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봄 (수정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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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방관.

 

그것은 류봄이 예과 2년, 본과 4년, 인턴 1년, 레지던트 4년, 정신의학과 전문의 6년의 긴 시간동안 터득한 유일한 삶의 방식이었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사회의 부조리함을 수용하고, 도움을 청하는 간절한 손길을 뿌리치는 것에 그녀는 어느덧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가끔 양심의 가책이 들기도 했지만, 방관하지 않는 삶을 살았더라면 이 자리까지 오를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녀는 종종 생각하곤 했다. 그녀는 이제는 경영 부실로 인해 폐교된 지방 사립대학의 의대를 졸업했다. 그 대학에 부속 병원 같은 것은 당연히 없었으므로 졸업이 다가올 무렵 그녀는 타 대학병원에 인턴 지원서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병원인 U 대학교 부속 병원에서, 동기들 중 누구보다 빠르게 승진해 30대 후반의 나이에 정신의학과 과장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원칙대로 올바르게 살았더라면 결코 이룰 수 없었던 성과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비오는 날이면 류봄은 종종 새벽에 악몽을 꾸다 깨어나곤 했다. 늘 같은 꿈이었다. 꿈에서 그녀는 정신과 레지던트 3년차였을 때로 돌아가 있었다. 장맛비가 무섭게 퍼붓던 날이었다. 30살의 그녀는 의국의 열린 문틈으로 레지던트 4년차 선배인 C가 당시 정신의학과 과장이었던 P에게 폭력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P는 바닥에 쓰러진 C를 발로 걷어차고 밟으며 환자들 앞에서는 결코 입에 담지 않는 욕지거리를 해대고 있었다. 저 정도로 맞았으면 분명 온 몸에 멍이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류봄은 어느 순간 신음을 참고 있던 C와 눈이 마주쳤다. 이윽고 P도 그녀를 발견했다. P는 점잖게 헛기침을 한 후 류봄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다가와 방문을 닫았다. C가 대한전공의협의회에 P에게 지속적인 폭행을 당해왔다는 민원을 넣은 것은 그 일이 있고 일주일 후였다. 마침 부산의 한 대학병원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던 터라, 한국 최고의 대학병원에서 폭행민원이 접수되었다는 소식은 전국적인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로 지목된 그녀는 경찰 조사에 응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반차를 내고 병원 현관을 나서던 류봄은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P와 마주쳤다. P는 그녀의 어깨에 잠시 손을 얹더니 어깨를 툭툭 치고 병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날 조사에서 류봄은 P가 C를 폭행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며, P는 레지던트들에게 늘 자상하고 친절하게 대해주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C의 주장이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판단했고, P에게 레지던트 폭행 혐의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U대학교 부속 병원은 정직하고 훌륭한 병원이라는 이미지를 지킬 수 있었다. 그 일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대중들의 뇌리에서 서서히 잊혀 갔다. 병원 내에서 C의 평판은 바닥을 찍었다. 그 일이 있고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C는 치사량의 포타슘을 자신의 정맥에 주사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2년 후에 류봄은 U대 병원의 정신과 전문의가 되었고, 그녀의 커리어는 고속도로 위를 달리다시피 했다. 몇 년 뒤 P가 건강상의 이유로 퇴직하였을 때, 그는 류봄에게 정신의학과 과장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병원 직원 중 아무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누가 봐도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던 삶이었지만, 류봄은 행복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식 의사가 되고 만 1년이 지났을 때 결혼을 했다. 상대는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소개받은 선배 의사였다. 누구보다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던 류봄이었기에, 결혼생활 또한 순조로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결혼하고 1년이 지나도 아기가 들어서지 않자 시부모는 류봄에게 검사를 받아볼 것을 종용했다. 그녀는 불임 판정을 받았고, 그러자 남편 측은 이혼을 요구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벌을 받은 것일지도, 라고 류봄은 한산해진 진료실에 홀로 앉아 생각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었다. 류봄은 구내식당을 잘 이용하지 않았다. 지난 10여 년 동안 혼자 밥 먹는 것에는 익숙해진 그녀였지만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며 식사를 하는 하얀 가운들 사이에서 묵묵히 홀로 밥을 먹는 것은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럴 때면 어쩐지 무리에서 외따로 떨어진 철새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평소에 류봄은 병원 근처의 제육볶음이 맛있는 백반집에서 끼니를 해결하곤 했다. 류봄과 연배가 비슷한 여자가 혼자 꾸려나가는 식당이었는데, 아이가 백혈병으로 U대 병원에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그녀와는 어느새 서로 반말로 농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어쩐지 느끼하고 몸에 안 좋아 보이는 걸 먹고 싶어, 라는 마음의 속삭임에 류봄은 병원 1층의 햄버거 프랜차이즈로 향했다.

 

류봄은 치킨 버거 세트를 주문했다. 점원은 이번 달 프로모션입니다, 라고 말하며 버거와 캐릭터 열쇠고리를 함께 건넸다. 하얀 바탕에 까만 눈, 역삼각형 모양의 까만 코를 가진 토끼 캐릭터였고, 몸통에는 햄버거 프랜차이즈의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무심히 테이블에 열쇠고리를 내려놓고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던 류봄은 자기 쪽을 바라보던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환자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아 소아병동 환자인 것 같았다. 류봄은 아이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다시 햄버거를 집어 들었다. 자신은 평생 낳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었을까, 3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류봄은 아이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게임중독 청소년이나 자폐를 가진 어린이들이 진료실을 찾아오면 괜히 서랍에 넣어두었던 초코바를 꺼내 쥐어주곤 했다.

 

“아줌마, 이 토끼 뭔지 알아요?”

햄버거를 먹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던 류봄은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어느새 소아병동 아이는 류봄 맞은편에 양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아니, 모르는데, 라고 류봄은 대답했다.

“그러면요, 여기 이거는 얘 입이게요, 코게요?”

아이는 류봄이 코라고 생각했던 토끼 얼굴의 역삼각형 모양을 가리키며 물었다.

“코 아니야?”

“땡! 이건 얘 입이에요!”

아이는 즐겁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아… 난 이게 얘 코인 줄 알았어. 입이라기엔 너무….. 부자연스러운데”

“그거는 얘가요, 슬퍼도 안 슬픈 척 웃고 화나도 안 화난 척 웃고 있어서 그래요. 얘는 맨날 이렇게 웃으면서 방방 뛰어다니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은 얘가 맨날 행복한 줄 알고 좋아해요. 저도 약간 그렇거든요. 그래서 얘가 저 같아서 좋아요.”

류봄은 아이를 자세히 살폈다. 아무리 높게 잡아도 초등학생 이상으로는 안 보이는 아이인데, 그런 어린 아이 입에서 어째서 저런 말이 나올까. 저 애의 삶도 순탄치 않았나보다, 하고 류봄은 생각했다.

“이름이 뭐야?”

“얘 이름은 오버액션토끼에요.”

“말고, 네 이름말이야.”

“저는 이세민이에요! 저 병원에 엄청 오래 있었는데요, 아줌마 지나다니는 것도 몇 번 봤어요. 아줌마 의사죠?”

“어떻게 알았어?”

“지금 가운 입고 계시잖아요. 그리고 우리 엄마 식당 올 때도 맨날 가운 입고 왔잖아요. 와서 맨날 제육볶음만 먹고 가잖아요. 히힛”

세민이 킥킥 웃으며 말했다.

“그럼 혹시…. 네가 백반집 아이니?”

“네! 전 아줌마 몇 번 봤는데, 아줌마는 기억이 안 나나 봐요. 쪼금 섭섭하다.”

류봄은 미소를 짓고는 이 열쇠고리 너 가질래, 라고 세민에게 물었다. 아이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래도 돼요? 저도 하나 받았긴 한데요, 병원에서 만난 친구가 있거든요. 그 친구도 하나 주고 싶었는데, 치즈버거 세트를 한 개 더 사먹을 돈이 없었어요.”

“그럼 이거 가져가서 친구 줘.”

“감사합니다! 제 친구 이름은 안수하에요! 나중에 수하도 소개시켜 드릴게요.”

류봄은 명랑하면서도 어딘가 슬퍼 보이는 이 아이가 마음에 들었다. 아이는 의자에서 일어나 배꼽인사를 하고 가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류봄은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이의 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그 후로 몇 번 류봄은 병원에서 세민을 마주쳤고, 그럴 때마다 괜히 반가워 몇 마디씩 말을 건네곤 했다. 처음엔 세민도 제법 붙임성 있게 대답을 해 주었다. 어른스럽지만 역시 어린아이는 어린아이여서, 은연중에 어리광을 부리기도 했고 귀여운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아이의 표정이 시나브로 어두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류봄은 병원 로비를 유령처럼 배회하던 아이를 불러 세워 햄버거 가게에 앉혔다. 요즘 들어 왜 이렇게 우울해 보이냐는 류봄의 물음에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 동안 햄버거 세트에 따라 나온 오버액션토끼 열쇠고리를 만지작거렸다.

“…… 수하가 사라졌어요. 우리 아지트에도 안 찾아오고, 병원을 다 뒤졌는데도 안 보여요.”

“저번에 말한, 네 친구 말이야?”

“네….”

“글쎄…. 퇴원한 거 아닐까? 건강해져서.”

“아니에요! 수하는 말도 없이 사라질 그런 애가 아니란 말예요!”

세민은 잠시 생각하더니 선언하듯이 말했다.

“수하는…. 납치된 거예요. 얼마 전에 수하가 그랬어요, 하루 종일 누군가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고. 하루는 이상한 아저씨들이 수하를 끌고 가서 머리에 이상한 모자를 씌우고 이상한 통에 집어넣었데요. 수하가 막 아프다고 하고 그만하라고 해도 아저씨들은 들어주지도 않았데요. 거기 하루 종일 있다가 풀려났다고, 너무 무서웠다고 그랬어요.”

“그냥 MRI 찍고 마취 수술 한 거 아닐까? 그건 이상한 짓이 아니라 치료의 한 부분이야.”

“아니에요! 저도 수하도 MRI도 찍어 봤고 마취도 해 봤는데, 그거랑 진짜 다른 거예요! 자기를 실험용 쥐처럼 다뤘다고 수하가 그랬어요.”

류봄은 세민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아이의 눈빛은 진실 되고 절박해보였다. 마치 7년 전의 C처럼. 이 아이는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거짓을 말하는 것일까. 혹시 수하라는 아이는 이 아이의 환상 속에서 탄생한 가상의 친구가 아닐까. 이 아이를 믿어줘야 할까. 만약 세민의 말이 사실이라면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될 터였다.

“….아줌마, 그 아저씨들 좀 막아 주시면 안돼요? 이러다가 수하한테 큰일이 날지도 모른단 말예요.”

