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제곱도 소용도 상관도 없어야 할 유일한 환상이다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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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병의 뼈는 물이라서 영영을 믿지 않고도 흐를 수 있지 어제의 영사기에 올라타면 천식처럼 기구해지는 뒷면의 꿈, 투사되는 손길들, 반쯤은 농밀하게 익어 가는 어항까지, 제일 먼저 전구를 꺾는다 플라스크의 눈을 누른다 나는 우주의 끄트머리를 놓지 않고 무수히 떨어지는 변종 손목에 키스하지 않아도 될 때까지 거꾸로, 올라가는 셔터와 셔터 사이가 더는 시를 쓸 수 없게 만들고

 

나는 발레리나 따위를 좋아해 분질러질 수밖에 없는 발가락의 말미를 좋아해 열대어처럼 퉁겨오르는 목울대의 불안한 이완을 좋아해 손끝으로 춤을 춘다면 그 무게는 어디로 견뎌야 하는 걸까 실재하지도 않는 목덜미는 한참이나 얄팍해 사이를 투과할 손톱이 망가질 텐데 주사위가 있습니다 나는 패인 크레이터 속으로 들어가 불길한 수면에 중독됩니다

 

언제나 둥글어지고 싶었어요, 등을 열고 들어가면 다른 등이 솟아나고, 굳지도 않은 몰드가 운명이 되고, 그걸 꿈이라고 부르는 사람과 말없이 돌아버리는 사람, 나는 반만 젖은 스페이드 카드를 귀에 구깁니다 물도 없는데 바다라고 불리는 건 일종의 실패가 조형되는 방식 중 하나라고, 일제히, 발작적으로, 과거만이라도 지평면만이라도₂, 곱하면 사방에 튄 내가 반투명의 역사로 너를 사랑해₃

 

온전하다는 건 어른이 될 선지마저도 없다는 제시문

 

너의 입술과 내 입술 중 어느 것이 더 가엾을지 내기하자 너는 주먹을 내 나는 부적격의 증표로 숨을 낼게 네가 날 믿지 않으면 누가 날 믿겠어 토슈즈를 갈아 뭉친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친다 내일은 없다는 문항의 존재론을 서술하시오(36.5점) 하지만 작별 선물로는 내일의 발자국을 손바닥 위에 깨뜨려 줘 이방인은 물러선 나머지 휘파람이라도 불 준비를 한다 그믐이 지면 우리는 거짓말처럼 흘러 굳는 뜀박질이 될 거라서

 

 

 

₁ 어떤 힘은 수직으로 발달해 익숙한 명명법만 부여받았다 우리는 같은 지점에 머무른 가상의 집합 속에서 살고 있지

₂ 당겨져 갇히는 게 빛인지 손목인지 목소리인지 구분하는 방법이 학계에서 아직 명료하게 규명된 바 없다

₃ P(A)가 배덕한 신앙으로부터 도려내어질 운명의 앞면이라면 P(B)는 뺨이 붉은 소녀의 발바닥에 바다가 가장 많이 새겨질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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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것마다 기시감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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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시집을 읽을 수 없는 상황이고, 접하는 어휘는 고삼이라 한정적인데, 쓰는 것마다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하는 것 같고, 시가 다 비슷비슷해 보이고, 옛날처럼 쓸 수도 없는 것 같고, 자꾸 퇴화하는 것 같아서 문제입니다. 조금 사랑할 수 있게 되었나 싶더니 다시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게 되었어요. 제 글을 보면 토할 것 같습니다. 문장도 거기서 거기, 발상도 사유도 거기서 거기, 아무나 할 수 있는 것 같고 독창성이라곤 없는 것 같아요. 제 글이 싫어요. 제 시가 싫습니다. 조금 더 튀어나가고 싶은데 그것마저도 되지 않습니다.

