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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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 모(母)와 자(子)와 외부인

 

병원에서 역할극을 하기로 예약을 잡아놓았다 병원에는 엄마가 나를 데리고 간다 병원까지 가는 길은 나도 안다 집에서 쭉 오른쪽으로 쭉 간 다음 횡단보도를 건넌다 5층짜리 병원 건물이 있다 내 말은 나도 엄마를 데리고 갈 수 있다는 거다 나는 엄마에게 동물일 것이다 데리고 키우는 거 보니 애완이고(야생은 위험하지 않은가) 성별은 남자 대화는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나는 당신의 생각보다 똑똑할거다 동물인 걸 감안해도

 

엄마가 사육사를 맡는다

나는 동물을 맡는다

의사는 해설을 맡는다

(의사는 없었으면 좋겠다)

 

  1. 돼지

내가 소리낸다

꿀꿀꿀

의사가 말한다

어떻게 들으셨나요

엄마는 조용하다

나도 조용히 한다

 

  1. 이구아나

엄마가 말한다

이구아나가 울긴 해요?

의사가 말한다

울긴 하겠죠?

나도 말한다

아 예 그러시겠죠?

 

  1. 돌고래

서커스에선 링 안으로 들어간 돌고래가

좋은 돌고래

링은 사육사 손에 들려있다

내가 돌고래 같은가

연기이므로 링을 통과한다

돌고래가 연습하기 싫을 때 링을 배로 깔아뭉개는 걸 본 적이 있다

한 번 링을 통과한 이후엔 계속 넘어지기를 반복한다

 

사자: 의사의 일방적인 사자

엄마 장난감 사자 엄마 과자 사자

엄마 콜라 사자 엄마 옷 사자

엄마 핸드폰 사자 엄마 컴퓨터 사자

엄마 차 사자 엄마 집 사자

엄마 약 좀 사자 엄마 피 사자

엄마 주사바늘도 좀 꽂고 죽 사자

엄마 백합 좀 사자 엄마 액자 사자

엄마 어느 땅이 좋아 엄마 이 땅 사자

엄마 비석도 사자

눈물이 조금 난다

의사는 나를 힐끔 쳐다보고 말한다

엄마 눈물도 사자

눈물이 쏙 들어간다

사자, 안 해도 될 것 같다

 

먹을 걸 뺏긴 걸로 생각한다

눈을 치켜세우고 엄마의 얼굴을 본다

얼굴이 너무 높은 데 있다

눈을 조금 내린다

엄마의 목을 본다

몇 초가 지난 후에 나는 엄마의 목을 친다

때린 후에 엄마를 본다

엄마는 짝다리를 하고 넘어질 듯 말 듯 서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의사도 넘어질 듯 말 듯 서있다

나도 짝다리를 짚어본다

손은 허리위에 올려놓고

 

  1. 원숭이

앞에 있는 책상에 귤이 있어서 까먹는다

나는 잘 까먹고 있다

다 먹은 후에는 의자 위로 올라간다

그곳은 높은 곳이다

나는 거기서 엄마의 머리를 잡아당긴다

머리가 홀랑 까진다

아주 잘 까졌고 나는 홀랑 까졌다

나는 박수를 치고 나무를 뛰넘는 시늉을 한다

의사가 웃으면서 박수를 친다

엄마는 나를 보지도 않았고 의사를 보지도 않는다

발랑 까진 그 껍질만 쳐다본다

 

  1. 앵무새

집에서 키우는 앵무새는 엄마 말을 따라한다

안돼(한숨)

이걸 왜 했어(한숨)

하라는데로 왜 안 했어(한숨)

앵무새가 잠시 쉰다

시간이 지나고 한소리 한다

후(정말이지)

 

몇몇 동물들을 따라한다 앞으로도 많은 동물들이 남아있다 나는 모두 해보기로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는 정색했지만 고개를 끄덕인다 이 병원은 24시간 하는 곳이다 우린 남은 시간동안 계속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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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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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를 차고나면 풀지 않는다

시계에서 나오는 초침소리

반복되는 매크로놈같은

오차도 없이 흐르는 그 시간 속에서

느끼는 안정

번복을 꾀하지 않는다

변화가 생기지 않는 원을 유지하는 건

크고 작은 기어들

기어들을 유지하는 건 작은 톱니

그 작은 톱니 하나가 빠지면 바뀌게 될 24시간

하루의 큰 원이 있으면

나는 그 원 안으로

무수히 작은 원들을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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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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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본 기린의 목이 길었기 때문에 나는 눈을 떼지 못했어 나와 달랐거든 발이 네 개, 목은 길고, 먹는 건 풀뿐이야, 멍도 너무 많았지 엄마의 옷소매를 끌어당겨 엄마의 귀에 내 입을 갖다대고 소곤거렸어 쟤는 엄마 배에서 나올 때 많이 아팠을 거라고 엄마가 웃었어 꺼이꺼이 숨소리가 넘어갈 듯이 웃었지 나는 입을 비죽 내밀었어 엄마가 손가락으로 눈밑에 묻은 눈물을 닦고 말했어 쟤는 너 때문에 멍들었다고 내 눈은 커졌고 입술은 떨렸고 다리도 떨렸는데 뒷걸음질 치다가 발을 헛딛어서 엉덩이를 땅바닥에 찧었어아마 눈시울이 붉어졌을 거야 눈이 뜨거웠으니까 나는 울면서 미안해 미안해 외쳤는데 너는 이해했는지 내게 그늘 되어주던 나무의 나뭇잎들을 먹기 시작했어 이걸로 너와 나는 같다는 것이었을까 눈을 들었어 내 머리 위에 있는 너의 턱을 보니까 눈물이 멈췄고 나는 손을 뻗어 너의 턱을 만졌지부드럽더라 너의 털을 뽑았어 너는 나를 보더니 다시 목을 곧게 세우고 다른 기린들과 어울렸어나는 차를 타고 집에 오면서 그 하얀 털들을 손에 꼭 쥐고 잠 잤다고, 엄마한테 들었지

동물원을 갔다와서

차 뒷자석에서 꾸벅꾸벅 졸며 자는 내 딸 손에 쥐어진 하얀털을 보았어 엄마처럼 숨이 넘어가듯이 웃어볼까 생각해봤어 내 딸은 나랑 똑같더라고 나는 손으로 그녀의 맨들맨들한 턱을 깨지 않도록 살짝 꼬집어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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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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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네가 내게 말했던 때는 대학가기 전인 차지도 따듯하지도 않은 모호한 계절 이었다

많은 것들이 바뀔 준비를 하니 모든 것들이 신기하고 궁금해졌다

네가 말을 했다

모든 게 달라졌다

나뭇가지에 붙어 꽃피울 준비를 하는 꽃봉오리가

편의점 의자에 앉아있던 아이들이

매번 같은 곳에 있던 모든 것들이

어색해졌다

나의 다리는 딱딱하게 굳었다 적어도 내 몸 정도는 어색해지지 말아야지

움직여야 할 상황에 제때 움직이지 못한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울어버렸다

속눈썹에 맺힌 눈물 때문에 시야가 뿌옇게 보였다 울고 있었어도 궁금한 게 생겼다

너는 어떤 표정으로 서서 나를 봤을까

확실한 건 내게 너는 바뀌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확신으로 남지 않은 것, 그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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