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과 고민: 상담이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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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랜만에 글틴에 들어와, 마침 ‘문학 상담실’이라는 게 열렸다기에, 저도 몇 가지 고민을 털어놓으려고 합니다. 막상 한꺼번에 적으려니 너무 내용이 들쭉날쭉해 두 가지 카테고리로 나눠봤는데, 길더라도 끝까지 읽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1.작가

 

저는 이제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는 학생이고, 갓 기역 니은을 뗀 꼬마에게 김소월 시집을 선물하신 할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글을 읽고 쓰는 걸 좋아했었습니다. 언젠가는 소설가가 되어 있을 거라고 늘 생각해 왔었고요.(제가 열 살 때 쓴 일기장을 다시 보게 되었는데, 거기 내년(11살)의 목표랍시고 “소설책 출판하기”가 적혀 있더군요. 흠…..) 그러나 그 소망이자 확신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흐려졌습니다. 이제 저는 고2가 되었고, ‘학교의 유일한 내신 1.0’이라는 귀속지위에 구속되어 허덕이고 있습니다. 1학년 1학기 때까지만 해도 저와 함께 내신 1.0이었던 친구가 2학기에 성적이 조금 떨어지고, 제가 학교에서 유일하게 1.0 내신을 보유하게 되자 제게 거는 학교와 선생님들의 기대가 갑작스레 높아졌습니다. 지금 저는 의과대학에 진학해 신경학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공부하고 있는데(위의 내용을 읽고서 제가 ‘의사 되서 잘 먹고 잘 살아야지’ 라는 마음으로 진로를 정한 게 아닌가 라는 의심을 하실 수도 있겠지만, 중학교 때 올리버 색스 박사의 책을 접한 후로 신경정신과 의사나 연구자가 되는 게 제 두 번째 꿈이 되었습니다. 미래에는 누구나 서너개 직업을 전전한다고들 하니까요) 선생님들의 입에서 ‘S대 의대 생각은 안 해 보니?’라는 말이 나왔을 때 저는 두려워졌습니다. 그분들이 주목하시는 제 성적에, 속된 말로 ‘운빨’이 많이 작용했다는 걸 알고 있고 올해도 성적을 유지할 수 있을지 전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희 학교는 ‘2017학년도 체제’로 전환하여 문이과 분반과 새 반배정을 하였는데, 새로운 반의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신학기의 들뜸이나 새 친구를 만난다는 설렘을 잃은 아이들이 고요히 자리에 앉아 자습을 하고 있더군요. 새 책상을 물티슈로 한 번 닦고 싶었는데 제 부스럭거림이 다른 친구들에게 행여나 방해가 될까봐 선배들이 남기고 간 풀썩한 먼지가 앉은 책상에 그대로 책을 폈습니다. 책장 넘기는 소리와 샤프 사각거리는 소리만 나는 그 교실이 저는 벌써부터 무서웠습니다. 그것보다 더 두려웠던 건, 제가 그곳에 앉아 수학 문제는 풀지도 않은 채 새로 쓸 시의 첫 구절이 될 문장을 곱씹고 있었다는 것이었어요. 남들은 다 피 터지게 공부하는데, 게다가 엄청 문이 좁은 진로를 희망하는 만큼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데, 글 쓸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너는 뭐냐, 뭐 그런 기분이었어요. 공부를 하려면 글쓰기를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 어쩌면 벌써 포기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가 되려면 어느 정도의 습작과 독서는 필요할 텐데, 사실 마지막으로 소설을 읽은 지도 꽤 되었고(모의고사 지문을 제외하곤요), 매번 글틴에 글을 쓸 때마다 이 글이 마지막 글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한편으론 등단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내가 그것 목표로 수많은 실패를 견딜 경제적/정신적 능력이 될까, 그럴 재능이 있을까, 라는 의구심도 들고요. ‘로그함수의 미분’이니 ‘지구가 생명가능지대인 이유’니 그런 것들에 고개를 파묻고, “전 정말 뼛속까지 이과랍니다~~!!‘라는 뉘앙스의 생기부를 만들기 위해 과학 영재교육원이며 수/과학 경시대회, 의생명과학교실 같은 곳을 쏘다니고, 리처드 도킨스와 칼 세이건의 책으로 생기부 독서기록란을 채우면서, 성적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으면서, 저는 과연 작가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요? 계속 글을 쓸 수 있을까요?

 

2. 작품

 

저는 어릴 적부터 굉장히 빨리 읽고, 굉장히 빨리 쓴다는 평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은, ‘근데 글이 너무 길다’였습니다. 손이 키보드에 닿는 대로 글을 써 내리더니 쓸데없는 사족을 너무 많이 붙였다는 것이었지요. 이 글을 읽으시는 멘토 선생님께서도 이미 그런 느낌을 받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글의 분량과 완급을 조절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은 학교의 국어 선생님들께도 초등학교 때부터 꾸준히 받아왔고, 글틴 소설방의 멘토 선생님께도 받았습니다. 전체 내용을 감안했을 때 크게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느슨하게 늘려 쓰는 경향이 있다는 말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고민스러운 부분은, 정작 저 자신은 그러한 ‘사족’들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저는 주로 일상의 단면을 소재로 한 글을 쓰는데, 그 분들이 말씀하시는 ‘사족’이 저에게는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느껴집니다. 인물의 성격을 묘사하려면 그가 친구들과 떠는 수다를 들려주어야 하고, 인물이 우울증과 망상증을 앓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려면 그의 어린 시절을 짚어주어야 하고, 인물이 ‘사물함 앞 벤치에 앉는’ 행위가 그가 그 벤치에게 동질감을 느낌을 의미한다고 말하려면 그 벤치에 얽힌 사연을 먼저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좀 빼고 줄이란 말야!”란 말을 들어도 무엇을 어떻게 빼고 줄여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고민 없이 적은 문장은 없고, 각 장면은 저마다 나름의 의미를 가지며 전체 스토리라인을 지탱하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십년이 넘어가는 세월동안 똑같은 지적을 들으며, 그리고 언제나 목표량을 훌쩍 넘기고도 끝나지 않는 소설을 쓰며 제가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않더라도 타인에게 난감함을 주는 글이라면 고쳐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각각의 부수적인 스토리라인이 글 속에서 각자의 의미를 잃지 않은 채 간결하고 명료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추신) 지난 상담실 답변글을 보니, 글쓴이를 판단하기에 앞서 그의 작품을 한 번 읽어보고 싶다고 말씀하신 답변이 많아 여태껏 글틴에 올린 제 작품 몇 편의 링크를 첨부합니다. 부족하지만 한 번 읽어봐 주세요

http://teen.munjang.or.kr/archives/96925

http://teen.munjang.or.kr/archives/94791

http://teen.munjang.or.kr/archives/94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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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가본 세계를 가 본 세계로: 북경, 96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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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중국은 묘한 나라이다. 지난 몇 세기 동안 한반도는 중국의 속국으로서 중국을 어버이의 나라로 섬겨왔다. 그러나 급격한 세계정세의 변화와 경제발전의 흐름에 따라 어느새 한국은 중국을 업신여길 정도로 성장했다. 이제 한국인들은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중국을 바라본다. 더럽고 천박하다며 무시하기도 하고 세계의 새로운 중심이 될 나라라며 혀를 내두르기도 한다. 나는 중국에 대한 조롱과 경탄이 혼재하는 시기의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렇기 때문에 방학을 맞아 학교 친구들과 몇몇 선생님들과 함께 중국의 수도 북경을 여행하게 되었을 때 나는 중국이라는 나라가 내가 듣고 배운 것과 얼마나 일치하고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안고 도착한 북경에서 내가 본 것은 홍보 영상 속 화려한 도시도, 주변 사람들의 선입견 속의 지저분한 미개국도 아닌, 역동하는 나라 중국의 맨 얼굴이었다.

 

Day 1. 왕부정 거리 

 

중국에 도착한 우리가 가장 먼저 간 곳은 북경의 최대 번화가인 왕부정 거리였다. 왕부정 거리는 황실의 저택이 있던 곳이니, 어쩐지 고즈넉하고 예스러운 곳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예상과는 달리 그곳은 온통 경쾌하고 시끌벅적했다. 그곳에서 가장 먼저 우리를 반긴 것은 온갖 음식 냄새가 섞여 빚어낸 정체불명의 향이었다. 중국의 길거리 음식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들, 그러니까 전갈튀김이며 구운 옥수수, 취 두부, 과일꼬치, 양 꼬치 같은 것들이 길 양가로 늘어선 가판대에서 분주히 만들어지고 팔리고 있었다. 나는 비위가 약한 편이어서 차마 그것들을 사 먹을 용기를 내지는 못했지만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그것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상인들은 살아있는 전갈을 꼬챙이에 꽂아 그대로 끓는 기름에 튀겨냈고 갖가지 색의 과일을 나무 꼬치에 구슬목걸이처럼 엮어 꿀을 발랐다. 비행기에서 내린 후 줄곧 이국에 왔다는 생각을 잘 하지 못했는데 먹자거리를 걸으며 무슨 맛일지 짐작도 가지 않는 음식들이 일상적으로 만들어지고 또 소비되는 것을 보며 중국에 왔다는 것이 마침내 실감이 났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했을 때의 나는 아직 중국에 대해 개미 눈곱만큼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먹자골목의 끝자락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나와 친구들은 기념품 노점들이 늘어선 길로 들어갔다. 학교에 남은 선생님과 친구들을 위한 선물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거리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우리는 어느 부채가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인도 영화에 주인공 남자의 지적인 체 하는 단짝친구 역할로 나올 것 같은 외모의 부채가게 청년이 통에 꽂힌 부채들을 하나하나 펴 보이며 “싸요”와 “사요”의 중간 음으로 들리는 한국어를 연발했다. 그는 부채 하나를 집어 들며 80위안이라고 말했다. 왕부정 거리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가이드 선생님께서 최소 20위안은 깎으라고 하신 것이 생각나 우리는 50위안을 불렀다.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계산기를 건네며 원하는 금액을 거기에 찍으라고 말했다. 오기가 생긴 우리는 20위안을 불렀다. 남자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손을 내저었다. 우리는 딴 데서 사자고 서로에게 말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남자가 허둥거리며 우리를 붙잡으면서 “오케이, 오케이 25위안”이라고 졌다는 듯이 말했다. 부채를 한두 개씩 사 들고 오며 우리는 부채를 80위안에서 25위안까지 깎은 것에 대해 매우 신이 나 있었고, 풀 죽은 얼굴로 부채를 건네던 남자에 대한 연민을 잠시 느꼈다. 노련한 관광객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젖어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윽고 우리는 번듯한 기념품 가게 앞에 이르게 되었다. 그 가게 안으로 들어서지 않았다면 우리는 계속 명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가게에 들어간 우리는 한쪽 벽을 가득 채운 부채들을 보고 말았고 그 부채들이 10위안, 비싸봐야 19위안에 팔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부채들은 아까 청년이 싸요, 혹은 사요, 라고 연신 종알거리며 펼쳐보였던 부채들과 정확히 동일했다. 우리는 유니폼을 입은 점원이 수상한 눈초리로 지켜보는 것도 개의치 않고 입을 떡 벌린 채로 멍하니 진열된 부채들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이곳은 북경의 번화가, 눈 뜬 채로 코 베이는 곳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남은 3일 간의 여행 동안 우리는 그 부채들이 우리를 비웃는 듯이 25위안보다 훨씬 싼 가격에 팔리는 것을 종종 지켜보았다. 마지막 날 공항 면세점에서 그 부채들이 예쁜 진열대에 맵시 있게 진열되어 30위안에 팔리는 것을 보고서야 우리는 비로소 위로 받을 수 있었다.

 

 

Day 2. 천안문광장-국가 박물관-자금성-인력거 투어-이화원

 

둘째 날에 우리가 찾은 곳은 텔레비전에서 중국에 대한 뉴스를 방송할 때에 가장 흔하게 화면에 띄우는 천안문광장과 자금성이었다. 천안문광장은 천안문 사태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고, 나는 책에서 배웠다.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을 적에 광장의 보도블록이 희생자들의 피로 검붉게 물들었다고도 했고, 비가 내려 그 피가 붉은 시내를 만들었다고도 했다. 그래서 그곳에 가는 것이 조금은 무섭고 조금은 엄숙한 의식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천안문 광장 역시 내 생각과는 다르게 경쾌하니 붐볐다. 뉴스에서 봐서 이미 익숙해진 마오쩌둥의 얼굴이 우리를 반기지 않았다면 그곳이 천안문 광장이라는 것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곳은 현대사의 한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한 곳이라기보다는 광화문 광장이나 유원지의 진입로처럼 보였다. 한 가지 다른 점은 광화문 광장도, 내가 가 본 그 어느 놀이공원도 그곳만큼 붐비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구미시 인구보다, 어쩌면 경상북도 인구보다도 더 많아 보이는 사람들이 천안문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버스에서 가이드로부터 지금 중국은 방학 기간이라서 전국의 수많은 학부모가 자녀들에게 북경 구경을 시켜주러 데리고 온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국가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줄은 더욱 장관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온갖 나라의 언어로 쉴 새 없이 말하는 사람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을 굽이굽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놓칠 새라 손을 꼭 잡고 걸었다. 그러나 줄 사이로 끼어드는 사람들 틈바귀에서 우리는 어느새 서로에게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었다. 가이드 아저씨의 보라색 깃발도 먼 곳이 작은 점으로 보였다. 비는 내렸고 시간은 흘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기는커녕 박물관 입구조차 볼 수 없었다. 마지막에는 결국 우리도 약간의 새치기를 하며 이것 역시 중국 문화 체험이라고 주장하며 우리들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시간이 없어 지하의 고대관만 대충 흩어보는 것으로 관람을 마친 우리는 자금성을 거쳐 인력거 투어를 하러 갔다. 인력거라고 해서 <운수 좋은 날>의 김 첨지가 끄는 것처럼 인력거꾼이 등에 사람을 짊어지고 움직이는 것일 거라고 짐작했었는데, 중국의 인력거는 뒤에 좌석 두 개가 달린 자전거였다. 나는 J와 함께 맨 처음 도착한 인력거를 탔다. 우리가 좌석에 채 엉덩이를 붙이고 앉기도 전에 인력거꾼은 빠르게 페달을 밟더니 힘차게 출발해 버렸다. 인력거는 지면에 그 바퀴가 닿지 않는 것처럼 부드럽고 빠르게 움직였다. 아무리 뒤를 돌아봐도 뒤따라오는 친구들의 인력거가 보이지 않았다. 인력거꾼은 여유롭게 느릿느릿 움직이는 다른 인력거들을 비웃듯이 추월하며 “빨리빨리!”를 외쳤는데, 그것이 그의 유행어였던 모양인지 그가 추월한 인력거의 주인들은 늘 있는 일이라는 듯 우리를 돌아보며 웃는 얼굴로 “빨리빨리!”라고 되받았다. 이름 모를 상점들이 멀리서부터 보였다가, 가까워졌다가, 다시 쏜살같이 멀어졌다. 인력거에서 마침내 내렸을 때 우리는 인력거꾼의 등이 땀으로 흠뻑 젖은 것을 보았다.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그 인력거꾼은 그 중국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의 얼굴은 생각나지 않고 흥겹게 “빨리빨리!”를 외치는 그의 목소리만이 한없이 기억 속에서 맴돌았다.

