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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었다. 고된 노동을 마치고 돌아온 곳은. 허기가 졌지만 상을 차리는 과정을 생각하니 귀찮아 먹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밥을 걸러도, 외출복 그대로 이부자리에 누워도 내게 핀잔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금세 때탄 이불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모서리에 거뭇거뭇 곰팡이가 피어있었다. 전 집에 비하면 안방만도 못한 크기의 집이었으나 나는 그나마 아버지의 어마어마한 빚을 떠안지 않을 수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랬더라면 이렇게 누울 자리마저도 아쉬워했겠지. 생각하며 나는 피로함에 일찍 잠에 빠져들었다.

“혹시 드라이버 있어요?”
옆집이 한동안 시끄럽더니 새로 이사를 들어왔나 보다. 전이라고 교류가 활발한 편은 아니었으나 면식은 있는 사이였는데, 그 사람은 인사도 없이 이사를 가버렸다. 그리고 새로 이사 온 이웃, 아마도 내 또래의 그는 첫 만남에 다짜고짜 내게서 공구를 구했다. 나는 사정이 급해 보이는 그에게 공구를 빌려주었고 그는 내친김에 일을 도와줄 수 있느냐는 부탁을 해왔다. 평소 같으면 거절했겠지만 끝나고 술을 사겠다는 그의 말에 홀려 흔쾌히 승낙했다. 일은 쉽다 못해 짐정리 수준에 이르러 예상보다 빨리 끝났다. 그의 약속대로 우리는 안주와 술을 마셨고 그 와중에 이야기를 나누었다. 얘기를 나누다가 느낀 건데, 그와 나는 생각보다 닮아있었다. 서로의 과거얘기는 묻지도 꺼내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이야기를 가만 들어보니 그도 나처럼 젊은 나이에 어떠한 사정으로 얽힌 청년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깨닫고 나니 나는 그에게 유대감을 느꼈다. 그날 이후 그의 친화력 덕분에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고, 나는 생활고로, 그는 고독으로 시달리던 차에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술친구가 되었다.

그날은 예고 없이 내린 비가 그치지 않던 하루였다. 늦잠을 잔 나는, 허둥지둥 움직여 바로 일터로 나갔다. 그렇게 여느 때처럼 오후 느지막이 돌아와보니 그가 보였다. 그는 문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고 나는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그는 나를 보자마자 두려운 표정으로 손가락을 뻗어 내 집 문턱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이 이른 곳에선 탁한 물이 방 안으로부터 새어나오고 있었다. 미처 닫지 못한 창문으로부터 쏟아진 빗물이 바닥을 채운 것이었다. 나는 황급히 문을 열었다. 묵직하니 잘 열리지 않던 문을 잡아당기자 문을 막고 있던 빗물이 쏟아졌다. 그 빗물은 우리의 발을 흠뻑 적시고 복도 바닥으로 퍼져나갔다. 욕설을 내뱉었다.
방에 들어섰다. 나는 젖은 물건을 하나씩 정리했다. 펴놓은 이불도 물을 먹어 축축했다. 한동안 맨바닥에서 자야겠네, 생각했다. 내가 이불을 걷을 동안 그는 문 밖에 멀뚱멀뚱 서서 내 집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의 집을 들른 적은 있어도 그가 내 집을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의 집은 그의 집보다 훨씬 누추했다. 그러나 비슷한 처지에 숨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질려버린 눈으로 방을 둘러보는 그에게 말했다.
“뭐해? 얼른 와서 도와주지 않고.”
그제야 그는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내 방에 발을 들였다.
한창 내 집을 치우다가 말고 그는 자리에 퍼더앉았다. 나 또한 온종일 일하고 온 나머지 기력이 온전치 않은 상태였다. 마대를 집어던지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우리는 그렇게 허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힘들 때마다 내쉰 한숨의 양을 재보면 이 집을 채우고도 남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보다.”
넋을 놓고있다가 그가 스치듯 내뱉은 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순식간에 많은 의문이 머리를 스쳤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의연한 태도를 유지했다.
“가족들 뭐하는데?”
“정육점.”
그는 이렇게 말하고 생각만 해도 넌더리가 나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고기 자르고 나면 손에 남는 비릿한 피냄새가 그렇게 싫더라.”
그가 말했다. 나는 그를 위로하거나 편을 들어주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저 어서 이 청소가 끝나고 난 뒤 그를 돌려보낼 생각으로 가득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얼마간 잡담을 늘어놓다간 도무지 피곤해서 안 되겠다며 제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어느 정도 정리된 집 안을 바라보다가 맨바닥에 베개 삼아 사전을 깔고 누웠다. 찬기가 올라서인지 도무지 졸리지 않았다. 눈을 끔벅거리다 모서리의 곰팡이를 바라보았다. 그새 번식한 곰팡이는 내 집을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 천장을 꺼멓게 물들여가고 있었다. 그날, 나는 결국 잠을 설쳤다.

