 쉬는 시간이 잘못임을 상정한다
몸을 가로지르는 실선과
지저분하게 지워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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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쳐가는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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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밤, 별이 춤추던 모양을. 자취로 방정식을 그리고 자유롭게 낙하하던 불꽃놀이의 꼬리를.

 

거긴 내 자리였어야 했는데. 두 손에 폭죽을 쥐고 넌 행복하게 고깔의 노래를 부르는 중이었어. 딸기 케이크의 속을 파먹는 건 나였어야 했는데. 그랬어야 했는데.
네가 바다 속으로 벗어던진 교복은 네 것이 아니었는데. 짧게 잘라낸 머리카락, 툭 튀어나온 성대, 단단한 종아리, 장미와 향수와 반지, 다 네 것이 아니었는데.

 

그 말캉한 입술과 점막을 처음으로 까끌하게 부벼대던 게 내 혀였어야 했는데.

 

단조롭게 헤엄치는 알파벳들을 사전 순서대로 정렬했을 때. 나는 죽음을 예감했었지. 나의 이니셜은 네 바로 앞이었고, 엑스, 엑스, 와이… 물을 잔뜩 머금어 헤엄치며. 내 이름은 아무리 눈을 감아도 기억나지 않는데, 너는 이름이 뭐니?

 

태어나던 순간의 울음 조각들을. 붉어지던 양수와 녹진하게 물드는 세계를. 살의 연한 조직들이 생선 대가리처럼 끊기는 통증을. 네가 할퀸 심장들과 뜯어먹은 피부조각들을. 앉아 소꿉장난을 하던 놀이터 바닥의 모래와 그걸 뭉쳐 만든 팬케이크를.

 

조각보가 필요하지, 얇게 저민 살점들을 꿰매 만들자. 내게 먹을 수 없는 빵을 구워줘. 끝없이
부풀어 오르다가 터져 버릴 수 있게. 눈알을 깨어 계란으로 사용하고 채 자라지 않은 나팔관을 뽑아 갈아다가 후추처럼 뿌리자. 목덜미에 이를 박아 끄집어낸 신경을 리본처럼 묶어 장식해줘.

 

네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야 했는데.
아가리를 벌리고 날 빨아들이던 금속은 없었어야 했는데.
그럼 너도 없었어야 했는데.

 

이건 훔쳐가는 게 아니라 돌려받는 거야.

 

길게 늘어지는 발자국 위로 혀가 가볍게 끌리고. 보송하게 부풀어 오른 네 위로 내가 내리고. 살해당한 나와 보존된 너, 끝없이 지워지던 자궁의 톱톱한 이름들과, 깨어지던 존재마다

 

자전거를 타고 달 위를 넘어가고.

 

*진은영의 시집 제목 <훔쳐가는 노래>에서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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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벼락에 문을 그렸어

빛나는 해파리는 파란 물을 토했어

구름을 찌른 콘크리트 사이에서

죽어가고 있던 순간이었어

 

뒤돌아보지 말고 뛰어

속삭임은 옅었고 빛은 작았지

간격을 신고 색에 물든 공기를 찢었어

목을 조르는 좁은 벽

모서리 위를 달렸어

 

멈춘 시간 속에서 네 목소릴 생각했어

넌 왼쪽으로 계속 걷자고 했지

오른쪽 벽에 손이 녹아드는 중이었어

우린 미로 안에 들어와 있는데

 

달이 멎은 어느

골목길의 문을 열어보면

별의 파편들이 달리고 있었어

여운처럼

 

새벽을 닮은 크레파스로

미로의 창백한 입구를 그리는 중이야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은 우리의 호흡이

다시 닿을 수 있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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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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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커져서 그림자가 길어진 줄 알았어

 

몸을 돌려 눈을 떴는데 빛이 웅크렸어
까치발이 잠긴 웅덩이가 구르는 중이야
다리가 빠질 것 같았는데
헐거운 공기 위를 뛰어가고 있는 거였어

 

조각난 해가 천천히 부식되던 나무에서
빛이 갈기갈기 찢겨 있는 걸 봤어
양 모양이었던 내가 구름으로 커져가
멈춰줘

 

멀어지는 이야기

 

희미해진 직선과 맞닿을 수 없다고
무채색으로 번져가는 세계와
그림자가 갈라진 입술 모양으로
손등에 입 맞추는, 죽어가는, 빛

 

구름 위로 쓰러지고 있는 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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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천으로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있는 사회에게 외친다 : 김사과, 미나 (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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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수많은 문제점들이 숨겨지는 순간이 있다. 존재의 부재가 정상으로 판단되는 순간이 있다. 특히 타인에게 보이는 면모를 중요시하는 곳에서는 끊임없이 이 이상현상들이 숨겨지고, 은폐되고, 또 공공연하게 포장되어 집단 밖으로 퍼져나가지 못하도록 막는다. 문제점은 죄악으로 치부되어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부여하고 마침내는 그들 스스로 입을 닫게 만든다. 여기 닫힌 입을 벌려 소리치는 작가가 있다.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눈앞에 들이밀며 이것이 바로 너희가 외면하고 싶어했던 진실, 이라고.

