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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 부탁드릴게요..! 고맙습니다!

+ 고등학교 때 이 공간에서 참 많이 설렜는데 아직 홈페이지가 남아 있어 기분이 좋네요.
글틴이 더 번창하길 바라며, 사이트 유지를 위해 힘쓰고 계신 많은 분들, 화이팅입니다!
모두 행복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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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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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

 

 

 

판결을 내리는

양궁의 뻣뻣한 활시위

손을 놓는다

화살로 과녘에

망치질을 하는 그

꽉 감은 왼쪽 눈

외면할 수 없는 신경의 떨림

핏줄이 튀어오른다

 

초록 칠판 앞 감독

점수를 말하라는

부러진 나뭇가지 끝

심장 비껴간 화살을 뽑는다

한 걸음 거리였으나

초점이 흐렸던 걸까

 

십점 만점에 육점

입니다 뼈에 박힌 화살

감독은 고개를 갸웃한다

친구 사이마저 점수를 매기는

학원 사회과 선생

너는 심장을 쏘았지

건너편 과녁 정중앙에

화살이 꽂혀있다

 

심장이 조각나고 싶어

스스로 쪼개진다 하지만

뼈만 아릴뿐

여섯 째 숫자가 점수판에

새겨져 지워지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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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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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어지다

 

 

노부부가 추레한 바지를 탁탁 털어내고

굽어진 등을 일으켜 세운다

벌건 바구니와 야채들 있기에

아 하는데 이번엔

깔고 앉았던 은빛을 털어낸다

 

하늘이 짙어져 그만 가자, 외면하고

앞발 힘주어 내딛는다 그런데

공중박스 안, 덩어리가 있다

굽어진 것들에 익숙해 지나치려는데

검은 머리다 다시 본다

 

허리목손목 모두 굽은 사내는

늘어진 버드나무 같기도 하고

한껏 폼을 잡은 연극 배우 같기도 하다

낡고 녹슨 쇠붙이 밑에 웅크린 사내는

연락을 기다리는 걸까

나는 한 손가락 굽혀

번호를 찍어본다 통화 키를 누른다

발신음이 굽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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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공포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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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안한 시선은 사람의 눈동자를 잡아끄는 힘이 있다, 라고 썼다. 아무것도 쓰지 않으면 또 책상 위에 고개를 처박을 것 같아서, 뒷목이 무거워질 것만 같아서, 계속 노트에 써내려갔다. 너무 힘주어 썼는지 샤프심이 툭, 툭, 부러졌고, 그 때마다 무력감을 느끼며 새로운 샤프심을 뽑아내야 했다.

  형광등 불빛이 너무 밝다, 라고 썼다. 그 환한 조도 아래에서,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태권도 사범님의 말은 내 머릿속을 언제나 어지럽히고 있었다. 사람의 시선은 180도입니다. 초등학교 때 나는 그 말을 새겨들었다. 시선을 앞에 고정시켜두고, 흐릿하게 일렁이는 옆 사람의 잔상을 훔쳐보았다. 앞을 보면서도 옆 사람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초등학교 때 나를 가르쳤던 K선생님이 떠올랐다. 그녀는 항상 자신의 눈을 보며 수업을 들으라고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K선생님의 눈동자는 깊었다. 나는 K선생님을 거치고 난 후 수업시간엔 무조건 선생님들의 눈동자를 찾았다. 내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눈을 보며 수업을 듣는다는 것은, 다른 짓은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했다. 성적이 올랐다. 따로 공부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K선생님에게 감사했다. 수업시간에 듣고 이해하는 집중력이 올라갔다. 짜릿했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선생님들의 머릿속에 내 존재감을 확실히 심어줄 수 있었다. 오로지 수업시간의 눈 맞춤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범학생이라는 선입견을 그들에게 주었다. 나는 수업시간을 포기할 수 없었다.

  첫 증상은 중학교 3학년 때 나타났다. 열심히 수업을 듣고 있는데, 180도의 시야 안에 있는 학 학생이 거슬렸다. 피부가 하얗고 팔다리도 긴데다 얼굴까지 작은 학생이었다. 서울 과학고를 목표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게다가 패션 센스까지 갖춘 그 학생은 내게 열등감을 심어주었다. 그 친구가 어려워, 반에서 유일하게 몇 마디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나름 사교성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한 나였는데 그 앞에서 나는 허망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새로운 자리배치가 있을 땐 제발 그가 내 시야 범위 내에서 없어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거슬릴 때면 선생님을 보고 있었지만 모든 것이 뿌옇게 변해버렸다. 내가 어딜 보고 있는지 몰랐다. 칠판에 쓰인 글씨를 보면서도 나는 옆을 의식했다. 혹여나 내 눈동자가 제멋대로 돌아가 그를 쳐다보진 않을까, 그래서 과학고를 준비하는 그의 공부 시간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가, 나는 무서웠다. 내 시선이 다른 사람에게 불편함을 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처음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했다. 1학년 때 적응을 하지 못해서 힘들었는데 새로운 고등학교에 올라간다는 것이 막연했다. 서울시 금천구에 살던 나는 분양받은 아파트 때문에 경기도 군포로 이사 가야 했다. 이름도 생전 처음 들어보는 군포에 전학을 간다는 사실은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그런데 중학교 친구가 거기 아는 애 없을 텐데 괜찮겠어? 라고 말할 때부터 꼬임은 시작됐다. 그 친구를 원망했다. 나는 그런 생각 하지도 않았는데, 거기서 잘 지낼 거라는 생각만 지니고 있었는데, 그 친구는 대체 무슨 권리로 걱정거리를 내게 건네는 건가.

  적응에 실패했다. 과거의 친구들, 그 환한 웃음이 내 몸에 번져 이따금씩 휴지로 눈물을 찍어내야 했다. 물론 고등학교 때 사귄 친구들은 있었다.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모든 걸 너무 심각하게 생각해.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까지 세세하게 신경 쓸 필요는 없잖아. 적응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내 생각을 토해냈을 때, 그는 밝은 줄 알았는데,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라고 했다. 그 때 웃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흔한 비유인 피에로처럼, 분장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잇몸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 쾌활한 웃음, 얘기만 나눠도 하하 웃어대는 내 겉모습 때문에 어두운 면이 가려져 있었다. 그와 동시에 이런 겉모습이 아니었다면 진작 왕따가 되었을 거라는, 내 가식적인 모습에 기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절정은 오른쪽 대각선에 앉은 친구의 말을 들었을 때 다다랐다. 쟤 자꾸 쳐다보는 것 같지 않냐? 누구? 쟤 말이야. 아닌 것 같은데? 칠판 보고 있잖아. 철컥, 차갑고 단단하고 무거운 쇠붙이가 가슴에 얽혀 내려앉는 듯했다. 얼굴이 붉어졌고, 뜨거워졌고, 숨이 가빠왔다. 고개 드는 것 하나하나까지 의식되었다. 내가 고개를 들면, 그럼 그가 자기를 쳐다본다는 생각을 하겠지, 내가 아무리 수업을 열심히 들어도, 그는 내 흔들리는 시선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겠지. 중학교 땐 수업시간 집중력으로 100점을 맞은 적도 있었는데 정작 수업시간에 집중이 안 되니 혼란이 야기됐다. 성적이 떨어졌다. 살고 싶지 않았다. 성적 때문이 아니라, 수업시간에 집중할 수 없는 게 안타까워서, 그랬다. 선생님을 바라보는 내 눈동자도 차츰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더 이상 내가 눈을 바라보며 ‘수업’을 듣는 게 아니라, 눈을 바라보며 내 ‘눈동자의 흔들림’을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는 존재했다. 없는 것도 아니고 꽤 많았다. 이상했다.

