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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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우거진 숲 깊은 산속에서

서로의 몸을 찌르며 햇빛조차 보지 못하도록 가지를 드리운다

여기는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성장 경기장

호루라기 소리 대신 앳된 울음소리에서 싸움은 시작한다

우리의 뿌리에서는 단단한 발톱이 솟아오르는 중

서로를 해치기 위한 애틋한 발길질들이 나뒹구는 숲속

산신령님 제 말이 들리신다면 제게 날카로운 이빨이라도 몇 개 만들어주세요

숲에서 가장 으뜸가는 나무가 될게요 약속해요

 

그러자 옆에서 들려오는 말 너 그거 아니

이 땅의 칠할이 우리같은 나무들로 득시글거려

벌레와 먼지들 속에서 하루에도 몇만 다발의 가지가 잘려나가고

불 속에 포근히 안겨 제 몸을 태우며 행복한 외출을 떠나는 과정

나는 이제 듣기가 싫어져서 시끄럽다고 소리친다

그리고 따라오는 누군가의 속삭임

언제부터 나무가 소리도 지를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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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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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에서는 방 안이 더 잘 보인다

고로 나는 나를 즐겁게 하는 아픔을 찾고 싶을 때

방 귀퉁이에 가서 웅크려 앉고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곤 하는 것이다

 

방구석에서는 빛나는 표면을 가진 로봇이 더 잘 보인다

단단한 발을 딛고 빌딩마냥 높이 솟은 로봇

선반 위에서 방 안을 훑어보듯 거만한 자세로

방의 주인인 나마저 내려다보고 있다

 

방구석에서는 낡아 헤진 헝겊 인형들이 더 잘 보인다

일어나지도 못해서 찬 바닥에 등을 대고 살며

초롱초롱한 플라스틱제 눈으로 천장만을 보다가

끝내는 먼지와 함께 숨쉬게 된 것들이다

 

방구석에서는 모든 게 적나라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유일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내 등 뒤의 벽에 나 있는 창문이다

나는 굳이 고개를 돌리려 애쓰지 않는다

내 좁은 방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창문을 보는 순간 느껴질 너무 많은 고통에

정신을 잃고 향락하게 될까봐

조금은 두려운 것이다, 나는 그렇게 두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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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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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가 멍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책상은 더러웠다. 그리다 만 장난감 도안들과 부러진 연필심들이 미카의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미카는 흑연이 묻어 거뭇한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새하얀 비듬이 어깨 위로 떨어졌다. 미카는 새삼스레 짜증이 났다. 모든 것에 싫증을 느꼈다. 책상 한 켠에서 눈치를 보며 숨어있는 사탕 껍질들조차도 도무지 봐 줄 수가 없었다. 미카는 온갖 종이들을 다 구겨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지금 미카가 느끼는 이 증오스런 감정들은, 모두 오늘 아침의 회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미카는 장난감 회사에 다녔다. 그 중에서도 그녀는 장난감을 구상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와 같은 부서의 디자이너들은 이 주에 한 번 큰 회의를 가졌다. 그들 자신이 떠올린 장난감의 아이디어에 대해서 발표를 하는 시간이었다. 미카는 십 이 년 차였지만 매일 그 회의에 발표자로서 참석했다. 그러나 아무리 연차가 쌓여도 그녀의 발표 공포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도 미카는 손을 가만히 두지 못했고,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많이 떨렸다. 그래서 미카는 오 분 만에 ‘빠꾸’당했다. 아침 시간의 그 회의 이후로 미카는 계속 우울했던 것이었다. 문득 심통이 난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지만, 그건 그저 저 자신이 아직도 철이 들지 않았다는 생각에서 나온 반쪽의 자기위로였다.

 

장난감 회사. 그 곳은 미카의 직장이었다. 장난감같은 회사라는 게 아니라, 또는 장난감으로 이루어진 회사라는 게 아니라, 그냥 장난감을 만들어 파는 회사였다. 컴퓨터 회사에서 컴퓨터를 만들고 과자 회사에서 과자를 만들 듯 장난감 회사에서도 장난감을 만들었다. 미카의 일인 장난감 구상은 그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였지만, 미카는 자신이 하는 일이 가치있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껍데기는 꽤 그럴듯했다. 그녀는 손가락이 검게 물들만큼 많은 양의 도안을 그렸고, 엄청나게 많은 양의 생각을 해냈다. 거의 치사량의 생각을 해야 했다. 그래도, 생각이 없을 때 고질병처럼 밀려올 불안을 상상하면 차라리 쉴 새 없이 생각하고 일하는 게 나았다. 그래서 미카의 손은 언제나 까맸다. 사람들은 미카에게 멋있다고 말했다. 그녀가 아직도 열정을 잃지 않는다는 게 사람들의 눈에는 꽤 대단하게 보였던 듯 했다. 실제로 미카는 신입사원들보다 더 바쁘게 일했다. 그럼에도 미카가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때마다 그들의 말을 잘근잘근 씹어넘겨야 했던 이유는 왠지 모를 혐오감 때문이었을 것이었다. 사람들은 미카의 앞에 선 거대한 벽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미카 앞의 두꺼운 벽은 장난감을 닮았다. 분홍색과 파랑색으로 뒤덮인 벽 앞에 서면, 미카는 장난감 나라 속의 인형이 되었다. 미카는 그 플라스틱 벽 안에 어떤 것이 들어차있는지 잘 알았다. 그 안에는 잔뜩 엉킨 검은색의 전선들이 있을 터였다. 누가 장난감 안에 그런 것들이 들어가게 허락했냐 물으면, 미카는 답할 말이 없었다. 장난감은 원래부터 그랬다. 구태여 허락을 받을 필요도 없이 장난감 안에는 전선이 들어가는 게 당연했다. 번쩍번쩍하고 그럴듯한 겉모양을 위해서는 전선이 꼭 있어야 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굳이 그 안을 열어보지 않을 뿐이었다. 미카는 갑자기 토기가 밀려드는 것 같았다. 좀 역겨웠지만 괜찮았다.

 

 

 

회사가 끝나면, 미카는 아들을 데리러 갔다. 미카의 아들은 유치원 종일반에 다녔다. 아들은 유치원에서 그림을 그렸고 운동을 했고 노래를 불렀다. 아들은 항상 밝았다. 미카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유치원으로 들어서면, 아들은 빠르게 뛰어와 미카를 안았다. 아들은 곧 자신의 서랍에서 스케치북을 꺼내어 그 날 그렸던 그림을 엄마에게 보여주었다. 아들은 항상 선명한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렸다. 놀이터에서 노는 친구들의 모습, 나무에 앉아있던 작은 참새의 모습, 높은 채도의 색채는 생기가 넘쳤다. 미카는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그 작은 손으로 열심히 그림을 그렸을 것을 생각하면 대견하기도 했다. 선생님은 아들을 칭찬했다. 아들은 아주 착하고 말도 잘 듣는다고 했다. 미카는 미소지었다. 그녀는 졸리다며 투정을 부리는 아들을 안아들고 차 안에 태웠다. 아들이 졸고 있었다. 아들이 태어난 후로부터 칠 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갓난아기 때의 얼굴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신기했다. 아마 아들이 나이가 들어서 미카보다 키가 커지고 목소리가 굵어져도 그녀는 아들에게서 분유 냄새를 맡으려 할 것이었다. 아들의 몸에 묻은 초콜릿 자국을 찾으려 애쓸 것이었다.

 

“엄마, 오늘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아들이 피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미카는 괜스레 미안함이 들어 웃으며 대답했다.

 

“미안해. 엄마가 일이 좀 있었어.”

 

아들도 미카가 일을 하고, 그 일 때문에 늦게 온다는 것쯤은 알았다. 아들이 궁금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아들은 다시 질문했다.

 

“무슨 일인데? 난 엄마가 일찍 왔으면 좋겠어.”

 

미카는 멋쩍게 웃었다. 미카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웃음을 터뜨리는 일 뿐이었다. 엄마가 미안해. 내일은 더 일찍 올게. 미카가 말했다. 아들은 여전히 엄마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랐지만, 아들의 목표는 그걸 알아내는 게 아니었다. 엄마가 일찍 오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들은 미카의 약속을 듣고 다시 잠에 빠졌다.

 

 

 

미카와 그녀의 아들이 집에 도착하자, 미카의 딸은 치킨을 먹고 있었다. 미카가 언제 시켰냐고 물었다. 딸은 시큰둥한 얼굴로 미카가 오는 걸 보더니, 하도 안 오길래 치킨 시켜 먹고 있었어, 라고 말했다. 미카는 딸의 옆에 앉았다. 아들은 눈을 반짝거리면서 저도 먹고 싶다는 눈치를 보냈다. 딸은 잠시 아들을 째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제일 작은 치킨 조각을 손에 들려 주었다. 아들은 조금 실망한 표정이었지만 맛있게 치킨을 먹었다. 미카는 아이들의 옆에 앉아 두 아이가 치킨을 먹는 것을 보았다.

 

“엄마, 오늘 회의 있다고 하지 않았어?”

“응.”

“어땠어? 잘 했어?”

“응. 잘 했어. 엄마가 우리 유정이랑 유준이 응원 받고 힘내서 잘 했어.”

“역시 우리가 엄마를 지켜줘야 한다니까.”