류봄은 도움을 요청하는 세민의 간절한 눈빛을 애써 피했다. 이런 일에 나서는 것은 류봄이 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글쎄, 네가 말하는 아저씨들이 누군지 모르겠다. 너무 막연하고 불분명한 정보라서, 그거로는 수하를 찾을 수 없을 거야. 아무래도 나는 너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구나.”

아무래도 세민은 의사를 잘못 찾아온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류봄은 말했다. 세민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신 것이 보였다. 세민은 알겠다고 대답한 후 빈 햄버거 포장지를 버리고 일어서 휘적휘적 가게를 빠져나갔다. 늦은 끼니를 때우러 찾아간 백반집에서도 세민은 줄곧 상처 입은 표정으로 류봄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앞으로 다시 저 아이를 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고, 류봄은 불현 듯 생각했다. 어쩐지 가슴 한편이 싸한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류봄은 스스로에게 잘했어. 잘했어, 류봄, 이라고 되뇌었다. 애초에 저 아이의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도 불분명하잖아.

 

그러나 세민의 말이 전부 사실이었음을, 류봄은 곧 알게 되었다.

“소아병동에 안수하라는 애, 소문 들었어?”

의국 앞을 지나가던 류봄은 안쪽에서 들려오는 안수하라는 이름에 걸음을 멈추었다. 류봄은 홀린 듯 안으로 들어갔다. 텅 빈 의국에는 레지던트 몇 명이 모여 앉아 있었다. 류봄은 커피를 타 마시는 척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지만, 그녀를 의식한 레지던트들이 거의 속닥거리다시피 대화를 이어갔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약물, 의료사고, 인격 장애, 실험, 연구 같은 단어들만이 드문드문 들려왔으나, 그 단어들만으로도 사건의 경중을 파악할 수 있었다. 류봄은 원두를 내리며 슬금슬금 레지던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홍세연 연구원이랑 박민철 쌤?”

한 레지던트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는 류봄의 눈치를 살피더니 제 입을 틀어막았다. 류봄은 그만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몸을 돌렸다. 흥분한 레지던트들은 어느새 류봄의 존재를 망각한 듯 했다.

“미쳤다…. 박민철 그 인간은 인간쓰레기를 넘어서 핵폐기물 아니냐?”

“글니까, 나 인턴 때 말야, 그 인간이….”

홍세연과 박민철은 류봄도 아는 작자들이었다. 전자는 U대 의대 부설 연구소의 연구원, 후자는 같은 병원 소속 의사였다. 홍세연과는 병원과 연구소가 함께 하는 망년회나 단합회 때 몇 번 마주쳤는데, 류봄은 그의 모습이 마치 혀를 날름거리는 독사와 같다고 생각했다. 박민철은 여러모로 P 교수를 닮은 인간이었다. 게다가 무능력하기까지 해서 근래에도 의료사고를 일으켰다고 들었다. 듣자 하니 그 콤비가 안수하를 모르모트로 삼아 수상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일에 엮이면 괜히 귀찮아지기만 할 것이라고 류봄의 이성이 속삭였다. 류봄은 의국 밖으로 슬슬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위험한 인간들한테 붙잡혀 있다면, 안수하라는 그 아이는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갑작스럽게 울린 휴대전화 벨소리에 류봄은 흠칫 놀랐다. 백반집 여자였다.

 

류봄은 진료실 책상에 눕듯이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맸다. 백반집 여자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들에 머리가 아파왔다. 혼란스러웠다. 아마도 거기엔 안수하의 근황에 대한 충격적인 이야기뿐만 아니라 선뜻 안수하를 구하는 계획에 동참하겠다고 말한 10분 전의 자신의 모습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지금 대체 뭐 하는 거야, 그녀의 이성이 소리쳤다. 도대체 뭐 하고 싶은 거야, 너 이런 사람 아니잖아. 류봄은 멍하니 책상 위를 내려다보았다. 몇 주 전 세민에게 받은 쪽지가 책상에 붙어 있었다.

‘아줌마, 엄마가 아이스 홍시 사 놨대요. 오늘 꼭 식당에 놀러오세요! 수하도 나중에 꼭 소개해 드릴게요! -이세민-’

쪽지에는 아이가 크레파스로 그린 것 같은 조약한 약도가 그려져 있었고, 그 밑에는 류봄과 두 아이, 그리고 예의 토끼 캐릭터로 추정되는 난해한 그림이 있었다. 그림에서 안수하와 이세민은 풍선을 손에 들고 밝게 웃고 있었고, 류봄의 등에는 하늘색 날개가 그려져 있었다. 류봄은 한 손으로는 오버액션토끼의 손을, 다른 손으로는 세민의 손을 잡고 있는 그림 속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갑자기 들려오는 빗소리에 류봄은 반사적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장맛비가 내리고 있었다. 7년 전 그날만큼이나 세찬 비였다.

 

이튿날 오후에 류봄은 반차를 내고 백반집을 찾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삐걱거리는 문을 여니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던 세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모였다. 이제 어쩔 셈이냐, 류봄의 이성이 조소하듯이 물었다. 한눈에도 연륜 있는 학자처럼 보이는 남자가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U대 의대 연구소 소속 류혁진입니다. 이쪽은 제 밑에서 일하고 있는 신임 연구원 한도윤 양입니다.”

“아…. U대 병원 정신의학과 과장 류봄입니다.”

“세민이 어머니한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수하…. 도와주신다고 하셨다고…..”

“네…. 일종의 의료사고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수하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특수하고 비범한, 어떤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고요. 그러자 U대 의대 연구소에서 수하를 연구대상으로 삼고 다소 비윤리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시작했다고 …. 전해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해당 연구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연구과정에서 연구 대상인 안수하 양을 대상으로 비윤리적인 행위가 발생하지는 않았는지 규명하려고 합니다. 저희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 문제를 공론화시켜 연구의 진행을 중단시키고, 안수하 양에게 적절한 치료와 교육을 제공하는 데에 있습니다.”

“네, 저도 할 수 있는 한 돕겠습니다. 제가 어떤 일을 하면 되지요?”

“선생님은 병원 내에서 입지가 확고하시지요. 그리고 기자나 의료계 인사들과도 면식이 있으시고요.”

“네….. 그렇다고 할 수 있겠죠.”

“수하를 대상으로 어떤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지, 그 연구가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 외부에 알려주십시오. 연구소는 폐쇄적인 곳입니다. 외부인들은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고 있어요. 가능하시겠습니까?”

“그 정도라면…..”

“이곳은 홍세연 연구원처럼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절망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이 판치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이 정상적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어요. 수하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외부의 힘이 필요합니다.”

“……..”

“메일 주소를 알려주십시오. 지금까지 저희가 캐낸 해당 연구 관련 자료와 수하 양의 능력에 관한 보고서를 보내드리겠습니다. 험난한 싸움이 될 것입니다. 보내드린 자료를 읽어보신 후에 다시 모여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요”

“네, 알겠습니다. 메일주소는…. 여기 있습니다.”

류봄은 주머니를 뒤져 한동안 꺼내보지 않았던 명함을 꺼내 류혁진에게 건넸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정말 감사드려요, 류봄 선생님.”

한도윤이 말했다. 류봄은 그녀의 눈빛이 어딘가 세민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꼭 진실을 밝혀낼 겁니다, 라고 말하며 류혁진이 악수를 청했다. 류봄은 그의 손을 힘껏 잡고 흔들었다.

 

장맛비에 사람들의 발이 묶인 것인지, 오후의 진료실은 한산했다. 류봄은 한참 동안 류혁진의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니, 그녀의 이성이 중얼거렸다. 아마 그렇지 않을까, 하고 류봄은 이성의 물음에 답했다. 그녀는 류혁진이 보낸 메일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파일에는 연구에 대한 상세 정보와 연구의 진행 상황에 대한 자료와 함께 틈틈이 몰래 찍은 것 같은 스냅 사진들도 들어 있었다. 류봄은 그 사진들을 통해 안수하를 처음으로 대면했다. 앙상하고 괴로워 보이는, 만신창이가 된 것 같은 앳된 아이였다. 아이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고, 표정은 무표정했다. 류봄은 휴대폰 연락처를 뒤져 도움에 될 만한 번호들을 찾아냈다. U대 병원의 최연소 정신의학과 과장이라는 타이틀이 PD와 기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들렸던 모양인지, 그녀는 의학 다큐멘터리나 육아 프로그램의 단골 출연자였고, 몇몇 신문에 칼람을 연재한 적도 있었다. 성공의 척도로만 생각했던 그 경력들이 뜻밖에 이런 일에 도움이 될 줄이야, 인생은 정말 모를 일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류봄은 기자들에게 류혁진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넘겨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휴대폰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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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대 병원은 비윤리적인 생체 실험을 중지하라’

‘아이를 풀어주고, 연구책임자는 사임하라’

바람에 날려 온 대자보 조각이 발에 채였다. 언제나 말끔했던 병원은 며칠 사이에 꽤나 을씨년스러워졌다. 소식이 알려진 후 병원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분노했고, 병원 앞에서는 연일 시위가 벌어졌다. 퇴원수속을 밟고 다른 병원으로 옮기겠다고 말하는 환자들도 있었다. 그 일을 언론에 알린 것이 류봄이라는 사실은 곧 병원과 연구실 전체에 퍼졌다. 몇몇 간호사와 의사들은 류봄이 지나갈 때마다 역병을 보듯이 피했다. 류봄은 허리를 펴고 꼿꼿이 걸어 진료실로 들어갔다. 환자가 많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진료실은 하루 종일 한산했다.

 

궁지에 몰린 홍세연과 박민철은 사건이 공론화되고 사흘이 흐른 후 안수하를 풀어줬다. 안수하의 모친은 외국에서 유학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반집 여자가 임시로 안수하를 맡기로 결정되었다. 안수하의 치료와 교육은 류혁진이 전담하게 되었다. 안수하는 이제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주로 제일 친한 친구인 세민과 시간을 보냈다. 세민은 다시 밝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가끔 병원 복도에서 마주칠 때면 세민은 씩씩하게 말을 붙여왔다. 그럴 때 마다 류봄은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왁자지껄한 소리에 류봄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인권단체 관계자들이 부스를 철거하고 짐을 정리해 떠나고 있었다. 장맛비가 내리는데, 라고 류봄은 중얼거렸다. 류봄은 다시 책상에 앉았다. 아직 할 일이 하나 남아있었다.

