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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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내 앞에 선을 긋는다

 

나도 선을 그은 옛 기억이 있다

존경하던 한 청년에게

그는 나보다 여러모로 위대하다

고 그렇게

 

누구나 발 앞에는 선이 있다

체온으로 그은 선

곧 자아의 선

곧 타인에의 선

 

나에게도 있었다

너는 세상의 빛

나는 세상의 빛

나는 어두운 너를 비출, 세상의 빛

 

위대하지 않은 너에게는

나의 빛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러나 위대했던 그는 선물로

나의 선을 넘어와 주었다

 

선은

경계를 잃는다

출렁이다

너와 나와 그를

묶는다

 

그러므로 무의미하다!

너와 나와 그는

언제든 그 선을 넘나들 수 있다

 

네가 내 앞에 선을 그었고

그래서 우리는 묶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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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1차 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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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에게 편지를 주었다

 

너로 인해 나는 슬픔을 견뎠고

아름다운 너의 곁에 평생을 함께 하리

 

이제는,

이곳에 오지 말아줘 나는 두렵다

 

포용의 에메랄드 빛 수면의 윤슬

은 거짓말 다 거짓말이다

 

너는 모를 거다

빛조차 사라진 해저면

마-악, 치밀어 오른 서늘함

나에게도 눈과 귀와 그리고

입과 손가락이 있다

 

이제 삼켜야한다 나는

이 차디찬 심층수

나는 네가 두렵다 왜 넌 눈을 가졌니 귀를 가졌니 입과 손가락을 가졌니!

다가오는 너를 위하여

 

다시 삼키고 꿀꺽 삼키고

윤슬 찬란히 선물한다

네가 가면 깨져버릴

나의 파아란 에메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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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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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추적추적 왔던 날

비 젖은 담배꽁초에 불을 붙이는 아저씨를 보았다

불은 붙지 않았고,

다시 버려지는 담배꽁초

처럼 처량하게 길에 눕는 아저씨를 보았다

그 길조차 주인이 있었는지

쫓겨나는 아저씨를 보았다

사람이 될 수 없는 사람을 보았다

절룩이는 아저씨를 30분이나 보았다

그리고 또 한 번 사람이 될 수 없는 사람을 보았다

배고픔에 허덕이는 낙오된 개체

를 외면하려는 짐승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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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欲혹은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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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버리리

힘과 형태와 무게를

 

나는 너를 보내리

어떠한 너이든 보내리라

 

돌진하는 기차 그와 같은 주먹도

피할 수 없는 칼날 모든 것을 자를 말말말

 

나는 나를 버리고

너를 너에게 보내리

없는 것에 휘두를 힘과

없는 것에 내뱉을 형태

없는 것에 대항하는 무게감

 

나는 감정조차 버리겠지만

너는 너와 싸우리

 

이것이 나의 욕 혹은 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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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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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오지 말아줘 나는 두려워

아득한 바다 깊은 곳으로

 

수면의 윤슬 가장 큰 에메랄드

는 거짓말 다 거짓말이야

 

빛조차 사라진 해저면에는

마-악, 치밀어 오른 서늘함이 있지

너는 모를 걸 나도 잘은 몰라서

 

이 차디찬 심층수를 다만 나는 삼켜야지

나는 네가 싫다 왜 넌 눈을 가졌니 귀를 가졌니 입과 손가락을 가졌니!

기다리는 너를 위하여

 

다시 삼키고 꿀꺽 삼키고

윤슬 찬란히 선물할게

모두가 사라지면 깨져버릴

나의 파아란 에메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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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바비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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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진 종이 상자와 같았다.

소꿉장난 같은 가구들이 마냥 그 안에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도

팔다리가 뻣뻣한 바비 인형

나는 나를 그렇게 생각했다.

 

오늘도 나의 주인은 나를 외출시키지 않았다.

상자는 상자와 붙어 있었고

상자는 비면 항상 종이 썩는 소리뿐이었다.

더 찬란한 스펙의 인형은 오늘도 종이만 썩히고 있었다.

 

나는 오늘도 눈물에 젖은 옷을 킁킁 거렸다.

시큰한 냄새.

상자에 송곳을 뚫 듯 내놓은 창으로는

냄새가 빠질 수 없었다.

 

그것은 자주 나의 마약이 되었다.

그 시큰함은 본드 냄새가 방을 채우듯 빙빙 돌았다.

반사적으로 웃었다.

역설적으로 웃었다.

바비의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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