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변(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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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사립 고등학교가 예산이 부족하다고 푸념할 때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되는 법이다. 이번 경우만 봐도 그렇다. 동아리 예산마저 모자라다고 축제 동아리 부스 운영 지원금을 문화상품권 두 장으로 퉁칠 땐 언제고, 교내 교육활동 성과발표를 빙자한 문집을 만드려 하고 있지 않는가. 발행 부수며 소요 예산을 보아하니, 전교생에게 문집을 한 권씩 돌리려는 계획임이 분명하다. 어쩌다보니 그 문집 한 귀퉁이에 내 글도 한 편 실리게 되었다. 문예부의 실권자인, 늘 열정과 의욕이 넘쳐나시는 나의 국어 선생님께서는 그 사실을 알려주시며 특이한 부탁을 해오셨다.
"…..창작 후기를 써 달라고요?"
"뭐, 창작 후기라고 볼 수도 있겠네. 왜 이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 소설의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었는지, 그런 걸 써주면 돼. 우리는 그걸 "작가의 변(辯)"이라고 부를 거야. 그리고 옆에다가 똥(便) 그림을 그리는 거지. 크하하핫!"
그리하여 나는 고작 일주일밖에 되지 않는 방학의 귀중한 한나절을 반납하고 학교에 나와 이른바 '작가의 변'을 쓰게 된 것이다.

 

문집에 실릴 내 글은 3월에 열린 교내 소설 공모에서 입상한 작품으로, 평범한 어느 소녀가 오지랖 넓은 친구를 만나 인생이 마구 꼬이는 이야기를 담은, 본격문학이라기보다는 초등학교 고학년을 위한 동화에 가까운 소설이었다. 쓸 당시에는 희대의 걸작처럼 보였는데 다시 읽어보니 진부하디 진부한 소설이었다. 플롯이 너무 단순한 탓에 동기랄 것도 없어 보였다. 거의 1년 전에 쓴 글인데, 창작 동기는 커녕 무슨 글이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는게 정상 아닌가, 라고 생각하며 나는 종이컵에 담긴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이 코코아로 말하자면 매점의 계절 한정 상품으로, 이번 달 매점 아저씨 매상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어 나는 코코아 컵을 입에서 반쯤 떼었다. 가끔씩 눈썹을 덮던 갈색 앞머리에 아래로 약간 처진 눈꼬리. 길쭉한 팔다리와 길쭉한 얼굴…. 그건 당신이었다.
……그래, 이 소설을 쓰게 된 건 당신 때문이었지.
아니, 당신이 더 이상 내 여기에 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었지.

 

당신과 나는 그 초등학교의 젊은 교사들이 장난으로 "쟤들은 아주 그냥, 평생 붙어 살겠네"라고 놀릴 정도로 각별한 친구였다. 나는 중상위권 성적의 눈에 안 띄는 조용한 학생이었고, 당신은 경력 많은 할아버지 교사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의 개구장이였으니 당신과 나의 우정은 분명 타인들의 눈에 신기하게 보였을 것이다. 엇비슷한 부류끼리 모여 유유상종하는 게 인간관계의 본질이라고 누군가 말했지만, 그건 나이가 좀 들어서 세계를 보는 시선이 좁아지고 정형화된 뒤에야 할 만한 일이었다. 어린 아이들은 집이 가깝다거나, 엄마들끼리 아는 사이라거나, 놀이터에 오는 시간이 비슷하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당신과 나는 그렇게 맺어진 친구였다. 우리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고, 나의 할머니는 당신의 어머니와 놀이터 정자에 앉아 간간히 대화를 나누었으며, 동생들끼리도 나이가 같아 함께 어울렸으니, 그때의 어린 우리는 친구가 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초등학교 졸업반인 육학년이 되어서도 같은 반이 되었고, 여전히 가깝게 지냈다. 그즈음 나는 일 년만 더 있으면 중학생이 된다는 사실에 부쩍 어른이 된 것만 같은 설렘을 만끽하고 있었다. 아마 그래서였는지 문득 나는 당신에게 장래희망이 무어냐고 물었다. 어린 당신은 경찰이 되고 싶어했고, 오랜 친구로서 나는 당신이 꿈을 이루기를 바랐다. 어린 나의 식견으로, 경찰대학은 동네의 모든 엄마들이 선망하는 서울대학에 버금가는 대학이었으므로, 나는 당신이 성적을 좀 올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방과 후에 공부를 가르쳐 주겠다고 제안했다. 아니, 제안했다기보다는 강요했다. 당신은 당황한 듯 하였으나 선선히 나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날부터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다 푼 문제집을 꺼내 내가 쓴 답안에 하나하나 화이트칠을 하곤 했다. 그렇게 답안을 가린 문제집을 한 뭉치 복사해서 당신에게 풀라고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때로는 알록달록한 색연필로 테두리를 한 종이에 직접 문제를 만들어 당신에게 건네기도 했다. 당신의 답안을 채점하고 당신이 모르는 문제를 가르쳐 주며 나는 홀로 뿌듯해 했다. 어쩌면 먼 훗날 경찰 제복을 멋있게 차려 입은 당신이 경례를 붙이며 내게 감사 인사를 하는 장면을 상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신은 언제부터인가 울적한 얼굴로 수업에 들어왔다. 때로는 우리의 수업을 빼 먹고 당신과 내가 살던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서 홀로 그네를 타고 있기도 했다. 그럴수록 나는 당신을 닥달했다. 당신이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린 이 문제지를 만드느라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썼는지, 당신이 갈망하는 경찰이 되는 것이 요즘 같은 세상에 얼마나 하늘의 별따기 같은 일인지, 나는 소리 높여 떽떽거렸다. 당신은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바라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당신의 성적은 점점 떨어져 교사들의 걱정을 살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나와 당신은 냉랭하게 멀어져 버렸다. 우리는 가급적 서로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등하교 시간을 조정했다. 당신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졸업식 날이었다. 꽃다발이며 졸업장을 양 손 가득 든 채 모퉁이를 돌다가 서로 맞닥뜨린 것이었다. 나는 어색한 눈길로 당신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내 손에 쥐인 꽃다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나서 우리는 마치 애초에 모르던 사람들처럼, 인사 한마디 나누지 않고 저벅저벅 서로의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 이후로 나는 더 이상 당신을 만날 수 없었다.

