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반지
목록

은반지

 

텔레비전에서 그 애가 나왔다. 엄마는 그 애가 예뻐졌다고 했다. 그 애의 얼굴이 화면에 잡히자 엄마는 어머, 하며 연신 박수를 쳤다. 쟤 좀 봐, 쟤 좀. 그 애는 비싸 보이는 가죽 공책을 들고 초등학생 때부터 일기를 써왔다고 했다. 엄마는 그 애의 바뀐 겉모습을 봤지만 내게는 손이, 얇고 기다란 손가락이 먼저 보였다. 문득 그 애가 앙칼지게 쥔 주먹이 떠올랐다. 끊어질 듯 부풀어 올랐던 혈관이 생생히 보였다.

그 애는 손이 예쁜 여자아이였다. 잡으면 벌겋게 부어 손자국이 남을 것같이 하얬다. 특히 손가락이 길쭉하고 뼈대가 얄팍한 게 또래 여자 애들과는 달랐다. 마치 성인 여성의 그것과도 같아보였다. 그 애의 성숙한 손에는 항상 반지가 껴져있었다. 커다란 보석이 박힌 공주반지였다.

그 애는 항상 공주처럼 기다란 드레스는 아니어도 꼭 배에 미키마우스가 그려져 있는 원피스를 입었다. 자신이 진짜 공주라도 된 것처럼 또래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복도를 자기 혼자 사뿐사뿐 걸었다. 몇몇의 아이들은 재수 없다는 듯이 우웩, 거렸지만 내 눈에는 기품 있어보였다.

나는 그 애와 친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가 더 정확할 것이다. 그 애는 나를 쳐다보는 적이 없었고 모든 게 지루하다는 듯이 수업을 듣다 창밖을 보기 일쑤였다. 나는 언제나 그 애를 쳐다봤다. 어느 때는 수업 내내, 어느 때는 무심히 한 번. 그때마다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움트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 공주반지를 뚫어지게 보던 까무잡잡한 여자아이가 반짝이는 무언가를 가져왔다. 여자아이는 무언가를 손바닥에 올려놓고는 친구들과 막 떠들고 있었다. 이거 진짜 은반지다? 정말 비싼 거야. 여자아이의 주변에 몰려든 아이들은 침을 꼴깍, 삼켰다. 나는 자리에서 힐끔거리며 여자아이의 은반지를 바라봤다. 여자아이는 으스대듯 손가락을 치켜들더니 반지를 꼈다. 반지는 멈추지 않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여자아이는 당황한 듯 손은 감췄다. 나는 얇고 기다란 손가락을 떠올리며 그 애를 바라봤다. 그 애는 눈을 은반지처럼 반짝이며 연신 공주반지에 달려있는 보석을 문지르고 있었다.

그날 하교시간, 여자아이는 울고 있었다. 화장실에 다녀온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여자아이는 반지를 찾기 전에는 그 누구도 교실을 나갈 수 없다는 식으로 울고 있었고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선생님은 도무지 올라올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흑, 우리… 언니거란 말이야… 20만원도 넘는 건데, 으앙”

여자아이의 주변에 있던 친구들은 하나같이 찾을 수 있을 거라면서 여자아이를 위로했다. 그 중 몇몇이 책상 안에 넣어둔 게 어떻게 사라질 수 있냐면서 구시렁거렸고 의심은 화살처럼 방아쇠를 당기듯 쭉 늘어났다. 그러자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아이의 반지를 찾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몇몇은 여자아이의 책상 주변을 살폈으며 의심의 눈초리로 평소 행실이 좋지 않던 친구들의 책상을 훔쳐봤다. 여자아이의 전 남자친구를 추궁했고 구석을 샅샅이 뒤졌다. 칠판 위도 확인하고 바닥에 뚫린 구멍도 파보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반지는 나오지 않았다. 조급해진 여자아이는 다시 울상을 지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설렁설렁 교실을 돌아다니며 그 애를 쳐다봤다. 그 애는 꽤나 열심히 반지를 찾고 있었다. 손은 낙지처럼 끈적거렸고 그 애의 얼굴에서는 식은땀도 보였다.

그때, 선생님을 모시러갔던 아이가 뛰어올라와 선생님이 소지품검사를 할 거라고 했다. 나는 그 애를 쳐다봤다. 그 애는 머뭇거리며 자신의 원피스 끝자락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주위를 쓱 훑어보더니 속주머니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걸 꺼냈다. 그제야 나는 보석반지가 더 이상 그 애의 손에 끼어져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 애는 천천히 앞으로 가더니 여자아이에게 다가갔다. 나는 침을 삼켰다. 그 애는 여자아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애의 입이 달싹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 맴도는 듯했다. 그 애는 입을 열더니 딱 한마디 내뱉었다. 다행이다, 선생님 와서. 나는 무언가 긴장이 풀려 멍하니 그 애를 바라봤다. 그럼 그렇지 그 애는 그럴 애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다시 나는 그 애를 쳐다봤다. 그 애는 이미 여자아이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었다. 그 애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굳게 다물어진 손을 어떤 책상 속에 넣었다 뺐다. 그 자리는 방금 전에도 그 애가 조사하고 간 곳이었다. 그걸 본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나는 천천히 문제의 책상으로 다가가 손을 쑥 내밀었다. 뭔가가 잡혔다. 온기가 남아있는 딱딱하고 매끈한 것이었다. 나는 꺼내서 손바닥위에 올렸다. 은반지였다. 나는 분노인지 희열인지 모를 소리를 외쳤다.

“은반지 찾았다!”

아이들은 곧 모여들었고 여자아이는 빼앗듯 가져가 나지막이 고맙다고 말했다. 나를 둘러싼 아이들 중에는 그 애도 있었다. 그 애는 긴장했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서 찾았는데?”

나는 그 애를 쳐다봤다. 그 애와 눈이 마주친 건 처음이었다. 나는 손가락을 들어 찾았던 자리를 가리키려다 곧 멈췄다. 그러면 그 자리 주인이 의심받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말을 안 하자니 내가 의심받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 애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쟤, 쟤가 범인이야.”

나는 재빨리 고개를 푹 숙였다. 아이들은 시끄럽게 떠들어댔고 이내 그 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 아니야, 아니라고, 진짠데……”

그때 가슴속에서 자라나던 무언가가 픽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 애를 바라봤다. 그 애의 손은 꽉 움켜져 핏줄이 오돌토돌 튀어나와 징그러워 보였다. 그 애가 입은 원피스의 미키마우스는 구겨져 볼품없어 보였고 나는 그 애가 더 이상 공주로 보이지 않았다.

“이건 일기에요.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쓴 거죠.”

텔레비전에서 가짜 공주가 나왔다. 일기장에는 그 흔한 손톱자국 하나가 없었다. 그 애의 손은 단단해 보이면서 물컹했고 화려한 그림이 그려진 손톱은 무언가를 가리키듯 뾰족했다. 문득 그 애의 손가락에 아무것도 끼어져있지 않다는 게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 애는 손이 예뻤던 여자아이였다. 단지 그뿐이었다. 방에 들어가 모로 누웠다. 곧 텔레비전이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애의 손가락이 생생히 보였다.

 

 

목록
등껍질 속 가족
목록

등껍질 속 가족

 

 

 

할머니는 내가 태어난 게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너는 돌다리 밑에서 주워 온 거야. 비가 아주 많이 오는 날이었지. 네가 강에서 떠다니는 걸 네 애비가 주워서 집 앞에 놓고 갔어. 그게 끝이야.

할머니가 술과 한 뭉텅이의 약을 왕창 먹고 식탁으로 올라가 손을 번쩍 들고는, 하나님 아버지! 하고 울부짖었다. 나는 엄마와 배를 잡고 웃었다. 킥킥, 움직이는, 움직이는 텔레비전이야. 엄마가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속삭였다. 엄마의 입김이 귀에 닿자 알코올과 약방의 냄새가 났다. 괜히 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귀를 벅벅 긁었다. 빨간색의 무언가가 손가락 끝에서 묻어나왔다. 립스틱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엄마를 바라봤다. 화장을 고치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엄마는 집에서도 밖에서도 립스틱을 바르고 다녔다. 크레파스로 덕지덕지 뭉쳐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거짓말같이 예뻤다.

할머니가 그 상태로 고꾸라져 아빠가 누워있던 이불위에 쓰러져 누웠다. 먼지가 푸석하고 일어났다. 아빠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지 한참이 지났다. 이상적인 나날이었다.

이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다. 어쩌면 눈치 챘겠지만 나는 네버랜드에 산다. 피터 팬에 나온 것과는 조금 다른 영원한 네버랜드. 우리 집에서 늙어가는 것은 거북이와 나밖에 없다.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멈춰 있다. 아니 할머니는 오히려 젊어지고 있었다. 육십 먹은 노인네가 목청 좋게 소리를 지르다 빠글빠글한 머리를 지닌 아줌마가 되고 촌스러운 옷을 입은 시골 아가씨가 되고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소녀가, 해맑게 웃는 아기가 되었다.

네버랜드는 거대한 거북이의 등껍질 위에 있는 섬. 그 무엇도 불가능하지 않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우리 집 가훈이다. 가훈 바로 아래에 걸려있는 조잡한 대자보에는 네버랜드에 살기 위한 규칙이 나열되어 있다.

 

네버랜드에 살기 위한 규칙

 

첫 번째, 네버랜드는 물과 전기가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직접 생필품을 구하러간다.

두 번째, 등껍질 아래에는 해적이 도사리고 있다. 네버랜드는 움직이는 거북 섬이므로 한번 떨어지면 절대 다시 올라올 수 없다.

세 번째, 항상 웃어야 한다. 그래야지 거북이가 앞으로 나갈 수 있다.

네 번째, 거북이와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늙지 않는다.

 

규칙을 보면 어려운 것이라고는 딱히 없다. 이곳은 말 그대로 네버랜드. 웃음이 끊이질 않는 곳. 단지 매일같이 생필품을 구하러 밖으로 나가야한다는 점이 귀찮을 뿐이다. 규칙을 보니 문득 주름이 생각났다. 나는 땅에 떨어진 손거울을 들어 얼굴 앞에 가져가댔다. 내가 조각처럼 웃는 게 보였다. 손을 뻗어 실룩 올라간 광대 위 눈가를 매만졌다. 자글자글한 주름선이 몇 개나 되는지 세었다. 광대 아랫부분에서 미세한 경련이 같이 일어나고 있었다. 웃으면 웃을수록 얼굴에 주름이 진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매일같이 거울로 얼굴을 보고 있었다. 나이를 먹지 않아도 주름은 진다. 얼굴에 박힌 주름이 내 나이와 비슷하다는 걸 매일같이 느꼈다. 거울을 한참동안 들여다보다 내가 눈을 찡그리고 있는 건지 웃고 있는 건지 헷갈려 크게 웃었다.

 

매일 아침 나는 누구보다 앞서 뛰어나갔다. 그 뒤를 엄마가 쫓아오고 할머니는 핵핵 거리다 같이 가! 하고 소리쳤다. 할머니는 너무 어려진 나머지 목소리가 크면 이긴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작아지는 할머니의 얼굴을 보며 소리쳤다.

이건 경쟁이야. 어서 뛰어!

나는 더욱 빨리 뛰었다. 더 이상 할머니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엄마는 잘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면 됐다.

숨이 가슴언저리까지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저 너머에서 작게나마 물소리가 들렸다. 나는 두 팔을 맥없이 축 늘어뜨리며 서서히 걸음을 멈췄다. 엄마도 그런 나를 따라했다. 우리는 천천히 달리며 고개를 돌려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 어디에 있어?

고개를 돌려 할머니를 부르는 순간 앞서가던 발에 무언가가 걸려 쭉 미끄러졌다. 앞으로 쓰러지면서 눈이 발아래로 향했다. 신발 코에 초록색 이끼가 묻어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절벽으로 쓸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곳은 규칙에 적혀있던, 떨어지면 다시는 못 올라온다는 거북이의 등껍질 끄트머리였다.

마치 날아가는 것처럼 발이 반쯤 공중으로 떠올랐다. 이대로라면 등껍질 아래의 무시무시해 보이는 바다로 빠질 것만 같았다. 피터팬은 이럴 때 하늘로 날아올랐을 탠데. 나는 묘한 충동심이 들어 오른손을 앞으로 쭉 뻗고 왼손은 가슴팍에 붙였다. 그때, 엄마가 내 복사뼈의 움푹 파인 부분을 억세게 잡았다. 나는 엄마에게 대롱대롱 매달린 채 양팔을 쭉 뻗어 마치 봐달라는 아이의 반성의 표시처럼 귓가에 붙였다. 엄마는 천천히 나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머리에 피가 쏠리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여기는 네버랜드. 뭐든지 될 수 있는 곳. 그런데 왜 나는 피터팬이 될 수 없는 걸까. 네버랜드에는 피터팬이 존재해야만 하는데. 내가 피터팬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생각하다 절벽 아래의 무언가와 눈이 마주쳤다. 미간을 좁히며 무언가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애꾸눈의 아빠가 커다란 파도와 그 위를 두둥실 떠다니고 있는 무시무시한 배위에 탄 채 씩 웃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화들짝 놀라 재빨리 엄마의 팔을 움켜쥐었다. 한창 나를 끌어올리고 있던 엄마는 내 손아귀의 힘이 억셌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엄마도 아빠를 봤을까. 여기는 네버랜드. 아빠는 해적이었다. 아빠는 우리 뒤를 뒤쫓고 있었다. 다시 이 섬에 오르기 위해서. 우리가 항상 웃는 이유도 아빠가 우리를 못 쫓게 하기 위해서였다. 문득 내가 피터팬이 될 수 없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해적의 딸이기 때문에. 후크선장의 딸이 피터팬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쓸린 무릎에서 빨간 뱀이 복숭아뼈를 타고 뚝뚝 떨어졌다. 할머니가 저 멀리서 뛰어오는 게 보였다. 할머니가 나를 흉내 내듯 넘어졌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할머니가 무릎을 부여잡고는 아프다고 징징거렸다.

무릎이 너무 아파.

나는 할머니의 어깨를 흔들며 외쳤다.

여기는 네버랜드. 무릎 따윈 아프지 않아!

할머니가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웃었다. 아빠가 집을 떠났을 때처럼. 해님의 색깔이 주황색으로 변해가더니 엄마의 얼굴에 들어왔다. 엄마는 누렇게 뜬 얼굴로 할머니의 팔뚝을 꼬집으며 일으켜 세웠다. 할머니의 은밀한 속살에 서슬 퍼런 멍이 들었다.

엄마의 왼편에는 내가, 오른편에는 할머니가 손을 올려놓았다. 우리는 어깨동무를 하고 거북이의 등껍질, 갈라진 부분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물이 있었다.

 

할머니와 내 무게가 엄마의 어깨를 짓눌렀다. 엄마는 가는 동안 땀을 많이 흘려 머리카락이 살에 달라붙어 있었다. 엄마는 화가 났는지 입을 옹 다문 채 나를 째려봤다. 어쩌면 얼굴이 녹아 말을 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괘념치 않았다. 얼굴이야 다시 그려 넣으면 되니까.

