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치료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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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공포스러운 묘사가 있습니다.

 

 

라미는 눈을 떴다. 병원의 병실처럼 새하얀 천장이 곧장 눈에 들어왔다. ‘지나치게 흰 걸 오래 보고 있으면 미쳐버린다던데.’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우연은 아닐 터였다.

 

머릿속에 아직도 어제의 일이 맴돌았다. 15년 인생을 살면서 그토록 최악인 날이 없었다. 전혀 폭발할 기미가 없던 마음이 너무나 갑자기 터져버린 탓에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어제였던 월요일의 5교시는 국어시간으로 미리 예고한 모둠 활동시간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라미는 모둠장을 맡았고, 다른 아이들이 핸드폰을 갖고 노는 동안 시인의 다른 시를 찾아 학습지에 베끼고 있었다.

“아, 미친. 얘네 단톡방 쓴다.”

“뭐 어때? 쌤도 없는데. 걍 써.”

 

국어 교사가 나간 후 교실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이런 상황에 익숙했기에 라미는 소음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라미가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거의 다 베꼈을 무렵, 누군가가 벌떡 일어나더니 교실 안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한성준 저 미친 새끼가!’ 라는 외침이 들린 것으로 보아 도를 넘은 수준의 장난을 치는 것으로 유명한 한성준이 또 무슨 일을 터트린 것 같았다.

 

‘누구는 혼자 팔 아프게 죽도록 시 베끼고 있는데, 짜증나….’

 

불만은 입으로 나오지 않고 가슴에 쌓였다. 라미는 입술 안쪽을 잘근거리며 씹었다. 겨우 아문 상처가 다시 터지며 비릿한 피 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그것을 삼키며 ‘님의 침묵’의 마지막 행을 써내려갔다.

 

과장되게 쿵쾅대는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여진에게 쫓기던 성준이 벽과 라미 사이의 좁은 거리를 벗어나려다 라미를 밀쳐버린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악!”

 

옆으로 밀려 고꾸라질 뻔한 라미는 비명을 질렀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책상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의자는 잠시 흔들거리다가 다행히도 제자리를 찾았지만, 방금전까지 쓰던 학습지는 바닥에 떨어져 성준의 발에 짓밟혔다. 라미처럼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고 있던 그는 그것을 밟고 넘어져버렸다.

 

잠깐 조용하다 폭소가 터져나왔다. 모두가 라미와 성준을 비웃었다. 얼굴이 새빨개진 성준은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았다. 라미는 그에게 학습지가 밟혔으니 어떡할 거냐고 따지려 했지만 그가 먼저 라미에게 소리쳤다.

 

“야! 벽에 그렇게 붙어있으면 어떻게 지나가란 거야!”

 

라미는 순간 성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성준은 안 그래도 큰 목소리를 더 높였다.

 

“니가 벽이랑 너무 붙어있어서 넘어진 거잖아! 너 때문에 개쪽 됐는데 어쩔거야?”

“이야, 장라미 탓 하는 한성준 인성!”

“근데 장라미 탓은 맞음. 안 그래?”

 

라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짓밟혀 구겨진 학습지를 보고 성준을 보았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이 더듬거리며 나왔다.

 

“너, 너는 우리 학습지 밟고 넘어진 거잖아! 그게 왜 내 탓이야?”

 

‘소심한 장라미가 웬일이냐’는 목소리가 들렸다. 성준은 움찔하더니 되받아쳤다.

 

“학습지 떨어트린 건 니잖아! 니가 간수를 잘했어야지.”

“난 멀쩡히 쓰고 있었어! 니가 날 밀치는 바람에-”

“그게 어쨌건 니가 붙잡고 있으면 되는 거였잖아, 장라미.”

 

유진호가 라미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인기 많고 노는 아이인 진호가 성준의 편을 들자 아이들이 술렁였다. 그리고 곧 성준의 편이 속속 생겨났다.