 

Day 3. 만리장성-북경대학교-중국인민대학교

 

만리장성은 북경 중심지에 있는 것이 아니어서, 우리는 이른 아침에 출발해 산과 강이 끝없이 펼쳐진 북경 교외의 고속도로를 한참을 달렸다. 그곳은 그 전날 간 천안문광장이나 자금성보다 훨씬 고즈넉했다. 버스 주차장에서 만리장성 입구까지 걸어가는 것도 힘에 부칠 정도로 저질체력인 우리였지만, 중국까지 와서 만리장성에는 한번 올라가봐야 되지 않겠냐는 일념으로 나와 친구들은 만리장성을 오르기 시작했다. 만리장성 초소로 향하는 계단은 가팔랐고, 그 높이도 천차만별이었다. 높은 계단과 낮은 계단이 어떤 패턴도 없이 섞여 있어서, 자칫하면 발을 헛디뎌 넘어질 수도 있을 것처럼 보였다. “포기하고 내려갈까”, 내지는 “쉬었다 가자”를 연신 중얼거리면서도 우리는 기어이 꼭대기에 있는 초소까지 올라갔다. 마지막 하나의 계단까지 다 올라 초소의 아치형 문에 발을 디뎠을 때는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지만, 왜인지 모를 상쾌함이 밀려들었다. 트인 돌문에서는 천연 에어컨처럼 찬바람이 불었고 우리는 그 앞에 서서 땀을 식히며 돌문 밖으로 펼쳐지는 장관을 감상했다. 만리장성의 입구와 버스 주차장이 아득히 아래에서 점처럼 작게 보였고 우리가 올라온 계단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고개를 돌릴 수 없는 경치를 앞에 두고 마시는 생수는 상쾌했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북경대학교와 중국 인민 대학교를 차례로 둘러보았다. 북경대학교에서는 호텔 연회장 같은 분위기의 교류관에서 홍보 영상을 보고 북경대의 역사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북경대 학생과의 질의응답 시간을 가진 뒤 간단하게 캠퍼스 투어를 했다. 학교에는 큰 연못이 있어, 연못가에서 산책을 하거나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세계적으로 명망 있는 대학교 캠퍼스에 우리가 있다는 생각에 저마다 조금씩 흥분해 있었다. 주위는 온통 북경대 학생들과 대학 구경을 온 중국 아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인솔자의 설명을 들으며 말간 눈을 빛내는 중국 초등학생들의 모습이 예뻤다. 북경대학교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정체모를 탑이었다. 처음에 아름드리나무들 사이에 세워진 그 탑을 봤을 때 나는 그것이 누군가의 위령탑이거나, 학생들의 학문적 성취를 기원하는 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녀들의 북경대 입학을 염원하는 중국 학부모들이 입시 철이 되면 그 탑에 절을 하며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것이라는 상상도 했다. 그래서 그 탑이 그저 대학 내 건물들에 물을 끌어 오기 위한 관개시설이라는 설명을 들었을 때 나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크고 웅장해 보이던 탑이 초라하고 평범한 관개시설로 보였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듯 간사한 것임이 문득 실감나 우스워졌다.

 

Day 4. 귀국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는 활주로를 서슴없이 내달리다, 이윽고 중력보다 세차게 날아올랐다. 기압차로 귀가 멍멍해져 나는 손으로 코를 막고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지난 3일 동안의 북경 여행 동안 있었던 에피소드들이 눈앞에 드라마의 장면처럼 펼쳐졌다. 북경 탐방의 첫 번째 날에 가이드 선생님께서 여행이란 ‘못 가본 세계’를 ‘가본 세계’로 바꾸는 과정이며, 그렇기 때문에 값지다고 말씀하신 것이 문득 생각났다. 북경은 나에게 미지의 세계였고, 이번 여행을 통해 나는 그 곳을 조금이나마 알아가게 되었다. 내가 편견에 갇혀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들의 진면목을 깨닫게 되었고, 막연하게 상상 속에서 그리기만 했던 곳들을 실제로 볼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중국은 나에게 ‘가 본 세계’가 되었지만, 그 곳을 다시 ‘잘 아는 세계’로 바꾸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이다. 먼 미래에 어느 날 나는 다시 중국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그 때까지 잠시 이 3박 4일간의 기억을 잘 갈무리해 놓았다 그날이 오면 중국 설화 속 어느 여인이 쉼 없이 짜내는 베처럼 굽이굽이 펼쳐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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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제노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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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A, B, C, D, 소년

배경: 교외의 어느 아파트 단지

 

A, B, C는 아파트 놀이터 정자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 때 D가 아파트 안에서 황급히 나와 이야기에 끼어든다.

 

D: 모두들 어찌 이렇게 태연합니까? 지금 이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A: (의아한 듯이) 무슨 소리 말씀이오?

D: 302호 남자가 또 마누라와 아들을 때리고 있지 않소. 부인이 흐느끼고 아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소. 지금 그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B: (김빠진 목소리로) 아아, 난 또 뭐라고. 그건 만날 벌어지는 일이 아니오. 나는 2년 전에 이사 왔을 때부터 매일 밤마다 저 소릴 들었소. 새삼스럽게 무슨?

C: 또 한 바탕 대거리를 하는 모양이지, 그놈의 집구석.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니까.

D: 어제 시장에 갔다가 302호 여자를 봤는데, 다리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더군요. 이쯤 되면 가정 폭력 아닙니까? 아무래도 경찰서에 신고해야 할 것 같은데….

B: 아니,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있을까. 형씨, 원래 남의 집안싸움에는 끼어들려 해선 안 된다오. 어쭙잖게 부산떨다가 불똥 튀면 당신만 손해지!

A: 진짜로 심각한 일이라면 우리가 아니라도 누군가 다른 사람이 신고하겠지, 뭐.

C: 아아, 당신, 진짜로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오?

D: (어물쩍거리며)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지 않는다면 나 혼자 신고를 할 필요는 없겠지요, 뭐…. (무대 암전된다)

 

 

무대, 암전된 채로 배경이 정자에서 소년의 방 안으로 바뀐다. 웅크린 소년의 실루엣 보이고,

 

소년: (독백하듯) 이제 그는 더 이상 술에 취할 수도, 골프채를 들고 엄마를 개 패듯 때릴 수도 없겠군요. 나는 방금 나의 아버지 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목사님은 다른 사람을 죽인 이는 살아서는 감옥에 가고, 죽어서는 지옥에 간다고 하셨지요. 이제 나는 감옥에, 지옥에 가게 되는 건가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내가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는 머지않아 엄마를 죽였을 거니까요. 이제 나에게 돌을 던질 여러분은 이미 우리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계셨겠지요. 그렇지만 아무도 엄마와 나를 도와주지 않았어요. (피 묻은 손을 들어 보이며) 그러므로 이건 아무래도 피할 수 없었던 결말인 거예요!

 

 

무대, 다시 밝아지고 노란색 접근 금지 테이프가 붙어 있는 302호 현관 앞에 A, B, C가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C: 이 집에서 대관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오?

A: 모르셨소? 302호 아이가 자기 아비를 죽였다오. 부엌칼을 들고 남자를 마구 찔렀더랬지.

B: 퇴근한 그 집 여편네가 바닥에 흥건한 피와, 그 옆에 차분히 웅크리고 앉아 피 묻은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소년을 발견했더랬지.

C: 맙소사! 이제 집을 팔 수도 없겠군! 집값이 미친 듯이 떨어질 테니! 그 소년은 대관절 몇 살이었소?

D: (무대 뒤편에서 불쑥 등장하며) 열한 살이었소! 초등학교 사학년이었단 말이오!

A, B, C는 동시에 깜짝 놀란 듯 D를 바라보고, 서로에게 무언가를 속삭인다.

A: 아아, 당신이었군. 경찰이 취조라도 하러 온 줄 알았잖소.

D: 당신네는 느끼는 바가 없소? 이 사건에 대해서?

C: 우리가 무엇을 느껴야 하지요? 당신 말은 우리가 이 사건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뜻이오?

B: 누군가 한 사람이 경찰에 302호 남자가 식구들에게 폭력을 휘두른다는 걸 신고했다면 됐을 것 아니오?

D: 그렇지만 당신은 신고를 하지 않았잖소!

A: 당신도 신고를 하지 않았잖소!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소?

D: 그야… 여러분이 하지 않겠다기에….

B: 이제 이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우리는 이 사건에 대해 책임이 없음이 명확합니다. 누군가는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신고를 했어야 했어요. 다만 그 누군가가 우리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일동 정지한다. 무대, 암전되고 스포트라이트가 정지해 있는 B를 비춘다. 이윽고 스포트라이트는 A, C, D 순으로 옮겨간다.

 

 

무대, 완전히 암전된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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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쪼개지는 소리보다 더 아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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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벌써 22세기 한국문학의 대모, 소설가 백지아 선생이 돌아가신지 꼭 오 년이 되는 날이군요. 백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여 주신 모든 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말주변 없는 이 늙은이가 오늘 여러분 앞에 선 것은, 백선생과의 작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선생의 막내 조카 결혼식 때 한 약속이었으니 벌써 팔년도 더 된 일이지요,

 

김 형, 김 형은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지요?

글쎄,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아가 원하는 일이라면 도둑질과 살인 외엔 다 해 줄 수 있지.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이것, 받아요, 하며 선생은 제게 밀봉된 서류 봉투를 건넸습니다. 이십년은 더 된 것 같은, 낡고 빛바랜 봉투였습니다. 봉투를 뜯으니 녹슨 스테이플러로 철해진 누렇게 변색된 에이포 판형의 종이 뭉치가 나왔습니다.

소설이니? 흐음, 단편인가, 라고 제가 물었습니다.

아니요, 유서에요.

제가 그 글을 읽다 말고 뻣뻣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선생은 볼우물이 깊게 패이도록 웃으며 덧붙였습니다, 물론 어렸을 때 쓴 유서죠. 그 땐 매일 밤 내일의 아침 해가 뜨는 것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며 잠자리에 들었었거든. 근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이건 전혀 유서라고 할 수 없겠는걸. 어쩌면 그때의 나는 내가 이렇게 오래 살아남을 것을 은연중에 알고 있었나 봐요.

저는 납득했습니다. 선생은 어렸을 때부터 희귀한 유전병을 앓아왔는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 병으로 결국 돌아가셨지요.

 

……이건 유서라기보다는 ‘너’라는 대상에게 쓴 편지에 가깝겠군. 그런데 여기 나오는 ‘너’는 누구지? 실존하는 인물이겠지?

실존하는 사람이지요, 당연히. 하지만 지금 그분은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유명인사가 되어 계셔서 제 입으로 그분 성함을 밝히기는 힘들겠군요.

유명 인사가 된 선생의 고등학교 동문이라면 짐작 가는 사람이 몇 있어 저는 종이 냅킨에 그들의 이름을 써서 선생께 보였습니다.

이 사람이에요, 하며 선생이 한 사람의 이름을 가리켰습니다. 그는 인터넷 강의 강사 출신의 전 교육부 장관, 네에 맞습니다, 몇 달 전에 돌아가신 그 분이 맞소.

 

김 형이 이걸 가지고 계시다가, 나와 이 친구가 모두 이 세상을 떠나면 세상에 내보여주셨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살아있을 때 이 글이 공개되면 이 친구에게 행여나 누가 될 수 있으니까요.

음….. 물론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내가 지아보다 먼저 죽으면 어쩌려고?

나는 누가 나보다 먼저 죽고 나중에 죽을지 알아요. 어렸을 때부터 그냥 알았어요. 장수할 복을 타고 났어, 형은. 내가 죽은 후에도 오래오래 사실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민감한 글이라면 왜 공개하려 하는 거지?

글쎄, 뭐라고 말해야 할까. 잊힌다는 건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잖아. 내가 죽는 것과 동시에 내 십대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나는 두려워요.

사실 내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 중에 애틋하게 추억할만한 건 이것 밖에 없거든, 이라고 말하며 선생은 쓸쓸하게 웃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때의 선생이, 내가 수십 년 동안 봐 온 선생의 모습들 중에 가장 아름다웠소.