어느새 물이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여기는 네버랜드 중에서도 가장 신비로운 장소였다. 나와 할머니는 거북이의 등껍질이 갈라진 부분에 무릎을 갖다 댔다. 물이 상처를 감싸기 시작하더니 피는 사라지고 상처는 얼룩도 없이 가라앉았다. 엄마는 얼굴을 강가에 대고 씻었다. 무언가가 씻겨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의 표정이었다. 엄마의 얼굴은 하얀 도화지로 변했다. 엄마는 작은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빨간 립스틱을 칠했다. 도대체 어디가 입이고 어디가 눈인 줄 알고 저렇게 칠하는 걸까? 마침내 아이브로우로 눈까지 그려낸 엄마는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눈은 양 볼에 있고 입은 이마에 있었다.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했다.

엄마 코가 없어.

할머니가 말했다. 엄마는 이상하다는 듯 킁킁 거려보더니 다시 거울을 보며 코를 그려 넣었다. 거북의 등껍질 뒤로 해가 걸려 떨어지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입가에서 미소가 흘러내려와 땅에 떨어졌다.

세 번째 규칙, 항상 웃어야 한다.

거북이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쿵쿵, 요즘 거북이는 늙었는지 움직임이 둔해졌다. 나는 창밖을 내다봤다. 전화기를 귀에 대고 어둠속에서 웃음을 떨어뜨리는 엄마가 보였다. 누구랑 통화 하는 걸까. 비스듬하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엄마가 들어와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을 바라봤다. 요즘 엄마는 거울을 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엄마는 계속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리고 나처럼 나이를 세는 건지 눈가의 주름을 만지고는 한숨지었다.

혹시 엄마가 절벽 아래에 있던 아빠를 본 것일까? 그렇다고 해도 아빠는 해적이어서 움직이는 거북이 위로 올라올 수 없을 탠데. 엄마는 내 고민 따위는 알지도 못하는지 거울을 보며 더욱 짙게 립스틱을 칠했다. 엄마는 입을 오므렸다가 피기를 반복했다. 뻐끔뻐끔, 공기방울이 공중을 하늘거리다가 터졌다. 엄마의 입술이 점점 하나의 꽃봉오리가 되어갔다. 어린왕자의 장미처럼 나는 엄마의 입에 유리컵을 얹어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내 시선을 느낀 엄마는 자신의 입에 유리컵을 얹으며 말했다. 여기는 네버랜드. 불가능한 것은 없어. 킬킬 웃는 엄마의 목소리가 컵에 울려 내 귀에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갑자기 화장대 오른편에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엄마는 입에 놓았던 유리컵을 때고 전화기를 들었다. 한번 내 눈치를 쓱 보고는 또 다시 웃음을 떨어뜨렸다. 이상하게도 엄마는 웃고 있는데 거북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무언가 엄마가 사라져버릴 것만 같이 불길했다. 나는 눈을 감아 엄마의 얼굴을 떠올려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용기를 내어 자꾸 감기는 눈을 크게 뜬 채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왜 자꾸 화장을 해? 여기는 우리 밖에 없잖아.

엄마는 내 말에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게 이 새빨간 립스틱이 잘 어울릴 나이가 온다면, 나를 이해할 수 있겠지.

엄마의 소리가 이물감 가득한 공간에서 유영하는 듯 들렸다. 새빨간 립스틱이 잘 어울릴 나이가 온다면… 눈이 감기고 하얀 도화지가 보였다. 도화지에 그려진 입이 게걸스럽게 입을 벌리며 말했다. 나는 사실 스파이였어. 그렇기에 이제 떠나야해, 안녕.

무언가가 내 귀에 속삭이고 가는 걸 들었다. 엄마의 목소리가 닫히지 않은 귀를 빠져나와 머릿속을 울렸다. 나는 떠나야해, 안녕. 나는 이불을 걷어차다시피 자리에서 일어나 큰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돌아오는 소리는 엄마의 대답이 아닌 누군가가 흘린 웃음소리로 인해 걷고 있는 거북이의 발소리였다. 나는 집을 샅샅이 뒤졌다. 변기통도 열어보고 화장대 서랍도 열어봤다. 어디에도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떠나갔다. 엄마는 다시는 네버랜드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엄마는 스파이다. 단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내 곁에 있었던 가짜 엄마였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엄마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이상한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 왜일까? 할머니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엄마가 수라도 쓰고 간 걸까? 엄마가 자신이 스파이였다는 걸 밝히고 사라진 날, 할머니는 호두까기인형이 되어버렸다. 매일같이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늘어지게 침을 흘리며 웃는 것과 고개를 끄덕이는 것 뿐. 나는 이제 엄마대신 화장대에서 립스틱을 바르고 앉아 할머니에게 인상을 쓴다.

시끄러워!

나는 화장대 속 거울을 들여다봤다. 억지로 웃는 것 같은 광대가 눈앞에 서있었다. 나는 광대인 건가. 다시 엄마처럼 웃어도 보고, 눈을 게슴츠레하게도 떠보고, 가슴도 모아봤다. 아무리 봐도 어울리지 않았다. 엄마가 한 화장처럼.

거북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집은 흔들리지 않았고 먼지도 떨어지지 않았다. 저 멀리서 우리를 쫓아오던 해적선이 거북이의 발아래 배를 댔다. 아빠가 힘겹게 등껍질로 올라와 내 앞에 섰다. 인형이 아빠를 반긴다는 듯이 딱딱거렸다.

오랜만의 집이로군. 반가운 우리가족 한번 안아나 보자.

아빠의 흔적이라고는 할머니가 오줌을 지려놓은 이불이 다였다. 나는 몰래 발을 한 발짝 뺐다. 아빠는 허공을 껴안았다. 아빠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다짜고짜 스파이부터 찾았다.

네 엄마 어디 있어.

엄마는 스파이에요. 임무를 수행하러 나갔어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요.

아빠가 거북이의 등껍질을 세게 차고는 이빨 사이로 거짓말을 늘여놓았다.

네 엄마는 화냥년이야.

나는 아빠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아빠의 눈에서 엄마가 보였다.

아빠는 네버랜드가 지긋지긋해서 떠난 거잖아요.

넌 갈수록 네 엄마를 닮아 가구나.

할머니는 호두까기인형인 만큼 고개를 잘 끄덕였다.

그년이 나 밥도 안줬어!

나는 할머니를 보며 눈을 흘겼다. 할머니를 꼬집으며 벽에 걸린 대자보를 가리켰다. 첫 번째 규칙, 우리는 직접 생필품을 구하러간다. 할머니가 나를 보며 울상이 되었다.

엄마, 아파!

아빠는 해적질을 하면서 얻은 보석들을 자랑스럽게 꺼내어 올렸다. 거북이의 등껍질이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다. 이건 너 꺼. 이건 할머니 꺼. 물건을 세던 아빠는 무언가 중요한 게 남았다는 듯이 배로 내려갔다. 저 멀리서 아빠가 무언가를 끌고 오는 게 보였다. 아빠가 나를 보고 품 뒤로 무언가를 숨겼다. 그러고는 뜸을 들이더니 짜잔, 하며 나보다도 작은 아이 두 명을 꺼내놓았다. 아빠는 누런 금니를 보이며 웃었다.

얘들은 황새가 물고 왔어.

피터팬이 없는 네버랜드는 그렇게 해적의 것이 되어버렸다. 밤마다 아버지는 술통을 쌓아올렸고 거북의 등껍질 위에서는 불길이 일었다. 더는 앞을 나가지 못해서인지 거북이는 아버지가 주는 먹이를 먹으며 살이 뒤룩뒤룩 쪘다. 거북이와 집, 밖을 나가려고 하지 않는 아빠를 보며 상상했다. 어쩌면, 내가 다시 웃기 시작한다면 아빠는 이 섬에서 떠나갈 것이다. 거북이는 다시 움직이고 활력을 되찾겠지.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엄마는 다시는 거북 섬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나는 머리를 쥐어 싸매며 고민하다 끝내 웃기로 결심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들이마신 다음 가만히 기다렸다. 한참이 지났다. 속을 가득 채운 바람이 다시 코로, 입으로 나가고 남은 바람은 속을 더부룩하게 했다. 나는 속에 남은 바람을 게워내듯 크게 기침을 하고 손가락을 목구멍에 넣었다. 손가락이 목젖을 쳐 헛구역질과 함께 바람이 튀어나왔다. 벌게진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한참을 잊고 살아오던 눈물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웃는 법을 까먹었다.

아빠는 엄마를 약탈해오겠다며 다시 집을 떠났다. 아이들은 나를 엄마라고 불렀다. 아이들이 입을 벌리며 내게 밥을 달라고 지저귀었다. 나는 대자보에 적힌 글씨를 보여주려다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너무나도 시끄러워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 아이들의 모습은 새 같았다. 어미에게 입을 벌리며 음식을 넣어달라고 조목조목을 따지는 새.

어렸을 적 엄마는 내게도 이랬을까. 나도 이제 엄마가 되는 걸까. 립스틱이 어울리는 엄마. 그때, 할머니가 첫째를 밀쳤다. 엄마 나도 밥 먹여줘. 나는 치마폭에 얼굴을 묻었다. 종종 엄마가 했던 자세였다. 새들은 지적이고 호두까기인형은 딱딱거렸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할머니가 완전히 인형이 됐다. 더는 말을 하지도, 움직이지도 못했다. 음식을 줘도 고개를 젓거나 입을 벌리지 않았다. 동생들은 이제 밥을 혼자 먹기 시작했고 말도 듣지 않았다. 벽에 붙어있던 대자보는 동생들이 찢어놓은 탓에 종이 쪼가리가 되어있었다. 종이쪼가리가 된 대자보에는 번호와 점, 숫자와 명령만이 남았다. 동생들이 온 후부터 한동안 앉지 않은 엄마의 화장대는 할머니가 오줌을 적신 아빠의 이불처럼 점점 기억 속에서 흐릿하게 잊혀갔다. 해적이 찾아오지 않은지 한참이 지났다. 이 섬은 해적한테도 버려진 섬이다.

거북이가 멈추기 시작한 날부터 처음 보는 사람들이 네버랜드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등껍질 위에서 유일한 집인 우리 집을 두드렸다. 나는 항상 숨을 죽이며 아이들의 입을 막고 있거나, 아이들이 내 손을 깨물며 소리를 내는 경우에는 최대한 어른인 흉내를 냈다.

왜 그러세요?

부모님은 안계시니?

부모님은 왜요?

네 아버지가 선장이라지? 그 사람한테 맞아서 반불구가 된 사람이 여럿이란다. 임금도 제대로 주지 않았고, 혹시 언제쯤 다녀갔니?

아저씨, 피터팬이에요?

내 말을 들은 그는 미심쩍게 나를 훑었다. 아버지의 눈 속에서 보였던 어머니의 눈빛이었다. 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었다. 나는 문밖의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네버랜드의 시간이 정상적으로 돌아갔다면 나는 너보다도 훨씬 많은 나이였어. 이 녀석들아! 썩 꺼져!

그들은 낮게 욕 짓거리를 내뱉고 반짝이는 빛과 함께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닫힌 문을 보며 생각했다. 네버랜드에 정상적인 시간이 흘렀다면, 할머니가 아줌마가 되고 아가씨가 되고 소녀가 되고 아이가 됐다가 결국 인형이 된 것처럼 나도 아가씨가 되고 아줌마가 됐다가 할머니가 되고… 그 다음에는… 음, 나는 무엇이 될까?

동생들은 그들이 찾아온 이후로 떠나온 고향이, 그러니까 저 무시무시한 바다가 그리워진 모양이었다. 내가 말을 해도 잘 듣지 않고 무심히 바다를 쳐다봤다. 나는 동생들의 눈에서 엄마를 봤다. 아빠의 타오르던 눈을 봤다. 동생들은 나와 다르게 무언가가 눈 안에 박혀있었다.

동생들이 바다 너머의 이야기를 했다.

언니, 저 바다 너머에는 커다란 대륙이라는 게 있는데, 그 곳에는 없는 게 없어. 이렇게 불편하게 우리가 먹을 것을 찾으러 다니지 않아도 돼. 물도 집에서 나와.

나는 동생들의 대화를 무시한 채 빨래를 접었다. 아빠를 닮은 둘째 동생이 나를 보며 소리를 질렀다.

누나! 아빠도 바다에 있다고! 어쩌면 누나의 엄마도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엄마에 대해서 떠올렸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엄마. 스파이. 립스틱. 엄마의 이야기가 나오자 호두까기인형은 턱을 흔들며 부스러기 같은 웃음을 흘렸다. 나는 그걸 얼른 쓸어 모아 장롱에 쏟아버렸다. 혹시라도 거북이가 움직이면 큰일이었다. 나는 동생들을 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동생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언제부터 동생들의 엄마가 아니게 된 걸까. 나는 동생들을 안아주려고 팔을 벌렸다. 동생들은 어깨를 빼버렸다. 그날 저녁, 새가 둥지를 떠났다.

동생들은 깃털하나도 남기지 않은 채 별의 별것을 다 들고 집을 떠났다. 밤새 시끄러운 소리로 집이 흔들렸지만 나는 눈을 꼭, 감고 움직이지 않았다. 가긴 어딜 가. 이 늦은 밤에 배가 어디 있다고. 나는 동생들이 집을 떠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저 침대에 누워 큰 소리로 한 마디 내뱉었다.

이 늦은 밤에 니들이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동생들의 코웃음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네버랜드. 우리는 날아갈 거야.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동생들을 쳐다봤다. 동생들은 이미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것 같았다. 나는 열려있는 창문으로 달라가 고개를 내밀었다. 저 멀리 날개를 힘차게 움직이고 있는 한 쌍의 새가 보였다.

매일같이 찾아오던 바다의 사람들이 거북이의 등껍질을 부수겠다고 내게 번호와 점을 주며 말했다. 바다를 항해하는데 거북이가 방해된다는 이유였다. 어느 날부터 거북이는 다리도 목도 꺼내지 않은 채 등껍질 안에만 들어가 있었다. 나는 웃지 않았고 거북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거북이가 죽게 된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하는 걸까. 겨우 내게 남은 건 호두까기인형 뿐인데. 그마저도 고장 나기 일보직전인데. 갑자기 엄마가 떠올라 치마폭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눈을 떴다. 붉은색의 꽃 원단이 보였다. 치마폭에 얼굴을 묻은 채로 잠이 들었나보았다.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땅바닥에 웅크렸다. 넓으니까 좋네, 뭐. 호두까기인형이 동의한다는 듯이 딱딱거렸다. 바닥에 귀를 대고 누웠다. 바닥이 돌아가는, 거북이의 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거북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거북아 자?

거북이는 대답이 없이 내 뺨에 볼을 비볐다. 거북이의 볼이 차가웠다.

거북아 그때가 생각나. 철골들 사이에서 내가 뛰어다니던 것이 말이야. 그때가 처음으로 해적이 엄마를 때렸던 날이었잖아. 아빠가 해적이 되기로 결심한 날이었나. 아무튼 그날 아마 엄마는 스파이가 되기로 결심했을 거야. 네가 한창 몸을 키워가고 있었을 때. 나처럼.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목에서 비린 피 맛이, 녹슬어가는 철골의 냄새가 났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녹조가 뱀처럼 내 다리에 옭아들어 내가 넘어졌던 날, 그때 우리는 처음 만났지. 내가 한동안 꼼짝없이 방에 누워있었을 때 말이야. 나는 아직도 그때가 생생해. 바닥에 귀를 기대었을 때 들린 너의 그 작은 숨소리가 윙윙거리며 마치 우는 듯해 보였던 그날. 나는 네가 내 대신 울어주고 있다고 생각했어. 내 몸의 아픔보다는 사라진 아빠와 치마에 얼굴을 묻고 있는 엄마를 보며 말이야.