 

“니가 잘못한 거야.”

“학습지 잡고 있어야지. 너 믿고 니한테 맡긴 건데 이렇게 하면 어떡해?”

“벽이랑 왜 그렇게 가깝게 붙어있냐?”

 

“사과해.”

 

친하다고 여긴 친구조차도 라미에게 사과하라고 말했다. 모두가 그녀에게 적대적인 눈초리를 보내왔다.

 

‘날 믿고 맡기기는 무슨…내가 거절 못한다는 거 알고 다 나한테 맡기는 거잖아. 내가 벽이랑 붙어있건 말건 한성준이 이쪽으로 뛰어온 게 잘못이지 내가 왜 사과해야 하는데!’

 

라미는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생전 처음 느끼는 억울함과 분노로 인한 떨림이었다. 몸의 떨림보다도 더 확연히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항변했다. 학년이 다 끝나가는 겨울,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난 아무 잘못 없어. 가만히 앉아서 학습지 쓰고 있었고…이제 거의 다 썼는데 니가 쳐서 날아갔단 말이야…. 내가 열심히 쓴 거 닌 어쩔건데! 이제 몇 글자만 더 썼으면 끝이라고!”

 

말 끝에 눈물이 차올랐다. 코 끝이 찡하는 느낌이 들더니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짜증나!”

 

라미가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너무 뻔해서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울어버린 자신에게 쏟아지던 경멸과 비웃음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라미는 눈을 꽉 감고 속으로 외쳤다.

 

‘끔찍해. 끔찍해. 도대체 거기서 왜 운거냐고!’

 

하지만 어제의 일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비참한 마음으로 하교를 한 라미는 집에 오자마자 엄마에게 달려갔다. 본래라면 서로 거들떠도 보지 않겠지만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친한 친구조차 그녀를 배신한 상황이니 엄마에게서라도 위로 받고 싶었던 것이다.

 

엄마가 위로해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자신을 안아주며 속상했겠다고 말할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러나 엄마는 라미의 예상을 완전히 부쉈다.

 

“왜 이래? 오자마자 왜 질질 짜?”

 

말투가 험악했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방으로 도망갔어야 했는데 라미는 그러지 못했다. 그러지 못하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울면서 털어놓아 버렸다. 이야기를 다 들은 엄마가 말했다.

 

“그딴 거 가지고 뭘 그렇게 울어?”

“하지만 엄마, 걔네가 날….”

“그런 건 힘든 일도 아냐. 엄만 오늘 어땠는지 알아?”

 

엄마는 라미의 말을 막고 자신의 얘기를 늘어놓았다. 친구 모임에 나갔는데 친구들 딸은 전부 성적이 평균 90점이었다며 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라미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또 다시 몸을 떨기 시작했다.

 

‘날 위로해 달랬지, 엄말 위로해주겠다고 안 했잖아! 그리고 왜 또 성적 가지고 그러는데! 맨날, 엄마는 맨날 성적 얘기하고!’

 

화가 치밀었지만 생각은 여전히 말로 되어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울음이 밀어닥쳤다. 학교에서 울었던 것보다 더 서럽고 큰 울음이었다. 굵은 눈물 방울이 폭포수처럼 볼을 타고 흘러내리며 눈 앞을 가리고 꺽꺽대는 소리가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부터 터져나왔다.

 

“엄마는, 왜 항상…나한테 왜 항상…짜증나! 짜증난다고!….”

 

겨우 입 밖으로 나온 생각은 가장 극단적인 부분이었다. 그것을 이해한 순간 엄마의 표정이 굳어졌다.

 

엄마는 나긋나긋하려 애쓰지도 않고 소리질렀다. 라미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쉴새없이 몰아붙였다.