 

당신과 내가 살던 동네는 이웃의 여러 마을과 하나의 학군으로 묶여 있어, 우리는 서로 다른 중학교로 배정 받았다. 중학생이 된 이래로 나는 당신이 학교 폭력 사건에 연루되었다거나, 흡연으로 물의를 일으켰다거나 하는 진위를 알 수 없는 소문 외에는 당신의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었다. 그 소문 속의 당신은 내가 익히 알아온 밝고 어리숙한 아이와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고, 나는 어쩌면 그게 내 탓인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내 순진한 선의가 당신에게는 잔혹한 폭력이었음을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초등학생이 경찰대 대비 공부를 해서 무슨 소용이었겠는가. 당신은 깐깐한 과외 교사가 아니라 싱거운 농담과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필요했을 텐데. 그런 생각에 나는 때때로 울적해지곤 했다.

 

고교 비평준화 지역인 우리 지역에서는 특목고에 합격한 이들을 제외한 모든 학생들이 자신이 지원한 고등학교에서 고입선발고사를 치러야 했다. 입학 정원보다 지원자가 많을 시에는 불합격생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결국 정원 미달인 먼 고등학교에 등록할 수 밖에 없었는데, 선생님들은 이를 비꼬듯이 '유학'이라고 불렀다. '유학생'을 가급적 만들지 않는 것이 그즈음 모든 중3 담임 선생님들의 목표였다. 고입 시험 날에는 선생님들이 지역의 20여개 고등학교에 나눠 찾아가 마치 수능날의 학부모들 처럼 제자들을 응원하곤 했다. 나는 화이팅을 외치는 담임 선생님께 손을 흔들어 보이며 수험생 명단에서 내 이름을 찾으려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 명단에서 나는 당신이 진학한 중학교 이름 옆에 쓰인 당신의 이름을, 내내 찾고 싶었던 당신의 이름을, 보았다.

 

이제 당신에게 치졸한 사과라도 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나는 시험을 치는 내내 두려우면서도 설렜다. 당신이 내 사과를 듣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어떤 말을 털어놓을지 나는 줄곧 상상했다. 그러나 며칠 후에 발표된 고등학교의 최종 합격자 명단에 당신의 이름은 없었다. 나는 당신이 새벽에 집을 나서야 하는 먼 고등학교로 '유학가게' 되었다는 것을 당신과 별로 닮지 않은, 당신의 동생으로부터 들었다. 우리가 지원한 고등학교는 시 변두리의 외곽 지역에 있어 아이들이 그다지 선호하는 학교는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허탈하면서도 의아해했다. 입학 후에 나는 우연히 그 해의 불합격생은 겨우 세 명이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학생부 종합 전형'의 확대로 우수한 상위권 학생들이 학생부를 꼼꼼하게 적어주기로 유명한 그 학교로 몰려들었던 것이었다.
세 명만 지원자가 적었었더라면 나는 당신을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어쩌면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었을지도.
……….딱 세 명만 다른 학교로 지원했었더라면.

 

그래. 나는 당신과 나를 생각하며 이 소설을 썼었지, 엄청 시니컬한 기분으로. 나는 이미 식은 코코아를 양손으로 잡고 들이켰다. 교무실의 몇몇 선생님들과, 지구과학실의 과학 심화반 아이들과, 텅 빈 교실의 나 밖에 없는 학교는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당신 생각을 하지 않은지도 무척 오래되었다,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어쩌면 당신과 나는 영영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지금껏 여러번 마주쳤는데 서로 알아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어린 우리가 해 저무는 놀이터에서 공기놀이를 하던 시절로부터 우리는 너무 멀리 와 버렸으므로. 내가 많이 변했듯이, 당신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므로. 그러나 마주쳤는데도 알아보지 못했다면 그건 만나지 않은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어쩌면 평생 전하지 못할 미안한 마음을 담아, 결코 당신에게 닿지 못할 문집에, 당신을 향한 반성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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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의 힘 (가구의 힘 패러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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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의 힘

 

 

얼마 전에  커플이 된 녀석이 있다

그 녀석은 내 마지막 여친이다

나는 그 인스타 팔로우를 언제고 취소할 수 있었지만

그때마다 핑계를 만들어 한 번도 취소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너는 날마다 그 연인들의 다정한 셀카가 열 몇장씩 올라오는 것이 여간 눈꼴시러운 게 아니라고

들어갔다온 얘기를 하며 나보다 저가 더 화난다듯이

허공에 잽을 날릴 때마다 태연한 나의 손가락도 뜨끔거렸지만

나는 걔들이 뭐 연예인인가 걔네들 일상에 관심을 다 가지게

하고 한마디 해주었다 #남치니가 뽑아 준 곰인형 이나

#오늘부터 125일 이라든가 #기대만땅 크리스마스 #교복 데이트~~!!!가 마구 뒤섞여

트리처럼 번쩍번쩍거리는 그 인스타를 생각하며

나는 폰을 쥔 왼손을 감추며 돌아섰다

연애란 그런 것이 아니지

홀로 골목길을 걸을 때면 몹쓸 기억이건 달콤했던 시절들이

검게 손때가 묻은 오래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우리는 여러 번 이별을 입밖에 내었지만 그때마다

마주앉은 입김으로 그 말들을 다시 지워버렸다

우리의 연애는 그 입김이 끌고 왔던 것이다

인스타를 하는 그 녀석은 사랑하는 사람의 '좋아요'가 늦어졌다는 것만

느껴도 금방 초라해지는 여자라서

연인의 눈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세월 가득 뒤집어 쓴 오랜 커플이

그리운 눈이 소복한 골목길을 홀로 거닐다가 우연히 서로

마주쳤을 때만큼이나 벅찬 행복을 다시 느낄 수는 없는 법이다 연애란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입김에 실려 서로의 심장에 깃들기 때문이다

그녀란 녀석도 그런 맥락에서 동정할 것…

하고 녀석의 인스타에서 출발한 생각이 여기에서 막혔을 때

네가 매점이나 갈까 하는 음성이 좀 누그러져 들려왔다

너무 조용해서 상심한 나머지 내가 잠든 척 하는 걸로 오해한 거냐

나는 갑자기 억지로라도 생각을 막바지로 몰고 싶어져서

너의 오해를 따뜻한 무관심으로 받아들이며

쉬는 시간이 끝날 때까지 서글픈 인스타그램론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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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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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강은교, <사랑법>

 

묻습니다.

….나는 이상한 사람입니까.

굳이 대답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당신이 무어라고 답할지 나는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다, 너는 전혀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겠지요. 그러나 나는 당신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하겠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온 마음을 다해 믿어보려고 해도 도저히 그것만은 하지 못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절대로 보통의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이상한 사람이라는 것을.