지금까지는 전도유망한 젊은 판사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소설가가 되었다는 것이 젊은 날의 백선생에 대해 알려진 것의 전부였습니다. 백선생의 이 글을 통해 여러분이 그녀의 추억을 공유할 수 있게 되신다면, 이 늙은이는 저승에서 떳떳하게 선생을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열일곱 살 백지아가 쓴 유서를, 지금부터 읽어드리겠습니다.

 

 

1

 

어떤 소녀는 태어나서 한 번도 생일에 케이크를 먹어 본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그녀 생일 바로 일주일 전에 오빠의 생일이 있고 일주일 후에 남동생의 생일이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대부분은 딸인 그녀에게 가족들이 별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녀의 엄마도, 아빠도, 터울이 좀 있는 오빠도, 연년생인 남동생도 그녀가 깨끗한 옷을 입고 따뜻한 잠자리에서 잠을 자는지, 아침마다 학교엘 가는지 문방구 오락기 앞에서 시간을 때우는지, 그런 것들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았다. 저녁 식사 시간에 가족들은 맛깔나게 차려진 식사를 소담스레 먹으며 단란하게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 시간에도 그녀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에게 유일하게 관심을 가져 주는 이는 할아버지였다. 소녀의 아빠가 백끝순이나 백말순 쯤의 이름으로 그녀의 출생신고를 하려 했을 때 그 머리를 지팡이로 한 대 쥐어박고 며칠 동안 옥편을 뒤진 끝에 그녀에게 백지아라는 이름을 붙여준 이도 할아버지였다. 소녀는 먼 시골 마을에 사는 그를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이 힘든 날에도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희미한 웃음을 짓곤 했다. 그는 그러나 소녀가 중학교 일학년 때 희귀한 유전병으로 급작스럽게 죽었다. 평소에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아들은 아버지의 장례도 치르지 않은 채 사망 진단서를 발급받자마자 화장터로 가 자신의 아버지를 항아리 속의 재로 만든 뒤 항아리 째 계곡에 뿌려버렸다. 집안에서 할아버지에 대한 애도는 허용되지 않았다. 오빠와 남동생은 할아버지라는 위인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행동했다. 소녀는 낮 동안은 태연하려고 노력했지만, 이따금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이불 속에서 입을 막고 흐느꼈다. 그러고 나면 다음날 아침에는 눈이 부어 검은자가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가 되어 있곤 했다. 어느 날 눈두덩을 얼음 덩어리로 문지르며 소녀는 그녀가 사랑했든 사랑하지 않았든 타인은 결국 그녀를 떠나기 마련이며, 타인에게 마음 한 구석을 떼 주는 일은 그녀만을 고통스럽게 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더 이상 소리 죽여 울며 밤을 지새우지 않았다. 그녀가 부은 눈을 마사지 하려고 매일 저녁 한 판씩 얼려놓은 얼음은 어느 순간부터 냉동실 구석에 방치되었다. 그것을 어느 무더운 여름날 소녀의 남동생이 발견하여 그것으로 빙수를 만들어 누나가 하교하기 전에 서둘러 먹어치웠다.

 

 

2

 

소녀는 열다섯 살 때부터 심장 언저리에서 트럭의 바퀴가 몸을 짓누르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처음에 소녀는 그것을 일시적인 성장통 정도로 여겼으나,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도 통증이 가라앉지 않고 점점 심해지자 토요일 자습을 빼고 집 앞 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가 보았다. 의사는 한참 동안 소녀의 몸에 청진기를 대고 있다가 고개를 저으며 더 큰 병원에 진단 의뢰서를 써주겠으니 찾아가 보라고 말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소녀는 몇 달 동안 토요일마다 이런저런 병원들을 전진해야 했다. 하루에 병원을 세 군데씩 들러야 할 때도 있었다. 의사들은 그녀의 병명을 밝혀내지 못했고, 늘 더 큰 병원에 진단 의뢰서를 써 주겠다고 말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 의뢰서를 들고 소녀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그녀 할아버지가 죽은 대학병원이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할아버지와 같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의사는 수술을 권고했어, 라고 소녀는 그날 집에 돌아가 엄마에게 말했다.

하지만 수술을 한다고 백 퍼센트 완치는 아닌 거잖아. 그리고 수술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바로 죽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그냥 수술을 받으면 적어도 가까운 시일 내에 죽지는 않는단 거지.

그치만 그 수술, 돈도 엄청 많이 들 텐데. 여보, 어떻게 생각해요?

당신이 결정해. 우리 집 경제적 실권은 당신한테 있잖아.

그치만 당신이 가장이잖아요.

나는 몰라.

나도 잘 모르겠는데.

……당신, 그거 들었어? 요새는 북극곰들이 먹을 게 없어서 저위도 지역으로 헤엄쳐 내려온다더군.

아, 맞아요! 중국에서 북극곰이 고기잡이배를 덮치는 바람에 선원이 네 명이나 죽었다면서요. 세상에 무섭기도 해라!

그들은 딸의 수술보다 더 중요한 문제인 북극곰 이야기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소녀는 이제 자신의 인생이 복불복 게임처럼 되어 버렸음을 알았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는 콜라인지 까나리 액젓인지 모를 음료를 코를 꾹 막고 마신다. 소녀는 매일 밤 자신에게 아침이 한 번 더 허락될지를 알지 못한 채 눈을 꾹 감고 잠자리에 든다. 복불복 게임은 예능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재이다. 게임이 시작되면 출연자와 방청객 모두, 심지어 게임에 참가하고 있는 당사자마저도 배를 부여잡고 웃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복불복 게임’은 소녀에게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소녀는 할아버지를 생각했다. 입안이 씁쓸해졌다.

 

소녀의 오빠가 소파에 누운 듯 기댄 채로 보고 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는 반쯤 헐벗은 미녀들이 긴 머리칼을 나풀거리며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에서는 공작새처럼 치장한 남녀가 벚꽃 아래에서 셀카를 찍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뭐가 좋아서 저렇게 흥청망청 일까. 영원한 사랑이란 어차피 존재하지 않잖아, 하고 소녀는 생각했다.

결국엔 서로가 서로를 버리게 될 텐데. 헤어지고 잊혀지고. 사랑이란 의미 없어.

근래에 소녀는 할아버지의 얼굴 생김이며 목소리를 어렴풋하게 밖에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사실은 지압판이 박힌 슬리퍼처럼 그녀가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그녀를 쿡쿡 찔러댔다.

사랑이란 의미 없어, 소녀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3

 

그런 소녀를 너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학교에서 소녀는 자신의 가정환경이나 병에 대해 말을 아꼈다. 그러므로 너는 소녀를 평범한 여고생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친구들에게 사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 소녀를 이상하게 꺼림칙한 녀석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더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생각하느라 소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소녀는 종종 네가 자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 궁금해 하곤 했다.

 

너는 어렸을 때부터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사람들을 몰고 다녔다. 네가 가는 곳마다 벌떼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한진욱 저 녀석은 어디 가도 굶어 죽지는 않겠어, 너를 가르쳤던 교사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고등학교 입학식 날, 아는 사람이 없어 막대가 부러진 밀대처럼 교실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소녀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 것도 너였다. 타인과 타인들의 사슬이 거미줄처럼 너를 너무 두텁게 둘러싸고 있어, 소녀는 자신이 너의 입장에 처하게 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질식해 죽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관계 속에서 네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소녀는 가끔 신기했다.

 

언젠가부터 소녀는 무리 속에서 네 뒤통수만 보고도 너를 단번에 찾아낼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실이 짜릿하면서도 무서워, 소녀는 가끔 너를 보고도 일부러 못 본 척 지나가거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척을 했다.

나, 여기 있잖아. 아까 눈도 마주친 것 같은데. 못 본 거야?

있는 줄 몰랐어.

바로 앞에 있었는데, 줄곧.

왠진 모르겠지만 너는 눈에 잘 안 띄어.

허어, 세상에.

너는 소녀를 어떻게 생각할까, 소녀를 가끔 생각하기는 할까, 그런 물음들이 소녀의 머릿속에서 피구 공처럼 튀어 오르는 날들이 있었다. 그런 날이면 소녀는 이유 없이 발그레해진 볼을 두 손으로 가리며 그 물음들을 꾸역꾸역 삼켰다.

 

 

4

통증 때문에 잠 못 드는 밤이면, 소녀는 차라리 자신이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예능 프로그램의 복불복 게임에서 출연자는 종종 자신이 마신 검은 액체가 콜라가 아니라 까나리 액젓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 더 평온한 표정을 짓곤 했다. 마치 이제 더 이상 자신에게 이것보다 더 나쁜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이.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부터 소녀는 가족 중에서 죽음과 가장 맞닿아 있었다. 소녀가 어렸을 때 엄마는 세 남매를 옹기종기 앉혀두고 어떤 할머니가 배고픈 숲속 동물들에게 호박죽을 쑤어 준다는 내용의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오빠는 자기도 커서 호박죽 할머니 같은 사람이 되겠노라고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남동생은 숲 속 동물들이 귀엽다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호박죽 할머니는 언제 죽어? 호박죽 할머니는 늙었는데 어떻게 ‘동물 친구들의 손자와 그 손자에게도’ 호박죽을 먹일 수 있어?

소녀의 엄마는 소녀가 물음을 마치자마자 소녀의 등짝을 짝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때렸다.

쪼끄만 게 못하는 소리가 없어, 재수 없게 그런 말은 왜 해?

어쩌면 나는 애초부터 일찍 죽을 운명이었을지도, 하고 소녀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5

 

소녀의 학교에서는 학반을 세 개씩 묶어 국어, 수학, 영어를 수준별로 나눠 수업했다. 소녀는 너와 국어 수업을 같이 들었다. 소녀가 네가 속한 반은 가장 수준이 높은 반이어서, 인원수가 열댓 명밖에 되지 않았다. 모의재판 경연대회인지 자치법정 시연대회인지 하는 대회 때문에 자치법정 동아리 부원인 급우 두 명이 이틀 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 때 소녀의 옆자리와, 다른 한 소녀의 옆자리가 비었다. 그녀는 귀족적인 얼굴 생김새 때문에 아이들 사이에서 아가씨라고 불리는 인물로, 국어 시간에는 소녀의 바로 뒷자리에 앉았었다. 너는 아가씨가 너의 절친한 친구일 뿐이라며 항변했지만, 너와 아가씨가 시쳇말로 ‘썸을 타는’ 사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초로의 국어 교사는 칠판 한가득 암호문처럼 보이는 문자들을 써가며 서동요에서 나타난 향찰 표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소녀는 네가 자신과 아가씨가 있는 쪽을 줄곧 쳐다보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순간 네가 설핏 웃는 것을 본 것 같다고, 소녀는 문득 생각했다. 너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소녀와 아가씨가 있는 쪽으로 걸어 왔다. 소녀는 마른 침을 삼켰다. 이유 없이 목이 탔다. 소녀는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너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너는 그걸 알아차렸는지 소녀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소녀는 너의 인사를 받아주지 못했다. 너의 그림자가 소녀의 교과서를 회색으로 물들였다가, 더 짙게 물들였다가, 소녀가 손을 살짝 떨게 했다가, 소녀의 심장을 덜컹거리게 했다가, 곧 그 빛을 거두었다. 너는 소녀의 등 뒤로 돌아가 아가씨 옆자리에 앉았다. 교사가 서동요의 조사표기에 대해 설명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한진욱이, 방금 뭐한 거지?

하하 쌤. 죄송해요. 그냥, 음, 쓸쓸해 보여서요.

너와 교사는 동시에 너털웃음을 웃었다. 어떤 녀석이 호들갑스레 휘파람을 불었다. 아가씨는 너를 밉지 않게 흘겼다. 네가 아가씨가 쓸쓸하다면 소녀 또한 쓸쓸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소녀는 잠시 원망스러웠다. 그렇지만 소녀는 곧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 애초에 나는 너의 친구도 그 무엇도 아닌 걸. 관계란 덧없어. 사랑이란 의미 없어.

 

소녀는 초등학교 때부터 어깨를 채 덮지 않는 단발머리를 고수해왔지만, 어느 날인가 머리를 길러 보기로 마음먹었다. 죽기 전에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한번 시도해 봐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사실 소녀의 친구들은 근 십년 동안 소녀에게 머리를 길러 살짝 웨이브를 넣을 것을, 조언하다 못해 간청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 해 보는 거지, 라고 소녀는 중얼거렸다. 절대로 아가씨가 길고 탐스러운 생머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절대로 아가씨가 얼굴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가늘고 하얀 손가락으로 쓸어 넘길 때마다 네가 그녀의 모습을 감탄어린 눈길로 지켜보기 때문이 아니었다.

 

 

6

 

……어둑한 데 혼자 앉아 있는 걸 좋아하나봐. 저번에도 여기 있는 걸 본 것 같은데.

창밖을 보던 고개를 살짝 돌려 다가온 사람이 너라는 것을 확인한 소녀는 혼자만의 공상에서 벗어났다. 바깥의 빗소리는 너의 발소리를 가릴 만큼 충분히 요란했다.

비가 오네. 나 우산이 없는데, 소녀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너는 창문을 열고는 한 손을 바깥으로 내밀었다.

….. 곧 그칠 텐데. 이런 비는.

하지만 아까보다 빗줄기가 더 굵어졌잖아.

그러니까 더 세게 퍼붓고 곧 그쳐버리는 거지.

소녀가 너를 미심쩍게 쳐다본다고 생각했는지, 너는 한쪽 뺨을 일그러뜨리듯이 웃으며 덧붙였다.

그냥 믿어. 나는 비에 관해선 전문가라니까, 평생을 여기 송학리에서 살았는걸, 나름 시골 사람이라고. 그나저나 저녁 먹으러 안가?

