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적 불안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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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 점으로 절단될 때 우리의 소란이 적막으로 포장될 때 사람의 감정이 가느다란 충돌같이 얇아질 거란 걸 예감할 때 뱃지의 도색이 깔끔하지 않게 매달려 있을 때 인간일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잠잠히 짐을 싸서 이 행성을 떠날 때 우리의 사랑은 늘 거기 없었고 다만 토성의 고리 사이에서 얼어붙어 형체도 없이 시야에서 잠적했다는 걸 오래된 라디오에서 들었을 때 현상을 집합적으로 나열하고 정작 감정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이미지만 그려낼 때

 

시인은 열망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도 냉소해야 합니다

선생님, 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고 난 당신은 간신히 뜨겁게 울었습니다 우리의 리시안셔스가 시들기 시작하는 걸 보았습니다 아무리 낯설어도 낯설 수 없어야 하는 손끝과 시시때때로 뒤바뀌어 엉키는 당신의 표정들은 도무지 소리내어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서로를 구원할 수 없는 슬픈 이족보행동물들의 울음이 창틀에 금을 내고 깨지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부풀어 오르다가 삐걱이는 다리의 마지막처럼 무너지지 말고 꼭 우리가 초래한 재앙을 당신 혼자 삼키지 말고요 난 나의 열망을 잃지 않았다고 나직하게 비명하면서 눈을 안대로 가렸습니다 녹아내리면서 유동적인 불안들을 자꾸만 이것은 미래를 위한 식물이라는 단순한 유희로 치환하면서

 

우리의 안구에 빗금처럼 습기가 들어찰 때 손목에 남은 양호한 흉터가 거의 망각의 축복을 받았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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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밈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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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된 뮤지컬이 햇빛처럼 쏟아지는 밤마다 고양이가 조향한 향수를 마셨어 고민처럼 외줄타기를 하다가 어느 수식어가 가장 어울릴지 눈에 넣어 보는 우리의 시선들

 

동공이 커져서 빛이 죄다 번지면 옷장에서 한 입 베어물다 만 이빨 자국을 머리핀처럼 꽂고 다 찢긴 손목 위에 말라붙을 그림을 그릴 거야 심장을 하트 모양으로 도려내 뺨에 붙이고 다 터진 실핏줄이 보이면 그 위로 하얗고 자글자글한 욕설들이 단조롭게 흩어져 눈밑을 반짝 장식하겠지

 

호우주의보가 경보로 또 폭설경보로 치환되던 시간엔 우리가 참아 오기만 했던 가장 아름다운 구절들을 입지 않을래 잔혹하기 때문에 익사할 수밖에 없었던 감긴 눈꺼풀 안쪽에서 몸을 웅크리고 나날이 부풀어가던 열대어들까지도, 실어증을 앓는 우리의 손끝은 뻐끔거리고 아직도 향수 냄새가 고양이 털처럼 남아있어

 

난 앞에 벌려 둔 채도들을 수습할 생각이 없어 이를테면 그건 우리의 시신들을 각자 챙겨 화장터로 업고 가는 일 다만 한 손바닥 크기의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입을 모아 노래를 부르는데 우리는 녹아내리면서도 서로에 서로를 꼬리물듯 찍어 맛보는데

 

웃을 수가 없어서 당신의 미소를 잠깐 훔쳐 발랐어요 잠잠히 매달린 재난이 혹은 재앙이 너무 눈이 부셔서 숨을 쉴 수가 없었지 무도회에 쓰고 갈 가면이 필요해서 얼굴은 더 이상 얼굴이 아니었고,

 

나는 유리병 속에 담겨서 온통 향기롭게 찰랑거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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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나 오랜만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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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글을 쓰고 있기도 했고, 연달아 닥쳐오는 백일장이며 공모전을 마감하는 데 급급했던데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로 3년차인 글틴의 글은 어쩐 일인지 애정으로 읽고 있었기에 이렇게나 활동을 안 했나 싶네요. 3월 글을 마지막으로 사라져 버린 거 같기도 하고, 새로운 분들도 많이 보이고요. 앞으로도 좋은 시 많이 기대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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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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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의 기억

 

 

숨을 쉴 수 없을 때 머리를 처박는 법을 배웠다.

