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란드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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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의 안에 살았다. 그는 내가 밖으로 나올까 봐 언제나 전전긍긍하며 나를 숨겨두었다. 나는 절대 환영받을 수 없는 존재였으니까. 그가 나를 눈치 챘을 때 그는 깨달았을 것이다. 나는 영원히 떼어놓을 수도, 분리할 수도 없는 존재라는 걸. 나는 꽃을 피워낼 날을 고대하며 그의 안에서 조용히 줄기를 뻗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일부였고, 그는 나였다. 우리는 온전히 하나였다.

*

 

아줌마가 음료수 잔을 건네주었다. 오렌지 주스였다. 거실에 앉아 티비를 보며 나는 누나를, 아줌마는 딸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우리 가족과 누나네 가족은 아주 예전부터 친했다.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나는 누나네 집에서 보낸 시간이 많았는데, 그 때문인지 누나네 집은 우리 집만큼이나 편안한 곳이었다. 현관 도어락을 푸는 소리에 뒤이어 또각또각 누나의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누나를 반기기도 전에, 누나의 한 마디 말에 온 집안은 살얼음판이 된다.

“저 임신 했어요.”

누나의 목소리가 온 집안에 메아리치듯 울리는 것 같았다. 누나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동그란 풍선처럼 제 몸집을 부풀리며 점점 커졌다. 커지고, 커지고, 더 커다래져서 마침내 뻥, 하고 터져버렸다. 저 임신했어요. 아줌마가 멍하니 누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줌마는 고개를 돌려 아저씨가 앉는 자리의 소파를 바라본다. 아저씨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잊은 것처럼 보였다. 너무 놀라서, 아무 생각도 안 나는 상태인 것 같았다.

“영준이 왔구나? 들어가자. 내 방에 있어.”

나는 뒤돌아선 누나의 등이 한없이 멀고 낯설게 느껴졌다. 내 앞에 있는 건 분명 누나가 맞는데, 겉모습만 비슷한 타인인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누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왜 나마저 이런 상황에 말려들게 한 건지, 수많은 의문이 저 밑바닥에서 피어올랐다. 나에게 누나는 어린 시절을 함께한 친한 친구이자 가족, 그리고 내 비밀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여기, 이거야. 내가 준다고 했던 것.”

누나가 내 손에 자그마한 화분 하나를 올려주었다. 나는 손바닥보다 작은 화분을 이곳저곳 살폈다. 아주 이상한 식물이었다. 위로 삐죽삐죽 솟은 잎들은 얼핏 선인장의 한 종류처럼 보이기는 했으나, 완전히 그 종이라고 보기엔 어색한 감이 있었다. 게다가 그 이상한 식물의 아래에는 기름진 흙이 아니라 예쁜 자갈이 깔려 있었다. 어항 바닥에나 쓰는 색색의 자갈 위에 그 식물은 홀로 우뚝 서 있었다.

“틸란드시아라고 해.”

누나 말을 들으며 화분을 살피다가 식물이 내 손길에 조금 움직여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보니 그 식물은 자갈에서 완전히 분리되도록 되어 있었다. 뿌리가 없었다.

“신기하지? 뿌리를 내리지 않는 식물이야.”

“그러고도 살 수 있는 거야?”

“그럼. 적당한 수분과 햇빛이 필요하다는 건 다른 식물들과 같아. 뿌리로 양분을 흡수하지 않을 뿐, 자신만의 생존 방식을 찾은 거지.”

누나는 틸란드시아에 대한 얘기를 줄줄 읊으며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스스럼없는 행동이었다. 나에게도 익숙한 상황이었다. 누나는 한참을 틸란드시아에 대해 얘기했지만 내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장마철엔 환기를 자주 시켜줘야 해.”

“누나.”

“응?”

막상 이유를 물으려니 말문이 턱 막혔다. 무엇을 먼저 물어야 하는지 혹은 무엇을 묻지 말아야 하는지. 나 나중에 꼭 여기에 갈 거야! 지금보다 훨씬 앳된 누나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때 누나가 보여준 엽서에는 한적한 바다가 그려져 있었다. 그 엽서를 바라보는 누나의 눈동자가 기묘하게 반짝였었다. 누나는 외출할 때 항상 부모님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누나는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고, 어딘가를 가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런 누나를 잘 알았기에 처음으로 어딘가에 갈 거라고 말 한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았다. 왜 하필 그 장면이 지금 떠오른 것인지. 누나는 책상 의자에 앉아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를 한참 마주 보다가 먼저 시선을 돌린 건 나였다.

“일주일에 물 두 번?”

일단은 물러서자. 어차피 먼저 얘기해 줄 눈치도 아니었다. 이런 때의 누나는 어떤 식으로 꼬여내도 입을 열지 않곤 했다. 한 번 입을 다물면 절대 벌리지 않는 거북이처럼. 나는 종종 그런 상태의 누나가 섭섭했다. 이제는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불안하게 둥 둥 뛰는 심장은 가라앉지 않았다. 누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안도의 의미 같았다. 나는 손 안의 작은 화분을 꼭 붙잡았다. 갑자기 나타난 이상한 식물이 내가 잘 알았던 누나의 흔적이라도 되는 듯이.

 

 

교실 창가에는 반 아이들이 키우는 식물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종류는 갖가지였다. 선인장과 허브, 무슨 먼지를 먹는다는 식물까지. 초등학교 때나 키워봤던 강낭콩도 있었다. 학기 초에 정해진 우리 반의 환경미화 주제는 푸른 교실이었다. 각자 자신이 키울 식물을 하나씩 가져와야 했다. 나는 누나에게 받은 틸란드시아를 가져다 두었다. 화분을 가져가야 한다고 말했더니 누나가 주겠다고, 집으로 오라고 했던 거였다.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틸란드시아는 서로 비슷비슷한 식물들 사이에서 아주 눈에 띄었다. 내가 틸란드시아를 가져왔던 날, 아이들은 창가에 달라붙어 너도 나도 구경하기 바빴다. 그 소란은 식물의 주인이 나라는 걸 안 순간 수그러들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여전히 식물에 관심이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영준아, 옷 안 갈아입어?”

반장이었다. 다음 시간은 체육이었고, 아이들은 체육복을 갈아입고 있었다. 나는 창가 옆 내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체육 선생님께 말씀드렸어. 몸 안 좋다고.”

“내일 애들이 피씨 방 가자던데, 너는?”

“야, 관 둬. 걔가 언제 게임하는 거 봤냐?”

옆에서 옷을 갈아입던 아이가 한마디 했다. 딱히 악의가 있는 말은 아니었지만 괜히 신경이 쓰였다.

“나도 갈게.”

