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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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커져서 그림자가 길어진 줄 알았어

 

몸을 돌려 눈을 떴는데 빛이 웅크렸어
까치발이 잠긴 웅덩이가 구르는 중이야
다리가 빠질 것 같았는데
헐거운 공기 위를 뛰어가고 있는 거였어

 

조각난 해가 천천히 부식되던 나무에서
빛이 갈기갈기 찢겨 있는 걸 봤어
양 모양이었던 내가 구름으로 커져가
멈춰줘

 

멀어지는 이야기

 

희미해진 직선과 맞닿을 수 없다고
무채색으로 번져가는 세계와
그림자가 갈라진 입술 모양으로
손등에 입 맞추는, 죽어가는, 빛

 

구름 위로 쓰러지고 있는 달이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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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천으로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있는 사회에게 외친다 : 김사과, 미나 (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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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수많은 문제점들이 숨겨지는 순간이 있다. 존재의 부재가 정상으로 판단되는 순간이 있다. 특히 타인에게 보이는 면모를 중요시하는 곳에서는 끊임없이 이 이상현상들이 숨겨지고, 은폐되고, 또 공공연하게 포장되어 집단 밖으로 퍼져나가지 못하도록 막는다. 문제점은 죄악으로 치부되어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부여하고 마침내는 그들 스스로 입을 닫게 만든다. 여기 닫힌 입을 벌려 소리치는 작가가 있다.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눈앞에 들이밀며 이것이 바로 너희가 외면하고 싶어했던 진실, 이라고.

김사과가 지금까지 투고한 작품 중 걸작을 꼽으라고 하면 필자는 망설이지 않고 <미나>를 택한다. 물론 <02>와 <천국에서> 또한 그에 준하는 수작이나 미나는 장편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두 명의 주인공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데, 각각의 인물들의 감정표현과 그에 어울리는 문체 선정이 천재적이라고 평해도 아깝지 않다. 신예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영이>를 발표하던 시절부터 김사과의 독창성은 빛났고, 피크에 도달했을 때의 작품이 <미나>라고 볼 수 있겠다.

<미나>는 이상향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이상향이 유토피아, 즉 미의식을 자극하는 순수함을 불러일으켰다면, 김사과가 펼쳐내는 이상향은 어지럽혀지고 멸종 직전의 세계인 디스토피아를 상상하도록 만든다. 병리학적 지점에서 <미나>의 주인공 수정은 정서적 결여와 분리장애, 그리고 경계선 인격장애를 함께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현대인들이 대체적으로 지니고 있는-그러나 인정하려 들지도 않고 인정하고 싶어 하지도 않고 심지어 자각하는 행위조차 죄악으로 여기는-정신분석학적 문제들이다. 김사과는 이러한 사회의 염증을 그대로 직면하고 돌파한다.

또 다른 주인공 미나 또한 수정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 둘 다 현대사회의 부조리함과 모순점을 인지하고 염증을 느끼며 증오와 경멸을 품고 있는 동시에 무관심한 태도를 내비친다. 둘은 사회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둘은 서로를 이해한다.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이해관계에 기초한 관계이다. 명민한 미나와 수정은, 더 나아가 아이들은 세계에서 비추어지는 핑크빛 미래가 허상과 허영과 가식과 황홀한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그렇기에 세계가 자신들에게 요구하는 개념과 질서와 규칙과 법률들을 배반하고 무시하고 증오한다.

아이들은 세계에서 감각을 제거하는 행위로서 연명한다. 세계에 대해 냉소적으로 일관하는 아이들은 의식적으로 감각을 제거했거나, 무뎌지고 무뎌져서 이제는 더 이상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아이들은 이렇게 살아간다. 수동적인 세계를 견뎌낼 수 있는 방법은 경멸이다. 경멸과 무관심으로 대응함으로서 아이들은 세계의 타자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타자성을 인정한 이들은 낙오자로 치부한다.

셔터를 내리는 것은 일종의 방어기제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아이들은 생존을 위해 방어기제의 발현을 익힌다. 이것이 깨지는 것은 자살과 살인이 일어날 때뿐이다. 이 순간 방어기제는 필요하지 않다. 죽음은 세상과 긴밀하게 상호작용하고 있던 감정의 전원을 내려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단편적으로밖에 보이지 않으나, 박지예는 감각을 제거하는 행위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한다. 뚜렷한 명목은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박지예의 자살은 다른 지친 아이들에게 기폭제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박지예가 자살함으로서 미나와 수정은 세계의 타자성을 인식한다. 자신과 세계는 별개의 문제이다.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시험을 보아야 하는 사실은 변함이 없고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살아남아야 한다. 여기에서 미나는 세계에 대한 증오와 무관심을 꺼뜨려버린다. 감정에 동화되어 시험을 백지로 내는 완벽하게 가련한 소설 속 여주인공의 모습을 연출한다.

수정은 미나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미나가 감정이 없는 세계에서 떠난다. 그래서 수정은 미나의 슬픔을 질투한다. 질투는 애착과 사랑을 유발하면서 극단적으로 피폭된다. 자신이 모르는 것은 없어야 하며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 또한 없어야 한다. 미나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그리고 유일한 사람이다. 이해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간단하다. 죽이면 된다. 이해의 개념을 소유의 개념으로 치환하면 된다.

수정은 21세기의 엘리트들의 극단적인 표상이다. 사회의 염증을 느끼고 무관심과 증오로 일관하지만 영리한 수정은 제게 유리한 것을 인지할 만큼 영악하다. 수정은 사회 체제를 바꾸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자신이 위에서 군림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는 수정의 논술 답안에서도 드러난다. 자신의 글 안에 조악한 세계를 가두어 버리려는 시도이다.