 

─너 도서관 안 가?

─거기 자리 맡기 힘들잖아.

─그래도 더 집중은 잘 되잖아.

─으음, 그냥 기숙사에서 할래. 귀찮아.

 

기숙사는 조용했다. 으레 방문을 뚫고 복도에서 들리던 수다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아이들은 모두 실어증을 앓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의적으로 입을 다물고 책상 앞에 몸을 붙인 채 펜을 놀리는 행위의 연속이었다. 망가져가는 오른손에 고무줄을 감았다. 프로그래밍 된 알고리즘에 따라 움직이는 마리오네트처럼 반복되는 세계는 시계와 닮아있었다. 문득문득 치솟는 생각이 있었다. 시계초침을 부러뜨리고 싶다. 언제나 같은 리듬의 삶에서 벗어나 죽음의 문을 두드리고 싶다.

다섯 명이 함께 지내는 호실에는 사람의 온기가 남아있지 않았다. 열댓 권의 책들을 의자 밑에 쌓아두고, 그 책들이 한 번씩 손을 거치고 나서야 자신의 호실로 잠시 돌아가 책을 바꾸어 올 뿐이었다. 수학과 과학 책을 잔뜩 가져와 무리의 일원으로서 의무를 다하던 시절이었다. 언어를 머릿속에 C언어처럼 입력하고 올바른 답을 도출하기 위해 잠을 줄였다. 비정상적인 일상생활이 되풀이되었다. 언제나 같은 결과를 이끌어내었고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같은 교재를 잡았다. 책을 바꾸기 위해 호실로 들어가던 찰나, 숨이 들이켜지지 않았던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출력값이었다.

내뱉은 단어들이 없어 들어올 것도 없었다고 판단했을까. 아니면 쓸모없는 몸뚱이가 연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까. 어느 쪽이든, 공기의 유입을 폐가 거부하는 중이었다. 나는 바람 빠진 풍선인형처럼 침대 옆에 주저앉았다. 숨을 들이켜기 위해 하늘을 보고 막힌 공깃구멍을 뚫기 위해 애썼다. 침대 위에 있던 이불이 끌어내려지고, 삶을 갈구하는 몸짓만을 반복했다. 목을 쭉 빼고 어떻게든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처절했다. 죽음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무렵들과 삶의 밧줄을 추악히 그러쥐는 몸뚱이가 겹쳐보였다. 역겨웠다. 그렇게 생의 중단을 꿈꿔왔으면서. 나는 발버둥치기를 멈추고 무릎 사이로 머리를 처박았다. 숨구멍이 트여 죽음의 수갑에서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침대에서 벗어나는 것이 힘든 날이 있다. 할 일들은 자습실 책상 위에 형체를 갖추고 쌓여 있는데, 마치 아지랑이처럼 금세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에 빠져 버리는 날. 몸을 웅크린 채 심장소리를 듣는 중이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찰나들이 연속적으로 찾아온다. 몸이 떨리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제어하면 발끝부터 슬금슬금 기어 올라오는 것들이 있다. 마치 환청처럼, 아른아른. 세상의 아름다운 인식과 상반되는 추악한 섬뜩함.

밖으로부터 차가운 공기가 들어와 문 쪽을 바라보았다. 룸메이트가 슬리퍼를 끌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애는 자신의 노트북을 침대 위에 던져두고 여러 색깔의 책을 챙겼다. 방 안에서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시간은 단 일 분이 되지 않았다. 오직 따뜻한 공기뿐이 남은 기숙사 방 안에서 나는 도망가는 나를 보았다. 고장 난 눈으로 세상을 보고 망가진 팔로 귀를 막아버린. 내가 도피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물처럼 밀려왔다. 알고 있었던, 그러나 결코 알고 싶지 않았던. 다분히 의도적이었지만 믿고 싶지 않았던. 직시하자 숨이 막혀오기 시작했다.