말을 꺼낸 반장 또한 내가 그리 대답할 줄은 몰랐는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매번 빼던 녀석이 웬일이냐는 얼굴이었다. 왜 그랬지. 아이들은 우르르 운동장으로 몰려 나갔다. 곧 종이 쳤고, 소란스럽던 복도도 조용해졌다. 나는 책상 서랍에서 문제집을 꺼냈다. 왜 그랬냐고. 내가 언제부터 게임 같은 거 했다고. 사각 사각, 펜의 잉크가 종이의 흰 여백 위에 여러 숫자들을 새겨낸다. 바삐 굴러가는 머릿속에 여러 목소리가, 문장이 중첩된다. 나중에 꼭, 임신, 여기에, 했어요, 갈 거야!

순간 손목이 시큰거리는 통증에 펜을 떨어트린다. 나도 모르게 펜을 쥔 손에 힘을 가득 주고 있었던 걸 뒤늦게야 알았다. 공책 위에 펜의 잉크가 동그랗게 얼룩을 만들었다. 뒷장에도 잉크가 번져 공책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새카맣고 둥글게 남은 얼룩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낙인마냥 공책에 들러붙었다. 공책을 가방 안에 넣어버렸다. 교실은 깊은 물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고요했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하늘을 보니 정말로 물속에 잠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머리도 옷도 이렇게 축축한 걸까. 틸란드시아는 내 자리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놓아두었다. 누나에게 받아온 그대로, 아직 물도 한 번 주지 않았다. 물을 주고 싶지 않았다. 누나가 이상해진 날 건네받은 이상한 식물은 첫 만남부터 좋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땀이 나 이마에 달라붙는 앞머리가 불쾌했다. 창문을 열어도 꿉꿉한 바람만 밀려들 뿐이었다.

“야, 패스하라고 새끼야!”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이 축구를 하는 중이었다. 곧 여름이긴 했지만 날이 흐린 탓에 쌀쌀했는데도 아이들은 반팔에 반바지였고, 간혹 아예 웃통을 벗은 아이들도 보였다. 스탠드에는 아무도 없었다. 반 아이들 모두 축구에 한창이었다. 평범한 남자 고등학생의 모습이란 저런 것일지도 몰랐다. 그럼 나는? 고개를 저어 떨쳐내려 했다. 그래도 떨어지기는커녕 더 끈끈하게 달라붙어 왔다. 그럼 아이들 속에 속하지 못한 나는. 고개를 돌리다 운동장 한 편의 모래사장을 보게 되었다.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아 초라했지만 어렸을 때 나는 모래사장에서 항상 놀았었다.

누나는 친화력이 좋은 사람이다. 친구라곤 누나밖에 없는 나와는 달리, 학년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누나는 친한 친구들이 많았다. 누나와 단둘이 노는 걸 좋아했던 나는 우리 둘 사이에 누군가 끼어드는 것을 싫어했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못했다. 나는 그 날 누나와 모래사장에서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누나는 누나 역이고 나는 나였다. 그러던 중 누나와 친한 여자 아이들이 아는 체를 해왔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때에는 질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언니, 언니 하며 누나를 잘 따르고 누나도 그 애들을 받아주는 모습이 질투가 나서 그랬던 것이라고. 그 단어는 생각보다 쉽게 입 밖으로 나왔다. ‘언니.’ 파란 사탕을 빨아먹으며 곁에서 걷던 누나가 내 부름에 우뚝 멈춰 섰었다. 마주보았을 때 반쯤 벌린 입술 사이로 누나의 파래진 혓바닥이 보였다. 누나는 잠시 그렇게 나를 바라보다가 파란 혓바닥을 입 안으로 쏙 숨기며 웃었다. 누나가 그 때 뭐라고 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 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그 단어를 뱉어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우연을 가장한 부름. 그 단어를 뱉으며 가슴에 올라앉은 무엇도 뱉어낸 것처럼 후련했지만 뱉어놓은 만큼의 무게를 다시 가슴에 얹어놓은 것 같았다. 누나의 파란 혀를, 마찬 가지로 파랗게 물든 혀를 숨기며 빤히 바라봤던 순간. 나는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오는 단어를 삼킨다. 가슴이 파랗게 물든다. 창문을 닫고 블라인드를 친다. 누나는 정말 떠날지도 모른다.

 

 

학교가 끝난 후 집 반대 방향으로 서둘러 걸었다. 누나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누나 회사에 도착할 생각이었다. 말 해줄 때까지 기다리자니 누나가 언제 떠나 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불쑥불쑥 찾아와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누나에게 회사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연락했다. 누나는 평소와 달리 조금 당황한 것 같더니 알았다고 대답했다. 누나는 회사 앞에서 먼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엔 누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칠 뻔했다. 도수 없는 안경에 마스크까지 끼고 있어서, 누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왜 그런 걸 하고 있냐고 묻기도 전에 이유를 알아버렸다. 눈가의 상처는 안경으로도 전혀 가려지지 않았다.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아도 빤했다. 누나는 어릴 때도 종종 그런 상처를 달고 나타났다. 하굣길에 약국에서 산 밴드를 붙여주는 건 언제나 내 몫이었다. 누나가 집에 가자며 팔을 끌었다. 누나가 이렇게 살아갈 바엔 이곳을 떠나는 게 정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어떤 결정이든 누나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

“어떻게 할 거야?”

“그거 물어보려고 일부러 온 거야?”

“누나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으니까 그렇잖아. 왜 그랬어.”

“그러게.”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누나는 내가 원하는 대답은 하나도 들려주지 않았다. 마치 남의 일을 얘기하는 것처럼 태연하고 느긋한 모습에 내가 더 답답해졌다. 집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골목길, 결국 나는 끝끝내 먼저 묻고 싶지 않았던 말을 꺼냈다.

“떠날 거야?”

누나는 그제야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입 밖으로 내뱉어놓고 보니 누나가 정말 나도 모르는 새 훌쩍 떠나 버릴 것만 같아 서러워졌다. 울지 않으려 입술을 짓씹었다. 누나의 곤란한 표정은 내 질문이 정답이라는 걸 알렸다. 가슴이 죄여오는 걸 느끼며 한 번 더 물었다. 아니라는 대답을 원했지만 그런 말이 나올 리 없다는 건, 되묻는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떠날 거지? 그렇지?”

누나의 침묵은 긍정이었다. 그 후 나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붙일 수 없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집에 들어가는 누나의 등을 오래도록 바라보고만 있었다.

 

친구들을 따라 피씨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 하루 종일 잠기운에 비실거리다가 얼떨결에 끌려온 게 잘못이었다. 아까라도 내뺄걸. 후회는 의자에 앉아 눈치를 보며 본체 전원을 키고, 아이들이 많이 한다는 게임에 접속했을 때 확실해졌다. 나는 그 흔한 게임 아이디조차 하나 없었다.