 

그녀의 딸은 능청스런 표정으로 몇 마디를 덧붙였다. 이제 동요 부를 나이는 지났으니까, 엄마 사랑해요 뭐 그런 건 못 하지만, 우리가 엄마를 지켜줄 수 있잖아, 라고. 미카는 맞장구를 쳤다. 미카는 웃었다. 미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카는 딸의 볼을 쓰다듬어주다가 딸의 볼에서 기름진 치킨 냄새가 아닌 싱그런 복숭아 냄새를 맡았다.

 

“그래도 엄마한텐 가끔씩 동요같은 거 불러줘. 엄마는 우리 딸이 노래불러줄 때가 제일 좋더라.”

“에이, 그래도 동요는 좀 그런데…….”

“동요가 좋잖아. 밝고 귀엽고. 너희들한테 딱 어울리는데.”

 

딸은 미카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마지막으로 남은 치킨 조각을 입에 넣었다. 미카는 딸의 컵에 콜라를 따라주었다. 콜라가 넘쳐 옆으로 흘렀다. 사실 그 컵에는 콜라가 가득 차 있었던 것이었다. 주변이 좀 더러워지긴 했지만 닦기만 하면 되었다. 아들이 휴지를 가져왔다. 끈적한 콜라의 자국이 바닥에 남았다.

 

 

 

“그러니까 어제 나왔던 아이디어들을 다 검토를 했습니다. 그 중에서…… 미카 씨의 아이디어는 가장 상투적이고 오래된 것 같습니다. 지금 세상에 토끼 인형 옷입히기 같은 걸 팔으라구요? 배를 누르면 기괴한 소리가 나는 거, 그거 말고 이 인형에 뭐 특별한 점이 더 있습니까? 뭐 그건 특별한 것도 아니죠. 아까 말했듯 상투적이기 짝이 없고 판에 박혔으니까요. 미카 씨가 나이가 좀 있는 건 맞지만, 그래요, 그건 저도 압니다만, 그에 맞춰서 더 잘해야 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자꾸 발전없는 모습만 보여주신다면…….”

 

모든 말이 듣기 싫었다. 그녀의 상사는 그녀가 듣기 싫은 말만 골라서 했다. 그의 앞에 서 있는 동안, 미카는 자신의 얼굴이 진흙으로 뒤덮인 것 같았다. 무겁고 차가웠다. 미카는 그의 모든 말을 다 들은 후에야 제자리로 향할 수 있었다. 연필심이 가슴을 확 관통해버린 느낌이 들었다. 제가 몇 번이고 부러뜨렸던 연필심이 이제는 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미카는 낙서를 끄적거리다가 정신을 차렸다. 미카는 더 잘해야 했다. 더 많이 생각해야 했다. 발전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렇게 시간을 때우는 일이 없어야 했다. 미카는 연필을 들었다. 그러나 연필은 유난히 묵직했다. 연필을 들자마자 손에 힘이 들어서, 미카는 연필을 내려놓았다. 결국 미카는 회사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 때의 상태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의 회사는 공장 단지 주변에 위치했다. 제조업계의 회사이다 보니 공장 곁에 있는 것이 유리했다. 일을 하는 도중에 사무실 창밖을 쳐다보면, 공장의 굴뚝에서는 허여멀건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옥상에 올라오니 그 모습이 더 잘 보였다. 굴뚝은 번식하듯 연기를 뿜었고, 연기는 구름의 일부가 된 것 마냥 높은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미카는 한 번도 피워본 적 없던 담배를 피워보고 싶어졌다. 제가 피운 담배 연기도 하늘로 올라갈 것 같았다. 그러나 제게는 담배가 없었다. 당연했다. 있을 리가 없었다. 미카는 텅 빈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그 안에서 연필을 찾아냈다. 담배 대신 연필로 손바닥을 찌르며, 미카는 드넓게 펼쳐진 공장 단지를 관찰했다. 공장 단지는 새까맣고 흐렸다. 요상스럽게도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너무 작아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을 한 명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미카는 제 손을 멈추었다. 미카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공장 단지의 모습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에 든 연필을 꽉 쥐었다. 연필이 따뜻했다. 미카에게도 드디어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 것이었다. 공장. 공장이었다. 공장은 여태껏 한 번도 장난감으로 만들어진 적이 없는 곳이었다. 소방서도, 사무실도, 병원도, 경찰서도, 카페도, 높은 성도, 편의점과 작은 승용차도 장난감이 된 적이 있었지만 공장은 없었다. 미카는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미카는 숨을 고르며 자리에 앉았다. 같은 사무실에 앉아 있던 직원들이 그녀를 흘겨보았다. 미카가 연필을 들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방안지를 가득 채워버릴 듯한 열기였다. 그녀는 단 몇 시간만에 도안을 그렸다. 장난감은 직사각형의 상자 모양이었고 그 안에는 컨베이어 벨트와 각종 절단기들과 기계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미카는 제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미카의 그림은 온통 검은 흑연으로 그려졌지만, 그 순간만큼은 뚜렷하게 빛이 났다. 미카는 제가 그린 도안을 몇 번이고 다시 바라보았다. 미카는 행복했다. 자신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냈다는 게 너무도 만족스러웠다. 미카는 아들과 딸에게 따뜻한 저녁을 차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카는 깊은 자아도취에 빠진 채 퇴근할 때까지 그 안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미카는 그 날 일찍 퇴근했다. 아들과의 약속은 지켜야 했다. 커다란 눈망울로 저를 기다리고 있을 아들이 생각나서, 미카는 더 급하게 악셀을 밟았다. 아들이 제게 무슨 그림을 보여줄지 궁금했다. 그냥 아들이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 날은, 아들의 스케치북이 이상했다. 그 전까지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었다.

 

“엄마, 오늘 쓰레기장 뒤에 숨어있었던 쥐야.”

 

미카는 굳은 얼굴로 아들의 그림을 살펴봤다. 아들은 쓰레기장과 쥐를 그렸다. 그림은 무채색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그 그림에서 유일하게 색이 있는 부분은 쓰레기통이었다. 쓰레기통의 색은 과하게 밝은 하늘색이었다. 그 옆에 작고 째진 눈을 하고 고개를 내민 쥐가 보였다. 어떤 쥐는 쓰레기통의 플라스틱 면을 뚫고 나와 고개를 내밀고 있기도 했다. 미카는 당황을 숨긴 얼굴로 그림 속 쥐의 눈을 가리켰다. 아들이 해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쥐야. 엄마, 나 진짜 잘 그렸지?”

“쥐를, 쥐를 어디서 본 거야?”

“놀이터 뒤 쓰레기장에서. 거기서 쥐가 숨어 있었어. 쥐 집인가 봐. 신기해서 보고 바로 그렸어.”

“쥐는 더러운 거야, 유준아. 손으로 만지면 위험할 수도 있어. 그리고 그렇게 막 관찰하려고 다가가면 안 돼.”

“손으로 안 만졌어. 다가가지도 않았어. 그냥 멀리서 봤는데 신기해서……. 엄마, 내가 잘못한 거야?”

“아니, 네 잘못이 아니야. 아니야. 괜찮아.”

 

그럼, 이게 아들의 잘못이 아니면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소중한 아들의 앞에 벌떡 나타나버린 쥐의 잘못이란 말인가? 아니면 아들이 들고 있던 검정색 색연필이, 쥐의 아늑한 소굴이 되어주었던 쓰레기장이, 혹은 아들을 그 더러운 생물 옆에 있도록 놓아 둔 선생님이 잘못했단 말인가? 미카는 자신의 말을 곱씹으며 다시 생각했지만 답이 나지 않았다. 그림을 그린 것, 그건 잘못이 아니었다. 아들은 호기심에 쥐를 관찰했고, 처음 보는 그 생물체에 이끌려 그림을 그린 것뿐이었다. 그 행동 자체를 나쁘게 보기는 힘들었다. 오히려 아이의 관찰력에 칭찬을 해 줄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미카는 그런 아들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아들의 그림 속 쥐는 유난히 혐오스러워 보였다. 미카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차 안의 분위기는 어제보다 훨씬 더 가라앉은 상태였다. 미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들도 미카의 눈치만 살폈다. 차 안에서 아들이 흘린 땀의 냄새가 펄펄 흘렀다.

 

 

 

씨발, 씨발, 딸이 말했다. 엄마는 일찍 온다면서 매일 늦게 와. 엄마는 약속도 안 지켜. 봐봐, 벌써 여덟 시가 넘었잖아. 엄마는 나쁜 사람이야. 딸이 울먹이며 소리를 질렀다. 미카도 화를 냈다. 유정아, 욕하지 말랬잖아! 딸은 더 크게 소리쳤다. 씨발, 엄마가 뭔데! 나도 이제 열 살이나 됐단 말이야! 나도 이제 십 대란 말이야! 미카는 기가 차서 어이없다는 듯 웃다가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넌 욕하면 안 돼! 누가 엄마 앞에서 욕을 하래! 어디서 배웠어, 그런 말, 어디서 배웠냐고! 딸이 악을 썼다. 어른들은 다 욕하잖아! 왜 나는 안 돼! 아직도 나를 어리다고 생각하는 거야? 엄마! 엄마! 메마른 딸의 등에서 텁텁한 흑연 냄새가 났다. 미카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녀는 곧바로 화장실에 들어가 변기에다 구토를 했다. 엄마의 돌발 행동에 놀란 아들이 엄마에게 다가와 미카의 다리를 부여잡고 울었다. 엄마, 괜찮아? 이게 다 누나 때문이야! 누나가 우리 엄마를 힘들게 했어! 방 안에서 딸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왜 나한테만 그래! 엄마는 매일 날 어린 아이로 봐! 난 어린 아이가 아니란 말야! 난 초등학교 삼학년이고 내 아래에는 일학년과 이학년도 있단 말야! 난 혼자서 치킨도 시켜먹을 수 있단 말이야! 미카는 역겨움을 참을 수 없었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까지 토사물을 뱉어 냈다. 징그러운 냄새가 제 입 안에서 풍겼다. 그러자 다시 토기가 밀려 왔다.