그날부로 그를 만나지 않았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한밤중에도 여러 번 내 집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나는 베개로 귀를 틀어막고 열어주지않았다. 그도 내가 대놓고 자신의 인사를 무시하고 난 뒤부터 더 이상 나에게 말을 걸거나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나는 다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갔다. 새벽에 일을 나가 밤에 돌아와서 곧장 잠자리에 들고 다시 일어나 일을 나가는. 더 이상의 술값 걱정은 없었다. 후련한 기분이었다. 언젠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그의 문앞에 박스가 여러 개 쌓여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것이 그가 이사를 나가는 것인지 이미 나가고 새사람이 들어오는 것인지 몰랐다. 하지만 우연히 라도 그와는 마주치고싶지않아 재빨리 집으로 들어갔다. 배가 고팠다. 그러나 텅 빈 밥솥을 보니 밥맛이 사라졌다. 나는 대충 세면을 마치고 이불 위에 몸을 누였다. 유난히 일찍 잠에 빠져들 무렵이었다. 벽너머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이웃 여성이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방음이 되지 않아 나의 집에 그녀의 목소리가 그대로 울려 퍼졌다. 나는 익숙하게 베개로 귀를 막았다. 눈을 질끈 감은 채, 만일 그녀가 나의 집 문을 두드리면 없는 척을 해야지, 라고 생각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이제 육개월 뒤면 저도 글틴에 더이상 글을 올리지 못하게 되네요. 뭔가 아쉽고 슬프다… 늘 정성스러운 첨삭 감사합니다…!! 여름 감기랑 모기 조심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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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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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꿈을 꾸었다. 이번에는 세계가 멸망하는 꿈이었다.

 

그는 궁핍함을 물려받고 태어났다. 부모세대부터 사치는 포기하고 의식주에만 신경을 써도 몇 안 되는 가족이 굶는 일이 꽤 많았다. 평생 자신의 부모를 거울삼아 결혼을 죽어도 하지 않겠다던 그가 아이를 가졌다. 아이에게도 가난이 물려질 것이 두려웠지만 그는 아이를 포기할 수 없었다. 작은 생명체가 제 아내 품에서 꼬물거리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더욱 그랬다. 저자신이 집안을 일으켜 세우리라 다짐했다. 그래서 악착같이 돈을 벌었고 자신은 최소한의 욕구만 해결해가며 가족에겐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그가 한창 말라가던 때의 일이었다. 그는 꿈을 꾸었다. 꿈에선 처음 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다른 말없이 번호를 읊어댔다. 처음엔 멀뚱멀뚱 서서 듣기만 했던 그가 이것이 심상찮은 ‘계시’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 그는 꿈에서 깨어났다. 그는 기억이 나는 대로 종이에 목소리가 들려준 번호를 받아 적고 근처 구멍가게로 달려갔다. 그 누구도 설마 그가 당첨되리라는 생각하지 않았다. 구멍가게 주인마저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지금껏 모든 것들을 자기 힘으로 충당하며 살아왔고 애초에 이런 식의 기적에 기댈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는 1등 복권에 당첨되었다. 어마어마한 액수의 주인이 바로 자신이 된 것이다. 그는 스스로도 믿을 수 없었다. 그가 거액의 돈을 받고 처음 한 일은 바로 빚을 청산하는 일이었다. 그 후엔 언젠가 큰돈이 생긴다면 사고 싶었던 것들, 하고 싶었던 일들을 가족과 함께 돈 걱정 없이 마음껏 누렸다. 한마디로 사치가 많아졌다. 그는 돈이 많아 행복했다. 그러나 그 행복도 잠시. 아들이 병에 걸리고 나서부터 그의 가정은 점차 나락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아들의 병은 불행하게도 현시대까지 치료법을 발견치 못한 불치병이었다. 그도, 의사도, 아들도 병의 원인을 몰랐다. 아들은 계속 말라갔고 그는 돈이 많았지만 불안해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 그는 잊고 있던 꿈을 떠올렸다. 꿈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떠올리고 그것을 필요로 했다. 하루에 열다섯시간도 더 잠을 청하며 그 목소리가 들려오길 바랐다. 아내가 아들의 병을 수발할 동안 그는 불편한 마음으로 누워서 잠을 청했지만 한동안은 아무런 계시가 없었다. 한동안은. 반나절을 꼬박 잠들었다가 깨어나려 비몽사몽할 때에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그 전과 같은 것이었다. 이번엔 장소와 시간, 인상착의를 알려주고는 그는 꿈에서 깨어났다. 그는 깨고 나서 계시를 받은 시각이 얼마 남지 않은 걸 깨닫고 부랴부랴 준비를 시작했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잠을 잔 것이었지만 그 지푸라기가 동아줄이 되어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역시나 그 시각 그 장소에서 만난 인연이 아이의 병을 완치시켜주었다. 그는 의사로서 마침 아이의 병에 대해 외국학교와 협력으로 연구조사를 하던 중이었고 개발 중인 아이에게 투여했더니 그 병이 나았더라는, 동화 같은 이야기였다. 어쨌든 아이는 살았고 그들 가족은 다시 화목하게 살 수 있었다. 그가 다시 꿈을 꾸기 전까지.