아감구멍을 막아버린 기분이었다. 해부 직전의 개구리처럼 축 늘어져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무방비함. 스멀스멀 올라오는 무력감은 놓아두면 무기력으로 부피를 불린다. 죽음은 그다지 멀리 있지 않다. 주위에서 몸을 숨기고 낚아채 갈 희생양들을 기다리고 있다. 목각인형의 관절부에 매달린 실이 조금만 느슨해지면 죽음은 다가온다. 너는 지금 도피를 하고 있어, 그럼 죽음으로의 도피는 어떨까? 자각할 수도, 인지할 수도 없는 영원한 도피 말이야. 죽음은 끊임없이 속삭인다. 맴돌고 있는 상념 중 어느 것을 잡아채는 것이 최선의 선택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숨을 쉴 수 없었다. 나는 배운 대로 머리를 처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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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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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의 밤

 

비상구의 녹색등이 어스름했다. 깜빡거리는 꼴이 꼭 아까 걸었던 길의 신호등을 닮았다. 자꾸만 혜진의 생각이 났다. 그 애의 때 탄 교복 셔츠, 밑단이 조금 뜯어진 치마, 거듭 비어져 나오던 그림자, 그걸 필사적으로 가리려던 얇은 손가락 마디까지. 나는 내 손가락 마디를 만져보았다. 그 애처럼 얇진 않을 것이다. 자잘한 상처들조차 없다. 지금쯤 상처들은 더 커졌을까. 많이 다쳤을까. 아니면…. 나는 의식적으로 손가락을 뜯었다. 상처가 닮아간다고 해도 달라지는 걸 없다는 걸 알면서,

 

부럽다.

어?

너희 부모님은…

유서를 쓰던 혜진은 말을 늘이는 걸 끝으로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볼펜 딸깍이는 소리도 멈추었다. 그 애의 구겨진 교복 틈으로 오래된 풋사과의 색깔이 보였다. 이따금씩 혜진은 학교에 나오지 않을 때가 있었다. 우리 반에서 혜진을 둘러싼 소문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사실일지 아닐지 모르는 가십거리에 힘을 실어주는 건 다시 등교한 혜진의 뺨에 나 있는 스크래치 자국이었다. 나는 잠시 혜진의 몸을 가리고 있는 교복을 바라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쓰고 있던 유서 한귀퉁이를 구겼다가 다시 폈다. 거기서 더 진전될 리가 없었다. 창문 사이로 들어온 빛이 물처럼 출렁였다. 자꾸만 그 애의 갸날픈 몸이 팔레트같이 보였다. 그 애가 힘주어 깨문 입술은 빨간색 물감이 상한 것 같았다.

 

아주 폭력적인 생각인 것을 알고 있다. 그 애한테도, 나한테도. 그렇지만 그 애보다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교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혜진의 아빠라는 사람이 불쑥 나타나 손목을 잡아끌었다. 혜진의 앙다문 입술이 그리고 있던 수평이 일그러지는 걸 봤다. 몇 번이나 내 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목에 힘을 주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손을 뻗었지만 닿지 못했다. 결국 그 애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난 더디게 나아가는 몸을 재촉했다. 가로등의 전기가 금세 나갈 것만 같이 보였다. 깜빡거리는 불빛을 따라 그림자가 함께 깜빡거렸다. 위태로움을 눈앞에서 보는 것은 늘 어려웠다. 나는 고개를 똑바로 한 채 앞만 보기 시작했다. 소리가 자꾸만 귀 안에서 메아리쳤다. 너희 부모님은…. 그 애가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안다. 혜진과 난 닮아도 한참이나 닮아있었다. 적막을 싫어했다. 목소리가 파묻히는 걸 두려워했으며 작은 소음에도 깜짝깜짝 놀라기 일쑤였다. 다른 점이라면 혜진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온통 어둡고, 나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온통 밝다는 것 정도였다. 지금 내 생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영양가 없는 생각들. 전부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죽고 싶어. 나도.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 그만 살고 싶지? 어. 우리 같이 죽자. 어? 언젠간 외국으로 떠서 안락사 같이 하자고. 그거 비싸잖아. 그러게. …. 그럼 그냥 같이 뛰어내리자. 언제? 스무 살 되기 전에. 그래놓고 안 죽을 거잖아. 유서 오백 장 되는 날 그 때 죽자. 그래. 같이 죽자. 그래.