 

 

 

우울한 밤도 결국에는 지나간다. 수없이 우울한 밤이 지나갔다. 밤이 지나면 낮이 온다. 장난감 세상이라면 하루 종일 밝은 낮이겠지만, 여기는 현실이라 밤과 낮이 있다. 그렇게 가차없이 밝아진 아침을 또 수없이 맞았다. 이 주만에 회의가 열렸다. 미카가 발표를 시작했다. 손이 떨렸고 목소리에는 자신이 없었다.

 

“지금껏 공장이라는 소재는 장난감에서 단 한 번도 쓰인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이번에 구상한 이 장난감은 그 공장을 주제로 함으로써, 아이들에게 더 넓은 공간을 보여줍니다.”

 

그러자 그녀의 상사가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색이 너무 딱딱하고 아름답지 않군.”

 

미카가 변명했다.

 

“색은 바꾸면 됩니다. 스케치로만 그린 거라서, 정확히 색을 정하진 않았습니다.”

 

그녀의 상사 옆에 앉아있던, 안경을 쓴 여자가 말했다.

 

“모양이 너무 각져 있어서, 아이들의 호기심을 부추기진 못할 것 같군요.”

 

미카는 또 변명했다.

 

“이 위에는 예쁜 모양도 달릴 겁니다. 무늬도 넣을 겁니다. 아직 스케치 단계라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그 여자의 옆에 있던 주걱턱의 남자가 말했다.

 

“왜 굳이 이곳이 ‘공장’이어야만 하는 거죠? 그러니까 제 말은, 미카 씨가 만든 이 장난감이 요정들의 공작소라거나 왕자의 로봇 실험실이었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말입니다.”

 

미카가 짧게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미카의 발표가 끝났다. 미카의 상사는 다시 한 번 더 엄숙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카 씨에게는 도무지 창의성이란 게 보이질 않는군요.”

 

네, 그렇습니다. 새로운 것, 창의성이라는 건 어쩌면,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껏 필요가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미카는 저를 침범하는 생각을 받아들이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를 지켜보던 상사의 표정이 더 나빠졌다. 안 나갑니까? 미카는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회의실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요정들의 쿠키 공작소.

 

미카는 제목을 적었다. 그 장난감의 제목은 제 이름의 유래를 떠올리게 했다. 미카. 미카는 본디 천사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라고 했다. 왜 제가 천사의 이름을 갖게 됐는지는 몰랐다. 천사처럼 살으라는 그런 의미였을 것이라고 미카는 짐작했다. 그녀는 천사의 이름을 갖고 태어났다. 그래서 그녀는, 천사가 됐었던가. 천사는 무슨 일을 하는가. 제가 어릴 적 읽은 동화에 나온 천사들은 전부 아이들을 지켜주고 악마와 싸우는 일을 했다. 그래서 미카는 천사가 되어본 적이 있었던가. 아이들을 지켜주고 악마와 싸워 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 악마가 곁에 온 것을 알아차린 적은 있었던가. 미카의 버려진 뜻이 미카의 장난감 안으로 흡수된다. 나름 달콤했던 그 이야기를 미카의 장난감이 삼켜버린다. 물론 미카는 어른이라서, 단 걸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미카는 또 다시 자신에 대한 위로를 시작한다. 애초부터 나는 싫어했던 거니까. 내겐 필요가 없었던 거니까.

 

고소한 반죽 냄새가 공작소 안에 퍼집니다. 공작소의 한 켠에는 초콜릿과 체리와 색색깔의 스프링클들이 모아져 있습니다. 요정들은 작은 날개를 갖고 있어서, 공작소 안을 날아다니며 쿠키를 만듭니다. 하트 모양 뱃지를 단 요정들은 노릇하게 구워진 쿠키 위에 딸기 크림을 얹습니다. 새콤하고 부드러운 향기가 퍼지면, 입 안에서 침도 꼴깍 넘어갑니다. 파란 모자를 쓴 요정들이 쿠키를 포장합니다. 흰 레이스가 달린 상자 안에 쿠키를 넣고 이 선물을 받을 착하고 예쁜 어린 아이를 위해 그들은 날아갑니다. 여러분도 곧 요정들이 만든 맛있는 쿠키를 드실 수 있을 거예요!

 

제가 만든 장난감의 짧은 설명을 쓰며, 미카는 한숨을 쉬었다. 미카는 도안을 그려 다른 부서로 보냈다. 그 부서에서는 장난감의 모형을 만들어 줄 것이었다. 일이 처리될 때까지 자신은 좀 쉴 수 있을 것이었다. 한층 더 가벼워진 몸으로, 미카는 잠에 들기로 했다. 아들의 쥐 그림도, 딸의 욕짓거리도 더는 생각나지 않았다. 미카는 편안했다.

 

 

 

삼 일 쯤 지나 모형이 도착했다. 미카는 장난감 모형을 차 안에 실었다.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미카는 아들을 차 안에 태우고, 집에 가서 그것을 보여주기로 했다. 아들에게 먼저 보여주면 아들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누나에게 실없는 자랑을 시작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미카는 모형을 상자 채로 집까지 들고 왔다.

 

미카가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들이 동그래진 눈으로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미카는 한껏 익살스런 미소를 띄고선 상자를 열었다. 예쁘고 산뜻한 장난감 모형이 상자 안에서 나왔다. 아들은 큰 소리로 환호하며 장난감을 쓰다듬었고, 딸은 어정쩡한 얼굴로 그 광경을 쳐다봤다. 미카는 장난감을 가리키며 딸에게 어떠냐고 물었다.

 

“엄마, 이건 정말 멋지지만 내가 갖고 놀기에는 너무…… 작고 유치한 것 같아.”

 

미카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는 그녀의 아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유준아, 너는 어때? 미카는 힘없는 목소리로 아들에게 물었다. 아들은 상기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짜 예뻐! 근데 엄마, 여기 쓰레기통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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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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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에게 사랑받은 땅

저를 거스르는 물기 따위

모두 증발시키겠다며

햇살은 모래알 틈을 핏빛 양달로 물들였다

 

간혹 대지의 평화에 매료된

젊은 여행자들의 발자국이 보였고

낙타의 느릿한 걸음 아래

흙 위의 평화는 영원할 듯했다

 

그러나 여기는 서늘한 밤

무엇이 그 땅을 이렇게 만들었나

황량한 침묵을 간직한 세상이

낮의 체온을 잃고 죽어가는 순간에

해는 왜 그 땅을 외면했는가

 

밤새 바람이 땅을 난도질했다

해에게 사랑받아 모든 것을 잃었던 땅

뼈다귀만 남아 해쓱해진 모래알들이

소리 없이 잠들어가는 그곳은

사막이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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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준은 그 애를 아파트 단지의 쓰레기장에서 발견했다. 그 애가 쓰레기장 구석에 몸을 구부리고 앉아있지 않았더라면, 선준은 그 애가 세상에 있는 줄도 몰랐을 것이었다. 무심해보이긴 하지만, 새로운 불운의 형태를 굳이 쓰레기장에 내려앉은 소년으로 상상해 볼 필요는 없었다. 선준이 고약한 냄새를 맡지 않으려 숨을 참고 쓰레기 봉투를 던지고 있을 때, 그 애가 몸을 일으켰다. 그 애는 조그만 머리를 쓰레기통의 질펀한 옆면에다 그대로 박았다. 아이는 잠에 취한 듯 휘청거렸다. 선준은 그 아이에게 다가가 주소와 집 전화번호와 재학 중인 학교의 이름 따위를 물었지만, 그 애는 아무 것도 모르는 듯 했다. 그 애는 해쓱한 얼굴로 말했다.

 

갈 곳이 없어요.

 

할 말이 없었다. 그 말은 선준이 도망칠 수 있는 기회조차 앗아갔다. 계속 묻다가 대답이 없으면 그냥 가려고 했던 선준이었다. 그러나 사정없이 찢어진 아이의 바짓단이 눈에 들어왔고, 그대로 놔뒀다간 기절할 것 같은 핏기 없는 얼굴이 보였다. 경찰서에 데려다 줄까? 선준이 묻자 아이는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경찰서에 가는 게 나을 거야. 너를 도와주실 수 있을지도 몰라.

안 돼요. 경찰서에 가 봤자…… 저는 아무 것도 없어요. 저를 내쫓을 거예요.

 

선준은 난처했다. 하지만 이내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다. 평생 처음 본 낯선 사람을 집으로 들인다는 건 불쾌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체념하고 뒤를 돌면 다음 날 아이의 얼어버린 시체가 쓰레기장 한 쪽에 남아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그렇게 되길 바랐다는 듯, 아무런 반항 없이 끌려 왔다. 아무 것도 모르는 그 애는 그 애가 모르는 것들로 가득한 선준의 집으로 들어섰다. 아이의 표정은 평온했다.

