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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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각을 베어 물어
검은 나방이 오래된 춤을 추면 우리는 골몰한다

 

나방을 박제하세요 날개의 얇은 끝이 닳았어

너는 항상 다정하게 굴지 말라며 날개를 뜯어

우리는 자주 서로에게 총을 겨눈다

 

내일의 흉터를 발목에 새겼고 손가락 마디마다 라일락이 피어난다 너는 내 살 위에서 그림자놀이를 하다가 손가락을 꺾어 꽃다발 사이에 숨겨.

 

종종 내일의 타살을 훔친다

 

쇄골 위 장례를 치른다 너는 생존자가 되지 말 것 짓밟으면서도 구원을 바라는. 라일락을 너의 동공 사이에 박아두고 저수지 아래에서 기어 나오는 레퀴엠 악절의 숨을 끊어버리자

 

한낮의 불한당이잖아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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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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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주는 ( )이 생겼다
너는 나를 ( )라고 부르다 나는 너를 이름의 끝 글자로 부르다 너는 네 이름의 끝 글자를 내게 떼어주다

 

덜렁거리는 목을 가진 내가 가출을 하다 나는 우산도 없이 창밖으로 뛰어나가다 너는 뒤늦게 붉은 우산을 내밀다 나는 이미 ( )이다

 

우기에는 물가로 낙하
너의 발목까지도 차오르지 못하는 물 너는 자주 하얀 나비를 보다 혈액 대신 투명함이 가득 흘러서 너는 울다

 

너는 너의 빌라에 도착하다 옆집 세탁기가 시끄럽다 비는 이미 그쳤다 빨래를 생각하다 축축하게 늘어진 옷들로 얼굴을 덮다 숨구멍으로 습기가 축축 들러붙다 너는 묵묵히 빨래를 널다

 

나는 푸른 밤에 자주 머물다 가끔 내 생애를 들고 한참을 달빛에 비추다 고민을 하다 눈을 감다 다시 눈을 뜨다 눈을 감다 다시 눈을 뜨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게 되다 그래도 나는 살아있다 그렇다고 생각하다

 

나는 우산 없이도 장마를 퍽 잘 버틸 것이다
가끔 네 생각을 하다 자주 너를 까먹을 것이다

 

극열하다
열망하다
나는 너를 망望할 것

달과 태양처럼
너와 나를 정반대에 두고
나는 너를 (                   )

 

너는 빨래를 차곡차곡 개다 너는 나를 모른다고 하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옷장에 옷을 차곡차곡 넣고

 

(네 열병은 참 길다 난 계속 돌아오는 길을 모를 것)

 

넌 가끔 낡은 사당의 문을 열고 인화燐火를 보다 비가 주기적으로 내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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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 아틀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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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버린 눈동자로 죽어가는 눈동자를 보살피다가
이구아나에게 먹이를 준다

금방 울어버린다

 

동물원 바로 옆에는 정육점이 개업했다 이것은 또 누구의 어떤 쓸쓸한 업을 이어나갈까 자신을 해부하는 법을 몰라 다른 종을 해부하는 일종의 과학시간. 가위를 손에 쥐고 이제는 거울을 보세요 거울과 가위바위보를 했다 거울이 약간 깨졌고 그 흐릿함 속에 내가 아닌 다른 것이 보였다

 

흰 토끼와 눈으로 대화를 해 눈처럼 하얀 털 위로 폭설처럼 우수수 숨은 말들과 숨바꼭질 해 인간의 말은 너무 어렵습니다 그림자도 말도 몸도 다 투명하게. 앵무새가 어제 죽었다 기도는 그만하고 십자가를 부술 것

 

이구아나를 보다가 거울을 보다가 내가 아닌 다른 것을 보다가 흰 토끼를 보다가 불투명한 나를 본다

 

나는 투명한 새장을 열고 그 안에 숨는다

입을 다물고 앵무새 흉내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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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rdiac tw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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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내가 금붕어 먹이를 주기. 밤에는 네가 어항 물을 갈아주는 거야. 혜야. 격주 토요일마다 유서를 한 줄씩 나누어 쓰자. 다음 주면 우리는 죽을지도 모르니까. 투명한 숨이 파란 혼으로 변할지도 모르니까. 매달의 첫 일요일에는 네가 분홍색 쉬폰 주름치마를 입어. 매달의 마지막 일요일에는 내가 푸른색 테니스 스커트를 입을게. 첫 숨은 내가 쉬었잖아. 마지막 숨은 혜, 네가 쉬어. 우리는 하나야. 몸은 나뉘었지만 영혼은 서로에게 귀속되어 있음을 잊지 마. 그걸 되새기는 순간 우리 사이의 경계선은 모호해져. 너는 너. 나는 나. 너는 나. 나는 너. 결국은 모든 게 다 뒤섞여서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지. 잊지 마. 우리는 하나. 우리는 하나.