 

“내가 너한테 항상 뭘 했다고 짜증이 나! 짜증이 날 거면 내가 나야하는 거 아니니? 이 세상 너만 힘든 것도 아니고 나도 힘든데 왜 내가 네 어리광을 받아줘야 하는데? 열다섯이나 먹어가지고 그딴 일로 징징대기나 하고. 도대체 왜 넌 왜 그러니?”

 

“나한테 화풀이 하지 말고 네 방 가서 평소처럼 틀어박혀 있어! 거기서 울던지 징징거리던지 하란 말이야!”

 

그 말이 어제 마지막으로 나눈 엄마와의 대화의 끝이었다. 떠올리니 다시 울컥한 라미의 눈꼬리를 타고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도대체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지? 엄마는 날 사랑하는 게 아닌가? 왜 엄마까지 나한테 그러는 거냐고!’

 

눈물이 계속 흘렀다. 그 때문에 왼쪽으로 몸을 돌리자 연두색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눈에 편한 색상이라며 샀지만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마음에 들어서 신경쓰는 책상인데, 어쩐지 무언가 이상했다. 금이 가 있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뭐지?”

 

라미는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겨울의 한기가 잠옷을 뚫고 살갗을 파고들었다.

 

책상에 가까이 가자 금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깊고 넓은 범위에 걸쳐 생긴 금이었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 금 간 부분을 만진 순간 책상이 부서졌다.

 

“뭐야!”

 

라미는 놀라서 얼른 손을 뗐다. 그러나 책상은 누군가가 거대한 망치로 계속 내려치는 것처럼 더욱더 작은 조각들로 바뀌어갔다.

 

‘설마, 다른 것들도…?’

 

현실성이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책상에 금이 가더니 손을 대자마자 부서져 가는 일은 말도 안됐다. 그러나 커진 불안감에 라미가 시선을 돌린 순간 그것이 가닿은 모든 물체가 산산조각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금조차 가지 않고 손을 대지 않았음에도 책상과 같이, 보다 빨리 아주 작은 조각이 되어갔다.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새된 비명만이 나왔다. 그 동안에도 물건들은 부서지고 있었다. 이제는 조각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넋이 나갈 것만 같았다.

 

라미는 뒷걸음질 치다가 한때 침대가 있던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닥에 엉덩이를 부딪혀서 신음했다. 반사적으로 짚은 손을 바라본 순간 ‘손도 부서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비없이 손이 산산조각 났다.

 

*

 

“헉!”

 

정신이 든 순간 라미는 숨을 짧게 들이마시며 몸을 일으켰다. 급작스런 운동에 허리가 고통을 호소했지만 아랑곳 않았다. 심하게 흔들리는 시선으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은 조각나 있지 않았다. 열 손가락이, 손톱이 모두 붙어 있었다. 하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 확신하지 못한 라미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만져보고서야 부서지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그러자 도대체 몇 번째인지 모르겠지만 다시 눈물이 났다.

 

‘너무 자주 우는데…울지 말아야 하는데….’

 

하지만 눈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다행히도 차오른 눈물은 몇 방울 되지 않아 라미는 금방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그녀는 비로소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이 어디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곧 당황했다.

 

“여기, 어디야?”

 

주위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의 공간이었다.

 

*

 

눈이 차츰 어둠에 익숙해졌다. 라미는 가만히 있고 싶었지만, 어디선가 피 냄새가 나서무서워진 바람에 일어섰다. 아까 책상이며 천장이 부서진 일도 그렇고 온통 이상한 일 뿐이라 귀신이 나오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조금 걷다가 라미는 빛이 나는 곳을 발견했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가자 그 곳에는 거울이 있었다. 어디서 들어오는지 모를 빛을 반사하는 그 거울은 라미의 몸보다도 큰 전신거울이었다. 뒤에 벽도 없는데 고정된 것처럼 바닥에 수직으로 세워져 있었다. 그녀는 그 앞으로 가서 몸을 비춰보았다.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운 탓에 눈꺼풀이 다소 부어있었고 흰자가 붉었다. 통통한 볼살과 넓은 이마를 보니 짜증이 났다.