나는 너의 등껍질 위에 기대어 많은 걸 했었지. 집에 날아오는 고지서들을 접어서 비행기를 날리고 누가 더 멀리 나가나 시합을 했었잖아. 그때 진짜 재밌었는데.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내가 너의 등에 기대어 엄마의 립스틱으로 네버랜드에 살기위한 규칙을 만들었던 날. 너와 나는 그때 더 이상 커지지 말자고 약속했지. 그런데 거북이야, 그랬던 우리인데, 다 떠나가고 너만 남았는데 사람들이 널 죽이겠데.

목이 메여 헛기침을 했다. 양손을 모아 얼굴을 가리고 침을 삼켰다. 손이 축축해졌다. 코가 먹먹하게 찡한 느낌이었다.

거북아, 나는 커서 무엇이 될까. 나도 저런 어른이 되는 걸까? 문득 궁금해졌어. 나도 엄마가 될까? 거북아, 네게 보이는 나는 어디에 있니?

거북이의 볼에 서서히 온기가 들어섰다. 하지만 거북이는 말이 없었다.

너는 여전히 말이 없구나.

거북이의 등을 서서히 문질렀다. 딱딱한 철골이 만져졌다. 마디마디의 갈라진 숨구멍이 느껴졌다. 그 모든 게, 내가 뺨을 맞대었던 부분 말고는 차가웠다.

거북이의 등껍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창밖에서 악어들이 거북이의 등껍질을 깨부수고 있었다. 악어들의 거센 턱이 거북이의 등껍질에 파고드는 것이 보였다. 악어들의 눈은 바다사람들이 사라졌을 때의 빛을 뿜고 있었다. 집이 흔들리며 모든 것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엄마의 화장대며, 웃음을 숨겨놓았던 장롱이며, 할머니의 오줌에 변색된 아버지의 이불이며, 그 모든 것이 부서지고 무너져갔다. 나는 서둘러 벽에 붙은 대자보조각을 때어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립스틱이 주워들었다. 나는 호두까기인형을 들고 집 밖으로 뛰었다. 집이 와르르 무너졌다.

호두까기인형이 점점 돌처럼 굳어갔다. 나는 할머니를 질질 끌어가며 다 부서져가는 벽면에 기대어 서서 몸을 숨겼다. 앙상하게 뼈를 내밀고 있는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나는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져있는 맥주병을 주워들었다. 맥주병 안에서 아버지의 냄새가 났다. 나는 대자보의 뒷면에 엄마의 립스틱으로 우리들의 이야기를 적었다.

여기는 거북이의 등껍질 위에 있는 섬. 네버랜드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 수 있는 그런 장소. 여기에 엄마라는 아리따운 스파이가 살았고 할머니는 고장 난 호두까기 인형이 되었다. 아빠는 무시무시한 해적이어서 엄마와 동생들을 바다에서 잡아왔다. 잡혀온 동생들은 시끄럽기만 아기 새였다. 하지만 지금은 전부 떠나서 나밖에 없다.

나는 대자보를 맥주병 안에 넣고는 저 멀리 던졌다. 병이 바다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할머니를 쳐다봤다. 할머니 괜찮아? 할머니는 완벽한 돌이 되어버렸는지 꿈적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를 질질 끌었다. 할머니는 자꾸 툭툭 걸렸다. 할머니는 잠깐 정신이 들었는지 돌 부스러기를 흘리며 말했다.

이건 경쟁이야. 어서 뛰어!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붙들린 듯 그때처럼, 엄마와 같이 뛰었던 그 날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뛰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나를 붙잡는 나뭇가지들을 손으로 뿌리치며 뛰었다. 옷에 묻어있던 할머니의 돌 부스러기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럴 때마다 더욱 빨리 뛰었다. 자꾸만 무언가가 내 눈 옆길로 스쳐지나갔다. 악어의 거대한 입이며 아빠의 해적선이며 물이 고여 있는 틈이며 거북이와 처음 만난 장소며 계속 거북이를 덮고 있었던 안개까지. 모든 것이 내 뒤로 뛰었다. 할머니의 부스러기 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자 그제야 나는 멈춰서 주위를 둘러봤다. 내가 지금까지 뛰어온 길이 안개에 묻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처럼.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 까. 나는 이미 거북이의 등껍질에서 내려와 버린 걸까.

무작정 앞만 보고 걸었다.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어딘가로 분주히 뛰어가는 공사장 인부들이 보였다. 엄마를 닮은 사람들이 길거리를 걷고 있었고 아빠를 닮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소리를 질러댔다. 방금까지 밟고 있었던 거북이의 등껍질은 딱딱하고 거친 콘크리트 바닥으로 변해있었다. 나는 땅바닥에 손을 가져다댔다. 바닥에 놓인 내 손은 길고 가느다랬으며 마디마디가 갈라져있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단발이었던 머리카락이 어느새 산발하게 풀어헤쳐진 채로 내 어깨를 쳤다. 손을 들어 얼굴을 매만졌다. 딱딱한 광대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주머니 속에 있던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비쳐보았다. 젊어진 엄마가 보였다. 그랬다. 그랬던 것이었나. 가슴 언저리에서 무언가가 툭툭 튀었다. 꾹 참고 있었던 것이기에 토하듯 내뱉었다. 하, 하하. 흐흐흐. 어디선가 거북이의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다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나는 겨우 자라 어른이 되었다*.

 

 

*김애란 ‘비행운’ 중 ‘서른’ -나는 자라 겨우 내가 되겠지- 인용

목록
마법의 주문
목록

나는 눈을 깜박였다. 형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지나갔다. 늘 진득한 침을 달고 있는 턱, 흘러내린 침을 닦아주는 엄마, 둘을 지켜보는 나를 향해 어색하게 미소 짓는 엄마. 창문 너머에서 아빠의 차 시동이 꺼지는 소리가 났다. 형은 이내 꽥꽥,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서둘러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형의 목소리가 내 뒤통수에서 잘려나갔다. 형의 목소리 위로 엄마가 손가락이라며 소리치는 게 들렸다.

손가락은 무슨… 그러다 안 맞으면 다행이지.

언젠가 얼굴에 크게 멍이든 엄마가 생각났다. 손을 올려 귀를 막았다. 곧 형의 웃음소리가 들릴 터였다. 그런데 몇 분이 지나도 간헐적으로 새어 나오던 형의 신음이 들리지 않았다. 귀를 막던 손이 점점 축축해져갔다. 문을 살짝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형이 손가락을 집으며 숫자를 새고 있었다.

*

 

“왜 형이 온다고 말 안 했어요?”

아빠를 보며 소리쳤다. 엄마는 형이 깬다며 윗니로 아랫입술을 물었다. 나는 그 자리에 붙박여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빠가 이기든지 내가 이기든지. 둘 중 하나였다. 아빠는 몇 분 후 입을 열었다. 아빠의 입에서는 텔레비전처럼 실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는 형이 온 게 싫으니? 형이 너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데.”

나는 말문이 막혀 아빠를 노려보았다. 목구멍까지, 나는 고삼이고 중요한 시기고 하니 형이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만이라도 다시 들어가 있으면 하는 바람이 치고 올라왔지만 그 말을 삼켰다. 사레가 들린 듯 두 눈이 뜨끈해지는 게 느껴졌다. 지금부터 내가 어떤 말을 하던지 간에 아빠는 텔레비전, 저 바보상자처럼 같은 말을 반복할 것이 분명했다.

너는 형이 온 게 싫으니? 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네, 너무 싫어요!

아빠는 끝끝내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빼들고 텔레비전을 바라봤다. 휴먼다큐멘터리였다. 아빠는 그제야 나와 눈을 맞추고 말을 걸었다.

“네 형, 아니 우리가족. 여기 나가보는 게 어떠냐?”

나는 대답하지 않은 채 발을 쾅쾅 구르며 방으로 돌아갔다. 엄마가 나지막이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정말요? 정말이에요? 텔레비전의 소리가 커지고 더는 엄마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애오애오애. 뭔지도 모르면서 따라 웃는 형의 웃음소리가 내 방 문을 두드려댔다. 나만 혼자 외따로 떨어진 섬이었다.

 

*

 

형이 집을 떠나 살게 된 것은 1년이 채 안 된 일이었다. 어느 날 아빠는 인터넷을 뒤져보면서 강 너머 시골마을에 꽤나 재활성이 높은 센터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빠는 형을 그 재활센터에 보내고 싶어 했다. 그때쯤 우리 가족은 밤에 잠을 잘 수 없었는데, 형은 발악적으로 밤새 소리를 질렀고 이웃사람들은 밤마다 집의 초인종을 누르거나 문을 두들겼다. 언젠가 집 앞에 누가 쓰레기를 던지고 오줌을 싸고 간 적이 있었다. 항상 만사가 태평하던 아빠는 정원이 오줌으로 물든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는지 재활센터를 알아온 것이었다. 엄마는 묵묵히 들으면서 계속 흐느꼈고 그것은 암묵의 동의였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엄마와 아빠도 나와 마찬가지라고.

엄마가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한 건 형이 가는 재활치료 센터가 폐쇄병동이라는 걸 알았을 때부터였다. 엄마가 아빠에게 화를 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엄마는 아빠의 정원 가운데에 서서 잔디 깎기를 들고 주변 풀들을 전부 밀어버렸고 아빠는 그런 엄마에게 나도 몰랐다며 그러지마, 라고 애원했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주변을 둘러봤다. 혹시나 이웃들이 볼까 해서였다. 형만으로도 벅찬데 엄마와 아빠까지 갈등이 생기면 나는 더는 집에서 살 수 없었다. 나는 그때부터 집을 나가는 것을 꿈꿨다. 대학교에 합격하면 바로 집을 나가자. 멀리멀리, 날 찾을 수 없게. 형의 웃음소리가 닿지 않는 곳으로.

 

형은 무언가 할 말이 많은 듯 입을 달싹거렸으나 이내 눈알을 굴렸다. 엄마는 그런 형을 껴안으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가서 이 잘 닦고, 누가 괴롭히면 의사선생님께 말하고. 종종 연락하고 알겠지?”

엄마는 형이 연락을 할 줄 안다고 믿는지 형에게 전화번호가 적힌 포스트잇을 건넸다. 형은 그걸 살짝 구겨 잡더니 자신이 집을 떠나는 게 믿기지 않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제발 울지 마…….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형이 울기라도 하면 당장이라도 엄마의 마음이 바뀌어버릴까 봐 겁이 났다. 어렸을 때처럼 형 한 번 안아줘라. 아빠가 말했지만 나는 무시했다.

“자 얼른 가”

나는 형의 손에 덜덜거리는 캐리어를 쥐어주었다. 거기 가면 집에서 생활했던 것보다 더 좋을 거야. 씩씩거리면서 찾아오는 사람들도 없어.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형은 한동안 엄마를 쳐다보다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형은 가끔씩 뭔가를 다 아는 것 같은 눈으로 나를 쳐다볼 때가 있었다. 두 팔을 활짝 벌리고서 애오애오애. 바보같이 딴소리를 하는 형의 눈을 외면하고 싶었으나 오늘이 아니면 언제 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형의 눈동자가 옅은 갈색을 띄는구나. 나는 최대한 몸을 낮추고 대충 안아주었다.

형이 나를 보고 활짝 웃었다. 그러더니 골목 너머 형을 부르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향해 뒤뚱뒤뚱 걸어갔다. 드르륵, 캐리어가 골목을 치며 돌았다. 엄마는 형의 뒤통수를 보며 연신 휴지로 눈을 찍어댔다. 나도 형의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걸음걸이를 보며 살짝 눈물이 도는 듯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나는 이내 마음이 놓였다. 당분간 이웃들과 우리들은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것이고 편안하게 잠을 청할 수 있을 것이다. 엄마와 아빠의 갈등도 사라질 것이다. 나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참아왔으니까. 나는 형이 골목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봤다. 머리부터 엉덩이까지 형은 벽 뒤로 사라졌다. 마치 마법처럼 정말로 허무하게. 내 바람이 이렇게 쉽게 이루어졌다는 게 믿기지 않아 혹시 형이 집을 떠나지 않은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이 모든 게 장난이어서 내가 고개를 돌리고 문을 닫으면 형이 문을 두들기며 해맑게 웃고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손가락을 접었다. 엄마는 눈을 닦고 코를 팽 풀다 방으로 들어갔다. 골목너머로 형이 탄 차가 동네를 벗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형은 없었다. 고요가 어색해서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소리는 서서히 방안에 퍼지더니 모습을 감췄다.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소리였다. 나는 그날 예상과는 다르게 편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

 

아침부터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미닫이문을 열고 대문 앞에 서서 물었다.

“누구세요.”

“네, 휴먼다큐멘터리 팀입니다. 어제 연락드린 대로 취재 나왔습니다.”

나는 문구멍을 한참동안 들여다보았다. 방송국 로고가 찍힌 큼지막한 가방이 보였다. 나는 문에다 대고 크게 외쳤다.

“잘못 찾아오신 것 같은데요?”

이 근처에 휴먼다큐멘터리를 찍을 곳이 우리 집 말고 또 있을까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빠가 신청을 했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무슨 자랑이라고 취재팀을 부른다는 것인가. 나는 돌아서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또다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려 댔다. 아까와 같은 사람이었다.

“이 집이 맞는데요?”

나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이 웅성거리며 전화를 거는 소리가 들렸다. 괜히 민망한 상황이 벌어질 것 같아 자리를 피해 집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가려는 내 옆으로 전화기를 귀에 대고 밖으로 나가는 아빠가 보였다.

“네, 삼강주택. 저희 집 맞아요. 밖으로 나갈까요? 알겠습니다.”

나는 창문에 서서 그들을 쳐다봤다. 정말로 우리 집이, 심지어 정규방송에 나온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내 얼굴이 텔레비전에 동네방네 팔릴 것을 생각했다. 텔레비전에 얼굴이 나오기 바랐던 것은 어릴 적에 동요를 부르던 때가 마지막이었다. 나는 방문을 잠갔다. 촬영에 협조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엄마가 문을 두드렸다. 꼭 내가 나와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촬영의 의미가 없다고 잇대어 말했다. 나는 문에 대고 소리쳤다.

“난 끼고 싶지 않으니까, 형만 찍고 가라고 해요!”

촬영을 하는 사람들은 아마 이 모습도 찍고 있을 터였다. 할 수만 있다면 어디로든 사라지고 싶었다. 요즘 사람들은 전부 내 신경을 긁고 있었다. 약속한 시간도 채우지 않고 형을 도로 데려온 엄마 아빠며, 심지어 촬영을 하는 사람들까지. 나는 항상 뭐든지 받아들어야만 했다. 그게 동생이었고 장애를 가진 형을 둔 동생의 의무였으니까. 머리털이 삐죽 곤두서는 게 느껴졌다. 이러다가는 나까지 돌아버리고 말겠어. 애꿎은 머리칼만 쥐어뜯다가 모든 상황을 빨리 종료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건 방송이고 나는 설정 중 일부다. 찰칵, 사진이 찍히는 소리가 돌이 던져지는 소리처럼 귓가에 울렸다. 사진들이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끝내 문을 열었다. 싸가지 없는 아들보다는 융통성 있는 아들이 나았다.