“뭐 해, 안 들어 와?”

게임 아이디를 만들까, 하는 생각도 했다. 이대로 게임 아이디를 만들고, 방과 후면 아이들과 피씨방에 몰려 가 게임을 하고, 그렇게 할까. 남처럼. 평범한 남자애들처럼. ‘남자애들은 그래야 하는 거야. 알겠니?’ 뭐에 홀린 것처럼 회원가입 창을 켰다가, 이름을 적고, 생년월일을 선택하고, 성별을 선택하는 란에서 멈췄다. 남, 여. 남자 아니면 여자. 절반의 선택지.

“너 아직 아이디도 없냐?”

옆 자리 아이의 간섭에 화들짝 놀라 나는 회원가입 창을 꺼버렸다. 의문이 가득한 아이의 어깨를 툭 치며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미, 미안. 나 학원 있던 것 깜빡했다. 먼저 갈게.”

나는 컴퓨터 본체 전원을 눌러 강제종료 시켰다. 카드키를 카운터에 반납하고 도망치듯 나가는 나의 등 뒤로 게임을 시작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흐리더라니, 사거리의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을 때 기어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길을 가던 사람들의 우산이 하나 둘 펴지고, 우산이 없는 사람들은 바쁘게 나를 스쳐갔다. 신호등이 몇 번인가 색을 달리했다. 빨간 불에서 푸른 불, 다시 푸른 불에서 빨간 불로. 나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한참을 걷다가 갑자기 배가 아파 와서 하는 수 없이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가는 동안 복통이 멈췄으면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진 것 같았다. 이마에서 흐르는 것이 빗물인지 식은땀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열이 나는 것도 같았다. 익숙한 건물들과 골목이 보일 때쯤, 횡단보도 신호를 눈앞에서 놓쳐 버렸다. 배는 아파오고, 2분 남짓한 시간을 기다리자니 그 전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근처 공원으로 들어서자마자 화장실 건물을 볼 수 있었다. 마침 잘 되었다 싶어서 들어가려던 나는 자리에 우뚝 설 수밖에 없었다. 화장실은 남녀가 분리되어 있었다. 나는 눈앞의 화장실 표지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치마를 입은 빨간 표지판과 바지를 입은 파란 표지판. 각각 여성과 남성을 대변하는 기호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결국 아픈 배를 부여잡고 돌아섰다. 다음 신호는 절대 놓칠 수 없었다. 집에 가야지. 집으로 가야지. 이마에서 식은땀인지 뭔지 모를 액체가 흘러 속눈썹에 맺혔다. 더운 날도 아닌데 내게는 끔찍하게 더웠다.

 

 

 

  나는 사람들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갔어. 휴일 오후의 시내였고, 여름이었어. 따가운 햇살만큼이나 살갗에 들러붙는 낯선 이의 피부가 불쾌했지. 일행과 함께 에어컨 바람이 잔뜩 새어나오는 옷가게에 들어갔어. 무언가 사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더위도 피할 겸 구경도 할 겸 해서 들어온 곳이었지. 의미 없이 이 옷 저 옷 뒤적이다, 나는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했어. 그건 프릴이 잔뜩 달린 스커트였어. 옷을 입어보면 사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 번 입어보고 싶었지. 일행도 잔뜩 부추겼어. 한 번 입어봐. 예쁠 것 같은데, . 나는 스커트를 쥐고 못 이기는 척 일행의 손에 떠밀려 탈의실에 들어가. 아래를 꽉 죄고 있던 바지를 벗어 옷걸이에 걸쳐두고, 스커트의 지퍼를 내려 다리를 넣어.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탈의실을 나오면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행은 나를 보며 엄지를 치켜세우지. 눈짓으로 정말 괜찮으냐고 물으면, 일행은 나를 탈의실 앞에 있는 거울을 보게끔 돌려세워. 거울 속의 나는 아주 예뻤어. 스커트 아래로 뻗은 다리엔 털 하나 없이 매끈했고, 팔은 가늘었지. 어깨 아래로는 봉긋하게 곡선을 그리는 가슴이 있었고, 머리카락은 그 가슴을 가릴 만큼 길었지. 나는 여자애였어. 그리고 일행은, 누나, 누나였어.

 

 

 

빗방울이 창문에 와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다. 이마 위엔 미적지근하게 식은 물수건이 올라와 있었고, 방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니 머리가 핑 도는 게 몸살이 난 것 같았다. 오후 한 시였다. 학교를 안 갔구나. 어제 저녁 비를 맞으며 한참을 돌아다니다 간신히 집까지 찾아왔던 것은 기억이 나는데, 현관에 도착했을 즈음부터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지금 상태를 알만도 했다. 안간 게 아니라 못 갔다는 게 맞는 거겠지. 내일은 갈 수 있을까. 나는 교복이 아니라 집에서 입는 잠옷을 입고 있었다. 몸이 이런 상태라면 내가 직접 옷을 갈아입었을 리 없었다. 씻기고 옷을 갈아입힌 것은 아버지일까. 순간 알 수 없는 한기가 느껴져 몸을 쓸었다.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꿈에서 보았던 장면이 재생되었다. 기억은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동시에 사라져갔지만 내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를 복기 하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명치를 얻어맞은 것처럼 헉,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내가 무슨 꿈을 꾼 건지, 그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이불을 걷고 일어섰다. 자는 내내 땀을 흘린 건지 온 몸이 축축해서 씻고 싶었다. 땀에 전 몸을 이끌고 화장실로 갔다. 온 몸이 말을 듣지 않아 몇 번이고 넘어질 뻔 하며.

등부터 뜨거운 물을 끼얹었다. 어지러운 머리는 감기 때문일 거라고 되뇌며 넘어지지 않기 위해 두 다리에 힘을 준다. 때수건에 거품을 내 다리부터 문질러 올라오다가 가슴에서 문득 멈춘다. 꿈속의 봉긋한 곡선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거울에는 밋밋한 가슴과 넓은 어깨를 가진 남자가 나를 마주보고 있었다. 지우개로 틀린 식을 북북 지워버리듯, 때수건으로 괜히 가슴을 힘주어 문지른다. 따갑다. 가슴이 홧홧하게 달아오른다. 피부에 자잘한 생채기가 생긴다. 수증기 때문에 시야가 흐려 자꾸 헛것이 보인다. 샤워기로 뿌연 거울을 씻어 내렸다. 그 속에 창백하게 질린 내 얼굴이 있었다.