 

그 꿈에선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고 했다. 날짜와 시각만을 듣고 그는 다시 꿈에서 깨어났다. 이제는 전혀 의심 없이 꿈의 계시를 따랐다. 그의 꿈만은 미래를 알고 있었다. 그는 꿈에서 깨어나고부터 멍하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만 멸망으로부터 벗어날 길을 궁리했다. 오랜 생각 끝에 그는 집근처의 숲 한구석에 컨테이너를 가져다 놓았다. 그 컨테이너는 그가 마련한 최선의 해결책으로, 그는 이것을 방주라 불렀다. 세상에 멸망이 닥쳤을 때 오로지 계시를 받은 자신과 이곳에 있으면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에 마련한 장소였다. 멸망의 날 전까지 그는 그 컨테이너에 모든 생필품들을 가져다 놓고 몇 년은 그의 가족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그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그는 가족을 데리고 방주를 찾았다. 엄마의 손을 붙잡고 방주에 발을 들이려하지 않는 아이를 어떻게든 끌고 가려 했지만 아이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아내는 아이를 보듬으며 그를 질책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내가 아이의 손을 붙잡고 그에게로부터 도망쳤다. 그러나 산속 지리를 정확하게 꽤뚫고 있는 그의 시선을 피해 둘이 도망가는 일은 불가능했다. 조금 뛰다가 그들은 그에게 덜미를 잡혔고 그의 손에 이끌려 컨테이너 안에 가둬졌다. 모든 것은 그가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그는 꿈의 이야기를 풀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벌벌떨 뿐이었다. 그는 그들을 내내 진정시키려다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이내 화를 내기도, 물건을 집어던지기도 했다. 그러다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이내 사과를 건넸지만 그들은 순식간에 바뀐 그의 태도에 더욱 공포감을 느꼈다. 그가 보지 않을 때마다 그들은 탈출을 꿈꿨다. 그러다 잡히면 맞고 사과 받는 일을 반복했다. 그 좁은 공간에서 무수히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어느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그는 잠에서 깨어났고 아들과 아내의 이름을 불렀지만 방주는 고요했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그들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소파의 남은 온기로 깨달았다. 바로 몸을 일으켜 우비와 장화를 꺼내 입었다. 단단하게 단추를 여민 그는 손전등하나와 산새를 헤칠 쇠막대하나를 집어 들고 방주를 나섰다. 비가 생각보다 많이 내리고 있었다. 얼굴이 온통 비로 젖어 시야확보가 어려웠다. 그는 그들이 갈 법한, 적당히 경사진 산을 올랐다. 내려가진 않았을 것이다. 빗속에서 산은 오르는 것보다 내려가는 일이 더욱 험난했으니. 쇠막대로 가지를 쳐내며 산을 오를 때에, 그는 흔적하나를 발견했다. 진흙에 빠진 아들의 운동화였다. 그는 그것을 집어 들고는 그들의 방향을 짐작해 몸을 틀었다. 산새가 험해졌지만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는 화가 치밀었다. 비가 우비를 파고들고 속옷까지 적셨고 장화에는 이미 물이 차서 질퍽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며칠밤새 샤워도 하지 못한 그는 찝찝한 기분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쇠막대를 이리저리 휘둘렀다. 가지를 쳐냈고 공포를 물리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다 무언가 얻어걸리면 그게 동물이든 나무든 간에 마구 내리쳤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았고 전등은 이미 빗물에 고장이 나버린지 오래였다. 소리를 질러도 빗소리에 묻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발에 차이는 썩은 나무덩이를 무자비하게 내리쳤다. 그 모습은 마치 먹잇감의 목숨을 끊어놓는 짐승과도 같았다. 어쩐지 기분이 풀리는 듯 했다. 그는 날이 밝으면 그들을 다시 찾아보기로 하고, 오늘은 방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익숙한 산새 따라 수월하게 도착한 방주에서 그는 옷을 벗어던지고 음식 몇개를 까먹고는 금세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는 한기를 느꼈다. 이미 새벽이었다. 아내와 아들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아침으로 엊저녁과 같은 음식을 먹었다. 그는 멍하니 좁은 방주를 가득채운 음식과 물들을 바라보았다. 혼자라면 세계에 멸망이 닥치고서도 몇 년은 먹고 살 수 있는 많은 양의 것들이 한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는 어제 벗어놓았던 우비로 시선이 갔다. 낮이면 시냇가에 내다 빨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장화에는 물이 잔뜩 차있겠지. 그는 음식을 꾸역꾸역 넘기고 문 앞으로 다가섰다. 장화 속을 들여다보았다. 예상대로 물이 찰박거리고 있었다. 그는 새벽공기도 들이 켤 겸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나무사이로 해가 뜨고 있었다. 가라앉은 안개와 찬 공기로 분위기가 스산했다. 그는 장화를 엎었다. 말릴 요령으로 문 앞에 비스듬히 세워두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아 뒤적이는데, 장화 앞코에 묻은 검붉은 자국을 보았다. 그는 바로 몸을 수그리고 앉아 장화를 둘러보았다. 앞코뿐 아니라 밑창 전체가 붉었다. 짐승의 피를 밟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는 그것을 집어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설마……. 그가 중얼거렸다. 그는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 우비를 가지고 나왔다. 뒤집힌 옷 바깥쪽에 핏자국이 흥건했다. 그는 담배를 쥐고 있던 손을 떨었다. 우비를 꼭 쥐고 있다가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만진 양 손을 뗐다. 그는 눈을 굴렸다. 어제 자신이 내리친 것은 나무동이가 아니던가. 짐승이라도 죽인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사람을……. 그는 외투를 챙겨 입는 것도 잊고 어젯밤 기억을 더듬어 산을 올랐다. 짙은 안개와 자잘한 가지들을 헤치며 익숙한 흙물을 밟았다. 구겨 신은 운동화가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다시금 아이의 운동화를 발견했다. 그곳에서 방향을 틀었다. 조금 걷자 발에 무언가 채였다. 어제 산길을 헤집다 내팽개치고 돌아온 쇠막대였다. 반 쯤 흙에 파묻힌 쇠막대는 중간이 휘어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걸 뽑아들었다.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피가 흘러 내려오고 있었다. 아니기만 을 바랐다. 그가 죽인 것이 무엇이든, 생명체만은 아니길 바랐다. 그는 피가 흐르는 방향을 거슬러 바닥만을 보고 조심히 걸어 올라갔다. 멀리서 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뒷목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리고 고개를 든 순간. 잔뜩 뭉개지고 빗물에 퉁퉁 부르튼 시체위로 쇠막대가 떨어졌다. 그는 어제가 바로 그 멸망의 날이었음을 깨달았다. 짙게 내린 안개가 서서히 걷혔다. 그는 무릎을 꿇었다. 핏물이 바지를 적시는 줄도 모르고 하릴없이 울기만을 했다.