가야지, 근데 친구들이 어디 갔는지 모르겠네. 밖에 있으려나, 라고 말하며 소녀는 너에게 한 손을 흔들어 보이며 계단을 내려갔다. 어느 순간 소녀는 자신이 딛고 있는 바닥이 좌우로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계단 전체가 트램펄린이라도 되어 버린 건지, 소녀는 자신이 내딛는 발걸음이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인의 그것처럼 홀가분해졌음을 느꼈다. 공중에 붕 떠있는 기분이었다. 설마 또 지진인가, 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비명을 지르며 달려오는 것을 본 것 같았다. 뭐야, 무서운 얼굴을 하고선. 왜 그렇게 빠르게 뛰어오는 거야, 라고 소녀는 말했다. 최소한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했다. 발아래에 형광등 달린 천장이 놓여 있고, 머리 위에 시멘트 계단이 있는 것을, 그리고 다시 천장과 바닥이 똑바로 돌아오는 것을 소녀는 슬로모션으로 느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소녀는 자신이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져서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다운점퍼처럼 구겨져 있다는 사실을 지각했다. 너는 소녀를 일으켜 세워 다리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었다. 소녀는 너의 눈길을 피했다. 최근 들어 소녀는 자주 몸의 중심을 잃곤 했다. 이것도 병이 진행되는 과정이려니 하고 소녀는 내심 생각했다.

야, 정말….. 왜 그래, 네가 그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깜짝깜짝 놀라는지 알아?

…… 왜 걱정을 하는데, 라고 소녀가 물었다. 정말로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너는 황당한 질문을 받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야, 당연하지. 친군데.

…..우리가 친구였어?

친구가 아니면 뭔데?

그냥….. 얼굴만 아는 사이.

말을 해놓고 보니 어쩐지 재수 없는 말을 한 것 같아, 소녀는 고개를 숙이고 황급히 덧붙였다.

나는, 친하다는 것과 그냥 아는 사이라는 것의 경계를 잘 모르겠어, 친하다는 단어의 정의를 모르겠어.

난, 그렇게 복잡한 생각은 하지 않아서, 그냥 나랑 말을 한번이라도 섞어본 사람은 다 내 친구라고 여기고 있어. 그러니까 너는 내 친구고, 그 중에서도 특히 각별한 친구라고.

참 느슨하고 헐렁한 인간이네. 게다가 사람 많은 복도에서 엄청 큰 목소리로 저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하고 있잖아, 라고 생각하면서도 소녀는 저도 모르게 입 꼬리를 실룩거렸다. 그것을 숨기려 소녀는 너에게 말을 건넸다.

너는 밥 먹으러 안가?

가야지, 반에 애들 있을 테니까 같이 가려고. 박찬준은 또 블랙라벨 미적분 같은 거 꺼내서 수학 문제나 풀고 있겠고, 그 옆에서 신기현은 열심히 테블릿으로 길거리친구들 게임을 하고 있으려나.

……걔 그 게임 하다가 메뉴 잘못 눌러서 기록 다 지워버렸다면서?

……그래서 지금 피눈물을 흘리며 1단계부터 다시 하고 있잖아.

소녀는 너와 드문드문 이야기를 나누며 일층까지 내려갔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너는 현관 밖으로 손을 내밀며 하늘을 살폈다.

야자 끝날 때 까지 비가 그치지 않으면,

응?

내가 우산 씌워 줄게. 오늘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 말이야, 어쩐지 누구랑 같이 우산을 쓰고 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큰 우산을 가지고 나왔거든.

진짜 큰 우산이야. 이따만 해, 라고 말하며 너는 팔을 크게 벌렸고, 소녀는 그제야 실룩거리는 입을 가렸던 손을 내리고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7

 

소녀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비가 계속 내리기를 빌며 야자 시간 내내 창밖을 쳐다보았다. 야자가 끝날 무렵이 되자 아이들은 감독 교사의 눈치를 살피며 하나 둘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뭐야, 송학리의 기후 전문가라더니. 완전 사이비잖아, 라고 생각하며 소녀는 미소를 지었다. 소녀는 스쿨버스로 통학했는데, 늘 좌석 수는 학생 수보다 부족해, 스쿨버스를 타는 학생들은 좌석에 앉기 위해 야자가 끝나는 종이 울리자마자 운동장을 가로질러 스쿨버스 주차장까지 경주마처럼 뛰어가곤 했다. 평소에는 그 대열에 소녀도 포함되었다. 하지만 그날 소녀는 느긋하게 가방을 쌌다. 너는 학교 본관 4층에 있는 특별반 자습실에서 자습을 하기 때문이었다. 소녀가 자습을 하는 별관과 네가 있는 본관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 네가 별관까지 오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릴 터였다. 하루쯤 서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라고 생각하며 소녀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소녀는 난간의 틈 사이로 별관 앞 가로등 아래에서 우산을 들고 서 있는 너를 발견했다. 계단을 내려오는 아가씨와 친구의 대화가 들리지 않았다면 소녀는 서둘러 계단을 뛰어 내려갔을 것이었다.

 

아, 무슨 비가 종일 내려?

나 우산 있어. 같이 쓰자, 라고 아가씨의 친구가 말했다.

너는 버스 타잖아. 왜, 우리 집까지 씌워 주고 집가시게? 여기서 십 분 걸리는데?

너 그럼 십분 동안 비 맞으면서 걸어가야 되잖아. 어떡해?

어우, 괜찮아. 나 옆집에 한진욱 살잖아. 걔는 우산을 가져 왔겠지? 설마 안 가져오지는 않았겠지? 안 가져 왔으면 어떡하지? 하는 수 없이 비를 맞아야지!

경쾌하고 리드미컬한 아가씨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러 퍼졌다. 소녀는 시멘트 바닥에 들러붙은 껌처럼 계단 한 구석에 우뚝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오! 한진욱, 이 누님에게 우산을 씌워 주려 기다리고 있었구먼! 역시 실망시키지 않아, 우리 콩나물!

아가씨가 너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웃었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아가씨의 머리카락과 꼭 맞게 줄여 입은 치마 아래로 길고 곧게 뻗은 그녀의 다리에 소녀는 잠시 시선을 두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워서, 소녀는 무심결에 짧고 비쩍 마른 데다 안으로 굽은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계단에서 구른 것 때문에 양 다리에 시퍼렇게 멍도 들어 있었다.

야, 너 기다린 거 아니거든, 친구 기다렸거든! 넌 우산 없으면 여기 서서 잠깐 기다려. 그 친구 버스 있는데 까지 바래다주고 다시 올게, 너는 아가씨를 부드럽게 바라보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녀는 자신의 모습이 행여나 아래에서 보일까 벽에 몸을 더욱 바투 붙였다.

친구? 근데 걔는 버스 타는 애면서 왜 이렇게 안 나와? 딴 애들은 종 치자마자 뛰어나갔는데.

그지. 나, 걔 우산 씌워줄라고 야자 끝나기 오 분 전에 나왔거든. 감독쌤한테 안 들키려고 일층까지 맨 발로 뛰었어.

야자 끝난 지가 언젠데. 벌써 팔 분 지났다. 인제 버스 출발하겠는데. 설마 아직 안 나왔겠어? 뭐, 다른 사람 우산이라도 쓰고 갔겠지. 우리도 가자.

아니, 잠시만….

야, 너 그렇게 멍한 표정 짓지 마. 더 콩나물처럼 보인다니깐!

아가씨가 너를 쳐다보며 배를 부여잡고 깔깔 웃었다. 너는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아가씨 쪽으로 우산을 기울였다. 대체 콩나물 같아 보이는 표정이란 게 뭐야, 라고 말하는 너의 목소리가 너와 아가씨의 발소리와 함께 멀어져갔다. 소녀는 벽에서 등을 떼고 아래를 살폈다. 아가씨와 네가 충분히 멀어진 것을 확인한 후에 소녀는 스쿨버스 주차장 쪽으로 미친 듯이 뛰어갔다. 소녀가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버스는 막 출발하려 하고 있었다. 비를 맞으며 우는 건 순정만화의 여주인공, 그러니까 아가씨처럼 생긴 애들의 전유물이야, 라고 생각하면서 소녀는 입구까지 꽉 찬 버스에 끼여 탔다. 블라우스가 비에 젖어 땀 냄새가 더 짙게 배어났다. 땀 냄새라면 분명 비려야 할 텐데 어찌 된 일인지 짠 냄새가 났다.

 

 

8

 

어제 어디 갔었냐? 나 십오 분 동안 너를 기다렸는데. 우산도 없이, 집에 어떻게 갔어?

너는 등교하자마자 소녀에게 물음을 던졌고 소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냥 비 맞고 갔어, 라고 대답했다.

왜? 우산 씌워주겠다고 했잖아.

응. 네가 와 있는 걸 봤어. 근데, 아가씨가 너에게 말을 걸길래…. 같이 우산을 쓰고 가자고 하길래……

너의 기세등등했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너는 아아, 그럼 위에서 듣고 있었구나, 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주 긴 시간동안 침묵이 흘렀다. 소녀는 고치 옆구리가 터진 번데기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가씨를 사랑해,

소녀가 말끝을 올리지 않고 평서문을 말하듯이 물었다. 너무 작은 소리로 말해 너는 듣지 못했을 지도 몰랐다. 소녀는 목소리를 조금 더 높여 재차 물었다.

아가씨를 사랑해?

창문 밖에 무언가 흥미로운 것이라도 있다는 듯이 창밖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너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아침 햇살이 너와 소녀를 정면으로 비추었다. 소녀는 눈을 내리깔며 이건 그저 햇볕이 따갑기 때문이야, 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너는 한참동안 창틀에 쌓인 먼지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며 손에 묻은 먼지를 만지작거렸다.

응.

소녀도 창가로 걸어가 네가 그랬듯이 창틀의 먼지를 손가락으로 닦아냈다. 너는, 하고 네가 물었다.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없어?

없어, 소녀가 단칼에 대답했다.

한번도? 아니, 이성 간의 사랑만을 말하는 게 아니야. 누군가라도, 사랑해 본 적이 없어?

응.

네가 슬픈 듯이 고개를 저었다. 소녀는 그 이유를 물었다.

불쌍해서.

불쌍해서?

이렇게 황홀하고 혼미한 감정을 네가 아직 느껴본 적이 없다는 게.

소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입 밖으로 내지 않으려 오랫동안 참아왔던 말들이 스스로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나는 왜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왜 연애를 하는지 잘 모르겠어. 어차피 언젠가는 헤어지게 될 건데. 다 부질없잖아.

이번엔 ‘사랑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잘 모르겠어’ 라고 말하려는 거야? 라고 말하며 너는 설핏 웃었다.

맞아, 나를 너무 잘 아네, 소녀도 따라 웃었다.

흐으음,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다는 애한테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아! 너, 학교에서 가장 친한 애가 누구야?

딱히 없는데.

음, 이제 또 ‘나는 친구와 얼굴만 아는 사람의 경계를 모르겠어. 모든 사람들은 나에게 얼굴만 아는 사람에 지나지 않아’로 시작하는 장광설을 듣겠군. 마가경이잖아, 학교에서 너랑 제일 친한 애라면.

아아 그런가.

뭐야. 네가 그런 반응 보이면 마가경이 슬퍼한다고, 어쨌든, 가경이가 불타는 집에 갇히면, 너는 가경이를 구하기 위해서 불구덩이에 뛰어들 수 있어? 그럴 수는 없을 거야, 그지?

아니, 구하러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 그럴 수 있다면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는 거야.

허, 참 간단명료하네.

아아, 또 이 한정욱하면 간단명료지. 나중에 인강 강사나 할까봐, 너는 익살스럽게 말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사랑해도 언젠가는 이별하게 되는 거잖아. 아니, 삶이 끝날 때까지 함께한다 해도 언젠가는 한쪽이 먼저 죽을 테니까. 같이 죽자고 동반자살을 할 순 없는 노릇이잖아.

거 말 참 재수 없게 하네, 라고 너는 중얼거렸다. 소녀는 잠시 할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려보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의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의 자료화면처럼 뿌옇기만 했다.

언젠가는 끝나게 되는 거니까, 사랑이라는 건 의미 없잖아.

아니지, 언젠가는 끝나게 된다는 걸아니까 더 의미 있는 거지.

…..아가씨를 좋아해?

응.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어도?

응.

아니, 그러니까, 안 좋게 헤어질 수도 있는 거잖아. 그 후로는 예컨대, 길을 가다 마주치면 황급히 눈을 내리깔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야 할 테고, 어느 날 아가씨가 자기 친구들한테 ‘한진욱 저 인간은 내 인생의 걸림돌이었어!’라고 소리 높여 말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될 거고, 아침마다 아가씨와 마주치지 않으려 등교 시간을 맞춰야 할 거고. 그걸 다 감수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걸 다 알면서도 사랑해?

응.

언젠가 너도 아가씨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온다고 하더라도?

응.

….. 있지, 그럼 절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어떡해야 하지.

너는 대답하는 대신 소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수업이 곧 시작됨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너는 아 망했네, 체육관 가야 되는데, 라고 중얼거리며 급히 몸을 돌렸다. 소녀는 자기 교실 바로 앞에 서 있었으므로 서둘러 어딘가로 향할 필요가 없었다. 계단을 두 칸 씩 뛰어 내려가던 너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글쎄,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네. 절대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있겠지만.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용기가 없거나 감정이 없거나 둘 중 하나겠지, 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는 것을 소녀는 알았다. 너의 눈빛이 그런 말들로 일렁거렸다.

 

이번 주 토요일에 코스모스 축제를 하잖아, 라고 소녀를 찾아온 네가 말했다.

구경 갈래? 너 우리 동네에 뭐 있는지 하나도 모르지? 구경 시켜줄게. 어제 우산 씌어주겠다는 약속을 어긴 게 너무 미안해서.