 

 

벨을 눌렀다가 아직 누나가 집에 도착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아무도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아줌마도 안 계신 모양이었다. 나는 잠깐 고민을 하다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비밀번호를 알고 있으면서도 벨을 먼저 눌러보는 건 오랜 습관이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다가 현기증이 일어 벽을 겨우 잡아 지탱했다.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은데다 몸살 기운 때문에 제대로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계속 집에 혼자 있자니 미칠 것 같아 누나를 찾으러 온 것이었다. 이 일에 대해 얘기를 할 수 있는 건 누나밖에 없었다. 익숙하게 누나 방문을 열고 들어가 침대에 비스듬하게 누웠다. 이런 때에는 내 방보다 누나의 방이 더 안정이 되었다. 그대로 잠이 들어버릴 것 같아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새삼 누나의 방을 둘러보다가 서랍을 열어본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임신 테스트기. 그 물건 자체가 이상하지는 않았으나 테스트기에 나타난 선은 하나였다. 그 선 하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도 남았다.

 

눈을 떴을 때 방 안은 여전히 어둑했다. 서랍에서 그것을 발견한 후 어떻게 내 방으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희미하다. 나는 깜박 선잠에 들었다가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다시 깼다. 정신은 들었지만 몸은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가만히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방문이 열리고, 거실의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곧 눈꺼풀 위로 서늘한 손이 내 이마를 짚는 것이 느껴졌다. 내 체온이 높아서 그 손이 아주 차갑게 느껴졌다. 함께 밀려들어온 바깥바람과 향수 냄새로 누나의 손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누나는 찬 물수건을 내 이마 위에 다시 올려주었다. 나는 간신히 한 쪽 눈꺼풀만 들어 올려 누나를 확인했다. 누나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이불을 덮어주며 더 자, 하고 속삭였다. 누나의 걱정스런 얼굴이 눈꺼풀에 희미하게 남았다. 언젠가 그런 누나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던 것도 같다.

 

 

어렸을 때 나는 엄마를 따라 항상 여탕에 갔었다. 나는 또래에 비해 발육이 더뎠고, 작고 여린 몸은 여자 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 날은 누나네와 함께 목욕탕에 갔었다. 옷을 벗어서 락커 안에 넣어놓고 누나와 함께 먼저 목욕탕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갔다. 미닫이문을 사이에 두고 락커룸과 목욕탕은 서로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문을 열면 후덥지근한 열기와 습한 공기가 온 몸을 감쌌고, 그 안에는 싸구려 공용 샴푸나 비누의 향도 섞여 있었다. 우리는 미지근한 물에 들어가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동네의 작은 목욕탕이라 주로 어르신들이나 아줌마들이 많았다. 누나와 함께 여탕에 온 것이 즐거워서였을까 나는 언니, 언니 하고 누나를 불렀다. 그에 동네 아줌마들은 깔깔거리며 저 애 말하는 것 좀 보라며 나를 가리켰다. 어렸던 나는 그 웃음에 더 신이 나 까르르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도, 엄마의 얼굴이 점점 굳어져갔던 것도 나는 알지 못했다. 그 날 나는 머리카락도 제대로 말리지 못 한 채 엄마의 손에 이끌려 집에 돌아왔다. 엄마는 내 어깨를 붙잡고 거듭 강조해서 말했다. 언니라고 부르면 안 된다고, 그런 건 여자애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넌 남자애니까. 남자애들은 그래야 하니까. 어깨를 붙잡은 엄마의 손아귀 힘이 너무 강해서, 나는 겁에 질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도 엄마는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다시는 나를 데리고 여탕에 가지 않았다.

 

 

다음 날 눈을 뜨자 몸은 훨씬 개운했다. 또 무슨 꿈을 꿨던 것 같기도 한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평소 학교 가는 시간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서 느긋하게 머리를 감고 말린 다음 화장실을 나가려 했을 때였다.

“걔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 속 한 번 안 썩이고 잘 크더니…. 영준이가 안 좋은 영향 받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띄엄띄엄 끊겨 들렸지만 무슨 얘기인지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누나에 대한 얘기가 분명했다. 누나네 부모님에게 전해들은 것인지 아니면 누나에게 직접 들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문 열 타이밍을 놓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 채 문에 기대어 있었다.

 

집에서 들고 온 플라스틱 통에 틸란드시아를 넣고 화장실로 향했다. 드디어 물을 좀 줘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내가 물을 주지 않고 며칠 방치했기 때문인지 줄기 끝 부분이 조금 말라비틀어진 것도 같았다. 세면대에 통을 넣고 수도를 틀었다. 물이 차오르는 플라스틱 통을 바라보았다. 물이 차자 틸란드시아가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누나는 누나가 뱉어낸 풍선에 달려서 위로, 더 위로 올라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한참 멍하게 서 있다 물이 넘치는 것도 몰랐다. 세면대고 화장실 바닥이고 넘쳐흐른 물로 흥건했다. 물이 튀어 양말도 다 젖었다. 어딘가에서 불어온 바람에 축축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플라스틱 통을 들고 반으로 돌아갔다. 물이 넘치지 않게, 조심조심 걸어서.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진 골목에 들어섰을 때, 나는 대문을 열고 나오는 누나와 마주쳤다. 누나는 제 몸 만 한 여행용 트렁크를 끌고 있었다. 누나는 나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누가 봐도 몰래 떠나려던 행색이었다. 섭섭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가는 거야? 나한텐 말도 없이?”

“나중에 연락하려고 했지.”

나는 입을 삐죽이다가 누나의 트렁크를 대신 잡아끌었다.

“데려다줄게.”

누나는 트렁크의 손잡이를 넘기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며 무슨 말을 먼저 할 지, 무슨 말을 하지 않을 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 행선지를 물었을 때, 누나는 고속버스 터미널로 갈 거라고만 말했다. 거기서 뭐든 끊어 타고 이곳을 벗어날 거라고. 버스에 오른 후 제일 먼저 휴대폰의 전원을 껐다. 어찌 되었든 해 지기 전에 집에 들어가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버스가 터미널로 향하는 동안 버스 안의 사람은 점점 적어져 결국에는 둘만 남게 되었다. 조금 망설이다가 내가 꿈을 꿨는데, 하고 입을 열었다. 내가 더듬더듬 뱉어놓은 활자는 버스가 터널에 들어가며 어둠에 잠겼다. 누나는 계속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이야기를 마침내 다 끝냈을 때까지도, 또렷하게.

 

우리는 버스 종점인 고속 터미널에 하차했다. 내가 잠깐 편의점에 간 사이 누나는 고속버스 표를 끊어왔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누나 지갑 위에 튀어나온 버스 표 귀퉁이를 보고 출발까지 30분이 남았음을 겨우 알았을 뿐이다. 우리는 터미널 의자에 나란히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산 너머로 희끄무레한 태양빛이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시간이 꽤 많이 지난 것 같았다.