 


지난번에 써주신 조언 듣고 최대한 반영해 보았습니다!

제 문제점을 고쳐보려고 많이 생각하고 노력해서 써보긴 했는데 어떨진 잘 모르겠어요ㅠㅠ

부족한 점이 보인다면 다시 따끔하게 충고해주세욥!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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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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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꿈을 꾸었다. 이번에는 세계가 멸망하는 꿈이었다.

그가 꿈을 맹신하게 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종교는 물론이고 무당이나 점집만 봐도 치를 떨던 그가 자신을 의지할 곳으로 꿈을 정한 이유는 아들 때문이었다. 수년 전 그의 아들은 심각한 병을 앓고 있었다. 넉넉지도 못한 형편에 치료비가 없어 하나있는 아들까지 잃을 상황이었다. 세상 무너진 듯 골골거리던 그에게 꿈이 찾아왔다. 평소에 일이 바빠 잠에 들면 깊이 빠지는 그는 꿈을 그다지 반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꾼다고 하면 과거의 안 좋은 기억이 재생되거나 현실에서의 걱정거리들이 그대로 반영되기 마련이었기에, 그는 꿈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빚을 지고 마련한 아들의 수술을 며칠 앞둔 어느 날이었다. 오랜만에 그는 꿈을 꾸었다. 그 속에서 그는 이것이 꿈임을 일찍이 인식하고 어서 깨려했다. 혀를 깨문다던가 하는 행동으로. 눈을 꼭 감고 숫자를 세는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아들의 병을 낫게 하는 방도를 알려준다 했다. 그는 이런 종류의 꼬임에 쉬이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아들의 앞에서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아들의 병을 완치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사람이었다. 그 목소리는 날짜와 시각, 장소를 알려주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꿈속에서 그가 입을 떼려는 순간 현실에서 눈이 떠지고 그는 잠에서,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반신반의 하며 가본 그 시각 그 장소에서 만난 인연이 그의 아들을 살렸다. 그녀에게 꿈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는 그의 사연을 듣고 빠르게 수술을 집도해준 의사인 그녀에게 감사하기보다 그녀와 자신이 만나게 된 인연을 만들어준 꿈에게 더 감사했다. 시간이 조금 더 지체됐더라면 위험했을 거라는 말에도 아들의 안부보다 꿈의 계시에 조금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 후로도 꿈은 자주 꾸었다. 일부러 얕은 잠을 취하려는 그의 의식적인 행동도 있었다. 그러나 꿈은 꾸어도 그 속에서 목소리 혹은 다른 계시를 찾을 순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꿈을 꾸었다. 평소와는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싶더니 꿈에서 깨기 직전, 뒤척이는 자신의 몸이 느껴질 정도로 정신이 얕았던 그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아들을 살렸던 때와 똑같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세상이 곧 멸망할 것이라고.