소녀는 너에 대해 생각했다. 너와 아가씨에 대해 생각했다. 너와 아가씨와 소녀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소녀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너는 계속 소녀에게 무언가 말을 하고 있었지만 소녀에게는 그 말들이 들리지 않았다. 한참 있다가 소녀는 입을 열었다.

아니, 괜찮아. 그보다 나 토요일에 해야 할 일이 있어.

해야 할 일?

머리를 자르려고 해.

왜? 열심히 길렀으면서.

소녀는 너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너도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어정쩡하게 따라 웃었다.

아무래도 긴 생머리는 나한테 안 어울리는 것 같단 말이지.

 

 

9

 

소녀가 타는 스쿨버스는 버스 중에서 가장 일찍 학교에 도착하는 버스였다. 소녀는 매일 텅 빈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 아무도 없는 홈베이스에서 책을 챙겼다. 꼭두새벽부터 공부하는 건 너무 범생이 같은 짓 아닌가, 라는 생각에 그 책들을 펴서 예습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소녀는 복도 창가에 몸을 기대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는 학교 운동장과 주변의 집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등교하는 아이들과, 파란 야구방망이 모양의 쿠션을 손에서 이리저리 돌리며 서성거리는 교사와, 교육처분 기간 동안 등교 지도 보조를 하는 과벌점자들의 모습이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소녀의 눈에 가득 안겼다. 등교 시간은 여덟시 까지였다. 너는 항상 일곱 시 오십팔 분 즈음에 교문을 통과해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했다. 소녀는 항상 네가 별관 로비로 얼룩말처럼 뛰어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 창틀에서 몸을 떼고 교실로 돌아 들어갔다. 언젠가부터 그것이 소녀의 하루 일과의 시작으로 굳어져있었다.

 

그렇지만 그 날 소녀는, 일곱 시 사십 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그러니까 책을 챙겨 반에 가져다 놓은 뒤 막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을 때, 네가 학교의 진입로를 따라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너는 아가씨의 짐을 양 손에 든 채 그녀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소녀는 창문에 손가락을 대고 너의 걸음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소녀는 떠오르지 않는 할아버지의 얼굴과, 여전히 소녀를 유령처럼 대하는 가족과, 가만히 있어도 몸이 떨릴 만큼 심해진 심장의 통증에 대해서 생각했다. 너는 아가씨에게 소소한 장난을 치며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내가 너보다 오래 살 수 있다면 좋겠어, 라고 문득 소녀는 중얼거렸다.

물론 너의 연인이 되고 싶다거나, 절친한 친구가 되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그저 멀리서 가끔 네 소식을 들으면서 네가 무엇이 되었다던가, 누구와 결혼했다던가, 어떤 아이를 키운다던가, 어떤 삶을 이뤘다던가, 그런 걸 알 수 있었으면 좋겠어. 지금처럼, 손가락으로 너를 좇을 수 있는 곳에서.

너를 따라가던 소녀의 손가락이 창틀에 걸려 멈췄다. 너와 아가씨는 인파에 섞여 건물로 들어오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아. 내가 너보다 먼저 죽게 될 거라는 걸 알아. 너의 이런저런 소식을 나는 결코 알 수 없게 될 수 없을 거라는 것도.

소녀는 창밖을 한 번 더 바라보고 몸을 돌려 교실로 들어갔다. 너와 아가씨는 막 계단을 다 올라와 교실로 향하는 코너를 돌았다. 소녀는 그것을 느낌으로 알았다.

 

그렇지만 절대로, 이런 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법이야.

 

1) 이 소설의 제목은 이가림 시인의 시 <석류>의 구절에서 따왔습니다. (언제부터/ 이 잉걸불 같은 그리움이/ 텅 빈 가슴속에 이글거리기 시작했을까/ (중략) 사랑하는 이여/ 지구가 쪼개지는 소리보다/ 더 아프게/ 내가 깨뜨리는 이 홍보석의 슬픔을/그대의 뜰에/ 받아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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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변(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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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사립 고등학교가 예산이 부족하다고 푸념할 때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되는 법이다. 이번 경우만 봐도 그렇다. 동아리 예산마저 모자라다고 축제 동아리 부스 운영 지원금을 문화상품권 두 장으로 퉁칠 땐 언제고, 교내 교육활동 성과발표를 빙자한 문집을 만드려 하고 있지 않는가. 발행 부수며 소요 예산을 보아하니, 전교생에게 문집을 한 권씩 돌리려는 계획임이 분명하다. 어쩌다보니 그 문집 한 귀퉁이에 내 글도 한 편 실리게 되었다. 문예부의 실권자인, 늘 열정과 의욕이 넘쳐나시는 나의 국어 선생님께서는 그 사실을 알려주시며 특이한 부탁을 해오셨다.
"…..창작 후기를 써 달라고요?"
"뭐, 창작 후기라고 볼 수도 있겠네. 왜 이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 소설의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었는지, 그런 걸 써주면 돼. 우리는 그걸 "작가의 변(辯)"이라고 부를 거야. 그리고 옆에다가 똥(便) 그림을 그리는 거지. 크하하핫!"
그리하여 나는 고작 일주일밖에 되지 않는 방학의 귀중한 한나절을 반납하고 학교에 나와 이른바 '작가의 변'을 쓰게 된 것이다.

 

문집에 실릴 내 글은 3월에 열린 교내 소설 공모에서 입상한 작품으로, 평범한 어느 소녀가 오지랖 넓은 친구를 만나 인생이 마구 꼬이는 이야기를 담은, 본격문학이라기보다는 초등학교 고학년을 위한 동화에 가까운 소설이었다. 쓸 당시에는 희대의 걸작처럼 보였는데 다시 읽어보니 진부하디 진부한 소설이었다. 플롯이 너무 단순한 탓에 동기랄 것도 없어 보였다. 거의 1년 전에 쓴 글인데, 창작 동기는 커녕 무슨 글이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는게 정상 아닌가, 라고 생각하며 나는 종이컵에 담긴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이 코코아로 말하자면 매점의 계절 한정 상품으로, 이번 달 매점 아저씨 매상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어 나는 코코아 컵을 입에서 반쯤 떼었다. 가끔씩 눈썹을 덮던 갈색 앞머리에 아래로 약간 처진 눈꼬리. 길쭉한 팔다리와 길쭉한 얼굴…. 그건 당신이었다.
……그래, 이 소설을 쓰게 된 건 당신 때문이었지.
아니, 당신이 더 이상 내 여기에 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었지.

 

당신과 나는 그 초등학교의 젊은 교사들이 장난으로 "쟤들은 아주 그냥, 평생 붙어 살겠네"라고 놀릴 정도로 각별한 친구였다. 나는 중상위권 성적의 눈에 안 띄는 조용한 학생이었고, 당신은 경력 많은 할아버지 교사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의 개구장이였으니 당신과 나의 우정은 분명 타인들의 눈에 신기하게 보였을 것이다. 엇비슷한 부류끼리 모여 유유상종하는 게 인간관계의 본질이라고 누군가 말했지만, 그건 나이가 좀 들어서 세계를 보는 시선이 좁아지고 정형화된 뒤에야 할 만한 일이었다. 어린 아이들은 집이 가깝다거나, 엄마들끼리 아는 사이라거나, 놀이터에 오는 시간이 비슷하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당신과 나는 그렇게 맺어진 친구였다. 우리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고, 나의 할머니는 당신의 어머니와 놀이터 정자에 앉아 간간히 대화를 나누었으며, 동생들끼리도 나이가 같아 함께 어울렸으니, 그때의 어린 우리는 친구가 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초등학교 졸업반인 육학년이 되어서도 같은 반이 되었고, 여전히 가깝게 지냈다. 그즈음 나는 일 년만 더 있으면 중학생이 된다는 사실에 부쩍 어른이 된 것만 같은 설렘을 만끽하고 있었다. 아마 그래서였는지 문득 나는 당신에게 장래희망이 무어냐고 물었다. 어린 당신은 경찰이 되고 싶어했고, 오랜 친구로서 나는 당신이 꿈을 이루기를 바랐다. 어린 나의 식견으로, 경찰대학은 동네의 모든 엄마들이 선망하는 서울대학에 버금가는 대학이었으므로, 나는 당신이 성적을 좀 올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방과 후에 공부를 가르쳐 주겠다고 제안했다. 아니, 제안했다기보다는 강요했다. 당신은 당황한 듯 하였으나 선선히 나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날부터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다 푼 문제집을 꺼내 내가 쓴 답안에 하나하나 화이트칠을 하곤 했다. 그렇게 답안을 가린 문제집을 한 뭉치 복사해서 당신에게 풀라고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때로는 알록달록한 색연필로 테두리를 한 종이에 직접 문제를 만들어 당신에게 건네기도 했다. 당신의 답안을 채점하고 당신이 모르는 문제를 가르쳐 주며 나는 홀로 뿌듯해 했다. 어쩌면 먼 훗날 경찰 제복을 멋있게 차려 입은 당신이 경례를 붙이며 내게 감사 인사를 하는 장면을 상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신은 언제부터인가 울적한 얼굴로 수업에 들어왔다. 때로는 우리의 수업을 빼 먹고 당신과 내가 살던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서 홀로 그네를 타고 있기도 했다. 그럴수록 나는 당신을 닥달했다. 당신이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린 이 문제지를 만드느라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썼는지, 당신이 갈망하는 경찰이 되는 것이 요즘 같은 세상에 얼마나 하늘의 별따기 같은 일인지, 나는 소리 높여 떽떽거렸다. 당신은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바라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당신의 성적은 점점 떨어져 교사들의 걱정을 살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나와 당신은 냉랭하게 멀어져 버렸다. 우리는 가급적 서로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등하교 시간을 조정했다. 당신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졸업식 날이었다. 꽃다발이며 졸업장을 양 손 가득 든 채 모퉁이를 돌다가 서로 맞닥뜨린 것이었다. 나는 어색한 눈길로 당신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내 손에 쥐인 꽃다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나서 우리는 마치 애초에 모르던 사람들처럼, 인사 한마디 나누지 않고 저벅저벅 서로의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 이후로 나는 더 이상 당신을 만날 수 없었다.

 

당신과 내가 살던 동네는 이웃의 여러 마을과 하나의 학군으로 묶여 있어, 우리는 서로 다른 중학교로 배정 받았다. 중학생이 된 이래로 나는 당신이 학교 폭력 사건에 연루되었다거나, 흡연으로 물의를 일으켰다거나 하는 진위를 알 수 없는 소문 외에는 당신의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었다. 그 소문 속의 당신은 내가 익히 알아온 밝고 어리숙한 아이와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고, 나는 어쩌면 그게 내 탓인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내 순진한 선의가 당신에게는 잔혹한 폭력이었음을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초등학생이 경찰대 대비 공부를 해서 무슨 소용이었겠는가. 당신은 깐깐한 과외 교사가 아니라 싱거운 농담과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필요했을 텐데. 그런 생각에 나는 때때로 울적해지곤 했다.

 

고교 비평준화 지역인 우리 지역에서는 특목고에 합격한 이들을 제외한 모든 학생들이 자신이 지원한 고등학교에서 고입선발고사를 치러야 했다. 입학 정원보다 지원자가 많을 시에는 불합격생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결국 정원 미달인 먼 고등학교에 등록할 수 밖에 없었는데, 선생님들은 이를 비꼬듯이 '유학'이라고 불렀다. '유학생'을 가급적 만들지 않는 것이 그즈음 모든 중3 담임 선생님들의 목표였다. 고입 시험 날에는 선생님들이 지역의 20여개 고등학교에 나눠 찾아가 마치 수능날의 학부모들 처럼 제자들을 응원하곤 했다. 나는 화이팅을 외치는 담임 선생님께 손을 흔들어 보이며 수험생 명단에서 내 이름을 찾으려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 명단에서 나는 당신이 진학한 중학교 이름 옆에 쓰인 당신의 이름을, 내내 찾고 싶었던 당신의 이름을, 보았다.

 

이제 당신에게 치졸한 사과라도 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나는 시험을 치는 내내 두려우면서도 설렜다. 당신이 내 사과를 듣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어떤 말을 털어놓을지 나는 줄곧 상상했다. 그러나 며칠 후에 발표된 고등학교의 최종 합격자 명단에 당신의 이름은 없었다. 나는 당신이 새벽에 집을 나서야 하는 먼 고등학교로 '유학가게' 되었다는 것을 당신과 별로 닮지 않은, 당신의 동생으로부터 들었다. 우리가 지원한 고등학교는 시 변두리의 외곽 지역에 있어 아이들이 그다지 선호하는 학교는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허탈하면서도 의아해했다. 입학 후에 나는 우연히 그 해의 불합격생은 겨우 세 명이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학생부 종합 전형'의 확대로 우수한 상위권 학생들이 학생부를 꼼꼼하게 적어주기로 유명한 그 학교로 몰려들었던 것이었다.
세 명만 지원자가 적었었더라면 나는 당신을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어쩌면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었을지도.
……….딱 세 명만 다른 학교로 지원했었더라면.