수정의 사고방식은 전형적인 경계선 인격장애 환자의 사고방식과 유사하나 완벽함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 특이성을 찾아볼 수 있다. 다가올 때는 불안해하지만 한편으로는 소유하고 싶어한다. 두 충돌은 사람의 정신을 공격해 두 인격이 마치 한 몸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해서 수정은 미나를 한순간 사랑스럽게 여겼다가 다음 순간 구역질 날 것만 같이 혐오스럽고 비천하게 여기고, 그 다음 순간에는 미나를 다시 아름답다고 칭하며 숭배하는 것이다.

수정은 여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간다. 엘리트의 길을 걸어왔기에 모든 것이 완벽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것은 혼자 분투하는 외로움의 싸움이고 수정에게는 자신이 인정받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수정은 완벽하게 불안해하고 완벽하게 소유하고 싶어한다. 미나가 제게 손을 내밀었을 때는 거리를 두더니 미나가 떠날 때에서야 붙잡는다. 그러나 늦었다. 미나는 이미 감정을 알았고 수정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완벽한 세계에 흠집이 나서는 안 되기 때문에. 수정은 이 사소한 균열을 계기로 미나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서 떠나려 하면 극단적인 부정현상을 보이며 폭력적이고 악하게 변모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BPD(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 경계선 인격장애)이다. BPD를 앓고 있는 이들에게 중립은 없다. 오로지 선과 악만 존재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친밀하게 붙어 다녔던 이, 즉 절대선적 존재가 오늘 자신을 밀어내려 한다고 생각하면 절대악적 존재가 되는 것이 BPD의 주요 증상이다. 그렇기에 수정에게 중립은 없다. 미나는 이제 절대선이 아니라 절대악이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어서 이해하기 위해 다가갔으나 미나는 이미 수정과는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 수정이 낙오자로 부르는 그 세계에서 미나는 만족하고 살아간다. 수정은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

수정은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완벽주의를 작품 전반에서 드러낸다. 알 수 없으면 알아내야만 하고 완벽하지 않으면 완벽해야만 한다. 이것이 수정이 미나를 죽이는 이유다. 자신이 모르는 감정을 알기 위해서. 너를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 정당화 현상에 의해 이것은 필연적이고 필수적인 자신의 권리라고 수정은 생각한다. 수정의 감정은 극에 달한다. 미나를 죽이기 전 아기고양이를 죽일 때, 수정은 일시적 해리상태를 경험한다. 자신과 자신이 분리되어 자신이 아닌 상태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자신인 상태에서 후회하다가 다시 자신이 아닌 상태에서 깔깔거리며 비웃는다. 그 과정에서 수정은 생물에서 무생물로 전락한다. 의식이 있는 상태의 수정은 생물이다.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수정은 무생물이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자신이 아니라며 회피하고 부정하는 것. 사람이 어떠한 사실을 받아들일 때 사용하는 제1단계 방어기제가 여기서 발현된다.

마침내 미나를 죽일 때 수정은 고백한다. 이제야 네 심장을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노라고. 수정은 황홀해한다. 정복감과 소유욕을 충족시키는 쾌락은 어떠한 행위로도 대체될 수 없다. 수정은 그것을 안다. 마침내 수정은 미나의 심장을 손에 쥔다. 감정을 느꼈을까? 작가는 그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수정은 행복해한다. 몰랐던 지식을 마침내 습득했다는 것에 대한 흥분감과 미나를 드디어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성취감의 혼재다.

지금까지 수정이 알고 있었던 세상은 자신이 노력하면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세상이었다. 곧 기출문제나 수학문제와도 같은 것이다. 기출문제와 시험은 글 안에서 내내 수정의 세상으로 표상된다. 가장 안락하고 아늑하고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이것은 수정에게 절대적 진리이고 수동적 행태를 취하게 하는 가장 대표적인 공리이다. 동시에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주입하려는 거짓된 정보이고 십대들이 나름대로의 시기를 거치면서 거짓임을 알아가게 되는 한 가지의 작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수정은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인정하지 못해서 죽여야만 한다. 이것은 수정의 자기합리화가 아니다.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는 계획적 범죄다.

수정은 아무리 노력해도 답이 없어 보이는 난제를 인정하지 못한다. 언제나 수정은 문제를 완벽하게 풀어왔고 그것으로 안정감과 소속감을 추구했다. 수동성으로 무장하고 있던 수정에게 닥친 최초의 난제는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수동성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미나이다. 난제는 풀어야만 한다. 수정의 세상에서는 그렇다. 엘리트의 길을 걸어왔고 어른들이 쌓아올린 모든 사고방식과 정치적 교육적 체제를 부정하고 깔보고 우스워하면서 자라난 수정은 그렇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 결국 수정은 미나를 죽임으로서 난제를 해결한다. <미나>는 수정 나름대로의 해결방법을 제시함으로서 맺음을 인정한다.

사랑이 애증으로 변하고 애증이 증오와 경멸과 살해의식으로 변모하는 과정은 상당히 비약적이고 격동적이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극단성을 지니고 있으나, 실은 그것이 사회의 염증으로 인해 벌어진 상처를 감추는 과정에서 드러난 피폐성을 눈앞에 가져다 둔 것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수정의 문제가 아니다. 미나의 문제가 아니다. 박지예의 문제도 아니다. 이 작품에 나오는 어떠한 사람의 문제도 아니다. 이것은 사회의 문제이다. 김사과는 이러한 현실에 분노를 표출하는 수단으로 글을 택했고 <미나>는 정점의 폭발이었다.