 

머리카락에 시선이 갔다. 예쁘게 해본답시고 어설프게 한 양갈래 머리는 갈색이었지만 끄트머리는 금색이었다. 염색을 하고 나서 다시 하지 않았던 탓이다. 금발은 전혀 어울리지 않고, 오히려 이상해 보인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피부가 하얗지 않았기 때문에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못생겼어. 못생겼다고…어?”

 

몸으로 시선을 옮긴 라미는 놀란 그 상태로 굳어버렸다. 자신이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상태여서다. 게다가 자세히 보니 피부 색깔이 이상한 붉은색이었다.

 

라미는 직감했다. 아까 느꼈던 피 냄새는 분명 자신의 몸에 묻은 피의 냄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라미는 말을 잇지 못하고 뒷걸음질쳤다. 어째서 몸이 피투성이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어떤 상처도 입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심장이 황소처럼 거칠게 날뛰었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듯이 머리가 아프고 앞이 흐렸다. 라미는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에 손을 가져다댔다. 그리고 더는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심장은 라미가 알고 있는 그 자리에 없었다.

 

*

 

깨어났을 때, 라미의 몸에서는 여전히 피냄새가 났다.

 

수전증 환자처럼 심하게 떨리는 손을 왼쪽 가슴에 가져다 대보았다. 허공만이 만져졌다.

 

“으아아아아!”

 

라미는 머리카락을 쥐어잡고 소리를 질러댔다. 눈 앞의 거울이 가슴 부분이 뻥 뚫린 채로 울부짖고 있는 피투성이의 여자아이를 자꾸만 비춰댔다. 혐오스러운 그 모습에 속이 울렁거리고 온몸에 개미가 기어다니는 것 같은 끔찍한 느낌이 들었다.

라미는 눈을 꽉 감았다. 그러나 여자아이의 모습은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생각하기를 머리가 강요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울면서 외쳤다.

 

“뭐야 이게. 싫어! 싫어! 이게 뭐야. 무서워! 싫어!”

 

“집에 보내줘! 여기 싫어! 싫단 말이야아!”

 

거울 속의 여자아이가 말을 건 것은 그때였다.

 

“보내줄까?”

“…넌 뭐야?”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거울의 상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이 너무 현실성이 없는 것들이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거울 소녀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어쩐지 악마가 짓는 듯한 느낌이 드는 무서운 미소였다. 소녀의 입술이 열리자 라미는 저도 모르게 침을 한번 삼켰다.

 

“너, 진짜 한심해.”

“뭐?”

 

뜬금없는 독설에 라미는 얼이 빠졌다. 혀를 찬 거울 소녀가 다시 말했다.

 

“네가 너무 한심하다고.”

“….”

“얼굴도 몸도 머리도 전부 못나고 성격은 소심하기 짝이 없고. 왜 그렇게 사는 거야?

 

거울 소녀는 그런 말을 하며 실실 웃었다. 라미는 화가 났지만 감히 화내지 못했다. 열 수 없는 입은 바깥에서나 여기서나 똑같았다.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 진짜 한심하다.’

 

거울 소녀가 그런 라미의 모습을 지적했다.

 

“왜 나한테 화를 못 내? 화를 내야지 너한테 안 이럴거 아니야. 그리고 화를 낸답시고 울어버리니까 애들도 엄마도 너를 갈구는 거라고. 제대로 화를 내야지, 안 그래?”

“…맞아.”

 

라미는 잔뜩 움츠러든 채 대답했다. 거울 소녀가 그녀를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한심하지만 불쌍하니까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줄게.”

“정말?”

“그래. 좀 믿어봐. 설마 내가 널 잡아먹겠어? 고작 거울의 상에 불과한데?”

“….”