그 계시를 받고 난 후로 그는 지금껏 해온 모든 일과 미래를 위해 쌓아온 업적들을 전부 포기했다. 때때로 회사에 나가지 않고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그 계시에 대해 곱씹고 전 인구를, 하다못해 주변 사람들만이라도 살리는 일에 대해 생각을 몰두했다. 주변인들은 그의 말을 믿기보다는 그의 바뀐 행동과 본새로 보아 정신병을 의심했다. 종일 앉아 있다가 속옷 바람으로 나와서 하는 말이 멸망이 어쩌고 세상이 어쩌고, 집에 틀어박혀 아무도 만나지 않다가 뜬금없이 약속을 잡더니 꿈이 어쩌고 구원이 어쩌고. 오히려 그는 점점 혼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의 곁에 남은 사람은 가족뿐이었으나 그들마저도 그를 이상하게 보고 있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아들의 소매를 붙잡고 차에 태웠다. 그리고 집에서 멀지 않은 산에 마련한 컨테이너로 끌고 갔다. 그 컨테이너는 그가 마련한 최선의 해결책으로, 그는 이것을 ‘방주’라 불렀다. 세상에 멸망이 닥쳤을 때 오로지 계시를 받은 자신과 이곳에 있으면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에 마련한 장소였다. 아들은 말로만 들었을 뿐 아버지가 마련한 ‘방주’에 발을 들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들은 간 이문 앞에 서서 컨테이너 안을 바라보았다.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수히 많은 통조림과 생필품들이 그리 넓지도 않은 컨테이너 안을 꽉꽉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침낭 세 개가 놓여있었는데, 아들은 그것이 오로지 자신과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를 위한 침낭이 분명하다 확신했다. 아들은 뒷걸음질 쳤다. 그는 아들이 들어오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으로 생각해 아들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아들은 기겁했다. 공포에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다가오는 그의 팔을 뿌리치고 뛰쳐나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아들이 그렇게 방주를 뛰쳐나간 뒤로 침낭 두개를 돌돌 말아 구석에 처박아 놓았다. 버리진 않았다. 그는 한동안 방주에서 먹고자고 생활했다. 실제로 멸망이 닥쳤을 시기에 익숙해지려는 그의 노력이었다. 전기가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그는 밤이면 초에 불을 붙였다. 전자기기라고는 건전지로 돌아가는 라디오뿐이었다. 미처 여분의 건전지를 챙기지 않아 불편했다. 며칠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방주 밖을 나가 집을 들러보기로 마음먹었다. 하필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그는 준비해둔 우비와 우산, 장화까지 챙겨 신고 밖으로 나섰다. 밤이었는지 세상이 온통 시커멨다. 젖은 나무를 짚고 질퍽한 흙을 밟으며 그는 산길을 내려왔다. 집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방주를 마련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오는 길에도 비가 멎지 않는 다면 그때엔 집에서 한숨 자고 내일 와도 좋으리라 생각했다. 멸망이 바로 내일이라는 소리도 없었으니까. 산을 내려오자 전혀 변한 것이 없는 마을이 보였다. 집에 도착한 그는 우산을 접고 도어락 앞에서 순간 망설였다. 가족이 자고있을까 걱정한 것이 아니었다. 금새 그는 비밀번호를 생각해내고 조심조심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코끝에 비린 냄새가 훅 끼쳤다. 형광등 스위치를 달칵거렸지만 켜지지 않았다. 그는 코를 쥐고서 집의 구도를 떠올리며 건전지가 있을 서재로 향했다. 건전지는 예상대로 서재 책상 서랍에 아직 있었다. 그는 먼지가 가득한 그것을 손에 쥐고나 서야 아들과 아내는 어디를 나간 걸까 생각했다. 그가 그녀가 항상 누워있던 안방에 들렀을 때, 그때 그는 그냥 지나치려다 꼭 틀어막은 콧구멍 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아주 역하게 풍기는 냄새에 안방침대를 한번 더 돌아보았다. 그때 번쩍, 하고 번개가 일었다. 그는 코를 더욱 세게 쥐고 안방으로 들어섰다. 더이상 숨 참기가 힘들었다. 가까이 할 수록 구토가 나올 것만 같았다. 그가 쿨럭이며 침대 옆에 다다랐을 때, 그는 냄새의 근원을 찾았다. 열린 창문새로 내리쬔 달빛이 침대를 비췄다. 누운 아내와 아들의 몸을 비췄다. 그들의 시체를, 썩어 문드러진 몸을 비췄다. 천둥소리가 들렸다. 건전지를 쥔 그의 손에서 땀이 베어 나왔다.