 

저는 2010년대의 시단에만 머물러야 하는 걸까요 결국 발전이라곤 할 수 없는 걸까요 사실 자괴감에 빠지기도 싫은데 아무것도 할 수 없나는 생각이 너무 지배적이에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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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구 이토록 로맨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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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표면을 갉아먹는 저 은밀한 반란을 봐 얘들아, 혀끝에서 피어나는 이를테면 어색하게 맞물리는 장미 덩굴같이, 누군가가 쏟아진다면 적어도 열기에 에이지만 않았으면 좋겠네 볼펜의 끈적한 잉크 안에서, 뽀글뽀글 우리는 네 질척한 슬픔을 눈꺼풀로 받아적을 준비가 되어 있어 감사해, 텅 빈 머리가 꼭 하나씩 빼먹고 발음하면 너는 하여간 미끄러지는 걸 알고만 있어

 

그런데 나 이제 정말이야, 정말로 못 버틸 것만 같아 너는 언제부터 견고해지기 시작했니 언제부터 입술의 틈으로 하여금 지난하게 신앙을 얽었니 얘들아, 봐 불온하기 짝이 없는, 이토록 익숙할수록 절도처럼 낯설어지는 천국을 정말로, 버티지 못해도 매달릴 수는 있어야 한다고 자, 잘 들어 이제부터 우리는 손가락 하나만으로 비구름을 틀어막으러 가는 거야 알았지 그래도 낭자하게 비린 여기가 천국이니까,

 

길을 뒤집어 걷자 A-8, B-13, 잘리고, C-27, 사선으로 베이고, 너는 자 여기까지. 출입증이 없잖아. 불공평한 소음들은 뒤집혀도, 불균형한 복원 대신 다정한 멸종을 택한다 자기소개서 대신 유서나 써야지 이번엔 어디로 깔끔하게 복직할 수 있나요 어느 꿈으로, 나의 열두 해는 어떤 값싼 방식 혹은 그 이하로 분해되나요 쨍그랑, 개량한 장미는 젖었을망정 세 자릿수의 가시가 없다고, 들여보내 주세요 선생님, 너는 내 앞에서 우주선에 몸을 묻고 나는 분질러진 다리를 한참이나 지쳐 절단하고

 

이마에 입을 맞춰 줘

나는 전생을 모조리 기억하고 내가 사랑하는 너는 젖은 것들이라곤 모조리 잊어버리고

 

돌아가지 마 아무거나 할 수 있어, 우리의 주먹 쥔 불면은 도대체 얼마나 더 간절해야 어깨의 부피를 줄일 수 있습니까 언제까지 엉망인 맞춤법을 지켜야 합니까 우리는 왜 이 빌어먹을 천국에서 하염없이 아무렇지도 않아야 합니까 깍지를 낀다는 건 발칙한 손가락 사이로 카니발리즘에서 겨우 살아남은 무해한 변절자들*을 연소처럼 문지르는 것 재채기를 하지 얘들아, 키슈 옮는 전염병을 핑계로 없는 자극처럼** 깨뜨려도 그래 다 씨발, 괜찮아

 

 

* 그러니까, 모두가 스스로 사라질 때 기어코 같이 자살하자고 했잖아.
** 끓지도 않으면 우리는 반짝거리거나 반사될 수 없어서. 이왕이면 손목에 돋아난 나무처럼 위험해지기 위하여. 평면처럼 납작해지면 일그러져도 어떻게든 비틀 수 있겠지 우리는 우리를 끝끝내 보지 못하겠지만,
( 이 면은 공백입니다 ) 부족은 원죄로 숭배당할 수밖에 없을까 삼백육십오일 구멍 같은 신음을 내내 앓아도 우리를 위한 천국만 지독하게 없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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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dd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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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를 끄면 두 쌍의 비늘이 누울 수 있지
마지막을 비집을 각오를 하고

 

모서리에는 다섯 살짜리의 파자마가 있지
누구든 차례도 없이 빌려 꾸다가
싫증이 나면 이불방울을 불거나 웅크리거나

 

예쁘게 꾸며 둔 팔목은 어쩐지 낯이 익어
그건 인형을 둘로 나눠 묶는 일과는 가장
다른 부류의 일이라서

 

빻아 둔 입을 길게 늘여볼래
그리고 악몽은 예감하기만 한다고 속삭일래

 

소금 같은 몸을 열어보는 건 그만두기로 하자
알약이 드물게 열리는 나무처럼

 

환한
서로의 화상을 기우지 말자고 했지
나는 누구의 입술에 기대어 자야 할지를 모르겠어

 

이번에는 손을 뻗었다
양말이 무릎을 꿇는 감각으로
좋은 꿈을 닳도록 앓아

 

