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빛났던 당신의 얼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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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빛났던 당신의 얼굴은

나는 당신의 비상을 보았다. 오직 나만이 당신의 증인이다. 당신은 날개를 쭉 벋은 채 창공을 가로질렀다. 쏟아지는 햇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반짝거렸다. 이윽고 당신은 당신의 몸으로 태양을 가렸다. 나는 그 아래에 있었다. 당신의 모습이 역광으로 검게 물들고 있었다. 그것이 인류최초의 비행이었다. 지금도 믿어의심치 않는다. 당신은 하늘 높이 날아, 영겁처럼 긴-어쩌면 찰나일지도 모르는- 시간을 만끽했다. 나 역시 마치 꿈결 속에 있는 듯했다.

아직도 고향의 옛 집에 머무는 동안이면 창고에서 자주 시간을 보냈다. 당신의 흔적이 남아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내가 갈무리한 당신의 날개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 날 내가 옮겨다놓은 모습 그대로 여기에 남아있었다. 여기서 날개를 보며 당신과의 추억을 안주 삼아 브랜디를 마시는 것이 늙은 내 취미였다. 추억 속의 당신은 이제 나보다 쉰 살은 어렸다.

당신은 하늘을 동경하는 이카루스이자 총명한 기술자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당신은 이미 양력을 발견하고 날개를 설계 중이었다. 당신은 내게 그 설계도를 보여주며 말했다. "저 푸른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어. 새처럼, 바람처럼." 당신의 동경은 나까지 끌어들인 우량한 것이 되고 말았다. 나는 당신의 비행을 보기 위해 당신의 곁을 지켰다. 그때 나에게 당신은 한 마리 새처럼 보였다. 날개를 잃어 잠시 무리와 하늘을 떠난 한 마리 새가 아닐까. 나는 곧잘 당신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슬슬 취기가 올랐다. 그만 본채로 들어갈까 하는 차에 문이 열렸다. 시원한 바람이 콧잔등에 닿았다. 손자 녀석이 바닥을 끼익끼익 울리며 달려들어왔다. 넘어질 뻔하면서까지 급하게 구는 것이 중한 용무가 있는 듯했다. 손자는 숨 고르는 일도 잊고 나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가까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쭉 뒤로 빼자 그제야 글씨가 읽혔다. '1차 세계대전의 숨은 영웅들' 저자 란에 써있는 이름이 친숙했다. 옛 전우의 이름이었다.

"여기 나오는 아서 경이 정말 할아버지예요?"

손자가 물었다. 책 표지에 그려진 복엽기 사진을 보고 있자니 취기가 훅 올라왔다.

"그래, 내가 바로 제임스 아서 경이다!"

콧김을 뿜으며 과장스러운 군인 말투로 말했다. 손자가 눈을 빛내며 책에서 소개하는 일화에 관해 물어댔다. 나는 경험담을 바탕으로 적당히 부풀려서 손자에게 대답을 들려주었다. 손자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모두 피한 세대였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이미 모든 것은 과거가 되어갔다.

"그럼 이 조형물에도 뭔가 있는 거죠?"

손자는 당신의 날개로 다가갔다. 나는 말리지 않았다. 손자는 당신의 날개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당신의 흔적은 누군가의 관심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뭔가 적혀 있는 것 같아요. 다 헤지고 번져서 잘 모르겠는데, 아마 J. A……."

손자가 중얼거렸다.

"얘야, 네 큰엄마가 부르는 것 같구나. 가봐야하지 않겠니?"

내가 말했다. 손자가 덜컥 고개를 들었다. 불쾌한 침묵이 감돌았다. 손자는 잠시 내 눈을 바라보더니 순순히 창고를 나갔다. 손자에게 안 좋은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자각하면서도 끓어오르는 심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허리가 찌르르 아파왔다. 나이가 나이임에도 사람은 이런 유치한 일을 저지르고 마는 것이었다.