라미가 대답하지 못하자 거울 소녀는 아까의 그 부드러운 미소를 다시 지었다. 아까처럼 독설을 날릴 것만 같아서 다소 불안했지만, 소녀는 친절한 말투로 말했다.

 

“여길 나가기 전에 우선 알아둬야 할 게 있어. 여긴 네 마음속이야.”

“마음속?”

“그래. 네가 지금 엉망진창 이 꼴인건 네 마음이 그렇기 때문인 거야.”

거울 소녀는 자신의 몸을 가리켰다. 라미는 왜? 라고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자신이 엉망진창인 이유쯤 쉽게 알 수 있었다.

 

“…내 성격이 이렇지만 않았으면…남한테 싫은 소리도 못하고 힘든 일은 맨날 나만 떠맡고…한심해….”

 

원망의 말이 라미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거울 소녀는 오, 라면서 입술을 동그랗게 모았다.

 

“맞아. 네가 그따위니까 이런 일이 생긴거야. 이번 일 터지기 전에도 넌 그것들에게 부려졌잖아? 좀 더 강해질 필요가 있어, 너는.”

“…강해질 수 있을리가 없어.”

 

라미는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쥐었다. 다시 반복해서 말했다.

 

“강해질 수 있을리가 없다고. 네 말대로 난 한심하고…겨우 화낸 것도 울어서 다 망치고…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어.”

 

거울 소녀가 헛웃음을 지었다.

 

“야, 그러니까 강해지라는 거잖아. 약하다고 주저앉아 있으면 뭐가 달라져? 네가 여기서 나가려면 강해지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어.”

“…어떻게, 해야하는데?”

 

거울 소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라미의 귀에 들리지 않도록 작게 중얼거렸다.

 

“자극 한번 잘못 줬다가 실패할 뻔했네.”

“뭐?”

“아무것도 아냐. 그건 그렇고 강해지는 방법 말이지.”

거울 소녀가 검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찔렀다.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정석인 방법은 여기 있는 관문들을 통과하는 거야.”

“관문이라고?”

“그래. 뭐, 자기연민, 인정, 그런 종류의 것들이지. 가장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지만 난 추천하지 않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거든.”

 

라미는 눈을 내리깔고 중얼였다.

 

“…난 빨리 나가고 싶어.”

“그래, 그래. 조금만 기다려봐.”

 

거울 소녀가 뒤를 돌더니 무언가를 집어들었다. 다시 앞을 본 그녀의 손에는 어쩐지 익숙한 색의 반죽이 든 통이 들려있었다.

 

“빨리 나가는 방법은 이걸 몸에 바르는 거야.”

“그게 뭔데?”

 

미끈거리는 듯 겉에 윤기가 흐르는 반죽이 라미는 영 내키지 않았다. 거울 소녀는 그런 그녀를 설득했다.

 

“이건 네 살에 뚫린 구멍을 깔끔하게 채우고 피를 지워주는 거야. 얼마 안 걸려서 금세 나갈 수 있지.”

“느낌 이상할 것 같은데….”

“그럼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관문을 통과할래? 통과하지 못하면 여기 계속 갇혀있을지도 모른다고.”

 

거울 소녀가 ‘정말 끔찍한 일’이라면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라미는 고민에 빠졌다.

 

‘어떡하지. 여기는 얼른 나가고 싶지만 저건 왠지 불안한데…그렇지만 관문을 통과하다가 실패하면 어떡하지? 나라면 그럴 수도 있어. 여기 영원히 갇히면 어떡해? 엄마는 보고 싶지 않지만 집에는 가고 싶다고. 여기 있기 싫어.’

 

한참 동안 라미는 선택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러다가 문득 거울 소녀에게 물었다.

 

“이걸 바르는 게 강해지는 거랑 무슨 연관이 있는거야? 고작 반죽일 뿐이잖아?”

