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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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단발 머리하고 복도에 웃으며 있는 사람

멀리서부터 꽃향기 날 듯한 교복 입고 있는 사람

작은 발에 꼭 맞는 하얀 실내화를 신고 있는 사람

나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주는 사람

 

감지 않던 폭탄머리를 바가지 머리로 변하게 만든 사람

방구석에 박혀 있던 교복을 가지런히 정리하게 만든 사람

질질 끌던 슬리퍼를 발에 맞는 하얀 실내화를 신도록 만든 사람

나를 환히 웃으며 학교를 갈 수 있도록 만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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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위에서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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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도화지에 푸른 빛을 쏴

물컹물컹한 물풀로 모래알을 붙여

 

"자, 바다야."

 

양팔을 양쪽으로 쫘악 뻗어

퇴근 못하는 선풍기 바람을 안아

 

푹푹 밣히던 눈들은 지났갔어

푹푹 밟히는 모래알갱이들 위를 걸어

 

"여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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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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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너는 탁 트인 파란하늘을 데려왔었어

오늘의 너는 둥실둥실 떠다니는 구름을 데려왔어

내일의 너는 휘잉휘잉 날아다니는 바람을 데려올거야

 

어제의 나는 자라오던 초록나무에서 빨간 옷을 입고 내려왔어

오늘의 나는 자라오던 초록나무에서 아직 초록 옷을 입고 있는 너를 바라보았어

내일의 나는 너를 위해 따뜻한 햇살을 데려올거야

 

앞으로 나는 들쑥날쑥 자란 잔디에서 너를 기다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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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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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별들이 새겨 놓고 떠난 글과 숫자를 담은 초록하늘과

따스한 햇살을 받는 나무들만 볼 수 있도록 막아놓은 차가운 철 덩어리들

그리고 굳어버린 몸과 마음처럼 딱딱한 책상과 의자가

어디보다 빠른 시간이 흐르는 이 공간을 채운다.

 

더 멀리, 더 높이, 더 빠르게

따스한 햇살을 받는 나무가 되기 위한

계단을 탁 탁 오르고

차오르는 눈물들을 보고 도망치기 위해서

계단을 타다닥 타다닥 오른다.

 

긴 복도 끝에

홀로 가만히 서 있으니

남은 이 하나 없다.

 

결국

난 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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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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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책가방이 누른  어깨만큼

종이에 눌린 새끼 손가락에는

굳은 살이 박혔다.

 

수 없이 잡았던 연필 때문에

가느다란 손목에는 힘조차 들지 않아서

바람에 흔들리는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부러질 듯 흔들린다.

 

지우고 쓰고를 반복해서 닳아버린 지우개처럼

그 어떤 칼이 들어와도

아프지 않다고 느낄만큼 마음은 닳아버렸다.

 

매일 셀 수 없을 만큼의

풀어나가는 문제들이 늘어나고

 

늘어나는 문제를 따라

다른 것인지 틀린 것인지 모를 것이 늘어나고

 

다른 것인지 틀린 것인지 모를 것에 따라

생각이 늘어나고

 

생각들에 따라

걱정은 늘어가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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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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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고,

차가운 공기를 헤집고 다니는 자동차들과

어두운 하늘 밑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켜지지 않은 가로등 아래

 

외롭고 쓸쓸한 너가 웅크리고 있다.

 

낮보다 가볍지 않고

밤보다 무겁지 않은

새벽공기가 되어

 

숨 막히는 정막 속에서

너가 숨 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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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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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네모 아저씨들이

기분 좋아 술을 마시고 휘청이다

데굴데굴 굴러서 서로 쿵쿵 부딪쳐서

만든 원고지 위에 아저씨들의

횡설수설 나당기는 말들을

쓰고 싶어요.

 

커다란 회색 몸통 위에

칭칭 묶어놓은 얇고 긴 선들

샥샥 모아 만든 악보지 위에

밤하늘 하나 둘  채우는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을

따서 붙이고 싶어요.

 

가로등 아래에

펑펑 내린 눈들이 서로 손잡아 만든

도화지 위에 작은 나뭇가지로

슥슥 눈사람을

그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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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의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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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밖 창가로

새어들어오는 햇빛이

나무들만의 따사로운 무대 조명

 

산들산들 바람이 불어주는

파란 오선지에 하얀 음표들에 따라

잎들이 춤을 둥실둥실

 

바람이 조금 더 세게 불어주니

나무들이 다 같이 휘청거리며 덩실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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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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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달한 초콜릿은

입 속 하얀 아파트를

야금야금 부셔버리니까

적당히

 

꼬불꼬불 라면은

면봉처럼 가늘었던 몸을

볼록볼록 튀어나오게 하니까

적당히

 

딱딱한 원두를 갈아만든 커피는

눈 밑에 떠다니는 하얀구름들을

어두운 먹구름으로 변신시킬 수 있으니까

적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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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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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작았을 때는 미로를 전부 보지 못해서,

두렵지 않아 커다란 노란풍선처럼 부푼 마음으로 길을 찾아 헤맸다.

 

키가 커지고 나니 미로가 전부 보여서,

회색빛 연기가 마음을 가득 메워 보이지 않아 한숨을 내뱉고 가던 길을 멈췄다.

 

발걸음이 잦아들자,

지금껏 걸어온 길에 떨어진 누군가의 눈물에 담긴 아픔,

무참히 짓밟힌 누군가의 꿈에 대한 죄스러움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나를 덮치려 다가왔다.

 

뒤를 돌아보면,

파도가 나를 덮쳐버릴까

앞만 보고 달렸다.

 

보이지 않아 벽을 짚은 손에 박힌 가시,

보이지 않아 바닥을 내딛은 발에 박힌 송곳,

 

미로가 살아 움직여 내 길을 막는 것인지,

길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높아져만 가는 파도와 나의 키.

 

손에 박힌 가시가 너무 아파서,

발에 박힌 송곳이 너무 아파서,

 

있는 힘껏 미로의 벽을 부셨다.

 

푸른하늘과 새하얀 구름, 따스한 햇살을 배경삼아

어울리는 검은집을 뒤로하고,

 

난 주저없이 나를 덮치려했던 파도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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