“궁금한 게 많을 텐데 다 알려주지 못 해서 미안해. 미리 걱정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

누나는 거기까지 말한 후 잠시 숨을 골랐다. 나는 조용히 누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까 네 얘길 듣다가 그 때 일이 어렴풋이 생각났어. 왜, 네가 나한테 처음 언니라고 불렀을 때 있잖아. 그 때는 이렇게 말 해주지 못 했던 것 같아서.”

누나도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누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너는 그냥 너잖아.”

심장이 내려앉았다. 분명 별 것 아닌 이 한 마디를, 나는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네가 뭐라고 부르던 상관없어. 마찬가지로 네가 무슨 모습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누나가 타야할 버스가 플랫폼에 들어왔다. 버스 앞 차창에는 내가 모르는 낯선 지명이 적혀 있었다. 누나의 트렁크를 실어주려 버스 짐칸에 다가갔다가 바람에 날린 매연을 잔뜩 맞으며 눈물을 찔끔 흘렸다. 코는 매웠고, 목은 간지러웠다. 옷소매로 눈물을 찍어냈다.

“연락할게. 이메일이든 편지든. 휴대폰은 놔두고 왔으니까 기다리지 말고.”

“이제 안 돌아와?”

“글쎄. 가 봐야 알지 않을까.”

누나는 작은 가방 하나 말고는 든 것이 없었다. 언제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채비였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보는 환한 웃음이 후련함의 의미로 여겨지기도 했다. 누나는 버스에 오르기 전, 마지막 인사를 하며 내게 말했다.

“나는 저쪽에 가서도 잘 지낼 거야. 그러니까 너도 그러겠다고 약속해 줘. 넌 나 없이도 충분히 혼자 잘 할 수 있어.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서로의 길을 걸어가자.”

누나는 창가 쪽에 앉았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려 창가에 다가갔다가, 굳게 마음을 먹고 입술을 뗐다.

“언니, 잘 가.”

창에 가로막혀 소리는 전해지지 않았지만 입 모양으로 충분히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정말 마지막이었다. 누나는 낯선 곳으로 떠났다. 그리고 나는 그 날 저녁, 부모님께 연락도 없이 늦었다고 된통 혼이 났다.

 

 

          틸란드시아

  • 물은 일주일에 2~3회
  • 직사광선에 주의하고 통풍을 신경 쓸 것.
  • 온도에 민감하니 가급적이면 맨 손으로 만지지 말 것.
  • 주기적으로 물에 담가줄 것. 시간은 한 시간 이내.

 

10월 말쯤이 되면 이 작고 빈약한 식물의 한 가운데서 화려한 보랏빛의 꽃이 핀다고 했다. 꽃이 피면 지금의 볼품없는 모습과는 완전 다르겠지. 틸란드시아가 그렇게 달라졌을 즘엔 나도 어딘가 지금의 모습과는 달라져 있지 않을까. 틸란드시아에 분무기로 물을 주다가 문득 조금 자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에게 처음 받았을 때보다 큰 것 같았다.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않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잘 자랄 수 있는 식물, 틸란드시아가 자라나는 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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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디며 살아가는 모두에게 건네고 싶었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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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_나는 왜 글을 쓰는가.

학기 초였다. 친한 친구인 A가 갑자기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통학버스를 타지 않는다는 문자만 남긴 채였다. 조회시간에 A반 담임 선생님이 나를 찾아왔다. A가 학교에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걸 그 때 알았다. 선생님은 A가 내게 연락을 할지도 모르니 휴대폰을 계속 가지고 있게 했다. 주머니에 든 휴대폰이 무겁게 느껴졌다. 아무리 문자를 하고 전화를 해도 소용없었다. A는 전화를 받지도, 문자에 답장을 하지도 않았다. 뉴스에서 보았던 좋지 않은 사건들이 종일 머릿속에 떠올랐다.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선생님에게 A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저 마음이 좋지 않아 학교에 올 수 없었던 것뿐이라고, 괜찮다고 했다. A는 내게만 연락을 하지 않았다.

 

A에게는 아무 일이 없었지만 나는 하교하는 길 내내 서럽고 속이 상해서 눈물까지 날 정도였다. A가 학교에 오지 않았던 시간동안 어디에서 무얼 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왜 마음이 좋지 않았는지를 몰랐다는 게 나를 힘들게 했다. 또 왜 나에게는 연락을 하지 않는 건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들었다. 나는 혹시 내가 A에게 상처를 준 일이 있었나, 염려하며 아무 연락이 없던 A에게 상처를 받았던 것이었다. 다음 날 A는 학교에 왔고, 내게 연락하지 않은 것에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A는 전날의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돌아가는 A의 뒷모습은 내게 너무 잔인했다. 알고 있다. 아마 어쩔 수 없었을 거라는 걸.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라는 것을. 하지만 그렇다고 A의 그 하루의 공백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니었고, 내게는 여전히 그 하루가 큰 상처이다. A는 나에게 직접적으로 어떤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너무 쉽게 상처를 받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A와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상처를 주고받는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문득 이런 게 삶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상처 없이 살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 의지대로 줄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다면 골백번도 더 노력했을 것이다. 상처의 수준을 나눌 수는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상처는 객관적일 수 없고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는 않지만 예리하고 자잘한, 수많은 상처들이 나를 구성하고 있다. 아주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다. 그런 것들이 모여 많은 상처를 끌어안은 지금의 내가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모두가 그렇다. 사실 산다는 것은 그저 많은 상처들을 견디는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상처를‘견디는’것은 상처를 입은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상처받기 너무 쉬운 곳이고, 또 상처주기도 쉬운 곳이기 때문이다.

 

국어시간에‘공정무역 커피’에 대해 배웠다. 내가 사먹은 커피나 초콜릿이 지구 반대편의 아이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나는 인식하지 못한 채로 여태까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던 것이다. 우리는 어째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 수밖에 없을까. “어쩔 수 없었어.”라는 말로 포장하기엔 주고받은, 또 앞으로 주고받을 상처 하나하나의 아픔이 너무 크다. 그 아픔과 내가 의도치 않게 상처 준 사람들에게 느끼는 죄책감이 나를 괴롭게 했다. 앞으로 나는 살아가면서 남들에게 줄, 또 남들에게서 받을 상처들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 우리는 이 상처 많은 사회에서 어떤 자세를 취하며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견디며 살아가야 할까.