당신은 마지막에 와서야 일을 망설였다. 사람이 직접 날개를 달고 시험 비행을 해야 일이 끝났다. 하지만 추락할지도 모르는 날개를 메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일을 할 만한 미치광이는 당신밖에 없었다. 당신은 생각보다 덜 미쳐 있었는지, 예정일을 하루 앞두고 나를 찾아왔다. "네가 대신 해줄 수는 없겠어? 말했잖아. 너도 새처럼, 바람처럼, 하늘을 날고 싶다며!" 나 역시 두렵기는 매한가지였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자 당신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결국 무슨 대답을 하긴 했을 것인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반백년이 지난 일이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나는 술잔을 바닥에 내려놓고 당신의 날개로 다가갔다. 발을 들어 손자가 보았던 비밀을 짓밟았다. 전쟁터에서 군홧발로 그랬던대로. 허리가 계속 아파왔지만 발길질은 멈추지 않았다. 당신의, 그리고 나의 날개가 부수어져갔다. 무슨 상관인가. 이런 흔적이 없대도 내가 당신의 증인이다.

당신은 분명히 하늘을 날았다. 새처럼, 바람처럼. 그것이 틀림없는 인류 최초의 비행이었다. 당신이 태양을 가리고 역광으로 물들었던 때의 그 모습만은 똑똑히 기억났다. 반백년이 흘러도 마찬가지였다. 그 기억 속에서 나는 당신이고 당신은 나였다. 나는 오직 그때만을 상상했다. 당신의 얼굴이 잠깐 빛났던 때, 그래서 검게 물들었을 때, 당신의 얼굴을 상상했다. 그때의 당신은 무엇을 보고있었을까. 하늘을? 나를? 당신은 어째서 추락하고 말았는가. 그 탓에 나에게 진정한 하늘이란 여전히 당신의 빛났던 얼굴이다. 아주 어둡게 빛났던, 당신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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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손에 쥐어준 야구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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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손에 쥐어준 야구공

나는 황망히 관객석 뒤쪽으로 도망쳐 나왔다. 앞앞 자리에 앉은 두 사람 탓이었다. 저 둘이 왜 이런 곳에 있을까. 마주치면 분명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말 것이었다. 나는 모자를 눌러쓰고 두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진 장소로 몸을 옮겼다.

깡, 하는 시원한 소리와 동시에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하늘 높이 공이 날고 있었다. 나는 날아가는 공의 궤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멀리 포물선으로 날아가는 타구였다. 앞에 앉은 사람들이 열광하며 일어섰다. 펜스를 넘길 것처럼 날아가던 공은 결국 펜스에 부딪혀 떨어졌다. 떨어진 공을 외야수가 처리했다. 2루 주자는 여유롭게 홈을 밟았고, 1루 주자는 아슬아슬하게 홈인했다. 타자는 3루에 안착했다. 홈런인 줄 알고 일어섰던 관객들이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3루타가 어디냐. 관객들은 응원 소리를 높였다. 열기는 뜨거웠고, 나는 말없이 맥주를 들이켰다. 잠실에서 홈런이 그렇게 쉽게 나오는 줄 아나. 하지만 아예 안 나오는 건 또 아니지. 나는 문득 그 날의 공이 떠올랐다.

내가 아직 교복을 입었을 때였다. 서울 오는 버스에서 얼굴이 삭았다는 이유로 성인 요금을 빼앗겨 계속 기분이 좋지 않았다. 21세기를 맞은 서울은 미로처럼 복잡했고, 여기저기 치인 나는 겨우겨우 잠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한껏 지쳐 이제 그냥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진짜 야구장은 이렇게 큰 것이었나. 그 날 경기는 안 그래도 많은 관객을 부르는 잠실 시리즈였다. 그 트윈스의 야생마가 현역이던 시절이었다. 응원 분위기는 최고조였다. 관객석은 꽉 차 있었고, 경기 준비를 하는 선수들의 눈빛엔 독기가 서려 있었다.