  수업시간에 엎드리는 일이 잦아졌다. 그것은 하나의 큰 사건이었다. 수업시간을 포기할 수 없는 나에게, 형체 없는 공포감은 용기를 앗아갔다. 선생님과 눈 맞출 일이 없어지니 내 존재감은 희미해졌다. 중학교 땐, 그래, 그 땐 선생님들끼리 내 칭찬을 하기도 했다. 그 학생 참 모범학생이죠? 네 그렇죠. 수업도 잘 듣고, 청소는 자기가 나서서 얼마나 잘한다고요. 얼굴도 곱상하고 성격도 좋은 게, 아휴, 제 딸이 나이도 같은데, 이런 남자애 만나야 된다니까요. 길거리를 걸을 땐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었다. 자동차 뒤꼭지에 달린 빨간 눈만 봐도 두려웠다. 엘리베이터에 누군가 타고 있을 땐 화들짝 놀라며 저도 모르게 헉 소리를 냈다. 1, 2, 3, 4교시. 1교시를 버티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가끔 예전 습관이 나와 선생님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경청하고 날 때면 뿌듯했다. 눈물이 날 정도로 행복했다. 수업시간에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그 당연한 사실이 너무 행복해서 속으로 울었다. 힘들어도, 힘들어도, 고개를 들려고 노력했다. 고개를 들면 180도 내에 그가 또 들어오겠지만 그래도 수업을 듣고 싶었다. 수업을, 정말 듣고 싶었다.

  증상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 자리를 바꾸는데 그 한 달이 너무 길었다. 혹시나 싶어,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눈이 너무 두렵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다 거슬립니다. 그런 식으로 검색했다. 그러자 나온 병명이 ‘대인공포증’이었다. 사람을 두려워한다고? 하지만 내 주위에 사람은 많은 걸. 그래도 대인공포증이었다. 대인공포증의 여러 증상 중 시선공포. 대인공포증이라기에 사람을 두려워하는 건 줄 알았는데, 남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병이라고 했다. 예전부터 착하다는 소리를 많이들은 나였다. 나는 착함의 기준을 새로 세웠다. 착한 것은 곧, 남을 의식하는 것이다. 나는 착한 게 싫어졌다. 착한 내 성격을 싫어하니 자존감이 떨어졌고, 그것은 또 남을 의식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내 자신에 대한 깊은 생각을 그 때부터 시작했다. 자존감이라든가 자아존중감이라든가 하는 용어들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내 유년의 시절에 관심을 가졌다. 집이 어려웠을 때, 이모 집에 맡겨진 적이 있었다고요? 그래서 이렇게 된 걸까,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눈을 맞추며 수업을 들으라고 했던 K선생님, 사람의 시선은 180도라는 태권도 사범님 때문에 일어난 일인 것 같아 책임을 떠넘기며 좌절했다. 그리고 운명을 믿었다. 저들은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라는 운명.

  베란다 창문을 내려다보면 딱딱한 아스팔트 바닥, 그 끝없는 어둠에 몸을 내맡기고 싶었고, 뭐라도 썰기 위해 칼을 들 때면 칼을 쥔 내 모습이 무서워 내려놓았고, 자동차가 쌩쌩 달리는 길거리에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 학교 청소시간에 높다란 창문을 닦을 때면, 우연히 추락해버렸으면 하는 생각들. 그럼에도 난 살고 싶었다. 그까짓 시선공포가 뭐라고 내 삶을 이렇게 쥐고 흔드는지 극복하고 싶었다. 그리고 꼭 이 경험을 토대로 소설을 쓰리라 마음먹었다.

  그 힘겨운 고등학교 1학년 때 한 편의 글을 쓴 적이 있었다. 학교에 부적응하고 있는 주인공으로 쓴 거였다. 친구들은 네 이야기 쓴 거 아니야? 라고 물었다. 완성되지 않은 작품이었는데도 그랬다. 그래서 그 글을 더 이어 쓰지 않았다. 부끄러웠다. 다른 글을 썼고, 그 다른 글로 장려상을 받았다. 허무했다.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다 쥐어짜서 같은 반 친구들에게 비밀을 털어놓았다. 나는 쳐다보지 않았는데, 그 애가 자꾸 그렇게 말하니까, 정말 내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겠어. 그 애의 목소리 하나하나가 귀에 날카롭게 박혀들고, 힘들어. 너네도 알고 있었지?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분명 옆에 앉아있는 애들이었는데도 그랬다. 대인공포증이래. 정신병원이라도 가봐야 할까봐. 사실 위로라도 해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들은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실제로 정신병원을 가라고 추천해줬다. 진심어린 충고였고 나를 위로해주고 있었다. 그래도 자신이 겪은 일이 아니면, 그 고통을 모르니까, 쉽게 말할 수 있는, 그게 부러웠다. 그 날 담임선생님한테 전화했다. 야간자율학습을 못할 것 같아요, 선생님. 울먹이는 내 목소리를 들은 선생님은 심각함을 눈치 채고 물었다. 왜 그래? 선생님, 저 대인공포증이에요. 친구들 때문에 집중이 안돼요. 누가 옆에 있으면 불편해요. 중간고사 시작 전까지, 3일만, 3일만 뺄게요. 선생님도 그러면 정신병원에 가봐야 하지 않겠니? 라고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괜히 말했다고 생각했다. 어찌됐든 야자를 3일 뺄 수 있었다.

  실제로 정신병원에 가고 싶었지만 후기 글을 보니 약물에 중독될 위험성이 있다고 쓰여 있었다. 약물에 의존하는 나를 바라보기가 싫었다. 스피치 학원, 그 곳에서 긍정적인 기운을 얻으면 극복할 수 있을까. 인터넷에 떠도는 광고지는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대인공포증, 대인기피증 뭐든 다 치료할 수 있을 거라고, 최면을 해서 아픈 기억을 흐릿하게 해준다고 했다.

  누나와 부모님의 입이 떡 벌어졌다. 나를 위로해 주면서도 네 착한 성격이 문제야, 라고 했다. 나는 인천에 있는 스피치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알겠다고 했다. 스피치 학원은 유일한 도피처였다. 3개월을 끊었다.

  이 와중에 친구들이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고 감사했다. 내가 이렇게 남을 의식하고, 시선도 불안한데, 친구들은 있구나.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내 얼굴이 조금만 못생겼더라면 그럼 친구도 없었겠지. 그래도 얼굴 고만고만하게 생겼으니까 그나마 친구라도 있는 거겠지. 대인공포증 환자들의 글엔 친구가 없다는 글이 많았다. 그래서 외모에 집착하게 되었다. 그들이 내 외관만 보고 좋아하는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환한 웃음 뒤에 숨겨진 음울한 마음을 꺼내면, 그들은 인상을 찌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잘생겼다는 말을 몇 번 들었고, 들으면 불안했다. 못생겨지면 다 떠나갈 것만 같아서, 그랬다.