지난번 통조림에 남겨주신 댓글 잘 보았습니당. 선생님께서 기억해 주실지 몰랐어요… 뭔가… 제 글을? 저를 기억해 주시는 분이 있단게 되게… 신기하고 기분이 묘해요. 늘 평범해서 기억에도 남지 않을 글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한동안 안쓰다가 오랜만에 내키는대로 쓰고 첨삭도 제대로 안한 글을 올렸어용…헿 민망하네유…

암튼…음… 아, 감사합니다!! 매번 꼼꼼하게 합평해주시고 조언도 해주셔서…!  진짜 감사해요…조언이 정말 도움이 많이돼요…! 저는 제 글이 익숙해서인지 여러번 훑어도 찾지못하는 문제점을 선생님께선 객관적인 시선에서 지적해주시니까 진짜 정말 도움되고… 너무너무너무!!감사해요!! 앞으로도 글 열심히 쓰겠습니다ㅠㅠ! 제 글이 좀 더 나아지길 바라며… 좋은하루 보내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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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조림

“학생, 마스크.”

마스크를 쓰고 나서야 비로소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흰 천에 둘러싸여 흰 옷을 입은 사람들과 흰 공장안에서 어제와 같은 일을 시작했다. 통조림을 차곡차곡 쌓아서 박스에 넣는 작업이었다. 수많은 캔 사이에서 불량인 통조림은 박스에 담기지 않고 그대로 흘러 어딘가로 굴러 떨어졌다. 일을 하는 동안에는 집중하느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통조림은 끊임없이 기계를 타고 흘렀고 흰장갑을 낀 내 손도 눈을 따라 거의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잠깐 이 안정감에 넋을 잃었을 때, 앞에서 한 아줌마의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뭐하는 거야!”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불량 라인으로 일반통조림이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이미 많은 상품이 굴러 떨어져 둔탁한 소리가 났다. 문득 불안감이 밀려들어왔다. 내 옆에 띄엄띄엄 늘어선 사람들이 불량 통조림 라인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따라 걸어가 불량들 사이에서 정상이 통조림을 골라내는, 달갑지 않은 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끝날 때 쯔음에 내 손엔 동그란 참치통조림이 하나 들렸다. 알아 보기 쉽지 않았지만 아마도 내게 호통 친 아줌마인 듯한 사람이 내게 와 통조림을 손에 쥐어준 것일게 분명했다. 내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불량이야, 라고 말하며 벗은 작업복을 락커에 넣고 먼저 자리를 벗어났다. 자세히 살펴보니 통조림에는 정말 손잡이가 나가떨어지고 없었다. 나는 그 통조림을 들고 버스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버스는 예상시간표보다 일찍 도착했다. 나는 집에 가서 할 일들을 생각하며 차창밖을 내다보며 집을 향했다.

 

집에 도착하니 오늘따라 일찍 오신 아빠가 홀로 저녁을 먹고계셨다. 늘 그렇듯 내다보지않으셨다. 부엌을 가로지르는 길에 본 식탁위 저녁반찬은 김과 구운 스팸, 김치가 전부였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부엌으로 발을 돌렸다. 서랍에서 통조림따개로 불량캔을 하나 따서 식탁에 내려놓았다. 대수롭지 않은일이었으나 아빠는 기뻐하셨다. 반찬수가 늘었다고 고작 통조림하나를 나보다 더욱 반기는 아빠의 모습을 보니 조금 괘씸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는 내게 앉으라 손짓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는지 의아했다. 나는 흘긋 부엌시계를 보았다. 내일도 아침 일찍 공장에 나가야했다. 자기전까지 할 일들을 생각하고 아직 여유시간이 조금 남아있자 아빠의 앞자리에 앉았다. 아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회사일로 푸념이 있으신가 싶어 대충 비위를 맞춰드렸다. 그러나 아빠는 내가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한다고 생각하신 듯 속 깊은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뒤늦게 식탁 한쪽에 올려진 반 쯤 비운 소주 한 병을 보았다. 아빠는 새로 사귄 여자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아빠의 일터에 친한여직원이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빠는 이 칙칙하게 반복되는 일상에 그녀가 새로운 빛이라고 말했다. 오직 그녀만이 자신과 자신의 환경을 바꿔줄수 있을것이라 했다. 나는 침착하게 아빠에게 교제기간에 대해 물었다. 아빠는 어물어물 숫자를 중얼거렸다. 두달도 채 넘지 않은 기간이었다. 그 짧은 시간동안에 아빠는 그녀에대해 무얼 안다고, 그녀가 어떤식으로든 자신을 바꿔줄 수 있다고 믿는 그 모습이 바보같아 나는 화가 치밀었다. 나는 아빠의 생각을 잘라버리기로 결심했다. 아빠의 작은 결심이 초래할 결과가 두려웠다. 그래서 단호하게 몰아붙였다. 어쩌면 해서는 안될말 까지 해버렸을 지도 몰랐다. 아빠는 그저 술에 취해 헛소리를 하는 것 뿐이고 내일 아침이면 다시금 일상에 적응 할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핑계를 대고 서둘러 자리를 회피했다. 아빠는 내가 도망가는 동안 새로 깐 통조림을 내내 뒤적였다.