뭐가 문제지? 우리는 언제나 유서를 같이 썼고 펜을 비웠다. 그걸 교환해 읽고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 애의 유서는 온통 빨간색이었다. 피로 유서를 쓴 것도 아닌데 읽다 보면 세상이 계속해서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 색깔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글로 자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사건들이 터진 채로 곪아가고 있었고 절박한 절규들이 그 틈을 메웠다. 그에 비해 나는 그저 평범한 고등학생일 뿐이었다. 잘못된 점이 없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다정한 부모님과 그럭저럭 괜찮은 친구들과의 관계. 풍족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은 재정적인 지원들과 감정적인 응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안정했고 죽음을 꿈꾸었다. 미쳐도 내가 단단히 미친 거였다.

 

유서를 써야 했다. 아까 다 쓰지 못했는데 펜과 종이는 혜진에게 있었다. 피씨방의 문을 열었다. 시계가 아홉 시를 가리켰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 본체를 켰다. 교복을 입은 앳된 남학생들은 게임을 했고, 컵라면을 옆에 쌓아두고 포커를 치고 있는 아저씨도 있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숨을 쉬었다. 내가 죽기 전에 뽑아 놓을 유서를 써야 했다. 글은 내가 되고 나는 글이 된다. 순간마다 활자들과 함께 간신히 호흡했다. 죽고 싶어서 유서를 쓴다. 죽음을 미루기 위해서 유서를 쓴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몰랐다.

나는 감정을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한글 파일에 빨간 줄이 자꾸 보였다. 흑백으로 이루어진 파일에 긁힌 흔적은 환영받지 못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그걸 지웠다가 되돌리기 버튼을 눌렀다. 그게 혜진의 상처와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온전치 못했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절대로 바로잡을 수 없었다. 그 애는 나를 지지대로 삼고 있었을까? 난 그걸 오래오래 바라보다가 다시 글을 썼다. 빨간 줄이 자꾸만 그어졌다. 내버려두었다. 혜진의 상처는 피부에 있었다. 어쩌면 내 상처는 나일지도 몰랐다. 화면에 상처가 늘어갔다. 어느 순간 손을 멈추었다. 의자를 돌려 다른 사람들의 모니터 화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그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나는 커서가 깜빡이는 것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들의 세계를 구경했다. 모니터가 일제히 꺼지기 전까지는.

 

열 시였다. 미성년자는 나가라는 알바생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발소리 여럿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꺼진 모니터 앞에서 아이들이 몰려나가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혼잡했다. 각자의 세계가 엉키듯. 전원을 내려버린 순간에 아흔 아홉 대 정도의 컴퓨터가 꺼졌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동시에 아흔 아홉 명의 사람이 죽어버리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나는 쓰고 있던 내 유서가 전부 날아갔다는 걸 알아챘다.
자살할 날까지 하루가 더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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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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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료수

 

 

현아, 오늘 아침으로 토스트를 먹었어. 토스트기에 식빵을 넣어둔 걸 깜빡해서 이미 식었더라. 다시 구웠을 땐 조금 타긴 했지만 그나마 먹을 만 했어. 햇빛은 어쩐지 사람을 나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단 말이야. 토스트기를 누르고 기다리는 시간 동안 나도 모르게 정신을 까무룩 놓는 모양이야. 아침에 일어나는 게 그렇게 힘든 것도 아닌데 말이야. 오전의 나른함은 묘하게 이질감을 불러일으켜. 다시 자지 않으려고 이불을 개고, 창문을 열고. 나답지 않게 부산스러움을 조금 떨고서야 제대로 된 토스트를 먹을 수 있었어. 네가 맛있다고 했던 딸기잼을 펴 발랐어. 따뜻한 딸기 냄새가 좋아서 잠깐 행복해졌고, 짧은 순간에 너를 생각했어. 계란프라이를 해서 올려 먹을까 하다가 설거지거리가 늘어난다는 생각에 금방 고개를 저었고, 대신 검은색 잉크를 유리컵 가득 채워서 마셨어.