 

안수하 사건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류봄은 경찰서로 향할 것이다. P의 레지던트 폭행 사건에 대한 진술을 번복하기 위해서였다. P가 C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어째서 그때 자신이 진실을 말하지 않았는지 다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그게 불러일으킬 파장에 대해서는 류봄도 알고 있었다. U대 병원의 최연소 정신의학과 과장의 자리는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그녀는 많은 비난을 받을 것이고, 아마 다시는 의료계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세민과 백반집 여자마저 그녀를 꺼려하게 될지도 모른다. 병원의 이미지는 추락할 것이고, 그녀 자신과 은퇴 후 여기저기 강연을 다니고 책을 출판해 일약 유명세를 얻고 있는 P 두 사람 다 처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문득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의 C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류봄은 지난 몇 년 동안 단 한 번도 그의 묘소에 찾아가지 않았다. 그건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이번에야말로 그를 찾아가야겠다, 술과 꽃을 사서, 그의 묘 앞에 무릎을 꿇어야겠다, 류봄은 두서없이 생각했다. 그가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을지,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류봄은 문득 알고 싶어졌다. 어리고 미성숙했던 자신은, 그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

 

“아줌마! 엄마가 저녁 드시러 오래요!”

세민이 진료실 문을 힘차게 열고 뛰어 들어왔다. 그럼 갈까, 하고 류봄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비는 어느덧 그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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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방관.

 

그것은 류봄이 예과 2년, 본과 4년, 인턴 1년, 레지던트 4년, 정신의학과 전문의 6년의 긴 시간동안 터득한 유일한 삶의 방식이었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사회의 부조리함을 수용하고, 도움을 청하는 간절한 손길을 뿌리치는 것에 그녀는 어느덧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가끔 양심의 가책이 들기도 했지만, 방관하지 않는 삶을 살았더라면 이 자리까지 오를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녀는 종종 생각하곤 했다. 그녀는 이제는 경영 부실로 인해 폐교된 지방 사립대학의 의대를 졸업했다. 그 대학에 부속 병원 같은 것은 당연히 없었으므로 졸업이 다가올 무렵 그녀는 타 대학병원에 인턴 지원서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병원인 U대학교 부속 병원에서, 동기들 중 누구보다 빠르게 승진해 30대 후반의 나이에 정신의학과 과장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원칙대로 올바르게 살았더라면 결코 이룰 수 없었던 성과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비오는 날이면 류봄은 종종 새벽에 악몽을 꾸다 깨어나곤 했다. 늘 같은 꿈이었다. 꿈에서 그녀는 정신과 레지던트 3년차였을 때로 돌아가 있었다. 장맛비가 무섭게 퍼붓던 날이었다. 30살의 그녀는 의국의 열린 문틈으로 레지던트 4년차 선배인 C가 당시 정신의학과 과장이었던 P에게 폭력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P는 바닥에 쓰러진 C를 발로 걷어차고 밟으며 환자들 앞에서는 결코 입에 담지 않는 욕지거리를 해대고 있었다. 저 정도로 맞았으면 분명 온 몸에 멍이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류봄은 어느 순간 신음을 참고 있던 C와 눈이 마주쳤다. 이윽고 P도 그녀를 발견했다. P는 점잖게 헛기침을 한 후 류봄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다가와 방문을 닫았다. C가 대한전공의협의회에 P에게 지속적인 폭행을 당해왔다는 민원을 넣은 것은 그 일이 있고 일주일 후였다. 마침 부산의 한 대학병원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던 터라, 한국 최고의 대학병원에서 폭행민원이 접수되었다는 소식은 전국적인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로 지목된 그녀는 경찰 조사에 응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반차를 내고 병원 현관을 나서던 류봄은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P와 마주쳤다. P는 그녀의 어깨에 잠시 손을 얹더니 어깨를 툭툭 치고 병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날 조사에서 류봄은 P가 C를 폭행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며, P는 레지던트들에게 늘 자상하고 친절하게 대해주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C의 주장이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판단했고, P에게 레지던트 폭행 혐의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U 대학교 부속 병원은 정직하고 훌륭한 병원이라는 이미지를 지킬 수 있었다. 그 일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대중들의 뇌리에서 서서히 잊혀 갔다. 병원 내에서 C의 평판은 바닥을 찍었다. 그 일이 있고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C는 치사량의 포타슘을 자신의 정맥에 주사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2년 후에 류봄은 U대 병원의 정신과 전문의가 되었고, 그녀의 커리어는 고속도로 위를 달리다시피 했다. 몇 년 뒤 P가 건강상의 이유로 퇴직하였을 때, 그는 류봄에게 정신의학과 과장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병원 직원 중 아무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누가 봐도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던 삶이었지만, 류봄은 행복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식 의사가 되고 만 1년이 지났을 때 결혼을 했다. 상대는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소개받은 선배 의사였다. 누구보다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던 류봄이었기에, 결혼생활 또한 순조로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결혼하고 1년이 지나도 아기가 들어서지 않자 시부모는 류봄에게 검사를 받아볼 것을 종용했다. 그녀는 불임 판정을 받았고, 그러자 남편 측은 이혼을 요구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벌을 받은 것일지도, 라고 한산해진 진료실에 홀로 앉아 생각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었다. 류봄은 구내식당 대신 병원 근처 상가에 있는 햄버거 프랜차이즈로 향했다. 지난 10여 년 동안 혼자 밥 먹는 것에는 익숙해진 그녀였지만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며 식사를 하는 하얀 가운들 사이에서 묵묵히 홀로 밥을 먹는 것은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 일이었다.

 

류봄은 치킨 버거 세트를 주문했다. 점원은 이번 달 프로모션입니다, 라고 말하며 버거와 캐릭터 열쇠고리를 함께 건넸다. 하얀 바탕에 까만 눈, 역삼각형 모양의 까만 코를 가진 토끼 캐릭터였고, 몸통에는 햄버거 프랜차이즈의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무심히 테이블에 열쇠고리를 내려놓고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던 류봄은 자기 쪽을 바라보던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U대 병원 로고가 박힌 환자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아 소아병동 환자인 것 같았다. 류봄은 아이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다시 햄버거를 집어 들었다. 자신은 평생 낳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었을까, 3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류봄은 아이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게임중독 청소년이나 자폐를 가진 어린이들이 진료실을 찾아오면 괜히 서랍에 넣어두었던 초코바를 꺼내 쥐어주곤 했다.

 

“아줌마, 이 토끼 뭔지 알아요?”

햄버거를 먹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던 류봄은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어느새 소아병동 아이는 류봄 맞은편에 양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아니, 모르는데, 라고 류봄은 대답했다.

“그러면요, 여기 이거는 얘 입이게요, 코게요?”

아이는 류봄이 코라고 생각했던 토끼 얼굴의 역삼각형 모양을 가리키며 물었다.

“코 아니야?”

“뗑! 이건 얘 입이에요!”

아이는 즐겁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아… 난 이게 얘 코인 줄 알았어. 입이라기엔 너무….. 부자연스러운데”

“그거는 얘가요, 슬퍼도 안 슬픈 척 웃고 화나도 안 화난 척 웃고 있어서 그래요. 얘는 맨날 이렇게 웃으면서 방방 뛰어다니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은 얘가 맨날 행복한 줄 알고 좋아해요. 저도 약간 그렇거든요. 그래서 얘가 저 같아서 좋아요.”

류봄은 아이를 자세히 살폈다. 아무리 높게 잡아도 초등학생 이상으로는 안 보이는 아이인데, 그런 어린 아이 입에서 어째서 저런 말이 나올까. 저 애의 삶도 순탄치 않았나보다, 하고 류봄은 생각했다.

“이름이 뭐야?”

“얘 이름은 오버액션토끼에요.”

“말고, 네 이름말이야.”

“저는 이세민이에요! 저 병원에 엄청 오래 있었는데요, 아줌마 지나다니는 것도 몇 번 봤어요. 아줌마 의사죠?”

류봄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 열쇠고리 너 가질래, 라고 세민에게 물었다. 아이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래도 돼요? 저도 아까 하나 받았긴 한데요, 병원에서 만난 친구가 있거든요. 그 친구도 하나 주고 싶었는데, 치킨 버거 세트를 한 개 더 사먹을 돈이 없었어요.”

“그럼 이거 가져가서 친구 줘.”

“감사합니다! 제 친구 이름은 안수하에요! 나중에 수하도 소개시켜 드릴게요.”

류봄은 명랑하면서도 어딘가 슬퍼 보이는 이 아이가 마음에 들었다. 아이는 의자에서 일어나 배꼽인사를 하고 가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류봄은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이의 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류봄이 이세민이라는 아이와 그 아이의 친구를 만나게 된 것은 그 날로부터 일주일 정도가 지난 후였다. 점심을 먹으러 진료실 밖으로 막 나가던 류봄은 문 앞에 서 있던 두 아이를 발견했다.

“아줌마! 오늘부터 길 건너 돈까스 가게에서 왕돈까스 시키면 오버액션토끼 인형을 준대요! 같이 가실래요?”

“음…. 그럴까? 내가 사 줄게.”

“아니에요, 우리도 돈 있어요. 돼지저금통 깨 왔는데….”

그 돈은 더 좋은 데에 쓰렴. 나는 이십 분 일하면 왕돈까스 세 접시 살 돈을 벌 수 있단다, 라고 말하며 류봄은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 맞다! 아줌마, 얘가 저번에 제가 말씀드렸던 수하에요.”

처음 뵙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너무 스산하게 들려 류봄은 걸음을 멈추었다. 빼빼 마른 아이의 홀쭉한 얼굴에는 다크 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 아이는 무엇이 불안한지 연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어디가 아픈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자폐가 있는 아이일수도 있겠다고 류봄은 생각했다. 류봄은 돈까스를 먹으며 아이를 계속 지켜보았다. 아이는 전반적으로 주변 환경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지만, 세민과 이야기를 할 때는 밝게 웃었다. 그래도 의지할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녀가 생각할 찰나였다.

“아줌마, 저 화장실 가고 싶은데 같이 가주시면 안돼요?”

류봄은 세민과 함께 일어섰다. 화장실 문이 닫히자마자 세민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줌마, 수하 좀 도와주세요.”

“도와…..달라니?”

“수하가 그러는데요, 이상한 아저씨들이 매일 수하를 끌고 가서 머리에 이상한 모자를 씌우고 이상한 통에 집어넣는데요. 또 막 이상한 약을 먹여서 재워놓고 몸에 이상한 짓을 한데요. 수하가 막 아프다고 하고 그만하라고 해도 아저씨들은 들어주지도 않는데요. 거기 수하 엄마가 같이 있을 때도 있는데, 수하 엄마는 수하가 도와달라고 해도 그냥 보고만 있는데요.”

“그냥 MRI 찍고 마취 수술 한 거 아닐까? 그건 이상한 짓이 아니라 치료의 한 부분이야.”

“아니에요! 저도 수하도 MRI도 찍어 봤고 마취도 해 봤는데, 그거랑 진짜 다른 거예요! 자기를 실험용 쥐처럼 다룬다고 수하가 그랬어요.”