 

어쩌다 저 애를 들였을까. 선준이 새 집으로 이사 온 지 딱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새 집은 전에 살던 집보다 좀 더 넓었고, 화장실을 빼고도 방이 두 개나 있었다. 무엇보다도 회사와 가까웠다. 그래서 이사를 가면 모든 일이 잘 풀릴 줄 알았다. 회사와 집과 덜컹거리는 지하철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선준의 일상 중 가장 중요한 곳은 집이었다. 집을 옮기겠다는 과감한 결정을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모든 것에 서툰 선준이 유일하게 어깨를 펼칠 수 있는 곳,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혼자만의 자유를 가질 수 있는 곳. 조그맣지만 안락한 나의 집. 선준이 몇 년 전부터 바라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저 애를. 선준은 아이를 쳐다봤다. 아이는 바닥을 보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감정은 평화로운 뇌 속을 비스듬히 지나가는 지진과 비슷했다. 선준도 그걸 알았다. 처음에는 동요하지만, 빠르게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감정이 지나간 후, 선준의 앞에는 거대한 쓰레기 밭이 생긴다. 진짜 지진이라도 났던 것처럼 마음이 황폐해지곤 한다. 방금 전에도 어떤 감정이 찾아왔었다. 리히터 규모 불분명. 감정의 이름은 동정심이었다. 머리 꼭대기를 점령했던 동정심은 그 애의 손을 잡고 집의 문을 열어줬고 그래서 이 집엔 그 애가, 그 남자애가 있었다. 후회해도 변하지 않았다. 선준은 또 하나의 문제를 제 팔로 직접 껴안은 셈이 되었다. 불길했다. 뒤를 돌아 남자애를 쳐다봤다. 그 애는 하얀 발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뭐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래도 우리가 좀, 갑작스럽긴 하지만, 한 집에서 살게 됐잖아. 그렇지?

 

그 애가 고개를 들었다. 아이의 머리카락은 덜 자란 식물의 뿌리처럼 힘없이 들렸다. 아이는 말 없이 눈을 끔뻑였다. 선준은 최대한 다정하게 웃으려 노력했다.

 

그러니까 뭔가, 그래도 아는 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무슨…… 말씀이세요?

네 이름이라도 알아야지.

 

사실 선준은 그 아이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진 못했다. 그 애의 이름을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선준은 하루 정도 그 애를 집에서 재워주고 나면 내보낼 작정이었다. 그건 낯선 이에게 베풀 수 있는 최선의 호의였다. 그 이상은 동정심도 발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가 무례하다는 생각에 분노하게 됐다. 실제로 화를 내진 못했지만, 호의를 권리처럼 누리려는 사람은 어떻게든 피하는 쪽이었다. 그러나 그 애는 표정 없는 얼굴로 멀뚱히 선준을 보았다. 이 집에 온 것이 선준의 아량 넓은 행동이었던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듯 했다. 답답했다.

 

그래. 대답 안 해도 된다. 근데 내가 내일 회사에 나가서 말이야. 그 때까지는 네가 집에서 나가줘야 할 것 같아.

그렇지만 저는…….

너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널 믿어줄 순 없어. 나는 네 이름도 몰라.

아무 것도 안 할게요. 정말 아무 것도 안 건드리고 있을 수 있어요. 전 더 갈 곳이 없어요.

 

잠깐 기시감이 들었다. 그러나 선준은 그 애가 집에 들어오기 전부터 갈 곳이 없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다시 그 쓰레기장 앞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침내 결정을 했다. 그 애가 어떤 아이든, 문제만 일으키지 않으면 됐다. 그리고 그 아이는 최악의 상황을 벌이기엔 많이 연약해 보였다. 아이는 선준의 옆에서 느릿하게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에게 유예 판정을 내렸다. 며칠동안은 더 집에 있어도 된다는 것이었다. 선준은 그 애에게 옷을 내어 주고 안방으로 들여보냈다. 그 애는 무릎을 다 펴지 못하고 구부정하게 걸었다. 괴물이 침을 삼키듯, 그 애가 문을 닫는 소리는 둔탁하고 짧게 퍼졌다. 선준은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다. 결국 원점이었다. 어쩌다가. 내가 어쩌다가. 선준은 텔레비전을 틀고, 채널을 돌리다 잠이 들었다. 실소와도 같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회사였다. 눈을 뜨자마자 옷을 챙겨 입고 양치질을 했다. 다른 건 신경 쓸 새도 없이 지하철 역을 향해 뛰었다. 아침의 젊은 직장인들은 도로를 거슬러 가는 구급차들보다도 바쁘다.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울리며, 빨리 가지 않으면 제가 죽는다는 생각으로 뛴다. 선준은 십 오 분 정도 지하철을 타고 사람들 틈에 눌리며 차에서 내렸다. 출근 시간은 아주 조금밖에 단축되지 않았다. 가까운 곳으로 이사했다고 자랑했던 말이 무색하게, 선준은 헝클어진 머리와 축 쳐진 넥타이를 하고 회사에 나타났다. 선준을 대하는 상사들의 태도도 여전했다. 갑작스런 변화는 기적적인 성공 스토리에나 있는 일이었다. 회사에 와서 선준이 가장 먼저 마주한 건 빈틈없이 서류가 쌓인 자신의 책상이었다. 불쌍한 내 책상. 가끔 선준은 그의 상사들이 제 책상 위에서 블록 쌓기 놀이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쌓는 게 블록이 아니라, 건드려도 쓰러지지 않는 파일이라는 점에서 확실히 달랐지만.

 

선준 씨. 지금 별 일 없나?

 

선준의 상사가 그를 불렀다. 선준은 대답 대신 상사의 옆으로 가서 섰다. 상사는 선준을 보지도 않은 채 눈썹을 찡그렸다. 무안해진 선준이 짧게 대답했다.

 

부르셨어요?

그게, 우리 회사에서 봉사활동을 신청했다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신입사원들이 가는 게 좀 좋지 않을까 해서.

아…….

요즘에 뉴스 보면 많이 나오잖아, 그런 거. 사회 환원인가 뭔가 해서. 봉사활동 했다고 기사라도 몇 편 나면 회사 이미지도 좋아지겠지 해서 신청한 모양이야. 노숙자 점심 배식, 그런 건가 봐. 우리같이 늙은 사람들이 그런 델 갈 순 없으니까.

 

상사는 자신의 책상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그는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는 듯 조용히 선준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게 더 큰 압박이 되었다. 선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모니터에 펼쳐진 통보 형식의 봉사활동 안내문을 살폈다. 안내문은 상사의 손에도 들려 있었다. 일찌감치 인쇄해 뒀던 듯 했다. 거절할 수 없었다.

 

다음 주 수요일이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래. 아마 버스를 대절했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 표정 좀 펴고.

 

상사가 입꼬리를 비죽였다. 선준은 상사가 건넨 종이를 받아들고 자리로 갔다. 의자에 앉아 종이를 훑어보자 새삼스럽게 자신이 한심해졌다. 학생 때 억지로 채웠던 봉사활동 시간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머리가 아팠다. 선준의 선행은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자신이 입는 피해를 피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적당한 선행 정도면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선준을 옥죄어 오는 상황들은 마치 그를 성인聖人으로 만들겠다는 양 온갖 친절을 요구하고 있었다. 요즘에 죄를 많이 지었던가. 고해성사의 보속이 끝없는 선행이었던가. 선준은 종이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눈치를 보면서도 일찍 퇴근했다. 피곤했다. 상사는 선준에게 자신의 책임을 떠맡긴 게 미안했던지 여섯 시의 퇴근을 허락했다. 버스 좌석에 앉아 피로를 쫓으려 애쓰며, 집에 가면 그 애가 있다는 게 기억이 났다. 그러자 불안감이 허리를 쑤셨다.

 

오늘 집에서 뭐 했니.

 

현관문을 열자마자 한 말이었다. 아이는 공손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선생님에게 혼난 꼬마처럼 등을 움츠리고 앉은 꼴이 영 보기 싫었다. 차분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지만, 그 애가 대답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선준은 양말을 벗어 세탁기 안에 던져 두고 소파에 누웠다. 바람이 다 빠진 소파가 선준의 쪽으로 약간 내려앉았다. 남자애는 선준과 같은 소파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불편하다는 눈이었다. 선준은 당장이라도 여긴 내 집이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 애의 얼굴에 두려움이 서려있는 걸 알아챘다. 그 불편함을 담은 눈빛도 선준의 같잖은 오해였을지 몰랐다. 남자애는 어제 저녁에 침실에서 끌어왔던 이불을 코 밑까지 끌어올린 상태로 대답했다.

 

그냥 자다가…… 잤어요.

밥은 어떻게 했니.

별로 배가 안 고파서 안 먹었어요.

난 너 병 걸리게 할 생각까진 없다.

병 안 걸려요. 괜찮아요.

밥은 챙겨 먹어. 라면 끓일 줄 알아?

네.

그럼 라면이라도 끓여 먹든지 냉장고에서 반찬이라도 좀 꺼내 먹든지 하고.

 

선준은 그렇게 말하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러나 냉장고 안의 공간을 채우는 건 달걀 껍데기 색의 불빛과 거의 텅 비다시피 한 반찬통들 뿐이었다. 뭘 사 두기라도 해야 하는지 잠시 고민했다. 남자애는 밋밋한 표정으로 선준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애의 시선을 피하고 냉장고 문을 닫았다. 기계 안에서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뭐 만지고 그러진 않았지?