 

가끔 궁금해 합니다. 여덟 살 때의 내가 그 여름날 다른 장소에 있었더라면 지금 내 삶의 궤적은 어떤 식으로 변했을까, 하고. 태양은 모든 것을 태워버리겠다는 듯 맹렬히 끓어오르고 더위를 먹은 동네 개들은 경쟁하듯 쓰러져 마을에 하나 밖에 없는 동물 병원 원장님 쥐구멍 같은 삶에도 햇볕 들던 날이었습니다. 오빠와 나는 거실에서 선풍기 바람을 쐬며 만화영화를 보고 있었습니다.

“아따, 찬 물도 위아래가 있다 했거늘, 너희들만 찬바람 쐬니까 좋으냐.”

엄마는 깎던 참외를 쟁반에 받쳐 부엌에서 거실로 들어오셨습니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엄마는 널어둔 빨래를 걷으려 마당으로 뛰어나가셨습니다. 만화 영화가 끝나고 새로 나온 진공청소기를 광고하는 젊은 여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거실 가득히 울러 퍼졌습니다. 오빠는 쟁반 위에 놓인 과도를 잠시 살펴보더니 그것을 집어 들어 슈퍼 히어로의 검인 양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지구를 지키는 파워레인저다! 덤벼라 악당아!”

덤벼라, 하며 오빠가 휘두른 칼이 내 얼굴에 스치던 것과 오빠가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칼을 집어던진 것 중 어느 것이 먼저였는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칼은 내 볼을 깊숙이 베었고 오빠는 울며 엄마에게 달려갔습니다. 나는 방울져 떨어져 내리는 핏방울을 멍하니 바라보며 참 붉다. 라고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습니다.

 

왼쪽 뺨에는 칠레의 땅 모양처럼 기다랗고 구불구불한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습니다. 그 때부터 내 별명은 칠레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잔인했습니다. 자신들과 다른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경멸했고 놀림감으로 삼았습니다. 나는 그들의 가장 만만한 놀잇감이었습니다. 체육 수업을 하고 오면 실내화는 으레 쓰레기통 한 귀퉁이에 처박혀 있었고 필기구는 바닥에 나뒹굴었습니다. 남자아이들은 내 필통을 둥글게 말아 캐치볼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커터 칼로 찢어발겼습니다. 초등학교를 다닌 6 년 동안 내내 내 책상에는 네임펜으로 온갖 욕설이며 악담이 쓰여 있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는 홀로 소강당 청소를 하고 있었고, 그들은 담배를 피러 으슥한 소강당에 숨어들어온 아이들이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소강당에 사람이 있자 그들은 잠시 당황한 듯 했으나. 그것이 나라는 것을 알자 야비하게 웃으며 다가왔습니다.

“이야, 칠레가 청소를 하네. 그런데 얘들아, 더러운 칠레가 청소를 하면 병균이 퍼져서 더 더러워지지 않을까아?”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습니다. 한 녀석이 머리를 감싸 안고 쓰러지는 시늉을 했습니다.

“으윽, 칠레 병균에 감염되었다! 물러서, 모두!”

입을 열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뜨뜻미지근한 오줌이 종아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뭐냐, 칠레 주제에 째려보냐! 눈 안 깔어!”

“야아, 그만해라. 칠레 오줌 쌌다.”

“더럽다!”

“칠레 균 옮을라. 가자!”

무리는 킬킬거리며 소강당을 빠져나갔습니다. 나는 멍청하게 서 있었습니다. 뺨을 타고 피가 흘러내리도록, 바지를 타고 오줌이 흘러내리도록 가만히 멍청하게 서 있다가 나는 이런 꼴이 났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며칠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 사건을 극복하는 데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다른 모든 기억이 그렇듯이 그 기억도 세월이 흐르자 빛바랜 사진처럼 흐릿해졌습니다. 기억이 희미해질 무렵 뺨의 흉터도 다 아물어갔습니다.

 

그즈음에 나는 내가 살아온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내가 다닌 중학교에서는 나를 제외한 누구도 가지 않은 학교였고,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학교였습니다. 나는 그 곳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꺽다리 예지와 난쟁이 민아. 고등학교 일학년 때 나와 같은 반이 된 예지는 채팅 용어로 말하듯이 모든 말을 ‘임’이나 ‘님’으로 끝내는 특이한 말투를 가진 아이였습니다. 아빠의 지방 발령 때문에 초등학교 오학년 때 서울에서 이사 왔다는 민아는 똑 부러진 서울말을 썼는데 까무잡잡하고 귀엽게 생긴 민아가 재벌 집 마나님같이 우아하게 말하는 모양이 우스워 예지는 종종 그것으로 민아를 놀려먹곤 했습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친구였다는 둘은 같은 구석은 하나도 없었지만 늘 죽이 척척 맞았고 늘 활기찼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습니다. 예지를 만나러 이 층에 있는 자기 반에서부터 삼 층에 있는 나와 예지의 반까지 올라온 민아가 나에게 먼저 살갑게 말을 붙였습니다.

“처음 보는 얼굴이네. 얘, 너는 이름이 뭐니? 어느 중학교에서 왔니?”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으므로 나는 황망해져 고개를 푹 숙이고 웅얼웅얼 대꾸했습니다.

“장하민…K 중학교에서 왔어..”

“어머나, 거기 여기서 차타고 40분은 가야 나오는 곳 아니니? 3 년 동안 어떻게 매일 통학하려고.”

손거울을 보며 화장을 하던 예지가 나와 민아를 흘끗 쳐다보더니 말했습니다.

“집 멀면 기숙사 들어오면 되는 거 아님? 너 기숙사 신청 안 했음?”

예지가 눈 밑에 명함을 받치고 서툴게 속눈썹에 마스카라를 발랐습니다. 명함에 자랑스럽게 금빛으로 빛나던 '70년 전통 할매 국밥‘ 상호는 마스카라 액이 묻어 시커멓게 일그러졌습니다.

“…그냥, 집에서 다니는 게 편해서.”

“맞음, 뭐니뭐니 해도 엄마가 해주는 집 밥이 최고임.”

예지는 마스카라가 군데군데 묻어 이제 쉬이 원래의 상호를 알아볼 수 없게 된 명함을 부채처럼 팔랑이며 눈 화장을 말렸습니다. 나는 그 아이가 명함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예지, 마스카라 번졌다, 얘. 너는 생전 화장이라곤 하지를 않던 애가, 고등학생이 되더니 무슨 바람이 들어서 갑자기 화장을 하니?”