촌놈이었던 나는 야구장의 분위기에 심취되었다. 이 큰 야구장을 가볍게 압도하는 관중들의 응원 소리와 내가 TV 스크린 너머로 동경했던 야생마의 호투는 나를 야구장의 포말로 만들었다. 나는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댔다. 집에 돌아가서는 쇳소리밖에 못 낸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맥주도 마시지 못하는 나이였지만 나는 누구보다 취해 있었다. 야생마를 만나면 사인을 받기 위해 가져온 글러브를 꼭 쥐고서 경기를 관람했다.

경기는 점점 트윈스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야생마는 마운드를 내려갔지만 이어서 마운드에 올라온 투수도 호투를 계속했다. 몇 번이고 삼진을 잡아냈다. 승기를 잡았다. 응원 소리가 더욱 드높아졌다. 패색을 느낀 베어스 쪽 관객은 선수들을 북돋고 역전을 기도했다. 승기를 잡은 트윈스 쪽은 환호를 거듭했다.

경기는 계속돼 9회 말이었다. 오늘 홈은 베어스였다. 이미 점수 차는 꽤나 벌어져 있었다. 드라마처럼 역전 끝내기 홈런 같은 홈런이 연속 두 번은 터져야 정말 역전할 수 있는 점수 차였다. 안 그래도 잠실에선 홈런이 나오기 힘들었으니 관객들의 분위기는 일목요연했다. 마지막 긴장의 끈이 내 앞에서 어른거렸다. 그 때, 어느 소리보다도 청아한 재앙의 소리가 들렸다. 응원석의 모든 관객들이 목이 부러질 정도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공은 직선으로 비행하고 있었다. 정확히 이쪽 관객석을 향해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중이었다. 베어스는 절규 같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공은 결국 잠실의 펜스를 넘었다. 나는 무심코 글러브를 들어올렸다. 잠실의 홈런 공은 내 글러브 위로 떨어졌다. 아웃은 아니었다.

나는 내 글러브에 들어온 공을 유심히 보았다. 난 야구공을 가져오지 않았고, 이 공은 방금 하늘에서 툭 떨어졌다. 그럼 확실했다. 나는 홈런볼을 잡은 것이었다. 손목과 손바닥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베어스 관객들은 축제 분위기였다. 옆에서도 베어스 팬으로 보이는 한 가족이 환호하고 있었다. 나는 손에 잡힌 야구공을 바라보았다. 강력한 스윙에 맞고 날아왔음에도 야구공은 깨끗했다. 나는 예상치 못한 행운에 겨워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얘, 안 돼.”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작은 손이 있었다. 짧고 뭉툭한 손가락이 다섯 손가락 펴져 있고, 하얗고 부드러운 손바닥이 그 가운데 가만히 서있었다. 손가락들이 생명을 띠고 꼼지락거렸다. 초등학생 정도 돼 보이는 아이의 손이었다. 부모가 아이를 말리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그 손을 잡을 뻔했다. 아이는 마치 손을 잡아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뭔가에 홀린 듯 그 초등학생 아이에게 공을 건넸다. 부러지기 쉬워 보이는 그 손을 쥐듯 천천히. 아이는 손을 뻗어 야구공에 손을 갖다 댔다. 아이의 부모가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와 나는 별개였다. 이 야구장과는 멀리 떨어진, 독립적인 공간에서 마주하고 있었다. 아이는 미소 지었다.

맥주를 홀짝이며 그 때를 회상하고 있자니, 처연했다. 작은 행운이었던 그 만남을 지나, 지금은 도망자 신세였다. 나는 이제 다시는 그 눈빛을 볼 수 없다. 이대로 경기장에 있으면 꿀꿀한 기분이 가시지 않을 듯했다. 나는 경기장을 나가려다, 배트 맞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하늘엔 야구공이 떠있었다. 커다란 뭉게구름이 푸른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야구공은 이쪽 관객석을 향해 오고 있었다. 나는 순간, 야구공이 나를 잡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서른이 넘은 몸을 이끌고 앞으로 달렸다. 옛날 젊었을 적처럼, 공을 잡기 위해 달렸다. 여기였다. 여기 서면 공을 잡을 수 있으리라. 나는 멈춰 서서 손을 뻗었다.