 

 

혜의 치마는 짧습니다. 중학생은 치마 길이로 관계의 우열을 나누는 이상한 관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치마가 가장 짧은 혜는 너무나도 쉽게 우위를 차지했고요. 덕분에 혜는 학교에서 가장 진한 색 틴트를 바를 수 있었어요. 옅은 분홍빛 조가비 같은 입술을 핏빛 틴트로 덮은 혜는 예뻤습니다. 그런데도 혜는 자꾸 불안해했어요. 틴트 색과 같은 검붉은 피가 입술에 총총 박힐 때까지 입술을 물어뜯었고 종종 불규칙한 속도로 다리를 떨곤 했지요. 툭, 툭. 툭툭. 툭. 툭. 툭툭툭. 투툭. 그리고 가끔머리가 지끈거리는 날에는, 그러니까 눈을 뜨고도 악몽을 계속 꿔야만 했던 날에는 지치도록 울었어요. 아, 손거울을 집어던지며 울기도 했지. 가끔 그 거울 조각이 발바닥에 박혔거든요. 혜는 이불을 꼭 뒤집어쓰고 울면서 노래를 불렀고. 그러다가 묽은 숨을 뱉기도 했어요.

있잖아 아파 이번 생이 아파 도대체 얼마나 더 아파야 해? 선생이 나한테 뭐라고 한 줄 알아?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 같대 씨발 그래서 자꾸 손목을 긋는대 자꾸 이상한 환영에 시달린대 어긋나고 있대 조금만 더 늦으면 바로 잡을 수 없대 난 이대로가 좋은데 아니 싫은 건가 난 지독한 자기혐오에 시달리고 있어 근데 변하기는 싫어 내가 왜 변해야 해 그냥 난 자꾸 미워하고 싶어 아무 것도 몰라 이젠

아니 애초에 난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애잖아

혜는 그렇게 연신 악악 소리를 지르다가도 금방 잠이 들었습니다. 저는 가끔 잠든 혜의 손을 잡았어요. 내 손과 닮은 손. 아니 같은 손. 온통 희다가 문득 끝이 분홍인 손. 둥그스름한 손톱 아래 연한 살에 흉터가 가득한 손. 보면 아픈 손. 아프다가 영영 아프다가 그렇게 앓다가 미쳐버릴 손.

 

그것뿐인 손.

손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손.

자기를 보호 할 줄 모르고 자꾸 자기를 살해하는 손.

우리 살결에서는 같은 냄새가 났습니다.

 

 

혜와 저는 쌍둥이. 다른 몸에 같은 영혼을 공유하는 쌍둥이. 어릴 때부터 우리는 줄곧 규칙을 만들고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 했습니다. 수요일은 새벽에 샤워를 하기, 서로의 첫사랑은 공유하기, 혜가 머리를 푼 날에는 제가 머리를 묶고 혜가 머리를 묶은 날에는 제가 머리를 풀기. 일기장은 한 장씩 번갈아서 쓰기. 우리는 자랄수록 자꾸 닮아갔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동일해진 정신. 그래도 괜찮았어요. 우리는 무언의 약속을 했으니까. 투명한 새끼손가락을 물컹한 칼로 베어내서 아무도 볼 수 없는 혈서를 썼으니까. 우리 둘만의 세계에서 영영 살기를 희망했습니다. 우리의 법, 우리의 관념, 우리의 연애, 우리의 치마.

 

 

잔잔한 여름. 블루와 스카이 혹은 블루와 오션. 블루는 종종 푸른 것들을 형용하는 단어라는 사실을 캔디바를 꼭꼭 씹으면서 달콤하게 알게 된 그날. 입에서 톡 하고 터지는 캔디 또 저 건너편 하늘에서 톡 하고 터지는 불꽃을 구경한 날. 잊을 수 없습니다. 아니, 저는 그 날을 잊지 못 해요.

그 날 우리는 스케치북에 아무렇게나 그림을 그렸습니다. 붉은 선은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고 검은 눈동자는 학급 친구가 되었으며 손가락이 없는 손은 피아노가 되었어요. 그리고 저는 그 스케치북 한 장을 북북 찢어서 종이비행기를 접었습니다. 혜는 베란다에서 종이비행기를 날렸고요. 비행기는 곧장 추락했습니다. 혜는 종종 아무 이유도 없이 웃었습니다. 스케치북 모서리에 손가락이 이리저리 긁혔습니다. 제 손에서 하얀 스케치북 위로 뚝뚝 떨어지는 선혈을 바라보며 혜는 웃었고 저는 울었어요. 손이 아리고 시려서 전 종이비행기 접기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컴퓨터를 켰어요.