 

이런 고민들을 끌어안고 글을 썼다. 내 글 속에서 인물들은 상처를 주고받은 채 서로를 견딘다. 자신이 입은 상처 때문에 그 사람을 마주보는 것을 망설이는 인물이나, 상처를 계속 끌어안고 끙끙거리는 인물들…. 그들이 입은 상처는 내가 입은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지만 어쩐지 그들에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나는 별반 다르지 않구나, 다들 그렇게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내가 받은 상처를 너무 무겁지 않게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방법으로 상처를 견딘다. 어떤 인물은 상처를 떨쳐내고 나아가는 것을 선택하고, 어떤 인물은 그 상처에 한없이 머무르는 것을 택한다. 언뜻 보기에 비극적이거나 그렇지 않은 선택들 모두 각자에게 있어서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는다. 나는 그들을 통해 삶을 견디는 여러 가지 모습을 배웠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삶을 견디는 방식이 되었다.

 

나는 글을 쓸 때 A를 생각한다. 내가 A에게 받았던, 어쩔 수 없었지만 아팠던 그 하루를 생각한다. 반사적으로 아파오는 가슴 한쪽을 느낀다. 우리는 모두 상처투성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고, 그게 삶이고, 당연한 것이고, 어쩔 수 없는 것인지 모르지만 너무 힘들어 하지는 않으려고 했다. 그 모든 게 나를 너무 힘들게 하고, 내 세계를 무참히 흔들어 버릴 때,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러면 나는 흔들리는 그 시간을 버틸 힘을 얻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상처가 된 모든 것들이 해결되거나,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허구의 몸인 소설은 역설적으로 현실을 견디게 해 주는 위로가 된다. 나는 내 글 속의 인물들에게 늘 위로를 받았고, 글을 쓰며 나 자신에게 위로를 건넸다.

 

나는 내가 쓴 글이 나 자신에게 위로가 되고 견디는 방식이 되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기를 바랐다. 힘들어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싶었고, 어쩔 수 없는 것들에 아파하는 사람들에게‘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글 속의 인물들이나, 나 자신이나, A뿐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위로가 되는 글을 쓰고자 애썼다. 비록 A의 하루를 나는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우리는 오늘도 부대끼며 살아간다. 우리 모두는 서로가 주고받은 상처를 완전히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만 흉터가 남고 가끔은 아물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 상처를 껴안고도 잘 살아갈 수는 있다고 믿는다. 글이 그렇게 할 수 있게 한다고, 많은 사람들에게 오늘을 살아갈 위로가 된다고 믿는다. 그 믿음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이고, 목적이자, 동시에 내가 글을 쓰는 뿌리가 되었다. 나는 오늘도 그런 생각을 하며 글을 쓰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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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조림 속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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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난 시에 따르면 지난 2012년 시작한 온난 강 댐 건설이 오늘 2016년 7월 3일 완공된다. 온난 강 댐 수몰민 이주대책 차원의 이주단지 조성 완료 후 수몰민을 대상으로 택지분양을 추진하였으며, 댐 주변 수몰지 255세대에 대한 보상을 추진해 251세대(98.4%)에 대한 보상을 완료한 상태이다.

 

금붕어는 어항 벽에 붙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은 탁한 초록빛이었고, 군데군데 이끼가 끼어 있었다. 수면 위에 큰 그림자가 졌다. 그림자에서 자잘한 가루들이 떨어졌다. 탁한 수면에 주황색의 가루가 떠다녔다. 재원이 금붕어가 붙어 있는 벽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금붕어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툭 튀어나온 무신경한 눈과 마주친 것도 같았다. 금붕어의 기억력이 몇 초라더라. 3초? 재원은 손가락으로 벽을 두어 번 더 두드렸다. 금붕어는 그제야 느릿하게 움직였다. 수초 사이로 모습을 감추는 금붕어의 꼬리가 면사포처럼 하늘거렸다.

“넌 좋겠다. 뭐든 금방 잊어서.”

재원의 한숨과도 같은 목소리는 금방 공기에 스며들었다. 물 표면에 떠다니는 주황색 가루, 물결에 따라 조금씩 흔들리는 수초, 여기저기 엉겨있는 녹조류. 어항 안의 시간은 바깥보다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먹이통을 내려놓는 거친 손길에 먼지가 일었다. 먹이통을 내려놓았던 탁자 위에 액자 하나가 엎어져 있었다. 액자 뒤의 ‘메이드 인 차이나’ 글자 위로 먼지가 내려앉는다.

재원이 침대에 누운 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현관문이 조용히 열렸다. 재원은 정신만 깬 채로 현관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었다. 신발을 벗느라 잠시 멈칫한 아버지가 거실로 들어섰다. 아버지는 거실에서 다시 한 번 발걸음을 멈추었다. 꽤 긴 시간이었고, 반쯤 잠이 든 상태였던 재원은 아버지가 다시 움직이는 기척을 느끼기 전에 잠에 빠져들었다. 아버지는 탁자 앞에서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재원이 잠들고 난 후에도 아주 긴 시간동안.

 

*

 

“저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과장님.”

“그래, 수고했네.”

여자의 구둣발 소리가 멀어졌다. 여기 저기 불이 꺼진 구청 민원실에는 아버지 혼자만 남게 되었다. 아버지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모두가 돌아간 뒤 냉방기능을 끈 민원실은 셔츠 아래의 흰 러닝셔츠를 푹 적실 정도로 더웠다. 바쁘게 움직이던 아버지의 손가락이 멈췄다. 셔츠 앞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낸 아버지가 한숨을 돌리며 이마를 훔쳤다. 그 와중에도 등은 꼿꼿하게 세워 앉은 채였다. 이맘때만 되면 언제나 민원이 차고 넘쳤다. 아버지에게 야근은 필요보다 습관에 가까웠다. 콧잔등에 흘러내린 안경을 추슬렀다. 땀이 나 끈끈한 얼굴에 들러붙는 안경테가 신경에 거슬렸다. 컴퓨터를 끄고 책상 주변을 정리하는 아버지의 손길은 시종일관 차분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아버지가 한 마지막 일은 습관처럼 달력을 넘기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달력은 다른 달력들과는 달리 흰 종이 한 장에 그 날의 날짜 하나가 크게 적혀 있는 것이었다. 31일에서 다음 1일로 가기 위해선 이미 넘겼던 숫자들을 다시 앞으로 돌려놔야 했다. 아버지의 손가락이 이미 지나갔던 날짜들을 앞으로 넘기는 동안, 아버지는 잠시 혼몽한 상태에 빠진다. 마치 자신이 숫자를 넘기면서 정말 시간이 넘어가기라도 하는 듯이. 그래서 실은 한 달을 주기로 시간을 되돌리는 것을 매 달 반복하고 있기라도 한 듯이. 마침내 첫 장으로 돌아왔다. 1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달력을 모니터 옆에 내려놓는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버지는 문으로 향하다가 민원실 중앙에 멈춰 선다. 민원실 중앙의 널따란 탁자에는 얼마 전 완공된 댐을 축소시켜 만든 모형과 댐이 들어서기 전 마을의 지도가 전시되어 있다. 아버지의 눈길이 잠시 그곳에 머무른다. 아버지의 눈동자 어딘가에서 뭔가 번뜩였다가 금세 사라졌다. 아버지가 민원실의 문을 연다. 복도의 불빛이 민원실 안으로 길게 아버지의 그림자를 드리우게 한다. 민원실의 문이 잠기고, 곧 복도의 불빛도 꺼진다. 건물은 완전한 암흑에 잠긴다. 푸른 어둠 속에 잠겨 있을 그곳처럼.