“나도 이제 예뻐질 거임. 두고 보셈.”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이제 공부나 열심히 하렴, 화장은 삼 년 있다가 하고.”

“뭐래, 나는 너처럼 범생이가 아님.”

나는 연극을 관람하듯 흥미롭게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습니다. 예지는 파우치에서 아직 개봉하지 않은 틴트를 꺼내 뚜껑을 열었습니다. 민아는 반 앞쪽 게시판에 붙어있는 시간표를 유심히 보았습니다.

“너 근데 다음 시간 물리인데 화장해도 되니? 선배들한테 들었는데 물리 선생님, 화장 엄청 엄하게 잡으시는 분이래.”

“헐, 망했음. 빨리 화장 지우고 와야겠음. 하민, 같이 화장실 가자.”

가방을 급히 뒤져 클렌징 티슈를 꺼낸 예지가 내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그 아이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2학년이 되어서는 민아와 예지 둘 모두 나와 같은 반이 되었습니다. 친구들과 학교 앞 분식집에 가서 떡볶이를 시켜먹고, 수련회에 가서 밤늦도록 수다를 떨고, 소소한 장난을 치며 점심을 먹으러 가는 것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나는 중학교 때까지 왕따를 당한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고등학생이 된 나는 더 이상 칠레가 아니었습니다. 그 사실이 너무나 소중하고 좋아서 나는 너무 기뻤습니다. 그 뿐 만이었다면, 그렇게 해피엔딩이었더라면 좋았을 것이었습니다. 세계는 너무나 완벽했습니다. 그 아이, 머루가 나의 조그맣고 완전한 세계에 들어오던 그 날까지는.

 

머루.

머루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눈동자가 머루처럼 검고 깊다고 하여 머루. 어렸을 적부터 유독 머루를 좋아해 혀가 머루 즙으로 퍼렇게 물들기가 일쑤였다고 하여 머루, 얼굴이 머루 알처럼 조그마하고 오밀조밀하다고 머루입니다. 머루라는 것이 그의 본명은 아니나,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심지어 그의 부모님마저 소년을 머루라고 불렀습니다. 머루는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고, 손가락이 길쭉하니 예쁩니다. 머루는 학교의 가장 엄한 선생님마저도 일 분만에 인심 좋은 할아버지처럼 허허 웃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녀석이었습니다. 머루는 상담 교사를 꿈꾸는 전교 육 등이었고, 전교 회장이었습니다. 반반하고 반지르르한,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고생 모르고 평생 살아온 것 같은 머루를 학교의 모두가 알았고, 거의 모두가 사랑했습니다. 요컨대 조롱과 경멸로 가득한 칠레라는 나의 별명과는 달리 머루라는 별명은 사랑과 따뜻함으로 충만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잠시 나와 머루의 아득한 격차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나, 내가 칠레로 불렸던 시절은 이미 먼 과거로 느껴졌으므로, 나는 이윽고 머루와 나를 비교하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요컨대 머루는 나에게 같은 반 아이, 그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윽고 내가 머루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일이 생겼습니다. 사회문화 시간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 반 아이들이 선생님을 몹시 기쁘게 하여 사탕을 받아먹은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선 책상과 책상 사이를 분주히 돌아다니시며 원기둥 모양의 사탕 통에서 청포도 맛 알사탕을 하나씩 꺼내 나누어 주셨습니다. 머루는 내 대각선 앞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그가 야무진 손끝으로 사탕 포장지를 뜯고 조그맣게 입을 벌려 입 속으로 사탕을 집어넣으려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다른 녀석이 머루의 팔꿈치를 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사탕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아앗, 3초 룰!” 하고 중얼거리며 머루는 허리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팔을 길게 뻗어 잽싸게 떨어진 사탕을 주웠습니다. 쪼개져 반 토막만 남은 사탕을 녀석은 눈을 가늘게 뜨고 후우 불더니 입에 쏙 집어넣었습니다. 으음, 맛있다, 라고 말하는 듯한 미소가 녀석의 얼굴 가득 퍼졌습니다.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머루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습니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떨어진 음식이라도 삼 초 안에 주워 먹으면 아직 균이 옮겨 붙지 않아서 괜찮대!”

그때부터 나는 가끔 머루를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떨어진 사탕을 그토록 복되게 먹으면서, 그토록 말갛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어서.

 

그래서 그런 아이가 기묘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 나는 의아했습니다. 언젠가부터 나와 눈이 마주칠 때면 머루는 무언가를 묻는 듯 한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습니다. 나는 처음에는 똑같이 바라봐주는 것으로 응수하다가, 그 다음부터는 머루가 나를 볼 것 같으면 먼저 눈을 내리깔았고, 마지막에는 급기야 성큼성큼 다가가 날카롭게 쏘아붙였습니다.

“너, 뭐야. 왜 그렇게 쳐다봐, 사람을.”

“….궁금해서.”

“뭐가?”

“네가 왜 그런 눈을 하고 있는지. 애들이랑 떠들 때도, 즐겁게 웃을 때도, 너는 항상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잖아. 그건 어째서일까, 궁금해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궁금해서.”

그 말의 뜻을 내가 또렷이 이해하는 데는 조금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온 몸에 닭살처럼 소름이 돋았습니다. 머루는 찬찬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나의 과거를 이런 의외의 인물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지금 내 앞에 서서 이렇듯 염려하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머루 같은 사람을 나는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나는 이해받고 싶었습니다. 공감과 위로를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귀족의 아들처럼 순조롭고 평탄한 삶을 살아온 머루가 육탄전이 난무하는 내 과거를 알게 되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을까, 하고 궁금해 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너처럼 온실 안 화초같이 살아온 사람보다 훨씬 파란만장하고 역동적인 인생을 살아왔다, 라고 뽐내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머루가 다시 한 번 “알고 싶어”, 라고 말했을 때 나는 더 이상 근질거리는 입을 닫고 있지 못했습니다. 참지 못하고 다 털어놓아버렸습니다. 칠레라는 별명, 소강당, 따돌림, 그 모든 것을. 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던 그 모든 것을.