촬영이 시작됐다. 카메라는 총 4대였다. 거실에 하나, 형 방에 하나, 들고 다니는 거 두 개. 시작점은 정원이었다. 그들은 정원을 기점으로 촬영을 시작했다. 정원에서는 형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PD로 보이는 남자가 아빠에게 다가와 질문을 했다.

“원래부터 이런 아이였나요?”

아빠는 질문을 듣고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게 중요한가요?”

“사람들이 사연을 알아야 이해하죠. 촬영 팀, 다시 갈게요.”

PD는 손바닥을 보이며 아빠를 재촉했다. 아빠는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네. 태어났을 때부터 이렇게 태어났답니다.”

“개선의 여지가 있나요?”

아빠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살짝 화가 나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건 아무도 모르죠.”

아빠의 말이 격양된 채로 튀어나왔다. PD는 힐끔 아빠의 얼굴을 쳐다보다 머리를 긁적이고는 질문을 바꾸었다.

“정원이 참 예쁘네요. 만들게 된 이유가 어떻게 되시죠?”

“그냥 제가 좋아서 만들었어요.”

PD는 어이없다는 듯 아빠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며 스토리를 만들라고 했다. 예를 들어 형에게 자연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었다 던지.

“아들만을 위한 정원을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럴 수 없는 세상이니까요.”

PD는 손을 들더니 아빠의 말이 끝나자 내렸다. 카메라를 들고 있던 VJ가 녹화를 중지했다. 이로써 아빠는 할 일을 다 한 듯했다.

카메라가 서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제 내가 방송을 나가게 되면 학교에서든 길거리에서든 날 알아보는 애들이 생길 것이었다. 그러면 장애인 형을 가진, 불쌍한 아이로 낙인찍히겠지. 나를 향해 다가오는 카메라가 마치 없는 것 마냥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아무런 문제없는 아이로 보이겠다고 다짐했다.

“형이랑 친한가요?”

“형제끼리 친하고 말고가 있나요. 싸우기도 하고 그렇죠, 뭐.”

“그렇담 형이 싫을 때가 있나요?”

질문이 가슴 속을 헤쳐 놓았다. 머리를 긁적인 채 웃으며 카메라를 봤다.

“원래 모든 동생들은 형을 싫어한답니다.”

PD가 웃더니 다음 질문을 했다. 꽤나 괜찮은 답변이었나 보았다.

“형이 만약 평범했더라면 가족은 어떤 느낌일 것 같으세요?”

형이 만약 평범했더라면 이따위 방송에 나올 일도 없었을 것이고 매일같이 집을 찾아오는 이웃들에게 미안하다고 머리를 조아릴 필요도, 벌써 울음으로 강을 만든 엄마의 벌건 눈도, 아빠가 형만 바라보는 것도, 내게 오지 않는 시선도 전부 사라지고 막내로서 가져야 할 가족의 사랑이 내게로 돌아왔을 것이다. 목구멍까지 이 말이 차올랐다가 카메라를 보고 가라앉았다. 카메라의 렌즈는 진짜 사람 눈처럼 보였다. 그것을 똑바로 마주보고 있으려니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헛기침을 몇 번하고 카메라를 응시했다. 렌즈 겉면에 작게 응축된 내가 보였다. 나는 나를 보며 말했다.

“똑같았을 거예요. 형은 어떤 모습이로든 형이고, 우리 가족이니까요.”

PD가 신호를 보내왔다. 촬영이 종료된다는 의미였다. PD의 표정을 유심히 쳐다봤다. 그의 말대로 꽤나 괜찮은 그림이 나온 것 같았다.

항상 스스로 할 줄 아는 것 없이 남에게 민폐만 끼칠 줄 아는 형을 방송에서는 다르게 보이고 싶었는지 엄마는 형이 스스로 하는 무언가를 보여줬다. 나는 형을 노려보았다.

빨리, 빨리 끝내자? 응?

형에게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형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보며 방긋 웃었다. 비닐장갑을 낀 형의 손은 이미 엉망이 돼 얼룩덜룩해져 있었다.

촬영이 끝났다. 하지만 집안에 놓인 카메라는 그대로였다. 그들이 말하길 일상을 찍어야 좀 더 리얼리티 있는 방송이 된다고 했다. 그들은 그렇게 집안에 카메라 4대를 내버려둔 채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대략 일주일 있다가 온다고 했다. VJ가 내게 다가와 카메라를 켜는 법과 끄는 법, 충전하는 법, 테이프를 갈아 끼우는 법 같은 것들을 설명했지만 나는 제대로 듣지도 않고 손가락으로 아빠를 가리켰다. 적어도 일주일 동안 우리는 저 카메라 앞에서 무슨 쇼를 하게 될까. 나는 답답한 마음에 창가에 기댔다. 창가 너머로 촬영하는 사람들의 대화가 들렸다.

“진짜 불쌍하다. 22년 동안 저렇게 산 거 아니야. 나을지도 모르는 애 붙잡고.”

“난 그 동생이 더 놀랍다.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거짓말을 해.”

“원래 관심 받지 못한 애들이 약게 큰다잖아. 불쌍하지 걔도.”

그들이 탄 차가 골목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먼지가 일렁이는 게 보였다. 그 먼지가 마치 형처럼 보였다. 또 형이었다.

또 형이다. 다 형 탓이다. 저들이 저렇게 내 이야기를 하는 것도 형이 아파서이고, 우리가 동정을 받는 것도 그것 때문이다. 나는 불쌍하지 않은데 왜 불쌍해야 하고, 힘들지 않은 척을 해야 할까. 형이 그렇게 태어난 게 내 잘못도 아닌데 왜 벌은 내가 다 받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일까. 침대에 모로 누워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하루 동안의 피곤과 졸음이 쏟아졌다.

차가웠다. 손으로 다가가 만져보았다. 부드러웠다. 부스러기가 손끝에서부터 떨어져 내려왔다. 무언가 축축한 것이 내 뺨을 타고 흘렀다. 귓가에 누군가가 히히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낮게 으으 거리며 이불로 몸을 감싸고 고개를 벽면으로 돌렸다. 무언가가 얼굴에 뭉개지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가 나를 흔들기 시작했다.

갓난아기가 옹알이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꾸 얼굴 위로 차가운 것이 떨어져 광대를 타고 흘렀다. 끈적끈적한 액체였다. 액체, 갓난아기, 흘리는 것, 침… 나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이 내 얼굴에 침을 질질 흘리며 샌드위치를 들이밀고 있었다. 눈을 돌려 이불 시트를 바라봤다. 이미 샌드위치로 얼룩져 냄새가 났다. 내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항상 내가 참아야 하냐는 생각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형을 밀치며 소리쳤다.

“하지 말라고! 대체 왜 돌아온 거야, 제발 꺼져! 다시 가 버려!”

형은 속수무책으로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저 멀리서 아빠가 무슨 소리냐며 방으로 달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형은 계속 웃고 있었다. 마치 나를 비웃는 것처럼. 나는 형을 때릴 듯이 손을 크게 올렸다. 형은 흠칫 놀라더니 몸을 공처럼 말기 시작했다. 윗도리를 얼굴까지 올려 가리더니 발악적인 비명을 질렀다. 그건 그저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니라 처절한 비명이었다. 나는 당황해 아무 말도 못하고 형을 쳐다봤다. 올라간 형의 등 위로 시퍼런 멍이 보였다. 아빠는 방에 들어와 형을 안고 일어섰다. 아빠의 품속에서 잠깐 보인 형의 짙은 갈색 눈도 멍이 든 것처럼 보였다. 이 모습도 전부 카메라에 찍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자꾸 눈에 형의 멍이 밟혔다.

아빠가 나를 불렀다. 안방에 들어서자 아빠는 내게 형이 왜 돌아왔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아냐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아빠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이마까지 올리더니 머리를 계속해서 뒤로 넘겼다. 아빠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 같았다. 아빠는 말을 이어갔다.

“형이…… 거기서 맞았다고 하더라구나. 엄마가, 면회시간에 형을 봤는데 팔에 멍이 시퍼렇게 들어 있더라고. 그래서 한번 보자고 해서 몸을 살펴봤는데 온몸이 멍이더라. 가슴이 너무 아팠다. 네 형에게 못할 짓을 한 것 같아서. 그것 때문에 잠을 못 잤어. 내가 너보고 형을 이해해 달라는 게 아니다. 그냥, 형 앞에서 주먹을 쥐거나 손을 높이 들지 마렴. 그러면 형이 놀란다.”

형이 놀라면 엄마가 울고 아빠는 가슴이 철렁거린다. 형은 단지 말을 못한다는 이유로 자기처럼 아픈 친구들에게 맞았다고 했다. 형이 말을 못하니까 꽤나 오랫동안 맞은 걸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고 했다. 심장이 꽉꽉 죄어오는 것처럼 화가 났지만 이상하게 목소리는 끝도 없이 잠겨 들어가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형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아빠의 뒤에서 손가락을 세고 있었다. 아빠는 내 시선을 느끼고 형을 앞으로 끌어왔다.

“이으애아으어으 이으애아으어으”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줄 아니? 숫자를 세고 있는 거야. 1부터 4까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숫자를 세면 떨렸던 마음이 진정된다는구나. 막 화가 났던 감정도 숫자를 세면서 사라진다는 거야. 참 아이러니하지 않니? 우리는 계속 생각하고 사는데 형은 그렇지 않는다는 게.”

아빠의 눈가에 고인 눈물이 뚝, 하고 떨어졌다. 아빠는 이내 눈을 비비더니 돌아누워 텔레비전을 틀었다. 한참 숫자를 세던 형은 이제 모든 것을 까먹었는지 나를 보며 빵긋, 미소를 지었다. 아빠는 힐끔 형을 보더니 귓속말로 내게 손가락 세는 법을 알려주라고 했다. 형이 다가왔다. 내 손을 부여잡고는 하나 씩 접으면서 말했다.

엄지를 접을 때,

검지를 접을 때,

으애

중지를 접을 때,

아으

약지를 접을 때,

어으

희한하게도 새끼는 없었다. 왜 5는 안 세? 내가 겨우 목소리를 내어 말하자 형은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눈살을 찌푸리다 어렵게 몇 글자를 내뱉었다.

아요, 하오 카…요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한참을 입안에 머금어 보았다. 아요, 하오, 카요. 형의 입 모양을 생각하며 따라가 봤다. 문득 그 단어가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족도 4명이고 형이 내뱉는 단어도 4개이기 때문에. 형은 항상 힘들 때마다 우리를 생각한다고, 그렇게 이해하고 싶었다.

 

*

 

오늘은 첫 방송이 있는 날이었다. 다들 텔레비전 앞에 오순도순 모여 앉았다. 엄마는 형의 손을 꽉 쥐었고 아빠는 형 뒤에서 서서 엄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형은 나를 쳐다보더니 내 손을 잡고는 끌어당겼다. 아빠 품에, 엄마의 그늘 아래에 나도 들어섰다. 영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카요, 카요”

영상에서 가족이라고 말하는 형의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다음은 문을 열어주지 않는 내 모습과 정원의 모습, 형이 정원을 뛰어다니는 모습, 아빠의 정원을 만든 포부와, 내가 형을 생각하는 마음, 엄마의 다양한 시도와, 우리 가족이 함께 웃고 있는 사진이 나왔다. 마지막 장면으로 우리가족이 손가락을 펼치고 있는 모습이 흑백장면으로 바뀌어 지나갔다. 엔딩 크레딧에서 형은 잠들어 있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얼굴에 침을 뚝뚝 흘리며 애오애오애라는 말만 반복하는 형의 시선 끝에는 오로지 나뿐이었다.

우리가족.

형이 가진 마법의 주문을 나는 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목록
크로키
목록

크로키

 

형은 두 번째로 태어났고 나는 두 번째에 태어났다. 형의 형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고 했다. 형은 장남 아닌 장남이었고 나는 둘째 아닌 둘째였다. 내 이름은 형의 형과 같았다.

형의 형이 있었다는 사실은 할머니가 밥을 먹으며 무심코 말했다. 말을 하고 스스로 놀라 눈을 깜박이다 못 들은 걸로 하라며 티브이를 틀었다. 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 나왔다. 나는 티브이 속 그들과 같이 웃으며 밥을 목에 넘겼다. 밥그릇이 숟가락으로 긁히는 소리가 너무 크게 났다. 형은 그 사실을 원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무심히 밥을 넘겼고 애니메이션이 지루해진 나는 형의 형 얼굴을 상상했다. 어떻게 생겼을까. 이름이 무엇이었을까.

이름은 형이 알려줬다. 내 이름이었다. 그럼 내가 두 명이야? 형은 인상을 썼다. 닥쳐. 욕하지 마. 닥치라고.

나는 그래서 항상 입을 다물었고 숨이 차오를 때마다 약하게 숨을 내쉬었다. 형은 항상 먼저 입을 열었다. 앞선 너는 어떻게 생겼을까.

우린 앞 다퉈 스케치북에 형의 형 얼굴을 그려나갔다. 곱슬머리를 그리고 파란 옷을 입히고 집을 그리고 구름을 그리고 웃는 해를 그리고 다했지만 우리는 끝내 얼굴을 그려 넣지 못했다. 형은 고민하다 어디서 배워왔다고 얼굴에 십자가를 그렸다. 십자가의 얼굴을 가진 또 다른 나는 어딘가 성스러워 보이기도 죄성을 지닌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며칠 뒤 그림은 쓰레기통에서 나왔다. 네 갈래로 찢겨져 있었다. 엄마가 청소를 하고 난 이후였고 엄마는 실수라고 말했다.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실수를 찢겼다는 그림이 엑스 자 모양이 되려면 얼마나 많은 우연이 겹쳐야 하는지 생각했다. 그 날 이후 우린 형의 형을 잊었다. 나는 그때 이후 노트에 무언가를 적는 습관이 생겼다.

오랜 시간이 지나 내일이면 이제 내가 어른이 된다. 형은 어른이 되고 나서 집을 나갔고 나는 이제 혼자 방을 쓴다. 문득 형의 형 생각이 났다. 조각난 그때 이후 생각나지 않던 형이 문득 생각났다. 노트를 꺼내 그때부터 적기 시작했던, 새로 알게 된 것들을 적는 공간에 글을 적어내렸다.

* 치매에 턱관절을 움직이는 게 좋다는 말에 할머닌 껌을 반으로 쪼개 씹었다.

* 아버진 내게 부재에 관해 걱정을 하지 말라고 문자를 한다.

*식판을 보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 수 있다.

……

*감사와 고마움 사이

*우린 여전히 그림과 낙서 사이에 있다

우린 여전히 그림과 낙서 사이에 있다. 그때 형의 행동이 크로키였다는 것을 훗날 알았다. 영원히 알 수 없는, 하지만 언제라도 들어갈 수 있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 안에 내 얼굴을 그려넣었다.