  스피치 학원엔 열정적인 아줌마와 아저씨들이 많았다. 원장은 대인공포증은 우울증을 동반하는 병이죠, 라고 진지한 표정으로 상담해주었다. 같은 또래는 찾기 힘들었다. 첫 자기소개 시간 때 마이크를 잡고 소개를 했다. 군포에서 왔습니다. 17살이고요. 대인공포증을 극복하기 위해 학원을 다니기로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이런 데 올 생각도 하고 기특하다, 대단하다, 어떻게 이 먼 곳을 찾아올 생각을 했니? 여러 말이 날아들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정상적으로 보였다. 대인공포증 환자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왜 온 건지 의문이 들었다. 오전엔, 웃으면 행복해 진다면서 하, 하, 하, 하 앞에서 웃으면 따라 웃는 수업을 했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하다는 이론에 충실한 행동이었다. 나 자신을 사랑한다, 나는 모든 일에 있어 점점 좋아지고 있다. 선동에 가까운 문구를 반복하며 나는 점점 나아지길 간절히 기도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수업은, 자기가 원망하는 대상이나 일에 대해 A4용지에 적고, 회원들 앞에서 털어놓은 후, 불질러버리는 시간이었다. 제 친구 때문에 저는 시선공포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용서할까 합니다. 하얀 종이가 거멓게 재를 떨어뜨리며 사그라졌다. 나는 한 동안 그 종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왜, 그런 말이 있다. 큰 고난을 겪고 나면 모든 게 감사하고, 행복해 진다는 말. 너무 빨리 겪었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이 있다는 게 고마웠고, 팔다리가 멀쩡한 게 감사했고,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수업시간에 수업을 제대로 들을 때면 행복해서 기쁨의 눈물을 당장이라도 뚝, 뚝 떨어뜨릴 것만 같았다.

  피해 다니던 담임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대인공포증이 있다는 사실을 밝힌 후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지나치면 인사만 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내심 궁금했을 것이었다. 이놈은 전화로 심각한 얘기를 털어놓고, 말이 없구나, 했을 것이다. 선생님을 보자마자, 선생님 저 괜찮아졌습니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먼저 선수 쳐서 이야기 했다. 선생님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그것 때문에 부른 것은 아니다, 그런데 좋아졌다니 다행이구나, 라고 했다. 선생님을 어려워하는 것도 대인공포증 증상의 하나라고 했다. 그런데 유일하게 내 마음을 털어놓은 건 고1, 담임선생님이었다. 감사했다. 인사를 꾸벅 하고 나오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네가 애들이랑 웃고 떠들고 잘 지내는 것 같아 아무 일도 없는 줄만 알았다는 선생님의 말에 공감이 되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정말 나는 아무 일도 없는 평범한 학생에 불과했을 테니까. 실제로 그 동안 생활기록부에 적혀있는 내용은 모두 친구 관계가 원만하다는 내용뿐이었다.

  중학교 때처럼, 1학기가 지나고 나니 웬만큼 적응이 됐다.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스피치 학원도 성공적으로 끝냈다.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에 올라갈 땐 친구들과, 담임선생님을 뒤로하고 또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한다는 공포감이 일었지만 다 잘 될 거라고 생각하였다.

  2학년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남중, 고1 때까지 남자들 속에 파묻혀 지내다가 남녀 혼합 반이었다. 그 중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는 한 명 뿐이었다. 좌절은 하지 않았다. 힘든 세월은 다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여자 32명, 남자 14명인 반에서 아는 애가 한 명 뿐이라 막막했지만 어찌됐든 잘 해낼 것 같았다.

  윤리 첫 수업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느린 어투로 조곤조곤 선생님의 질문을 맞받아치는 내 모습을 보며 친구들은 귀엽다, 웃기다, 라고 했고 존재감이 확실해졌다. 기뻤던 것 같다. 수업도 수업이지만, 친구들이 내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둔 불안함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아서였다. 나는 그 동안 해왔던 연극처럼 또 웃고 있었다. 웃음이 싫다면서 그 웃음을 거부하지 못했다.

  상처가 큰 만큼 후유증은 없어지지 않았다. 다만 더 좋아졌다는 데에 초점을 맞출 뿐이었다. 선생님의 눈을 맞추며 수업을 듣진 않았다. 선생님의 눈은 간간히 맞추되, 칠판의 필기를 위주로 보는 방식으로 바꿨다. 그러니 부담감에서 풀려난 기분이었다.

  차라리 잘생기지 않았다면. 고2 때 여자애들이 잘생겼다고 말하는 것은 새로운 부담이었다. 계단을 내려갈 때도 급식시간에도 잘생겨서 쳐다보는 걸까 아니면 내 시선이 불안해서 쳐다보는 걸까 의심해야 했다. 그렇게 잘생긴 것도 아니지만, 못생긴 것도 아닌, 그런 얼굴인데도 그랬다. 2학년 때 친해진 남자애, 여자애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 사실, 대인공포증 있어.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워. 예전부터 이런 말 하면 관계가 다 끊겨버릴 줄 알았는데, 다들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너만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거라고,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고 했다. 여자애한텐 내가 굉장한 비밀 알려줄 게, 라면서 말한 건데 돌아오는 대답은, 그게 끝이야? 별로 대단한 비밀도 아니네, 라고 말해서 혼란스러웠다. 내 고민이란 게 보잘 것 업고 하찮은 것이었구나, 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턴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해도 대답은 똑같으니까. 아무렇지 않아 하니까.

  고2 때부터 학교에 완전히 적응했다. 잠자기 전, 다음 날은 어떻게 또 버텨야 하나, 라는 물음은 그 때부터 하지 않았다. 일어나면 학교에 가는 것이고,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오는 반복이었다. 그런 반복되는 일상이 나를 안도하게 했다. 자꾸 쳐다보지 않냐? 같은 물음 따윈 없었다.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며 2학년을 매듭지었다.

 

  고3이 되었다. 이제 고3도 끝물이다. 그 동안 내가 느낀 건 내가 정말 많이 웃는다는 것. 내 웃음 때문에 친구들도 웃는다는 것이다. 친구들은 내 겉모습만 보고 웃긴 애, 낙천적인 애, 그 누구보다도 낙천적이어서 고민 따윈 안할 애로 본다. 그것은 가끔 내 본모습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하지만, 그게 좋다.

  고3, 지금 같은 반엔 1학년 때 고민을 털어놓았던 친구들이 같이 올라와서 행복하다. 나는 그들에게 어떤 고민이라도 털어놓을 수 있다. 한 친구에게 그 때 고마웠다고 말하니, 그는 쑥스러워하며 나도 너라는 친구를 얻어서 참 좋다고, 너처럼 웃긴 친구를 두어서 나도 참 많이 바뀌었다고, 밝아졌다고 한다.

  힘든 일을 극복함으로써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이 달라졌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감사하다. 과거처럼 힘들지 않아,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하다. 누구든 아픔을 겪어야 성숙해지기 마련이다. 그 아픔의 종류는 다들 다르지만, 어떻게든 극복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아무리 깊은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아물기 마련이니까. 우리는 크고 작은 흉터를 평생 달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고3, 자기소개서 좌절 극복 칸에 시선공포 이야기를 쓰며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이 글을 썼다. 나는 앞으로도 할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고, 겪은 일이 많은 사람이고, 그것들을 글로 옮길 사람이다. 이런 글로 내 과거를 되돌아보고, 치유 받는, 그런 작업을 해서 뿌듯하다. 아, 정말 모든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우리 모두 다, 행복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아, 덧붙여야 할 말이 있다.