이 달의 운세, 오늘의 운세, 별자리, 띠…. 우리는 한 번에 두 명의 운명을 모두 엿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별자리가 뭐더라. 물고기 자리? 오늘의 운세는…곤경에 처해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굳게 먹고 하던 일에 열중하세요. 운명은 노력하는 자를 바라봅니다. 결국 도움의 손길은 오기 마련. 연애를 한다면… 이 부분부터는 읽을 필요가 없지. 우리는 시덥지 않은 주제로 속살거렸어요. 야, 연애래. 연애. 부끄러워라. 혜야. 우리도 언젠가 연애를 하겠지? 부부가 되겠지? 내가 속삭여주는 말들을 들으며 혜는 곧잘 웃었어요. 음이 유난히도 높았습니다. 꼭 노래 같았어요.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 혜는 종종 손목을 그었습니다. 오늘도 혜는 합니다. 저는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다 토했습니다. 속이 쓰렸어요. 혜는 걱정스럽다는 듯 내 등을 토닥거렸습니다. 더러워, 정말 더러워. 목이 갈라지면서 이상한 소리가 나왔어요. 목이 아파서 미간을 찌푸리니 걔가 물을 한 잔 떠왔습니다. 나는 물을 벌컥거리며 마셨어요. 약간 숨이 막혔고 몸 내부에 물이 가득 차서 익사 할 것 같았습니다. 다행히 물은 딱 그즈음에서 바닥이 났고 나는 다시 숨을 쉬었어요. 짧은 치마. 진한 틴트. 피. 혜.

너도 해 볼래?

아마 조금 더 깊었습니다. 혜는 혼자만 아픈 걸 싫어합니다.

 

 

쌍둥이 법칙 하나 하나가 죽으면 둘도 죽을 것

쌍둥이 법칙 둘 하나는 종소리로 둘을 부를 것

쌍둥이 법칙 셋 하나가 죽은 계절은 겨울일 것

 

우리는 그 법칙을 퍽 좋아했습니다.

 

 

…지금 저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첫눈이 왔습니다. 저는 여전히 혜의 뒷모습을 봅니다. 거울을 한참 바라보다가 혜의 눈길을 바라봅니다. 혜는 죽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몸은 나뉘었지만 영혼은 서로에게 귀속되어 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해가 집니다.

내 자신이 무너진 자리를 바라봅니다. 혜의 동맥과 나의 동맥을 구분하는 법을 잊었습니다. 혜는 종이 비행기를 접다가 손가락을 다칩니다. 나는 종이 비행기를 날립니다. 멀리 멀리 날아가다가 툭 하고 떨어집니다. 그 비행기는 아마 작성자 불명의 유서.

너는 너. 나는 나. 너는 나. 나는 너. 결국은 모든 게 다 뒤섞여서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지. 잊지 마. 우리는 하나. 우리는 하나.

혜가 내 숨을 멈췄습니까. 내가 내 숨을 멈췄습니까. 내가 혜의 숨을 멈췄습니까.

너는 너. 나는 나. 너는 나. 나는 너. 결국은 모든 게 다 뒤섞여서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지. 잊지 마. 우리는 하나. 우리는 하나.

 

 

해가 무너진 자리에 달이 기울어지던 그 밤에

서늘한 바람이 목덜이를 베어 물던 그 밤에

직접 네 숨을 틀어막았어야만 했는데

그랬어야 했는데

 

 

우리의 끝은 기왕이면 같이. 내가 죽은 날 혜는 죽었습니까. 내 눈 앞에 작은 종이 보입니다. 종을 툭 칩니다. 종소리는 끊임이 없고 자꾸 퍼집니다. 혜는 길을 잃었나 봅니다. 어쩌면 내가 길을 잃었고 우리는 죽어서도 서로를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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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생은 체리맛 립밤을 바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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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핑 캔디 바를 베어 먹으면 드라이아이스처럼 번지는 미신과 뒷담화 우리 수식과 단어 말고 별자리와 연애운을 외우자 있잖아 남자 친구와 키스는 부끄러워 한 뼘만 더 크고 할게 응

 

숙녀의 숨 막히는 첫 사춘기 역겨운 체취와 발광하는 자취 흔들리는 분홍 네온사인 더듬더듬 읽어 너만 알아듣는 언어로 넋두리를 어지러운 외계어 추락하는 밤 빙글빙글 돌아가는 별의 나선과 악 악 난 아직도 네 말 이해 못 해 어쨌든 샤워를 하고 수증기로 기억한다

 

별자리를 훔치고 싶어?