 

목록
태풍이 지나가고*
목록

 

화초가 생각보다 잘 죽지 않았다.

여자는 베란다로 다가가 엎어진 화분을 바라봤다. 목이 꺾이긴 했어도 뿌리는 여전히 흙을 붙잡은 채 아직 가시지 않은 바람을 견디고 있었다. 여자는 잡을 게 없어 손을 잡았다. 손의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암초는 그렇게 거대한 배도 집어 삼켰다는데 왜 태풍은 이깟 화초 하나 날리지 못하나.

여자는 매일 꿈을 꿨다. 바다 속으로 잠긴 배에 여자의 딸이 타고 있었다. 딸은 어둠 속에서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는데 물은 계속 차올랐다. 여자는 반대편 유리창에 얼굴을 들이밀고 딸에게 소리를 질렀다. 갓 승무원이 된 딸은 항상 울었고 혼자였고 헐떡였고 또 죽어갔다. 딸의 머리카락이 물위로 떠 하늘거렸다. 딸은 몇 번 발버둥 치다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여자는 잠에서 깼다. 온 몸에서 땀이 났다. 여자는 물을 마시려고 고개를 들다 베란다 유리에 비친 모습을 바라보았다. 양 팔을 가로 질러 두 팔을 안고 있는 자신이 보였다.

이른 새벽이었다. 여자는 소파에 앉아 바닥에 쓰러진 화분을 바라봤다. 화초는 태풍이 불기 전 날 왔었다.

화초를 감싼 비닐봉투에는 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여자는 그 위 종이를 빼들었다. A4용지에 문서로 복사된 글이었다. 여자는 소리 내어 앞 문장을 읽었다.

이 화초는 따님이 죽기 전 제게……,

여자는 말끝을 흐렸다. 문장이 끊이지 않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편지지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딸이 죽기 전 화초를 보고 무슨 말을 했었다는 걸까. 혹시 딸은 죽음의 그림자를 봤던 것일까. 여자는 숨을 참았다. 그런데도 왜 구명조끼를 양보한 것인가. 여자는 억지로 침을 넘기려고 했다. 여자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나는 딸에게 무엇이었나.

여자의 창백한 얼굴은 짙은 화장으로 덮여있었다. 여자는 화장 솜에 세정제를 묻혀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여자는 직장을 잃었다는 걸 종종 잊었다. 매일 아침 딸을 깨우러 딸의 방에 들어갔다가 가만히 멈춰서있기가 일쑤였다. 딸의 침대는 아직까지 딸의 냄새가 났다. 여자는 물끄러미 자신이 앉아있던 마루의 소파를 바라봤다. 바닥에 편지지가 떨어져 있는 게 보였다. 여자는 숨을 참고 편지지를 들었다. 호흡은 가파르게 이어졌다.

혜선은 바다를 바라보며 숨을 거듭 삼켰다. 배에서 학생들을 끌고 나온 직후였다. 아직 배는 완전히 기울지 않아 들어갈 틈이 보였다. 혜선은 자신의 구명조끼를 다른 학생에게 건넸다. 자신은 수영을 배웠다고 다른 사람을 구하는 게 승무원의 의무라고 말했다. 혜선은 구명조끼를 받은 학생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살아야 해. 학생은 눈을 붉혔지만 이내 그 말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말은 독백 같기도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화초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혜선의 손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여자는 숨을 죽였다. 손이 하얗게 질려갔다. 바람이 불자 화초가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베란다로 한 발자국씩 걸어 나갔다.

수영을 가르치는 게 아니었는데.

승무원이 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 좋아하는 게 아니었는데.

배려와 용기에 대해 알려주는 게 아니었는데.

나는 화초가 돌아오길 바라던 게 아니었는데.

널 낳는 게 아니었는데……,

여자의 발에 흙이 밟혔다. 바람이 불어 여자의 치마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뿌리로 흙을 안으며 간신히 버티는 화초가 여자의 눈에는 오히려 악착같아 보였다. 무언가를 간신히 붙잡은 채 살려고 버티고 있는 것만 같았다. 편지를 쥐고 있는 여자의 손처럼 하얗게 질려있는 것만 같았다.

살아야 해.

여자는 물에 들어가기 전 딸처럼 숨을 거듭 삼켰다. 무언가 밝아오는 빛에  여자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창밖을 내다봤다. 베란다 너머에선 전날의 태풍을 이겨낸 사람들이 또 다시 아침을 맞고 있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었다. 화초는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베란다에 쓰러져 앉아 천천히 화초를 끌어안았다. 여자의 양 손 사이에서 흙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화초는 생각보다 잘 죽지 않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목록
너와 나
목록

너와 내 사이 책상 간격에는 유독 먼지가 많았다.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먼지가 왜 네 주변에만 많았는지 나는 알고 있다. 너의 책가방이 항상 쏟아질 듯이 열려있었기 때문이다.

너의 하루는 균형이 맞지 않아 조금씩 열리는 문을 닫으며 시작됐다. 문이 닫히면 너의 인사는 십 원짜리 동전처럼 요란스럽게 땅에 떨어졌다. 아이들은 너의 말이 사라지는 걸 보며 아무도 주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장 난 자판기라도 된 듯 너의 입에선 실없는 인사말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안녕. 반가워. 지금이 몇 시야? 밥 먹었어?

너는 항상 시간과 관계된 말을 내뱉었다. 방금 눈이 마주쳤던 것뿐인데 오래 못 본 사이처럼 살갑게 굴었다. 하지만 가끔 네가 사실 이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문 바로 앞 너의 책상을 선생님이 호의라고 말하자 네가 단어를 반죽하듯 책상 속에 손을 넣어 천천히 배려라고 대답했을 때의 눈빛처럼 말이다. 너는 다운증후군이었다. 다운증후군이 뭔지는 몰라도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건네는 너에게 시간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게 단지 너에게서 나던 고소한 냄새에 감춰져 있었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너의 어깨 너머 책상 안에서는 제빵이라는 단어가 가장 밝게 빛났다. 너는 수업시간마다 그 책을 꺼내 올렸고 나는 네가 책을 꺼내면 선생님을 바라봤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쳐다봤고 그 중 나는 없었다. 그리고 너도.

어느 날 네가 내게 빵을 건넸다. 내 옆에 있는 아이에게도. 아이는 빵을 받곤 작게 고맙다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더 작게 시발, 더럽게. 라고도 중얼거렸지만 너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네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는 나는 모른다. 하지만 나도 그 빵이 왠지 더럽게 느껴졌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나는 네가 쓰레기통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때를 기억한다. 이동수업에서 돌아오고 나서 너는 한 번 쓰레기통을 쳐다봤을 뿐이었을 것이다. 그 안에는 네가 준 빵이 있었다. 너는 그것을 본 채 한참을 멈춰 있었고 우리에게 중요했던 건 네가 한참이나 문을 막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수업종이 칠 때까지. 마치 알람이 고장 나 수업이 시작됐다는 것을 못 들은 것처럼. 아이들은 너를 밀며 들어왔고 너는 끊임없이 밀려나갔다. 반항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고장나보였다.

이제야 말하지만 너는 듣지 못하는 게 많았다. 그리고 너는 그걸 항상 내게 물어왔다. 하지만 사실 난 고장 난 알람이다. 네가 수업종마다 뒤를 돌아봐도 정확한 시간을 알려줄 수 없다. 내 알람을 오로지 나를 위해서만 울렸다. 나는 너의 시간이 아니었다. 나는 네게 시간이 되어 줄 수 없었다. 나는 자리를 옮겼다.

너는 그 이후로 벽에 등을 붙이고 지냈다. 내가 없는 네가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내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고 네가 사라진 것도 몰랐을 무렵에 선생님이 네가 빵집에 취직했다며 더는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교탁에 선 널 지켜봤다. 네가 돌린 팥빵에서는 너에게서 나던 냄새가 났다. 너는 처음으로 선 교탁이 어색한 듯 떨었다. 네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팥빵을 쥐었다. 따듯했다. 분명 너에게 앞문 바로 앞자리는 반의 전부였을 것이다. 네가 가본 전부였을 테고 네가 느낀 전부였을 테다. 너의 자리는 항상 아이들의 책상으로 둘려 쌓여 있었으니까. 그들의 시선은 너에게 울타리였을 테니까. 너의 고소한 냄새는 또 다른 보호색이었을 테고 나는 너의 울타리를 막아주지 못했다. 네가 문 밖으로 나가는 게 보였다. 네가 울타리를 넘고 있다. 사실 나는 너를 좋아하지 않았다. 문득 동정은 내가 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심리에서 나왔다는 말이 생각났다. 나도 어쩌면 너의 또 다른 울타리였을지도 몰랐다.

무심코 네가 사라진 네 자리에 앉았다. 칠판이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앞만, 분필가루를 털어내는 기계만 보였다. 책상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차가운 날붙이가 잡혔다.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놨다. 커터 칼이었다. 네가 이것을 쥐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차가운 철이 오래 쥐니 축축해졌다. 문득 운다는 게 무엇일까 생각했다. 용서라고 생각했다. 커터 칼을 책상 깊은 곳에 놓아주었다. 그리고 너처럼 주변을 둘러봤다. 너의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책상들 너머 철창이 보였다. 블라인드에 가려진 철창의 그림자는 울타리로 막혀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너는 우리가 아니라 저걸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걸 안다는 눈빛으로 무언가에 둘려 쌓여 갇힌 건 내가 아니라 너희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물어보기에 너는 여기 없다. 답변을 하듯 네가 준 팥빵을 뜯어 입에 우겨넣었다. 팥이 마냥 달지는 않았다. 쓰기도 하고 목이 멨다. 하지만 왠지 더 달다고 느껴졌다. 네가 나간 앞문을 바라봤다.

네가 준 팥빵 팥이 유독 붉다. 네가 지금껏 견뎌낸 선혈처럼 나의 손 위로 팥이 뚝뚝 떨어진다. 너는 지금 울타리 밖 세상에 있다. 수업종이 울렸다 그친다. 차마 일어서지 못하고 그대로 자리에 앉아 앞 문 밖을 내다본다. 손에 들린 빵에서 고소한 냄새가 계속해서 난다. 나도 저 울타리를 넘을 수 있을까. 시간이 이미 지났는데도 알람 소리가 끈질기게 귓가를 맴돌고 있다. 온 몸이 자명종처럼 덜덜 떨렸다.

 

목록
닭 한 마리
목록

닭 한 마리

 

언니, 잘 지내세요? 최근에 소식 들었어요. 결혼하셨다면서요? 언니가 소개해준 덩치 큰 아저씨들이 말해줬어요. 곧 태어날 애까지 있대나 뭐래나. ‘청원 고시원’ 너무 오랜만에 듣는 이름인가요? 저는 아직도 여기에 살고 있어요. 그때 언니가 썼던 방을 쓰고 있어요. 언니가 그토록 들어오지 못하게 한 그 방에요. 그땐 방안에 뭔 꿀단지라도 숨겨놨나 싶어 틈틈이 언니 방을 훔쳐보려던 게 생각나요. 언젠가 저와 눈이 마주쳤던 거 기억하세요? 언니의 살짝 벌여진 문 사이에서요. 언니는 망상스럽게 옷을 홀딱 벗고는 어떤 남자와 얘기 중이었죠. 그때가 아직도 선명해요. 지금 제가 앉아 있는 책상 바로 뒤에서 언니는 웃고 있었어요. 저는 처음에 언니가 울고 있는 줄 알았어요. 문 뒤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언니의 윤곽은 곧 쓰러질 것처럼 떨려 웃음이 정말 슬프게 들렸나 봐요. 심하게 흔들리던 그림자, 전 걱정이 돼 문틈 사이로 언니를 봤죠. 언닌 웃고 있더라고요. 흐흐흐 웃음을 흘리며. 그런데 신기하게 웃고 있는 언니의 얼굴을 봐도 여전히 슬퍼보였어요. 하지만 언니 앞에 있는 남자는 그런 언니가 웃는 걸 좋아하는 듯했어요. 뭐 그러니까 언니가 웃고 있었겠지만. 저는 언니를 보며 고층빌딩들 사이로 연결된 외줄에 올라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언니, 혹시 춥지는 않으셨나요? 높은 곳은 춥다는데 옷도 홀딱 벗고서 벌벌 떨고 있었잖아요. 전 언니에게 적어도 따듯한 물 한잔 건네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 자리에 붙박여있던 거 에요. 언니와 눈이 마주칠 때 동안. 언니는 지금까지 제가 훔쳐봤다 생각했겠죠. 그때 말했어야 했는데…… 언니가 절 쳐다보는 눈빛이 너무나 섬뜩해서, 무언가 와르르 무너지는 게 보여서 그냥 문을 닫고 도망쳐야 했어요. 그때 문 뒤에 남겨진 언니는 이어 웃었죠. 그때 전 동물들을 보고 왜 운다 하는지 알았어요. 언닌 마치 동물이었죠. 슬프게 흐느끼는. 미안해요. 언니, 그때 말했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해요.

언니, 제가 이 방에 처음 왔을 때 언니가 놓고 간 일기장을 발견했어요. 딱 3장 적힌 일기장이요. 언니도 저처럼 시골에서 올라왔다 말했죠. 돈을 벌려고 집을 나섰다고요. 언니의 일기장에 무슨 말이 적혀 있었는지 기억해요? 편지가 적혀있었어요. 제게 보내는 편지. 언니는 아마 제가 그 편지를 읽게 될 줄 몰랐겠죠? 저는 그렇게 믿고 싶어요. 단지 쓰고 버리려 했던 거라고. 날 보여 줄 생각이 없었다고. 언니가 침대에 일기장을 두고 사라진 것이 저를 보라고 올려놓은 게 아니라고요. 언니는 그렇게 잔인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제게 서울 말씨를 가르쳐주고 언니, 동생으로 지내자 했잖아요. 저는 아직도 언니가 사준 삼계탕을 잊지 못해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뚝배기 안에 쑥스러운지 자신의 속살을 조금만 내보이는 그 닭 한 마리. 그러면 더 먹고 싶단 걸, 손이 간다는 걸 그 닭은 몰랐겠죠. 저는 그때 닭을 잡아들고는 먹질 못했어요. 너무 짜더라고요. 닭이, 국물이 그 모든 게 마치 제 눈물 같이요. 언니는 그런 절 묵묵히 쳐다보더니 제 그릇을 가져가 먹기 시작했죠. 언니는 비위가 좋은 것 같았어요. 제가 언니였으면 한마디 할 성 싶은데 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죠. 그런데 사실… 들었어요. 언니가 작게 그릇에 얼굴을 박고 먹으면서 한말을요. 괜찮아, 괜찮아. 나도 그랬어. 그리곤 고개를 들고 재빨리 입이 찢어지게 하품하는 모습을, 눈에도 김이 서렸는지 촉촉해진 눈망울을 하고선 제게 그만 가자고 말했죠. 그랬던 언니가 제게 그랬을 리 없잖아요. 하지만 가끔 외로울 때, 덩치 큰 아저씨들의 말이 떠오르곤 해요. 걔는 자기 살자고 널 버린 거야. 언니가 제게 보증을 서달라고 부탁했을 때, 저 덩치 큰 아저씨들 앞에서 아버지가 아프다고 제게 울면서 간청했을 때 아저씨들은 웃고 언니는 울었죠. 오늘 같이 외로운 날. 아닌 걸 알면서도 자꾸 아저씨들의 말이 머리를 맴돌아요. 그러면 그때 언니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생각나고 소름끼치는 웃음이 떠올라요. 저는 언니가 제게 했던 모든 몇 안 되는 말 중에서 그 말이 가장 컸다고 기억하고 있어요. 나 돈 좀 빌려주라. 제발. 언니 전 이제 짜디 짠 삼계탕을 먹을 수 있어요. 정말 짰는데, 이젠 별로 못 느끼겠더라고요. 눈물도 뭐도. 언니, 그건 그렇고 이제 아버지는 괜찮으신가요?