누구든, 자기 자신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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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웅숭깊다. 그의 식견은 가없다. 때문에 여낙낙한 아가씨들이 그의 뒤를 따른다. 고샅길을 걸을 때에도 무당이 고수레를 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그가 방 안에서 갈무리를 할 때에도 아가씨들은 저 멀리 무람없이 서있다. 그가 버드나무 아래에서 새참을 먹을 때면, 아가씨들은 구성없이 근처 그루터기에 모여 앉아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그가 취하는 것이란 객쩍은 것이어서 아가씨들은 고깝게 여기곤 한다. 그가 새참을 한 입 먹는다. 버드나무 이파리가 쏴아아, 흔들리고 사내의 젓가락질이 빨라진다. 그가 있는 곳은 소리가 멎어 괴괴하다. 그를 바라보는 아가씨들의 눈빛은 괴란쩍다. 그가 새참을 다 먹고 잠을 청한다. 아가씨들은 끄느름한 날씨에 발을 돌릴까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끌끌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를 떠나지 않는다. 그가 일어난다. 그는 조금씩, 조금씩 걷는다. 남새밭을 지나 저자에서 낫잡게 주쇼, 라고 말하며 콩나물을 싸게 산다. 아가씨들 저기 지나가잖아요. 근처에 있던 난봉꾼이 너스레를 떤다. 넉살 좋은 고깃집 아저씨는 손짓한다. 아가씨들은 그들과 잠깐 노닥이다가 금새 그의 뒤를 따른다. 높새바람이 분다.

 

  그는 힘차게 집으로 향하다 느꺼워 땅바닥에 주저앉는다. 는개가 그의 신을 적시고 목덜미를 타고 한 방울 흘러내린다. 달포가 지났지만, 그가 말한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그가 일어선다. 단물난 옷을 털며 그는 댓바람에 걸음을 옮긴다. 그가 걸어서 도착한 곳은 어둠직한 도린곁이다. 아가씨들은 시장 한 켠, 둔덕에서 그가 서 있는 곳을 본다. 그의 뒷모습에서 드레가 느껴진다. 아가씨들은 들썽하여 얼굴을 붉힌다. 누군가 딸각발이, 라고 말한다. 그의 뒷모습이 가난한 선비같다는 것이다. 아가씨들은 떡심이 풀린다. 그 소리는 그의 단면만 보는 사람들이 늘 하는 말이다. 뚜쟁이가 돈 많고 뜸직한 여자를 소개해도 고개를 젓는 그다. 그와 아가씨들의 머리 위로 매지구름이 둥둥 떠다닌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만 같다. 그는 머드러기 포도를 씹으며 달린다. 비가 머츰했지만 언제 다시 내릴지 모른다. 아가씨들이 그를 머흘게 따라간다. 그는 어느새 멧부리에 다다랐다. 멧부리에선 꽤 큰 모꼬지가 열려 있다. 방자고기 타는 매캐한 냄새가 난다. 모꼬지에서 한 남녀가 음식을 집어 먹고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칼을 내리치던 주인은 모지라진 도마를 본다. 너네들, 몽태쳐놓고 끝까지 모른척 할거냐? 남녀는 말이 없다.

 

  그는 시끄러운 모꼬지를 벗어나 무당에게 간다. 무꾸리를 하기 위해서다. 무당은 묵정이로 무꾸리를 한다. 자네, 자네를 따르는 여자들이 꽤 많구먼. 미립이 꽤 쌓인 듯 무당은 눈을 감고 그의 운명을 점친다. 같은 미리내에 속한 건, 암, 그렇고 말고, 흔한 인연은 아니지. 그는 무당을 미쁘게 여긴다. 아가씨들은 그런 그를 보며 미욱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민패를 무당 앞에 던지고 일어난다. 그 민패는 금빛이어서 값비싸보인다. 그는 이제 민틋한 길을 걷는다. 아가씨들이 반색하며 그의 뒤를 밟는다. 배내에 있을 때, 그의 버성긴 입술이 크게 벌어진다. 그러나 더 말을 잇지 않는다. 그는 볏가리를 지나치고 한 기와집 보꾹에서 새 둥지를 본다. 그 와중에 한 아가씨가 볼멘소리로 부아한 마음을 토해낸다. 그가 좋긴 하지만, 언제까지 따라가야 하죠? 아무도 당신을 잡지 않아요, 라고 아가씨 무리가 대답한다. 이렇게 따라가면 삭신이 쑤신다구요. 아가씨는 괜스레 삭정이를 분지르고 뒤돌아선다. 아무도, 그녀를 잡지 않는다. 삭정이가 떨어진다.

 

  새물내가 풍긴다. 그의 집앞에 널어놓은 빨래에서 나는 냄새다. 아가씨들은 그를 따라 오며 나뭇가지에 긁혔다. 자잘한 생채기에 저마다 핏방울이 맺혀 있다. 그의 집앞 선술집은 오늘따라 유난히 시끄럽다. 웃음은 모두 선웃음이다. 섣부른 사람들을 손님으로 들인 것이 틀림없다. 그는 섬돌을 밟으며 집으로 들어간다. 아가씨들은 각자 싸온 소담한 음식을 풀어 서로 나눠 먹는다. 그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그녀들의 일이다. 아가씨들의 손바람은 거침이 없다. 벌써 다 먹고 보자기를 싸맸다. 그가 숫사람이라는 게 좋아요. 한 아가씨가 시래기를 씹으며 말한다. 아가씨들은 슴벅이며 조용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시름없어 보이기도 하고요. 아가씨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이내 시뻐진다. 언제쯤 그와 말을 할 수 있을까. 아가씨들의 고민이다. 저는 심드렁한 그의 성격이 마음에 들어요. 우리들 중 그 누구도 그와 말을 안 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실팍한 아가씨가 말한다. 그 아가씨는 말을 잇는다. 우리는 어쩌면 심마니인지도 모르죠. 아가씨들은 말이 없다. 말이 아퀴지어진다.

 

  그의 집 안엔 궐공이 있다. 그의 어머니다. 그는 설명서의 알짬을 되짚으며 어머니에게 드릴 약을 달인다. 아이고, 암팡진 놈, 네가 애미를 살리는 구나. 너의 안갚음에 나는 하릴없구나. 미안하다. 애오라지 너를 먹여살린 게 다인데……. 그는 애옥살이에도 불평을 늘어놓은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가끔, 어머니 옆에 누워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아둑시니가 올까 두려워요. 어머니가 해줬던 그 아둑시니 얘기요. 오롯이 저 혼자 견뎌야 할 그 깊고 어둔 밤이 무서워요. 저를 따라다니는 아가씨들은 알까요? 제가 이렇게 약한 사람이라는 걸요. 어머니는 올무를 조심해, 라고 말한다. 올무요? 아둑시니가 아닌 올무요? 그가 물었지만 어머니는 잠이 들었다. 그는 우두망찰해진다. 그리곤 슬픔이 우꾼하게 밀려든다. 어머니, 저는 정말 두려워요. 이불을 꼭 끌어안은 어머니의 모습이 을씨년스럽다. 아슥한 밤이, 그는 길게만 느껴진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우련한 안개를 본다. 소나무 우듬지에 가려 해는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는 여전히 숨을 고르게 쉬며 자고 있다. 그는 아우러진 아가씨들을 본다. 지난 밤 추위에 몸을 꽁꽁 끌어 안고 잔 모양이다. 그는 발치에서 꽃이 이울져 있는 것을 본다. 붉은 꽃이 늘어져 있다. 그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온다. 어머니는 어느새 일어나 자리끼를 마시고 있다. 그는 남은 자리끼를 마당에 버린다.