“수하는 어디가 아픈데?”

“음…. 뭐라더라… 인격 장애? 그런 게 있고요. 팔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데요. 이상한 아저씨들이랑 실험하고 나면 더 아프다고 그랬어요?”

“혹시 수하가 망상 증세를 보이고 있는 게 아닐까? 망상이 뭐나면…. 없던 일을 있는 것처럼 느끼는 건데…”

“아니에요! 그 아저씨들 저도 봤단 말이에요. 점심 먹고 나면 또 수하를 데리고 갈 걸요? 아줌마, 그 아저씨들 좀 막아 주시면 안돼요? 이러다가 수하한테 큰일이 날지도 모른단 말예요.”

류봄은 도움을 요청하는 세민의 간절한 눈빛을 애써 피했다. 아이의 말을 믿어도 될 지부터 확신이 들지 않았다.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어쩔 것인가. 이런 일에 나서는 것은 류봄이 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세민은 의사를 잘못 찾아온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류봄은 세민에게 수락도 거절도 아닌 애매한 말을 건넸다.

 

그러나 세민의 말이 전부 사실이었음을, 류봄은 곧 알게 되었다.

“소아병동에 안수하라는 애, 소문 들었어?”

의국 앞을 지나가던 류봄은 안쪽에서 들려오는 안수하라는 이름에 걸음을 멈추었다. 류봄은 홀린 듯 안으로 들어갔다. 텅 빈 의국에는 레지던트 몇 명이 모여 앉아 있었다. 류봄은 커피를 타 마시는 척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지만, 그녀를 의식한 레지던트들이 거의 속닥거리다시피 대화를 이어갔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약물, 의료사고, 인격 장애, 실험, 연구 같은 단어들만이 드문드문 들려왔으나, 그 단어들만으로도 사건의 경중을 파악할 수 있었다. 류봄은 원두를 내리며 슬금슬금 레지던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강호민 연구원이랑 박민철 쌤?”

한 레지던트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는 류봄의 눈치를 살피더니 제 입을 틀어막았다. 류봄은 그만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몸을 돌렸다. 흥분한 레지던트들은 어느새 류봄의 존재를 망각한 듯 했다.

“미쳤다…. 박민철 그 인간은 인간쓰레기를 넘어서 핵폐기물 아니냐?”

“글니까, 나 인턴 때 말야, 그 인간이….”

강호민과 박민철은 류봄도 아는 작자들이었다. 전자는 약사 출신 연구원, 후자는 같은 병원 소속 의사였다. U대 의대 부설 연구소 소속인 강호민과는 병원과 연구소가 함께 하는 망년회나 단합회 때 몇 번 마주쳤는데, 류봄은 그의 모습이 마치 혀를 날름거리는 독사와 같다고 생각했다. 박민철은 여러모로 P 교수를 닮은 인간이었다. 게다가 무능력하기까지 해서 근래에도 의료사고를 일으켰다고 들었다. 듣자 하니 그 콤비가 안수하를 모르모트로 삼아 수상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일에 엮이면 괜히 귀찮아지기만 할 것이라고 류봄의 이성이 속삭였다.

 

‘엄마가 병원 앞에 식당을 열었어요. 아줌마, 오늘 꼭 놀러오세요! -이세민-’

진료실 문에 붙어있는 도화지를 발견한 류봄은 흠칫 놀랐다.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던 탓이었다. 쪽지에는 아이가 크레파스로 그린 것 같은 조약한 약도가 그려져 있었고, 그 밑에는 류봄과 두 아이, 그리고 예의 토끼 캐릭터로 추정되는 난해한 그림이 있었다. 그림에서 안수하와 이세민은 풍선을 손에 들고 밝게 웃고 있었고, 류봄의 등에는 하늘색 날개가 그려져 있었다. 류봄은 한 손으로는 오버액션토끼의 손을, 다른 손으로는 세민의 손을 잡고 있는 그림 속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런 그림 따위는 재빨리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리라고, 지금 대체 뭐 하는 거야, 하고 류봄의 이성이 말했다. 이 식당에서 세민과 그 모친을 만나게 되면 꼼짝없이 사건에 관여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류봄의 손은 이성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뭐야, 너 이런 사람 아니잖아, 그녀의 이성이 악을 쓰다시피 말했다. 갑자기 들려오는 빗소리에 류봄은 반사적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장맛비가 내리고 있었다. 7년 전 그날만큼이나 세찬 비였다.

 

“우와, 아줌마! 오셨네요!”

축하 화환의 꽃이 아직 싱싱한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세민의 낭랑한 음성이 류봄을 반겼다. 류봄은 자신이 조악한 지도 하나를 가지고 무섭게 퍼붓는 장맛비를 뚫고 이 식당까지 왔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이제 어쩔 셈이냐, 이성이 조소하듯이 물었다.

“아줌마 배고프시죠? 저기 앉으세요! 우리 엄마는 제육볶음 잘해요.”

세민이 홀로 뛰어 들어가 의자를 빼 주었다.

“뛰어다니지 마, 세민아. 그러다 다칠라.”

류봄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때 인턴 생활을 같이 했던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였다. 그는 류봄을 발견하더니 약간은 떫은 표정으로 목례를 건네고 고개를 돌렸다. 자세히 둘러보니 식당에는 소아병동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이곳은 어느새 그들의 단골집이 된 모양이었다. 연구소 사람들도 몇몇 보였다.

“저…. 제육볶음 정식 하나 주세요.”

네, 제육 정식 하나 맞으시죠, 하고 부엌에 있던 여자가 나와 주문을 받았다. 세민의 모친인 모양이었다. 류봄 또래의 여자로 보였으나, 손이 거칠었고 얼굴에는 오래 누적된 피로의 흔적이 보였다. 그렇지만 병원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재롱을 부리는 세민을 바라보는 눈에는 아이에 대한 사랑이 가득해 보였다. 류봄은 음식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들어가려는 여자를 불러 세웠다.

“세민이 어머니 맞으시죠? U대 병원 정신의학과 과장 류봄입니다.”

“아…. 세민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수하…. 도와주신다고 하셨다고…..”

자신의 애매한 답변을 세민은 긍정이라고 받아들인 모양이라고 류봄은 생각했다. 결국 이렇게 흘러갈 일이었던 것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수하가 어떤 연구에 이용되고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 점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으신가요?”

여자가 세민의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와 세민이가 처음 수하를 만난 것은 4년 쯤 전입니다. 수하는 자폐가 있는 아이였는데, 약물 치료를 받고 있었지요. 몇 달 전에 병원 측의 실수로 수하가 잘못된 약물을 처방받게 되었어요. 일종의 의료사고….이지요. 그런데 그 약물이 뜻밖에 수하의 증세를 완화시켰다고 했어요. 다른 자폐 환자들에게서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는데, 수하에게서만. 그러자 U대 의대 연구소에서 수하를 연구대상으로 삼고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 연구가 정상적인 연구는…. 아닌 것 같아요.”

“정상적인 연구가 아니라니요?”

“우리 세민이…. 만성 골수성 백혈병을 앓고 있어요. 세민이는 거의 서너 살 때부터 병원생활을 했어요. 골수성 백혈병은 완치가 가능하다고들 하는데, 세민이는 아직도…. 그래서 백혈병과 관련된 신약이 개발되었다고 할 때마다 임상실험에 참여하기도 했었는데…. 수하가 당하고 있는 실험은 그런 실험과는 달라 보였어요. 조금 더 위험하고 이상한…. 병원 갈 때마다 수하를 만나는데, 하루하루 아이 얼굴이 야위어가는 게 보여요.”

“…… 그렇군요.”

“수하 어머니를 만나 얘기를 나눠 보았는데, 그분은 수하를 짐처럼 생각하시는 분이라….. 오히려 잘 되었다고 느끼시는 것 같아요.”

“……”

 

맞은편 식탁에서 국밥을 먹던 두 연구원이 어느 순간 류봄이 앉은 테이블로 건너왔다.

“그래서 저희는 해당 연구의 목적이 과연 무엇인지, 연구과정에서 연구 대상인 안수하 양을 대상으로 비윤리적인 행위가 발생하지는 않았는지 규명하려고 합니다. 저희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 문제를 공론화시켜 연구의 진행을 중단시키고, 안수하 양에게 적절한 치료와 교육을 제공하는 데에 있습니다.”

세민 모친의 말을 곱씹고 있던 류봄은 그들이 자신의 테이블로 넘어 온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들려오는 담담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렇군요. 그런데 누구시죠, 하고 류봄은 물었다.

“아, 인사가 늦었습니다. U대 의대 연구소 소속 류혁진입니다. 이쪽은 제 밑에서 일하고 있는 신임 연구원 한도윤 양입니다.”

류혁진이라는 남자가 류봄에게 명함을 건네며 저희를 도와주신다고 들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네, 할 수 있는 한 돕겠습니다. 제가 어떤 일을 하면 되지요?”

“선생님은 병원 내에서 입지가 확고하시지요. 그리고 기자나 의료계 인사들과도 면식이 있으시고요.”

“네….. 그렇다고 할 수 있겠죠.”

“수하를 대상으로 어떤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지, 그 연구가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 외부에 알려주십시오. 연구소는 폐쇄적인 곳입니다. 외부인들은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고 있어요. 가능하시겠습니까?”

“그 정도라면…..”

“이곳은 강호민 연구원처럼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절망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이 판치는 곳입니다. 수하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외부의 힘이 필요합니다.”

“……..”

“메일 주소를 알려주십시오. 지금까지 저희가 캐낸 해당 연구 관련 자료와 수하 양의 능력에 관한 보고서를 보내드리겠습니다. 험난한 싸움이 될 것입니다. 보내드린 자료를 읽어보신 후에 다시 모여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요”

“네, 알겠습니다. 메일주소는…. 여기 있습니다.”

류봄은 주머니를 뒤져 한동안 꺼내보지 않았던 명함을 꺼내 류혁진에게 건넸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정말 감사드려요, 류봄 선생님.”

한도윤이 말했다. 류봄은 그녀의 눈빛이 어딘가 세민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꼭 진실을 밝혀낼 겁니다, 라고 말하며 류혁진이 악수를 청했다. 류봄은 그의 손을 힘껏 잡고 흔들었다.