이틀은 비리거나 싱겁거나 우스워서
시큼한 오늘
나는 목걸이에 매달린 기도

 

마르지 않는 머리를 썰어 혀 밑에 숨기면
어느 윤달에 알맞던 척추의 맛
오븐에서 아장아장 쓸려나온 맛

 

이별도 작별도 별의 이름인데 너는
이담에 커서 깨진 거울이 되겠다고
매달리지도 미끄러지지도 말아야 하는데

 

쓸어 넘긴다
모른 척 어제는 없으니 아무 생각도 없이
아닐 수도 있어

 

내일은
둥글고 물러
달콤하게 죽기 좋은 날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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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문장 : WRITING (feat.글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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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숫자 하나씩을 사용해서 쓰는 구절들. 글틴 분들도 같이 해 보면 어떨까 하고 가져왔어요! 성인이 되신 글틴 졸업생 분들도, 막 활동하고 계신 글틴 분들도 즐겁게 참여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물론 백 분은 넘지 않겠지만 스무 분이라도 참여해 주시지 않을까 기대해요. 댓글로 참여의사를 먼저 달아주시고 4월 20일까지 각자 쓴 문장을 대댓글로 달아주세요! 개인에게 할당되는 숫자는 자신이 댓글을 단 순번입니다. 수시로 업데이트할게요!

 

예시작

http://naver.me/xy0KH8Fc

 

 

순번

1 백색소음

2 윤별

3 속도

4 소낙

5 노랑

6 냥큼냥큼

7 비행선

8 민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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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표를 모르는 흰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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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함께 들어주세요.

악보와 함께 시를 읽어주세요.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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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틴국가 헌법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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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글틴은 만우절 농간으로 건립된 고전시가의 명맥을 잇는 인소의 고결한 정신과 획일화된 문학의 경직에 항거한 마쭘뻡파개왕의 자유의지를 계승하고, 인수타의 찌통적, 희망적 감성과 라노벨의 세계제패 사명에 입각하여 사유·발상과 이색적인 표현으로써 글티너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족쇄와 차별을 타파하여, 자율과 이성을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성찰 및 발전을 더욱 확고히 하여 시·소설·수필·감상비평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멘토님들의 기분을 즐거이 하고, 관리자님의 감성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흑화와 항마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균등한 배설을 위한 온몸 소화기관의 지대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과도기적인 해드뱅뱅과 이산화탄소배출량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같은 작품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2018년 4월 1일에 촉발되고 24시간에 걸쳐 시행된 만우절 농간을 이제 야매 글틴집단의 의결을 거쳐 글틴러 갬성에 의하여 위키위키휘키휘키비비디바비디부 호 한다.

 

발의자 윤별 트수 속도 노랑 김줄 별환 서윤호 청울 효흔 멜랑콜리다성 백색소음

 

 

+ 관리자님들 멘토님들 늘 사랑하고 애정합니다 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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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ㄱㅏ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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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ㄱㅏ끔…

소리를 친ㄷㅏ…

시를 사랑ㅎㅐㅅㅓ…

술을 마ㅅㅣㅁㅕ… 마감할 수 있ㄷㅏ는건….

좋은ㄱㅓㅇㅑ….

ㅁㅓ… 꼭 슬ㅍㅓㅇㅑ만 우는 건 ㅇㅏ니잖ㅇㅏ…^^

난…눈물ㅇㅣ…. 좋 다….

ㅇㅏ니…

ㅁㅓ리가ㅇㅏ닌….

맘으로…..우는 ㄴㅐㄱㅏ좋ㄷ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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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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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요 사람들아 거기엔 천국 따위가 없어요

 

부스러진 눈꺼풀을 비비지 말아요 말라붙을 용기는 충분한 (  a   ), 여력들과 서로를 열망하던 촛불은 이미 꺼졌잖아요 이 겁쟁이들아 역시 좀 멈춰 봐요 아이가 널 명명할수록 남는 버거운 흔적들 이름이 텅텅 비어 주저앉을 수밖에 없으리라던 소원들

 

난데없이, 기어가던 발자국마다 모래가 떠올라요 우리는 언젠가부터 헨젤과 그레텔 색깔은 색깔로서 다만 여기 남았고, 남되 졸아드는 파랑처럼, 섞이지도 않은 우리가 잘하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가정만 못해요 가령 집에 돌아가면 야옹 하는 모닥불도 축축할 거야 눈을 감아도 보여요 쓰고 있는 길이 얼마나 물컹한지