벌써 언니가 사라진지 10년이 지났네요. 언니가 말없이 떠나고 나서 전 돈을 갚기 위해 정말 여러 일을 했어요. 여자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말이에요. 처음엔 여러 잡일로 시작하다가 이러단 평생 불어나는 이자도 못 갚겠다 싶어 아저씨들이 제안한 일을 하기 시작했죠. 언니처럼 말이에요. 저는 그게 두려웠어요. 이게 날 평생 쫓아다니는 족쇄가 될까봐. 매일 새벽에 타는 버스의 손잡이처럼 내 손을 꽉 잡고 놔주지 않을까봐. 나도 이제 살아가고 싶은데, 좀 살고 싶은데… 평생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했죠. 그래서 전 자살도 생각했어요. 버스의 손잡이를 보며 교수형을 떠올렸죠. 누군가가 내게 벌을 내리는 거구나.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거구나. 그럼 죽어야지. 내가 잘못했다는데 죽어야지. 그래서 머리를 넣어보려고 하면 구멍이 너무 작았어요. 제 머리가 들어가기엔 너무나도. 전 그렇게 모든 구멍엔 맞지 않는 사람이었나 봐요. 전 항상 너무 컸어요. 언니. 그래서 제가 언니를 이해한다고 생각한 것일지도 모르죠. 전 항상 제가 크다 생각했으니까. 그 모든 걸 껴안을 정도로. 언니의 일을 이어 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언니가 왜 기괴하게 웃으며 옷을 벗고 있었는지 이해가 됐어요. 짐승의 소리를 내며 우는 언니가 이해됐어요. 언니는 제게 서울 말씨를 알려줄 때 음의 높낮이만 알려준 게 아니었죠. 언니, 저는 지금 삼계탕이 된 기분이에요. 하얗고 뽀얀 살이 된 기분이에요. 그들이 나를 물고 잡아당겨 나는 소중한 사람이가요?

언니 저도 임신했었어요. 배에 임신선이 생겨서야 임신했단 걸 알았죠. 언니는 처음 임신선이 생겼을 때 어땠었나요? 저는 두려웠어요. 임신선이 생기고 생리가 멈추고 나서부터 애 아빠는 누굴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죠. 언니, 화장실에서 죽어간 애들은 도대체 몇 명일까요. 가끔 변기를 내려다 볼 때 가슴이 막 답답해요. 답답해서 숨을 쉬기 힘들어요. 아저씨들이 준 약을 먹었을 때도 전 화장실 변기에 붙박여 움직이질 못했죠. 뭔가가 나온 게 느껴졌는데 아래를 내려 볼 수 없었어요. 언니도 아이를 물 위에 두둥실 흘려보낸 적이 있나요? 소용돌이 속으로 던져본 적이 있나요? 언니 저는 사람을 죽였어요. 언젠가 제가 결국 변기위에서 일어서야 한단 걸 깨달았을 때, 그것과 제가 연결된 줄은 오직 나만이 끊을 수 있단 걸 깨달았을 때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언니 전 줄을 잘랐어요. 가위가 잘 들지 않더라고요. 제 속에서 나온 것은 마치 털이 다 빠진 닭 같았어요. 아무런 쓸모가 없어 죽어진 닭. 어쩌면 언니가 제 껄 무리하게 먹고 게워낸 닭일지도 모르죠. 언니, 저는 닭을 먹을 순 있어도 먹긴 싫어요. 닭을 볼 때마다 언니가 떠오르고, 제가 떠오르고 그것이 떠올라요. 언니 이제 당신의 털은 다 자랐나요? 오랜만에 정말 보고 싶어요.

언니가 제게 미안해한다 하더라고요. 언니,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제게 미안해하지마세요. 전 언니의 족쇄가 되기 싫어요. 돈은 다 갚았어요. 저도 이제 고시원을 떠날 거 에요.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나, 영원할 줄 알았던 족쇄를 풀면 전 어디로 가야 하죠? 언니도 이런 기분이었나요? 전 지금 열쇠를 들고 망설이고 있어요. 구멍에 열쇠를 넣어다 빼며 생각해요. 만약 그때 언니가 저의 대한 오해가 없었더라면 언니는 도망쳤을까요? 제게 차라리 한마디의 언질이라도, 도망치라고 말해줬더라면 뭔가가 달라졌을까요? 언니 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잘생기진 않았지만 착해 보여요. 매일 아침 일찍 나와 근처에서 그 사람을 지켜봐요. 그 사람은 병든 닭처럼 골골대요. 저는 이 사람과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뭔가 느낌 상 전 사랑하지 못하는 몸이 된 것 같아요. 폐경기가 너무 일찍 온 것 같아요. 언니 저를 한 번 보러 와줘요. 제 마음 속의 털이 다 자랐는지 확인해줘요. 저는 아마 계속 고시원에 있을 테니 언니가 준비되면 언제든 나를 보러 와줘요. 그때야 저는 아침을 알리는 닭처럼 힘차게 울 수 있을 것 같아요.

 

목록
쭉정이
목록

쭉정이

쌀을 양은냄비에 불려놓았다. 쌀에서 하얀 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돌렸다. 손이 벌게질 때쯤 뺐다. 손은 물기로 번들거렸다. 서서히 쌀은 가라앉고 쭉정이가 올라왔다. 나는 쭉정이가 올라온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 여기까지였다.

“태연아, 같이 가자.”

녀석이 손을 건네 왔다. 숲은 울창했고 나무의 가지는 길게 뻗어 기지개를 펴는 듯했다. 나는 빛이 들지 않은 그림자 아래에 있었다. 내 몸은 저 나무의 가지들처럼 축 처져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피어 난지 얼마 안 된 새싹처럼 아무렇게나 흩뿌려져있었다. 나와 달리 녀석의 얼굴에는 빛이 반짝거렸다. 생기어린 얼굴이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얼굴이었다.

“됐거든, 나도 혼자 갈 수 있어.”

나는 부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일어섰다. 땀을 잽싸게 훔쳤다. 단체복은 땀에 찌들어있었다. 나는 녀석을 힐끔 쳐다봤다. 녀석은 벌써 저만치 나아가있었다. 같이 가자고 했으면서. 나는 으윽, 소리를 내며 녀석을 앞질러 나갔다. 녀석은 그 당시 나의 자그마한 라이벌 이었다.

형의 손가락을 보며 피아노를 배웠고 형의 나비넥타이를 보며 성악을 시작했다. 내가 형이 입은 단체복을 보고 컵 스카우트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엄마는 내가 금방 그만 둘 줄 알았다고 했다. 그래서 내게 형이 입던 단체복을 물려줬다. 늘어난 멜빵바지에 어깨선이 맞지 않은 목 때 낀 파란셔츠. 나는 가끔 단체복을 입고 학교에 갔다. 형은 나를 보자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게슴츠레 형을 쳐다봤다. 나를 부러워하고 있는 거야. 내가 너무 멋져서. 그럴 때마다 형은 가시 돋친 말투로 내가 끝까지 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포기 할 거라고. 하지만 나는 엄마와 형의 예상을 깨고 형처럼 조장까지 했다. 형같이 반짝이는 뱃지는 없었지만 조장은 조장이었다. 내가 엄마와 형의 예상을 깨고 버틸 수 있었던 건, 녀석 때문이었다.

녀석은 특별히 잘생기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피아니스트와 성악가처럼 나비넥타이가 잘 어울리는 아이였다. 웃음이 보기 좋은 아이, 부모들이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런 녀석이 항상 내게 껌 딱지처럼 달라붙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항상 웃고는 했다. 하하 호호. 나는 그 웃음소리가 싫어 귀를 막고 고개를 푹, 숙이고 싶을 때가 많았다. 녀석은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항상 싱글벙글했다. 나도 딱 한번 녀석에게 웃어줬던 때가 있었다. 스카우트의 조장들만 가는 졸업여행. 녀석과 내가 한 조가 된 처음이자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그때 녀석의 콧대를 눌러주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었다.

이윽고 우리 조는 캠핑장에 도착했다. 나를 포함해 6명이 이루어진 조였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텐트부터 쳤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 우리는 각자 저녁밥을 준비해야 했다. 그게 이 여행의 하이라이트였다. 직접 음식을 준비하는 것. 녀석은 텐트 주변에 모기향을 뿌리느라 바빴다. 나는 재빨리 조원들을 불러 모았다.

“각자 가져온 재료들을 꺼내자.”

나는 쌀과 김치를 꺼냈고 다른 애들은 여러 가지 밑반찬을 꺼냈다. 고기며, 상추며, 새우젓이며, 하나같이 바비큐를 위한 것이었다. 녀석이 가져온 것은 그릴이었다. 고기를 구울 줄 안다고 했다. 초등생주제에 고기는 무슨 고기. 나는 녀석을 힐끔 곁눈질한 후 밥을 할 줄 안다고 했다. 그래서 양은 냄비를 가져왔다.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그 녀석의 그릴에 비해 내 양은냄비는 초라해보였다. 녀석은 싱긋, 웃고 나는 지지직, 눈빛을 보냈다.

녀석이 설치한 그릴의 달궈지기 시작했다. 녀석은 나뭇가지를 가지러 어디론가 향했다. 사람들은 녀석이 가져온 그릴에 관심이 많아보였다. 녀석이 아빠와 캠핑을 자주 간다고 말하던 게 생각났다. 나는 이러다가 내가 준비한 밥이 밉보이면 어쩌지, 이번만큼은 지기 싫은데 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 나는 쌀 봉지에서 벌레가 보였다. 쌀벌레였다. 나는 화들짝 놀라 벌레를 버리려다가 딱 좁쌀만한 것이 그릴의 반짝거리는 은박지위에서 잘 보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사건은 그로부터 10분 후 터졌다. 누가 처음 소리를 쳤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릴주위로 몰려왔다. 그 안에는 녀석도 있었다. 녀석은 그릴위에 죽어있는 벌레를 보고 당황해 울기 시작했다. 내건 깨끗한데, 정말이야. 녀석의 울음은 그칠지 몰랐고 나는 녀석이 우는 걸 처음 봤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걸 처음 보는 느낌이었다. 하늘에서도 물이 내리는구나. 우는 녀석을 등지고 그릴을 바라봤다. 그릴 위에는 내가 놓은 쌀벌레가 새까맣게 타고 있었다. 그 주변엔 내가 가져온 쌀알들이 곳곳이 놓여있었다. 쌀알을 치울까 했지만 곧 그만뒀다. 시간이 지날수록 쌀이 타는 냄새가 점점 났다. 마치 밥의 김이 빠지는 것처럼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났다. 사건은 선생님이 프라이팬을 들고 오는 걸로 끝났다. 그날, 나는 내가 가져온 밥을 안치지 못했다.

그때 이후로 나는 더 이상 녀석과 만날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다른 중학교를 올라가며 멀어졌고 나도 서서히 녀석을 잊어갔다. 녀석은 내 기억 속에서 영원히 이름 없는 ‘녀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내게 밥을 안쳐달라고 부탁한 날. 내가 못하겠다고 하자 어렸을 때 컵 스카우트에서 배운 게 어디로 갔냐며 나를 달달 볶던 그 날. 나는 쌀을 씻었다. 쌀에서 하얀 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돌렸다. 손이 벌게질 때쯤 뺐다. 손은 물기로 번들거렸다. 손등에 물을 맞추고 냄비를 끓이려던 찰나, 서서히 냄비위로 무언가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쭉정이였다. 쭉정이를 보며 그때가 떠올랐다. 녀석의 그릴이 생각났고 녀석의 울음이 생생히 들렸다. 하지만 녀석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무언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을 해야 하는데. 나는 엄마를 불러 쭉정이를 걸러내는 법을 물었다. 엄마는 그것도 기억하지 못하냐면서 나를 채근했다. 졸업앨범. 앨범을 보면 녀석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 엄마의 말을 귓등으로 들은 채 천천히 졸업앨범이 어디 있는지 생각했다. 졸업앨범 속 나비넥타이가 잘 어울리는 녀석은 아직 나를 기억할까. 나는 녀석에게 쭉정이를 건지는 법을 알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목록
나는 누가 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목록

나는 누가 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누가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누’가 되는 사람. 왜 그런 적 있잖아요. 너무 힘들어 모든 걸 포기하고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은 거. 마치 수영장의 유수 풀처럼 말이에요. 흐름 따라 주르륵. 생각해보니 저는 어렸을 때부터 유수 풀을 정말 좋아했어요. 돌아다니는 튜브 하나 챙겨 그 위에 가만히 누워있음 제 갈 길 알아서 가는 걸요. 저는 당연히 제 인생도 그렇게 정해진 길을 따라 유수 풀의 흐름처럼 흘러갈 줄 알았어요. 정말 평탄하게. 두둥실 하늘에 뜬 구름처럼.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구름은 먹구름이 되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어렸을 때의 전 몰랐나 봐요. 수영장엔 저만 있는 것도 아니고, 제 갈 길에도 저만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자꾸 사람들과 부딪쳐서 튜브에서 떨어지고, 물을 먹고. 눈물 콧물 쏙 빼고 눈을 뜨면 이미 내 주변의 흐르던 흐름은, 튜브는 저만치 지나가 있더군요. 다음 흐름을 타면 되는 게 아니냐고요? 튜브를 주워서 새로 타면 되는 거 아니냐고요? 그게 말처럼 쉽나요. 제가 튜브에 올라가려면 다른 사람이 튜브에서 내려야 해요. 마찬가지로 제가 흐름에 끼려면 다른 사람이 저처럼 낙오돼야 하고요. 저는 핑계지만 그게 싫었어요.

 

생각해보면 유수 풀은 가만히 있는 곳이 아녜요. 가만히 있어도 돌긴 하는 곳이지. 제가 왜 튜브에서 미끄러지고, 흐름을 놓쳤는지 아세요? 멈춰있어서 그래요. 멈춰있어서. 다른 애들은 막 물장구치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는 떡 하니 튜브 위에 누워 하늘만 바라보며 궁상을 피워서 그래요. 우리 엄마도 그랬어요. 다 네 게으름 때문이다. 다 네 탓이야. 아녜요. 엄마, 아녜요. 죄송하지만 우리 집 돈 때문이에요. 우리 집은 남들보다 좋은, 단단하고 깨끗한 튜브를 살 돈이 없어요. 제게 수영을 가르칠 수도 없고요. 저를 다시 흐름으로 밀어 보낼 힘도 없잖아요. 엄마, 그리고 아빤. 엄마 아빤 모두 거짓말쟁이에요. 약골에다가. 우리 집이 가난해서, 가난해서 제가 학원도 못 다니고 공부에 대한 열의가 없어진걸요. 아, 물론 거짓말이에요. 이 모든 건. 제발 섣부른 동정심 갖지 마세요. 제가 한 이 모든 말은 거짓말이에요. 전 거짓말쟁이니까요. 우리 집 돈 많아요. 한 이건희처럼?