어젯밤 일로 취침이 두시간이나 늦춰졌고 잠을 뒤척여 몹시 피곤한 상태로 공장에 나갔다. 제때에 맞춰 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모두들 오늘 따라 일찍 나와 준비를 완벽하게 끝내고 각자 자리에 서서 조회를 듣고있었다. 나는 온 몸을 허옇게 감싸고 그들 틈에 끼어들었다. 지각체크도 면했고 조회는 별것없이 오늘도 어제와 같은 일을 시작했다. 나는 다시 안정감을 느꼈다. 어제의 실수는 번복하지 않았다. 주말이 되면 집에서 봐야 할 tv예능을 생각하며 작업을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야 아버지 생각이 났다. 그리고 오늘 손에는 통조림이 들려있지 않다는 것에 조금 안도했다. 나는 현관문을 열자 보이는 널린 구두한켤레를 통해 오늘도 아버지가 일찍 일을 마치고 돌아온 것을 알아챘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못보던 여성구두가 그옆에 한켤레 더 놓여있었다는 것. 나는 그 신발을 주시했다. 안방에서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오래전 들어보았던 아빠의 웃음소리와 섞여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목소리의 주인이 어젯밤 아빠가 말하신 여자친구의 목소리임을 나는 확신했다. 손이 떨렸다. 불안감에 어쩌면 좋을지 몰랐다. 그녀를 마주친다면 반갑다는 듯 인사를 건내야 할까, 아무일 없다는 듯 무시해야 할까. 나는 알지 못했다. 이런 것은 어느 메뉴얼에도 나와있지 않았다. 내 일정에도 적혀있지 않았으며 내 윗사람 혹은 동료가 알아서 처리해 줄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내가 불안감에 현관에서 손톱을 물어뜯는 사이 안방이 아닌 부엌에서 아버지가 그녀와 팔짱을 껸 채로 거실로 들어섰다. 나는 아빠와 눈도 안마주치고 그대로 돌아서서 현관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숨까지 참고 한순간에 계단을 뛰어내려온 나는 대문 앞에 놓인 재활용 쓰레기봉투를 무심코 바라보았다. 그 안엔 이제껏 아빠와 내가 먹어온 스팸캔 여러개가 들어있었다. 나는 이제 도무지 어찌해야될지 감이 오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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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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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었다. 우두커니 서있으면 엄마가 나를 찾아 올 것이라 생각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울타리 안 동물들만이 서로를 보살피고 있었다. 점심밥을 먹지 않아 배에선 쉴 새 없이 꼬르륵 소리가 났다. 저 멀리 불 켜진 와플상점에 자꾸 눈길이 갔다. 먹고 싶었다. 부드러운 와플 빵과 달달한 크림을 한꺼번에 베어 물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군침을 꼴딱 삼키며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자리를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곳을 벗어났다간 두 번 다시 엄마를 보지 못하게 될 거란 것을 알고 있었다. ‘부모님을 놓쳤을 땐 자리에 가만히 서서 돌아오시길 기다려야해.’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멀리서 불빛이 아른거렸다. 가만 보니 서커스를 준비 중인 듯 했다. 시작을 알리는 폭죽소리와 함께 현란한 배경음악에 맞춰 서커스 복을 차려입은 동물들이 행진을 시작했다. 울타리 안 잠자코 있던 동물들도 하나 둘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를 벗어나 몰래몰래 행진에 참여하는 동물들도 보였다. 모두 즐거운 표정이었다. 나를 제외하고. 들 뜬 분위기 속에 혼자 울상인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 나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호랑이었다. 호랑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동안 조용하던 호랑이는 나에게 질문했다. -부모님은 어디계시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호랑이는 희미하게 웃는 듯하더니 손을 내밀었다. -가자, 데려다줄게. 나는 친절에 이끌려 그 손을 붙잡고 말았다. 호랑이는 손이 닿자 씩 웃고 강하게 끌어당겼다. 몸을 구부린 채 나를 안아 동물들 사이를 헤쳐지나갔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로 호랑이에게 몸을 맡기었다.