김사과가 지금까지 투고한 작품 중 걸작을 꼽으라고 하면 필자는 망설이지 않고 <미나>를 택한다. 물론 <02>와 <천국에서> 또한 그에 준하는 수작이나 미나는 장편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두 명의 주인공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데, 각각의 인물들의 감정표현과 그에 어울리는 문체 선정이 천재적이라고 평해도 아깝지 않다. 신예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영이>를 발표하던 시절부터 김사과의 독창성은 빛났고, 피크에 도달했을 때의 작품이 <미나>라고 볼 수 있겠다.

<미나>는 이상향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이상향이 유토피아, 즉 미의식을 자극하는 순수함을 불러일으켰다면, 김사과가 펼쳐내는 이상향은 어지럽혀지고 멸종 직전의 세계인 디스토피아를 상상하도록 만든다. 병리학적 지점에서 <미나>의 주인공 수정은 정서적 결여와 분리장애, 그리고 경계선 인격장애를 함께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현대인들이 대체적으로 지니고 있는-그러나 인정하려 들지도 않고 인정하고 싶어 하지도 않고 심지어 자각하는 행위조차 죄악으로 여기는-정신분석학적 문제들이다. 김사과는 이러한 사회의 염증을 그대로 직면하고 돌파한다.

또 다른 주인공 미나 또한 수정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 둘 다 현대사회의 부조리함과 모순점을 인지하고 염증을 느끼며 증오와 경멸을 품고 있는 동시에 무관심한 태도를 내비친다. 둘은 사회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둘은 서로를 이해한다.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이해관계에 기초한 관계이다. 명민한 미나와 수정은, 더 나아가 아이들은 세계에서 비추어지는 핑크빛 미래가 허상과 허영과 가식과 황홀한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그렇기에 세계가 자신들에게 요구하는 개념과 질서와 규칙과 법률들을 배반하고 무시하고 증오한다.

아이들은 세계에서 감각을 제거하는 행위로서 연명한다. 세계에 대해 냉소적으로 일관하는 아이들은 의식적으로 감각을 제거했거나, 무뎌지고 무뎌져서 이제는 더 이상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아이들은 이렇게 살아간다. 수동적인 세계를 견뎌낼 수 있는 방법은 경멸이다. 경멸과 무관심으로 대응함으로서 아이들은 세계의 타자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타자성을 인정한 이들은 낙오자로 치부한다.

셔터를 내리는 것은 일종의 방어기제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아이들은 생존을 위해 방어기제의 발현을 익힌다. 이것이 깨지는 것은 자살과 살인이 일어날 때뿐이다. 이 순간 방어기제는 필요하지 않다. 죽음은 세상과 긴밀하게 상호작용하고 있던 감정의 전원을 내려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단편적으로밖에 보이지 않으나, 박지예는 감각을 제거하는 행위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한다. 뚜렷한 명목은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박지예의 자살은 다른 지친 아이들에게 기폭제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박지예가 자살함으로서 미나와 수정은 세계의 타자성을 인식한다. 자신과 세계는 별개의 문제이다.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시험을 보아야 하는 사실은 변함이 없고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살아남아야 한다. 여기에서 미나는 세계에 대한 증오와 무관심을 꺼뜨려버린다. 감정에 동화되어 시험을 백지로 내는 완벽하게 가련한 소설 속 여주인공의 모습을 연출한다.

수정은 미나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미나가 감정이 없는 세계에서 떠난다. 그래서 수정은 미나의 슬픔을 질투한다. 질투는 애착과 사랑을 유발하면서 극단적으로 피폭된다. 자신이 모르는 것은 없어야 하며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 또한 없어야 한다. 미나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그리고 유일한 사람이다. 이해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간단하다. 죽이면 된다. 이해의 개념을 소유의 개념으로 치환하면 된다.