 

장맛비에 사람들의 발이 묶인 것인지, 오후의 진료실은 한산했다. 류봄은 한참 동안 류혁진의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니, 그녀의 이성이 중얼거렸다. 류봄은 책상 한 귀퉁이에 앉혀놓은 토끼 인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왕돈까스를 먹고 얻은 것이었다. 아마 그렇지 않을까, 하고 류봄은 이성의 물음에 답했다. 문득 선배 C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가 죽은 후 몇 년이 지났음에도 류봄은 단 한 번도 그의 묘소에 찾아가지 않았다. 그건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이번에야말로 그를 찾아가야겠다, 술과 꽃을 사가야지, 그의 묘 앞에 무릎을 꿇어야겠다, 류봄은 두서없이 생각했다. 그가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을지,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류봄은 문득 알고 싶어졌다. 어리고 미성숙했던 자신은, 그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 아니, 그건 불가능할 것이다. 어째서 자신은 그토록 근시안적이고, 어리석었을까. 남은 생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고, 류봄은 생각했다.

 

‘띠리링’

새로운 메일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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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백일장 선물 잘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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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야자 끝나고 집에 와 보니 두꺼운 소포 뭉치가….! 독서대, 철학서, 시집에 문구세트까지…..정말 감사합니다! 시험기간이라서 읽지도 쓰지도 못하고 있지만 시험 끝나고 다시 열심히 글틴활동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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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밭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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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년 늦여름이었을 것이다. 중학생 시절 데면데면하게 지내던 아이에게서 갑작스러운 메일을 받았다. 의례적인 인사말 몇 마디를 건넨 후에 그는 내 근황에 대해 줄곧 전해 들었다며 그 당시 내가 열성적으로 하고 있던 이런저런 비교과활동을 언급하더니 이에 대한 제 코멘트를 덧붙였다.

‘…. 정말 가시밭길을 스스로 기어들어가다니 마조히스트의 기질이 있구나….’

 

더 이상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도 들리지 않는 늦은 밤이었고 방구석에는 낮에 예은이와 함께 체크리스트를 써가면서 꾸려놓은 캐리어가 있었다. 나는 혼자 누워 뒤척거리면서 답장도 하지 않고 곧 잊어버렸던 그 메일을 계속 곱씹고 있었다. 수학여행을 가기로 선택한 것이, 더군다나 한라산 코스를 택한 것이 과연 옳았을까 하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나는 아킬레스건이 선천적으로 좋지 않아 오래 걸을 수 없었고, 그래서 초등학생 때도 중학생 때도 다른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간 동안 학교에 남아 당직 선생님과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그런 주제에 한라산이라니, 대체 무슨 정신이었느냐고 나는 과거의 나에게 물었다. 정상에 올라가면 제주도 전체가 조그마한 디오라마처럼 발아래에 펼쳐지고 주위에는 쉼 없이 노루며 사슴이 뛰어다닌다는 말에 혹했을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 수학여행이니 무언가 특별한 것을 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한라산이 남한에서 제일 높은 산이라는 사실은 기억나지 않았을 것이다. 함께 한라산에 가자고 주변 아이들에게 떼를 썼던(물론 그 중 99%는 단칼에 거절했다) 사람이 나였으므로 탓할 사람도 없었다. 진지한 고려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한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막상 수학여행이 다가오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담당한 파트가 2분도 채 안 되는 장기자랑 춤 연습도 힘에 부쳤고, ‘진짜 한라산을 오르겠다고?’라고 묻는 주위의 불신하는 눈빛도 그제야 의식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딱딱한 캐리어 바퀴가 발에 채일 때마다 나는 완전히 잊은 줄 알았던 메일 내용을 무한 반복 재생하고 있었다. 기억하는 바로 그 메일은 이렇게 끝이 났다. 가장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던 것은 그 마지막 문장이었다.

‘ … 그럼 고생해라. 괜히 주변 사람들 고생시키지 말고. ㅇㅅㅇ’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의 농도가 갑작스럽게 옅어졌다. 아파트의 가로등이 일제히 꺼졌다는 뜻이었고, 곧 해가 뜰 것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일어나 머리를 감았다. 수학여행 첫째 날 새벽이었다.

 

 

2

 

3박 4일의 수학여행 중 한라산 등반은 셋째 날에 배정되어 있었다. 둘째날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방에서 친구들과 초콜릿 소물리에를 표방하며 기념품 가게에서 사 온 초콜릿을 까먹고 있던 나는 한라산 코스 참가자들은 로비로 모이라는 안내방송을 들었다. 로비에서 초코바, 소시지 등 한라산 등반 중에 먹을 간식들을 일인분 씩 나눠 담기 위해서였다. 맨 왼쪽으로부터 4, 3, 2, 1 개씩 담으면 돼, 라는 선생님 말씀에 따라 지퍼백에 간식을 나눠 담았다. 한라산 코스를 신청한 순간부터 줄곧 실감나지 않았던, 이튿날에 한라산을 오른다는 사실이 그제야 실감나기 시작했다.

 

한라산은 등반 가능 시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한라산 코스 아이들은 다른 코스보다 더 일찍 로비에 모여 출발했다. 한라산 정상으로 가는 코스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그 중 우리가 오를 코스는 성판악 코스였다. 전날 지퍼백에 챙긴 간식과 두 병의 물, 점심으로 먹을 김밥을 가방에 넣고 ‘13:00까지는 진달래밭 대피소에 도착해야 백록담까지 등반할 수 있습니다’라고 쓰인 푯말을 넘어 한라산에 입산했다.

 

처음에는 평범한 돌길이 이어졌다. 양 옆으로 빽빽이 나무가 심겨져 있다 뿐이지 동네 길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길이었다. 한라산도 별거 아니네, 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조로운 길이라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한참을 걸어 나온 표지판에는 아직 우리는 초급 단계의 등산로에 있으며, 차후 중급 단계와 고급 단계의 등산로를 모두 거쳐야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 각 단계가 끝날 무렵에 대피소가 한 개씩 있었는데, 기상 상황이 악화되었을 때 사람들이 잠시 머무를 수 있게 만든 곳이었던 모양이었다. 초급 단계 등산로가 가장 길이가 길기는 했지만, 아무리 걸어도 일정한 간격마다 세워진, 남은 시간과 간 거리를 알려주는 표지판에 적힌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처음의 목표는 함께 한라산 코스를 신청한 친구 K와 속도를 맞추는 것이었다. 첫 이십 분 정도동안은 실현 가능한 목표였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K의 날랜 걸음을 따라잡는 것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빠른 보폭으로 걸어가는 그를 따라잡으려고 엉성하게 뛰어가 봐도 그가 있던 위치에 내가 도달하자 K의 실루엣은 잔인하리만치 멀어져 있었다. 초반부터 마구 뛰니 메고 있던 크로스백(등산을 하려면 역시 배낭을 챙겨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한라산에서 실감했다)이 점점 더 무겁게 느껴졌다. 결국 나는 K를 좇는 것을 포기하고 내 속도에 맞춰 걷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러자 혹시 내가 일행의 끄트머리일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지만 뒤를 돌아보니 다행히 저 멀리서 실루엣으로 수학 선생님과 한 무리의 아이들이 보였다. 나는 앞으로 돌아 다시 걸었다.

 

한참을 그렇게 걷다 보니 나는 내 가시범위 내에서 홀로 되었다. 잠시 멈춰서 앞뒤를 살펴보았지만 누군가 멀어지는 소리도 가까워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내가 걸으면서 작은 돌을 차는 소리에 섞여 정체모를 조그만 소리만이 들렸다. 아마 나뭇잎이 서로 부딪히며 뒤척거리는 소리였을 것이다. 속삭임 같기도 부스럭거림 같기도 해 계속 귀를 기울이게 되는 소리였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한동안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길이 뻗어나가는 데로 걸어 나갔다. 혼자 걸어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해 주는 소리였다. 하산할 때 그 30분 남짓한 길을 다시 지나가게 되었다. 그 때 국어 선생님께서는 나와 다른 친구를 그 길 구석에 세워두고 일 분 동안 눈을 감고 있으라고 하셨다. 등산하는 길에 들었던 소리가 증폭되어 고요하면서도 왁자지껄하게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3

 

30분 정도 지나 해발 고도를 알리는 비석 앞에 모여 뒤로 오는 아이들 수를 세고 있던 국어 선생님과 서너 명의 아이들을 만났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오른손으로 받쳐 들고 걷고 있던 크로스백을 보시더니 들어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처음에 나는 사양했지만 선생님께서는 한 번 힘이 빠지면 돌이킬 수 없다며 계속 설득하셨다. 그래도 역시 내가 메고 가야겠다고 말하려던 찰나 한 무리의 남자아이들이 개선부대처럼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지나갔다. 그 순간 그들의 함성 소리에 기가 꺾여 계속 고집을 부리려던 패기가 사라졌다. 자칫 이러다가 조 전체가 지체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시간 후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점심을 먹을 때 먼저 와 밥을 먹고 있던 K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네 가방을 쌤이 들고 온 거야?”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K는 농담조로 반칙이네, 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괜히 능력도 안 되면서 한라산에 오른다고 했나, 라는 후회와 부끄러움이 들며 종전에 일어난 다른 사건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가방을 선생님께 드리고 나는 한 손에 얼음물을 들고 계속 걸어가다 B를 만났다. 그는 물이 거의 다 떨어지고 얼음덩이만 남아있던 내 물병을 보더니 자기 물을 좀 부어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거절했다. 다시 목마르기 전까지 남은 물이 얼음을 좀 녹여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산을 올라갈수록 목이 말라 남은 물을 다 마셔버렸고, 점점 기온이 낮아지던 탓에 얼음은 좀처럼 녹지 않았다. B는 이미 저만치 앞서 간 상태였고, 얼리지 않은 물 한 병은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가방 안에 있었다. 초급 코스와 중급 코스 사이의 대피소에서 물을 채워 넣어야 했었겠지만 멈춰 쉬면 뒤처질 것 같아서 바로 중급 코스 등산길로 들어갔던 것이다. 진달래밭 대피소에 들어갈 때까지 나는 전날 오전부터 냉동실에 넣어 꽁꽁 언 얼음에서 한 방울 씩 떨어지는 물을 삼켜가며 걸었다.

 

나는 타인들보다 뒤처지거나 남의 신세를 지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다. 다른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은 늘 쉬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을 하거나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항상 어려웠다. 한 친구는 가끔 나에게 왜 그렇게 아등바등 사는지 물었다. 그때마다 나는 이런 삶의 방식이 있다면 저런 삶의 방식도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하곤 했었다. 한라산에 올라 그 아이가 했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진달래밭 대피소에는 육개장 한 종류의 컵라면만을 팔았다. K와 나는 선생님께서 사 주신 라면 한 컵을 나눠 먹었다. 익히 알던 육개장과는 조금 다른 맛이 났다. 기압 때문인지 면발도 더 탱탱하게 느껴졌다. 중학교 때 에베레스트를 다녀오신 음악 선생님께서 대피소에서 먹었던 신라면 맛이 생생하게 기억난다는 말을 하셨다. 그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의 뜻을 한라산을 오른 후에야 이해하게 되었다.