 

성당 앞을 지나다가 잠시 걸음을 멈췄어. 스테인드글라스가 여러 색으로 반짝였어. 빛이 쏟아지듯 내렸고, 한여름의 열기가 아지랑이를 피웠는지 성당이 이리저리 흔들렸어. 성모 마리아 상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고 문득 무서워졌어. 몸이 굳었어.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것 같아서 뒤로 돌아 걸었어. 걸음이 점점 빨라졌어.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리가 뛰고 있더라. 내 폐를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조금 당황스러웠어. 잠깐 숨을 고르다가 다락방으로 올라갔어. 거기 다다르는 순간 다리가 풀려서 주저앉고야 말았어. 원고지가 날 보고 웃는 중이었어.

 

언젠가 너한테 잉크를 어떻게 마시는지가 궁금하단 질문을 했었지. 네가 환하게 웃으면서 유리컵에 반절정도 담겨있던 잉크를 내게 권했던 걸 기억해. 나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고 너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가 네 입으로 컵을 가져다댔어. 검은 물이 출렁일 때마다 네 속눈썹이 가녀리게 떨렸었던 것도 같았어. 그 때는 말갛게 웃는 네 얼굴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었어. 나는 그걸 따라하려고 많이도 애를 썼었지. 넌 그 입술로 내게 피와 잉크가 비슷하다고 했었고 나는 내 오른팔을 슬그머니 가렸어.

 

불규칙적으로 생긴 상처들을 볼 때면 숨이 막혀왔어. 아주 진부하게 말이야. 언제나 맞이하는 감정이었지만 늘 새롭게 날 때렸어. 현아, 내 오른팔을 본 적이 없지. 네가 알고 있지 못했던 이야기를 난 지금에서야 고백해. 잉크를 마시는 널 생각하며 피를 마셨어. 피비린내가 점점 옅어지는 것 같았어. 농도가 옅어진 피는 수채화 물감과 닮아있었어. 그럴 때면 난 유화가 그려진 캔버스의 그 거친 표면을 쓰다듬곤 했어. 눈을 비비고 다시 유화 물감처럼 피가 검붉게 진해질 때까지. 그 피가 멎을 때까지 난 반대 손으로 꾸역꾸역 원고지를 채웠어. 딱지가 앉아 피가 더 이상 나지 않는 순간이 잉크가 굳는 순간이었어. 현아, 난 이렇게 글을 썼어.

 

현아, 네가 처음 잉크를 전해줬던 날을 기억해. 입술과 입술 사이 그 작은 틈으로 잉크를 밀어 넣던 순간을 기억해. 그건 아주 달면서 썼고, 차가우면서 뜨거웠고, 단조로우면서 화려했었지. 넌 내게 어떻냐고 물었고 난 바보같이 입에서 소리를 내는 법을 잊었어. 그 전날 꿈에서 봤던 성당 앞 동상처럼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가 없었어. 네게서 항상 나던 냄새가 났어. 잉크 냄새. 네 손에서 나는. 난 그게 아주 새빨갛다고 생각했어. 피와 비슷하단 이유를 알 것만 같았어. 그리고 네가 잉크에 중독되었던 이유도. 현아, 마치 어른들이 술에 의존하고, 마약을 원하는 것처럼 말야. 속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글을 썼어. 내 정신은 잠시 몽롱함 속에 맡겨두고, 위벽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통증 속에서 그걸 무시하며 활자를 하나하나 새겨 넣었어. 네가 그랬듯이 말야.

 

그래서 웃는 원고지를 보는 순간 그 옆의 잉크를 입안에 털어 넣고 말았어. 그 다음에 다가올 고통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어. 네 목소리가 어스름 사이로 들려왔어.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잉크를 펜촉에 적셔 네 이야기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했어. 원고지를 아무리 찢어도 네게 어울리는 글이 나오질 않았어. 네 말간 얼굴 하나, 조곤조곤한 목소리 하나를 묘사하는 게 불가능처럼 느껴졌어. 어쩌면 현아, 나는 잉크가 아니라 네게 중독되었을지도 모르겠어. 손에 잡을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널 계속해서 그려봐. 글을 쓸 수밖에 없는 네가 지금껏 너를 써 왔어. 네가 날 이끌었고, 내가 널 한껏 닮아갔듯이.