이것은 비단 수정과 미나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수정이 경계선 인격장애를 앓고 있어 이러한 비윤리적으로 표상되는 행태를 자행한 것도 아니고, 미나의 나약함 때문에 수정의 트리거를 당긴 것도 아니다. 이것은 십대들의 이야기이다. 거쳐야 하는 나날의 치열함을 매개로서 공감을 의도적으로 차단하는 이들의 이야기이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때로는 경험하지 못한 상처를 우스워하는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한 명 한 명이 수정이고 미나이다. 단지 그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들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제도와 매커니즘이 불합리하고 불온전하며 모순적이라는 것을 안다. 당장 열아홉에서 스물로 바뀌면 주어지는 모든 것들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열아홉이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면 눈앞의 공부에 집중하라며 타박하고 정치색과 정당을 언급하며 저지한다. 그러나 스물이 되는 순간 어린 청년들은 정치에 대해 완벽하게 알고 있어야 하며 자신의 정치적 견해와 소신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사람들로 변모한다.

어른들은 학생들에게 완벽해질 것을 강요한다. 완벽함에 대한 어른들의 기준은 학생들을 옭아맨다. 자신의 상처를 의사에게 드러내어 치료하기는커녕 눈앞에서 수많은 눈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에 숨겨 동여매기에만 바쁘다. 이것이 학생들을 수정으로 만들고 미나로 만들고 지예로 만든다. 결국 모두 아파할 수밖에 없다.

결국 상처는 곪아 치료할 수 없는 상태로 썩어간다. 이 갇힌 세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의식적으로 소리쳐야 한다. 우리는 불온한 규율에 몸을 끼워 맞추지 않을 것이라, 고. 아픔은 부끄러운 것도 숨겨야 할 것도 아니며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아픔이라, 고. 선악과를 내밀며 속삭이는 미래가 실은 이상향에 불과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고. 이것이 바로 김사과가 사람들을 향해 외치는 메시지가 아닐까.

 

연장원 퇴고작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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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목마의 꼭대기
원을 그린다

 

몸이 녹아가고 있어
캔버스에 갈색 물감을 적시고
남아버린 발자국

 

너는 하늘과 맞닿은
활자들의 세계 속
궤도를 도는 중

 

같은 길
넌 날 만나고
내게 에스코트를 부탁했다

 

올 나간 스타킹이
간판에 걸린 채
발레를 해, 토슈즈와

 

수채화는 동그랗게
스텝을 밟아
네 눈꺼풀을 깨문다

 

책장마다 묻은 각자의 숨
넌 멎지 않기 위해
달리는데

 

있지,
원이야

 

모서리가 닳아 없어진
동그라미야

 

여덟을 넘어뜨렸어
목마가 선로 위를 움직이고
넌 여전히 제자리야

 

책이 둥글게 말려있어
서사가 한없이 이어지는
너의 저글링처럼

 

새벽과 밤을 기워 만든
커피 향 잠옷을 걸치며
넌 서점에서 줄곧 아픈 원을 그려

 

브레이크를 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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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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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스 구석에서 너를 생각했어 고래를 삼킨 목소리가 실바람을 불러오고 언젠가 손등에 키스하며 골방에서 손잡자던, 속삭임 높고 붉은 노래에서 배어나오던, 라임 향기 아찔한 날붙이 위에서 폴카를 추던, 쉘 핑크 스커트와 플랫슈즈 눈꺼풀 뒤로 사라지던, 형체의 잔상

 

짓씹던 살점이 남아있어 희멀겋게 말라붙은 침은 그림자를 긁어내고 난 벚꽃을 기대했는데 창밖으론 인형만이 쏟아지는 중이었어 형체가 없는 너를 찾아가는 여행, 크리스마스트리 꼭대기에서 꾸벅꾸벅 조는 별을 따다가 네게 줄 도시락을 만들었어 너는 빛이 나니까 어쩌면 별의 파편을 마시지 않을까 하고

 

도시를 뚫고 나온 네온사인 가장 반짝일 수 없어서 스스로를 먹어치웠니 라임 맛 밀크초콜릿을 빨아먹으며 나는 오선지에 붓칠을 했어 만년필을 녹여 만든 잉크와 섞은 빨강으로 그린 유에프오 아주 캄캄한 허공으로 항해하면 널 만날 수 있을까 우주 끝까지 찬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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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CP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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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이 치열하게 깃든 물의 흐름
우린 운하에서 맨몸으로 수영합니다
녹아 흐느적거리는 별똥별의 꼬리와 넓어지는 길
불어난 물이 수로 벽의 새끼돌을 찌르고

 

리알토 다리에게 묵념을!
로봇 제 일원칙을 깨뜨리기 직전
숙인 고개는 허상입니다
벽돌마다 부서지는 소리가 물에 비치고
피 흘리며 죽어가는 하얗고 빨간 시계상인들은
곤돌라와 함께 껍데기만 남아

 

리볼버를 쥔 곳은 아마도 심장부
우리의 놀이는 캅카스 룰렛이랍니다
병으로부터 구원받은 수로 언저리 십자가를 따라
대운하에 염산을 퍼붓습니다
르네상스의 후퇴를 저주하는 목소리
흰 망토를 걸친 시계상인들을 모조리 죽여라
베네치아가 출렁거리고

 

금이 가기 시작하는 교회의 파사드
감전된 물이 덩어리지어 묽게 튀어오르며
오염된 플랑크톤과 사체들과 시계들이
부활을 위해 날개를 펄떡거리는 시간
우린 죽어가야만 하는 숙명을 사랑하며
서로를 끌어안고 기능이 멈추길 기다려요