 

만져요, 뒤돌아요, 칠판을 지워요 분필 가루가 떨어질 수 있게 먹습니까 믿습니까 아니면 치웁니까 우리가 난잡하게 일어서서 여태 서로를 펼쳐내는 여름 동안 통증을 얼마나 비축해 두었나요 더는 머무르지 않겠다고 화병에 팔을 잘라 꽂았나요

 

우리가 방주를 얻어 탈 방법조차 없지요 (  b  ), 흰 화재가 과자집 꼭대기에서 나른하게 녹는 돌고래 튜브, 내리지 않는 폭우와 쓰러지지 않는 전구, 돌아갈 수 있나요 그리하여 눈사람처럼 희고 차게 지배당하리라고 사람들아 척추의 등고선처럼 멈춰요 연달아 부축처럼 구원받을 수 없는

 

 

* a와 b가 공통적으로 느꼈을 알맞은 감정을 고르세요.

1) 나는 너를 왜 사랑하느냐

2) 내가 너를 왜 사랑하느냐

3) 왜 내가 너를 사랑하느냐

4) 나의 사랑은 왜 너일 수밖에 없는가 (하필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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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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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코

 

 

백일장에 요즘 사이코 있대.

사이코?

어. 이과인데다가 문창과도 안 갈 거 같은 앤데, 자꾸 나가서 상 뺏어 온다더라. 미치겠어. 문학특기자 점수로 다 들어가는 건데 솔직히 양보해야 하는 거 아니야? 누구는 절박해 죽겠는데 참.

 

 

Y는 토요일마다 어딘가로 떠났다. 어느 주말에는 기숙사에서 통 보이지 않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가지런히 개어 두어야 마땅할 이불은 늘 구겨져 있었고, 낡은 문제집이나 연습장 따위가 침대 위에 어지럽게 놓여 있기도 했다.

Y는 숨을 몰아쉬었다. 계단과 내리막길을 위태롭게 뛰어내려온 Y는 기다리고 있는 택시의 문을 익숙하게 열었다. 안녕하세요. Y는 늘 택시에 오를 때마다 조급하게 구는 습관이 있다. 기사님, 최대한 빨리 가 주세요. 고속버스터미널이요.

평소였다면 삼십 분 하고도 조금 더 기다려야겠지만 한산한 새벽에는 십오 분도 걸리지 않는다. Y는 익숙하게 택시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바깥을 응시했다. 매주 보는 길의 순서를 외우지는 못했지만, 교차로는 차례로 읊을 수 있다. 사거리, 로데오, 다시 사거리, 그리고 삼거리. 제대로 빗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부스스한 반곱슬 머리카락은 곧 다른 창문으로 옮아갔다.

 

고속버스 좌석에 간신히 앉은 Y는 남청색 백팩을 뒤적였다. 그럴 때마다 Y는 톱톱하고 붕 뜬, 자신이 썼던 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된다. 눈썹이 묘하게 치켜올라간 Y의 손에 보라색 시집이 딸려 나왔다. 나오기 직전 서둘러 고르는 시집의 표지는 명도가 높고 채도가 낮은 색상이 대부분이었다. Y는 자신이 무채색이기 때문에 너무 쨍한 색깔은 자신을 부술 테고, 그렇대서 색깔이 없다면 우울이 얼룩처럼 짙어질 거라는 독백을 징크스처럼 상기했다. Y는 책의 앞부분을 오래 들여다보다가 몇 장을 넘겼다. 핏기 없는 입술이 우물우물 움직였다.

버스가 출발한 후로 Y가 책을 다시 펼치는 일은 없었다. 다만 그것이 마치 부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른손으로 쥐다가, 왼손으로 옮기다가, 이따금 품에 껴안기도 하면서 잠을 청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Y의 입속에서는 금세 까 넣은 초콜릿 하나가 달콤하게 녹아갔다.