 

그래. 나는 당신과 나를 생각하며 이 소설을 썼었지, 엄청 시니컬한 기분으로. 나는 이미 식은 코코아를 양손으로 잡고 들이켰다. 교무실의 몇몇 선생님들과, 지구과학실의 과학 심화반 아이들과, 텅 빈 교실의 나 밖에 없는 학교는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당신 생각을 하지 않은지도 무척 오래되었다,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어쩌면 당신과 나는 영영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지금껏 여러번 마주쳤는데 서로 알아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어린 우리가 해 저무는 놀이터에서 공기놀이를 하던 시절로부터 우리는 너무 멀리 와 버렸으므로. 내가 많이 변했듯이, 당신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므로. 그러나 마주쳤는데도 알아보지 못했다면 그건 만나지 않은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어쩌면 평생 전하지 못할 미안한 마음을 담아, 결코 당신에게 닿지 못할 문집에, 당신을 향한 반성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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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의 힘 (가구의 힘 패러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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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의 힘

 

 

얼마 전에  커플이 된 녀석이 있다

그 녀석은 내 마지막 여친이다

나는 그 인스타 팔로우를 언제고 취소할 수 있었지만

그때마다 핑계를 만들어 한 번도 취소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너는 날마다 그 연인들의 다정한 셀카가 열 몇장씩 올라오는 것이 여간 눈꼴시러운 게 아니라고

들어갔다온 얘기를 하며 나보다 저가 더 화난다듯이

허공에 잽을 날릴 때마다 태연한 나의 손가락도 뜨끔거렸지만

나는 걔들이 뭐 연예인인가 걔네들 일상에 관심을 다 가지게

하고 한마디 해주었다 #남치니가 뽑아 준 곰인형 이나

#오늘부터 125일 이라든가 #기대만땅 크리스마스 #교복 데이트~~!!!가 마구 뒤섞여

트리처럼 번쩍번쩍거리는 그 인스타를 생각하며

나는 폰을 쥔 왼손을 감추며 돌아섰다

연애란 그런 것이 아니지

홀로 골목길을 걸을 때면 몹쓸 기억이건 달콤했던 시절들이

검게 손때가 묻은 오래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우리는 여러 번 이별을 입밖에 내었지만 그때마다

마주앉은 입김으로 그 말들을 다시 지워버렸다

우리의 연애는 그 입김이 끌고 왔던 것이다

인스타를 하는 그 녀석은 사랑하는 사람의 '좋아요'가 늦어졌다는 것만

느껴도 금방 초라해지는 여자라서

연인의 눈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세월 가득 뒤집어 쓴 오랜 커플이

그리운 눈이 소복한 골목길을 홀로 거닐다가 우연히 서로

마주쳤을 때만큼이나 벅찬 행복을 다시 느낄 수는 없는 법이다 연애란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입김에 실려 서로의 심장에 깃들기 때문이다

그녀란 녀석도 그런 맥락에서 동정할 것…

하고 녀석의 인스타에서 출발한 생각이 여기에서 막혔을 때

네가 매점이나 갈까 하는 음성이 좀 누그러져 들려왔다

너무 조용해서 상심한 나머지 내가 잠든 척 하는 걸로 오해한 거냐

나는 갑자기 억지로라도 생각을 막바지로 몰고 싶어져서

너의 오해를 따뜻한 무관심으로 받아들이며

쉬는 시간이 끝날 때까지 서글픈 인스타그램론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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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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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강은교, <사랑법>

 

묻습니다.

….나는 이상한 사람입니까.

굳이 대답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당신이 무어라고 답할지 나는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다, 너는 전혀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겠지요. 그러나 나는 당신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하겠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온 마음을 다해 믿어보려고 해도 도저히 그것만은 하지 못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절대로 보통의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이상한 사람이라는 것을.

 

가끔 궁금해 합니다. 여덟 살 때의 내가 그 여름날 다른 장소에 있었더라면 지금 내 삶의 궤적은 어떤 식으로 변했을까, 하고. 태양은 모든 것을 태워버리겠다는 듯 맹렬히 끓어오르고 더위를 먹은 동네 개들은 경쟁하듯 쓰러져 마을에 하나 밖에 없는 동물 병원 원장님 쥐구멍 같은 삶에도 햇볕 들던 날이었습니다. 오빠와 나는 거실에서 선풍기 바람을 쐬며 만화영화를 보고 있었습니다.

“아따, 찬 물도 위아래가 있다 했거늘, 너희들만 찬바람 쐬니까 좋으냐.”

엄마는 깎던 참외를 쟁반에 받쳐 부엌에서 거실로 들어오셨습니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엄마는 널어둔 빨래를 걷으려 마당으로 뛰어나가셨습니다. 만화 영화가 끝나고 새로 나온 진공청소기를 광고하는 젊은 여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거실 가득히 울러 퍼졌습니다. 오빠는 쟁반 위에 놓인 과도를 잠시 살펴보더니 그것을 집어 들어 슈퍼 히어로의 검인 양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지구를 지키는 파워레인저다! 덤벼라 악당아!”

덤벼라, 하며 오빠가 휘두른 칼이 내 얼굴에 스치던 것과 오빠가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칼을 집어던진 것 중 어느 것이 먼저였는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칼은 내 볼을 깊숙이 베었고 오빠는 울며 엄마에게 달려갔습니다. 나는 방울져 떨어져 내리는 핏방울을 멍하니 바라보며 참 붉다. 라고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습니다.

 

왼쪽 뺨에는 칠레의 땅 모양처럼 기다랗고 구불구불한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습니다. 그 때부터 내 별명은 칠레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잔인했습니다. 자신들과 다른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경멸했고 놀림감으로 삼았습니다. 나는 그들의 가장 만만한 놀잇감이었습니다. 체육 수업을 하고 오면 실내화는 으레 쓰레기통 한 귀퉁이에 처박혀 있었고 필기구는 바닥에 나뒹굴었습니다. 남자아이들은 내 필통을 둥글게 말아 캐치볼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커터 칼로 찢어발겼습니다. 초등학교를 다닌 6 년 동안 내내 내 책상에는 네임펜으로 온갖 욕설이며 악담이 쓰여 있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는 홀로 소강당 청소를 하고 있었고, 그들은 담배를 피러 으슥한 소강당에 숨어들어온 아이들이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소강당에 사람이 있자 그들은 잠시 당황한 듯 했으나. 그것이 나라는 것을 알자 야비하게 웃으며 다가왔습니다.

“이야, 칠레가 청소를 하네. 그런데 얘들아, 더러운 칠레가 청소를 하면 병균이 퍼져서 더 더러워지지 않을까아?”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습니다. 한 녀석이 머리를 감싸 안고 쓰러지는 시늉을 했습니다.

“으윽, 칠레 병균에 감염되었다! 물러서, 모두!”

입을 열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뜨뜻미지근한 오줌이 종아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뭐냐, 칠레 주제에 째려보냐! 눈 안 깔어!”

“야아, 그만해라. 칠레 오줌 쌌다.”

“더럽다!”

“칠레 균 옮을라. 가자!”

무리는 킬킬거리며 소강당을 빠져나갔습니다. 나는 멍청하게 서 있었습니다. 뺨을 타고 피가 흘러내리도록, 바지를 타고 오줌이 흘러내리도록 가만히 멍청하게 서 있다가 나는 이런 꼴이 났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며칠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 사건을 극복하는 데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다른 모든 기억이 그렇듯이 그 기억도 세월이 흐르자 빛바랜 사진처럼 흐릿해졌습니다. 기억이 희미해질 무렵 뺨의 흉터도 다 아물어갔습니다.

 

그즈음에 나는 내가 살아온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내가 다닌 중학교에서는 나를 제외한 누구도 가지 않은 학교였고,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학교였습니다. 나는 그 곳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꺽다리 예지와 난쟁이 민아. 고등학교 일학년 때 나와 같은 반이 된 예지는 채팅 용어로 말하듯이 모든 말을 ‘임’이나 ‘님’으로 끝내는 특이한 말투를 가진 아이였습니다. 아빠의 지방 발령 때문에 초등학교 오학년 때 서울에서 이사 왔다는 민아는 똑 부러진 서울말을 썼는데 까무잡잡하고 귀엽게 생긴 민아가 재벌 집 마나님같이 우아하게 말하는 모양이 우스워 예지는 종종 그것으로 민아를 놀려먹곤 했습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친구였다는 둘은 같은 구석은 하나도 없었지만 늘 죽이 척척 맞았고 늘 활기찼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습니다. 예지를 만나러 이 층에 있는 자기 반에서부터 삼 층에 있는 나와 예지의 반까지 올라온 민아가 나에게 먼저 살갑게 말을 붙였습니다.

“처음 보는 얼굴이네. 얘, 너는 이름이 뭐니? 어느 중학교에서 왔니?”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으므로 나는 황망해져 고개를 푹 숙이고 웅얼웅얼 대꾸했습니다.

“장하민…K 중학교에서 왔어..”

“어머나, 거기 여기서 차타고 40분은 가야 나오는 곳 아니니? 3 년 동안 어떻게 매일 통학하려고.”

손거울을 보며 화장을 하던 예지가 나와 민아를 흘끗 쳐다보더니 말했습니다.

“집 멀면 기숙사 들어오면 되는 거 아님? 너 기숙사 신청 안 했음?”

예지가 눈 밑에 명함을 받치고 서툴게 속눈썹에 마스카라를 발랐습니다. 명함에 자랑스럽게 금빛으로 빛나던 '70년 전통 할매 국밥‘ 상호는 마스카라 액이 묻어 시커멓게 일그러졌습니다.

“…그냥, 집에서 다니는 게 편해서.”

“맞음, 뭐니뭐니 해도 엄마가 해주는 집 밥이 최고임.”

예지는 마스카라가 군데군데 묻어 이제 쉬이 원래의 상호를 알아볼 수 없게 된 명함을 부채처럼 팔랑이며 눈 화장을 말렸습니다. 나는 그 아이가 명함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예지, 마스카라 번졌다, 얘. 너는 생전 화장이라곤 하지를 않던 애가, 고등학생이 되더니 무슨 바람이 들어서 갑자기 화장을 하니?”

“나도 이제 예뻐질 거임. 두고 보셈.”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이제 공부나 열심히 하렴, 화장은 삼 년 있다가 하고.”

“뭐래, 나는 너처럼 범생이가 아님.”

나는 연극을 관람하듯 흥미롭게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습니다. 예지는 파우치에서 아직 개봉하지 않은 틴트를 꺼내 뚜껑을 열었습니다. 민아는 반 앞쪽 게시판에 붙어있는 시간표를 유심히 보았습니다.

“너 근데 다음 시간 물리인데 화장해도 되니? 선배들한테 들었는데 물리 선생님, 화장 엄청 엄하게 잡으시는 분이래.”

“헐, 망했음. 빨리 화장 지우고 와야겠음. 하민, 같이 화장실 가자.”

가방을 급히 뒤져 클렌징 티슈를 꺼낸 예지가 내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그 아이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2학년이 되어서는 민아와 예지 둘 모두 나와 같은 반이 되었습니다. 친구들과 학교 앞 분식집에 가서 떡볶이를 시켜먹고, 수련회에 가서 밤늦도록 수다를 떨고, 소소한 장난을 치며 점심을 먹으러 가는 것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나는 중학교 때까지 왕따를 당한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고등학생이 된 나는 더 이상 칠레가 아니었습니다. 그 사실이 너무나 소중하고 좋아서 나는 너무 기뻤습니다. 그 뿐 만이었다면, 그렇게 해피엔딩이었더라면 좋았을 것이었습니다. 세계는 너무나 완벽했습니다. 그 아이, 머루가 나의 조그맣고 완전한 세계에 들어오던 그 날까지는.

 

머루.

머루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눈동자가 머루처럼 검고 깊다고 하여 머루. 어렸을 적부터 유독 머루를 좋아해 혀가 머루 즙으로 퍼렇게 물들기가 일쑤였다고 하여 머루, 얼굴이 머루 알처럼 조그마하고 오밀조밀하다고 머루입니다. 머루라는 것이 그의 본명은 아니나,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심지어 그의 부모님마저 소년을 머루라고 불렀습니다. 머루는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고, 손가락이 길쭉하니 예쁩니다. 머루는 학교의 가장 엄한 선생님마저도 일 분만에 인심 좋은 할아버지처럼 허허 웃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녀석이었습니다. 머루는 상담 교사를 꿈꾸는 전교 육 등이었고, 전교 회장이었습니다. 반반하고 반지르르한,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고생 모르고 평생 살아온 것 같은 머루를 학교의 모두가 알았고, 거의 모두가 사랑했습니다. 요컨대 조롱과 경멸로 가득한 칠레라는 나의 별명과는 달리 머루라는 별명은 사랑과 따뜻함으로 충만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잠시 나와 머루의 아득한 격차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나, 내가 칠레로 불렸던 시절은 이미 먼 과거로 느껴졌으므로, 나는 이윽고 머루와 나를 비교하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요컨대 머루는 나에게 같은 반 아이, 그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윽고 내가 머루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일이 생겼습니다. 사회문화 시간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 반 아이들이 선생님을 몹시 기쁘게 하여 사탕을 받아먹은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선 책상과 책상 사이를 분주히 돌아다니시며 원기둥 모양의 사탕 통에서 청포도 맛 알사탕을 하나씩 꺼내 나누어 주셨습니다. 머루는 내 대각선 앞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그가 야무진 손끝으로 사탕 포장지를 뜯고 조그맣게 입을 벌려 입 속으로 사탕을 집어넣으려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다른 녀석이 머루의 팔꿈치를 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사탕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아앗, 3초 룰!” 하고 중얼거리며 머루는 허리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팔을 길게 뻗어 잽싸게 떨어진 사탕을 주웠습니다. 쪼개져 반 토막만 남은 사탕을 녀석은 눈을 가늘게 뜨고 후우 불더니 입에 쏙 집어넣었습니다. 으음, 맛있다, 라고 말하는 듯한 미소가 녀석의 얼굴 가득 퍼졌습니다.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머루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습니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떨어진 음식이라도 삼 초 안에 주워 먹으면 아직 균이 옮겨 붙지 않아서 괜찮대!”

그때부터 나는 가끔 머루를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떨어진 사탕을 그토록 복되게 먹으면서, 그토록 말갛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어서.