 

  그는 저자에 나가는 것을 저어한다. 아가씨들이 따라올 것이다. 게다가 제출물에 도린곁으로 가다 다리가 제켜 아릿하다. 그래도 그는 집을 나설 수밖에 없다. 약을 구해야 한다. 그는 주머니에 주전부리를 가득 챙겨넣고 추레한 외투를 걸친다.

 

  아가씨들의 눈빛에 뒤가 켕긴다. 코숭이에 멈춰선다. 이토록 타울거렸지만, 그는 물음을 잇지 못한고 저자에 도착한다. 터럭이 온몸에 수북한 사내는 김을 팔고 있다. 그는 한 톳 주십시오, 한다. 사내는 한 톳이나요? 하다가 푸접하게 김을 내온다. 그는 피천을 내민다.

 

  그는 저자에서 한 소년을 만난다. 밥그릇을 기다란 손톱으로 하비고 있던 소년이다. 뭐하냐, 고 물었을 때 소년은 밥을 먹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거예요, 라며 하냥다짐 하였다. 머릿결이 함초롬한 소년. 그는 그 소년을 한참 바라보다 떠난다. 언제나 너는 허드렛일을 하겠구나, 그는 갑자기 서글퍼진다.

 

  허방에 발이 걸린다. 약을 사는 게 헛물을 켜는 일일까? 그는 균형을 못잡아 엎어지고야 만다. 아가씨들은 저자를 허대다 그를 놓친다. 이제, 그를 따라오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는 집에 들어가기 전, 호드기를 분다. 호드기의 가녀린 울림이 그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허벅진 감나무는 흐드러지게 자라났다. 사내는 희나리를 보다 또 슬퍼져 호드기를 분다. 호드기, 호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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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의 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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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6층 복도

둥근 계란의 낙화

웬만한 꽃잎보단 빠르지만

바닥에 노란 씨앗

얇은 막 깨고

흘러 나온다

 

산산 조각난 요구르트 색 껍질

검은 가방 초등학생

유심히 바라본다

투명하면서 물컹거리는

약간 점액도 포함된

흰자의 흐느낌

노른자는 뭉개진 채

하늘을 바라본다

 

머리 솟은 키 작은

초등학생 둘

던지지 말라는

스피커 통해 흘러나오는 분노

뇌 속을 파고든다

 

유리조각처럼 날을 세운

계란껍질

오른쪽으로 휘몰아치는

검은 가방 초등학생의 정수리

애기 손 만한 계란의 낙화

꽃잎처럼 부드러이

떨어졌던 아찔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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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차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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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린다

전동차 안 또 다른

전동차

털들이 삐져나온 붉은 모자

두툼한 보라색 외투

봄인데 꽁꽁 싸맸다

 

입가에 둥글게 진 주름과

끊임없이 밖을 응시하는

반쯤 풀린 눈동자

할머니 목 얇은 실크 스카프

바람에 춤을 춘다 문은

열려있고 건장한 두 남자

틈에 낀 바퀴를 들어 올린다 그러자

깨어난 그녀의 눈동자

흔들린다

죽은 아들이라도 찾는 듯

허공에 뻗은 주름진 손

창밖이 풍경이 빠르게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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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 뜬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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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뿌연 곰국에 어둠을 탄다

흰 미역이 천천히 국을 헤엄친다

곰국 가운데 환한 빛을 내며 떠 있는 보름달

미역은 보름달을 지날 때면, 어둠을 집어삼켜

짙은 남색이 되어버린다

미역에 파묻힌 달은 얼굴을 들이밀며 애쓴다, 하지만

무겁고 짙은 미역, 쉽진 않다

 

구름이 희뿌연 안개처럼 하늘에 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진한 사리곰탕에

구름 모양 미역을 풀어놓은 것 같다

 

비가 다시 내린다

한 때 짐승의 다리였을 뼈, 오래 끓인 물

혀를 내밀자 한 방울 톡 떨어져 내린다

흰자인지 노른자인지 환한 달빛

배가 출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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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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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방 앞에 섰다. 해가 뜨지도 않은 이른 새벽에 다방은 저 혼자 미약한 빛을 내고 있었다. 젊은 다방이라 쓰여 있는 간판 오른쪽 아래 귀퉁이는 까맸다. 다방은 대형커피전문점 사이에 껴 있어서 그런지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다른 건물은 지상에 우뚝 서 있는데 다방만 지하로 내려가야 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나는 지하로 내려가는 낡은 나무 계단을 보며 이곳의 오래된 흔적을 엿보았다. 바람이 불다 그만 지나칠 자리였다. 바람은 제 몸에 더러운 냄새를 싣지 않으려 흉흉한 소리를 내며 입구를 떠돌고 있었다. 아마 젊은 바람이었을 것이다. 젊은이들은 다방을 찾지 않으니까. 나는 다방에 꽂혀있던 시선을 거두었다. 하늘이 어두침침했다. 기상청에선 오늘 오후부터 안개가 걷히고 구름 사이로 해가 뜬다고 했다. 나는 구름의 흐름을 보았다. 구름은 먹물을 한껏 빨아들인 화선지처럼 눅눅하고 어두웠다. 과연 단단히 뭉친 먹구름을 뚫고 해가 뜰까. 다방은 해를 늙어보이게 만들었다. 아마 해가 좀만 젊었다면 먹구름 따윈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다방은 무슨 다방이에요?”

“다방이 뭐 어때서?”

엄마는 거울 앞에서 자꾸 옷섶을 만지작거렸다. 내겐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다방 가는 게 뭐 대수라고 그리 열성이었다. 나는 다방이라는 단어가 주는 촌스러움을 음미해보았다. 할아버지 몸에서 흘러나오는 퀴퀴한 쉰내가 났다. 벽지를 집어 삼킨 곰팡이를 씹어 삼킨 듯 속이 매스꺼웠다. 그러나 대형 체인점 메뉴판에 당당히 이름을 내걸고 있는 카푸치노란 얼마나 부드럽고 고소한 향인가. 그 세련된 발음을 하는 순간부터, 달콤 씁쓰름한 향과 하얀 거품이 터졌다. 그러나 다방엔 카푸치노가 없을 것이었다. 사실 엄마가 가자고 해서 기대가되긴 됐다. 눈 밖에 난 오리새끼처럼 중년 여성 틈에 끼지 않는 엄마. 걔네들은 너무 늙었어. 엄마는 가끔 혼자 이렇게 중얼거리기도 했다.

“어쨌든 저 다방 가기 싫어요. 오늘 누나 오는데, 마중 나가야지.”

나는 한숨을 내셨다. 누나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다방이라니. 엄마가 그제야 내 쪽을 흘끗 바라봤다. 머리를 안쪽으로 말아 올리던 고데기가 멈추었다. 나는 느닷없이 찾아온 적막이 불편했다.