수정은 21세기의 엘리트들의 극단적인 표상이다. 사회의 염증을 느끼고 무관심과 증오로 일관하지만 영리한 수정은 제게 유리한 것을 인지할 만큼 영악하다. 수정은 사회 체제를 바꾸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자신이 위에서 군림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는 수정의 논술 답안에서도 드러난다. 자신의 글 안에 조악한 세계를 가두어 버리려는 시도이다.

수정의 사고방식은 전형적인 경계선 인격장애 환자의 사고방식과 유사하나 완벽함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 특이성을 찾아볼 수 있다. 다가올 때는 불안해하지만 한편으로는 소유하고 싶어한다. 두 충돌은 사람의 정신을 공격해 두 인격이 마치 한 몸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해서 수정은 미나를 한순간 사랑스럽게 여겼다가 다음 순간 구역질 날 것만 같이 혐오스럽고 비천하게 여기고, 그 다음 순간에는 미나를 다시 아름답다고 칭하며 숭배하는 것이다.

수정은 여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간다. 엘리트의 길을 걸어왔기에 모든 것이 완벽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것은 혼자 분투하는 외로움의 싸움이고 수정에게는 자신이 인정받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수정은 완벽하게 불안해하고 완벽하게 소유하고 싶어한다. 미나가 제게 손을 내밀었을 때는 거리를 두더니 미나가 떠날 때에서야 붙잡는다. 그러나 늦었다. 미나는 이미 감정을 알았고 수정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완벽한 세계에 흠집이 나서는 안 되기 때문에. 수정은 이 사소한 균열을 계기로 미나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서 떠나려 하면 극단적인 부정현상을 보이며 폭력적이고 악하게 변모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BPD(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 경계선 인격장애)이다. BPD를 앓고 있는 이들에게 중립은 없다. 오로지 선과 악만 존재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친밀하게 붙어 다녔던 이, 즉 절대선적 존재가 오늘 자신을 밀어내려 한다고 생각하면 절대악적 존재가 되는 것이 BPD의 주요 증상이다. 그렇기에 수정에게 중립은 없다. 미나는 이제 절대선이 아니라 절대악이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어서 이해하기 위해 다가갔으나 미나는 이미 수정과는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 수정이 낙오자로 부르는 그 세계에서 미나는 만족하고 살아간다. 수정은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

수정은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완벽주의를 작품 전반에서 드러낸다. 알 수 없으면 알아내야만 하고 완벽하지 않으면 완벽해야만 한다. 이것이 수정이 미나를 죽이는 이유다. 자신이 모르는 감정을 알기 위해서. 너를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 정당화 현상에 의해 이것은 필연적이고 필수적인 자신의 권리라고 수정은 생각한다. 수정의 감정은 극에 달한다. 미나를 죽이기 전 아기고양이를 죽일 때, 수정은 일시적 해리상태를 경험한다. 자신과 자신이 분리되어 자신이 아닌 상태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자신인 상태에서 후회하다가 다시 자신이 아닌 상태에서 깔깔거리며 비웃는다. 그 과정에서 수정은 생물에서 무생물로 전락한다. 의식이 있는 상태의 수정은 생물이다.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수정은 무생물이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자신이 아니라며 회피하고 부정하는 것. 사람이 어떠한 사실을 받아들일 때 사용하는 제1단계 방어기제가 여기서 발현된다.

마침내 미나를 죽일 때 수정은 고백한다. 이제야 네 심장을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노라고. 수정은 황홀해한다. 정복감과 소유욕을 충족시키는 쾌락은 어떠한 행위로도 대체될 수 없다. 수정은 그것을 안다. 마침내 수정은 미나의 심장을 손에 쥔다. 감정을 느꼈을까? 작가는 그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수정은 행복해한다. 몰랐던 지식을 마침내 습득했다는 것에 대한 흥분감과 미나를 드디어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성취감의 혼재다.

지금까지 수정이 알고 있었던 세상은 자신이 노력하면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세상이었다. 곧 기출문제나 수학문제와도 같은 것이다. 기출문제와 시험은 글 안에서 내내 수정의 세상으로 표상된다. 가장 안락하고 아늑하고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이것은 수정에게 절대적 진리이고 수동적 행태를 취하게 하는 가장 대표적인 공리이다. 동시에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주입하려는 거짓된 정보이고 십대들이 나름대로의 시기를 거치면서 거짓임을 알아가게 되는 한 가지의 작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수정은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인정하지 못해서 죽여야만 한다. 이것은 수정의 자기합리화가 아니다.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는 계획적 범죄다.