 

 

원고지를 받아들었다. Y는 강당의 불편한 의자에 앉은 채 학교와 이름을 차례로 원고지 오른쪽에 기재했다. 아무리 고속버스에서 잤다고 해도 잠의 질이 아주 뛰어나지도 않았을 뿐더러,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분주하게 짐을 챙기고 지하철을 갈아타면서 시간을 매번 확인했기 때문에 Y는 눈을 연신 비빌 수밖에 없었다. 눈을 꾹 눌렀다가 떴다. Y의 시야가 서서히 트이자 세미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마이크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그럼 시제를 발표하겠습니다. 시 부문 시제는…….

Y는 화면에 크게 띄워진 시제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바쁜 발자국 소리들이 강당을 꽉 메웠다. Y는 그제야 원고지와 펜을 꽉 쥔 채 강당에서 벗어나는 무리에 합류했다. 대부분의 백일장에서 그러했듯 서정을 종용하는 시제였다. Y는 손톱이 손바닥에 자국을 남길 만큼 세게 손을 쥐었다.

도서관 열람실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부정행위를 감시하기 위한 진행요원들이 수시로 돌아다녔고, 그들이 걸어 타일이 울리는 소리와 종이 넘기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조용했다. Y는 서정, 이라고 두 글자를 썼다. 이미 입은 바짝 말라 있었다,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느리게 진척되는 발상들을 이끌다가 멈췄다. 서정. 입 안 양 뺨에 시큼한 맛이 갑자기 돌았다. 이건 내 글이 아니다. Y는 혀를 깨물었다. 입이 앙다물어졌다. 원고지 사용법조차 모를 정도로 어리숙했던 첫 백일장의 기억이 잠깐 스쳐지나갔다.

 

 

A 백일장은 극서정 좋아해, 리얼리즘이랑. 학생답고 적당히 잔잔한 거. 길어도 떨어뜨린데. 불교 윤회사상 참고해서 쓰면 상 탄다던데. 왜, A에서 주최하는 거면 말 다 했지.

백일장 전날에 온 메시지였다. 유명했고, 유명한 만큼 소문도 구름처럼 생겨났다. 진위여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그렇대서 그것을 아주 무시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전 수상자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팁들이 있었고, 학원이나 과외에서 이 백일장에서는 어떻게 쓰라고 조언했더라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Y는 밝기를 최대로 낮춘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한참을 키패드만 누르다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뒤집었다. 휴대폰 옆면은 여전히 깜빡거리고 있었다.

 

근데 거기 심사위원 취향 안 맞추면 떨어져요?

거기가 유난히 좀 심해.

왜요?

몰라. 까라면 까야지. 걔네가 상 주는 거니까.

아.

너 보통 산문시 쓰지 않아? 그럼 안 줄걸. 너처럼 환상 끌어와서 쓰는 애들 싫어해. 사유는 없고 겉멋만 든 것 같다면서.

왜요?

내가 심사위원들 마음을 어떻게 알아. 야, 어쩔 수 없잖아.

 

 

다들 아는데, 대학 가려면. A 백일장 시험실에 앉아서도, Y는 도무지 그 이야기를 지울 수가 없었다. 어느새 칠판에는 다섯 개의 시제가 가지런하게 적혔다. 물방울, 눈부시다, 흔들리다, 환승, 편지. 모두 무난한 대상들이었으나, Y에게는 전부 다르게 다가왔다. 극서정. 학생다움. 잔잔함. 불교. 운문시. Y는 스톱워치를 흘긋 바라보았다. 초를 나타내는 디지털 숫자는 멈추지도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머리가 아파오자 Y는 스톱워치를 뒤집었다. 그리고 세 시간을 꽉 채워, 결국 A가 원하던 시를 정성스럽게 제출했다.

죄책감과 유사한 감정을 느끼게 된 건 시상식 이후부터였다. 첫 백일장에서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이름이 불리고, 단상 위에 올라가 떨떠름하게 상을 받고, 악수를 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그러나 Y는 생각보다 기쁘지 않았다. 자꾸만 추 따위의 무게가 자신을 짓누르고 있어서 위험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역 화장실에서 점심부터 저녁까지 먹은 모든 것들을 토했다.

밀고나가자. 그게 어디에서든. 타인 이전에 자신에게 떳떳하지 않은 시는 존재할 가치가 없다. Y가 흔들리지 않기로 결심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연연하지 않기로 했잖아, 상에. 그렇게 다짐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조급해져서. Y가 상에 욕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그랬다면 편도 세 시간과 그에 상응하는 교통비를 감수하면서까지 백일장에 나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과 타협한 상장을 받는 건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것보다 더 싫었다. 또다시 역겨움을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정말로 시를 놓게 될지도 모른다.