“저녁 비행기라며?”

엄마는 어느새 휴대폰을 쥐고 있었다. 흐릿한 주홍빛 조명 아래 깊게 스며든 휴대폰 불빛이 밝았다. 문자를 보고 계신 걸까. 누나가 문자를 한 걸까. 어떻게? 엄마가 휴대폰을 화장대에 내려놓았다. 탁, 하고 딱딱한 금속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엄마는 기계를 능숙하게 잘 다뤘다. 컴퓨터 모니터만 봐도 까막눈이 된다는 아줌마들의 말은 엄마 피부에 닿으면 힘도 못 쓰고 흩어져버렸다. 저번에 엄마는 시리얼에 우유를 말아 드시며 인터넷 하는 법을 알려 달라고 하셨다. 나는 급하게 아침밥을 먹고 있다가 등교하기 전, 인터넷 하는 법을 알려드렸다. 그리고 학교에서 돌아오니 엄마는 눈동자 근처에 빨간 핏줄을 가득 세운 채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키보드 자판을 두들겨대고 있었다. 그렇게 친구들이 못하는 걸 자기가 소화해내곤 했다. 그리고 나면 엄마는 항상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하셨다.

“나 젊어 보이지? 왜 요새 젊은이들 컴퓨터 잘 하잖아.”

그럴 때면 정말 엄마가 젊어 보이기도 했다.

 

내가 자꾸 묻자 엄마가 다시 한 번 휴대폰을 봤다.

“누나 저녁에 온다고 문자 왔어.”

“그래도 다방 갈 여유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넌 항상 그래. 누나, 누나, 누나. 네가 그토록 찾는 누나, 내가 낳았어.”

“그래요. 엄마가 낳았죠. 근데 갑자기 그 얘긴 왜 꺼내세요?”

엄마가 울었다. 머리를 말고 있는 손이 아픈 추억을 회상하는 늙은이의 손 마냥 벌벌 떨렸다. 이상했다. 내 앞에서 대놓고 울음을 보인 적은 없는 엄마였다. 그리고 너무 갑작스러웠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래도 얼굴을 맞대면하고 있는 사람에게 마음이 가기 마련이니까. 통화 너머의 상대보다 당장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눈길이 가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그렇다고 내가 누나 마중에 대한 미련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누나는 인천공항 톨게이트를 지날 때부터 엄마와 나의 모습을 그리고 있을 것이었다. 일단 다방을 가자. 그리고 빨리 마신 후, 엄마를 설득하자.

 

나는 다방을 떠올려 보았다. 왠지 꽃무늬 밴드를 머리에 두르고, 촌스러운 단색 원피스를 차려 입은 사람이 커피를 따를 것 같았다. 종업원은 붉은 립스틱을 입술에 덕지덕지 바른 채 보이지도 않는 가슴을 애써 가리고 있지 않을까? 나는 지금 당장 전화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여보세요? 다방이죠? 원두커피 한 잔이요. 그리고, 아시죠? 보온병을 보따리에 싸고 짧은 치마를 입은 사람이 배달오지 않을까. 최대한 조신하게 다리와 손을 모으고서. 그러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거 모두, 드라마에서 본 장면이잖아. 그러나 드라마인지 현실인지 인터넷 검색창에 ‘다방’을 쳤을 땐, 컴퓨터에 빨간 원 속에 그려진 19금 표시가 적나라하게 떴다. 나는 행여나 엄마가 들어와 오해할까 싶어 바로 인터넷 창을 닫았다.

 

해는 여전히 뜨지 않았다. 엄마가 꽉 잡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어서 가자. 다방이 코앞이잖아. 그나저나 왜 하필 다방이에요. 소개하고 싶었어. 엄마가 먼저 낡은 계단을 한 칸 밟았다. 먹구름이 다방 입구에 빨려 들어가기라도 한 듯 어두웠다. 나무를 한 계단, 한 계단 밟으면서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엄마는 카페에 앉으면 기본 열 시간 이상은 잡담을 나누는 사람이었다. 저번에 한 번은 엄마 친구 분이 전화를 해 ‘네 엄마 좀 데려가’라고 한 적도 있었다. 나는 카페에서 돌아온 엄마에게 항상 질문했다.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그러면 엄마는 ‘젊은이들은 여섯 시간도 앉아 있고 그런 다는데?’라고 했다.

나도 계단을 밟았다. 계단을 밟을 때마다, 어둠이 흐르는 그 낯선 공간을 밟을 때마다 누나와 멀어지는 듯했다. 어긋난 내 심정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나무 계단에서 끼이익, 하며 녹슨 문소리가 났다. 엄마는 벽을 짚으며 내려가고 있었다. 흘러간 젊은 세월이 그 벽에 깃들어 있기라도 한 듯 천천히 짚으며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물끄러미 엄마를 바라보았다. 앞에 먼저 간 엄마의 축 늘어진 엉덩이가 출렁거렸다.

 

다방은 내가 생각한 그런 곳이 아니었다. 그저 무심한 눈길을 던지는 새치 가득한 할머니가 흔들의자에 몸을 뉘고 있을 뿐이었다. 가게는 좁았다. 겨우 탁자가 네 개 들어갈 정도. 그것도 모두 어딘가 곰팡이 피었거나 모서리가 뭉툭해진 것뿐이었다. 나는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냅킨으로 의자를 스윽, 닦아냈다. 먹구름처럼 뭉쳐 있는 먼지가 대롱대롱 달렸다. 나는 찝찝함을 털어내듯 닦아낸 의자를 손으로 털었다. 휴지통은 보이지 않았다. 바닥이 더러워 그냥 휴지를 밑에 버렸다.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앉았다. 먼지도 털지 않았다. 할머니의 흔들의자가 멈추었다.

“주문 안 해?”

할머니는 익숙한 듯 반말이었다. 엄마가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나도 엄마를 빤히 바라봤다.

“내가 주문할게.”

 

커피는 할머니 이마에 새겨진 주름보다 더 깊은 향을 품고 있었다. 바깥에서 봤을 땐 ‘젊은 다방’이 촌스럽고 구시대적인 곳이라 생각했는데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도 지니고 있었다. 할머니는 그저 눈으로 얘기하고 있었다. 쓴 맛이 혀끝에 맴돌아 할머니를 쳐다보면 알아서 설탕을 내오셨다. 연륜이란 게 이런 것일까. 식물은 빛이 들어오지 않는 데도 끝에 이슬을 머금은 채 싱싱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식탁과 주방이 세 걸음밖에 되지 않는 것, 원두 가는 소리가 커피 휘저을 때 생기는 파동처럼 다방 안에 온통 퍼져나가는 것은 감동이었다. 이 얼마나 친근감 있는 모습일까. 나는 이런 곳을 본 적이 없었다. 할머니의 손길과 집게로 집어 놓은 폴라로이드 사진 속 중년들의 환한 미소. 단지 자신의 추억을 회상하러 온 것이 아니라, 나와 그 시대를 나누려 하는 엄마의 그 젊은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커피 한 잔을 딱 마시고 난 후였다. 시침은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해 뜨지도 않은 시간에 와서 커피를 홀짝이며 마시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갔다. 낯선 곳은 불편해 시간이 느리게 갈 줄 알았다. 그러나 이곳은 액자와 할머니의 탄력 잃은 피부, 깊게 파인 눈동자 자글자글한 주름들이 익숙해질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늘 맡아왔던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는 듯 다방의 냄새를 맡으며 빠르게 적응을 끝냈다. 그러니 시간이 빨리 갈 수밖에. 적응된 곳은 편할 수밖에 없고, 편하면 시간은 빠르게 간다. 하지만 아직 괜찮다. 누나는 저녁에 오니까. 그러던 도중 문자가 왔다. 누나의 문자였다.