 

머루는 빈 교실에 오래도록 앉아 내 말을 들어주었습니다. 후련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머루에게 모든 것을 말해버린 것이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느껴져 마음이 살짝 무거워지긴 했지만, 나는 그 문제에 대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나는 단지 머루의 질문에 답을 해 주었을 뿐이며, 고등학생답게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머루 또한 자신이 들은 것에 대해 딱히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약간 부끄럽긴 하지만 단지 그뿐, 이라고 생각하며 가볍게 넘기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단지 그뿐, 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 일이 있은 날로부터 일주일 쯤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잠결에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우는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5교시 수학 수업이 끝나자마자 막 엎드려 잠이 들었던 터라 일어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계속 깨워대는 통에 도저히 다시 잘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지는 몰라도 참 집요하게 추근추근 깨워대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기지개를 폈습니다. 내 책상 앞에 선 머루가 허리를 반쯤 숙이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가 느닷없이 말했습니다.

“가자.”

“…어디를?”

“방금 방송 못 들었어? 소강당 청소 도우면 상점 주겠다고, 아무나 빨리 오래. "

머루는 어깨를 으쓱했습니다.

“너 상점 필요하잖아. 작년에 성취포상제 돋움도 못 땄지? 올해는 따야지. 빨리 가자.”

나는 머루에게 질질 끌려 소강당으로 향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청소를 하러 일 년 동안 소강당을 들락거리던 것 말고는 나는 단 한 번도 소강당이라고 불리는 곳에 가 보지 않았습니다. 왜인지 모를 두려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중학교 때 딱 한 번 대강당 마룻바닥을 간답시고 소강당에서 체육 수업을 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 때도 꾀병을 부리며 수업을 빠지고 보건실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피했던 소강당을 지금 머루의 손에 이끌러 가고 있구나, 라는 생각에 우스워졌습니다. 입학한 이래로 처음 가보는 고등학교의 소강당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초등학교 소강당과는 퍽 그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대리석 바닥 가득히 차갑고 좁은 철제 의자가 끝도 없이 이어져 있던 옛날의 소강당과는 달리, 이곳은 어린이 놀이방처럼 노랗고 푸른 매트가 깔려 있었고 조명이 밝게 켜져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옛날의 소강당과 같은 점은 하나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강당 입구에 발을 디디기가 무섭게 머루가 나에게 빗자루와 걸레를 쥐어주었습니다. 나는 예전에 그랬듯이 빗자루를 비스듬히 쥐고 구석구석 끼인 먼지를 빼냈고, 걸레로 창틀의 먼지를 훔쳤습니다. 머루는 밀대 봉으로 턱을 바치고 서서 웃는 낯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난생 처음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를 흐뭇하게 지켜보는 부모처럼. “옛날 생각이 좀 나니? 지금 기분이 어때? 뭔가 상처가 치유되는, 아픔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지 않아?” 라고 말하는 듯 한 기대하는 눈빛으로.

 

머루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전혀 예전의 소강당을 떠올릴 수 없었으며, 다만 간만의 강도 높은 육체노동으로 다리에 알이 생긴 느낌이 살짝 들었을 뿐이므로, 그 물음에 대해 애매하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습니다. 한참 만에 머루는 입을 열었습니다.

“괜찮아? 좀 도움이 된 것 같아?”

머루의 기대에 부푼 얼굴을 보면서 나는 도저히 그렇지 않노라고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응, 조금은.” 이라고 내가 말하자 머루는 더욱 활짝 웃었습니다.

“정신분석학 책에 보니까”. 하고 녀석은 조금 흥분하고 도취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트라우마와 정면으로 맞서는 거라고 하더라.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게 된 사람은 마침내 그걸 극복할 에너지와 용기를 얻는대. 넌 오늘 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어. 이제 네 상처도 깨끗하게 지워질 거야.”

“지우개로 지운 듯이 깨끗하게?”

“그래, 지우개로 지운 듯이. 마치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럼 나도 언젠가 너처럼 떨어진 사탕을 주워 먹으면서도 환하게 웃을 수 있을까, 애초부터 상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은 사람의 웃음을, 이라고 묻고 싶어졌으나 나는 그 물음을 삼켜버렸습니다. 머루의 인생과 나의 인생은 태양과 명왕성만큼이나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였으므로. 내가 생각하기에, 내 상처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점 희미해지긴 했지만, 절대로 마술사의 토끼처럼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다시 여덟 살 때로 돌아가서 그 때 오빠가 휘두른 칼에 얼굴이 베인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만큼이나 자명했습니다. 그래서 머루에게 같이 소강당에 가 주어서 고맙다고 웅얼웅얼 감사인사를 하면서도, 나는 머루가 더 이상 나를 도우려고 하지 말기를, 내가 다시 평소처럼 살아갈 수 있도록 내버려 두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머루는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언제든지 눈이 마주치면 그는 걱정하는 눈으로 나를 찬찬히 살펴보고는 독려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민아와 예지랑 내가 수다를 떨고 있을 때는 어느 순간 다가와 대화에 끼어 분위기를 띄우려 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혼자 앉아 숙제라도 하고 있으면 와서 말을 붙였습니다. 누군가 내 험담을 할라치면 득달같이 달려가 따졌습니다. 머루는 항상 나를 염려하는 듯 했고, 나에게 상처를 줄까봐 조심하는 듯했습니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고 느껴질 때에도. 어느 날인가, 한 아이가 지리 문제집을 들고 머루에게 와 모르는 문제를 물었습니다.

“머루! 칠레는 온대 기후냐, 열대 기후냐?”

머루는 반사적으로 나를 돌아보고 내 표정을 살폈습니다. 그러고는 나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 같은 몸짓을 하였습니다. 머루는 그 아이의 어깨에 팔을 둘러 밖으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나가서 설명해 줄게. 다른 애들 공부하는데 방해되겠다.”

복도에서 머루가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문제를 설명하는 것이 먼 기도 소리처럼 언뜻언뜻 들렸습니다. 그 희미한 소리를 들으며 나는 가슴 한 켠이 싸해졌습니다. 머루가 나를 걱정하지 말았으면, 하고 이제는 간절히 빌었습니다. 머루가 나를 특별하게 대할 때마다, 나는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내가 타인의 보호를 받아야 할 정도로 큰 상처를 지닌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비통하게 들었습니다. 즐겁게 고등학교 생활을 하면서 가끔은 더러 잊기도 했던 옛날의 기억이 이제는 밤낮없이 찾아와 나를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나는 움츠러들었습니다. 뒤로 한 걸음씩 물러섰습니다. 나는 애써 나는 범을 배웠으나, 그 나는 법을 다시 잊어버린 새가 된 것 같았습니다. 나는 뒤로 한 걸음 더 물러섰습니다.

