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해어(心海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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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깊다

깊은 것은 쉽게 끓지 않는다

 

날카로운 비늘을 가진 심해어야

네가 팔짝 뛰어오를 때마다

어째선지 아무도 바닷가에

놀러오지를 않는다

 

여기는 재밌게 생긴 조개가 있고

위태로운 모래성이 있고

서툴게나마 세상을 쓰다듬으려는 햇살이 있는데

 

너를 본 이들은 하나같이

발길을 돌린다

 

네가 그렇게 예쁘지 않아서일까

툭 튀어나온 이빨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번쩍거리는 비늘이 징그러웠나

아니면 잔잔하기만 한 줄 알았던 바다 속에

이처럼 커다란 물고기가

거품 아래 숨어있을 줄은 몰랐던 걸까

 

그러니 심해어야

아무리 뜨거워도 참아야지

바다가 팔팔 끓고 그래서 숨이 막혀도

조용히 엎드려서 너 자신을 죽였어야지

 

아무도 오지 않으니

파도 소리가 더 잘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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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과 기만의 상관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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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를 뾰족하게 잘랐어

상처 주고 싶은 마음이라는 이름의 마취약을 맞았는데도

자르는 동안 많이 아팠어

 

너는 메두사니까

눈을 마주치지 않은 것을 이해해

이끼가 잔뜩 낀 조각상이 되긴 싫었어

그것도 눈가에만

 

도망치듯 방문을 닫았어

전등 불빛 밑에 숨어서

미지근한 숨을 몰아쉬고 나니 아무렇지도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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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꽃을 키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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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는 것은 바람이고

흐르는 것은 세월인데

 

어째서 누군가의 세월은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어

우리 가슴 속에 박히는가

 

가슴을 태워

뜨겁게 달군 눈물을 부어도

굳은 세월은 녹지 않았다

 

그러나 그대여

 

바위 아래에는 꽃이 피어있다

 

노란 꽃잎 해살대는

작은 꽃이 피어있다

 

그러니 그대여

 

마음껏 슬퍼하되

함께 가라앉지는 말라

 

눈물을 흘리되

얽매이지는 말라

 

떨어지는 눈물에

꽃이 자라서 바위를 덮고

노란 꽃 수북이 덮인 바위는

당신 가슴 한가운데 태양이 되어

당신의 삶을 환하게 비출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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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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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의 반대는 연민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겠다

 

단단해 보이던 뒷모습이

툭 건들면 푹 꺼질 듯

숨이 죽은 솜인형 같고

 

달그락 달그락

그릇 위에서 춤추는 손가락이

빨간 구두의 멈추지 않는 춤처럼 느껴졌을 때

 

가슴 속 소쿠리에

한가득 사박대던

질긴 모래알 같은 무엇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그녀는 그저 서투른 여자였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늘 고민했으나

늘 답이 옳지는 않았던 사람이었다

 

오직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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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을 떠올린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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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에 넣어둔
수박을 꺼내보았다

 

오랫동안 냉기를 받아
껍질이 단단했다

 

손등으로 몇 번 퉁퉁 때린 후
반으로 쪼갠 수박 안에는
벌레처럼 까만 씨앗들이
새빨간 과육 속에 알알이 파묻혀 있었다

 

한참을 들여보다
한 입을 베어먹었다

 

씁쓸한 씨는 모두 뱉고
달콤한 속살만 아삭아삭 삼켰다

 

그러고 나면 수박은 온통 단 맛 투성이여서
오래오래 입안에 물고만 싶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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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 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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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 만찬

 

 

 

검푸른 천장에
하얀 소금별 흩뿌리니

 

김이
되었다

 

쌀밥을 닮은 흰 달
구름 연기가 솔솔 피어나
갓 지은 향이 나고

 

주홍빛 인공위성
한 바퀴 돌 때마다
진공 장독대 속에서
묵은지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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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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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지

 

 

 

휘몰아치는 눈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눈이 마냥 내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다 포기한 채

훅 떨어지는 놈도 있는가 하면

어떻게든 안 내려갈라고

기를 쓰는 놈도 있고

결국에는 온 힘 쥐어짜

조금씩 움툴대며 위로 올라가는 놈도 있다

 

하지만 결국은 떨어진다

어쨌든 결국은 사라진다

 

차가운 아스팔트 위 떨어져

스며들지도 못하고

그저 흘러갈 수 밖에 없는 운명

 

겨우내 버텨 드디어 태양빛을 마주해도

결국에는 말라 없어질 운명이다

 

사람도

마찬가지겠지

아무리 살려고 기를 써도

결국엔

눈이나 사람이나

똑같은 처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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