 

우회전 후 직진 하늘을 걷는 거야 성운들 틈에 숨어 좀 쉬어 별을 따는 법은 어렵지 않아 뜨거운 별 위에 지중해를 부어서 차분히 식힌 후 분홍 파우더 가루를 솔솔 뿌려 잠재워 매일 악악 거리며 네 잠자리를 지켜줄 거야

 

아 맞다 너는 가끔 내 목 조르는데 그 모습이 창백하게 예뻐서 씨발 예쁘게 못난 사람 그래서 막대 사탕 입에 물고 몇 번이나 손을 헛디뎠잖아 네가 악악 운다 사랑을 왜 난도질 해? 목에 붕대를 칭칭 감으며 자꾸 미안해하지 우리는 화해하며 교복을 바꿔 입는다 깨진 사탕 조각에 혀가 자꾸 다쳐 틴트색 피가 간헐적 별 폭발처럼

 

넌 교복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립밤을 집어서 다 닳은 입술에다 문지른다

 

촉촉한 입술로 다정하게 체리를 베어 먹어 조심 조심 베어 물어 거봐 네 뺨에 과즙 다 튀었잖아 연약한 볼 안쪽 살에 혀끝으로 일기를 쓴다
몽상, 망상, 향, 길잃은, 두려움, 두 눈을 가리고, 라일락, 이별, 외사랑, 은하수, 깜빡거리며, 얇은 손가락, 붉어진, 마디마디, 감정, 이상, 두통, 전남친, 틴트, 너, 중독, 가끔 온점.

 

맨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여고생은 체리맛 립밤을 바르세요

 

붕 뜨는 시차 감각에 역겨운 체취 발광하는 자취에 두근거리는 시야 쿵쾅거리는 공기의 입자 분홍빛으로 번지는 나의 첫 사춘기

 

결국 파열하는 분홍에게 애도를 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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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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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열기구는 일 년 전 태평양에 추락했어 소년은 이도교 성직자였던 삼촌과 함께 식었다 얼었다 부서졌다 그들은 아마도 치사량의 눈물이 되었어 달아올랐다 녹았다 응고되었다

 

그냥 소금이 되었다는 말이야

 

부서지면서 소년은 눈을 떴어 고요하게 이명이 퍼져

 

나비 동맥 차가워 새벽 불온한

 

바닷물에 일기를 썼어 이도교의 최종장 점멸하는 해저의 불빛이 보여 소년은 조금 더 부서져 삼촌은 아직 얼어있다

 

입자는 하늘의 별이 되었을 거야 그들은 이상한 전설과 퍽 잘 어울려 그들의 조상은 유목민이었어 언어는 별자리였고 집은 별무덤 가끔 삼촌의 손등에는 유성우가 툭툭 떨어졌어

 

2

엄마는 이도교의 신자야 신자들은 소년과 삼촌의 추모를 위해 팬케이크에 냉동 딸기를 얹고 설탕과 시럽을 뿌리는 의식을 거행했어 소녀는 쌓여 있는 팬케이크를 전부 먹었어

 

남은 잔해들이 달팽이 껍질처럼 나선형이다

 

소녀는 설탕의 입자가 싫었어 싫어 싫어 너무 달아 너무 달아

 

혀에 소금을 뿌리고

 

자꾸 소금을 뿌린다 혈액에서 설탕을 없애고 싶어 소녀는 하얀색 교복 셔츠에 묻은 노란 시럽을 노려봤어

 

엄마는 팬케이크를 다시 구워왔어 소녀는 이제 딸기와 설탕과 시럽 대신 소금을 뿌려 소녀는 소년의 혀를 상상해 이제는 세상에 없는 그 혀 소녀는 아직 첫키스를 못 해 봤다

 

소녀는 아주 조금 녹았어 소녀의 머리카락이 소금 위로 떨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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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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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혼에는 빈방이 없어요

저기요

저한테 오지 마세요

너무 춥거든

여기는 나는

 

2

그래서요 손이 얼었어요

있잖아요 사유들이

나를 좀먹어요

 

3

여린 살을 뚫고 장갑을 뚫고 주머니를 뚫고

파랗고 기다란 우울들이

자꾸 손톱 위로 자라요

내 피는 푸른색

인간은 붉은 피의 동물이래

소통을 하는 짐승이래

그럼 말하는 법을 잊은 나는

그저 짐승인가 아님 괴물인가

 

4

여전히 얼었고요

사유는 끊임이 없어요

 