 

어쩌면 제가 튜브를 뺐기 싫고, 남의 낙오된 자리에 들어가기 싫다고 말하는 것도 거짓말일 수 있겠네요. 저는 거짓말쟁이니깐. 근데 확실한 건 전 이미 낙오돼서 저 멀리 끄트머리에 걸쳐있다는 거 에요. 그런데 정말 웃긴 건 사실 제가 있는 곳은 완벽한 끝이 아녜요. 저 뒤가 있어요. 생각해보면 이 유수 풀은 이미 정원초과인지 모르겠네요.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좁거든요. 저는 지금 딱,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위치에 있어요. 제가 있는 위치는 정말 한적하죠. 그만큼 외롭고요. 다른 애들은 적어도 뭉쳐있는데 전 그러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가끔, 저도 앞으로 나갈 때가 있어요.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요. 그냥 물속에서 빈둥거리며 있고 싶은데 뒤에서 뭘 나가려고 하는지 자꾸만 부딪쳐요. 그러니 남들에게 치이며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죠. 뒤에서 올라오려는 애들에게 밀려서 앞으로 가는 거 에요. 뒤에 있는 애들은 저기 앞이 좋아 보이나 봐요. 어차피 꽉 막힌 건 똑같은데. 힘든 것도 똑같은데. 참 웃기죠. 전 앞으로 가기가 싫어요. 나는 앞으로 가기 싫은데, 싫은데. 정말 싫은데. 히히 이것도 거짓말이에요.

 

그거 아세요? 지금 당장 근처에 있는 사람 누구든 빤히 쳐다봐보세요. 그 사람이랑 눈이 마주칠 때까지요. 싫으면 어쩔 수 없고요. 저는 보통 그걸 당해요. 하는 게 아니라. 아무튼, 지금 하고 있나요? 보고 계신가요? 그 사람의 표정이 변하는 게 보이시나요? 처음엔 웃었나요? 점점 입꼬리가 내려가나요? 눈가가 찡그려지나요? 당신을 향해 다가오나요? 아니면 도망가나요? 네, 저는 도망 다녀요. 어딜 가나 저를 보는 시선이라 도망가는 것도 아니죠. 단순히 피해 다녀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얼마나 무서운지 당신은 아시나요? 아니지, 제가 너무 성급하게 물었네요. 당신이 보기엔 그가 당신의 시선을 좋아하는 것 같나요? 당신은 왜 그를 쳐다봤죠? 제가 보라고 하지 않고 사람을 쳐다볼 땐 그 기준은 무엇이죠? 저는 다 알고 있어요. 당장 말하세요! …… 사실 말 안 하셔도 되요. 저는 다 알고 있으니까요. 이 모든 건 제 열등감이에요. 흐름에서 벗어난, 튜브를 놓친 반항아의 일부에 속하죠. 저는 다가가지 못하는 쪽에 속해요. 앞뒤가 막혀 있는 사람이니까요. 저는 관상용이죠. 물고기는 화나도 어항을 치지 못해요. 자기만 다칠 걸 알기 때문이죠. 하지만 전 가끔 그런 물고기를 본 적 있어요. 일부러 어항에 부딪히는, 물고기에게도 피가 나더라고요. 그때 처음 알았어요. 피가 난다는 걸. 심지어 내 피와 똑같은. 붉은색의.

물고기는 왜 어항에 부딪히는 걸까요. 모르죠? 당신들은 아마 모를 거 에요. 이해하려고만 하겠죠. 이해만 하겠죠. 죄송해요. 제가 좀 심보가 고약해요. 기분 나빴던 건 아니죠? 이해해줘요. 저는 ‘누’가 되고 싶은 삶을 원하는 사람이니까요. 저는 지금 제 본분을 다하는 거뿐이에요. 그런 김에 더 나아가서 저는 당신들을 뭐라고 불러야 하죠? 이 쯤 되니 당신들을 편히 부르고 싶어져서요. 좀 더 제 얘기를 하기 쉽게 말이에요. 음… 아! 어항, 어항 괜찮죠? 저는 이제부터 물고기를 할게요. 저를 물고기라 불러주세요. 당신들은 어항이에요. 아 이제 좀 살 것 같네요. 제 어항이 보이니까요. 여기까지가 내 어항이었구나. 감사해요. 제 어항이 되어주셔서. 저는 이제부터 계속 당신에게 누가되면 되겠네요.

 

물고기가 되니까 수영장에서도 좀 더 수월할 것 같네요. 물 안에서도 숨을 쉴 수 있고. 사람들 틈을 빠르게 비집고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쩌면 앞으로도 갈 수 있을까요? 저는 이제 튜브도 필요 없어지고 흐름도 필요 없어졌으니까요. 하지만 그럴 필욘 없겠네요. 제겐 어항이 있으니까요. 아 이 유수 풀도 어항이었나. 뭐 전 작은 걸 좋아하니까요. … 아, 맞다 물고기가 돼서 물 안을 헤엄치다 생각 난 건데 전 그냥 물속에서 콱 죽어버리면 좋겠단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런 걸 자살이라고 하나요? 그 사람이 시킨 걸 하는 거면 자살인가요? 타살인가요? 아, 그냥 말해본 거 에요. 그냥. 뭐 이제는 물속에서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순 없겠지마는. 물고기는 물에 빠져도 죽질 않잖아요. 하하 나만 웃긴가. 어항님도 웃어주세요. 그리고 어항님은 제게 콱 죽어버리란 말을 하진 말아주세요. 어쩌면 전 그땐 어항에 몸을 박을지도 모르니까요. 저는 ‘누’가 되는 사람이, 아니지 물고기가 되고 싶은 거지. 죽고 싶은 게 아니니까요. 그게 그건가? 히히

 

이 글을 쓰려고 마음먹었을 땐, 그러니깐 제가 사람이었을 때요. 그땐 어항님을 만나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죠. 그냥 잠을 자야 할 시간에 숨이 너무 막혀 숨 좀 트자며 쓴 글이었어요. 이 글도 대충 쓸 생각이었죠. 평상시처럼. 난 내 꿈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야 하며. 자신을 위로하고 달래며 자위할 수 있게. 뭐, 지금도 대충 쓰고 있긴 하지만요. 그러니깐 제 말은, 이 글도 자위할 목적으로 썼다는 거 에요. 표현이 너무 그런가? 제가 단어를 잘 몰라요. 이해해주세요. 아무튼, 그런데 시간이 왜 이렇게 지나가는지 모르겠어요. 대충 쓰고 있는데 쓸 게 왜 이리 많은지 지금도 한 넉 장은 남은 것 같아요. 잠깐만요. 지금 왠지 뭐라고 말하신 것 같은데? 제가 한 번 맞춰볼게요. 음… 이렇게 재미없고 지루한 걸 더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쁘다. 라는 식으로 말했죠? 에이, 다 알아요.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 제가 당신을 위해 말해줄게요. 잘 들으세요. 한마디만 할 거니깐.

“나가세요.”

 

읽기 싫으면 이제부터 멈추셔도 돼요. 홈페이지를 끄고 제 갈 길 가세요. 당신이 아직 튜브를 잃지 않고 흐름에서 안주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건 충고이자 부탁이자 권유에요. 전 붙잡지 않으니깐. 전 뒤 돌아보지 않거든요. 지금 전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걸 후회하고 있지만 말이에요. 아 그래도 뒤를 돌아보지 않아요. 그니까 끝까지 써보려고요. 이유는 없어요. 신념을 지키는 것도 아니고요. 저 같은 사람에게 신념 따위가 있겠어요. 제가 글을 쓰는 건, 그냥 제겐 남은 건 오직 시간이니까요. 흐흐흐 왠지 이제야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손바닥을 비벼야겠어요. 열을 만들려고요. 지금은 매우 춥거든요. 새벽녘의 겨울이니까요. 아 나는 손이 없구나.

 

어항님 결론이 뭐냐고요? 빨리 듣고 싶다고요? 참, 아까부터 계―속 말했잖아요. 전 ‘누’가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요. 이대로 다 포기하고 최하층까진 아니어도 하층 정도에 만족하며 치이는 대로 살 거라고. 그래서 남들에게 ‘누’를 끼치며 살고 싶어요. 엄마든 아빠든 형이든 친구든 그 누구에게도 속칭 ‘빨대’를 꽂고 살고 싶어요. 남들이 제 튜브가 돼주면 좋겠다는 심보죠. 이건 제 속마음이에요. 왠지 이건 거짓말 같지 않네요. 하지만 이제 제겐 튜브는 필요 없고 (거듭 말해서 난 물고기니깐) 다른 사람들도 필요 없어요. 제겐 어항님이 있으니까요.

 

.

.

.

.

.

.

 

여기서 끝내도 되지만… 에잇, 저는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은 거짓말쟁이 물고기니까요. 끝까지 저는 글을 쓸 거 에요.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때까지요. 아직은 할 말이 남았네요.

 

누가 되고 싶은 사람으로서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어항님. 이번 단락에서만큼은 물고기가 아니라 다시 사람으로 있을게요.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거든요. 아무튼, ‘누가’되고 싶은 사람으로 깊게 생각해보면. 네, 이번엔 ‘누가’에요. ‘누’가 아닌 ‘누가’, 나 아닌 다른 사람. 전 제가 아닌 ‘누가’되고 싶었어요. 어쩌면 짐작하셨겠지만 전 어항님에게, 다른 사람에게 ‘누’가 되는 정도에 만족하지 않았죠. 솔직히 죄송하지만 어항님이나 다른 사람에게 ‘누’가 되는 삶은 정말 피곤했어요. 가끔씩 그들이 내비치는 눈빛과 혐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자꾸 인식하게 되는 제가 싫었죠. 그래서인지 저는 제가 아닌 ‘누가’되는 걸 꿈꿨어요. 그래서 전 꿈을 이룬 것 같네요. 물고기가 됐잖아요. 히히 일단은 이건 접어두고 전 ‘누가’되는 걸 꿈꿨는데 그 ‘누가’는 좀 높은 사람들이었어요. 유수 풀의 튜브를 놓치지 않은 사람.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은 사람. 완벽한 사람이었죠. 그런 사람들이 되게 부러웠어요. 속으로도 겉으로도 표현했지만, 물론 욕이었죠. 밥 먹고 공부만 처 했냐 시발 것들아……. 너무 표현이 거칠다고요? 이해해줘요. 이 모든 게 부러워서 한 거 아니었겠어요. 부러워서. 너무 나쁘게만 보진 말아주세요. 그럼 더 이상 제 얘기를 하기 힘들어지니까요. 어항님만큼은 적어도요. 분위기를 전환하는 김에 그거 아세요? 제가 ‘누가’되길 바란다는 점에서부터 전 여러분들에게 거짓말쟁이임을 인증한 셈이에요. 전 아까 남들의 튜브와 남들이 낙오된 흐름을 타고 가기 싫다고 말했죠. 다 위선이었어요. 가식. 밑바닥 쳐보니까 알게 되더라고요. 제 진심을. 괜히 삐뚤어지고 싶더라니 까요. 철없는 시절처럼. 욕도 막 내뱉고, 막 때리고, 울고, 불고, 난리 치고. 결국에는 어항에 머리를 쾅 박는. 하아, 상상만 해도 기진맥진하네요. 벌써 머리에서 피가 보이는 것 같아요. 진짜 핀가.

 

제가 ‘누가’되고 싶다고 생각한 건 남들이 나보다 앞에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였어요. 그걸 인정한 건 훨씬 뒤고요. 인정하기 전까진 ‘누’가 되는 사람이 되길 원했고, 인정하고 나선 ‘누가’되는 사람이 되길 원했어요. 말장난 같죠? 그런데 진심이에요. 제가 이 글을 쓴 발단도 이 ‘누’, ‘누가’에서 시작했죠. 그거 아세요? 모두들 처음엔 자신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건 정말이에요. 전 그랬어요. 제가 생각만 하면 모든 걸. 그러니까 이 전부를 다 해낼 줄 알았죠. 저는 이 생각을 꽤 오래 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길게 낙오를 할 수도 있었던 거죠. 언제든 다시 튜브를 타고 그들의 흐름에 합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네 알아요. 자만이었던 거. 그래서 지금 이 꼴이 된 거. 그런데도 정신을 못 차리고 글 쓴다 하며 새벽에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거. 가능성이 없는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도. 흠, 이 쯤 되면 밝혀야 할 것 같네요. 어항님이 궁금하실 것 같으니까요. 제 흐름의 명칭은 1999에요.

 

저는 지금 2017을 지나는 중이에요. 막 2016을 지나왔고요. 그걸 어떻게 아냐고요? 참, 위를 보세요, 위를. 수영장 위를 말이에요. 뭔가 모르게 네온사인 빛을 내는 야광 판이 보이시나요?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글씨가 보이시죠? 그럼 자그마하게 적혀있는 봄, 여름, 가을, 겨울과 그 아래의 숫자가 보일 거 에요. 적혀 있는 게 보이시죠? 네, 그거 맞아요. 2017. 그게 날짜를 가리키는 판이에요. 친절하게도 계절을 알려주죠. 흐름을 타고 얼마나 왔는지 알려주는 거 에요. 저에겐 좌절과 절망을 곱씹게 해주는 아주 고마운 판이죠. 제 흐름이 지금 어디쯤 있을까요. 저 판을 봐도 모르겠어요. 몇 년이 지난 것만 어렴풋하게 알 수 있을 뿐이지. … 어? 저기 저 정체된 구간이 보이시나요? 지금 보니 저기 끄트머리에 걸친 사람 중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대충 얼굴만. 자식이 커서 경찰 하고 싶다더니. 지금 하려고 노력 중인가 봐요. 멋지네요. 정말 부러워요…… 흠흠. 아니에요. 부럽지 않아요. 잘못 들으신 거 에요. 그렇다고요. 뭐. 그건 그렇고 대충 짐작하기에 저기에 있을 것 같아요. 제 흐름이 말이에요. 저기는 대입이라는 구간이거든요. 저기에 사람들이 왜 몰려 있는지 아세요? 뒤에선 거센 물살이 자꾸 나를 떠미는데 앞으로는 가지 못하고 계속 나를 압박하는 저런 곳에서 속 답답하게 왜 있는지 아세요? 그런 게 재밌어서? 참, 사람들이 전부 변태이게요? 다 틀렸어요. 입구가 작아서 그래요. 작아서. 저기, 쩌어기, 조그만 콩알 한 개 보이세요? 저게 구멍이에요. 저걸 들어가야 해요. 이후엔 뭐가 있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다들 저길 들어가야만 해요. 아니,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고요. 저도 들어가고 싶은데 제 차례가 올까요? 만약 온다면 전 얼마나 기다려야 하죠? 제가 있는 위치에서 저긴 너무 멀어요. 그러면 뛰어가라고요? 아니, 지금까지 뭘 들으신 거 에요. 저길 가려면 힘이 있어야 하는데. 저는 힘도 재능도 능력도 그 무엇도 하나도 없다고요. 아시겠죠? 그래서 전 방법을 찾았어요. 바로 왼쪽 길로 들어가면 되는 거 에요. 뭔가 밖에서 봤을 때 안에 쓰레기만 가득 찬 것 같은 오물 가득한 물로, 저 하수구 같은 곳으로 빠지는 길로 가면 되는 거 에요. 저 길은 꽤나 큰 구멍이에요. 이마저도 못 건너는 사람이 있지만 말이에요. 그들은 돼지죠. 살만 뒤룩뒤룩 쪄서는 물에도 뜨지 못하는 겁쟁이들. 사실 그게 바로 저에요. 그래서 전 다이어트를 하려고 하는 중이죠. 저 구멍이라도 들어갈 수 있게 말이에요. 솔직히 저 큰 구멍 뒤에도 뭐가 있는지는 알 수 없어요. 알고 보면 정말 1급수 물에, 예쁜 여자들이 비키니를 입고 수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정말 두려워요. 저 작은 구멍은 뭐가 있는지도 잘 안 보이니까 그냥 들어간다고 해도, 이건 대놓고 싫고 짜증이 나는 게 널려 있잖아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걸 더 무서워한다는데 개소리인 것 같아요. 전 보이는 게 더 무서워요. 작은 구멍을 못 들어가는 건 끈기 문제가 아니냐고요? 여보세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네? 정답이에요. 어항님도 알다시피 저는 끈기도 없고 구멍에 들어갈 수 있는 체형도 안 되는 거짓말쟁이 돼지물고기에요. 지금은 사람이지만요. 어항 속에 갇힌. 이젠 어디가 제 진짠지 모르겠어요. 사람인지 물고기인지. 전 제가 물고기였으면 좋겠네요. 멀리멀리 떠나갈 수 있게.