 

 

4

 

점심을 먹고 대피소를 나와 고급 코스에 접어들었다. 고급 코스는 그 이름에 걸맞게 험준했다. 주변의 등산객들은 등산 스틱으로 돌을 조심스럽게 디디며 걸었다. 나는 배낭은 물론 등산스틱도 없었으므로 그 사람들이 밟은 돌을 유심히 보고 디디려고 노력했지만, 여러 번 발을 헛디디기도 했고 넘어지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고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 몸으로 느껴졌다. 험한 돌길이었던 등산로가 나무 계단으로 바뀌었다. 원형으로 굽어 올라가는 나무 계단을 삼십분 정도 올라가자 사방을 빽빽하게 채운 나무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산 아래가 굽어 보였다. 절벽을 메운 보라색 꽃 뭉텅이 아래로 제주도 전체가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광경인 양 조그맣게 보였다. 산들바람을 맞으며 그 길을 걷는 것은 기묘하고도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아름답다’의 말뜻을 시각적으로 나타내면 이러한 느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기분 좋게 불었던 바람이 점점 강해졌다. 정상에서 1km 정도 남은 지점부터 바람은 한겨울에도 겪어 본 적이 없는 강도로 불어 닥쳤다. 바람에 휩쓸려간다는 말의 뜻을 알 것 같았다. 언젠가부터 등산로에는 계단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굵은 밧줄이 묶여 있었다. 그것 또한 여기저기 나무 지지대가 빠져 그리 믿음직스럽지 않은 모양새였지만, 등산객들은 그 줄에 매달려 기어가듯이 얼마 남지 않은 정상으로 올라갔다. 행여나 모자가 바람에 날아간다면 영영 찾지 못할 것 같아 나는 한 손으로 모자를 잡고 다른 손으로 밧줄을 잡고 올라갔다. 미련한 선택이었다. 바람이 밧줄을 잡은 손 쪽으로 불어왔고, 나는 순식간에 줄을 놓치고 밑으로 쓸려 내려갔다. 내가 인간 폭탄이 되어 기어 올라오는 사람들을 도미노처럼 산 아래로 무너뜨리기 직전에 누군가 뒤에서 나를 잡아 끌어올려주었다. 산타할아버지처럼 숱 많은 수염을 늘어뜨린, 아마도 노르웨이 계통으로 보이는 덩치 큰 서양인이었다. 그가 영어를 알아들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나는 최대한 크게 감사를 표하고 얼마 남지 않은 길을 마저 기어올랐다.

 

한라산의 정상, 즉 백록담에서도 바람은 세차게 불었다. 나는 계단에 앉아 간식을 까먹고 있던 아이들에게로 달려갔다. 산타할아버지 수염의 외국인은 제 집 마루인양 익숙하게 나무 계단에 앉아 페이퍼백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정상에 도착한 수학 선생님은 대자로 누워 주무시고 계셨다. 나는 바람을 헤치고 분화구 쪽으로 다가가며 푸른 물이 반짝거리는 백록담 주위로 노루며 사슴이 평화롭게 노니는 모습을 드디어 보게 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백록담 물은 말라 진갈색 바닥이 드러나 있었고, 당연히 노루나 사슴은 보이지도 않았다. 애초에 한라산을 오른 것이 백록담의 아름다운 광경을 보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실망할 법도 했는데, 그러한 광경을 보고도 아쉽지가 않고 도리어 기쁘고 뿌듯하기만 했다. 나는 백록담에서 눈을 돌려 내가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았다. 끝없이 이어진 길고 아득한 길이었다.

 

 

5

 

내려오는 길도 지겨우리만치 멀었지만 올라가는 길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발을 따라 몸이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후발대와 함께 그 아이들이 등산객들이 버리고 간 페트병이며 비닐 조각을 줍는 것을 도우며 걸어 내려갔다. 국어 선생님과 아이들이 쇼핑백(놀랍게도 쇼핑백 또한 산에 버려져 있던 것들이었다)에 쓰레기를 꽉 채워 들고 오는 것을 보고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말이야…. 사람들이 내 걱정을 해 주는 걸 원하지 않아. 그럴 때마다 초라해진 기분이 들거든.”

멍하게 걷다가 들려온 말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올라갈 때 발을 다친 아이의 목소리였다. 옆의 친구가 그를 걱정하며 한 말에 대한 대꾸였던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걸어 내려가며 한라산을 오르기 전의 내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지 돌이켜보았다.

 

오래전 받은 메일의 내용이 다시 떠올랐다. 가시밭길, 그 아이는 메일에 가시밭길이라고 써 놓았다. 수학여행에서 한라산을 오르기로 한 것은 내 능력에 비해 과분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애가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메일을 보낸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 말은 대충 맞아 들어갔다. 나는 여전히 가시밭길에 제 발로 기어 들어가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만의 가시밭길은 아니었다. 아마 내가 훗날 혼자 한라산을 올랐다면 나는 정상을 보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고 내려왔을 것이다. 선생님께서 가방을 들어주시지 않으셨다면, K가 고급 코스를 내려갈 때 한 걸음 앞서 걸어가며 길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산타 수염의 서양인이 그 슬로프에서 나를 붙잡아주지 않았다면, 나는 백록담을 끝내 보지 못했을 것이고 어쩌면 산 아래에 다시 발을 붙이지도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 아이가 예견한 것처럼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며 가시밭길을 걸어 올랐다. 하지만 가끔은 다른 사람의 도움은 절대 받지 않겠다고 고집부리지 않고 타인의 손을 빌리는 것도 괜찮다고, 이제는, 조금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오래도록 묵혀 놓은 그 메일에 답장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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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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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별도 달도 없는 이 밤을

걷는 건 저 검푸른 물에

모두 휩쓸려가 버렸기 때문일거야

나는 그대와 등을 맞대고 앉아

하염없이 하류로, 하류로,

몸을 내던지는 물줄기를 지켜보았던 것을 기억해.

 

속삭였어 있지 나는

자그마한 시냇물로 흐르고 싶었어

가만가만 노래를 부르며 논둑 사이로 춤을 추듯이

그대는 퍽이나 나이가 든 것처럼

말했어 아냐 어른이 된다는 건

저 검푸른 물에 섞여 휩쓸려가는 거야

소리 없는 노래를 부르며 움직임 없는 춤을 추듯이.

 

그대가 풀 먹인 저고리처럼 웃으며

아득한 하류를 바라보았던 것을 기억해.

어릴 적 보물 상자에 숨겨두었던

새파란 수채 물감 따윈 이미

시간에 내주었는걸 통행료로.

그래 어른이 된다는 건

저 검푸른 물에 새하얀 거품이 되어

 

우리가 별도 달도 없는 이 밤을

걷는 건 저 검푸른 물에

우리가 섞여가고 있기 때문일 거야

나는 그대와 손을 포개고 앉아

하염없이 하류로, 하류로,

팔을 내뻗는 물줄기를 올려다보았던 것을 기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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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포트리트 (self portra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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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사는 소리 없는 음악을 연주하고

무용수는 동작 없는 춤을 춘다

나는 지피에스 없는 내비게이션

항해하네 돛 없이 이 새벽 거리를

언젠가 당신이 쥐여준 새하얀 유화물감일랑은

이미 오래전에 삶에다가 내어주었지 통행료로

…….서투르게 라면 물을 맞추던

어린 연인이여.

 

바람은 소리 없는 음악을 연주하고

가로등은 동작 없는 춤을 춘다

나는 아스팔트 바닥에 유리조각으로 뎃생을 하며

중얼거리네 이것은 이미 자화상이 아니다

언젠가 당신이 쥐여준 샛노란 수채물감일랑은

쓰지 않았으므로 셀프-포트리트지 이것은

…….냄비 뚜껑에 라면을 덜어 후후 불던

나의, 나의 어린 연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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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정보 재동의는 어떻게 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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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동의 하지 않으면 3월 2일부터 탈퇴처리 된다는 메일이 와서 메일에 안내된 링크로 들어갔는데 바로 메인 페이지로 들어가고 아무것도 뜨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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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과 고민: 상담이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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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랜만에 글틴에 들어와, 마침 ‘문학 상담실’이라는 게 열렸다기에, 저도 몇 가지 고민을 털어놓으려고 합니다. 막상 한꺼번에 적으려니 너무 내용이 들쭉날쭉해 두 가지 카테고리로 나눠봤는데, 길더라도 끝까지 읽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1.작가

 

저는 이제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는 학생이고, 갓 기역 니은을 뗀 꼬마에게 김소월 시집을 선물하신 할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글을 읽고 쓰는 걸 좋아했었습니다. 언젠가는 소설가가 되어 있을 거라고 늘 생각해 왔었고요.(제가 열 살 때 쓴 일기장을 다시 보게 되었는데, 거기 내년(11살)의 목표랍시고 “소설책 출판하기”가 적혀 있더군요. 흠…..) 그러나 그 소망이자 확신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흐려졌습니다. 이제 저는 고2가 되었고, ‘학교의 유일한 내신 1.0’이라는 귀속지위에 구속되어 허덕이고 있습니다. 1학년 1학기 때까지만 해도 저와 함께 내신 1.0이었던 친구가 2학기에 성적이 조금 떨어지고, 제가 학교에서 유일하게 1.0 내신을 보유하게 되자 제게 거는 학교와 선생님들의 기대가 갑작스레 높아졌습니다. 지금 저는 의과대학에 진학해 신경학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공부하고 있는데(위의 내용을 읽고서 제가 ‘의사 되서 잘 먹고 잘 살아야지’ 라는 마음으로 진로를 정한 게 아닌가 라는 의심을 하실 수도 있겠지만, 중학교 때 올리버 색스 박사의 책을 접한 후로 신경정신과 의사나 연구자가 되는 게 제 두 번째 꿈이 되었습니다. 미래에는 누구나 서너개 직업을 전전한다고들 하니까요) 선생님들의 입에서 ‘S대 의대 생각은 안 해 보니?’라는 말이 나왔을 때 저는 두려워졌습니다. 그분들이 주목하시는 제 성적에, 속된 말로 ‘운빨’이 많이 작용했다는 걸 알고 있고 올해도 성적을 유지할 수 있을지 전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희 학교는 ‘2017학년도 체제’로 전환하여 문이과 분반과 새 반배정을 하였는데, 새로운 반의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신학기의 들뜸이나 새 친구를 만난다는 설렘을 잃은 아이들이 고요히 자리에 앉아 자습을 하고 있더군요. 새 책상을 물티슈로 한 번 닦고 싶었는데 제 부스럭거림이 다른 친구들에게 행여나 방해가 될까봐 선배들이 남기고 간 풀썩한 먼지가 앉은 책상에 그대로 책을 폈습니다. 책장 넘기는 소리와 샤프 사각거리는 소리만 나는 그 교실이 저는 벌써부터 무서웠습니다. 그것보다 더 두려웠던 건, 제가 그곳에 앉아 수학 문제는 풀지도 않은 채 새로 쓸 시의 첫 구절이 될 문장을 곱씹고 있었다는 것이었어요. 남들은 다 피 터지게 공부하는데, 게다가 엄청 문이 좁은 진로를 희망하는 만큼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데, 글 쓸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너는 뭐냐, 뭐 그런 기분이었어요. 공부를 하려면 글쓰기를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 어쩌면 벌써 포기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가 되려면 어느 정도의 습작과 독서는 필요할 텐데, 사실 마지막으로 소설을 읽은 지도 꽤 되었고(모의고사 지문을 제외하곤요), 매번 글틴에 글을 쓸 때마다 이 글이 마지막 글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한편으론 등단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내가 그것 목표로 수많은 실패를 견딜 경제적/정신적 능력이 될까, 그럴 재능이 있을까, 라는 의구심도 들고요. ‘로그함수의 미분’이니 ‘지구가 생명가능지대인 이유’니 그런 것들에 고개를 파묻고, “전 정말 뼛속까지 이과랍니다~~!!‘라는 뉘앙스의 생기부를 만들기 위해 과학 영재교육원이며 수/과학 경시대회, 의생명과학교실 같은 곳을 쏘다니고, 리처드 도킨스와 칼 세이건의 책으로 생기부 독서기록란을 채우면서, 성적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으면서, 저는 과연 작가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요? 계속 글을 쓸 수 있을까요?