 

이 무너져가는 핏빛 베네치아 한가운데에서
한 여자아이의 숨결을 앗아간 자의가
물기 어린 바람에게 속삭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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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죽음을 위한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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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잦아드는 물

 

난반사의 흔적들이 웅크렸다
가장 위험한 삼각형의 일렁임

 

허공에서 목적지까지 이백육십육 킬로미터
솜뭉치 내장을 토하기 직전이다
산타클로스의 선물주머니에서 뛰어내리자
가슴에 처음 닿을 뺨 주인의
물속에서 기지개 펴는 비명이 보였다

 

추락하던 비행기가 파동에 놀라 회항했다
갑판 위 버티던 여자의 배는 불규칙적으로 요동치고
구역질을 오렌지로 달래던 순간들의 얼음
눈앞에 칼날이 있다
갈라진 달 조각이 여자를 떠미는 한낮
파티를 연 바다생물들의 대가리가 뻐끔거렸다

 

밧줄은 교수대의 형상으로 춤을 추고
구멍으로 짠물이 밀려오는 동안
태아는 새로운 맛이 묻은 손가락을 쪽쪽 빨아댔다
목숨을 담보로 한 스쿠버 다이빙
태어나지 못한 형체는 죽지 못하고
물 속의 물 팽팽히 부서지는 세계의 연장선상

 

가라앉는 중이다
여자의 머리카락이 헤집은 길을 따라
너덜거리며 부패하는 조각보의 냄새를 따라
안기기 위해 침잠하는 중이다
사실 안겨야 할 사람은 너인데

 

경직된 물속에서
칭얼대는 생의 파편을 찾아가는 여정
썩은 난파선의 닻 옆 쇠사슬
녹물을 가득 들이키고

 

바닷물에선 신 오렌지 맛이 났다
죽음이 비껴간 태아의 눈물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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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질문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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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제 열여덟이 된 윤별입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몰라서 누구나 그렇듯 자기소개로 시작하게 되네요. 저는 아동문학을 제외한 시와 소설, 수필, 비평, 희곡 등을 두루 쓰는 고등학생입니다. 아마 고민거리가 많아 이곳에 자주 기웃거리게 될 것 같아요. 잘 부탁드립니다.

 

첫째로, 앞서 말씀드렸듯 저는 다양한 분야를 쓰고 있어요. 그 중 시와 소설, 수필을 위주로 쓰고 있는데 두 분야가 자꾸만 충돌합니다. 그러니까 시를 쓸 때는, 한 문장 한 문장을 분해하고 이리저리 끼워넣고 어떻게 해야 더 극적인 효과를 줄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문장마다 이미지를 선명하게 하는 데 주력하는 편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문장이 무거워집니다. 문제는 시에서 소설로 넘어올 때, 그리고 소설에서 시로 넘어갈 때예요. 소설은 가독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문장 하나하나의 분위기, 즉 미문보다는 문장과 문장 사이의 유기성과 스토리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고요. 그런데 시를 쓰다가 소설로 넘어올 때, 문장 하나하나에 너무 힘을 주게 됩니다. 지금 딱 그런 상황에 처해 있어요. 시 스터디를 하면서 적어도 한 달 반 동안 소설을 손에서 아예 놓았고(마지막으로 구성을 짜고 그것에 맞추어 쓴 소설이 11월이었어요.) 지금 다시 소설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잡으니 문장 하나하나에 힘이 들어가고, 소설이 쓰이지 않는 지경까지 이르렀어요. 쓰고 싶은 것은 많은데 생각대로 나오지 않는 문장들에 좌절하게 됩니다. 원래 소설을 주전공으로 하던 학생이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아요.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묻고 싶어요.

 

둘째로, 시를 쓸 때 흔히 듣는 지적 중 하나가 '일상적인 어휘를 사용하라'라는 것이었어요. 시를 쓸 때 쓰는 시어가 정해져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라는 의미였는데, 사실 저는 일상적인 어휘를 잘 모릅니다. 시에서 사용하는 한자어들은 주로 제가 일상언어생활에서도 사용하는 어휘들이기 때문에 제게 닥친 이 현상이 어떤 퇴화의 길이라고 해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몰라요. 어떤 단어가 일상생활에서 잘 사용되고 어떤 단어가 아닌지, 즉 생소하고 친숙한 거리와 정도를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지막으로, 소설을 쓸 때 제가 쓸 수 있는 주제와 소재가 국한되는 느낌을 받고 있어요. 저는 원래 쏟아내기 위해 글을 쓰던 사람이었고, 이걸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글을 썼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더 잘 쓰고 싶다, 사람들에게 어떤 감정을 전달해 주고 싶다, 다른 사람들이 내 글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쓰다 보니 작품과 저 사이에 거리두기를 많이 하게 되었는데, 소재는 변하지 않더라구요. 저는 그로테스크하고 어두운 글들을 많이 쓰고, 생과 사, 그리고 어쩌면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보지 않고자 하는 부분들에 대해 써요. 예를 들면 자해라던가, 자살이라던가. 그런데 문제는 이 소재들의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귀엽고 상큼하고 조금은 통통 튀는 발랄한 글들을 쓰고 싶어 쓰면 무의식적으로 자꾸 늘어지게 되고, 개연성도 무엇도 없는 글이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어두운 소재들로 글을 쓰면 물론 선행연구가 많이 필요하지만, 감정표현이나 상황표현이 상당히 자연스럽게 되더라고요. 다르게 말하자면, 어두운 글밖에 쓸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부분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덧붙여 제가 쓰는 소재가 소재이다보니, 선행연구와 논문, 사례를 접하고 연구하고 그 소재를 결코 가볍게 다루지 않기 위해, 그리고 소비하는 사람들도 가볍게 소비하지 않게끔 하기 위해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렇지만 전공서를 읽고, 사례집을 읽는 과정에서 그 사람들을 함부로 이해한다, 라는 말을 하는 건 굉장한 실례같더라고요.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하는 편인데, 혹시 민감한 소재를 다룰 때 조심해야 할 점이라던지, 마음가짐이라던지를 묻고 싶어요.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게 많지만 오늘은 처음이니만큼 네 가지 같은 세 가지를 묻고 가요. 잘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자주 찾아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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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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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가 검은 피를 흘리는 밤