호랑이가 나를 데리고 도착한 곳은 동물원 구석에 마련된 서커스 장이었다. 먼저 들어가서 갸우뚱하는 나를 보곤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오라 손짓했다. 마른 침을 삼키고 발을 들였다. 그 순간, 눈앞이 컴컴해 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는 두 눈을 끔벅였다. 눈을 떠도 감은 것 마냥 까맣기만 해 내가 장님이 된 것인지 서커스장이 원래 어두운 것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호랑이는 불러 봐도 대답 없고 기척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들어왔던 문을 찾았다. 보이지 않았다. 몇 발자국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문은 있어야 할 곳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손바닥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바싹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른 후 누군가 듣기를 바라며 소리쳤다. -집에 보내줘요. 그러나 허공은 말이 없었다. 몇 번을 크게 소리쳤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나의 메아리 뿐 이었다. 서커스 장은 엄청 넓은 것이 분명했다. 천천히 팔을 뻗어 어둠을 더듬었다. 양 손 끝에 차가운 무엇인가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것을 조심스레 쥐어보았다. 둥글고, 얼음처럼 찬 봉의 느낌이었다. 닿았던 손을 코에 가져가 냄새를 맡았다. 진한 쇠 냄새가 훅 풍겼다. 철제 우리인 듯했다. 일반 동물의 우리치곤 두께가 엄청나다고 생각했다. 그 새 냄새가 밸까 손바닥을 털어냈다. 박수치듯 손바닥을 맞부딪히자 어디선가 기척이 느껴졌다. 소리가 난 방향대로 고개를 움직였다. 물론 보이는 것은 없었다. 다시 박수를 쳤다. 이번엔 멀리서 들려왔다. 육중한 발소리가 들렸다.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본능은 이 발소리가 나를 어둠에서 꺼내주기 위한 소리가 아님을 인식했다. 나는 재빨리 소리의 반대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다른 것보다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거나 스쳐, 뒤쳐지지 않기를 바라며 달렸다. 온힘을 다해 뛰었지만 나는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큰소리로 울며 나의 잘못이다, 내려달라 발버둥 쳤다. 곧 나는 그것이 나를 쫒아오던 괴물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엔 이미 나를 향해 오는 무자비한 폭력이 시작된 이후였다. 가시 돋은 막대가 등을 스쳐 지나면 작은 쇠공들이 튀어 올라 나의 몸에 멍을 그리고 사라졌다.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나를 들린 무엇인가가 허공에서 끊어졌다. 나 또한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잔뜩 멍들은 팔로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나는 도망을 멈추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여전히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절뚝거리며 어딘가를 향해 걸었다. 어디를 향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걸었다. 잡힐 수밖에 없는 것을 알고 걸었고, 그래서 결국 따라잡혔을 때에도 나는 입술을 깨물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이젠 있는 힘을 다해 맞서 싸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휘두른 주먹 끝에 괴물이 닿았다. 괴이한 울음소리가 귓가에 쟁쟁했다. 나의 저항은 가볍게 끝이 나고 나는 몸이 짓눌리는 느낌에 더 이상 움직일 수도 없었다. 어딘가 끈적한 느낌이 들었다. 질척이고, 무거운 무엇인가 흘러내리는 느낌. 스스하는 소리가 들렸다. 뱀. 뱀이 분명했다. 그것이 다리를 감싸고 나의 허벅지를 날카로운 이로 물었을 때, 나는 지금껏 느껴온 그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비명과 함께 발끝을 세우고 발가락을 오므렸다. 사타구니를 타고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떴을 때 거리의 행진은 이미 끝난 지 오래인 듯 했다. 동물원은 이전보다 훨씬 조용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이곳엔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내가 서있는 곳에서 동물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동물들이 있어야 할 목재 울타리는 너덜너덜한 모습을 한 채 모서리부터 서서히 썩어 들어가고 있었고, 튼튼해야 할 철조망은 틈이 크게 벌어지고 녹이 슬어 있었다. 의아해 입맛을 다시며 바라보기만 하다 눈에 띄어 찾아간 와플 상점에서는 먹음직스러워 보이던 와플 사진 대신 가판대에 내려앉은 수북한 먼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기자기하게 꾸민 메뉴판과 간판 또한 거의 지워지고 닳아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무언가 발에 치이는 느낌이 들어 내려다보니 바람에 날아온 전단지 한 장이 내 발목에 붙어 펄럭이고 있었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엔 실종아이를 찾는 내용이 인쇄되어 있었다. 아이의 이름과 사진, 잃어버린 시기, 특징 등이 간략히 나와 있었다. 사진 속 활짝 웃으며 카메라를 응시하는 어린 얼굴이 결코 낯설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가입한 뒤로 처음 올리는 글이라 그런지 조금 떨리기도 하구 설레네요! 하하

따끔한 충고, 조언 부탁드립니다! 즐거운 연말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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