 

나 데리러 와. 제주도라서 문자 남기는 거야. 인천공항 직항인 줄 알았더니 딴 곳도 아니고, 제주도를 경유한다지 뭐니? 어쨌든 지금 출발해. 군포에서 여기까지 여유롭게 오면 1시간 30분쯤 걸리지? 나도 제주도에서 한 시간쯤 걸려. 엄마는 언제 온대?

 

엄마는 거짓말을 쳤다. 누나는 저녁에 오지 않았다. 나는 넌지시 휴대폰을 엄마 쪽으로 슬쩍 밀었다. 직접 말하려 했지만, 아까 다방에 오기 전 집에서 우는 엄마를 본 탓이었다. 엄마는 자신의 찻잔 옆에 놓인 휴대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휴대폰 키패드를 몇 번 꾹꾹 눌렀다. 분명 문자를 못 볼 엄마가 아닌데, 엄마가 물었다.

“이게 뭐?”

나는 손을 뻗었다. 휴대폰을 확인하자 바탕화면만 덩그러니 띄워져 있었다. 분명 문자가 보이게끔 넘겼는데, 지운 것이었다. 통화기록도 삭제돼 있었다.

“보셨잖아요. 엄마 안 가시면, 저라도 갈 거예요. 1년 만에 보는 누나잖아요. 대체 왜 그러세요?”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그저 다방에서 조금 더 오래 머물고 싶을 뿐이지. 그리고 누나, 저녁에 온 다니까?”

“엄마가 문자 지웠잖아요. 지금 당장 가야 안 늦어요.”

작은 다방이 모자간의 거친 목소리로 뒤덮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흔들의자에 앉아 돌아가 있던 할머니가 일어났다.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할머니의 발걸음 소리가 컸다.

“오늘 어머니와 아들의 날이다.”

“전 그런 소리 처음 듣는데요?”

“내 말 좀 더 들어봐라.”

나는 초조하게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젊은 다방은 이벤트를 한다. 어머니가 아들과 함께 이 다방에 올 일은 없거든.”

“그래서요?”

“조급해 하지 말고 들어.”

“일어나야 하는데요.”

할머니는 주름진 손을 내 어깨에 올리더니 힘주어 눌렀다. 엄마는 모른 척 눈 감고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깜빡 깜빡이는 희미한 기억 속에 그때 만난 그 사람 다시없던 그 사람 자꾸만 멀어지는데. 엄마는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도 되는 것 마냥 공중에 손을 뻗어 얼굴을 더듬듯, 공기를 더듬고 있었다. 희미한 기억 속에서 자신의 젊음을 찾고 있다는 듯이. 나는 그 모습이 되레 짜증이 났다.

“이벤트고 뭐고 필요 없어요. 가야 한다니까요?”

나는 할머니의 손을 뿌리치며 무작정 일어났다. 내 허벅지에 밀린 탁자가 엄마 쪽으로 기울어졌다. 남아 있던 커피가 엄마의 치맛자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잉크 한 방울 물속에 떨어뜨린 듯 갈색 커피가 옅게 번져갔다.

“이게 뭐야! 당장 집에 가서 갈아입어야 하잖아! 누가 안 간대? 지금 가!”

엄마는 급하게 냅킨을 뽑으면서 대충 치마를 닦아냈다. 할머니는 뿌리쳐진 손을 공중에 그대로 둔 채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나는 할머니의 시선을 무시했다. 늙은이. 괜히 헛소리를 해 가지고. 젊은 다방을 나왔다. 아직도 먹구름이 한 가득이었다.

 

오고 있어? 누나가 재촉했다. 엄마는 여전히 화장을 하고 있었다. BB크림에 눈 화장을 해야 한다며 한 대 맞은 사람처럼 거멓게 눈가를 칠하고 있었다. 거기에 붉은 악마 티셔츠도 울고 갈만한 짙은 색의 빨간 립스틱을 칠하기 까지. 엄마는 입술로 립스틱을 문지르는 것으로 화장을 마무리했다. 완성된 얼굴이라는 것이 목이랑 어찌나 차이가 나던지. 목은 주름이 두세 줄 가 있고 어두운 것에 반해, 얼굴은 비교적 주름 없고 흰 피부만 떠 있어 달걀귀신같이 보였다.

“엄마 빨리 새 옷으로 갈아입으세요.”

엄마는 여전히 커피 자국이 묻은 옷을 입고 있었다. 내 말에 옷장 앞에 선 엄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가끔, 네 누나가 정말 싫어.”

장롱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열렸다.

 

지하철을 탈까, 자동차로 갈까 그게 또 문제다. 나는 당연히 인천공항으로 가는 뻥 뚫린 길이 있으니 자동차를 타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번 누나를 데려다 준 적이 있는데 그 긴 다리에 자동차가 별로 없어 빠른 시간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엄마는 아니란다. 무조건 지하철로 가야 한단다.

“지하철 느리고 복잡하기만 하단 말이에요.”

“그래도 지하철이야.”

“왜요? 대체, 왜요?”

차를 코앞에 두고 타지 않겠다니 자동차가 보물 없는 지역이 그려진 보물지도 같이 의미 없어져버렸다. 나는 결국 엄마가 손톱이 손가락을 파고 들 정도로 꼭 쥐고 있는 자동차 열쇠를 억지로 빼앗아 들었다. 다방도 가 줬는데 더는 물러설 수 없었다. 날카로운 열쇠 날에 베인 엄마 손에서 피가 흘렀다. 나는 뻔뻔하게 그대로 차 조수석 문을 열었다.

“운전은 엄마가 하세요. 운전 좋아하는 건 엄마니까.”

엄마가 화난 표정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가끔 네 누나 정말 싫다’라는 말을 곰곰이 되짚어봤다. 엄마는 왜 누나를 싫어하는 걸까. 뜬금없이 저번에 한 떡볶이 집에서 튀김과 순대, 떡볶이를 눈앞에 두고 엄마가 한 소리가 떠올랐다.

“아들하고 먹으니까 참 좋다.”

“가족끼리 자주 와서 먹잖아요.”

“언제? 넌 맨날 누나랑 먹었잖아.”

“에이, 제가요? 같이 먹은 걸로 기억하는데요?”

“됐어. 나 늙었다고 쳐다보지도 않는 주제에.”

그 때 씁쓸한 웃음으로 넘기긴 했지만 지금 이렇게 다시 떠오르는 이유가 뭘까.

 

인천공항으로 가는 다리에 진입했다. 세계에서 몇 번째로 큰 다리라고 했던가. 새로 지어진 다리는 크고 웅장하고 멋있고 세련돼 보였다. ‘젊은 다방’은 늙었는데 인천공항은 아직 반들거리는 것처럼, 굳이 젊은이라는 수식 없이 가는 길 자체만으로도 자신이 멋지고 젊다는 것을 뽐내고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싶었는데.”