환호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홈런, 깔끔하게 펜스를 넘긴 타구였다. 나는 손을 보았다. 공은 잡히지 않았다. 거친 숨을 내뱉으며 웃었다. 참을 수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엄마에게 안긴 딸아이가 배실 배실 웃고 있었다. 딸아이는 작은 손바닥을 펴 나에게 향했다. 딸아이를 안은 엄마는 놀란 얼굴이었다. 근 몇 년간 본 당신이 지은 표정 중에 가장 인간적인 표정이었다. 나는 야구공 대신 손을 뻗어, 딸아이의 손을 포개 잡았다. 야구공은 딱딱하고 거칠하다. 딸아이의 손은 부드럽고 매끈했다. 나는 당신에게 눈빛을 건넸다. 아마도 당신의 눈에는 이렇게 보였을 것이다. 야구공을 주길 바라는 것처럼 간절한 눈빛으로 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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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옹의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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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좋은 사람한테 시집가서 애나 낳고 살면 돼. 그게 효도하는 거다. 넌 착한 아이잖니.
입시 원서로 대판 싸운 날이었다. 술에 취한 아빠는 나를 앉혀놓고 말했다. 두 손을 꼭 잡고, 몇 번이고 말했다. 나는 경악했다. 아빠란 사람이 어떻게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을까. 나라는 사람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말이었다. 나를 딸이라는 소유물로써 생각하는 사람의 말이었다. 내 손을 맞잡은 아빠의 거친 손에서 온도를 느낄 수 없었다. 나는 항의 한 마디 하지 못했다. 난 결국 원서를 다시 썼다. 그 날 밤, 볼을 감쌌던 축축한 베갯잇의 감촉을 잊을 수 없었다.
부모님 이야기를 누구에게 하는 건 처음이었다. 옆에 앉은 가연 언니가 묵묵히 얘기를 듣고 있었다. 나는 말을 멈추고 잠시 가연 언니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전체적으로 인상이 둥글었다. 볼살이 도톰하고 눈매가 부드러웠다. 화장도 짙지 않아 이웃 언니 같은 인상이었다. 하지만 역시 가연이란 이름은 가명일 거라고 생각했다. 침대에 나란히 앉은 채, 우리는 말이 없었다.
모텔 역시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일반적인 방의 모습이었다. 침대와 서랍장, 테이블과 거울 달린 화장대 정도가 전부인 작은 방이었다. 모텔은 문란한 곳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실제로 본 모텔의 모습은, 상상 속의 호텔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오랜 침묵 후에, 가연 언니가 입을 열었다.
“이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자기 같은 사람들이 종종 있어. 그런데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네. 어때, 포옹은 괜찮아?”
가연 언니는 두 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가연 언니는 천천히 나를 끌어안았다. 마치 아기를 다루는 듯한 손길이었다. 뻣뻣이 굳은 내 몸을 풀어주듯 어깨와 허리를 부드럽게 주물러 주었다. 블라우스 너머로 가연 언니의 살결이 느껴졌다. 나는 가연 언니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옅은 감귤 향이 났다. 포옹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가연 언니는 나를 안은 채 침대에 몸을 뉘였다.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내가 여자를 좋아하는 건 이런 점 때문이야. 많은 여자들은 이렇게 포옹하고 체온을 나누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거든.”
갑자기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가연 언니의 몸은 따스했다. 사람의 체온이 새삼 각별하게 느껴졌다. 오직 온기를 탐해 가연 언니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아직 눈을 뜨지 못한 갓난아기가 자신을 안아주는 어머니의 품속을 파고들 듯, 가연 언니를 끌어안았다. 우리는 한 화분에서 자라는 두 식물처럼 얽혀 들어갔다.