네.

 

대화는 곧 끊겼다. 시간은 잠을 참지 못하고 아주 더디게 걸어갔다. 초침의 움직임이 느려져갔다. 늪을 통과하는 기분이 들었다. 늪에 가 본 적이 없는데도.

 

어릴 때 정글을 꿈꿨던 적이 있었다. 짧고 단조로운 동요를 부르며 탐험가가 될 거라고 자랑스레 말했었다. 그러나 지금 늪은, 정글은, 오지는, 까마득한 숲과 산은 선준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곳에 가면 선준은 혼자가 되어야 한다. 모든 생물체들이 선준의 적이 된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모두를 적으로 보면서라도 살아야 했다. 현대 사회를 흔히 사람들의 정글이라 부른다. 도시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생명을 입증하는 불빛들이 꽉 차 있는데, 사람들은 쉽게 친구가 되지 못한다. 친구라는 터울 안에서 서로를 노리고 있는 사람들도 많고, 진짜 친구를 만났지만 그 관계가 지속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선준은 젊지만 느리고 건장하지만 할 줄 아는 게 없는 어리석은 탐험가가 됐다. 그러나, 선준의 존재를 아예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도 그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정글은 그런 곳이었다. 하루하루를 자신이 그곳에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곳. 그러자 꿈은 병들었다. 의미가 사라졌다. 선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추억은 없었다. 어차피 지나가버린 시절의 환상이 주는 것은 단시간의 행복일 뿐이었다. 그런 건 뒤로 제쳐둬도 상관없었다.

 

선준의 손에 아이의 발가락이 닿았다. 그 와중에도 발동한 냉점의 감각은 아이의 피부가 얼어붙을 정도로 차갑다는 걸 알아챘다. 선준이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 애는 눈을 감고 있었다. 숨소리가 얌전히 들리는 것을 보면 자고 있는 듯 했다. 선준은 아이에게 더 두꺼운 이불을 덮어 주었다. 잘게 떨리는 아이의 속눈썹이 애처로웠다. 이 아이도 언젠간 긴 여행을 떠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아이는 이미 그 여정을 시작했는지도 몰랐다. 선준은 생채기가 가득한 아이의 발을 쓸었다. 아이는 두 팔 가득 이불을 껴안고 자고 있었다. 그 애는, 꼭 사람의 몸체에서 함부로 떨어져나간 살덩이같았다. 생명력은 없으나 피와 살이 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살아야만 하는, 그 애와 선준은 몹시도 닮았다. 아이의 등이 불편하게 구부러졌다. 선준은 아이를 고쳐 눕히고서는 침실로 들어갔다. 아주 작은 소리조차도 나지 않는 밤이었다.

 

 

 

봉사활동을 하는 날이었다. 선준은 다른 때보다 조금 더 일찍 나왔다. 버스가 회사 앞의 주차장에 들어서 있었다. 선준은 버스에 올랐다. 삼십 분 쯤 지나 버스는 어느 초등학교 앞에 도착했다.

 

노숙자들의 배식소는 방학 중인 초등학교의 급식실이었다. 봉사활동에 온 사람들은 그나마 얼굴이 익숙한 입사 동기들과, 그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학부모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들 뿐이었다. 그녀들은 요즘 젊은 사람들은 참 착하기도 하다며 웃어보였다. 선준도 함께 웃으려는 노력을 하며 그녀들이 주는 앞치마와 비닐장갑을 받아들었다. 주변에서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녀들은 자기 아이들의 급식실이 더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일종의 감시 차원에서 온 듯 한데도 아주 익숙하게 행동했다. 그녀들의 태연한 행동과 비릿한 말들 사이의 간극이 날선 이질감을 불러일으켰다. 씁쓸함을 숨기며, 선준은 뒤로 돌았다. 앞치마의 끈을 등 뒤로 묶고 비닐 장갑을 꼈다. 스테인리스 솥에서 하얀 김이 솟아나오고 있었다.

 

배식이 시작됐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는 노숙자들의 모습은 대부분 비슷했다. 그들은 검은 모자, 혹은 헤져서 검게 보이는 모자를 쓰고 두꺼운 점퍼를 입었다. 그들의 불룩한 주머니 위로는 목장갑의 손가락이 튀어나와 있었다. 선준이 맡은 일은 식사 시간 후 뒤처리였다. 노숙자들은 나름의 질서가 있었기에 청소에는 그리 큰 힘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선준은 이 시간이 어서 끝나기를 바랐다. 성실하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타의에 의한 봉사를 한다고 해서 뿌듯함이 느껴지진 않았다. 학생 때도 마찬가지였고 지금도 그랬다.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두터운 지루함이 다가왔다. 한 사람이 수십 번 복제된 듯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너무도 닮아 있었다. 폐물을 처리하는 공장에 온 기분이 들었다. 모든 게 다 버려진 것처럼. 숟가락도, 식은 반찬도, 김이 피어오르는 국그릇도, 한 건물 전체가 폐기된 듯 했다. 그 안에 있는 선준 자신마저도 버려진 것 같았다. 사람들은 모두 똑같이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고 부대끼며 앉아있는데도 말 한 마디 나누지 않았다. 국에서 고소한 냄새가 퍼져나왔음에도 배고픔을 느끼지 못했다. 모든 것의 의미가 사라진 것처럼, 선준은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래도 선준은 물수건을 집었다. 벌건 양념과 밥알과 누런 국물이 묻은 탁상을 닦았다. 기계적으로. 공장스럽게. 그러자 그들 모두와 야릇한 유대감이 들었다.

 

아저씨, 맛있으세요?

 

선준은 유독 천천히 밥을 먹는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점퍼에 달린 모자로 이마까지를 가리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자, 거뭇한 얼굴 색과 그 위의 진한 주름들이 보였다. 그의 눈썹은 하얗게 새었고 얼굴에선 질척한 땀이 흘러내렸다. 선준은 그런 모습을 무시하려 애썼다. 자신이 착한 청년으로 보이길 원했던 것이지, 제 앞에 앉은 사람을 추악의 완전체로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선준은 자신이 그들과 닮아보인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은 폐기되었더라도 자신은 생생해야 했다. 그 안에서 의미를 가져야만 했다. 그래야 선준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음식이 참 맛있네. 아주 착한 사람이야.

 

그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문장에는 주어가 생략되어 있었음에도, 선준은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웃었다. 그는 그런 말이 선준을 떠나게 만들 줄 알았었는지 선준을 무시하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는 숟가락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다 식은 국물이 그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아저씨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그러나 선준은 한 번 더 말을 걸었다. 이것 역시도 일종의 동정심이 만들어 낸 거짓 선행인 듯 했다. 어쨌거나 선준은 그 말을 자신의 입으로 뱉었다. 노숙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선준을 선명하게 쳐다봤다. 아까와 같은 낯이었음에도 사뭇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진지한 표정에 되레 긴장을 한 건 선준이었다.

 

이름 없어.

네?

 

선준이 되물었다. 노숙자는 약간 성난 표정으로 또렷이 말했다. 이름은, 필요, 없어, 나는, 이름이, 없어. 선준은 제 이마가 땀으로 젖은 듯한 착각을 느꼈다. 아까 자신이 그를 보고 추악함을 느꼈듯 노숙자의 눈에도 제가 더없이 추악하게 보일 것 같았다.

 

이름이 왜 필요하지 않아요. 이름이 없으면…….

내 이름을 알아서 뭘 할 건가.

뭘 할 건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냥 저는…….

이름은 더 이상 내게 가치가 없어. 날 찾는 사람도 없고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날 필요도 없어. 사람들은 내가 없어지길 바라고 있겠지. 그러니까 내 이름은, 3호선 X역 5번 출구 노숙자 정도면 충분해.

 

그는 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말투로 얘기했다. 해야 할 말을 잊은 선준은 뒤로 약간 물러섰고, 그 사람은 게걸스럽게 국물을 들이켰다. 선준은 눈을 끔벅였다. 그는 벌써 밥을 다 먹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잔반 처리대 쪽으로 가고 있었다. 주방에 있던 여자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 청년, 여기 흘린 거 있는데 좀 닦아 줘요. 청년은 달려갔다. 그의 손에는 행주와 비닐 봉지가 들려 있었다. 음식을 치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또한, 거기에선, 단지 음식물을 치우기 위한 사람에 불과했다.

 

 

 

봉사활동을 마친 시각은 오후 두 시였다. 선준이 집에 돌아가려고 준비를 하던 참에 회사에서 문자가 왔고, 봉사가 끝나면 다시 회사로 복귀하라는 내용이었다.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야 했다. 그의 상사는 선준을 갈구기에 특화된 인물이었다. 저번에 일찍 가서 밀린 일이 좀 있으니, 오늘 다 처리해야 할 것 같은데. 경악스러운 말이었지만 일을 했다. 아홉 시가 넘은 시각에 회사를 나왔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순간 선준은 자신이 아침마다 내리고 저녁마다 타는 역이 3호선 X역인 것을 알았다. 낮에 봤던 그 노숙자가 생각났다. 선준은 5번 출구 쪽으로 뛰어갔다. 그건 선준의 기준에서 멍청한 일이었지만, 그는 멍청해지고 싶었다. 선준이 바쁘게 달려가자 출구의 계단 아래쪽에 신문지를 깔고 그 날 구걸한 돈을 정리하는 노숙자가 보였다. 선준은 그에게로 뛰어갔다. 노숙자는 사나운 눈으로 선준을 노려봤다. 선준은 숨을 고르고 해맑게 웃으며 노숙자에게 인사했다.

