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교차 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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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년도를 쓸 때 항상 전년도를 실수로 쓴다. 1월에도 추석이 다가오는 지금에도. 계속 작년 년도인 2016을 쓰고 6을 지운 후 7을 쓴다. 지운 자국이 7밑에 아이처럼 숨어 있다. 나는 왜 자꾸 실수 할까 생각해보면 전년도의 어린 내가 지금의 나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렇게 살아야지 했던 마음을 나는 단 몇 주 만에 지키지 않게 됐고, 추석이 다가오는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나는 존재가 후회인가. 내가 작년 12월에 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대학입시처럼 큰 것이 아닌. 운동하기 책 한줄 씩 읽고 자기 등. 단순 한 것 이었다. 근데 왜 나는 이런 것인가. 계속 자문하게 된다. 작년의 내가 자문하는 건 꽤나 괴롭다. 어른의 무게를 짊어지게 되기 직전 인 나이 19은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보다 앎에 대한 부끄러움이 더욱 생겼다. 그리고 자꾸 내 존재를 확인한다. 나는 네게 무엇이고, 내게 나는 뭔가. 전년도에는 이런 걸 생각 안했는데, 이것도 발전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나는 거울을 보고 내 모습을 치거나, 신발을 질질 끌고가는 어른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될까? ‘나’라는 걸 자꾸 대입시킨다. 사탕을 안준다고 때를 쓰는 어린아이든. 때를 써도 안 된다는 걸 아는 어른이든. ‘나’는 이란 말을 자꾸 사용한다. 그러기엔 나는 너무 초라하고 쥔 것이라고는 젋음의 갈망인 것 같다. 나는 젊지만 아니 어리지만 더 어림을 원한다.

어른들은 내게 과거를 붙잡지 말라고 가르치는데, 복습은 하라고 한다. 어른은 자신의 실패를 내가 하지 않게 끔 함으로서 내가 실패를 하게 만든다. 최소한 실패만 안하면 성공이지 않겠느냐. 이런 식인데, 나는 모르겠다. 복습은 과거를 돌봄으로서 내 문제를 찾게 된다. 과거를 붙잡는 건 이 행위와 닮아있는데, 왜 과거를 잊으라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전년도를 실수로 쓰는 건 오답노트를 하지 않아 생긴 하나의 반성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무의식을 좋아하는 나는 더욱이 그런 것 같다. 작년에 나는 한 아이를 좋아했는데, 그 아이를 너무 좋아해서 잡으려 했다. 내 손안에 들어오도록. 그 아이는 나를 떠나버렸다. 내가 그 아이에게 들어가버려서 그 기억에서 나오지 못한다. 지우개 자국만 나 있다. 종이에는 너무 강하게 문질러서 종이가 울어있다. 2017년도에 2016년도를 썼다는 건 그 아이를 지우려고 지우개로 무언가 썼다는 건 7이 흐릿한 6을 품고 있다는 건 실수다 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다시 나는 올해를 적고 누군가를 생각했다.

 

주저앉기에는 젊고 일어나기에는 어린 나의 모든 형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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