유리병에 대롱대롱 매달린 별이

죽음을 앞둔 사형수처럼 목을 씻는다

살갗의 문신으로 젖으려는 시도

 

별을 터트려 밤을 밝히자

펜촉을 적신 칼날이 깨끗한 목을 베고

갱지에 음절들이 새겨지는 찰나의 간격은

시계의 춤을 반복적으로 따라간다

 

이십 초 근방에서 머무르는 초침이

거미줄에 붙잡힌 벌레처럼 흔들린다

움직이지 못하는 순간

 

더 숨을 쉬지 않는 글자들의 무덤엔

도축당한 맨몸들이

울어 만든 문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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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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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귤

 

책가방이 흐물거리며 어깨에서 벗어났다. 비에 젖은 왼쪽 어깨에서 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것을 그대로 놓아두었다.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는지 모를 만큼 오랫동안 현관에 서 있다가 이선아의 왈가닥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언니, 학교 다녀오더니 정신도 거기에 빼 두고 왔어?”

“어? 얜 또 무슨 미친 소리야.”

“상식적으로 일단 들어와서 얘기하지? 지금 눈 풀렸는데?”

이선아가 한쪽 눈가를 찡그리더니 팔짱을 꼈다. 한심하다는 눈빛. 아주 한 살 차이라고 봐 줬더니 기어오르지? 괜히 팩 소리를 지르고 신발을 황급히 벗었다. 바닥이 미끄러워 넘어질 뻔 했지만 나름 무사히 착지했다. 그 광경을 전부 지켜보고 있던 이선아의 눈빛은 변함없었다. 비 다 맞고 잘 하는 짓이다, 어? 나는 이선아를 째려보곤 방안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아 시끄러워! 뭐 어쩌라고! 문 그렇게 닫지 말라고! 무슨 상관이야!

마구 정돈이 되지 않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기며 옷장을 열었다. 젖은 옷을 갈아입으려다 왼쪽 어깨에 아직까지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아 옷들을 뒤적이던 손을 멈추었다. 내 손을 어깨에 대어 보았지만 같은 온기를 느낄 수 없었다. 심지어 비슷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대로 옷장 문을 밀어 닫고 미끄러지듯 침대에 앉았다. 보송한 이불이 젖은 생쥐 꼴과 어울릴 리는 없었지만 뭐 어때.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온기는, 자꾸만 선배를 떠올리게 되는 매개체인 것이다. 무의식적인 회상일까. 동아리를 가입하게 된 이유였던 선배. 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동아리를 선택하라는 종이와 홍보 책자가 함께 날아왔고, 신입생이었던 우리는 쉬는 시간마다 책상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동아리에 대해 재잘거리기 바빴다.

“너 어디 갈 거야?”

“몰라, 이 학교는 동아리가 왜 이렇게 많아서 사람 결정장애 오게 만들어!”

나는 그대로 의자에 늘어져 심드렁하게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동아리 활동. 맡기면 열심히 할 자신은 있었지만 중학교 때의 동아리를 생각하면 온몸이 일순간 부르르 떨려 왔으니까. 삼 년간 열심히 일구었던 동아리에서의 좋은 추억이 없어서였는지, 아니면 항상 억압만 받아 왔기 때문이었는지 아직도 동아리라고 하면 일단 경계하고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근데 우리 동아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냥 정하래?”

“아, 선배들이 각 반마다 돌아다니면서 홍보하긴 한다던데 아직 우리 한 명도 안 왔잖아.”

그러게, 우리 반만 소식이 늦나? 말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한쪽으로 갸웃거리던 현수가 동아리 홍보 책자를 닫고 날 향해 물어왔다.

“으음… 진아야, 넌 뭐 관심 있는 거 있어?”

“그으다지… 글쎄, 잘 모르겠는데….”

말꼬리를 늘이는 것이 특기라도 되는 듯이 웅얼웅얼거리며 나 좀 잘게, 하고 대충 대답한 나는 다음 시간을 위해 책상에 엎드렸다. 한국사 시간 전에 자 두지 않으면 수업 중에 잘 확률이 백 퍼센트다. 그러나 편안한 자세는 몇 초도 넘기지 못하고 방해받았다. 잠이 들기 직전 잠시만 얘들아 여기 좀 봐 줘! 하는 명랑한 여자 목소리가 아이들을 강제로 기상시켰다.

“야 누구 왔…”

“동아리 홍보 왔나 봐! 저 남자애 엄청 잘생겼지!”

현수가 가리킨 쪽을 보자 과연, 여학생과 남학생 하나가 무언가를 들고 교단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오른쪽 눈을 비볐다. 시야가 좀 더 또렷해지자, 남학생이 들고 있는 것이 동아리 홍보용 피켓이라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선배 아냐?”

“어?”

“명찰 색이 다르잖아.”

“어, 그러게?”