 

접니다. 아까 급식실에서 봤던 청년이요. 아저씨, 기억하세요?

누구십니까.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눴었잖아요. 저, 접니다. 아저씨에게 성함을 물어봤던 사람이요.

죄송하지만, 전 어떤 기억이 가치가 없다고 판단할 때 바로 잊어버립니다. 그 일도 반쯤 잊었지만 아마 나는 이름이 없다고 대답했던 것 같은데. 그게 궁금해서 온 겁니까.

 

그게 궁금했던가. 선준은 다시 멈춰섰다. 자신이 왜 그 노숙자에게로 뛰어갔는지, 지하철 한 대가 지나가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왜 자신은 그에게 간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제 이름을 물어봐준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았다. 불편함을 느낀 것도 아니었고, 한 번 쯤 마주치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거였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의미를 두었던가. 그에게 의미가 있었던가. 상실감이 들었다. 나는 당신에게 의미를 부여한 적이 없어. 당신이 내 의미를 빨아먹은 거야. 선준은 그에게 달려들기 위해 주먹을 들었다. 그리고 그의 팔은 아주 느리게, 다시, 가라앉았다. 노숙자는 한심하단 얼굴로 선준을 바라봤다. 볼 일 없으면 가요. 나도 이제 자야 합니다.

 

그래. 나는 절대로 당신에게 다른 의미를 주지 않을 거다.

당신에게 분노하지도 않을 거고, 당신을 증오하지도 않을 거고, 혐오하지도 않을 거다. 내게 의미가 있는 건…….

 

경쾌한 알림음. 지하철이 오고 있었다. A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A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선준은 지하철 쪽으로 달려갔다.

 

 

 

잘 있었니?

 

선준이 아이에게 인사했다. 자신과 닮은 아이. 자신과 똑같이 탐험가의 꿈을 꾸고, 정글로 뛰어들고, 의미를 찾기 위해 다른 이들과 싸우게 될 아이. 그런 아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일주일 새 아이는 선준과 많이 비슷해졌다. 선준처럼 말했고 선준처럼 걸었고 선준처럼 움직였고 선준처럼 생활했다. 아이의 검은 머리카락을 만지고 눈꺼풀을 쓰다듬을 때 선준은 여물지 못한 저의 어린 시절을 느꼈다. 너는 뭘 생각하고 있니. 선준은 되도록 아이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 자신과 같은 의미를 담고 살고, 성장하는 아이의 모습에서 선준 자신의 모습을 보길 원했다. 선준 자신의 의미가 더 돋보이도록. 나의 의미가 늙을 때까지 성장하고 남의 위에 올라서고 살아남을 수 있도록. 그 아이를 통해서.

 

맞다.

왜요?

혹시 너, 이름이 뭐니?

 

아이의 얼굴 위에서 알 수 없는 감정선들이 복잡하게 얽힌다. 아이는 산뜻하거나 혹은 울음을 삼키거나 혹은 다정하거나 혹은 부드럽거나 혹은 애처로운 얼굴로 선준을 응시한다. 선준은 아이의 대답을 기다린다. 보채지 않는다. 그러자 아이가 입술을 벌린다.

 

없어요.

 

어차피 텅 비어있던 아이다. 태어났다는 이유로 살아야 했던 아이다. 다른 누구에게도 의미가 없었던 아이다. 선준이 아니었다면 영영 잊혀졌을 아이다. 대가를 치러야 했다. 선준에 의해 의미를 가지게 된 아이는 선준에 의해 정의되어야 했다. 선준이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네 이름을 지어줄게.

뭔데요?

선준. 이선준.

그럼 아저씨 이름은 뭐예요?

나는…….

 

선준은 이제 선준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선준의 혀에 선준의 이름이 닿는다. 선준이 웃는다. 선준은 선준을 안는다. 선준은 선준의 목을 쓰다듬으며 고백한다. 그의 이름을. 나는 너와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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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건물에서 X와 Y는 자살을 약속한다.

 

자살의 목적은 없다. 그들이 지금까지 했던 모든 행동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건물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다른 사람들은 X와 Y를 보지 못한다. 창문과 문이 단단히 잠겨 있기 때문이다. 둘은 온전한 둘만의 공간을 얻게 된다. X와 Y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화한다. 둘의 말을 엿들을 사람이 없는데도 둘은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가냘프게 속삭인다.

 

어디가 좋을까?

 

X가 말한다. 그 말은 어디가 죽을 때 가장 편안하겠냐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충격을 받거나 상처를 입지 않는 곳. 마을 주민들이 잘 다니지 않는 외진 곳. X와 Y는 고민한다. 침묵이 시간을 도려낸다.

 

어디서 죽을래?

 

Y가 되묻는다. X는 고려해뒀던 장소들을 막힘없이 내뱉는다. 둘의 간결한 대화가 이상하도록 평화로운 분위기를 조성한다. X는 잠시 눈을 감는다. X는 종종 공상에 빠지곤 한다. 그리고선 의미가 없어진 목표들을 읊는다.

 

나는 어른이 되고 싶었어.

 

X가 말하자 Y가 살포시 웃는다. 허탈한 웃음이다. Y의 웃음소리에, X는 더 깊은 꿈속으로 빠져든다. 마침내 X는 꿈의 중심부, 그 시발점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어른들이 있다.

 

X의 주위를 둘러싼 어른들은 키가 크다. 어른들의 피부는 반질반질하다. X는 어른들의 발 밑에서 잠들었다. 작은 숨이 X의 코에서 흘러나왔다. X는 몸을 살짝 떨었다. 그 행동은 어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어른들은 X의 뺨을 몇 번 두드렸다. X가 깨지 않자, 그들은 X의 등을 세게 내리쳤다. 어린 X는 통각에 민감했다. 참아야 했지만, X는 결국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어른들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X를 일으켰다. X가 울었다. 불안이 집어삼킨 X의 얼굴이 어둠에 뒤덮여 반쪽밖에 보이지 않았다. 반쪽의 얼굴은 짙은 공포로 가득 찼다. 그 얼굴을 보고 소름이 끼친 어른들은 X를 방 안에 집어넣었다. 방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어른들은 X의 눈물을 보지 않았다. 방 안에서, X는 강아지처럼 앓는 소리를 냈다.

 

X는 그 행위가 폭력임을 알지 못했다. 그런 단어를 알기에 X는 너무 어렸다. X에게는 순수한 세상이 필요했다. 어쩌면 X의 어른들도 그걸 원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약간 다른 방향으로, 순수한 X가 완전히 그들에게 순종하도록. 그들이 바라는 모습이 되도록. 마치 잘 훈련된 개처럼. 옆집, 앞집, 뒷집, 아랫집, 윗집에 사는 착한 어린아이들처럼. X는 언어가 결여된 세상에서 자랐다. X에게는 감정을 표현할 수단이 없었다. X가 할 수 있는 것은, 저의 몸 구석구석을 때리는 손짓에 거세게 저항하는 것뿐이었다. 떼를 쓰고 악을 질렀다. 그러면 그 행위를 잠시 중단시킬 수 있었다. 이내 다시 시작되는 손짓을 온 몸으로 막으며, X는 화를 짓눌렀다. 그러나 어른들의 방에서 벗어날 때까지 X는 그 폭력이라는 것이 대체 왜 이루어졌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어느덧 X의 키는 남자 어른이 앉는 의자보다도 더 커졌다. 그러자 X는 어른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X는 점점 X의 어른들과 비슷한 모습이 되어갔다. 식사 시간, 얼어붙은 표정으로 접시를 몇 초간 응시하다 숟가락을 든다. 흰 접시에 놓인 각종 음식을 숟가락으로 몇 초간 휘젓다 입술에 갖다댄다. 음식의 온도를 아주 짧은 시간동안 느끼다가 입으로 집어 넣는다. 어른들의 규칙. X의 습관. X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언제나 저를 때리는 건 어른들이었다. 그러니까 X는, 어른이 되면, 더 이상 맞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굳은 피가 벌레처럼 제 얼굴을 기어다니는 느낌을 더 이상 느끼지 않아도 될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X는 가출했다. 어른의 품을 벗어났다.

 

열 네 살이었다. X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X는 어른이 되어야만 했다. 어른이 되지 않으면 X는 영원히 죽는다. 죽을 것 같았다. X는 흐릿한 목적지가 그리웠다. X의 상상 속 그곳에서는 웃을 수가 있었다. 필사적인 의지와 오기로 엮어 만든 배가 유년기의 방을 떠났다. 어른이 되기 전까지는 배에서 내릴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익사하고 싶어.

 

눈을 번쩍 뜬 X가 Y를 향해 말한다. Y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다.

 

그럼 우리 죽기 전에 소원이라도 다 이뤄보고 갈래?

 

Y가 주머니 안에서 희고 딱딱한, 직육면체 모양의 물체를 조심스레 꺼낸다. X가 눈을 찡그려 그것을 쳐다본다. 담배다. 두꺼운 사탕 막대같은 담배들이 상자를 빠져나온다. 밑바닥이 검다. X는 한숨을 내쉰다.