수정은 아무리 노력해도 답이 없어 보이는 난제를 인정하지 못한다. 언제나 수정은 문제를 완벽하게 풀어왔고 그것으로 안정감과 소속감을 추구했다. 수동성으로 무장하고 있던 수정에게 닥친 최초의 난제는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수동성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미나이다. 난제는 풀어야만 한다. 수정의 세상에서는 그렇다. 엘리트의 길을 걸어왔고 어른들이 쌓아올린 모든 사고방식과 정치적 교육적 체제를 부정하고 깔보고 우스워하면서 자라난 수정은 그렇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 결국 수정은 미나를 죽임으로서 난제를 해결한다. <미나>는 수정 나름대로의 해결방법을 제시함으로서 맺음을 인정한다.

사랑이 애증으로 변하고 애증이 증오와 경멸과 살해의식으로 변모하는 과정은 상당히 비약적이고 격동적이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극단성을 지니고 있으나, 실은 그것이 사회의 염증으로 인해 벌어진 상처를 감추는 과정에서 드러난 피폐성을 눈앞에 가져다 둔 것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수정의 문제가 아니다. 미나의 문제가 아니다. 박지예의 문제도 아니다. 이 작품에 나오는 어떠한 사람의 문제도 아니다. 이것은 사회의 문제이다. 김사과는 이러한 현실에 분노를 표출하는 수단으로 글을 택했고 <미나>는 정점의 폭발이었다.

이것은 비단 수정과 미나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수정이 경계선 인격장애를 앓고 있어 이러한 비윤리적으로 표상되는 행태를 자행한 것도 아니고, 미나의 나약함 때문에 수정의 트리거를 당긴 것도 아니다. 이것은 십대들의 이야기이다. 거쳐야 하는 나날의 치열함을 매개로서 공감을 의도적으로 차단하는 이들의 이야기이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때로는 경험하지 못한 상처를 우스워하는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한 명 한 명이 수정이고 미나이다. 단지 그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들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제도와 매커니즘이 불합리하고 불온전하며 모순적이라는 것을 안다. 당장 열아홉에서 스물로 바뀌면 주어지는 모든 것들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열아홉이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면 눈앞의 공부에 집중하라며 타박하고 정치색과 정당을 언급하며 저지한다. 그러나 스물이 되는 순간 어린 청년들은 정치에 대해 완벽하게 알고 있어야 하며 자신의 정치적 견해와 소신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사람들로 변모한다.

어른들은 학생들에게 완벽해질 것을 강요한다. 완벽함에 대한 어른들의 기준은 학생들을 옭아맨다. 자신의 상처를 의사에게 드러내어 치료하기는커녕 눈앞에서 수많은 눈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에 숨겨 동여매기에만 바쁘다. 이것이 학생들을 수정으로 만들고 미나로 만들고 지예로 만든다. 결국 모두 아파할 수밖에 없다.

결국 상처는 곪아 치료할 수 없는 상태로 썩어간다. 이 갇힌 세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의식적으로 소리쳐야 한다. 우리는 불온한 규율에 몸을 끼워 맞추지 않을 것이라, 고. 아픔은 부끄러운 것도 숨겨야 할 것도 아니며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아픔이라, 고. 선악과를 내밀며 속삭이는 미래가 실은 이상향에 불과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고. 이것이 바로 김사과가 사람들을 향해 외치는 메시지가 아닐까.

 

연장원 퇴고작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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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목마의 꼭대기
원을 그린다

 

몸이 녹아가고 있어
캔버스에 갈색 물감을 적시고
남아버린 발자국

 

너는 하늘과 맞닿은
활자들의 세계 속
궤도를 도는 중

 

같은 길
넌 날 만나고
내게 에스코트를 부탁했다

 

올 나간 스타킹이
간판에 걸린 채
발레를 해, 토슈즈와

 

수채화는 동그랗게
스텝을 밟아
네 눈꺼풀을 깨문다

 

책장마다 묻은 각자의 숨
넌 멎지 않기 위해
달리는데

 

있지,
원이야

 

모서리가 닳아 없어진
동그라미야

 

여덟을 넘어뜨렸어
목마가 선로 위를 움직이고
넌 여전히 제자리야

 

책이 둥글게 말려있어
서사가 한없이 이어지는
너의 저글링처럼

 

새벽과 밤을 기워 만든
커피 향 잠옷을 걸치며
넌 서점에서 줄곧 아픈 원을 그려

 

브레이크를 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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