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시대에 태어난 아이들에게 바치는 위로의 자장가/판의 미로 감상/스포일러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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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시대에 태어난 아이들에게 바치는 위로의 자장가/영화 판의 미로

 

스페인 내전이 끝나고, 승리한 독재정권이 나라를 지배했다. 그러나 독재정권을 받아들이지 않는 반군들은 숲속에 숨어 게릴라 활동을 계속했다. 그런 반군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인들이 스페인 곳곳에 배치되었다.

 

여기 오필리아라는 한 소녀가 있다. 오필리아는 사춘기를 앞둔 소녀로, 동화를 좋아한다. 그녀의 엄마 카르멘은 비달 대위와 재혼하여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 비달은 자식의 탄생을 직접 보고 싶어 만삭의 카르멘을 오게 한다.

갑자기 마주하게 된 낯선 환경. 있는 거라곤 자신을 싫어하는 무서운 아빠와 어두컴컴한 숲과 군인들 뿐. 그러나 오필리아는 숲에 있는 판의 미로에 들어가게 되고 판이라는 요정(비주얼만 보면 괴물)을 만나 자신이 지하세계의 공주 모아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아나는 사람들의 말을 어기고 밖으로 나갔다가 햇빛에 죽어버렸다. 왕과 왕비는 모아나가 인간의 몸을 빌려서 다시 돌아오리라고 믿었다.

오필리아는 공주의 자리를 되찾고 지하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숙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 숙제는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오필리아는 우여곡절 끝에 그 숙제를 해결하고 지하세계로 돌아간다.

 

핵심적인 배경과 줄거리만 써놓으면 <판의 미로>는 마치 동화 판타지처럼 들린다. 유치한 어린이용 영화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절대 그렇지 않다. 판타지와 역사극을 섞은 영화로, 다소 잔인하고 징그러운 장면들이 적지 않게 나온다. 특히 이 영화의 트레이드마크인 '창백한 남자'라는 괴물은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유명하다.

 

대부분의 판타지 영화는 현실과 판타지가 구분되어있다. 유명한 판타지 영화 <나니아 연대기>나 <해리포터>는 한 지점을 경계로, 현실에서 판타지세계로 넘어간다. 그러나 <판의 미로>는 현실과 판타지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특별하다. 현실은 참혹하다. 특히 오필리아의 새아빠인 비달 대위는 만삭의 아내를 무리해서 오게 하는가 하면, 무표정하게 죄없는 농부를 유리병과 총으로 죽여버린다. 엄연히 딸인 오필리아에게 첫 만남부터 "악수는 왼손이 아니라 오른손으로 하는 거란다"하며 왼손을 세게 움켜쥐는 장면은 그를 잘 설명해준다. 산통으로 고생하는 엄마는 오필리아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심지어 숲속에서 언제 반군이 쳐들어와 공격을 할지도 모른다. 한 마디로 이러한 환경은 오필리아 같이 어리고 순진한 소녀가 견디기에는 너무 힘들다. 내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끔찍한데 오필리아는 오죽했을까. 제일 가슴 아픈 것은 카르멘이 아이를 낳고 죽어버린 것이다. 그것에 더해 아내의 죽음에 무감각한 남편의 모습은 한숨만 나오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오필리아가 왜 지하세계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라이언킹처럼 그냥 내 운명이고 정체성이니까? 아니다. 오필리아가 지하세계로 돌아간다는 것은 곧 이 환경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주라니, 얼마나 완벽한가. 누구나 한번쯤은 동화같은 상상을 해보았을 것이다. 가령 백마탄 왕자라든지, 알고 보니 부잣집의 잃어버린 딸이었다든지 하는 상상들. 오필리아는 그 상상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렇다. 판과 요정, 지하세계와 모아나는 오필리아의 상상이었다. 오필리아가 도피할 곳은 오직 상상 뿐이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가 거의 없다. 판이 오필리아에게 직접 찾아오거나 엄마의 산통을 낫게 할 맨드라크를 주기도 한다. 그런 부분을 보면 아리송하지만 뒷부분에 결정적인 장면이 나온다. 오필리아의 마지막 숙제는 순수한 피를 얻는 것이었다. 순수한 피가 있어야만 지하세계로 갈 수 있다. 오필리아는 아기를 데리고 미로에 가지만, 차마 아기를 죽일 수 없다고, 차라리 공주의 권한을 포기하겠다고 한다. 오필리아를 따라온 비달은 오필리아가 허공에게 애원하는 모습을 본다. 나는 이 장면을 보고 오필리아의 상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게 모두 오필리아가 만들어낸 상상인지, 아니면 정말 공주였는지 논쟁이 분분하다. 바로 결말 부분에 있다.

비달은 아이를 뺏고 오필리아를 쏘아죽인다. 오필리아의 피는 지하세계를 여는 비석으로 떨어진다.

