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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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달한 초콜릿은

입 속 하얀 아파트를

야금야금 부셔버리니까

적당히

 

꼬불꼬불 라면은

면봉처럼 가늘었던 몸을

볼록볼록 튀어나오게 하니까

적당히

 

딱딱한 원두를 갈아만든 커피는

눈 밑에 떠다니는 하얀구름들을

어두운 먹구름으로 변신시킬 수 있으니까

적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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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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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작았을 때는 미로를 전부 보지 못해서,

두렵지 않아 커다란 노란풍선처럼 부푼 마음으로 길을 찾아 헤맸다.

 

키가 커지고 나니 미로가 전부 보여서,

회색빛 연기가 마음을 가득 메워 보이지 않아 한숨을 내뱉고 가던 길을 멈췄다.

 

발걸음이 잦아들자,

지금껏 걸어온 길에 떨어진 누군가의 눈물에 담긴 아픔,

무참히 짓밟힌 누군가의 꿈에 대한 죄스러움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나를 덮치려 다가왔다.

 

뒤를 돌아보면,

파도가 나를 덮쳐버릴까

앞만 보고 달렸다.

 

보이지 않아 벽을 짚은 손에 박힌 가시,

보이지 않아 바닥을 내딛은 발에 박힌 송곳,

 

미로가 살아 움직여 내 길을 막는 것인지,

길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높아져만 가는 파도와 나의 키.

 

손에 박힌 가시가 너무 아파서,

발에 박힌 송곳이 너무 아파서,

 

있는 힘껏 미로의 벽을 부셨다.

 

푸른하늘과 새하얀 구름, 따스한 햇살을 배경삼아

어울리는 검은집을 뒤로하고,

 

난 주저없이 나를 덮치려했던 파도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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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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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가 도시에 별수제비로

별들을 새겨 놓은 밤

 

나이가 지긋한 갈색의자에

무거운 마음을 앉쳐놓고

 

손 끝에 힘을 주어 건반을 누르는 것처럼

발 끝에 힘을 주어서

온 집안을 누비고

 

꾹꾹 폐달을 밟는 것처럼

무거웠던 책가방에 눌려왔던 만큼

나만의 지도를 종이 위에 꾹꾹 눌러 적는다.

 

온 집안에 울려퍼져

다시 내게로 돌아오는 소리

 

손과 발 끝에 다가와

무거웠던 어깨와 마음을 흔드는

작지만 커다란 진동

 

아무 말 하지 않고

내말을 들어주는 검은 집

 

오늘은 집에 기대어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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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고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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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강아지 두 마리가 매달려도

거뜬한 엄마의 팔뚝 끝에

물에 오래 살아서 물집 만든 손이,

 

툭 꺾으면 부러질 것 만 같은

빼빼마른 아빠의 다리 끝에,

가장의 무게 대신 굳은 살 박힌 발이,

 

실은 세상에서 엄마 다음으로,

가장 예쁜 우리 누나 손 끝에

연필에 눌려 휘어버린 새끼손가락이,

 

세상에서 참 고운 것이다.

세상에서 참으로 고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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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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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

나의 아이들이 자라서

저 먼 곳까지 바람을 타고

흩날려 날아갈 때쯤,

 

작은 베란다 창문으로

검은 눈동자에 하얀 물을 담고

날 내려다보던,

한 사람이 떠났습니다.

 

다시 피어나고,

다시 지고,

다시 바람을 타고 흩날리고,

 

다시 가지 하나를 뻗어내며

영문 없이 떠나버린 이가 떠난 해를 세어가던 날이었습니다.

 

다시 작은 베란다 창문으로 누군가 날 내려다봅니다.

언제 키가 저리 컸는지,

떠난 이의 아이가 검은 눈동자에 하얀 물을 담고

날 내려다봅니다.

 

나의 아이들을 다시 바람에 태워 보내고,

이제 나는 가지 둘을 뻗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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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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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너를 보고 싶은데

내가 예쁜 꽃이 아니라

너에게 보여주기 싫어서,

살글살금 도둑고양이 마냥 너를 다시 바라보면,

나는 다시,

톡 쏘는 사이다 군인 아저씨 머리 위,

뾰족뾰족한 철 모자 여는 기분이 들어서,

펑 하고 열리까 두근두근,

뾰족뾰족 철 모자에 찔릴까봐 조마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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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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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곧은 선 다섯개 위에

까만 동그라미들이 둥실둥실

 

까만 동그라미들에게

길쭉길쭉한 과자하나 넣어주니

서로 키재기에 바쁘다.

 

하나 둘 친구들 모아 마디를 이루고,

둘 셋 마을 사람들 불러모아 곡을 이룬다.

 

손 끝에서 음표들의 춤소리가 전해져

머리 위에 새싹이 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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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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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뀌고,

달력이 넘어가고,

시곗바늘이 돌아가면,

덜 그리워질 거라고,

덜 슬플거라고,

덜 아플거라고,

나를 다독이는 따스한 햇살들이

작은 내 머리를 쓰담으며 말했다.

 

그 햇살의 빛이 너무 따뜻해서,

잡을 수 있었던 손을 놓아버린 것이,

봄잎들 가득한 옥상에서 파란 하늘을 향해,

뛰어내린 사람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절이 바뀌고,

달력이 넘어가고,

시곗바늘이 돌아갈수록,

 

잠시 머물던 햇살의 따스함은

빠르게 식어갔고,

나의 선택이

나의 실수 였음을,

나의 잘못 이였음을,

깨달았다.

 

더 그리워지고,

더 슬프고,

더 아파질 거라는 것을,

하얀 눈 덮인 옥상에서 검은 밤하늘를 보았을 때,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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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작은 소년의 도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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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 홀로 사는 키가 작은 소년의 도끼의 날은

많은 나무를 베지 않고,

따뜻한 불을 얻기 위해,

키가 큰 나무를 향해 있었다.

 

키가 큰 나무들은 키가 작은 소년에게,

키가 작은 너가 베어야 하는 것은,

키가 작은 나무들이라고 말하였다.

 

키가 작은 나무들을 모두 베고 나니,

소년에게는 겨울 눈만 남았다.

 

소년은 많은 나무를 베어,

뜨거운 불을 얻기 위해,

날을 더 깊숙이, 날카롭게 세웠다.

 

결국 모두 베어버렸다.

 

키가 작은 나무도, 큰 나무도.

키가 작은 소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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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지 않은 겨울 거리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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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침대처럼 푹신한 눈이 매웠다.

얇은 나뭇가지에서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한 눈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사랑에 빠져버린 사람들처럼 새빨간 목욕물에 빠져버린 떡들,

물보다 진한 피를 나눠가진 사람들처럼 진한 국물에 함께 몸을 담근 어묵들,

자신과 함께할 떡, 어묵들을 찾기 위해 몸에 기름칠 하는 호떡,

 

그것들이 입을 통해 몸으로 걸어 들어갈 때마다

겨울 거리 위는 춥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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