5

모르는 사람들과

같은 단어로 대화하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는데

기다란 우울들을 손톱깎이로 다듬었어요

거스러미를 물어뜯고

이걸 어째

내 손을 봐줄 사람은 없음을

손톱을 몽땅 뽑아버렸어요

이제는 손톱으로

교복 치마 주름을 만들 수 없어

 

 

6

시리고 시린

있잖아 손이 얼었어요

더 꽁꽁 얼었어요

푸른 피

조금은 외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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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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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닿는 순간 바스러지는

늙은 꽃을 본 적 있어

 

우리는 서로의 시계를 나눠먹었잖아

눈 결정처럼 연약하게 희어지는 머리카락

서로의 발목을 잡으려고

추하고 다정하게 이어지는 12시와 1시 사이의 간격

 

팽창하는 운명과 동시에 터져나가는 혈관

공백 공백 공백

모든 분과 초는 빅뱅이지

네 안에서 발화하는

가장 낡은 우주

 

난 네게 손을 가져다 대고

바스러지는 머리카락

한 가닥씩 이름을 불러

 

아슬하게 파열되는 연음

온통 하얗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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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사의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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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형은 하나의 빛을 찾기 위해 헤매는 것처럼 보였어요. 아, 맞다. 도박사의 오류라는 심리적 작용을 아시나요. 1913년, 모나코 몬테카를로의 카지노에서 룰렛 게임의 구슬이 25번 연속 검은색으로 떨어지는 일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아. 근데 그 결론은 통 기억이 안 나.”

“형은 26번째 구슬, 어떤 색에 베팅 할 것 같아요?”

…그러게. 참 난해한 문제 같아. 나는 항상 이런 질문에 대답을 못 하지. 내 모든 시간 속에는 항상 질문이 존재했고, 난 늘 잘못된 대답만 했다. 내가 겪을 수 있는 모든 시간을 지나 봄의 끝자락.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자각은 너무 늦게 찾아 왔다.  그와 동시에 쏟아져 내려오는 감정의 장마. 최종 목적지는 바로 너의 앞. 꿈에서만 볼 수 있는 너.

 

빛나는 것을 사랑하는 재주는 없었다.  늘 시끄러운 교실의 어두운 귀퉁이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를 필사하곤 했다. 선생님들은 말했다. 너는 시를 참 좋아하는구나. 이담에 커서 시인이 되어도 좋겠다. 너는 솔직히… 인서울은 어렵잖니. 그냥 책 열심히 읽고 좋은 경험 많이 하고. 그렇게 글을 쓰거라. 그러면 나는 대답했다. 저는 시인, 못 해요. 그냥, 심심해서. 그냥, 할 거 없, 어서. 시는, 좋아서. 그래서. 쓰, 는 거고. 읽는 거, 고. 그래요. 응… 그래요. 더듬거리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생님들은 그저 싱긋 웃으면서 답했다.

그래. 시인은 가난하잖니.

그 말이 내 가슴을 쿡쿡 찔렀다.

 

도열을 만난 곳은 다름 아닌 문학부였다. 그 아이는 열 일곱. 나는 열 여덟.  우리 학교의 문학부는 의도치 않게 소수정원으로 운영되었다. 학생들은 다들 '문학' 은 '스펙' 과 하나도 공통점이 없다며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으니까. 도열이 입학한 해에도 문학부의 신입 부원은 고작 3명 밖에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한 명은 유령 회원으로 첫 입부 날에도 오지 않았으며, 또 나머지 한 명은 첫 날부터 문학에 대한 무지함을 드러내며 자신은 다른 동아리에 들어가지 못해 이 곳에 가입했음을 구구절절하게 밝혔다. 그리고 마지막, 도열. 희고 맑은 피부에 검고 정갈한 머리, 눈끝과 입술이 붉은 소년. 그 애가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허공에 피아노를 치듯 손장난을 칠 때, 나는 전율했다. 이유는 몰랐다.

 

다른 신입 부원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도열은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 저는 시인이 될겁니다. "

2학년 부원이 물었다. 왜 너는 시인이 되고 싶은데?

" 할 수 있는 게 그것 밖에 없으니까요. "

나는 다시 전율했다. 여전히 이유는 몰랐다. 호기심이 생겼다. 동경하게 되었다. 내가 가지지 못한 태연함을 가진 소년. 할 수 있는 유일한 게 시인 소년. 시인이 될 소년. 도열. 너. 내가 보기에는 빛이 나는 소년. 그래서 생각하기도 벅찬 소년.