찌뿌듯한 허리에 손을 대고 꾹꾹 눌러댔다. 책상에 늘어져 새로 출현한 두 명의 이방인들을 바라봤다. 왜 하필이면 이 시간에 와서 잠도 자지 못하게 난리인 건지. 잡담도 잠시, 남학생과 여학생이 동시에 안녕, 하고 인사를 했다. 눈을 깜빡였다. 잠자기 직전 봐서 잘 보지 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에서 설명하는 선배는 상당히 멋져 보였다. 선배는 칠판에 커다랗게 신문편집부, 라고 쓰더니 손을 털었다.

“우린 신문편집부야. 학교 신문을 만들고 발간하는 일을 해. 이사장님의 총애를 받고 있는 동아리라서 지원금도 빵빵하고! 작년에는 지원금 백만 원으로 회식도 갔었어, 만든 신문은 여러 대학교에 보내지니까 대학 진학을 그쪽으로 고려하는 친구들에겐 유리하겠지?”

그 후로 선배는 계속해서 신문편집부에 대한 얘기를 했다. 지금도 잘 기억나지 않는 선발 인원이나 커리큘럼 같은 것들. 선배의 머리 색깔이나 눈동자, 하다못해 교복을 어떻게 입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아주 미미하던 귤 향기만이 남아있었다. 동경일까, 하는 마음으로 신문편집부에 지원했고 우연인지 다행인지 합격자 명단엔 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말을 걸어보지 못했던, 앞에 서기만 하면 콩닥거리는 가슴에 급히 원고만 제출하고 돌아와야만 했던 그런 선배.

 

“많이 남았어?”

“음 조금요, 원고 네 개만 고치면 돼요….”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기장이라는 이유로 남아서 부원들의 글을 봐 줘야 한다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었지만, 관례라며 선배들은 어깨를 두드리고 가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없던 능력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나는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선배들은 전부 가신 줄 알았는데? 내 옆에 선배가 앉아 있었다. 숨을 황급히 들이마시고 놀라 선배를 바라보았다.

“어, 서, 선배 안 가셨어요?”

“응, 일단 나도 기장이니까?”

“아.”

침묵이었다. 둘이 이야기를 한 적도 없었고, 부기장 선배가 내게 대부분의 일을 가르쳐줬으니 어색한 것이 당연했다. 갑자기 공기가 낯설게 느껴져 나는 어물어물 말꼬리를 흐리고 원고를 바라보았다. 커서가 깜박였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쉬이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몇 번이나 백스페이스를 누르고, 교정 버튼을 눌렀다가, 이건 아닌데, 하고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선배가 옆에 있다는 사실에 뻣뻣하게 굳어 버리고. 아, 바보 이진아!

“도와줄까?”

“네?”

“그거.”

선배의 손가락이 노트북 화면을 가리켰다. 새삼 손가락이 길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진아야?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마치 온몸에 심장을 달아 놓은 것 같이 쿵쿵거렸다. 그러니까.

“어, 네! 조, 조금만 부탁드릴게요.”

선배는 자신의 노트북을 켜더니 유에스비로 담아간 파일로 작업을 시작했다. 선배의 옆모습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분명 입을 다물고 있는데 선배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선배의 집중하는 모습. 선배는 집중하면 입술을 내미는 버릇이 있구나. 무의식중에 난 내 입술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선배가 갑자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황급히 노트북으로 시선을 옮기고 숨만 간신히 쉬고 있었다.

“이쪽은 끝.”

“어, 벌써요?”

노트북에서 시선을 떼질 못했다. 점점 고개는 내려가고, 애초에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눈은 갈 곳을 잃고.

“아직 못 끝냈어?”

선배의 목소리에 선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배는 기지개를 펴고 있었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원위치로 돌아왔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 작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선배의 눈빛에 물음표가 달려 있었다. 나는 뺨을 긁적이며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거의 다 끝났어요. 이제 메일만 보내면 끝이에요.”

메일 창을 클릭하려는데 선배의 말이 손목을 잡았다.

“아, 메일 보내지 말고 내일 동아리 시간에 바로 나눠줘.”

“그래도 되요?”

“원래 그래 왔으니까요?”

선배가 내 말투를 따라하듯 말꼬리를 올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곧 학교 문 닫아, 가자. 하는 목소리에 난 뻣뻣하게 일어나 고개를 끄덕였다.

 

“비 오네?”

“어, 비 와요? 우산 안 가져왔는데….”

시원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여름 날씨를 한풀 꺾이게 해 줄 비였다. 난 책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우산이 없으니 비닐이라도 쓰고 가야지. 책가방에 방수가 되는 비닐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쪼그려 앉아 책가방 안을 보고 있는데 무언가가 등을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선배였다.

“뭐 해? 뭐 놓고 온 거 있어?”

“비 오니까요…?”

선배가 당황하는 모습에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선배는 눈을 깜빡이다가 낮게 웃더니 자신의 우산을 가리켰다. 같이 쓰고 가자. 얼결에 고개를 끄덕여버린 나는 숨을 들이켰다. 선배는 자연스럽게 우산을 펴고 손짓을 했다. 다시 심장이 쿵쿵, 쿵쿵 하고 뛰기 시작하고. 힘이 풀려 휘청거리는 다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넘어진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엔 이미 늦었다. 몸은 이미 앞으로 기울었다. 점점 빨라지는 가속도를 몸이 느끼고 있다. 눈을 질끈 감은 순간, 어깨에 닿은 따뜻한 온기,

조심해야지, 하고 입술에서 흘러나온 다섯 음절과 아찔하던 귤 냄새를 나는 기억한다.