 

거울 소녀의 눈이 반짝였다. 먹잇감을 몰은 암사자의 눈빛 같다는 생각이 라미의 뇌리를 스쳤다.

 

“강해진다는 건 상처를 이겨내는 걸 말하지. 그건 엄청난 노력과 아픔과 시간을 필요로 해. 하지만 말이야, 그 반죽을 바르면 그런 수고 없이도 바로 상처를 없앨 수 있어. 끝내주지 않아? 심지어 이겨내는 건 성공한 후에도 상처가 남아있단 말이야. 당연히 반죽이 더 효율적이고 좋은 거라고.”

 

거울 소녀의 말은 막힘이 없었다. 듣다보니 말도 그럴듯 했다. 라미는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결정했다.

 

“바를게.”

 

그 말에 거울 소녀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녀는 팔을 쭉 뻗어 반죽 통을 내밀었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반죽 통이 거울 앞 바닥에 떨어졌다.

 

“…윽.”

 

반죽을 한 움큼 떼어낸 라미가 얼굴을 찡그렸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싫은 감촉이었다. 마치 개구리의 등을 만지는 것 같은 미끌거리고 물컹한 느낌에 그녀는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그것을 팔에 바르는 순간 그런 느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원래 내 피부색으로 돌아왔어.”

 

라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얘진 부분을 바라보았다. 분명 반죽을 발랐는데 피부가 두꺼워지지도 않았다. 묻지도 않았는데 거울 소녀가 친절하게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네 피부에 스며든거야. 닦아내도 지워지지 않게.”

“아아…지워지면 어떻게 되는데?”

라미는 계속해서 반죽을 바르며 물었다. 거울 소녀는 신이 나서 대답했다.

 

“지워질리 없으니 걱정하지 마. 만약 지워져도 다시 바르면 그만이라고.”

“다시 바를 수 있는거야?”

“…네가 여기로 다시 온다면.”

 

거울 소녀가 미소지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상냥한 소녀같이 보였다. 라미는 반죽을 다 바를 때까지 그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다 된건가?”

“응. 등도 완벽해.”

 

라미는 거울 앞에서 몸을 비춰보았다. 그녀의 등에 반죽을 발라준 거울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손뼉을 한번 쳤다.

 

“어…?”

라미의 눈앞에서 거울 소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소녀의 목소리만이 들렸다.

 

“거울로 나가. 그게 문이야.”

“아….”

 

드디어 집으로 돌아간다. 그런 생각이 들자 라미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거울 속에 팔을 집어넣자 팔이 쑥 들어갔다. 라미는 급하게 나머지 몸도 집어넣었다. 완전히 어둠을 벗어나기 전, 그녀는 거울 소녀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처음에는 너 좀 무서웠는데 실은 착한 애였구나. 반죽 줘서 정말 고마웠어! 안녕!”

 

 정다운 인사를 끝으로 라미는 어둠을 빠져나갔다.

 

 거울 위로 거울 소녀가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또 다른 소녀도 나타났다. 거울 소녀는 라미가 반죽을 바르기 전의 모습이었지만, 밧줄에 묶인 또 다른 소녀는 라미가 반죽을 바르기 전 후의 모습이 섞여서 얼룩져 있었다.

 

거울 소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바라보는 사람이 얼어붙을 것만 같은 악의가 담긴 미소였다. 정말로, 악마 같은.

 

거울 소녀가 조롱하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묶인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문지기 아가씨. 여길 빌려줘서 고마웠어. 네 주인은 정말 멍청하더라.”

묶인 소녀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거울 소녀의 만면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 안녕, 꼬마야. 얼른 또 보자. 네 영혼을 가질 날이 머지 않았어.”

 

빛이 꺼졌다. 라미의 마음은 완전한 암흑이 되었다.

 

 

부족한 글로 첫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오래전에 썼던 글에 살을 덧붙여 보았는데 괜찮을런지 모르겠네요. 좋은 조언을 기대하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 조금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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