Y는 양옆을 두리번거렸다. 동그란 안경을 쓴 진행요원과 눈이 마주치자 Y는 손을 들고 자신의 원고지를 가리켰다. 원고지 좀 바꿔 주세요. Y는 소리가 거의 나지 않게 입을 뻥긋거렸다. 수정테이프로 지우기엔 너무 많아서요. 진행요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금세 돌아와 Y에게 새 원고지를 건네주었다. Y는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주위는 여전히 조용했다. 글을 쓰기 시작한 Y의 머리카락이 시를 방해하기라도 하듯 종이 위로 흘러내렸다.

 

 

Y는 정식으로 글을 배웠던 적이 없었다. 다만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합평을 받고 그걸 발판삼아 자신의 글을 수정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온라인으로 만나는 합평회에서는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지망생들의 글을 읽은 후 합평했고, 받은 합평을 꼼꼼히 읽은 후 시를 퇴고했다.

가끔은 과외를 받는 친구들과 말할 기회가 있었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Y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들은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기 위해 여러 매체를 접하고, 매일매일 추천받은 책을 읽고, 그걸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세련되게 다듬는 기교를 연습했다. 길잡이가 있었다. Y는 그럴 때마다 양쪽 귀에서 자신에게 속삭이는 어떤 목소리들이 한층 더 힘을 얻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너는 문창과도 안 갈 거잖아. 어차피 아무리 공부해 봤자 일대일로 방향 제시받으면서 성장하는 애들하고는 못 비교해. 그냥 포기해라. 아니, 스스로 하는 공부가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야지. 네가 더 많이 읽고 쓰면 시간이 더 걸릴지언정 절대 뒤떨어지지는 않을 거야. 취미로 생각하고 덤빈 거 아니잖아.

 

자신이 사이코라고 불린다는 소문을 전해 듣고 Y가 가장 처음 한 일은 자신이 지금껏 해 왔던 공부들을 글로 열거하는 것이었다. 시집을 읽고 문장을 직조하고 이미지 묘사를 하고 시를 쓰고 퇴고를 하고 서사를 만들거나 꼬거나 비틀었던, 또 시를 분석하고 합평을 하고 나름대로의 시론과 나름대로의 세계를 만들고 그걸 끊임없이 부수기 위해 맨손이 발갛게 부어오르고 손목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두드리던 순간들을 차례차례 종이 위에 옮겨 보는 것이었다.

Y는 글에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건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재능이 글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어렸고 그만큼 순수했던 시절도 있었다. 좌절도 여러 번이었고 이유도 제각각이었다. 재능이 없어. 감각이 없어.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없을 거야. 서사가 늘 같아서 뻔하고 지루해. 네 이야기를 시에 녹여 낼 수도 없잖아. 문장이 늘 끊기잖아. 늘 알레고리는 똑같잖아. 분위기도 매번 거기서 거기고, 세계에선 벗어나지도 못하고. 저 사람들처럼 네가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러나 더럭 겁이 나 도망치면 글은 Y를 붙잡았다. 반대로 글이 도망치면 Y는 글을 쫓아갔다. 어디에 숨든 찾아내고 말 거라고. 이 정도의 이유로 글을 그만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Y는 늘 퇴고를 앞두고 있는, 불가연성 쓰레기 같은 자신의 너덜너덜한 초고를 쳐다보곤 말을 건넸다. 네가 나한테서 벗어나고 싶었으면, 애당초 내 삶에 이렇게나 들어오지 말았어야지. 그건 글도 마찬가지였다. 네가 나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 거 같아? Y를 따로 불러 이야기했던 국어 선생님의 말이 Y에게 겹쳐 들려왔다. 네가 어떤 직업을 갖든 어쨌든 마지막에 글은 쓰게 될 거야. 어떡하냐. 무서운 저주에 걸렸다, 너는.

 

재능이 없으면 그걸 압도할 만큼의 연습량으로 승부하면 되지.