 

머루가 나에게 신경 쓰는 것을 맨 처음 알아챈 것은 예지와 민아였지만, 그 아이들은 이 문제를 의외의 시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루는 민아가 갑자기 뛰어와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웬일이니, 웬일이니. 하민아, 머루가 은근 너 챙기는 거 알고 있니? 있지, 혹시 걔가 너 좋아하는 거 아닐까?”

예지가 입에 고무줄을 물고 거울을 보며 포니테일로 머리를 묶으면서 혀를 찼습니다.

“야, 설마. 머루가 진짜 장하민을 좋아하는 거면 걔는 취향 완전 독특한 거임. 우리 반, 문과반이라서 여자가 얼마나 차고 넘치는데. 거의 삼분의 이가 여자다 아님?”

“그거, 절대 많은 거 아니야. 나 작년에 일학년 일반이었잖아. 그 반은 일 년 내내 반에 남자가 세 명 밖에 없었던 거 기억 안 나니? 거기에 비하면 우리 반은 거의 남고 수준이야, 얘.”

나는 당황스러웠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친구들에게서 괴리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참새처럼 재잘거리는, 모든 것을 그렇듯 가볍게 받아들이는, 끊임없이 까르륵 웃어대는 예지와 민아가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트라우마를 치유한답시고 소강당 청소를 하는 내 모습에 아이돌 가수의 열애설에 대해 달뜬 목소리로 설명하는 민아의 모습을 겹쳐 보았습니다. 나에게는 늘 정중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을 거는 머루가 예지와는 스스럼없이 짓궂은 장난을 친다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나는 절대 저 아이들과 같아질 수 없겠구나, 그 때 불현듯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예지의 시니컬한 목소리가, 민아의 호들갑이 아득히 멀어져갔습니다.

 

어디에선가 둔탁한 것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나는 생각에서 벗어났습니다. 당황한 표정의 선생님들이 복도를 가로질러 홈베이스 쪽으로 급히 뛰어가고 있었습니다. 웅성거림이 일었습니다. 나는 예지와 민아를 쫓아 복도로 나갔습니다. 거기, 홈베이스 한 구석에 저만치 뒤로 밀려난 휠체어와 바닥에 엎어진 채 움찔거리며 일어나려고 애쓰는 소녀가 보였습니다. 선생님과 아이들이 소녀를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한 다른 아이가 두 손을 쉴 새 없이 꼼지락거리며 저만치 멀리 떨어진 곳에 서 있었습니다. 앰뷸런스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쓰러진 소녀의 별명은 모나리자. 사고로 시력을 잃고 하반신 마비에 걸려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아이였습니다. 한 손으로 벽을 더듬어가며 다른 손으로 전동휠체어를 조작하는 아이의 별명으로 모나리자는 좀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두 눈을 감은 채 부드럽게 짓는 그 아이의 미소가 너무 아름답고 신비로워 모두들 그 애를 모나리자라고 부르며 아껴주었습니다.

모나리자는 스스로의 힘으로 사물함에서 책을 꺼내기 위해 늘 직접 정한 순서에 맞춰 사물함 두 번째 서랍에 교과서를 꽂아두었습니다. 화학 책 옆에 문학 책. 문학 책 옆에 미적분 책. 미적분 책 옆에 영어책. 구석으로 물러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아이는, 몇 시간 전 모나리자가 책을 꺼내는 것이 너무 힘들겠다고 불현듯 생각하여, 모나리자의 사물함을 열어 교과서 몇 권을 모나리자의 손이 충분히 닿는 사물함 맨 아래 서랍에 옮겨두었습니다. 모나리자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사물함을 열어 늘 교과서가 있던 자리에 책이 없자 더 깊숙이 손을 뻗었습니다. 소녀는 균형을 잃었습니다. 균형을 잃고 휠체어에서 굴러 떨어졌습니다. 다리가 마비되었으므로 모나리자는 몸을 일으킬 수 없었습니다. 그 아이는 떨어져 코뼈를 다쳤습니다. 이 모든 것을 흥분한 민아에게서 전해들은 나는 다만 멀찍이 서서 119 대원들이 모나리자를 들것에 실어 데려가는 것을 멍청히 지켜보았습니다.

 

소동이 완전히 마무리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문학 선생님께서는 평소보다 삼십분 늦게 들어오셨습니다. 아이들은 앞 다투어 물었습니다.

“쌤, 모나리자는 괜찮아요?”

“모나리자 넘어뜨린 애는 어떻게 됐어요?”

“걔, 정말로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냐? 어떻게 모나리자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책을 옮겨버릴 수가 있어?”

선생님께서는 한참 후에 입을 여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선한 의도로 베푼 도움이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면, 그 사람은 칭찬을 받아야 할까요? 비난을 받아야 할까요?”

“그래도 좋은 동기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칭찬을 받아야 해요.”

“아니지, 벌을 받아야지, 모나리자가 어떻게 됐는지 생각해 봐.”

아이들이 웅성웅성 저마다의 의견을 말했습니다.

“그럼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 봅시다- 도움을 받은 사람은 누군가가 자신을 도와주기를 원했을까요? 만약 그 사람은 전혀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다면 어떡하지요? 그 사람은 남의 손길 없이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어떡하지요? 선의랍시고 베푼 도움이 그 사람에게 오히려 불쾌함을 주었다면 어떡하지요?

선의는, 도움을 받는 사람이 그 도움을 진짜 필요로 했을 때야 비로소 성립합니다. 자기 멋대로 판단해서 전혀 필요 없는 도움을 베푼다면, 오히려 해가 되는 도움을 베푼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선의가 아닙니다. 자신이 착하고 고결하다고 믿는 사람의 나약한 나르시시즘일 뿐이지요. 그것은 도움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폭력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폭력이예요. 이 폭력의 피해자는 폭력에 저항할 수도, 다른 사람에게 신고할 수도 없습니다. 상대방이 순수하게 선한 의도로 자신을 도우려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사람은 저항 한마디 못한 채 그 폭력을 혼자서 인내하다 종내에는 망가져버릴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만들어서는, 안 되겠지요. 우리가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참 오싹합니다. 오늘 모나리자한테 있었던 일을 통해 여러분이 이 점을 잘 숙고해봤으면 좋겠어요.“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아이들은 각자 저마다 하나씩의 생각에 빠진 듯 숙연했습니다. 나는 대각선 앞자리의 머루를 바라보았습니다. 다음 교시 수학 숙제를 덜한 모양인지 머루는 책상 밑에 수학 책을 펴 놓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정신없이 문제를 풀고 있었습니다.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교과서를 덮고 나가실 채비를 하시다 갑자기 생각난 듯 말씀하셨습니다.

