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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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안녕, 오늘은 아빠가 왔네."

"어 왔니. 야자 잘 했어?"

"야자가 야자지 뭐."

"그래. 집 가자."

 

매일 야자를 마친 뒤 무거운 몸뚱이를 차에 싣고 집으로 향하는 30분간의 길에는 가로등이 많다.

아빠가 데리러 온 날에는 항상 그렇듯 오늘 역시

무거운 몸과 무거운 눈꺼풀보다도 몇 배 더 무거운 침묵과 의미 없는 대화를 미리 떨치기 위해

그저 지나가는 가로등과 가로등과 가로등을 응시하며 라디오를 듣고 싶었다.

 

불행히도 음질 나쁜 라디오의 처량한 지직거림을 나도 아빠도 견딜 수 없어 잠시 후 꺼 버렸다.

연신 하품을 하며 '나는 지금 매우 졸리고 지치고 피곤하다.'를 티내려 했다.

서둘러 잠을 청하려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아버렸다.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는 나의 부친이 끝끝내 또다시 의무적이고 형식적인, 성의 없는 질문들을 건낼 것이 두려워서였다.

 

"오늘 점심 메뉴는 뭐였니?"

"제육볶음."

"…어어."

"……"

"뭐였다고?"

"제육볶음이었다고."

"아…어, 그래."

 

오늘도 또 하나의 모노로그가 진행되었다.

역시 부친은 애초에 관심이 없는 것에 대한 질문을 던져만 놓고 제대로 듣지조차 않았다.

제, 육, 볶, 음, 이라는 네 음절조차 알아듣지 못했다. 아니, 그저 정말 듣지를 않았다.

철저히 예상대로였기에 실망하지 않았다, 실망하지 않았다.

 

"내일도 아빠가 데리러 올 거야."

"왜? 내일 엄마 못 와?"

"어, 엄마 내일 워크샵 간다잖아."

"아. 맞다…"

"쯧, 그럼 오늘 엄마보고 너 데리러 가라고 할 걸 그랬네. 으휴, 피곤해 죽겠어."

"……"

 

말을 뭐 그렇게 하냐, 고 항변하고 싶었다.

당신 혹시 머릿 속 독백과 발화하는 말풍선 속 대사를 바꿔 말한 거 아니냐고,

늦게까지 야자 하는 거 눈치 보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면서, 왜 지금 당신은 굳이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 놓느냐고,

엄마가 너무 피곤해 하는 날, 끽해야 일주일에 한 번 데리러 오는 정도면서 그런 말 할 자격이 되느냐고,

마치 엄마에게 선심이라도 쓰는 것마냥, 본인이 드물게 직접 행차하시는 날마다 그렇게 온갖 힘든 티 다 내야겠느냐고.

 

당신과 똑같은 직장인인 엄마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따끈한 아침 도시락을 싸 내 손에 쥐어 주는 걸 항상 보면서,

고등학교 3학년인 첫째 딸이 수면부족에 시달리며 멀리 떨어진 학교에 고생고생하며 다니는 걸 항상 보면서,

다들 자신의 자리에서 각자 그 무게를 버텨내고 있음을 모를 수 없으면서,

왜 당신은 무언가를 조금이라도 참으려 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대화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래서 남의 말을 듣지 않는, 들으려 하지 않는, 결과적으로는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그래 놓고서 딸의 건방진 말하는 태도에는 또 몹시 심기가 거슬려 구겨진 얼굴로 거친 운전을 할 것이었기에,

그리고 난 '너 아빠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니'로 끝나고 말 뻔한 언쟁을 시작해 결국엔 반항아로 정의되기가 극도로 피곤했기에,

 

허전한 청각을 채워 줄 것이 없는 것을 약간 유감스러워하며,

그저 지나가는 가로등과 가로등과 가로등을 응시하며

입의 존재 이유를 잃은 듯한 무력감을 느끼며

나는 우리의 숨죽인 30분가량 가운데 덩그러니 '나'라는 사람으로 그저 존재하기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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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은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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깎인 살 아래서

창백한 백골(白骨)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아름다운 혼(魂)은

어슴푸레한 새벽빛을 앞두고

조용히 곱게 풍화작용(風化作用)하며

끝내 바람에 실려 흩어지더이다

 

지조(志操) 높은 개가

밤을 새워 어둠을 짖으나

 

저 새벽하늘의 부ㅡ연 어둠을

쉬이 걷어내지는 못할성싶습니다

 