Y는 재능의 부재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열등감은 썩 괜찮은 연료였다. 슬퍼할 시간에 한 편의 시를 더 읽고 한 명의 시인을 더 만났다. 노트북에 저장된 한글 파일이 자꾸만 늘어났다. 발상, 혹은 문장직조라는 부제가 마지막 장에 작게 적힌 손바닥만한 공책들이 쌓였다. 자는 시간을 줄였다. 소등을 한 후에도 여우처럼 몸을 웅크린 채 이불 밑에서 휴대폰 메모장에 활자를 이었다. Y는 더 이상 쓸데없는 절망에 시선을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Y의 손이 멈추었다. 시를 한창 옮겨 적는 와중이었다. 실재와 환상의 중간에서 위태롭게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표현들이 연습용 원고지 위에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누군가는 Y의 시가 딱 Y답다고 했다. Y만이 운용할 수 있는 독특한 사유들. 별달리 특별하지도 않지만 이상하게 Y가 생각나는 어휘들. 백일장에서 화학식으로 발상하는 애는 너밖에 없을 거야.

그건 단지 환상 위에 환상으로 하여금 각자의 논리를 갖게 하고, 그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하고 오차까지도 기록하는 일. 환상을 지어 둔 환상이 더 무너지지 않도록 보수하는 일. 마치 세상에 외따로 떨어진 섬의 무한한 이야기를 한계가 있는 언어로 간신히 옮겨내는 일.

 

 

Y는 마음에 꼭 들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자신에게 부끄럽지는 않을 시를 써 두었다. 발상부터 기존의 틀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있었고, 표현들은 적당히 가벼웠으며 관념은 환상으로 치환되었고, 환상은 또다시 비틀린 채 각자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Y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샤프를 짤깍였다. 더 이상 손이 나가지 않았다. 각질이 일어난 입술을 이로 뜯었다. 비릿한 쇠 맛이 났다. 소매로 입술을 훔쳤다. 소매에 선명한 얼룩이 남았다. Y는 눈을 찌푸리고 아랫입술을 혀로 감쌌다. 따가웠다.

너는 이기적이야. 몇 달 전의 대화는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Y는 자꾸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목소리가 환청인지 아니면 이명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식은땀이 그늘진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떠오르는 기분. 혹은 추락하는 기분. Y는 둘을 동시에 만질 수 있었다. Y는 고개를 돌려 시간을 확인했다. 제출 마감까지는 삼십 분 가량이 남아 있었다.

 

 

문특 쓸 거 아니면…… 백일장 가지 마. 예선도. 네가 애꿎은 기회만 뺏는 거야.

왜?

왜긴 왜야. 예선 한 자리도 걔네한텐 정말 소중한데 네가 가면 한 명이 못 가게 되잖아.

나한텐 안 소중해?

대학이 달려 있잖아, 걔네.

 

너는 아니고. Y는 휴대폰을 고쳐 들었다. 더 이상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휴대폰 너머에서 한숨이 전해져 왔다. 툭툭 튀어나온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가벼운 미열이 맴도는 것을 매만졌다. 눈을 느리게 감았다. Y가 더운 눈꺼풀에 자신의 마른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그래. Y는 간결한 어투로 몇 마디를 더 하고 입을 닫았다.

마우스를 움직여서 파일을 다시 다운받았다. Y의 소속 학교와 이름이 또렷하게 적혀 있는 백일장 예선 합격자 명단이 일렁이다가 뿌옇게 차올랐다. 존재만으로 해가 되는 존재. 글을 쓰는 행위가 죄가 되는 이야기. Y는 문득 이곳이 자신이 서 있을 공간이 아닌 것만 같이 느껴졌다. 한두 번 듣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양보하라는 말. 그건 민폐라는 말. 글은 마치 환상의 네버랜드처럼 Y에게 다가왔다가 멀어졌다가를 반복했다.

영영 잡히지 않을 꿈이라면 어쩌지?

 

 

Y는 손목에 힘을 주었다. 손목과 팔꿈치가 뻐근하게 아파왔다. 그러나 원고지에 한 자가 옮겨질 때마다 Y는 각자라는 단어를 끊임없이 되새겼다. 각자의 싸움. 각자의 길. 당장 앞에 닥친 목표는 다르지만, 끝내는 모두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그러므로 그들은 틀리지 않았으나, 나도 틀리지 않았다.