 

그래서 그런 아이가 기묘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 나는 의아했습니다. 언젠가부터 나와 눈이 마주칠 때면 머루는 무언가를 묻는 듯 한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습니다. 나는 처음에는 똑같이 바라봐주는 것으로 응수하다가, 그 다음부터는 머루가 나를 볼 것 같으면 먼저 눈을 내리깔았고, 마지막에는 급기야 성큼성큼 다가가 날카롭게 쏘아붙였습니다.

“너, 뭐야. 왜 그렇게 쳐다봐, 사람을.”

“….궁금해서.”

“뭐가?”

“네가 왜 그런 눈을 하고 있는지. 애들이랑 떠들 때도, 즐겁게 웃을 때도, 너는 항상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잖아. 그건 어째서일까, 궁금해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궁금해서.”

그 말의 뜻을 내가 또렷이 이해하는 데는 조금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온 몸에 닭살처럼 소름이 돋았습니다. 머루는 찬찬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나의 과거를 이런 의외의 인물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지금 내 앞에 서서 이렇듯 염려하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머루 같은 사람을 나는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나는 이해받고 싶었습니다. 공감과 위로를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귀족의 아들처럼 순조롭고 평탄한 삶을 살아온 머루가 육탄전이 난무하는 내 과거를 알게 되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을까, 하고 궁금해 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너처럼 온실 안 화초같이 살아온 사람보다 훨씬 파란만장하고 역동적인 인생을 살아왔다, 라고 뽐내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머루가 다시 한 번 “알고 싶어”, 라고 말했을 때 나는 더 이상 근질거리는 입을 닫고 있지 못했습니다. 참지 못하고 다 털어놓아버렸습니다. 칠레라는 별명, 소강당, 따돌림, 그 모든 것을. 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던 그 모든 것을.

 

머루는 빈 교실에 오래도록 앉아 내 말을 들어주었습니다. 후련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머루에게 모든 것을 말해버린 것이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느껴져 마음이 살짝 무거워지긴 했지만, 나는 그 문제에 대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나는 단지 머루의 질문에 답을 해 주었을 뿐이며, 고등학생답게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머루 또한 자신이 들은 것에 대해 딱히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약간 부끄럽긴 하지만 단지 그뿐, 이라고 생각하며 가볍게 넘기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단지 그뿐, 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 일이 있은 날로부터 일주일 쯤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잠결에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우는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5교시 수학 수업이 끝나자마자 막 엎드려 잠이 들었던 터라 일어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계속 깨워대는 통에 도저히 다시 잘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지는 몰라도 참 집요하게 추근추근 깨워대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기지개를 폈습니다. 내 책상 앞에 선 머루가 허리를 반쯤 숙이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가 느닷없이 말했습니다.

“가자.”

“…어디를?”

“방금 방송 못 들었어? 소강당 청소 도우면 상점 주겠다고, 아무나 빨리 오래. "

머루는 어깨를 으쓱했습니다.

“너 상점 필요하잖아. 작년에 성취포상제 돋움도 못 땄지? 올해는 따야지. 빨리 가자.”

나는 머루에게 질질 끌려 소강당으로 향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청소를 하러 일 년 동안 소강당을 들락거리던 것 말고는 나는 단 한 번도 소강당이라고 불리는 곳에 가 보지 않았습니다. 왜인지 모를 두려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중학교 때 딱 한 번 대강당 마룻바닥을 간답시고 소강당에서 체육 수업을 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 때도 꾀병을 부리며 수업을 빠지고 보건실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피했던 소강당을 지금 머루의 손에 이끌러 가고 있구나, 라는 생각에 우스워졌습니다. 입학한 이래로 처음 가보는 고등학교의 소강당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초등학교 소강당과는 퍽 그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대리석 바닥 가득히 차갑고 좁은 철제 의자가 끝도 없이 이어져 있던 옛날의 소강당과는 달리, 이곳은 어린이 놀이방처럼 노랗고 푸른 매트가 깔려 있었고 조명이 밝게 켜져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옛날의 소강당과 같은 점은 하나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강당 입구에 발을 디디기가 무섭게 머루가 나에게 빗자루와 걸레를 쥐어주었습니다. 나는 예전에 그랬듯이 빗자루를 비스듬히 쥐고 구석구석 끼인 먼지를 빼냈고, 걸레로 창틀의 먼지를 훔쳤습니다. 머루는 밀대 봉으로 턱을 바치고 서서 웃는 낯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난생 처음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를 흐뭇하게 지켜보는 부모처럼. “옛날 생각이 좀 나니? 지금 기분이 어때? 뭔가 상처가 치유되는, 아픔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지 않아?” 라고 말하는 듯 한 기대하는 눈빛으로.

 

머루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전혀 예전의 소강당을 떠올릴 수 없었으며, 다만 간만의 강도 높은 육체노동으로 다리에 알이 생긴 느낌이 살짝 들었을 뿐이므로, 그 물음에 대해 애매하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습니다. 한참 만에 머루는 입을 열었습니다.

“괜찮아? 좀 도움이 된 것 같아?”

머루의 기대에 부푼 얼굴을 보면서 나는 도저히 그렇지 않노라고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응, 조금은.” 이라고 내가 말하자 머루는 더욱 활짝 웃었습니다.

“정신분석학 책에 보니까”. 하고 녀석은 조금 흥분하고 도취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트라우마와 정면으로 맞서는 거라고 하더라.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게 된 사람은 마침내 그걸 극복할 에너지와 용기를 얻는대. 넌 오늘 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어. 이제 네 상처도 깨끗하게 지워질 거야.”

“지우개로 지운 듯이 깨끗하게?”

“그래, 지우개로 지운 듯이. 마치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럼 나도 언젠가 너처럼 떨어진 사탕을 주워 먹으면서도 환하게 웃을 수 있을까, 애초부터 상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은 사람의 웃음을, 이라고 묻고 싶어졌으나 나는 그 물음을 삼켜버렸습니다. 머루의 인생과 나의 인생은 태양과 명왕성만큼이나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였으므로. 내가 생각하기에, 내 상처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점 희미해지긴 했지만, 절대로 마술사의 토끼처럼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다시 여덟 살 때로 돌아가서 그 때 오빠가 휘두른 칼에 얼굴이 베인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만큼이나 자명했습니다. 그래서 머루에게 같이 소강당에 가 주어서 고맙다고 웅얼웅얼 감사인사를 하면서도, 나는 머루가 더 이상 나를 도우려고 하지 말기를, 내가 다시 평소처럼 살아갈 수 있도록 내버려 두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머루는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언제든지 눈이 마주치면 그는 걱정하는 눈으로 나를 찬찬히 살펴보고는 독려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민아와 예지랑 내가 수다를 떨고 있을 때는 어느 순간 다가와 대화에 끼어 분위기를 띄우려 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혼자 앉아 숙제라도 하고 있으면 와서 말을 붙였습니다. 누군가 내 험담을 할라치면 득달같이 달려가 따졌습니다. 머루는 항상 나를 염려하는 듯 했고, 나에게 상처를 줄까봐 조심하는 듯했습니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고 느껴질 때에도. 어느 날인가, 한 아이가 지리 문제집을 들고 머루에게 와 모르는 문제를 물었습니다.

“머루! 칠레는 온대 기후냐, 열대 기후냐?”

머루는 반사적으로 나를 돌아보고 내 표정을 살폈습니다. 그러고는 나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 같은 몸짓을 하였습니다. 머루는 그 아이의 어깨에 팔을 둘러 밖으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나가서 설명해 줄게. 다른 애들 공부하는데 방해되겠다.”

복도에서 머루가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문제를 설명하는 것이 먼 기도 소리처럼 언뜻언뜻 들렸습니다. 그 희미한 소리를 들으며 나는 가슴 한 켠이 싸해졌습니다. 머루가 나를 걱정하지 말았으면, 하고 이제는 간절히 빌었습니다. 머루가 나를 특별하게 대할 때마다, 나는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내가 타인의 보호를 받아야 할 정도로 큰 상처를 지닌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비통하게 들었습니다. 즐겁게 고등학교 생활을 하면서 가끔은 더러 잊기도 했던 옛날의 기억이 이제는 밤낮없이 찾아와 나를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나는 움츠러들었습니다. 뒤로 한 걸음씩 물러섰습니다. 나는 애써 나는 범을 배웠으나, 그 나는 법을 다시 잊어버린 새가 된 것 같았습니다. 나는 뒤로 한 걸음 더 물러섰습니다.

 

머루가 나에게 신경 쓰는 것을 맨 처음 알아챈 것은 예지와 민아였지만, 그 아이들은 이 문제를 의외의 시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루는 민아가 갑자기 뛰어와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웬일이니, 웬일이니. 하민아, 머루가 은근 너 챙기는 거 알고 있니? 있지, 혹시 걔가 너 좋아하는 거 아닐까?”

예지가 입에 고무줄을 물고 거울을 보며 포니테일로 머리를 묶으면서 혀를 찼습니다.

“야, 설마. 머루가 진짜 장하민을 좋아하는 거면 걔는 취향 완전 독특한 거임. 우리 반, 문과반이라서 여자가 얼마나 차고 넘치는데. 거의 삼분의 이가 여자다 아님?”

“그거, 절대 많은 거 아니야. 나 작년에 일학년 일반이었잖아. 그 반은 일 년 내내 반에 남자가 세 명 밖에 없었던 거 기억 안 나니? 거기에 비하면 우리 반은 거의 남고 수준이야, 얘.”

나는 당황스러웠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친구들에게서 괴리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참새처럼 재잘거리는, 모든 것을 그렇듯 가볍게 받아들이는, 끊임없이 까르륵 웃어대는 예지와 민아가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트라우마를 치유한답시고 소강당 청소를 하는 내 모습에 아이돌 가수의 열애설에 대해 달뜬 목소리로 설명하는 민아의 모습을 겹쳐 보았습니다. 나에게는 늘 정중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을 거는 머루가 예지와는 스스럼없이 짓궂은 장난을 친다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나는 절대 저 아이들과 같아질 수 없겠구나, 그 때 불현듯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예지의 시니컬한 목소리가, 민아의 호들갑이 아득히 멀어져갔습니다.

 

어디에선가 둔탁한 것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나는 생각에서 벗어났습니다. 당황한 표정의 선생님들이 복도를 가로질러 홈베이스 쪽으로 급히 뛰어가고 있었습니다. 웅성거림이 일었습니다. 나는 예지와 민아를 쫓아 복도로 나갔습니다. 거기, 홈베이스 한 구석에 저만치 뒤로 밀려난 휠체어와 바닥에 엎어진 채 움찔거리며 일어나려고 애쓰는 소녀가 보였습니다. 선생님과 아이들이 소녀를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한 다른 아이가 두 손을 쉴 새 없이 꼼지락거리며 저만치 멀리 떨어진 곳에 서 있었습니다. 앰뷸런스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쓰러진 소녀의 별명은 모나리자. 사고로 시력을 잃고 하반신 마비에 걸려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아이였습니다. 한 손으로 벽을 더듬어가며 다른 손으로 전동휠체어를 조작하는 아이의 별명으로 모나리자는 좀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두 눈을 감은 채 부드럽게 짓는 그 아이의 미소가 너무 아름답고 신비로워 모두들 그 애를 모나리자라고 부르며 아껴주었습니다.

모나리자는 스스로의 힘으로 사물함에서 책을 꺼내기 위해 늘 직접 정한 순서에 맞춰 사물함 두 번째 서랍에 교과서를 꽂아두었습니다. 화학 책 옆에 문학 책. 문학 책 옆에 미적분 책. 미적분 책 옆에 영어책. 구석으로 물러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아이는, 몇 시간 전 모나리자가 책을 꺼내는 것이 너무 힘들겠다고 불현듯 생각하여, 모나리자의 사물함을 열어 교과서 몇 권을 모나리자의 손이 충분히 닿는 사물함 맨 아래 서랍에 옮겨두었습니다. 모나리자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사물함을 열어 늘 교과서가 있던 자리에 책이 없자 더 깊숙이 손을 뻗었습니다. 소녀는 균형을 잃었습니다. 균형을 잃고 휠체어에서 굴러 떨어졌습니다. 다리가 마비되었으므로 모나리자는 몸을 일으킬 수 없었습니다. 그 아이는 떨어져 코뼈를 다쳤습니다. 이 모든 것을 흥분한 민아에게서 전해들은 나는 다만 멀찍이 서서 119 대원들이 모나리자를 들것에 실어 데려가는 것을 멍청히 지켜보았습니다.

 

소동이 완전히 마무리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문학 선생님께서는 평소보다 삼십분 늦게 들어오셨습니다. 아이들은 앞 다투어 물었습니다.

“쌤, 모나리자는 괜찮아요?”

“모나리자 넘어뜨린 애는 어떻게 됐어요?”

“걔, 정말로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냐? 어떻게 모나리자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책을 옮겨버릴 수가 있어?”

선생님께서는 한참 후에 입을 여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선한 의도로 베푼 도움이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면, 그 사람은 칭찬을 받아야 할까요? 비난을 받아야 할까요?”

“그래도 좋은 동기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칭찬을 받아야 해요.”

“아니지, 벌을 받아야지, 모나리자가 어떻게 됐는지 생각해 봐.”

아이들이 웅성웅성 저마다의 의견을 말했습니다.

“그럼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 봅시다- 도움을 받은 사람은 누군가가 자신을 도와주기를 원했을까요? 만약 그 사람은 전혀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다면 어떡하지요? 그 사람은 남의 손길 없이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어떡하지요? 선의랍시고 베푼 도움이 그 사람에게 오히려 불쾌함을 주었다면 어떡하지요?