 

2. 작품

 

저는 어릴 적부터 굉장히 빨리 읽고, 굉장히 빨리 쓴다는 평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은, ‘근데 글이 너무 길다’였습니다. 손이 키보드에 닿는 대로 글을 써 내리더니 쓸데없는 사족을 너무 많이 붙였다는 것이었지요. 이 글을 읽으시는 멘토 선생님께서도 이미 그런 느낌을 받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글의 분량과 완급을 조절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은 학교의 국어 선생님들께도 초등학교 때부터 꾸준히 받아왔고, 글틴 소설방의 멘토 선생님께도 받았습니다. 전체 내용을 감안했을 때 크게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느슨하게 늘려 쓰는 경향이 있다는 말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고민스러운 부분은, 정작 저 자신은 그러한 ‘사족’들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저는 주로 일상의 단면을 소재로 한 글을 쓰는데, 그 분들이 말씀하시는 ‘사족’이 저에게는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느껴집니다. 인물의 성격을 묘사하려면 그가 친구들과 떠는 수다를 들려주어야 하고, 인물이 우울증과 망상증을 앓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려면 그의 어린 시절을 짚어주어야 하고, 인물이 ‘사물함 앞 벤치에 앉는’ 행위가 그가 그 벤치에게 동질감을 느낌을 의미한다고 말하려면 그 벤치에 얽힌 사연을 먼저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좀 빼고 줄이란 말야!”란 말을 들어도 무엇을 어떻게 빼고 줄여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고민 없이 적은 문장은 없고, 각 장면은 저마다 나름의 의미를 가지며 전체 스토리라인을 지탱하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십년이 넘어가는 세월동안 똑같은 지적을 들으며, 그리고 언제나 목표량을 훌쩍 넘기고도 끝나지 않는 소설을 쓰며 제가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않더라도 타인에게 난감함을 주는 글이라면 고쳐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각각의 부수적인 스토리라인이 글 속에서 각자의 의미를 잃지 않은 채 간결하고 명료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추신) 지난 상담실 답변글을 보니, 글쓴이를 판단하기에 앞서 그의 작품을 한 번 읽어보고 싶다고 말씀하신 답변이 많아 여태껏 글틴에 올린 제 작품 몇 편의 링크를 첨부합니다. 부족하지만 한 번 읽어봐 주세요

http://teen.munjang.or.kr/archives/96925

http://teen.munjang.or.kr/archives/94791

http://teen.munjang.or.kr/archives/94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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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가본 세계를 가 본 세계로: 북경, 96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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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중국은 묘한 나라이다. 지난 몇 세기 동안 한반도는 중국의 속국으로서 중국을 어버이의 나라로 섬겨왔다. 그러나 급격한 세계정세의 변화와 경제발전의 흐름에 따라 어느새 한국은 중국을 업신여길 정도로 성장했다. 이제 한국인들은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중국을 바라본다. 더럽고 천박하다며 무시하기도 하고 세계의 새로운 중심이 될 나라라며 혀를 내두르기도 한다. 나는 중국에 대한 조롱과 경탄이 혼재하는 시기의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렇기 때문에 방학을 맞아 학교 친구들과 몇몇 선생님들과 함께 중국의 수도 북경을 여행하게 되었을 때 나는 중국이라는 나라가 내가 듣고 배운 것과 얼마나 일치하고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안고 도착한 북경에서 내가 본 것은 홍보 영상 속 화려한 도시도, 주변 사람들의 선입견 속의 지저분한 미개국도 아닌, 역동하는 나라 중국의 맨 얼굴이었다.

 

Day 1. 왕부정 거리 

 

중국에 도착한 우리가 가장 먼저 간 곳은 북경의 최대 번화가인 왕부정 거리였다. 왕부정 거리는 황실의 저택이 있던 곳이니, 어쩐지 고즈넉하고 예스러운 곳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예상과는 달리 그곳은 온통 경쾌하고 시끌벅적했다. 그곳에서 가장 먼저 우리를 반긴 것은 온갖 음식 냄새가 섞여 빚어낸 정체불명의 향이었다. 중국의 길거리 음식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들, 그러니까 전갈튀김이며 구운 옥수수, 취 두부, 과일꼬치, 양 꼬치 같은 것들이 길 양가로 늘어선 가판대에서 분주히 만들어지고 팔리고 있었다. 나는 비위가 약한 편이어서 차마 그것들을 사 먹을 용기를 내지는 못했지만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그것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상인들은 살아있는 전갈을 꼬챙이에 꽂아 그대로 끓는 기름에 튀겨냈고 갖가지 색의 과일을 나무 꼬치에 구슬목걸이처럼 엮어 꿀을 발랐다. 비행기에서 내린 후 줄곧 이국에 왔다는 생각을 잘 하지 못했는데 먹자거리를 걸으며 무슨 맛일지 짐작도 가지 않는 음식들이 일상적으로 만들어지고 또 소비되는 것을 보며 중국에 왔다는 것이 마침내 실감이 났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했을 때의 나는 아직 중국에 대해 개미 눈곱만큼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먹자골목의 끝자락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나와 친구들은 기념품 노점들이 늘어선 길로 들어갔다. 학교에 남은 선생님과 친구들을 위한 선물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거리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우리는 어느 부채가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인도 영화에 주인공 남자의 지적인 체 하는 단짝친구 역할로 나올 것 같은 외모의 부채가게 청년이 통에 꽂힌 부채들을 하나하나 펴 보이며 “싸요”와 “사요”의 중간 음으로 들리는 한국어를 연발했다. 그는 부채 하나를 집어 들며 80위안이라고 말했다. 왕부정 거리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가이드 선생님께서 최소 20위안은 깎으라고 하신 것이 생각나 우리는 50위안을 불렀다.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계산기를 건네며 원하는 금액을 거기에 찍으라고 말했다. 오기가 생긴 우리는 20위안을 불렀다. 남자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손을 내저었다. 우리는 딴 데서 사자고 서로에게 말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남자가 허둥거리며 우리를 붙잡으면서 “오케이, 오케이 25위안”이라고 졌다는 듯이 말했다. 부채를 한두 개씩 사 들고 오며 우리는 부채를 80위안에서 25위안까지 깎은 것에 대해 매우 신이 나 있었고, 풀 죽은 얼굴로 부채를 건네던 남자에 대한 연민을 잠시 느꼈다. 노련한 관광객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젖어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윽고 우리는 번듯한 기념품 가게 앞에 이르게 되었다. 그 가게 안으로 들어서지 않았다면 우리는 계속 명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가게에 들어간 우리는 한쪽 벽을 가득 채운 부채들을 보고 말았고 그 부채들이 10위안, 비싸봐야 19위안에 팔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부채들은 아까 청년이 싸요, 혹은 사요, 라고 연신 종알거리며 펼쳐보였던 부채들과 정확히 동일했다. 우리는 유니폼을 입은 점원이 수상한 눈초리로 지켜보는 것도 개의치 않고 입을 떡 벌린 채로 멍하니 진열된 부채들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이곳은 북경의 번화가, 눈 뜬 채로 코 베이는 곳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남은 3일 간의 여행 동안 우리는 그 부채들이 우리를 비웃는 듯이 25위안보다 훨씬 싼 가격에 팔리는 것을 종종 지켜보았다. 마지막 날 공항 면세점에서 그 부채들이 예쁜 진열대에 맵시 있게 진열되어 30위안에 팔리는 것을 보고서야 우리는 비로소 위로 받을 수 있었다.

 

 

Day 2. 천안문광장-국가 박물관-자금성-인력거 투어-이화원

 