벨소리가 울렸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가연 언니는 베개 맡 서랍장 위에 올려뒀던 휴대전화를 집었다.
“15분 남았네. 아쉬워라. 자기 몸, 따듯했는데.”
나는 가연 언니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가연 언니의 체온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 몸에 남은 체온이 나의 것인지 가연 언니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포옹을 통해 전해 받은 가연 언니의 체온은 마음속까지 뚫고 들어왔다. 포옹은 체온을 전하고, 체온은 서로를 하나로 만들어줬다.
“다음에 아버지를 설득할 땐 꼭 안아드리면서 말해 봐. 난 자기가 안아주면 체온 말고도 여러 가지 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가연 언니는 농담처럼 말했다. 나와 가연 언니는 짧은 포옹으로 작별인사를 했다.
문득, 나는 아버지의 거친 손을 떠올렸다. 체온이 전해지지 않았던 손이었다. 하지만 가연 언니의 농담처럼, 그 때 아버지가 포옹을 해주시며 말했다면, 체온이 전해졌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만약, 내가 그 손에 체온을 전해줬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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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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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나는 땅바닥에 버려진 검은 봉지를 보았다. 쓰레기에 눈짓을 줄 일은 없었다. 시선 끝에 들어온 새까만 비닐 봉지 끄트머리가 기억에 남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다음날 자라나는 잡초 싹 위에 유유히 떠오른 검은 봉지를 보았을 때 신경이 쓰였다. 대체 무슨 이유로 저런 의미 없는 쓰레기가 저 자리에 머물러 있는 걸까? 난 들춰보지 않았다.
나는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생각하지 않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머릿속에 검은 바탕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없는 공흑. 그 위에 아무것도 그리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실패를 거듭했다. 검은 바탕을 생각 위에 칠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검은 그림이 되고 말았다.
며칠이 지나도 그 자리에 검은 봉지는 그대로 있었다.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매일 검은 봉지를 스치듯 차가 지나갔고, 스키드 마크가 도로에 새겨졌다. 날이 따듯해지면서 잡초는 계속 자라났다. 보도블럭 사이의 흙에서 잡초 외의 꽃들도 피어났다. 개나리, 민들레 같은 꽃들이 자라났다. 그 구석에서 검은 봉지는 가만히 흔들렸다. 바람에 흩날리는 귀를 내버려두고, 아무런 무게 중심도 없는 듯 서있었다. 안에 뭐가 들어있다면 그 윤곽이 드러나야 할 텐데 그런 게 없었다. 무엇을 짊어지고 있기에 잡초 곁에 붙어 떠나지 않는 걸까. 어쩌면 비어있는 자신을 짊어지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꿈속에서 몇 번이고 그 안을 들췄다. 내용물은 항상 달랐다. 동전 한 닢이 그 안에 떨어져 있기도 했고, 자그마한 돌멩이가 봉지를 고정하고 있기도 했다. 내 꿈은 빠짐없이 채워져 있었다. 검은 봉지가 있는 도로변은 잡초와 꽃들로 채워져 꽃밭이었고, 하늘은 별과 해와 달이 서로를 둘러싼 푸른 밤하늘이었다. 꿈 안에서 그런 모습들은 항상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어째선지 봉지 속에 든 것들은 부자연스러웠다. 검은 비닐 봉지가 날지 못하는 것은 꿈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꿈에서 깨어 눈을 뜨면 주변은 어두웠다. 항상 그랬다. 낮과 밤은 뒤바뀌어 내게 낮은 어두운 시간이었다. 이불을 벗어나 몸을 일으켰다. 바닥엔 잡동사니가 굴러다녔으므로 발에 채이지 않게 조심해서 걸어야 했다.