 

아이를 안고 미로를 나온 비달은 메르세데스와 반군들에게 포위당한다. 그제서야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는 비달은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듯, 시계를 깨서 아들에게 자신이 죽은 시간을 알려달라고 한다. 그러나 메르세데스는 단호하게 말한다.

"아니, 이 아이는 당신의 존재 따위도 모르고 자랄 거야."

그리고 총으로 쏴죽인다. 이 말은 전쟁이라는 비극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기지의 스파이이자 반군파인 메르세데스는 죽은 오필리아의 시체를 보고 울면서 가사 없는 자장가를 불러준다. 그 후 오필리아는 환한 빛과 함께 일어난다. 예쁜 공주님 옷을 입고 왕좌에 앉은 왕과 왕비를 만난다. 마지막 세번째 숙제는 희생이었다. 오필리아는 가장 어려운 숙제를 해낸 것이다. 수많은 백성들의 환호와 환영 속에서 오필리아는 공주의 자리를 되찾는다. 오필리아는 공주가 되었는지, 그냥 죽은 건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오필리아가 자신이 진정 있어야 할 행복한 지하세계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오필리아는 자유로워졌고, 행복해졌다. 다만 그 자유와 행복이 현실에는 없었다는 점이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아쉬웠던 점이 있었다면 바로 한국 배급사에 있다. 마치 포스터를 아동용 판타지 영화로 꾸며놓아서 아이들이 엄마 손을 잡고 영화를 보러 갔다가 까무러쳤다는 후문이 있다. 개봉 당시에는 2006년이었기 때문에 영화를 보러가면 포스터만 보고 영화를 결정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이 영화가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라는 쓸데없이 판타지를 강조하는 부제를 지었다. 앞서 언급했듯 <판의 미로>는 전혀 아동용 영화가 아니다. 15금 영화이고, 미국에서는 19금 영화로 개봉했다. 판이 처음 나올 때 나는 놀랐다. 요정이라는 판의 비주얼은 괴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판이 오필리아에게 소리를 지를 때는 나도 놀라서 움찔했다. 날개달린 작은 요정은 그나마 인간 모습이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팅커벨 같은 모습은 아니다. 오필리아가 숙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괴물들이 있다. 하나는 구더기로 가득한 썩은 나무에서 사는 거대한 두꺼비인데, 두꺼비는 찐득찐득한 구토를 뱉어낸다. 그리고 '창백한 남자'는 정말 보면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이를 잡아먹는 그 괴물은 비달을 상징한다. 정말이지 오필리아를 쫓아오는 장면은 공포 그 자체이다. 이걸 보면 오필리아같이 어리고 순진한 아이가 이런 괴물을 직접 떠올렸을까…아리송하다. 잔인한 장면도 있다. 비달이 농부를 죽이는 장면, 반군을 고문하는 장면, 메르세데스가 비달의 입을 찢는 장면이 그렇다. 하지만 이렇게 기괴하고 잔인한 장면들이 현실의 잔혹함을 더욱 잘 부각시킨다.

 

이 영화는 오필리아같이 불행한 시대에 태어난 아이들에 대한 위로이다. 아이들 뿐 아니라, 당시 강한 남성들에 의해 억압받은 여성들은 상징으로 나온다. 나무를 썩게 하는 두꺼비는 독재정권을 상징하고, 그 나무는 자궁의 모양을 했다.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이런 상징들을 통해 감독이 얼마나 상징을 잘 이용하고 세심하게 연출했는지 알 수 있다.

 

나는 <판의 미로>를 4월에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았다. <판의 미로>를 보고 한동안은 영화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결코 쉬운 내용의 영화는 아니었고 그래서 인터넷의 리뷰와 해석을 다 찾아봤다. 이 글도 해석에서 따온 부분이 적지 않게 있다. 내가 오필리아의 슬픔에 공감하고 이 영화에 감탄하는 이유는 이 영화의 배경인 스페인 내전과 군부독재가 우리나라의 역사와 비슷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 배경을 일제시대 혹은 독재정권 시절로 한다 해도 어색함이 없다. 우리 부모님 세대까지만 해도, 많은 아이들과 여성이 비슷한 아픔을 겪었다. 과거에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미래에도 존재할 수많은 오필리아들…….

 

나는 곧 어른이 된다. 어른은 자신만의 이득만을 좇을 게 아니라 미래세대의 안녕도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의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평화로워보이지만 그 평화가 영원하다는 보장은 없다. 나는 어른으로서 아이들을 위해 더 현명해질 것이다. 메르세데스와 같은 스파이였던 의사는 비달에게 말한다.

"복종을 위한 복종은 당신같은 사람만 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모르는 새에 복종을 위한 복종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아야 한다. 수많은 오필리아들을 위해서라도. 이러한 역사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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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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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의사

반듯하지만 잔머리로 헝클어진 올림머리, 하얀 의사 가운과 대조되는 빨간 렌즈, 190이 넘는 장신……

“와, ‘죽음의 천사’ 님, 정말…… 뭐랄까…… 겉은 냉혈한이지만 속은 사랑을 갈구하는 외로운 상처투성이 의사 같아요! 뭘 해도 어울리시니, 역시 코스프레의 완성은 얼굴이군요.”