 

시간이 지나고 문학부 활동이 이어질수록 도열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 도열은 시를 정말 좋아했다. 걔는 종종 시집을 들고 복도를 천천히 걸어가곤 했다. 특히 복잡하고 어려운 시를 좋아했다. 해석이 여러갈래로 퍼지는 시를 좋아했다. 또 시를 굉장히 잘 썼다. 종종 내게 보여줬다. 선배, 다른 선배들이 말이죠. 선배가 여기서 제일 시 좋아한다구 해서요. 여기, 이 부분 좀 봐 줘요. 어때요? 너의 필체를 내 눈에 온전히 담았다. 여러번 곱씹었다. 같은 부분을 반복해서 읽었다. 그리고 천천히 대답했다. 응… 시, 가 참 좋아. 딱 너가, 쓴, 것 같다. 그 이후에도 도열은 종종 나를 찾아왔다. 시를 쓴 원고지를 들고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형. 형은 다른 사람들과 달라요. 도열이 떠나면 나는 그 말을 곧잘 따라 했다. 형은 다른 사람들과 달라요. 내 목소리로 듣는 도열의 말이 낯설었다.

또 도열은 종종 담배를 피곤 했다. 내 앞에서도 종종 피웠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담배 연기가 싫어서. 또 괴로운 듯 미간을 찌푸리는 도열을 보는 게 아파서. 사랑하면 뭐든 닮는다고 했는데. 순거짓말이다. 난 도열의 모든 면을 사랑하지 못했다. 담배를 피는 도열. 낮은 목소리로 욕설을 뱉는 도열. 가끔 학교에 나오지 않는 도열. 나에게 오지 않는 날의 도열. 그런 도열이 미웠다. 나는 절반의 도열을 사랑했다. 시를 사랑하는 도열. 인생의 전부가 시라는 도열. 그런 도열을 사랑했다.

 

나는 종종 도서실을 찾곤 했다. 아무런 이유없이 책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좋았다. 그 가을 날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줄 책상에 앉아서 가만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책을 읽었다. 나는 그 책의 모든 문장을 기억했다. 그래도 계속 읽었다. 어떤 책은 누군가의 삶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없으면 안 되는 공기와도 같은 글. 산소의 농도와 비슷한 글.

톡. 톡. 톡. 누군가가 샤프 끝으로 내 볼을 콕콕 찔렀다. 순간 가을이 봄이 되었다. 벚꽃이 떨어지고 창밖으로 꽃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향긋한 계절이 되었다. 눈을 지긋이 감다가 덜컥 떠버린다. 도열이다.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앉은 도열을 봤다. 도열은 나를 보다가 눈을 감는다. 감은 눈을 뜨지 않는다. 나는 도열을 본다.

도열아

꾹꾹 힘을 줘서 책상에다 네 이름을 적는다. 샤프심이 툭 하고 부러진다. 흑연이 번졌다. 도열의 눈길이 부러진 샤프심에 향한다. 푸스스 바람 빠지는 소리.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열의 소리가 들린다 .

왜 그렇게 애달프게 불러요

도열이 답한다. 마찬가지로 꾹꾹 힘을 줘서 책상에다 적었다. 창백한 네 손에 내 손을 포갠다. 투명한 네 향기가 내 목을 조른다. 도열의 엉킨 머리칼을 본다. 나는 불규칙적으로 다리를 부들부들 떤다. 도열은 그 모습을 보며 살짝 웃는다. 또 부스스 바람 빠지는 소리. 그 순간 머리 속에서 어떤 소녀가 속살거리며 시를 읊는다.

…우리 부숴지는 사랑은 하지 말자. 한여름밤의 꿈에는 관심 없어. 네 눈을 보고 싶어. 너의 눈을 독차지 하고 싶어. 나는 낡은 것들을 싫어해.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다 낡았지. 모순적이지 않니. 가장 낡아버린 자가 가장 새로운 것을 탐하다니. 나는 네 젊음을 원해. 나는 네 청춘을 원해. 네 청춘을 다 가지고 싶어. 우리 푸른 밤에 만나자. 푸른 밤 앞에서 숭고한 기도를 하자. 그렇게 밤을 보내자.

우리 오늘 밤에 만날래?

또 책상에다 적었다. 도열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유도 묻지 않고 도열은 그대로 도서실을 나갔다.

 

그 가을 밤. 정말 도열을 만났다. 우리는 실없는 이야기를 나눴다. 시와 시인과 음악과 너와 나와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를. 툭툭 의미없는 문장을 뱉으며 없던 의미를 만들어냈다. 그래도 좋았다. 우리는 직감했다. 내가 너를 사랑했을 때 너도 나를 사랑했구나.

"우리는 시를 닮았어요."