 

*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들려오는 것이 있다. 하나는 시계의 초침소리. 재원이 자려고 누웠을 때, 가장 크게 들려오는 것이었다. 시계의 초침은 언제나 일정한 속도를 가지고 움직였다. 재원은 가만히 누워 그 소리를 들으며 시간이 가기는 하는 건가,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하나, 아직 익숙해지지 못한 소리가 있었다. 한곳에 모여 있던 것이 인위적인 작동으로 인해 한꺼번에 빠져나오며 나는 소리. 댐에서 물을 방류할 때 나는 소리였다. 완공된 지 한 달 남짓한 댐은 장마철인 요즘엔 수위를 맞추느라 온종일 물소리가 들려올 때도 있었다. 재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물소리가 나는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커튼 틈 사이로 밝은 빛이 비춰들고 있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장마철이라지만 저런 식으로 물을 방류하면 댐의 아래가 곧 드러날 것만 같았다. 재원은 댐의 아래에 잠들어 있을 곳을 떠올렸다가 이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뇌 한구석을 파고드는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재원이 거실로 나와 가장 먼저 한 것은 금붕어에게 먹이를 주는 일이었다. 오늘도 어항은 잠잠했다. 재원이 먹이통을 내려놓다가 액자를 보았다. 뒤집힌 적이 없다는 듯, 반듯하게 정면을 보게 세워진 액자. 액자 속의 가족은 밝게 웃고 있었다. 베란다에서 들어온 빛이 액자를 비추었다. 어린 아이를 안은 젊은 여자의 얼굴에 빛이 닿았다. 재원은 인상을 구기며 액자를 다시 뒤집어 놓았다. 재원의 눈길이 자연스레 액자의 옆에 있던 달력으로 옮겨졌다. 줄줄이 늘어선 숫자 중 두 개에 동그라미 표시가 되어 있었다. 하나는 개학일, 하나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기일이었다.

물소리가 더 거세어졌다. 재원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물소리가 더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물소리는 점점 더 커지다가 어느 순간 고요해진다. 마치 폭포 바로 아래에 있다가, 그 속에 들어온 것처럼. 요란한 물소리는 어느새 아주 멀리 아득한 곳에서 들리고 있었다.

물소리가 천천히 작아지다가 어느 정도에서 멈추었다. 아주 작지도, 시끄럽지도 않은 물소리는 한동안 끊이지 않을 것 같았다. 재원이 시계를 보았다.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옷가지 틈에 섞여 있던 바지를 집어 들다가 교복 셔츠가 땅에 떨어졌다. 재원이 옷을 주우려고 허리를 구부렸다. 책상 아래에 참치가 그려진 네모난 박스가 있었다. 재원은 느릿하게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허리를 일으켰다. 옷가지들 틈에 있던 바지와 티셔츠로 대충 갈아입은 재원이 신발을 신고 현관문 앞에 섰다.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얼굴에 닿아오는 후덥지근한 공기가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재원의 걸음은 모래사장을 걷는 것만큼이나 느렸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발이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곧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몸이 축축하게 젖어갈수록 입안은 바짝 마르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의 그늘에서 쉬는 동안에도 땀은 마르지 않았다. 도로 위에 일렁이는 아지랑이 뒤로 버스가 들어오고 있었다. 버스는 재원의 앞에서 멈추었다. 문이 열리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은 조금 쾌적할 거라는 재원의 예상은 틀렸다. 버스 안도 밖과 다를 것이 없었고, 오히려 머물러 있는 공기 때문에 더 답답하게 여겨졌다. 자리에 앉아 창문을 열었다. 재원의 얼굴에 와 부딪히는 바람은 미적지근해서, 시원하지도 상쾌하지도 않았다. 재원은 손으로 티셔츠를 펄럭이며 눈을 감았다.

가끔 버스가 신호에 걸려 멈춰 설 때, 매미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버스에선 라디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재원이 사는 지역의 라디오로, 주로 지역의 소식이나 사연 같은 것을 받고는 했다. 덥고 습한 날씨, 시끄러운 매미 소리. 라디오가 제대로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으나, 문득 진행자의 어떤 말에서 재원은 라디오에 신경을 빼앗긴다.

‘4년 전 여름에는 우리 모두를 안타깝게 했던 통조림 공장 화재 사건이 있었지요….’

재원의 시야가 흐려졌다. 두서없는 단어들이 머릿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재원아. 재원의 몸이 떨렸다. 기억 속 어딘가에서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피어올랐다. 재원아, 뜨거워. 재원이 귀를 틀어막고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재원이 내려야 하는 정류장은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 버스가 정류장에 정차하고, 재원이 버스 앞문으로 급히 뛰어내렸다. 뒤에서 버스 기사가 뭐라 욕설을 내뱉었다. 재원은 급히 골목으로 달려들었다. 전봇대를 붙잡고 속에 있는 것을 게워냈다. 속에서 자꾸 무언가 울컥울컥 치고 올라왔다. 먹은 게 없어서인지 신 위액만 올라와 목구멍이 쓰렸다. 재원의 눈앞이 노랗게 번졌다.