나는 진달래처럼 어여쁜 사진사 아가씨의 손등에 키스한다. 나는 코스프레계의 남신으로 불리는 ‘죽음의 천사’. 첫 창작 코스프레를 촬영하기 위해 동네 병원에 왔다.

 

좋은 인물 사진이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사연이 있을 것만 같은 아우라를 느끼게 해야 한다.

나는 의대 출신의 유능한 의사에 빙의한다.

나는 아픈 과거가 있다. 초짜 시절, 자살기도를 한 환자가 죽었다. 뭐가 뭔지 모르고 머뭇거리다가 그만……. 나 때문이다! 나 때문에 환자가 죽은 것이다! 그는 죄책감의 형상을 한 유령으로 밤마다 나의 침대를 찾아온다……. 그 뒤로 나는 패쇄적이고 차가워졌다. 그리고 모든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는 습관이 생겼다.

 

갑자기 큰 앰뷸런스 소리가 났다. 한 여자가 들것에 실린 채 응급실로 옮겨지고 있었다. 자살기도를 한 걸까? 손에 피가 흥건했다. 정신이 번쩍 든다. 웬 여자가 다른 곳에서 사진을 찍자고 말한다. 나는 이상한 여자의 손을 뿌리쳤다.

“무슨 소리입니까. 나는 의사예요. 제 천명을 방해하시는 겁니까?”

나는 응급실로 뛰어갔다. 역시나 자살기도를 한 환자이다. 일단 생명을 살리는 것이 급선무이니 신속하게 뭐라도 해보아야 한다. 나는 심장재세동기를 환자의 가슴에 가져다댔다. 아, 전원이 꺼져있다. 지혈을 해야 하니 상처에 붕대를 감는다. 환자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는다. 내 가슴도 고통에 울부짖는다. 최후의 수단……MSY를 투여할 수밖에!

“간호사! MSY(M뭐든지 S살리는 Y약)를 가져와요! 지금 당장!”

간호사와 실습생들은 술렁거리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나는 선반에 있던 주사기를 꽂는다. 뭐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MSY일 것이다. 일단 찌르자. 용액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투여한다. 간호사가 끼어들려고 하지만 이런 일은 초짜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위대한 의사니까! 나만이 해낼 수 있다!

 

자살이라니, 얼마나 힘들고 답답했을까. 불행과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의 민낯을, 여린 당신은 부정하고 싶었겠지. 나는 당신을 이해한다. 하지만 죽지는 말아줘.

환자가 점점 의식을 잃어간다! 안 돼! MSY로도 역부족이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우리 아버지는 말씀하셨지. 매가 최고의 약이라고. 나는 환자의 뺨을 때린다.

“눈을 떠요!(철썩) 이렇게!(철썩) 죽으면!(철썩) 흐흐흐흑…… 자살의 반대말은 ‘살자’라고요!(철썩) 당신은 세상에 유일한, 존귀하고 아름다운 존재잖아요!(철썩) 아닐 것 같지만 의외로 세상은 아름다운 면이 아주 조금은 있기도 해요!(철썩)”

감동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아연실색한 간호사가 어딘가로 뛰어간다.

 

“당신 뭐야! 우리 병원 의사가 아닌 것 같은데? 끌어내!”

의사들이 나를 억지로 일으킨다. 이제야 환자를 보러온 주제에! 안 돼!……

그때 그녀가 의식을 되찾고 상체를 일으켰다. 응급실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볼에 핏방울이 맺힌 그녀가 나를 안는다.

“흐흑! 고마워요, 선생님. 나 사실 죽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더 고맙지, 당신의 영혼이 다시 세상에 발을 디뎠으니. 나는 경이로운 존재의 손등에 키스를 한다. 그리고 천사의 날갯짓처럼 유유히 빠져나간다.

집에 가자. 이런 날에는 잠만큼 좋은 게 없지. 나는 집에 도착해 편안한 잠이 든다. 오늘의 꿈자리는 부디 평안하길.

 

잠에서 깼다. 밤 열한 시, 기분이 이상하다. 낮에 뭘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별 거 아니겠지. ……착잡한 마음에 TV를 킨다.

“속보입니다. 오늘 낮 수원의 병원에서 의사로 위장한 정체불명의 남성이 환자에게 소독용 포르말린을 치사량 투여하고 폭행, 도주했습니다. 환자는 충격으로 깨어났지만, 15분 뒤 사망했습니다. 경찰은 남성의 행방을 뒤쫓고 있습니다.”

포르말린이라니! 세상에 미친놈들이 많군.

……그 순간 TV에 나오는 병원 CCTV의 남자의 빨간 눈과 마주친다. 거울에 비친 의사 가운에 묻은 빨간 피가 눈에 들어온다. 핏자국이 묻은 내 얼굴도. 오늘 낮에 나는 뭘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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