 

잉크가 전부 사라져서 책상을 열었는데 거기엔 아직도 너를 위한 잉크들이 빽빽이 쌓여있어.

현아, 어쩌면 나는 네 곁에 가고 싶은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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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지지 않은 그림자는 표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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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하게 빠져들었어야만 했다

 

손을 잡았던 날들과 사람들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파노라마처럼 그려지는 흔적들
팔찌 안에 숨겨두었던 날붙이의 악보들을 연주하는
나는 외로움에게 위로받았다

 

외로웠던 적이 있는 사람은 약속을 하지 않지
새끼손가락이 다가올 때 사라지던 별 조각들
가냘파 부러질 수 없다는 걸 안다 이미 흐르고 있었으므로

 

그래서 나는 죽음을 갈구한다는 시를 언젠가 썼던 것도 같다

 

기억이 나지 않는 아득한 어제가
지독한 추위를 던지며 등을
떠민다

 

묻어두었던 기억들이 유일하게 고개를 쳐들던 시간은 점점이 깨어지며
거기 마른 얼음 바닥에 뺨을 대고 있던
홀로 살아가는 우연의 연속이 너는 언제까지 녹아내릴 거냐고 물었다
그림자는 갈라지지 않았는데 갈라지는 법을 배우지 않았는데 자신의 피부를 스스로 가르는 법을 배우지 못했는데

 

발자국이 시간 위에 머물면서 태어난 기억을 소거한다
장미에게 필요 없는 잔가지들을 쳐내며

 

어린왕자가 자신의 발목을 자른다

 

네가 세 시에 온다고 하면 나는 두 시부터 도망치고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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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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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나날은 달을 맞는다
직선이 콘크리트 바닥을 가늘게 따라

 

거길 걸었다
달빛이 녹아 만들어진 웅덩이로
신발코를 길게 적시면서

 

번지는 빛과 물드는 사람들
각각의 노랑
정리된 개념들을 색칠하는 것처럼

 

한가운데를 지나며
숨 쉬는 시간이 잘못임을 상정한다
몸을 가로지르는 실선과
지저분하게 지워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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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벼락에 문을 그렸어

빛나는 해파리는 파란 물을 토했어

구름을 찌른 콘크리트 사이에서

죽어가고 있던 순간이었어

 

뒤돌아보지 말고 뛰어

속삭임은 옅었고 빛은 작았지

간격을 신고 색에 물든 공기를 찢었어

목을 조르는 좁은 벽

모서리 위를 달렸어

 

멈춘 시간 속에서 네 목소릴 생각했어

넌 왼쪽으로 계속 걷자고 했지

오른쪽 벽에 손이 녹아드는 중이었어

우린 미로 안에 들어와 있는데

 

달이 멎은 어느

골목길의 문을 열어보면

별의 파편들이 달리고 있었어

여운처럼

 

새벽을 닮은 크레파스로

미로의 창백한 입구를 그리는 중이야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은 우리의 호흡이

다시 닿을 수 있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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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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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커져서 그림자가 길어진 줄 알았어

 

몸을 돌려 눈을 떴는데 빛이 웅크렸어
까치발이 잠긴 웅덩이가 구르는 중이야
다리가 빠질 것 같았는데
헐거운 공기 위를 뛰어가고 있는 거였어

 

조각난 해가 천천히 부식되던 나무에서
빛이 갈기갈기 찢겨 있는 걸 봤어
양 모양이었던 내가 구름으로 커져가
멈춰줘

 

멀어지는 이야기

 

희미해진 직선과 맞닿을 수 없다고
무채색으로 번져가는 세계와
그림자가 갈라진 입술 모양으로
손등에 입 맞추는, 죽어가는, 빛

 

구름 위로 쓰러지고 있는 달이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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