일렁이는 새벽 미명(微明)에 아침 참빛을 드리워

새 날을 피워내기에는

우리네 고향의 긴긴 밤이

시대처럼 너무도 무거웠던 모양입니다

 

닳고 또 닳은 고향을 뒤로 하고

조심스레, 정처없이

도망하듯 뒷걸음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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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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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거라, 고난아

망설이지 말고 당장 성큼성큼 달려오너라

마냥 미지근했던 지난 날은 뒤로 하고

푸르른 청춘의 뜰을 건너

그 위대한 손바닥을 펼치듯

훨훨 무겁게 큰 걸음으로 날아오너라

 

물렁해진 나의 숨과 살을

무섭게 찢어헤치고

나의 심장에 차가운 고통을 휘둘러

단단히 깊숙히 후벼박거라

 

귀를 막아버린 나의 육과 영을

완전히 짓눌러버리고

나의 오만함에 엄중한 지혜를 높이 들어

사정없이 내려치거라

 

친애하는 고난아,

이 나의 높은 마음에

더 높은 드넓은 하늘이 되거라

팽개쳐진 삶의 중심에

의미를 부여하거라

 

어서 오거라, 고난아

두 팔 벌려 환영하겠나니

또다시 부족한 인생을 깊이 가르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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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아주지 않습니다

발목을 잡고 늘어진 그것이

단단하게도 붙잡고 있습니다

 

나는 입을 열어 봅니다

그것이 속삭입니다

나 여기 있어!

 

아, 왜 그것은 짓밟힐수록 힘이 세지는 것인지요

왜 그리도 거무죽죽하고 커다란 것인지요

 

그것의 손톱은 움켜쥔 내 발목을 파고듭니다

피가 새어나오자 희열에 찬 기침을 토해냅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지만

붉은 나의 피는 누구에게나 보이더군요

 

저 아이는 피를 흘리고 있어

누군가는 못본 척을 하고

또 누구는 넌지시 물어보고

다른 누구는 내 발목을 난도질하네요

 

그것은 잔인하고 차갑습니다

차가운 겨울 바람이 스치자 발목이 얼어붙습니다

결국 이렇게 무뎌지는 것일까요?

혹은 그렇게 무너지는 것일까요?

 

그것을 떨쳐내려면

내 발목을 도려내야 한다는 사실을 안 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칼을 쥔 사람은 나뿐입니다

 

감사하게도, 봄이 다가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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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쌓아올린 벽돌 무더기 저 반대편

사람들은 웃고 있다

 

홀로 숨죽여 운다

알몸이 되어 갓난아기처럼 운다

 

웃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오늘도 생채기 난 심장으로 벽을 쌓는다

 

사람들은 웃고 있다

나를 향해 조소한다

얻어 터져 피떡이 되지만 울지 못한다

 

보기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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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불빛에 취해

비틀거리는 하루살이들

 

낮은 전쟁이요

밤은 도취이니

 

들끓는 욕망을 토해 내

거리에 늘어놓는 환희의 시간

오늘만큼은 격렬하게, 미친 듯이 춤을!

 

외로이 혼자 잠드는 저 아이의

눈과 귀를 그 누가 가려 줄 수 있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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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집에서 두 번째로 큰 방에 몸을 자리한다.

당연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도 불만은 없다.

 

전에는 이 방에 어린 여자아이가 살았나보다.

벽에는 커다란 나비 스티커를 떼어 낸 거뭇거뭇한 자국이 남아 있다.

나뭇잎이 그려진 벽지와 산만한 불균형을 이루는 이 자국은 곧 있으면 페인트 붓에 가려질 예정이다.

아가, 미안하지만 널 이 방에서 지워낼거야.

 

방에서는 개 냄새와 땀내가 섞인 체취가 난다.

개는 침대 밑 쿠션에서 잠을 잔다.

가끔 깊게 잠들었을 때 하는 잠꼬대는 언제 들어도 무섭다.

 

천장은 그저 더할 나위 없이 새하얗다.

내 하루와 끝은 그 하얀 천장을 멍청하게 바라보며 시작되고 끝난다.

가끔 저 천장을 부수고 싶다.

 

오래된 피아노는 별로 쓴 적이 없어 새 것 같다.

보면대 위에 놓인 악보가 재즈 리얼북에서 바흐 인벤션으로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바흐, 모든 영광을 주님께!

 

오늘도 늦게 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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