Y는 마지막 온점을 찍었다. Y의 까만 눈동자가 제목을 오래 응시했다. 끝까지 흔들리는 건 어느 백일장이나 변함이 없었다. 미련하게 구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곧 손을 떠날 시를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이것은 가장 증오하는 나. 그리고 동시에 가장 사랑하는 나. 시에는 한 방울도 들어있지 않으나 조각을 맞추면 울퉁불퉁한 결을 따라 미끈하게 쓰다듬을 수 있는. 그 정도의 손길로도 죽어버릴 수 있고 그 조금이 치사량이 될. 슬프지 않되 슬플 수밖에 없는, 이상하지 않되 이상할 수밖에 없는. 이상하고 축축한 Y.

Y는 시험장을 빠져나왔다. 펜을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집어넣고 원고지를 제출했다. 잘 정리된 원고지를 건네고 인사를 하면 꼭 울 것만 같았으나 Y의 입술은 더 이상 혀나 소매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Y는 알았다. 그들에게 백일장은 큰 기회고 놓치지 말아야 할 숨이다. 때때로 문예창작과에 진학하지도 않을 자신이 백일장에 가는 게 죄라고 여겨져 짓눌리는 밤도 있었다. 그럴 때면 Y는 곧바로 기숙사 책장 한 칸을 가득 메운 시집 중 한 권을 집어들었다. 아무 페이지나 펼친 후 침대에 몸을 던지고 무작정 읽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빠져들어 읽다가 시집을 덮으면 이것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누군가 Y에게 너는 글이 그렇게 중요하냐고 물으면 당연하다는 듯이 소중하다고 답할 자신이 있었다. 백일장도 마찬가지였다. 확신이 필요했다. Y는 자신을 가장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혼자 공부하는 와중엔 퇴화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잘못 공부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불쑥불쑥 시를 비집고 나왔다. 그 생각에 잠식되면 오랫동안 글을 읽는 것조차 힘들었다. 적어도 너는 나쁘지 않게 공부하고 있다는 위로가 필요했다. 필사적으로 외로운, 온전히 집필하는 혼자의 시간에 아주 찰나라도 개입해 이 정도면 괜찮네, 하고 툭 던지는 응원이 필요했다. 그 수단이 백일장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중력이 너무 강해서 글을 쓰기 힘들 때 푹신한 이불을 몸 아래 깔아 주며 좀 쉬었다가 해도 괜찮다는 표정과도 같았고, 전부 그만하고 싶을 때 조금만 더 해 보자고 끌어올리는 손과도 같았다. 강했다. 희박한 가능성에 Y가 매달렸던 이유였다. Y에게는 그랬다.

 

 

의자에 쓰러지듯 걸터앉았다. 정해진 시간 내에 한정된 시제에서 환상의 궤도로 확장하는 건 상당한 체력을 필요로 했다. Y는 시상식을 보고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배가 요란하게 울었다. Y는 가방 앞주머니에 손을 넣어 초콜릿을 꺼냈다. 들쑥날쑥한 손톱 아래 더 들쑥날쑥한 살이 다 하얗게 뜯겨 있었다. 오늘의 위로는 어떻게 될까. 상관없지, 언제는 내 시가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대강당 안으로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Y는 다 먹은 초콜릿 껍질을 구겨 가방에 집어넣고 지퍼를 닫았다. 아침에 보았던 남자가 다시 무대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Y는 가방을 껴안고 가방의 머리에 자신의 턱을 괴고 무대를 응시했다. 마이크 테스트 소리나, 심사위원 총평 후의 박수나, 수상자 발표 직전의 긴장감은 Y에게 이제 익숙했다.

Y의 학교 이름이 대강당에 울렸다. 그 학교에서 백일장에 참가하는 건 Y가 유일했다. Y는 무표정하게 가방을 의자 아래로 떨어뜨렸다.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는 건 백일장에서 수상하지 않겠다고 선포하는 것과도 같다는 걸 Y는 알았다. 그걸 뒷받침이라도 하는 듯이, 가장 낮은 등위였다. 실력으로 압도해 시풍이 달라도 보란 듯이 잘 써 수상해 보이겠다는 건 애당초 치기였다고, Y는 생각했다.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M고등학교? 거기서 백일장에 왔다고? Y가 일어났다. 그리고 기꺼이 사이코가 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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