도열은 자신의 왼쪽 손목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우리 언젠가는 시집을 내자. 만약 성공한다면 그때 우리 수면제나 몽땅 털어 넣고 우아한 잠을 자요. 그러면서 도열은 고개를 푹 숙였고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서정적이고 운명적이고 애상적인. 우리는. 나는 괜히 도열에게 물었다. 너, 시간, 늦었는, 데  집, 안 가두, 괜찮니. 도열은 말없이 고개를 두어번 끄덕거렸다. 짜피 아무도 신경 안 쓰는데. 난 괜찮아요.

"실, 은 난 시인이, 될 마음, 이 없, 어."

"형도 곧 시인을 꿈꾸게 될 거에요."

"… 너랑, 나는 너,무 달라. "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한 번도 그렇게 생각 안 해봤는데."

도열의 목소리가 네 안에서 공명한다. 도열아. 더듬거리지 않고 도열을 부른다. 응, 형. 현이 형. 도열이 내 이름으로 대답한다. 우리는 닮았어요. 도열이 속삭인다.  응, 정말. 그런 것 같아. 그럴지도. 맞아요. 정말 닮았어. 정말? 응. 진심으로. 서로의 목소리를 잃고 우리는 하나의 그저 새벽의 음이 되어서 모든 순간을 기록했다.

 

그 가을밤 이후로 우리는 더 깊어졌다. 사랑을 인정하지는 못 했다. 자꾸 모든 걸 침범하는 아득한 사랑과 그 모든 기원들을 부정했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은 한 마디도 안 했다. 좀 더 자주 도서실에 가고 책상에서 필담을 나누고 새로운 샤프심을 더 많이 샀다. 밤마다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문자로 심심하면 안부를 묻고 서로의 시를 보여주고는 했다. 도열의 시는 자꾸 늘었다. 내 시는 바닥을 기었다. 자신감을 잃어갔다. 도열은 종종 말했다. 그 누구의 글 보다 형의 글이 더 좋아요. 나는 대꾸했다. 아,니. 내, 시는 별로야. 근데, 난, 시인이 될, 것두, 아니라서.

그렇게 일 년이 지나, 이제 나는 열 아홉이고 도열은 열 여덟.

나는 필사를 그만 두었다. 문학부를 그만 두고 시를 그만 두었다. 도서관 방문을 끊고 밤길에서 나두던 이야기를 끊었다. 도열을 부정했고 그 동안 품었던 사랑을 그만 두었다. 이 모든 부정의 이유는 단 하나. 현실과의 타협이였다.

말을 더듬거리고, 시를 좋아하지만 잘 쓰지는 못 하고, 그 동안 해 온 것 하나 없으며, 집안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신을 잘 받아왔던 것도 아니다. 집안 형편은 갈 수록 바닥을 쳤고 성적도 마찬가지. 시간이 갈 수록 세상에 대한 궁금증은 자꾸만 커지는데 그 질문들에 답을 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시를 그만 두었다. 내가 즐기지 못하는 것을 남이 즐겨주진 못 하니까. 그걸 알아서. 나는 모든 걸 관두고 평범한 수험생이 되었다.

도열이 찾아와도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마음이 아팠다. 우연히 도열을 봐도 아는 척 하지 않았다. 도열이 보낸 문자에도 답을 하지 않았다. 도열은 나에게 시와 같은 존재였다. 도열을 보면 시가 생각났다. 시상이, 영감이, 구절이 떠올랐다. 도열이 보고 싶을 때 마다 나는 그냥 도열이 나에게 줬었던, 그 시를 마음 속으로 읽어내렸다. 어렵고 복잡한 시. 아주 가끔 울기도 했다. 그 뿐이다. 다시 문제집을 펼쳤다. 남들보다 늦었더라도 어쨌든 수능을 준비했다.

 

언젠가부터 도열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난 수능을 쳤고, 남들은 이름도 모를 대학교의 알 수도 없는 과에 붙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학교 입학과 동시에 자격증 시험에 매달렸고 그 시험을 위해 학원에 다녔고 그 학원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렇게 살면서 도열을 잊었었다. 그렇게 어른이 되는 줄만 알았다. 사랑을 잊는 법을 알면 어른이 된다고 누가 그랬다. 생각해보면, 난 잊고 싶어서 잊은 게 아닌, 상황에 휘둘려서 도열을 잊은 건데. 난 그걸 몰랐다.