둘째 날에 우리가 찾은 곳은 텔레비전에서 중국에 대한 뉴스를 방송할 때에 가장 흔하게 화면에 띄우는 천안문광장과 자금성이었다. 천안문광장은 천안문 사태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고, 나는 책에서 배웠다.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을 적에 광장의 보도블록이 희생자들의 피로 검붉게 물들었다고도 했고, 비가 내려 그 피가 붉은 시내를 만들었다고도 했다. 그래서 그곳에 가는 것이 조금은 무섭고 조금은 엄숙한 의식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천안문 광장 역시 내 생각과는 다르게 경쾌하니 붐볐다. 뉴스에서 봐서 이미 익숙해진 마오쩌둥의 얼굴이 우리를 반기지 않았다면 그곳이 천안문 광장이라는 것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곳은 현대사의 한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한 곳이라기보다는 광화문 광장이나 유원지의 진입로처럼 보였다. 한 가지 다른 점은 광화문 광장도, 내가 가 본 그 어느 놀이공원도 그곳만큼 붐비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구미시 인구보다, 어쩌면 경상북도 인구보다도 더 많아 보이는 사람들이 천안문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버스에서 가이드로부터 지금 중국은 방학 기간이라서 전국의 수많은 학부모가 자녀들에게 북경 구경을 시켜주러 데리고 온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국가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줄은 더욱 장관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온갖 나라의 언어로 쉴 새 없이 말하는 사람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을 굽이굽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놓칠 새라 손을 꼭 잡고 걸었다. 그러나 줄 사이로 끼어드는 사람들 틈바귀에서 우리는 어느새 서로에게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었다. 가이드 아저씨의 보라색 깃발도 먼 곳이 작은 점으로 보였다. 비는 내렸고 시간은 흘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기는커녕 박물관 입구조차 볼 수 없었다. 마지막에는 결국 우리도 약간의 새치기를 하며 이것 역시 중국 문화 체험이라고 주장하며 우리들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시간이 없어 지하의 고대관만 대충 흩어보는 것으로 관람을 마친 우리는 자금성을 거쳐 인력거 투어를 하러 갔다. 인력거라고 해서 <운수 좋은 날>의 김 첨지가 끄는 것처럼 인력거꾼이 등에 사람을 짊어지고 움직이는 것일 거라고 짐작했었는데, 중국의 인력거는 뒤에 좌석 두 개가 달린 자전거였다. 나는 J와 함께 맨 처음 도착한 인력거를 탔다. 우리가 좌석에 채 엉덩이를 붙이고 앉기도 전에 인력거꾼은 빠르게 페달을 밟더니 힘차게 출발해 버렸다. 인력거는 지면에 그 바퀴가 닿지 않는 것처럼 부드럽고 빠르게 움직였다. 아무리 뒤를 돌아봐도 뒤따라오는 친구들의 인력거가 보이지 않았다. 인력거꾼은 여유롭게 느릿느릿 움직이는 다른 인력거들을 비웃듯이 추월하며 “빨리빨리!”를 외쳤는데, 그것이 그의 유행어였던 모양인지 그가 추월한 인력거의 주인들은 늘 있는 일이라는 듯 우리를 돌아보며 웃는 얼굴로 “빨리빨리!”라고 되받았다. 이름 모를 상점들이 멀리서부터 보였다가, 가까워졌다가, 다시 쏜살같이 멀어졌다. 인력거에서 마침내 내렸을 때 우리는 인력거꾼의 등이 땀으로 흠뻑 젖은 것을 보았다.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그 인력거꾼은 그 중국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의 얼굴은 생각나지 않고 흥겹게 “빨리빨리!”를 외치는 그의 목소리만이 한없이 기억 속에서 맴돌았다.

 

Day 3. 만리장성-북경대학교-중국인민대학교

 

만리장성은 북경 중심지에 있는 것이 아니어서, 우리는 이른 아침에 출발해 산과 강이 끝없이 펼쳐진 북경 교외의 고속도로를 한참을 달렸다. 그곳은 그 전날 간 천안문광장이나 자금성보다 훨씬 고즈넉했다. 버스 주차장에서 만리장성 입구까지 걸어가는 것도 힘에 부칠 정도로 저질체력인 우리였지만, 중국까지 와서 만리장성에는 한번 올라가봐야 되지 않겠냐는 일념으로 나와 친구들은 만리장성을 오르기 시작했다. 만리장성 초소로 향하는 계단은 가팔랐고, 그 높이도 천차만별이었다. 높은 계단과 낮은 계단이 어떤 패턴도 없이 섞여 있어서, 자칫하면 발을 헛디뎌 넘어질 수도 있을 것처럼 보였다. “포기하고 내려갈까”, 내지는 “쉬었다 가자”를 연신 중얼거리면서도 우리는 기어이 꼭대기에 있는 초소까지 올라갔다. 마지막 하나의 계단까지 다 올라 초소의 아치형 문에 발을 디뎠을 때는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지만, 왜인지 모를 상쾌함이 밀려들었다. 트인 돌문에서는 천연 에어컨처럼 찬바람이 불었고 우리는 그 앞에 서서 땀을 식히며 돌문 밖으로 펼쳐지는 장관을 감상했다. 만리장성의 입구와 버스 주차장이 아득히 아래에서 점처럼 작게 보였고 우리가 올라온 계단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고개를 돌릴 수 없는 경치를 앞에 두고 마시는 생수는 상쾌했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북경대학교와 중국 인민 대학교를 차례로 둘러보았다. 북경대학교에서는 호텔 연회장 같은 분위기의 교류관에서 홍보 영상을 보고 북경대의 역사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북경대 학생과의 질의응답 시간을 가진 뒤 간단하게 캠퍼스 투어를 했다. 학교에는 큰 연못이 있어, 연못가에서 산책을 하거나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세계적으로 명망 있는 대학교 캠퍼스에 우리가 있다는 생각에 저마다 조금씩 흥분해 있었다. 주위는 온통 북경대 학생들과 대학 구경을 온 중국 아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인솔자의 설명을 들으며 말간 눈을 빛내는 중국 초등학생들의 모습이 예뻤다. 북경대학교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정체모를 탑이었다. 처음에 아름드리나무들 사이에 세워진 그 탑을 봤을 때 나는 그것이 누군가의 위령탑이거나, 학생들의 학문적 성취를 기원하는 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녀들의 북경대 입학을 염원하는 중국 학부모들이 입시 철이 되면 그 탑에 절을 하며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것이라는 상상도 했다. 그래서 그 탑이 그저 대학 내 건물들에 물을 끌어 오기 위한 관개시설이라는 설명을 들었을 때 나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크고 웅장해 보이던 탑이 초라하고 평범한 관개시설로 보였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듯 간사한 것임이 문득 실감나 우스워졌다.

 

Day 4. 귀국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는 활주로를 서슴없이 내달리다, 이윽고 중력보다 세차게 날아올랐다. 기압차로 귀가 멍멍해져 나는 손으로 코를 막고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지난 3일 동안의 북경 여행 동안 있었던 에피소드들이 눈앞에 드라마의 장면처럼 펼쳐졌다. 북경 탐방의 첫 번째 날에 가이드 선생님께서 여행이란 ‘못 가본 세계’를 ‘가본 세계’로 바꾸는 과정이며, 그렇기 때문에 값지다고 말씀하신 것이 문득 생각났다. 북경은 나에게 미지의 세계였고, 이번 여행을 통해 나는 그 곳을 조금이나마 알아가게 되었다. 내가 편견에 갇혀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들의 진면목을 깨닫게 되었고, 막연하게 상상 속에서 그리기만 했던 곳들을 실제로 볼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중국은 나에게 ‘가 본 세계’가 되었지만, 그 곳을 다시 ‘잘 아는 세계’로 바꾸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이다. 먼 미래에 어느 날 나는 다시 중국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그 때까지 잠시 이 3박 4일간의 기억을 잘 갈무리해 놓았다 그날이 오면 중국 설화 속 어느 여인이 쉼 없이 짜내는 베처럼 굽이굽이 펼쳐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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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제노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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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A, B, C, D, 소년

배경: 교외의 어느 아파트 단지

 

A, B, C는 아파트 놀이터 정자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 때 D가 아파트 안에서 황급히 나와 이야기에 끼어든다.

 

D: 모두들 어찌 이렇게 태연합니까? 지금 이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A: (의아한 듯이) 무슨 소리 말씀이오?

D: 302호 남자가 또 마누라와 아들을 때리고 있지 않소. 부인이 흐느끼고 아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소. 지금 그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B: (김빠진 목소리로) 아아, 난 또 뭐라고. 그건 만날 벌어지는 일이 아니오. 나는 2년 전에 이사 왔을 때부터 매일 밤마다 저 소릴 들었소. 새삼스럽게 무슨?

C: 또 한 바탕 대거리를 하는 모양이지, 그놈의 집구석.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니까.

D: 어제 시장에 갔다가 302호 여자를 봤는데, 다리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더군요. 이쯤 되면 가정 폭력 아닙니까? 아무래도 경찰서에 신고해야 할 것 같은데….

B: 아니,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있을까. 형씨, 원래 남의 집안싸움에는 끼어들려 해선 안 된다오. 어쭙잖게 부산떨다가 불똥 튀면 당신만 손해지!

A: 진짜로 심각한 일이라면 우리가 아니라도 누군가 다른 사람이 신고하겠지, 뭐.

C: 아아, 당신, 진짜로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오?

D: (어물쩍거리며)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지 않는다면 나 혼자 신고를 할 필요는 없겠지요, 뭐…. (무대 암전된다)

 

 

무대, 암전된 채로 배경이 정자에서 소년의 방 안으로 바뀐다. 웅크린 소년의 실루엣 보이고,

 

소년: (독백하듯) 이제 그는 더 이상 술에 취할 수도, 골프채를 들고 엄마를 개 패듯 때릴 수도 없겠군요. 나는 방금 나의 아버지 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목사님은 다른 사람을 죽인 이는 살아서는 감옥에 가고, 죽어서는 지옥에 간다고 하셨지요. 이제 나는 감옥에, 지옥에 가게 되는 건가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내가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는 머지않아 엄마를 죽였을 거니까요. 이제 나에게 돌을 던질 여러분은 이미 우리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계셨겠지요. 그렇지만 아무도 엄마와 나를 도와주지 않았어요. (피 묻은 손을 들어 보이며) 그러므로 이건 아무래도 피할 수 없었던 결말인 거예요!

 

 

무대, 다시 밝아지고 노란색 접근 금지 테이프가 붙어 있는 302호 현관 앞에 A, B, C가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C: 이 집에서 대관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오?

A: 모르셨소? 302호 아이가 자기 아비를 죽였다오. 부엌칼을 들고 남자를 마구 찔렀더랬지.

B: 퇴근한 그 집 여편네가 바닥에 흥건한 피와, 그 옆에 차분히 웅크리고 앉아 피 묻은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소년을 발견했더랬지.

C: 맙소사! 이제 집을 팔 수도 없겠군! 집값이 미친 듯이 떨어질 테니! 그 소년은 대관절 몇 살이었소?

D: (무대 뒤편에서 불쑥 등장하며) 열한 살이었소! 초등학교 사학년이었단 말이오!

A, B, C는 동시에 깜짝 놀란 듯 D를 바라보고, 서로에게 무언가를 속삭인다.

A: 아아, 당신이었군. 경찰이 취조라도 하러 온 줄 알았잖소.

D: 당신네는 느끼는 바가 없소? 이 사건에 대해서?

C: 우리가 무엇을 느껴야 하지요? 당신 말은 우리가 이 사건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뜻이오?

B: 누군가 한 사람이 경찰에 302호 남자가 식구들에게 폭력을 휘두른다는 걸 신고했다면 됐을 것 아니오?

D: 그렇지만 당신은 신고를 하지 않았잖소!

A: 당신도 신고를 하지 않았잖소!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소?

D: 그야… 여러분이 하지 않겠다기에….

B: 이제 이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우리는 이 사건에 대해 책임이 없음이 명확합니다. 누군가는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신고를 했어야 했어요. 다만 그 누군가가 우리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일동 정지한다. 무대, 암전되고 스포트라이트가 정지해 있는 B를 비춘다. 이윽고 스포트라이트는 A, C, D 순으로 옮겨간다.

 

 

무대, 완전히 암전된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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