 

나는 담배 안 피울래. 무서워.

 

어른들은 다 피우잖아. 죽기 전인데, 어른이 된다고 생각하고 피워 봐.

 

이걸 피우면 어른이 될 수 있어?

 

그런 건 아니지만, 어른들은 담배를 피우니까.

 

Y는 반대쪽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낸다. 라이터 안에 든 묽은 기름이 자유롭게 엉킨다. 춤을 춘다. X는 신기한 듯 라이터를 매만졌다. 비싯하게, 탄 냄새가 밴 라이터였다. X는 험악한 표정을 하며 라이터를 Y쪽으로 던졌다.

 

왜, 싫어?

 

Y는 담배에 불을 붙인다. X의 큰 눈이 Y를 의심스레 쳐다본다. Y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담배를 X의 입에 갖다 댄다. X는 고개를 뒤로 돌리다가 제 미간 앞에 자리한 담배를 응시한다. X는 빠르게 담배를 낚아채 입에 문다. 그러나 곧, 기침을 쏟으면서 담배를 내던진다. 차가운 바닥에 내던져진 담배는 불을 되살리려 애쓰다가 빠르게 꺼진다. 연기가 피어오르며 매캐한 향이 교실을 채운다. X는 창문을 열었다. 헛구역질이 나온다. X는 목을 움켜쥐고 토악질을 해 댄다. Y가 X의 등을 두드린다. Y가 띄엄띄엄 말한다.

 

미안. 나도 사실 피워본 적 없어. 우리 아빠 거 훔쳐 온 거야.

 

아빠?

 

어, 그러니까…… 미안.

 

X는 Y의 재빠른 사과를 받아들인다. X는 허무한 표정으로 거의 멀쩡하지만 버려진 담배를 바라본다. 턱을 괸 Y가 열린 창문을 닫는다. X는 말이 없다. Y도 말이 없다. 둘은 조용히 뜬 눈을 반짝이며 새벽의 달에게 시선을 뻗었다. 달은 빛난다. 그러나 그 빛은 해의 것을 훔친 것이다. 해가 달을 비춰주지 않으면 달은 빛날 수 없다. 달은 자랑스럽게 두 어깨를 펼치고 하늘에 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속임수에 불과하다. 해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일들이다. 얌체같은 달. X가 중얼거린다. Y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면 밤의 해는 무엇을 위한 존재인가. 낮에 그토록 빛나던 해는, 밤에는 단지 달 하나를 빛내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가. 해는 버려지는가. 해는 죽어가는가. 마치 우리처럼…….

 

해는 불쌍하다.

 

X도 불쌍하다.

 

Y도 불쌍하다.

 

이제 어떻게 할까.

 

이번에는 Y가 먼저 입을 연다. X는 Y의 안면 근육이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을 쳐다본다. X에게는 문득 북받쳐오르는 것이 있다. X는 울음을 터뜨린다. Y는 X를 위로한다. 당황한 낌새도 없이, 둘은 서로를 껴안는다. X는 Y의 등을 쓰다듬는다. 보드라운 Y의 등이 X의 손에 닿는다. 꼭 아기의 살갗을 만지는 듯한 느낌에, X는 간지러워하며 웃는다. Y도 비싯비싯 웃음을 짓는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 난다고, Y가 일러준다. X는 더 크게 웃는다. 둘은 서로를 꼭 껴안는다. 둘은 점점 더 작아진다. 벌어졌던 상처들이 천천히 아문다.

 

Y는 X의 귓등에 입술을 묻고 고백한다. 입술의 움직임이 X의 뒷목에 그대로 전해져 온다. 나는 어른이었던 적이 있다고. 그러나 나는 한 번도 어른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그래서 아이처럼 살았다고. 어눌한 말씨로 말을 하고, 놀이터에서 온종일을 보냈다고. 방에 드러누워 아이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을 시청하고, 신세를 한탄하고, 크레파스를 들어 그림을 그리며 어른이 되기를 부정했다고. 그러나 저에게 흘러버린 삼십 년을 먹어치울 순 없었다고. Y는 아주 아주 아주 작아지면서 얘기한다. 내가 다시 아이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고, 하지만 이미 나는 어른이 되었다고,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고, 그래서 나는 목적을 잃었다고, 나는 아이로 살 때만 그 목적이 있었다고, 어른이 되었으니, 이제 나의 목적지로 갈 수가 없으니, 나는 완전히 생의 이유를 잃었다고. 그래서 폭력적으로 변해갔다고, 희망을 잃어서, 자신의 발 밑에 엎드린 아이를 때리고, 그 아이에게 질투가 나서, 그 아이가 부러워서, 그 아이처럼 변하고 싶어서. 순종적이고 순수한 아이를 보며 만족을 느껴서, 마치 강아지처럼, 무력한 실험체처럼, 잠든 그 아이를 보면 행복했다고.

 

다시 만나서 반갑구나. 내 아이야.

 

X와 Y는 점점 더 굳게 서로를 끌어안는다. 둘의 몸이 들러붙는다. 끈적한 껌처럼. 손과 발이 사라지고 둥그런 몸체만 남는다. 둘의 웃음소리가 사그라든다. 씨앗처럼 아주 작고 둥그렇게 변한 두 물체가 바닥에 남는다. 조용하다. 적막만이 있다. 사실은 적막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게 사라진다.

 

그렇게 둘의 생은 퇴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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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한 시 오십칠분에는 졸음으로 둔갑한 우울이 손을 내민다. 무진은 까딱까딱 순한 양처럼 그 감정들을 잘도 받아먹고서 뒤늦게야 후회한다. 서른 셋에 목을 뒤덮은 주름살들은 원망스럽다. 창문 밖으로는 가로등이 끔벅거리며 나른하게 길거리를 비췄다. 무진은 창으로 목을 빼놓고 히끅거리며 울다 문을 닫았다. 어지러운 맘이 들어서였다. 차게 식은 이불 위에 누운 후 벌레의 진득한 피가 달라붙은 천장을 보며 잠에 들었다. 제 꿈을 잘 지켜줄 수 있을지, 믿음직스럽지 못한 밤이다.

우울로 이루어진 토지의 기반은 약하다. 그 위에 번듯한 건물조차 세워보지 못하고 번번이 좌절감에 무너졌던 이유다.

쪽방촌 옥탑방을 자신의 터전으로 삼아 살고 있는 무진. 옥상 바닥을 기는 벌레들의 행렬 속에서 가장 큰 생물이 되어버린 무진. 이불에 싸여 밤새 울다가도 새벽 네 시가 되면 일어나 얼굴을 닦고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담담하게 나오는, 무진의 모습. 손등을 뒤덮은 갈라진 피부 사이를 면밀하게 채워주는 익숙한 상처를 가지고, 기념일을 세듯 하루에 하나의 상처는 꼭 붙이고 돌아오는, 그런, 무진. 무진은 도시 변두리의 공장에서 일했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오래된 공장에서 새벽부터 자정까지 일을 하다 고장나기 직전의 버스에 몸을 실고 속으로 느린 노래를 부르며 신세를 한탄하는 게 그의 일상이었다. 무진에게는 낮이 없었다. 언제나 컴컴한 아침에 까마득한 저녁만이 무진을 싸고 돌았다. 해를 그리워해본 적도 있었다. 사실 무진은 기억 속에만 야트막하게 흔적을 남긴 모든 것을 다 그리워했다. 그리움에 익숙해져 과거 속에만 머무르는 인간이 되어가던 무진이었다. 하지만 그리움이란 무진이 탐할 수 있는 감정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래서 무진은 쓸쓸하게 죽어간 애정의 빈터를 그리움으로 장식했다.

 

어느 밤이었다.

달은 아기의 얼굴에 뜬 황달처럼 누런 빛을 하고 있었다. 버스는 막차였다. 힘없는 다리를 앞 의자의 등받이까지 닿도록 뻗어 두었다. 두 다리는 나무젓가락 한 짝을 가지런히 놓은 듯 뻣뻣하다. 시간의 무게에 오랫동안 눌려있던 어깨를 펴며 기지개를 했다. 창 밖으로 수많은 가로등들이 스쳤다. 꼭 달빛과 비슷하게 누르스름한 색이다. 눈을 감았다가 뜨자, 짐짓 시린 느낌이 들었다. 무진은 고개를 숙였다. 오랫동안 해 왔던 억지적인 겸손의 모습으로 그 자세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무진은 고개를 다시 빳빳하게 들고 버스 위에서 함께 낡아가는 시계에 시간을 빼앗긴다. 몇 분 일 초, 몇 분 이 초, 몇 분 삼 초, 숨조차 쉬지 않고 시간은 달린다. 참 이상한 것이다. 잊고 살았던 시간을 의식하게 될 때면 기분이 묘해진다. 그러고선 무색무취의 침울함에 빠져 그 시간들을 보내게 된다. 안녕, 잘 가그라, 일 초, 이 초, 삼 초, 모두모두 안녕. 유령처럼 시간의 그림자가 무진의 뒤에도 드리워진다. 서럽다.