 

동창들은 가끔 주기적으로 모임을 가졌다. 형식적이고 지루한 자리지만 그래도 꽤 많은 친구들이 참석했다. 난 아르바이트와 대학 생활에 떠밀려 아주 가끔씩 동창들을 찾았다. 아마 5월의 어느 날. 10대들과 대학생들을 겨냥한 저렴하고 달콤한 음료를 파는 카페. 그 날 모임에  참석했다. 반가운 얼굴들이 많았다. 헤어짐은 잠시인데, 늘 만남은 벅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고등학생 시절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너, 이젠 말도 안 더듬네? 새끼. 많이 컸어. "

"엄청 고생했어. 말투 교정하는 학원도 다녔다, 내가."

"야아. 너 도열 알지."

"…어. 동아리 후배니까. 당연히 알지."

"걔 죽었다."

"응?"

"도열 죽었다고. 교통 사고로. 걔 자기 졸업식 마치고 그 다음 날 교통사고로 죽었어. 안 됐지. 걔 글도 잘 썼잖아. 성격도 좋고. 게다가 우리 또래니까. 더 좀 아깝지. 슬프고."

 

그 날 아주 깊은 꿈을 꿨다.

 

 

“난 말이야, 다음 구슬은 붉은 색 일 것 같아.”

“왜죠?”

“너무 오랫동안 검은 구슬이 나왔잖아.”

“형은 줄곧 잃기만하다 마지막 변화로 모든 패배를 극복할 승리를 거머쥐기를 바라는군요.”

“정답은?”

“우리 마지막으로 만난지가 벌써… 으이구. 내가 말을 말죠. 못 다한 이야기나 더 해 봐요.”

“여전히 재미없고, 지루하고, 그저 그래. 대학 생활은 생각보다 지루하고 연애는 못 해봤지.”

그래서 형, 요즘 악몽은 안 꾸고? 말도 안 더듬네. 장난스럽게 물어오는 질문에 나는 답하지 않았다. 살짝 웃어만 보였다.

“저는 여기 되게 싫어요. 형이랑 마찬가지로 재미없고, 지루하고, 그저 그래요. 제 모든 건 고등학교 졸업식 후로 멈췄으니까. 키도 더 이상 안 크고."

“너는 내가 짜증나지도 않아?”

“왜 그렇게 생각 하는데요?”

“그냥, 넌 날 좋게 생각할 것 같지는 않아서.”

“옛날에는 그랬죠. 근데 시간이 약이더라고요. 그리고 날 보러왔으니까. 아주 침울한 표정으로. 꼭 제가 구원자가 된 것 같아서요. 기분 꽤 괜찮았어요.”

서서히 꿈이 자각되기 시작했다. 넌 환상이라고. 꿈이 무너진다.

“이제 문제의 답을 알려줄게요. 날이 추워요. 빨리 가야죠, 집에. "

“26번째에도 공은 여전히 검은 색이었어요.”

 

“그게 전부야?”

“붉은 색에 모든 걸 걸었던 도박사들은 모두 전 재산을 잃었죠. 그리고 파산. 이게 도박사의 오류에요.”

 

 

난 붉은 공을 택했다. 빛을 헤매다가 다시 과거를 찾았고 관계의 회복을 알게 모르게 원했다. 도열과 나는 무언으로 통했고 결국 허무하게 종결되었다. 무채색의 순간은 변함이 없었다.

붉어지는 건 눈가뿐이다. 오류에 걸려든 난 파산 직전이다. 확률은 50대 50인데 그것에 오늘의 모든 감정을 베팅했다. 소득 없다는 생각으로 발걸음을 땐다.

오후의 끝에 다다른 5월의 오후.  창밖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지평선 위 붉은 태양. 그 빛은 하늘에 불이라도 낼 것처럼 점점 더 번져간다. 푸른 곳을 더 붉게, 어두운 곳에 붉은 꽃을 피우고. 문득 규칙은 깨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내 모든 걸 베팅해보고자 한다. 언젠가 찾아올 붉은 공의 순간을 위하여. 태양이 지는 걸 보지 못한 채 다시 눈을 감는다. 다시 꿈을 꾸자. 도열. 나의 시, 나의 밤, 나의 청춘, 나의 모든 것. 너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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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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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렬한 소리를 내면서

마지막 유언을 남겨라

아득하게 깨져 나가며

누군가를 상처 입혀라

 

본인의소멸과동시에타인에게상처를주는

너의이기심을나는사랑하지않을수없음을

부서지며갈망하는너의심장비트를따라서

 

그거아니이런빌어먹을통증은사랑이아니라고

엉망진창으로비명소리를내는너를계속안고서

네깨진조각들을주워담아품에안고서연신기도

 

깨짐은 축복이 아니라고

그것을 알기에

부서지는 너의 이름을 끌어안고

 

나는

이제

떨어지는 너의 부분들을

사랑하는 법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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