“참, 방금 말한 내용과 관련해서, 시 한 편 찾아옵니다. 강은교 시인의 <사랑법>. 다음 시간에 발표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아, 쌔앰. 숙제 너무 많아요. 영어 숙제도 해야 되고 수학 숙제도 해야 되는데에.”

“그래도 내가 영어나 수학보다는 숙제 덜 내주잖어, 임마.”

나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중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이 부모님과 함께 학교를 둘러보는 것이 보였습니다. 고등학교 입시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라 간간히 보이곤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아이는 엄마와 팔짱을 끼고 걸어가며 머루가 그랬듯이 말갛고 티 없는 웃음을 웃었습니다. 나는 커튼을 쳤습니다. 고개를 돌려 선생님께서 칠판에 적어놓은 시 제목을 숙제 공책에 베껴 적었습니다.

 

시간은 서서히 흘러갔습니다. 나는 친구들에게 전처럼 스스럼없이 다가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믿을 수 없이 큰 상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늘 보호받고 배려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머루의 시선이 나를 가로막았습니다. 이 점진적이면서도 갑작스런 변화에 나는 당황했습니다. 어느 석식 시간이었습니다. 나와 민아, 예지는 급식소 안에서 줄을 서서 배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맞은편에 서있던 머루와 나는 눈이 마주쳤습니다. 머루는 또 예의 그 걱정하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민아가 그것을 보고 호들갑스레 말했습니다.

“봤어? 머루가 너 보고 웃었다.”

“얘네 진짜 곧 사귈 기세임.”

“하민이랑 머루가 사귀면 둘이 뭐라고 불러 줄까? 머루는 산포도니까, 칠레와 산포도?”

나는 냉동육처럼 뻣뻣이 굳었습니다.

“띄어쓰기를 다르게 해 보셈. 칠레산 포도 어떰?”

“오, 좋다.”

소강당에서 조무래기들한테 에워싸였던 그 날처럼 다리에 힘이 풀리고 눈앞이 새카맣게 변했습니다.

“너네 그거.. 어디서 들었어? 내 별명이 칠레였다는 거?”

민아가 내 얼굴이 굳어진 것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머루가 말해주던데? 너, 중학교 때 따돌림 당했다며? 고생 많았겠다, 얘. 머루가 그거 알려주면서 네가 상처받지 않게 잘 해 주라고 신신당부를 하더라.”

얼굴의 피가 죄다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급식소 안을 가득 채운, 웅성거리는 아이들의 말소리가 북소리가 되어 쿵쿵거리며 내 귓속을 가득 울렸습니다.

“맞음. 그렇게 자상한 남자가 어딨음? 그러니까 너도…”

다리가 와들와들 떨렸습니다. 나는 뒤로 돌아 뛰어나갔습니다. 사람들을 헤치고 문을 빠져나와 급식소 앞 농구 코트를 반쯤 가로질렀을 때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습니다. 내가 서 있는 곳이 농구 코트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야 비로소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급식소 바깥에 길게 줄 선 일학년 아이들이 보였습니다. 환한 가로등 불빛 아래에 패딩을 입고 옹기종기 모여선 아이들이 짙은 어둠이 내린 텅 빈 농구 코트 중앙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미동도 않고 계속 서 있자 아이들은 등을 돌리고 저마다의 수다에 열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웃었습니다. 웃고 떠들었습니다. 웃고 떠들고 재잘거렸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나에게는 마치,

‘저 선배가 그 선배래. 초등학생 때부터 칠레라고 불렸던 선배.’

‘고등학교에 와서 저 선배는 그 사실을 감추려고 했지만 결국 들통 나고 말았대.’

‘이젠 모두가 알고 있어, 저 선배의 별명이 칠레라는 것을.’

‘이젠 우리도 알고 있어, 저 선배의 별명이 칠레라는 것을.’

라는 말처럼 들려 나는 휘적휘적 뒷걸음을 쳤습니다. 뒷걸음을 치다가 지나가던 선생님과 부딪쳤습니다. 나는 옆으로 비켜섰습니다. 손에 수능특강이며 영어 단어장을 들고 급식을 먹고 나오던 삼 학년 선배들이 귀신에라도 홀린 듯 바들바들 떨고 있는, 안색이 안 좋은 나를 흘낏 쳐다보고는 스쳐 지나갔습니다. 나는 발가벗겨진 채로 군중에게 둘러싸여 있는 사형수가 된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비웃고 조롱하고 나에게 돌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피하려 황급한 걸음으로 텅 빈 교실로 돌아왔습니다.

 

대충 책상을 치우고 교과서를 몇 권 포갠 뒤 그 위에 엎드렸습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교실은 서글프게 고요했습니다. 히터 돌아가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렸습니다. 귀를 기울이면 바람에 날려 온 단풍잎이 교실 창문에 잠시 붙었다 다시 떨어져 날아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습니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의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머루였습니다. 나는 머루를 보고 싶지 않아, 교과서 틈새로 머리를 더 깊숙이 파묻었습니다.

“어라, 저녁 안 먹었네. 어디 아프니? 무슨 일 있어?”

세상에, ‘무슨 일 있냐’ 라니, 나는 머루에게 책상을 집어던지고 싶었습니다. 따지고 싶었습니다.

‘왜 그랬어? 나는 잘 살고 있었는데, 왜 내 삶에 갑자기 끼어들어서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었어? 이제 내가 칠레라고 불린 것을 민아와 예지도 알아버렸어. 나는 그토록 숨기려고 했는데. 모나리자를 넘어뜨린 그 아이와 너는 같아. 도대체 왜 그런 거야.’

그렇지만 묻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물으면 머루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용서를 구한다는 식으로 대답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가만히 머루의 눈을 들여다보며 마음속으로, 마음속으로만 말했습니다. 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들이 내 안에서만 끊임없이 휘몰아 쳤습니다.

‘ 너는 애초에 전혀 나를 이해하지 못했잖아. 그렇지만 어려운 사람에게는 친절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나한테 살갑게 대한 거잖아. 나는 네 도움이 필요한 적이 전혀 없었어. 나는 혼자 잘 해내고 있었어-너는 한 번이라도 그걸 생각해봤어?’

“무슨 일 있어?”

머루가 염려하는 얼굴로 재차 물었습니다. 나는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나,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아. 오늘 야자는 못할 것 같아. 나 먼저 돌아간다고 선생님께 말씀드려줄래?”