선의는, 도움을 받는 사람이 그 도움을 진짜 필요로 했을 때야 비로소 성립합니다. 자기 멋대로 판단해서 전혀 필요 없는 도움을 베푼다면, 오히려 해가 되는 도움을 베푼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선의가 아닙니다. 자신이 착하고 고결하다고 믿는 사람의 나약한 나르시시즘일 뿐이지요. 그것은 도움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폭력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폭력이예요. 이 폭력의 피해자는 폭력에 저항할 수도, 다른 사람에게 신고할 수도 없습니다. 상대방이 순수하게 선한 의도로 자신을 도우려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사람은 저항 한마디 못한 채 그 폭력을 혼자서 인내하다 종내에는 망가져버릴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만들어서는, 안 되겠지요. 우리가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참 오싹합니다. 오늘 모나리자한테 있었던 일을 통해 여러분이 이 점을 잘 숙고해봤으면 좋겠어요.“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아이들은 각자 저마다 하나씩의 생각에 빠진 듯 숙연했습니다. 나는 대각선 앞자리의 머루를 바라보았습니다. 다음 교시 수학 숙제를 덜한 모양인지 머루는 책상 밑에 수학 책을 펴 놓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정신없이 문제를 풀고 있었습니다.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교과서를 덮고 나가실 채비를 하시다 갑자기 생각난 듯 말씀하셨습니다.

“참, 방금 말한 내용과 관련해서, 시 한 편 찾아옵니다. 강은교 시인의 <사랑법>. 다음 시간에 발표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아, 쌔앰. 숙제 너무 많아요. 영어 숙제도 해야 되고 수학 숙제도 해야 되는데에.”

“그래도 내가 영어나 수학보다는 숙제 덜 내주잖어, 임마.”

나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중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이 부모님과 함께 학교를 둘러보는 것이 보였습니다. 고등학교 입시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라 간간히 보이곤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아이는 엄마와 팔짱을 끼고 걸어가며 머루가 그랬듯이 말갛고 티 없는 웃음을 웃었습니다. 나는 커튼을 쳤습니다. 고개를 돌려 선생님께서 칠판에 적어놓은 시 제목을 숙제 공책에 베껴 적었습니다.

 

시간은 서서히 흘러갔습니다. 나는 친구들에게 전처럼 스스럼없이 다가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믿을 수 없이 큰 상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늘 보호받고 배려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머루의 시선이 나를 가로막았습니다. 이 점진적이면서도 갑작스런 변화에 나는 당황했습니다. 어느 석식 시간이었습니다. 나와 민아, 예지는 급식소 안에서 줄을 서서 배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맞은편에 서있던 머루와 나는 눈이 마주쳤습니다. 머루는 또 예의 그 걱정하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민아가 그것을 보고 호들갑스레 말했습니다.

“봤어? 머루가 너 보고 웃었다.”

“얘네 진짜 곧 사귈 기세임.”

“하민이랑 머루가 사귀면 둘이 뭐라고 불러 줄까? 머루는 산포도니까, 칠레와 산포도?”

나는 냉동육처럼 뻣뻣이 굳었습니다.

“띄어쓰기를 다르게 해 보셈. 칠레산 포도 어떰?”

“오, 좋다.”

소강당에서 조무래기들한테 에워싸였던 그 날처럼 다리에 힘이 풀리고 눈앞이 새카맣게 변했습니다.

“너네 그거.. 어디서 들었어? 내 별명이 칠레였다는 거?”

민아가 내 얼굴이 굳어진 것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머루가 말해주던데? 너, 중학교 때 따돌림 당했다며? 고생 많았겠다, 얘. 머루가 그거 알려주면서 네가 상처받지 않게 잘 해 주라고 신신당부를 하더라.”

얼굴의 피가 죄다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급식소 안을 가득 채운, 웅성거리는 아이들의 말소리가 북소리가 되어 쿵쿵거리며 내 귓속을 가득 울렸습니다.

“맞음. 그렇게 자상한 남자가 어딨음? 그러니까 너도…”

다리가 와들와들 떨렸습니다. 나는 뒤로 돌아 뛰어나갔습니다. 사람들을 헤치고 문을 빠져나와 급식소 앞 농구 코트를 반쯤 가로질렀을 때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습니다. 내가 서 있는 곳이 농구 코트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야 비로소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급식소 바깥에 길게 줄 선 일학년 아이들이 보였습니다. 환한 가로등 불빛 아래에 패딩을 입고 옹기종기 모여선 아이들이 짙은 어둠이 내린 텅 빈 농구 코트 중앙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미동도 않고 계속 서 있자 아이들은 등을 돌리고 저마다의 수다에 열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웃었습니다. 웃고 떠들었습니다. 웃고 떠들고 재잘거렸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나에게는 마치,

‘저 선배가 그 선배래. 초등학생 때부터 칠레라고 불렸던 선배.’

‘고등학교에 와서 저 선배는 그 사실을 감추려고 했지만 결국 들통 나고 말았대.’

‘이젠 모두가 알고 있어, 저 선배의 별명이 칠레라는 것을.’

‘이젠 우리도 알고 있어, 저 선배의 별명이 칠레라는 것을.’

라는 말처럼 들려 나는 휘적휘적 뒷걸음을 쳤습니다. 뒷걸음을 치다가 지나가던 선생님과 부딪쳤습니다. 나는 옆으로 비켜섰습니다. 손에 수능특강이며 영어 단어장을 들고 급식을 먹고 나오던 삼 학년 선배들이 귀신에라도 홀린 듯 바들바들 떨고 있는, 안색이 안 좋은 나를 흘낏 쳐다보고는 스쳐 지나갔습니다. 나는 발가벗겨진 채로 군중에게 둘러싸여 있는 사형수가 된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비웃고 조롱하고 나에게 돌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피하려 황급한 걸음으로 텅 빈 교실로 돌아왔습니다.

 

대충 책상을 치우고 교과서를 몇 권 포갠 뒤 그 위에 엎드렸습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교실은 서글프게 고요했습니다. 히터 돌아가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렸습니다. 귀를 기울이면 바람에 날려 온 단풍잎이 교실 창문에 잠시 붙었다 다시 떨어져 날아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습니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의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머루였습니다. 나는 머루를 보고 싶지 않아, 교과서 틈새로 머리를 더 깊숙이 파묻었습니다.

“어라, 저녁 안 먹었네. 어디 아프니? 무슨 일 있어?”

세상에, ‘무슨 일 있냐’ 라니, 나는 머루에게 책상을 집어던지고 싶었습니다. 따지고 싶었습니다.

‘왜 그랬어? 나는 잘 살고 있었는데, 왜 내 삶에 갑자기 끼어들어서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었어? 이제 내가 칠레라고 불린 것을 민아와 예지도 알아버렸어. 나는 그토록 숨기려고 했는데. 모나리자를 넘어뜨린 그 아이와 너는 같아. 도대체 왜 그런 거야.’

그렇지만 묻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물으면 머루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용서를 구한다는 식으로 대답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가만히 머루의 눈을 들여다보며 마음속으로, 마음속으로만 말했습니다. 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들이 내 안에서만 끊임없이 휘몰아 쳤습니다.

‘ 너는 애초에 전혀 나를 이해하지 못했잖아. 그렇지만 어려운 사람에게는 친절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나한테 살갑게 대한 거잖아. 나는 네 도움이 필요한 적이 전혀 없었어. 나는 혼자 잘 해내고 있었어-너는 한 번이라도 그걸 생각해봤어?’

“무슨 일 있어?”

머루가 염려하는 얼굴로 재차 물었습니다. 나는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나,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아. 오늘 야자는 못할 것 같아. 나 먼저 돌아간다고 선생님께 말씀드려줄래?”

나는 책가방을 둘러메고 교실에서 나왔습니다. 어두컴컴하고 텅 빈 운동장이 나를 집어삼킬 듯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예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나는 다시 외톨이가 되어서 졸업할 때까지 남은 고등학교 생활을 혼자서 보냈습니다. 민아, 예지와 나 사이에 벌어진 거리는 좀처럼 좁힐 수 없었습니다. 내가 급식소에서 뛰쳐나가 집으로 돌아간 밤, 예지가 문자를 보냈습니다.

<하민, 왜 야자 빠지고 먼저 집에 간 거임?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암?>

<혹시 아까 칠레라고 부른 것 때문에 그런 거임? 미안, 그렇게까지 기분 나빠할 줄은 몰랐음.>

민아가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나는 받지 않았습니다. 민아가 다섯 번째로 전화를 걸고 예지가 스물네 통 쯤 카톡을 보냈을 무렵 나는 휴대폰 전원을 꺼서 방바닥에 던져버렸습니다.

머루와도 내가 먼저 거리를 두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머루가 내가 걱정된다며 내 자리로 찾아왔을 때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후로 한참 동안 나는 머루를 피해 다녔습니다. 머루는 잠시 동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내 주위를 멤 돌더니 어느 순간 멀어져갔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사탕을 주워 먹고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 때처럼, 녀석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계면쩍게 웃으면서 나에게서 떠나갔을 거라고 나는 짐작하곤 했습니다.

 

지금도 가끔 나는 이제는 상담교사가 된 머루를 생각합니다. 오래오래 생각합니다. 어떤 때는 초콜릿을 입 속에서 녹여 먹듯 천천히, 어떤 때는 뜨거운 숫돌을 손에 쥔 사람이 그 돌을 내팽개치듯 황망하고 짧게. 이제는 머루를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잘못은 그때 그 짧은 순간을 참지 못하고 머루에게 내 모든 비밀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은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머루는 미숙했지만 정이 깊은 녀석이었습니다. 정이 깊지만 미숙한 녀석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외면하지 못하고 자기 나름으로 성심껏 나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쩌다보니 나에게 상처를 주긴 했지만 그때 우리는 어렸으므로 그건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저 그 뿐, 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에게 묻습니다.

…나는 이상한 사람입니까.

당신은 굳이 대답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나는 물론 그렇다, 나는 이상한 사람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다분히 애를 써서 온 마음을 다해서 그렇게 믿으려고 합니다. 내가 이상한 사람이기 때문에 어린 시절 당한 따돌림의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고등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것으로 합시다. 내가 먼저 다가오는 친구들을 뿌리치고 내 과거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도움을 준 친구를 원망하는 몹쓸 사람인 것으로 합시다. 다른 사람은, 머루마저도, 내 추락에 대해 그 어떤 책임도 없던 것으로 합시다. 나는 그렇게 믿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믿지 않는 편이 더 견디기 힘들어서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절대로 보통의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나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믿겠습니다. 그 것 외에는 머루를 끌어들이지 않고서도 내 고등학교 생활이 송두리째 망가져버린 이유를 설명할 다른 변명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새로 이사 들어간 반지하방에 서서 창밖으로 지상을 바라봅니다. 고개를 돌려보면 텅 빈 식탁 위에 머루 한 대접이 놓여 있습니다. 방주인 아주머니가 시골에 계신 어머니가 보내왔다며 나눠 준 머루입니다. 나는 대접을 집어 들고 강가로 향합니다. 머루를 한 움큼 집어 들어 강에 뿌립니다. 한 움큼 더 집어 다시 강에 뿌립니다. 머루 알들이 흐르는 물을 타고 경쾌하게 멀어져갑니다. 나는 그 기다랗고 구불구불한 머루의 행렬이 마치 칠레의 땅 모양 같다고 생각합니다. 대접에는 어느덧 머루가 한 알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공허만이 남아, 내 손이 한 알이라도 남았을지 모를 머루 알을 집으려 텅 빈 대접 안에서 계속 맴돌며 그 공허함을 휘저어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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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뜨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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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그칠 텐데

이런 비는

세차게 퍼붓고 이윽고

그쳐버리는 거지

 

나는

가장 친한 친구 같은 건

원하지 않아 심장을

고스란히 꺼내 주고 고스란히 빼앗겨

아무것도 돌려받지 못하는 건 원치 않아

 

그런데 너는

낡은 비석을 타고 내리는 담쟁이처럼

희미한 하늘에 비치고

나의 마지막 남은 먹구름을

거두어 가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무심하게

나를 휘감고

나는 무엇인지 모를 것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어쩌면 나는 너를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이제 나는

걸어간다

고등어보다 비릿한 새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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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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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머스마는 절대 절대로

“가시나야 니가 좋다”라고 말하지 않는 게 규칙이야

등에 에베레스트를 짊어지고 가는

파인애플처럼 무뚝뚝해야 하는 게 머스마의 천명이거든

 

그래서 경상도 가시나는 달도 없는 별밤에 머스마의 우산 속으로 뛰어 들어가

“있지, 옛날 이 땅에선 우산을 슈릅이라고 불렀대”라고 말해

슈릅 슈르릅을 씌워 씌워줘

머스마는 말도 없이 오른쪽으로 비켜섰어

달도 없는 별밤이야

 

겨울 달을 녹여 만든 칼날의 끝이

하나도 빠짐없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가시나는 세상 누구보다 잘 알았어

그 칼날이 망할 년 빌어먹을 년이라고 말한다는 것도

아니야 가시나의 세 번째 서랍 맨 구석에 숨어있는

긴 밧줄이 더 잘 알았어

서울깍쟁이의 스–카프처럼 그 밧줄이 가시나의 목을 휘감기 전에

슈릅 슈르릅을 씌워 씌워줘

“근데 이제는 슈릅을 우산이라고 부른대”라고 말해

 

달도 없는 별밤이야 가시나는

이 밤을 오래오래 보고 싶어

별도 없는 달밤이 오기 전에

슈릅 슈르릅을 씌워 씌워줘

그렇지 않으면 다시 칼날과 밧줄에 대해 생각하게 될 거야

 

경상도 머스마는 절대 절대로

“가시나야 니가 좋다”라고 말하지 않는 게 규칙이지만

조그만 슈릅 밖으로 반이나 삐져나간

머스마의 검게 젖은 어깨가 대신 말해줬어 “가시나야 니가 좋다”라고

 

슈릅 슈르릅을 쓰고 가시나는

머스마의 어깨는 검게 젖고

별도 없는 달밤은 오지 않아 동이 틀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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