 

옛날에 친구가 말해 줬던 것이 떠올랐다. 꽃 하나를 따다가 꽃잎을 하나씩 떼면서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를 번갈아 되뇌는 일종의 점. 왜 하필 지금 떠올랐을까? 선배는 집에 들어가면 연락을 한다고 했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젖은 어깨를 만져도 선배의 온기와 같은 온기를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나의 질문에 대한 답 또한 도출되지 않는다. 손으로 눈을 꾹 눌러본다. 아직도 귤 냄새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언니, 엄마가 귤 먹으라고 사 놨대!”

“가져다 줘!”

“아, 진짜 언니는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못 가져가? 좀 일어나! 그러니까 살이 찌지!”

“나보다 몸무게 많이 나가는 사람은 입 다무세요.”

이선아가 툴툴거리며 귤을 담은 접시를 내팽개치듯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동글동글한 귤들이 조금씩 흔들렸다. 차가운 귤을 손에 쥐었다. 그러고도 가지 않고 있는 이선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선아는 나를 째려보더니 언니가 그러면 그렇지, 라고 툭 말을 내뱉고는 끙 하는 소리와 함께 일어났다. 문이 눈앞에서 쾅 닫혔다. 한결 아늑해졌다.

귤껍질을 벗겼다. 손톱 아래에 귤의 흰 부분이 껴서 몇 번이고 다른 손톱으로 긁어내야만 했다. 주황색 귤 알맹이가 보였다. 문득 다시 꽃잎점이 생각났다. 나도 모르게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를 되뇌고 있었다.

깐 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알맹이 하나를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좋아한다. 다른 알맹이를 연이어 떼어냈다.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이게 뭐라고 가슴팍에서 콩콩대는 소리가 들리는지.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그리고 좋아하지 않는다. 마지막 알맹이가 좋아하지 않는다에서 멈추었다.

잠시 온 몸의 사고회로가 정지된 듯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야! 이 귤은 중간에 터진 부분이 있으니까 무효야! 혼자 속으로 외치곤 흩어져 있는 알맹이들을 입안에 밀어 넣었다. 입을 움직여 귤을 꼭꼭 씹었다. 그 선배에게선 꼭 이 향이 났지. 다른 귤을 손에 쥐었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이 귤은 작으니까 무효야. 이건 껍질에 파랗게 멍이 들어 있으니까 무효야.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이 귤은 맛이 시니까 무효야.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다. 이건 모양이 일그러져 있으니까 무효야. 무효야, 무효야, 무효야. 이쯤 되면 귤이 나를 농락하는 건지, 아니면 괜한 오기이자 객기인지 모를 지경이다. 한 번쯤은 좋아한다, 가 나올 수 있는 거 아냐?

마지막 귤에 손가락을 찔러 넣는 순간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었다. 진동을 타고 귤 냄새가 방안에 가득 퍼졌다. 나는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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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시계를 본다. 자정이 겨우 넘은 시각. 방 안에 자의로 갇혀있는 시간은 얼마나 길었지. 얼추 가늠해도 십오 일 남짓이다. 달이 뜨는 열다섯 번의 순간을 도축하듯 무시했다. 여자는 손을 뻗어 자신의 원고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프린터에서 막 나온 원고가 아직 따뜻하다. 열다섯 번의 밤과 열다섯 번의 낮을 쏟아 부은 작품이다. 꺼 두었던 휴대폰을 켰다. 편집장에게 연락을 했다. 여자는 오랜만에 듣는 자신의 목소리에 놀랐고, 편집장은 여자에게서 연락에 온 것을 놀라워했다. 여자는 막 마무리지은 원고를 봐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명랑하게 귀에 꽂혔다. 저 편집장은 항상 명랑했지. 당장 내일이라도 좋으니 근처에서 만나자는 말에 여자는 동의했다. 급작스럽게 잡힌 약속이었다.

그것은 곧 자신의 몰골이 어떤지 확인해야 한다는 이야기와도 같았다. 여자는 자신의 방에서 비척비척 나갔다. 스탠드의 옅은 불빛에 익숙해져 있던 여자의 눈은 강한 빛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어지러웠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떨리는 다리가 위태롭다. 여자는 화장실의 불을 켰다. 그곳에서 여자는 낯선 사람을 만났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머리카락은 부스스하고 다크서클은 뺨 중간까지 내려왔다. 이미 죽은 것 같아 보이는 눈에는 생기가 없었고 팔다리는 보름 전보다 훨씬 말라 뼈의 결합부가 도드라져보였다. 여자는 자신임을 확인하기 위해 오른손을 올렸다. 거울 안의 자신은 왼손을 올렸다. 그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매끄럽던 원고와 상반된 피부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여자는 눈을 깜빡였다. 삐걱거리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원고를 끝낸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컨디션 조절이다. 최대한 빨리 자야 내일의 만남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 여자는 다년간의 회사원 생활과 외부업체의 미팅 경력으로 첫인상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알았다. 최소한 만남에서 대화의 주도권을 가질 수 있을 정도의 인상을 남겨야 한다. 여자는 곧바로 문을 열어 둔 채로 이부자리를 폈다.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은 온통 암흑이었다. 채도 낮은 유채색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도저히 잠을 잘 수 없다. 양을 세어 보아도, 수면유도영상을 보아도, 잔잔한 노래를 들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여자의 몸에는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다. 중력을 이기지 못하는 행동거지들이 그것을 여실히 보였다. 다만 최면이었다. 약간의 방어기제성질을 띤 여자가 이불 속에서 빠져나왔다. 자신의 피부를 걱정하며.