나는 책가방을 둘러메고 교실에서 나왔습니다. 어두컴컴하고 텅 빈 운동장이 나를 집어삼킬 듯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예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나는 다시 외톨이가 되어서 졸업할 때까지 남은 고등학교 생활을 혼자서 보냈습니다. 민아, 예지와 나 사이에 벌어진 거리는 좀처럼 좁힐 수 없었습니다. 내가 급식소에서 뛰쳐나가 집으로 돌아간 밤, 예지가 문자를 보냈습니다.

<하민, 왜 야자 빠지고 먼저 집에 간 거임?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암?>

<혹시 아까 칠레라고 부른 것 때문에 그런 거임? 미안, 그렇게까지 기분 나빠할 줄은 몰랐음.>

민아가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나는 받지 않았습니다. 민아가 다섯 번째로 전화를 걸고 예지가 스물네 통 쯤 카톡을 보냈을 무렵 나는 휴대폰 전원을 꺼서 방바닥에 던져버렸습니다.

머루와도 내가 먼저 거리를 두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머루가 내가 걱정된다며 내 자리로 찾아왔을 때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후로 한참 동안 나는 머루를 피해 다녔습니다. 머루는 잠시 동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내 주위를 멤 돌더니 어느 순간 멀어져갔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사탕을 주워 먹고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 때처럼, 녀석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계면쩍게 웃으면서 나에게서 떠나갔을 거라고 나는 짐작하곤 했습니다.

 

지금도 가끔 나는 이제는 상담교사가 된 머루를 생각합니다. 오래오래 생각합니다. 어떤 때는 초콜릿을 입 속에서 녹여 먹듯 천천히, 어떤 때는 뜨거운 숫돌을 손에 쥔 사람이 그 돌을 내팽개치듯 황망하고 짧게. 이제는 머루를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잘못은 그때 그 짧은 순간을 참지 못하고 머루에게 내 모든 비밀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은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머루는 미숙했지만 정이 깊은 녀석이었습니다. 정이 깊지만 미숙한 녀석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외면하지 못하고 자기 나름으로 성심껏 나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쩌다보니 나에게 상처를 주긴 했지만 그때 우리는 어렸으므로 그건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저 그 뿐, 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에게 묻습니다.

…나는 이상한 사람입니까.

당신은 굳이 대답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나는 물론 그렇다, 나는 이상한 사람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다분히 애를 써서 온 마음을 다해서 그렇게 믿으려고 합니다. 내가 이상한 사람이기 때문에 어린 시절 당한 따돌림의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고등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것으로 합시다. 내가 먼저 다가오는 친구들을 뿌리치고 내 과거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도움을 준 친구를 원망하는 몹쓸 사람인 것으로 합시다. 다른 사람은, 머루마저도, 내 추락에 대해 그 어떤 책임도 없던 것으로 합시다. 나는 그렇게 믿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믿지 않는 편이 더 견디기 힘들어서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절대로 보통의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나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믿겠습니다. 그 것 외에는 머루를 끌어들이지 않고서도 내 고등학교 생활이 송두리째 망가져버린 이유를 설명할 다른 변명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새로 이사 들어간 반지하방에 서서 창밖으로 지상을 바라봅니다. 고개를 돌려보면 텅 빈 식탁 위에 머루 한 대접이 놓여 있습니다. 방주인 아주머니가 시골에 계신 어머니가 보내왔다며 나눠 준 머루입니다. 나는 대접을 집어 들고 강가로 향합니다. 머루를 한 움큼 집어 들어 강에 뿌립니다. 한 움큼 더 집어 다시 강에 뿌립니다. 머루 알들이 흐르는 물을 타고 경쾌하게 멀어져갑니다. 나는 그 기다랗고 구불구불한 머루의 행렬이 마치 칠레의 땅 모양 같다고 생각합니다. 대접에는 어느덧 머루가 한 알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공허만이 남아, 내 손이 한 알이라도 남았을지 모를 머루 알을 집으려 텅 빈 대접 안에서 계속 맴돌며 그 공허함을 휘저어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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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뜨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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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그칠 텐데

이런 비는

세차게 퍼붓고 이윽고

그쳐버리는 거지

 

나는

가장 친한 친구 같은 건

원하지 않아 심장을

고스란히 꺼내 주고 고스란히 빼앗겨

아무것도 돌려받지 못하는 건 원치 않아

 

그런데 너는

낡은 비석을 타고 내리는 담쟁이처럼

희미한 하늘에 비치고

나의 마지막 남은 먹구름을

거두어 가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무심하게

나를 휘감고

나는 무엇인지 모를 것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어쩌면 나는 너를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이제 나는

걸어간다

고등어보다 비릿한 새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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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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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머스마는 절대 절대로

“가시나야 니가 좋다”라고 말하지 않는 게 규칙이야

등에 에베레스트를 짊어지고 가는

파인애플처럼 무뚝뚝해야 하는 게 머스마의 천명이거든

 

그래서 경상도 가시나는 달도 없는 별밤에 머스마의 우산 속으로 뛰어 들어가

“있지, 옛날 이 땅에선 우산을 슈릅이라고 불렀대”라고 말해

슈릅 슈르릅을 씌워 씌워줘

머스마는 말도 없이 오른쪽으로 비켜섰어

달도 없는 별밤이야

 

겨울 달을 녹여 만든 칼날의 끝이

하나도 빠짐없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가시나는 세상 누구보다 잘 알았어

그 칼날이 망할 년 빌어먹을 년이라고 말한다는 것도

아니야 가시나의 세 번째 서랍 맨 구석에 숨어있는

긴 밧줄이 더 잘 알았어

서울깍쟁이의 스–카프처럼 그 밧줄이 가시나의 목을 휘감기 전에

슈릅 슈르릅을 씌워 씌워줘

“근데 이제는 슈릅을 우산이라고 부른대”라고 말해

 

달도 없는 별밤이야 가시나는

이 밤을 오래오래 보고 싶어

별도 없는 달밤이 오기 전에

슈릅 슈르릅을 씌워 씌워줘

그렇지 않으면 다시 칼날과 밧줄에 대해 생각하게 될 거야

 

경상도 머스마는 절대 절대로

“가시나야 니가 좋다”라고 말하지 않는 게 규칙이지만

조그만 슈릅 밖으로 반이나 삐져나간

머스마의 검게 젖은 어깨가 대신 말해줬어 “가시나야 니가 좋다”라고

 

슈릅 슈르릅을 쓰고 가시나는

머스마의 어깨는 검게 젖고

별도 없는 달밤은 오지 않아 동이 틀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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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요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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