나는 패딩점퍼를 걸쳐 입고 집 근처의 공원을 찾아 나섰다. 봄이었지만 아직 밤은 쌀쌀했다. 칼바람이나 다름없이 거센 봄바람에 꽤나 자란 머리카락은 갈대가 바람 맞듯 휘날렸다. 감지 않아 기름진 머리여도 숱이 부족하니 가볍게 날았다. 추위에 몸을 움츠린 채 겨드랑이에 손을 끼고 걸었다. 공원 입구에 도착해 공원을 들여다보니 아무도 없었다. 공원 중심의 구조물에 걸린 시계를 보니 열두 시였다.
공원 공중화장실에 들어가면 오줌지린내가 진동했다. 이 시간의 공중화장실은 가장 청소가 되어있지 않은 때였다. 취객들이 몰려와 바닥에 오줌을 흩뿌리거나 세면대에 구토를 쏟아내는 시간이기도 했다. 열두 시면 다행히 조금 일렀다. 나는 걸레 빠는 세면대에 머리를 집어넣고 물을 틀었다. 얼음장 같은 물이 뒤통수로 떨어졌다. 강한 수압에 얻어맞으며 머릿속이 얼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차가운 것을 급하게 먹은 듯 머리가 아려왔다. 찬물에 얻어맞을 것을 예상했지만 목은 크게 움찔거렸고 놀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두피의 감각은 금방 마비됐다. 나는 패딩 주머니에 들어있던 샴푸 샘플을 뜯었다.
핸드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밖으로 나오면 달은 서쪽으로 걸음을 옮긴 뒤였다. 새벽은 더욱 깊어져 주택가의 불빛들은 잠들었다. 각종 사옥으로 쓰이는 고층 빌딩들과 홍등가의 불빛들만 밝게 날뛰었다. 이 조그마한 도시에 왜 그리 많은 빛이 필요한지 알 수 없었다. 저 별들을 가릴 만큼 가치가 있는 도시일까, 이곳은. 나는 머릿속에 하나 둘 그려지는 낙서를 떨치고 공원에서 나왔다.
옛 생각이 잠시 들었다. 항상 이런 시간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고민하고, 별하늘 아래에서 죽을 때까지 숨만 쉬고 있고 싶다는 생각을 반복하던 나날이었다. 그런 시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교문으로 향할 때, 나는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검푸른 밤하늘엔 별이 많았다. 학교가 산등성이에 붙어있었기에 그랬을까, 유독 그 길에선 별이 많이 보였다. 나는 매일 같이 그 별의 개수를 세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많구나, 오늘은 어제보다 적구나. 그러다가 고개를 쳐들고 하교하는 학생은 눈에 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개를 숙이고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가는 일상이었다. 그러다가 아는 친구가 보이면 말을 걸어 나란히 걸었다.
매일 지나는 장소에서 다시 검은 비닐 봉지를 보았다. 발걸음을 멈추었다. 벌써 꽤나 자란 잡초와 풀꽃들 사이에서 녹색 조화를 망치는 존재였다. 자신이 있을 장소가 아닌데 억지로 붙어 있는 듯 부자연스러웠다. 악착 같이 검은 비닐 봉지는 자리를 지켰다. 빌어먹을 자식. 생각해보면 저 검은 비닐 봉지도 쓰레기에 불과했다. 저 자리에 있어도 될 물건이 아니었다. 평생 발휘해 본 적이 없는 환경 보호 정신이 불타올랐고, 나는 몇 주 동안 날 신경 쓰이게 했던 검은 비닐 봉지를 드디어 들추었다.
가볍게 들린 검은 비닐 봉지에 들어있는 것은 녹색이었다. 마음이 동요했다. 가볍게 들었던 검은 비닐 봉지의 무게가 갑작스레 무겁게 느껴졌다. 손이 떨렸다. 이런 거면 날아가지 못할 법했다. 상상과 별 다를 없는 결과물이었다. 손의 떨림이 멈추고 깨달았다. 이런 건 검은 비닐 봉지가 짊어질 물건이 아니었다.
나는 녹색 펄프 뭉치를 다시 자연으로 되돌려주었다. 손에 남은 것은 검은 비닐 봉지였다. 몹시 가벼워서 손가락에 준 힘을 풀면 봄바람을 타고 휘날려갈 물건이었다. 몇 주나 나를 신경 쓰이게 했던 이 물건엔 알 수 없는 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서서히 손가락의 힘은 풀렸다. 바람이 한 차례 강하게 휘날렸고, 검은 비닐 봉지는 밤하늘을 타고 서쪽으로 날아갔다.
나는 더없이 외로웠다. 검은 비닐 봉지는 금방 시야에서 사라졌다.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몸은 무거웠고 휘날리지 않았다. 그저 평소 가던 길 그대로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하지만 변화가 있었다면, 별과 달만이 떠 새까맣고 투박한 밤하늘도 좋아하게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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