“아까 왜 타고 싶다고 하셨어요?”

“지하철엔 사람이 많잖아. 그럼 눈도 많잖아.”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표시를 했다. 말을 잘못 하면 엄마는 지금 당장 유턴을 할 수도 있었다. 그나저나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지하철을 타고 싶다니. 엄마를 정말 알 수가 없었다.

 

휴대폰 벨소리가 크게 울렸다. 인천공항이 코앞이었다. 휴대폰엔 누나의 이름이 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문자랑 전화는 왜 다 씹고 그래? 어디야?”

“엄마랑 가고 있어.”

“짐 많다니까. 왜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해? 오면 전화 해.”

“응”

전화가 끊겼다.

 

엄마는 인천공항에 도착하기 전부터 초조한 듯 백미러를 통해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심지어 운전에 집중을 안 해 옆 차와 부딪칠 뻔 한 적도 있었다.

“누나 만나러 가는데 왜 이렇게 신경을 쓰세요?”

“누나 만나러 가니까 신경이 쓰이는 거야.”

엄마는 백미러로 눈을 보며 새끼손가락으로 눈썹을 수시로 만져댔다. 붉은 입술은 행여나 닦일까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누나는 입구까지 나와 있었다.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길목부터 누나가 눈에 띄었다. 나는 창 밖에 고개를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누나, 여기야! 엄마가 위험하다며 화를 버럭 냈다. 아직 가시지 않은 먹구름에 그늘진 엄마의 얼굴이 겹쳐져 나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누나는 소리를 듣고 거대한 여행용 트렁크 가방을 두 손으로 힘겹게 끌고 왔다. 누나가 말한 것처럼 정말 짐이 많았다. 화가 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막상 엄마랑 내가오니까 누나는 전화할 때완 다르게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1년만인가? 하긴 누나도 반가웠을 것이다. 자동차가 멈춰 섰다.

 

엄마는 시선을 좀체 들지 않았다. 자동차 바깥으로 나오는 것이 두렵다는 듯 나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낡고 추레한 다방 안에서와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는 엄마가 낯설었다. 거대한 인천공항 앞에 엄마는 힘도 못 쓰고 기도 다 빠져버린 모양이었다. 누나는 저 멀리서 여전히 힘겹게 가방을 끌고 있었다. 얼른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째서인지 인천공항에서 누나는 힘이 넘쳐 보였다. 마치 캥거루 품에 있던 새끼 캥거루가 주머니를 벗어나 더 활동적이게 된 것 같았다. 엄마가 먹구름이라면 누나는 해 같았다. 저 생생한 기운이 마치 해를 끌고 올 것처럼 밝았다.

“열어줘. 나 왔어.”

때마침 먹구름이 물러가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엄마와 누나는 서로 한 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다. 누나와 내가 주고받은 말 때문이었다. 엄마는 짙게 내려온 눈 밑의 그림자를 의식도 못한 채 말도 안 하고 운전을 하고 있었다.

“다방에 가서 늦었다고? 그게 말이나 돼? 네가 다방을 왜 가?”

“그래도 거기 꽤 좋던 걸. 조용하고, 바쁘지 않고.”

“원래 그런 곳은 조용하고 바쁘지 않으니까 늙은이들만 가는 거야.”

“그런가?”

 

그 날 저녁, 엄마와 누나가 대판 싸웠다. 엄마는 붉은 색만 보면 달려드는 투우처럼 누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누나는 갑자기 화를 내는 엄마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도 투우사와 투우가 싸우는 이유를 모르는 관람객처럼 그들을 쳐다볼 뿐이었다. 누나는 그저 멀거니 화를 내는 엄마를 가만히 들여만 보았다. 자신이 빨간 천을 든 투우사인 것도 모른 채 관람객처럼 엄마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계속 되는 엄마의 공격에 기분이 나빠졌는지 누나의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누나는 결국 엄마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엄마 나 없는 동안 좋았지? 그럼 나가줘? 내가 나가 줄까?”

“그래. 나가! 지금 당장 나가!”

그러나 누나는 그 날 문을 닫을 뿐 밖으로 나가진 않았다.

 

엄마는 옷장 앞에 쭈그리고 앉아 화장이 번지는 것도 모른 채 울어댔다. 그러더니 주먹으로 가슴을 먼지가 일만큼 세게 쳤다. 무엇이 그토록 엄마를 답답하게 만드는 걸까. 나는 들키길 염려하는 염탐꾼처럼 뒤돌아섰다.

 

베란다 창문을 보니 먹구름이 싹 가시고 몇몇 회색빛 구름이 남아 있었다. 내일 다시 먹구름이 낄까? 나는 오늘 누나와 엄마 사이를 잇고 있는 실타래가 제대로 엉켜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초등학교 때 실뜨기를 했던 것처럼 간단히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엉켜있는 것만이 문제가 아닌, 그 실 자체의 문제였다. 나는 내 방에서 한 동안 창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누나도, 엄마도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풀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는 것 같으니.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가족이 다 잘 무렵에야 엄마가 다방에 나를 끌고 간 이유를 알 듯싶었다. 포장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그동안 자식에게도 자신의 포장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닐까. 다시 떡볶이 집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늙어서 같이 가는 게 창피하냐는 식의 말투. 나는 그 말이 가슴 한복판에 죄책감처럼 얹혀졌다. 엄마는 늘 의식하고 있던 것이었다. 자신은 빈껍데기가 되었다는 것을. 좀 크자 자신과 어울리지 않고 누나랑 놀러 다니는 아들을 보며 느끼고 있을 터였다. 매일 신세대처럼 컴퓨터를 하고 기계를 잘 다루고 겉을 치장해왔던 엄마가 누나를 불편하게 된 것은 진주를 집어 삼킨 조개와 자신은 하찮은 조개껍질이 된 듯한 심경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어머니와 아들은 오지 않는다는 할머니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벤트라고 했던가. 나는 젊은 다방에 다시 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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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끄러운 머리칼 한 손으로

쓸어 넘긴다 분홍색 분이라도 칠한 듯

발그레한 볼과 검게 칠한 눈꼬리

반짝이는 미니스커트와 어깨에 걸친

에이 포 용지만한 클러치 백 하나

마무리로 붉은 구두에 발가락을

억지로 구겨 넣었다

 

구두 위로 튀어나온 두툼한 살

웬만한 여자보다 더 여자 같은 손짓과

굵고 낮은 목소리를

증오하는 그들의 가성 섞인 탁한 목소리

 

더러운 것도 아닌데

옷에 먹물이라도 튀길까 조심하는

서예 학원 학생들처럼

가슴에 앞치마를 두른 채

조심히 지나쳤다

 

머리에 깊은 못이 박혔다는

두려움 못이 커지는 데에는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들을 보며 망치의 끝으로 못을

빼려 노력해 보았지만

피를 볼까

그대로 심어두었다

못을 빼려다 발견한

길쭉하고 커다란 또 다른 못들

머리에 못이 이렇게 많이

박혔을 줄이야!

 

오늘도 끝이 뾰족하고 차가운 못을

들었다 머리에

마찰 하나 없이 매끄럽게 파고드는 못

 

나를 보는 그들의 머릿속에

못이 박혀있을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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