 

이거 보이시나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던 저는 제 흐름이 지금 어디를 가고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어요. 지구가 태양을 따라 도는 걸 왜 중학교 때 알려주는 걸까요. 전 저를 향해 지구가 돌아가는 줄 알았어요. 제가 마치 신인 줄 알았죠. 잠깐 지구로 마실 나온 거로 생각했어요. 신을 하기 위해서 인간 생활을 연습해보라는 거라나 뭐라나. 그래서 ‘트루먼 쇼’를 보며 소름이 돋았고 지금도 나에게 사람들이 장난을 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솔직히 그랬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불행한 건 싫으니까요. 차라리 몰래카메라라고 해줘요. 거짓말이라고 해줘요. 이건 거짓말쟁이의 바람이에요. 어항님.

 

제발 하루라도 헬렌켈러의 바람처럼 전 다른 사람이 되어보고 싶어요. 눈을 뜨고 싶은 것처럼 저도 잘하는 게 있으면 좋겠어요. 딱 하나만 그것만 바라볼 수 있게. 너무 이기적인가요? 차라리 이기적이 될 테니 뭐든지 주세요. 잘할게요. 정말 잘하려나? 잘 하는 게 생겼는데 잘할 필요가 있나? 그럼 차라리 행복하게 살 테니 제게 힘을 주세요. 어항님 기도합니다. 다음 문단으로 넘어갈 때는 제게 힘이 생겨야 해요. 무조건 하나는 잘할 수 있는 그런 힘이요. 부탁할게요. 어항님은 절 품고 있는 전지전능한 어항이잖아요. 믿습니다. 아멘.

 

왜 힘을 안 주시나요? 당신도 결국은 나약한 존재였네요. 누구에게 힘은 줄 수 없는, 그저 불쌍한 눈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는. 제가 그렇게 보지 말라고 했죠. 절 보지 마세요. 절 가만히 내버려 두세요. 전 지금이 좋아요. 지금이 행복해요. 하아 제발, 지금이 행복한가요. 제가 행복해 보이시나요? 말하지 마세요. 전 준비가 안 됐어요. 아직은. 절 당신의 애인 다루듯이 다뤄주세요. 소중하게. 사랑스럽게. 문지르듯이.

 

그래서 전 ‘누가’되고 싶다는 거 에요. 이렇게 불행하니깐 네, 저 다시 물고기로 돌아왔어요. 사람이 되니 복잡한 게 참 많네요. 특히 감정이 북 받쳐 올라요. 짜증나게. 아무튼, 그거 아세요? 어항님. 물속에선 울어도 티가 나지 않아요. 저는 경험해봐서 알죠. 많이 울어봤거든요. 우는 걸 좋아하기도 했고요. 울고 나면 콧등이 시큰한 게,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일부러 울 때도 있었죠. 물속에서 울 때면 숨이 막혀 와요. 물속에서 숨을 참아야 하는데 거기서 운다고 생각해보세요. 눈과 코와 입과 귀에 물이 들어가 여간 불편하지 않은 데가 없죠. 눈은 뻐근하고 코는 시큰하고 귀는 먹먹하고 입은 칼칼하고. 그런데, 전 일부로 그랬어요. 그래야지 평상시의 내가 아니니까, 그렇게 된통 당해봐야지 병신이 된 기분이니까. 장애인을 비하하는 건 아녜요. 그냥,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거 에요. 그 정도로. 자신을 혐오 하냐고요? 잠깐만 거울 좀 볼게요. 아 손이 없는데… 어항님, 어항님의 유리에 얼굴을 좀 비춰볼게요. 그래도 되죠? … 음 … 잘 모르겠네요. 그냥 못생기고 뚱뚱하고 거짓말쟁이일 것 같은 물고기가 있어요. 아 이게 혐온가?

 

이제 잘 아셨죠? 전 ‘누’가 되는 사람이 되고 싶고, 더 나아가 ‘누가’되고 싶어요. 그런데 그것도 사람이어야 하는 것 같아요. 누가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거니까요. 인간성은 물고기인 저에겐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매우 소중한 것이었나 봐요. 그렇기에 물고기는 안 되나 보네요. 미안해요. 아깐 되는 줄 알았는데. 결국, 꿈을 이뤘다는 것도 저 혼자만의 착각이었네요. 생각이 바뀌었어요. 다른 사람이 제가 됐으면 좋겠어요. 내가 ‘누가’되는 그런 미래만 생각하지 말고 ‘누가’ 내가 되는 상상을 해봐야겠어요. 너도 고통 좀 받아보라지. 그런데 누군가가 내가 됐는데 나보다 더 잘살면 어떡하죠? 그렇담 나는 무엇인가요. 도대체가 내가 살아 있는 게 도움은 되는 걸까요? 차라리 그때 죽을 걸 그랬어요. 모든 걸 포기하고. 그냥 물속에 잠겨가며.

제겐 하나의 바람이 있어요. 어렸을 적 제 꿈이었죠. 저를 특별한 사람이라 생각하면서도 저는 평범한 사람이길 원했어요. 남들과 똑같은. 남들이 좋아하는 걸 좋아하고, 원하는 걸 원하는. 누구든지 그렇게 되길 원하는 사람. 그 누군가가, 거의 이 세상의 많은 누군가가 원하는 행복한 삶. 평범하게 웃을 줄 아는 사람. 전 그런 사람이 되길 원했었죠. 그런데 전 그러지 못하네요. 남들에게 빨대를 꽂으며 사는 ‘누’가 되는 사람과, 남들이 되고 싶어 하는 ‘누가’되는 사람은 그 누구도, 그 ‘누가’가 원하는 사람이 아녜요. ‘누가’는 되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런 사람을. 저 같은 사람을. 그래서 저는 물고기가 되었는지도 몰라요. 이런 사람은 싫어서. 남은 게 자존심밖에 없는 그런 사람은 되기 싫어서. 허망하죠. 지금 제 기분이 그래요. 맷돌 손잡이가 없어도 한참은 없는 것 같네요. 어항님. 왜 나는 날 이끌어가지 못하는 걸까요. 전 더 이상 도망치질 못하겠어요. 이제 더 이상 전 물고기가 될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 물론 어항님도요. 어항님 죄송하지만 이제 당신을 깨트려도 될까요?

“……”

장난이에요. 지금은요.

 

*

 

물이 차가워요. 전 그런 물속에서 19년을 살아온 셈이죠. 처음엔 따듯했을 거 에요. 시원했거나.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땐 좋았겠죠. 사람이 되니 저를 치고 가는 물살이 더욱 강하게 느껴지네요. 물살. 물살이 저를 밀고 있네요. 그런데… 전 잘 밀리지 않아요. 왜 그러죠? 아, 땅에서 제 발이 앞으로 나아가길 거부하고 있군요. 생각해보니 전 지금 물살을 버티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속도가 느린 것도 그런 거 때문인 것 같고요. 저는 왜 앞으로 가길 싫어하는 걸까요. 솔직히 나는 앞으로 가길 원하는 것 같은데 왜 내 몸은 거부하는 걸까요. 물살이 되게 차요. 감기에 걸릴 것 같아요. 전 추운 걸 싫어해요. 그 정도로 물에 오래 있길 싫어하고요. 생각해보니 제 주변엔 싫어하는 것투성이네요. 저 작은 구멍. 막혀있는 앞뒤. 숨 막힐 것 같은 사람들. 나를 쳐다보는 시선. 주위의 모든 것. 도대체 제가 왜 여기 있죠? 다 제가 싫어하는 것밖에 없는데 말이에요. 저는 깨달았어요. 어항님, 절 지켜보고 계신가요? 절 꺼내주세요. 지금까지 당신에게 한 저의 무례를 전부 사과할게요. 제발 당신이 나를 퍼서 물 밖으로 내던져 주세요. 차라리 그게 낫겠어요. 전 여기서 도무지 버틸 수 없겠어요. … 네? 그럴 수 없다고요? 왜요? 이유가 뭔데요. 당신은 정말 끝까지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저 말만, 말밖에 없어요. 진짜로 전 당신을 증오해요. 지금 제게 생각하라고 하신 건가요? 나갈 방법을 간구하라고 하시는 건가요? 누구한테 간구합니까. 누구한테 기도합니까. 도와줄 생각이 없으면 제발 저를 가만히 내버려 두세요. 생각은 그놈의 생각. 알았어요. 생각할게요. 마지막으로 어항님의 부탁을 들어드리죠. 당신은 저를 버렸어도 그러니깐 저를 연민의 눈으로 쳐다보지 말라고 말했잖습니까. 괜찮아요. 전 당신을 이해하니까요. 그러니 생각할게요. 심호흡 좀 하고. 지난날의 저를 돌아볼게요.

 

…… 깊게 생각해보면, 배를 치는 흐름에 토가 나올 지경이지만, 집중해서 생각해보니 전 유수 풀의 흐름을 좋아했던 것 같진 않아 보여요. 물살을 타고 앞으로 나아가기보단 그 물살을 거꾸로 역행하는 걸 좋아했지. 그 증거가 아까 제가 물살을 버티던 거 에요. 그때의 표정이에요. 지금까지 써 내려온 문장들이에요. 전 싫은 것들 가운데서 전 버티고 있었던 거죠. 이제야 깨달았어요. 저는 미는 힘을 이겨내며 나아가는 걸 좋아해요. 친구들과 물도 왕창 마시며 콜록대기도 하는 그런 걸 말이에요.

 

왜 이제야 생각나는 걸까요. 남들에게 폐를 끼치는 ‘누’가 되는 사람. 내가 남들이 되고 싶은 ‘누가’되는 사람. 남들이 바라는 걸 나도 바라고 싶은 ‘누가, 되는’사람. 남들이 나를 바라고 원하고 따르고 싶어 하는 ‘누가’되(려)는 사람. 이 모든 게 거듭 더해져 ‘누가되는’사람이 된다는 걸요. 저는 거듭하여 보태어지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였어요. 말 그대로 누가되는. 점점 거듭하려 보태어지는. 이제야 깨달았네요. 그 모든 사람이 되고 싶어도 못 됐던 이유를. 되고도 힘이 들었던 이유를. 저기에 계단이 보여요. 정말 가까운 곳에 있었네요. 왜 전 못 알아봤을까요. 옆을 보기 싫었던 거겠죠. 주변을 살피기 싫었던 거겠죠. 정말 전 창피할 정도로 겁쟁이이었네요.

 

이렇게 길게 쓸 생각이 없었는데 벌써 새벽이네요. 공기가 차요. 이런 날 수영하면 감기 걸릴게 십상이죠. 수건을 준비해둬야겠어요. 곧 제 친구들이 나올 것 같거든요. 혹시 모르니 따듯하게 안아주려고요. 어… 물속에서 나와서 보니 저들이 어떻게 보이냐고요? 저들은 물고기로 보여요. 전부는 아니고 당연히 저와 같은 사람들만요. 저기에서 적응하지 못한 자들이요. 그런데 저들은 그냥 물고기가 아녜요. 연어지. 물속을 회귀하며 돌아오는 그런 대단한 존재 말이에요. 적어도 전 그렇게 생각해요.

 

누를 끼치다.

누가 되다.

누가 되는 사람이 되길 원하다.

누가 되려는 사람이 되길 원하다.

거듭 더해지다.

저는 누가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 모든 의미가 거듭 더해져 단단해질 거거든요.

 

그러니 어항님 당신을 깨트려도 되나요? 전 이제 제 다리로 스스로 설 수 있을 것 같네요.

 

쨍그랑

 

“저기 저는 누가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당신을 어항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히히 당연하죠. 지금부터 전 어항을 할게요. 당신을 품어줄 수 있는. 뭐든지 제게 거듭해서 털어놓으세요. 아, 일단 당신의 물기부터 말리죠. 제가 수건을 준비해놨어요. 그럼 좀 더 차분하게 말을 할 수 있을 거 에요. 시작 전에 일단 한 마디하고 시작하죠. 무슨 말인지는 알죠? 모르시겠다면 저를 따라 하세요.

 

하나

 

 

 

그래요. 난 누가 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목록
나비잠
목록

나비잠

 

하늘은 십자수를 꿰매는 듯

촘촘한 구름의 틈마다 하얀 눈실이 내려와요

뭉쳐진 솜이 문지방을 두드리며 나를 불러요

바닥에 층을 이뤄

한층 두층 세층···

겹겹이 쌓인 솜에 물이라도 채워진 건지

문은 열리지 않아요

아빠, 문이 열리지 않아 밖을 나갈 수 없어요

늑대가 밖을 돌아다닌다고

다 너를 위한 일이라고 말하시는 아빠,

늑대의 울음소리와 아빠의 고성은 비슷한 듯해요

 

-방은 따듯해

바람이 창을 두드리며 저를 불러요

-이불은 부드러워

눈이 자신의 부드러운 살결을 해님에게 보여요

-귤을 달콤해

저는 하늘에 걸린 구름이 먹고 싶어요

 

거친 숨을 내쉬는

아빠, 문을 열어주세요

입김이 모락모락 올라가

얼어붙은 하늘을 녹이고

하늘에 걸린 발가벗은 새도 끼룩끼룩,

하이디처럼 미소를 띠지 않나요?

기러기는

마르코폴로 마르코폴로

저는 모험가가 되고 싶어요

그러니 아빠, 제발 문을 열어주세요

그러지 않으면 저는 새가 되어

하늘에 걸릴지도 몰라요

 

강이 얼어붙고

신발이 솜 깊숙이 파묻힌다고 해도

사랑하는 아빠

문을 열어주세요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