무진은 차가운 볼을 손으로 차례 더듬으며 살을 꼬집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이 볼에 입술이 와닿았을 땐 언제이던가. 외로움과 공허와 겨울 밤이 만든 망령같은 뇌의 움직임에 무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걸 생각해봐야 뭐 하나, 커져가는 것은 내 슬픔 뿐인 걸. 그러나 무진은 계속 그 생각을 한다. 입술이 닿았던 일은, 십 년 전일 수도 있고 그보다 더 아래일 수도 있다. 무진은 생각한다. 애정의 감각이 없는 시대에 입맞춤이란 무의미한 것이라고. 그저 한 사람의 입술과 입술이 닿는 행위. 분위기가 아닌 욕정에 초점을 맞추며, 사람의 뭉텅한 살 일부가 퍽 가깝게 움직이는. 그럼에도 무진은 그 느낌이 그리워서 볼을 만지작거렸다. 목 언저리의 형태 없는 구슬픔이 마음으로 내려앉는 듯 하다.

 

그러는 사이 차는 네 번째 정류장에 도착했다. 길게 늘어진 벤치에 앉은 인간들의 군상은 초라했다. 다 헐거워진 옷을 입고, 오지 않을 버스를 기다리는 동네 바보와, 어른이 호통을 치건 말건 담배를 뻑뻑 피우는 고등학생. 그리고 그 옆에는 붉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있었다. 예쁜 여자였다. 발그레한 입술에 싱그런 미소를 띄고 사랑스런 두 눈알은 생기를 가득 머금고 있다. 무진은 차 뒷문이 닫히기 전에 급하게 차에서 내렸다. 푸석한 제 모습이 영 별로인 걸 알았어도 그 여자를 제 눈에 한번이나마 담아보고 싶었다. 그 순수한 얼굴을, 그러나 매혹적인 표정으로 보는 사람의 꺼진 열정을 다시 타오르게 하는 몸짓을. 무진은 여자의 손목을 건드리는 게 실례라고 느꼈다. 그러나 언제부터 제가 예의와 도덕을 철저히 지키는 모범 시민이었던가. 그런 건 양복 입은 거짓 신사들에게나 붙여주는 게 옳다. 무진은 여자의 가느다란 팔을 쿡 쥐어잡고 제법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제 몸을 허락도 없이 잡아온 무진에, 여자는 놀란 듯 손을 뒤로 뺐다. 무진은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으며 아, 그게 아니고, 저는, 저는, 하며 병신같이 지나간 버스 뒤를 흘겼다. 그러나 이내 여자는 두 볼에 둥글게 솟은 광대를 천진하게 올리며 이번엔 먼저 손을 잡아 왔다. 따뜻한 감촉에 잠시 말을 잃었던 무진이 여자의 얼굴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온통 희고 깨끗해보이는 여자였다. 무진은 의구심이 들었다. 과연 자신이 이렇게 웃으면서 희희덕거려도 괜찮은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안 될 이유야 없었지만 왠지 모를 무거움에 몸이 잘게 떨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무진을 여자는 더욱 잡아끌며, 그럼 당신은 이름이 뭐예요, 하고 넌지시 물었다.

무진입니다. 박, 박무진이예요.

그래? 이 씨였으면 이무진이었을 텐데. 리무진 말이예요, 난 한 번도 타 본 적 없지만 멋있더라. 그 기이이다란 차.

평소였다면 정색을 하며 뒤돌았을 말장난에도 무진은 비싯거리며 웃었다. 그 웃음의 원인은 몇 마디의 말장난보다 그저 아름다운 여자의 존재가 주는 행복이었을 것이다. 여자는 무진을 데리고 강변 위 다리를 걸었다. 겨울의 바람을 못 이긴 채 얼어붙은 강물이 나지막한 숨소리를 냈다. 여자는 무진의 앞을 재빠르게 지나가며 날갯짓을 하듯 가벼운 몸짓으로 뛰었다. 산뜻한 기분이 무진을 가득 채웠다. 여자는 희미한 웃음을 공기 속에 띄워 무진에게로 날리며 말했다. 나랑 같이 있으니까 좋아요? 무진은 정직한 목소리로 네에 하고 대답했다. 가로등이 무진의 벌게진 얼굴을 비췄다. 자기 얼굴 너무 빨개. 추워서 그런지 내가 좋아서 그런지. 여자는 무진의 볼을 멀리서 바라보다 다시 리듬에 맞춰 걸었다. 흥에 취한 무진이 알 수 없는 노래를 중얼거렸다. 여자는 그걸 들으며 좋다고 손뼉을 쳤고 무진은 더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밤이 깊어가는 중이었다.

 

깨어난 곳은 어디인지 모를 버스 정류장이었다. 주위는 여전히 암흑이었다. 밤이 다 가지 않은 것이다. 무진은, 술 한 모금 하지 않았는데도 정신이 몽롱했다. 배 부근이 묵직해서 고개를 드니 고개를 제 상체에 기대고 엎드린 여자가 보였다. 간헐적인 숨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여자는 자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무진은 손으로 여자의 얼굴을 받쳐 주고 천천히 일어났다. 흐릿하게 풀린 여자의 두 눈이 무진을 보았다. 여자는 자세가 불편했던지 허리를 뒤척이며 일어났다. 무진의 잠바가 여자의 손에 들린 채다.

가, 갖고 있어줘서 고맙습니다. 이젠 절 주세요, 자느라 겉옷을 걸치지 않은 줄도 몰랐군요.

당신.

예, 예.

나두 살아야지, 무진 씨. 나도 어쩔 수 없어요, 살아야 해.

무진이 마지막 말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여자를 응시하자, 여자는 재빠르게 잠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몇 푼 들어있지 않은 지갑인데도 여자는 좋다고 히죽이며 그것을 손에 쥐고 뛰어갔다. 여자는 정류장과 수많은 가로등을 지나쳐 멀리 달아났다. 아까의 그 걸음으로 사뿐사뿐, 고마웠어, 돈은 잘 쓸게 하고 실컷 약올리며 지나가는 여자를 무진은 보았다. 그러나 쫓아가지 않았다. 어쩌면 그 여자는 먼지 묻은 구두마저도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차가운 바람을 쓸어내리듯 나풀거리는 머리카락이 너무나도 서정적이었다. 마지막으로 가면서 여자가 보였던 비릿한 웃음마저도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어서 그녀의 볼을 어루만지며 끝내 못한 입맞춤을 하고 싶었다. 무진은 그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그제야 힘이 꺾인 무릎이 풀썩 쓰러졌다. 무진은 이내 얼룩진 바지를 털고 일어났다. 아무 것도 지나지 않는 도로 위에 버려진 겉옷을 주워 입고 느릿하게 길을 갔다. 잠긴 목은 상스러운 욕짓거리를 뱉어냈다. 침몰한 희망이, 진득하고 억센 비운의 바다에서 허우적댄다. 희망의 구조 요청은 깡그리 무시된 채 문드러진 울음만이 그것을 감쌌다. 결국에는 또 그렇게 되는 것이다. 무진은, 왜 그럴까. 다른 사람보다 유난히 짧은 손금의 성공선 때문인가, 어릴 적 어머니를 아프게 했던 철없는 성격 때문인가. 또는 저는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전생의 큰 죄 때문인가. 저의 불운에 관한 연구를 담은 논문 한 장을 머릿속으로 무던히 써내려가며 무진은 집 앞에 도착했다. 결론을 내렸다. 그냥 무진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지랄맞았다. 근거는 없지만 무진의 세상에서는 가장 정확한 사실이었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신에게 죄를 고백해야 한다면 지랄에게 숨겨뒀던 선의를 고백하겠다. 항상 지랄맞게 살았어야 하는데 미안해요. 내게도 착한 마음이 있더군요, 끝내 내어보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나 잘했죠, 끝까지 숨겼으니까, 하고.

 

지붕 위의 밤은 평안하다. 길게 늘어진 전깃줄 안에서 투둑, 투둑 전기 흘러가는 소리가 나는 듯 하다. 무진의 밤. 세 시 이십 분. 밤은 붉고 별은 차다. 창문을 열어둔 탓에 하루 내내 외로운 집 안을 심심치 않게 달래준 공기는 더 차가웠다. 무진은 창문을 닫고 엉성하게 깐 이불 위에 누웠다. 딱딱한 베게에서 땀 냄새가 흘러나온다. 고개를 새로 뉜 무진이 두려움에 물든 가로등을 허하게 쳐다봤다. 몇 년째 전깃줄과 사람들에게 학대당하며 무너질 듯 섰던 가로등이었다. 저 물체가 차라리 나보다 강할지도 모르겠다고 무진은 생각했다. 목이 따갑다. 팔이 저리다. 저 자신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목을 축였다.

무진은 연거푸 오른손을 들어 볼을 쓸어내린다. 엄지와 검지로 두 볼을 늘여도 보고 눌러도 보며, 언젠가는 느꼈을 뭉툭한 감정의 끝을 기억하려 애쓴다. 사랑. 연애. 연인. 마음. 행복. 밝음. 기쁨. 여름. 여름, 이마 위로 단물이 맺혀 온 몸을 촉촉히 적시던 여름. 무진은 어느새 그 열기에 뒤덮인 듯 하다. 무진은 눈을 감았다. 그 날 무진의 꿈을 찾아온 손님은 우스운 서러움. 손님을 앉혀둔 채 무진은 턱을 들어 시곌 보았다. 세 시 반이다. 잠을 잡아먹은 감정들을 원망하며, 무진은 서러움을 재웠다. 몇 분 내내 소리를 치며 날 위로해줘, 날 봐 줘, 날 그저 안고 있어 줘, 하고 울던 서러움이 곤히도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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