여자는 연필을 잡았다. 나무 향기가 났다. 여자는 종이에 무얼 그릴까 생각했다. 저 밤하늘의 별들과 달이 춤을 추는 것을 그릴까, 아니면 자신의 추레한 몰골을 그려버릴까. 박제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지. 여자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떠올렸다. 인물들. 방금 쓴 원고의 인물들을 그려야겠다. 마디마디가 또렷한 손가락이 희게 떨렸다.

소중하다는 것은 끌어안고 싶다는 것이다. 소중하다는 것은 지키고 싶다는 것이다. 소중하다는 것은 닮고 싶다는 것이다. 소중하다는 것은 동화되고 싶다는 것이다. 소중하다는 것은…. 여자는 열거된 모든 속성에 해당되는 인물을 그린다.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 그녀의 곱슬거리고 부스스한 머리카락과, 생기 없는 눈에 애써 반사된 빛과, 무의식적으로 부풀리는 가슴의 데포르메를 그린다. 연필이 수명을 깎아나가며 인물을 형상화한다. 자그마한 입과, 마른 몸뚱이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처럼 튼튼하게 자리 잡고 있는 두 다리와, 개뼈다귀같이 생긴 두 팔을 그린다. 애써 입혀 두었지만 어울리지 않는 흰색 교복 블라우스와, 체크무늬 넥타이와, 보풀이 일어난 조끼와, 시금치 색의 재킷과, 그 아래로 뻗어나가 뱀처럼 흐늘거리는 회색 치마를 그린다. 종이 안에서 살아난 인물이 자신의 창조주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여자는 소설 속에서 이 깡마른 아이가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창조한 아이이고 동시에 자신이 죽인 아이이기도 했다. 가장 극단적인 서사를 부여한 소설에서 가장 잔혹하게 죽은. 살아난 아이가 종이 속에 갇혀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의 초점 없는 눈에서 살의가 보였다. 여자는 문득 이 아이가 자신에게 보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순간적으로 박힌 감정은 점점 몸뚱이를 불려나갔다.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의자가 다시 삐걱이며 노래했다. 공기가 무거워 아감구멍을 점점 틀어막았다. 여자는 간신히 숨을 쉬다가 칼을 들었다.

여자의 칼은 펜이다. 빨간 잉크가 펜에서 똑똑 흘러내렸다. 잉크가 종이 속 아이의 뺨을 적셨다. 마치 상처가 난 것처럼 잉크가 종이의 결을 타고 빠르게 퍼져갔다. 생각할 시간조차 없이 여자는 그림에 손을 뻗었다. 아이의 뺨에서 시작된 상처가 주위로 번져갔다. 여자가 아이의 뺨을 그었다. 뺨과 눈과 피부를 전부 그어 긁어냈다. 꽃이 피어나는 기괴한 아름다움. 종이를 잉크로 적시고 있는 행위일 뿐인데도 여자는 그 속에서 근육을 본다. 거기에 온갖 장기들이 있다. 하나의 근육세포마다 생명이 있다. 거의 아사한 생명이 있다. 아이가 죽어간다. 여자는 숨을 다급하게 들이켠다. 힘이 빠진 손에서 펜이 굴러 떨어진다. 잉크가 튄다. 아이가 완벽하게 죽었는지 여자는 확인하지 못했다.

 

죽었던가?

그 애가 정말 죽었던가?여자는 눈을 감고 다시 소설을 떠올린다. 몇 번이고 퇴고해서 이젠 거의 외울 수 있을 법한 그 소설을. 완전히 죽음에 도달했던가. 자신이 쓴 소설 속의 한 구절을 여자는 웅크린 채 작게 읊조려본다. 나는 무가치함을 느낄 수 있다. 음수로 치닫는 가치가 몸통을 뚫고 지나간다. 피부에서 맥박이 선명히 뛴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자마자 죽어가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달콤한 꿈을 꾸다가 죽고, 누군가는 심장마비로 죽는다. 누군가는 스스로 목을 조르고, 누군가는 차에 치여서 죽는다. 그러니까 나처럼 피부가 전부 벗겨져 피와 함께 죽어가는 것도 죽음의 일부일 뿐이다. 지극히 작은 파편일 뿐이다.

나는 죽기 위해 소설을 썼던가, 아니면 살기 위해 소설을 썼던가? 살기 위해 약속을 만들었다. 살기 위해 다음날을 기약했다. 숨쉬기 위해 먼 미래의 일을 구체화시켰다. 내가 정말 삶을 갈구하는가? 여자는 입술을 세게 깨문다. 그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 무감각했다. 원래 이렇게 무감각했던가? 자신의 무릎을 껴안고 여자는 제게 또 묻는다. 너는 죽고 싶니, 살고 싶니?

문득 여자는 시계를 본다. 세 시 하고도 절반이 지났다. 편집장을 생각했다. 자신의 원고를 생각했다. 바닥을 칠 몸 상태를 생각했다. 몇 시간 후 자신이 앉아 있을 엔제리너스 카페의 의자를 생각했다. 여자는 자신의 얼굴을 생각했다. 이미 피부가 뒤집어진 자신의 얼굴에 종이 위에 그렸던 여자아이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붉은색마저 얼굴 전체에 도포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이가 죽기 직전의 모습으로 말을 걸었다. 너는 죽고 싶니, 살고 싶니? 여자는 가늘게 뜬 눈을 깜빡이다가 긴 막대기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여자의 손이 시선을 따라갔다. 손에 금속제의 느낌이 선명하다. 칼날이 스탠드의 빛을 반사시켜 약하게 반짝거렸다. 여자는 칼을 제 우둘투둘한 뺨에 가져다대었다. 잉크가 흘러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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