 

*

 

  2012.8.16

  노인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바싹 마른 입술에 닿아 스며들었다. 노인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외치고 있었다. 다들 여기 좀 보십시오. 지금 노인네 얘기라고 무시하는 거요? 광장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그 광경을 일상의 한 폭처럼 여기는 듯했다. 노인이 지나가던 여자의 팔꿈치를 붙잡고 품에 안고 있던 종이 중 하나를 디밀었다. 한 번만 읽어보쇼. 여자가 노인의 손길을 뿌리쳤다. ‘온난 시 댐 건설 반대! 우리 고향, 우리가 지키자!’ 등이 적힌 종이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런 썅…. 여자는 지레 겁을 먹고 건물 쪽으로 사라졌다. 노인이 쪼그려 앉아 종이를 모았다. 재수가 없으려니, 별…. 노인의 입에서 갖은 욕설이 쏟아졌다. 광장 멀리서 경비복을 입은 남자가 뛰어오고 있었다. 어르신,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된다니까요. 남자의 구두에 땅에 떨어진 종이가 짓밟혔다. 노인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종이를 끌어모으던 손을 멈추고 일어섰다. 뭐야 이놈은.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 정작 자신이 종이를 밟은 줄도 몰랐던 남자는 당황하여 뒤로 물러섰다. 노인답지 않게 억센 손길이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남자는 속수무책으로 노인의 손길에 휘둘리고 있었다. 뒤에서 경비원 몇 명이 더 뛰어왔다. 노인은 장성한 남자들의 손길에 별수 없이 끌려났다. 노인의 노기 어린 음성이 광장 곳곳에 울려 퍼졌다.

 

할아버지. 노인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들린 목소리에 놀라 잠시 주춤했다. 어둠 속에 재원이 서 있었다. 이제 들어오세요? 이가 드러나는 환한 웃음은 젊을 적의 아내를 생각나게 한다. 여태 안 잤냐? 재원이 앉아있던 식탁에 통조림 하나가 놓여있었다. 가만 보니 재원의 입술이 기름으로 번들거렸다. 아내와 며느리는 온종일 통조림 공장에서 일했다. 마트에서 노란 색의 참치 통조림만 봐도 두 사람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재원은 참치 통조림을 사 두었다가 두 사람이 늦게까지 일하는 날이면 하나씩 먹곤 했다. 할머니가 할아버지 오면 잔소리하랬어요. 할머니 오늘도 공장에 나갔냐? 에이, 말려도 안 통해요. 이제 그만하시래도. 신발을 벗고 들어서는 노인의 뒤를 재원이 따랐다. 오늘도 한잔 하셨어요? 노인의 걸음이 양옆으로 비틀거렸다. 재원이 부축을 하려 하자 노인이 손을 내저었다. 혼자 걸을 수 있다는 듯했지만 결국에는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하였다. 재원은 노인의 거부에도 꿋꿋이 노인의 겨드랑이에 자신의 팔을 집어넣었다. 노인은 자신을 부축한 재원을 내려다보았다. 사춘기인 또래들에 비해 유독 어머니를 잘 따르는 아이였다. 재원이 태어났을 때부터의 추억들이 집안 곳곳에 선명했다. 두고 봐. 이 할아비가 꼭 이기고 말테다. 지켜낼 거라고. 노인이 허공을 향해 삿대질했다. 알아요. 빨리 자라. 엄마랑 할머니 들어오시는 것 보고 잘게요. 노인의 방문 앞까지 간 재원은 문을 열어 주고 뒤로 물러섰다. 노인의 넓은 어깨가 어둠 속으로 숨는 것을 재원은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

 

액자를 다시 세워놓은 것은 아버지였다. 불이 꺼진 거실에 들어섰을 때, 신발장에 켜진 불빛이 닿은 곳은 엎어진 액자 위였다. 아버지의 손이 액자 앞에서 주춤했다. 액자에 손을 대는 것이 두려웠다. 아버지의 뒤에서 신발장의 불빛이 꺼졌다. 고요한 집 안에 시계 초침 소리만이 가득 찬다. 시계 초침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는 그 소리에 과거로 되돌아간다. 아주 잠깐의 시간 동안 아버지의 안에서 불꽃같은 것이, 뜨겁다고 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울컥 터졌다가 다시 잠잠해진다. 아버지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런 순간이 되면 자신의 내면 깊은 곳 어딘가에서 미처 다 하지 못 했던 것들이 올라온다. 사실 아주 오래전에 했어야 했던 말들. 갈 곳을 잃은 분노들. 간신히 눌러 담아 왔던 것들이 한순간에 뛰쳐나올까, 아버지는 긴장한다. 시간이 지나며 그것은 가라앉는다. 그제 서야 아버지는 액자를 건드릴 수 있었다. 앞으로 세워진 액자를 아버지는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본다. 때로는 입보다 눈으로 더 많은 얘기를 전할 수도 있는 걸까. 아버지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빛난다. 아버지는 오랜 시간동안 액자를 응시하고 서 있었다. 마치 액자 속의 누군가와 대화라도 하는 것처럼.

 

*

 

재원은 버스 정류장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걸어가기엔 너무 먼 거리일까.

하늘은 그새 비가 오려는지 먹구름이 잔뜩 몰려와 있었다. 해가 가려져 더위가 한풀 꺾이긴 했지만, 비가 오면 큰일이었다. 재원은 우산이 없었고, 원래였다면 우산을 챙겨줬을 이도 이제는 없었다.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재원은 움찔 떨었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휴대폰 화면에 아버지, 라는 고딕체의 글자가 떠 있었다. 재원은 조금 망설였다. 아버지가 꺼낼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한테 가봤니?”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는 요 몇 년간 야근이 늘어서 재원이 집에서 마주칠 기회가 적었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마른 모래처럼 버석거렸다. 재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원의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짧은 한숨 소리와 함께 조금 타이르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까지 병원에 계시려는지…. 잘 말씀드려 보아라.”

전화가 끊겼다. 재원은 전화기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입원한 후에 한 번 밖에 찾아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재원을 보내려는 걸 보면 할아버지를 많이 염려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다.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 않니.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하게 된 말이었다. 재원이 자리에서 힘없이 일어섰다.

덥지는 않아서 좋네.

재원이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재원의 머리카락 위로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다 젖었네.”

재원이 머리카락을 털며 병원에 들어섰다. 한 발자국씩 뗄 때마다 운동화 바닥에서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재원이 엘리베이터에 탔다.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자신은 물에서 금방 나온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6층에 도착한 재원은 간호사에게 받은 수건으로 젖은 몸을 닦은 후, 가장 끝에 있는 병실 앞에 섰다. 미안하구나. 재원은 이 문 앞에 섰던 또 다른 때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기억과 함께 잊고 싶었던 목소리도 함께 살아났다. 전부 내 잘못이다.

그냥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뜨끈한 목소리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재원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현상이었다. 또다시 속이 뒤집히려는 것을 침을 몇 번 삼키는 것으로 참았다. 재원이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병실의 문을 열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빈 침대 두 개였다. 반대편 침대 한 개에는 시트를 두른 환자가 누워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남은 침대 한 곳으로 눈을 돌렸다. 하얗게 센, 그마저도 머리 둘레를 따라 드문드문 남아있는 머리카락. 둥글게 굽은 어깨, 구부정하게 휜 등. 재원은 초라한 뒷모습을 한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왜 왔니.”

할아버지는 재원이 있는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오고 싶어서 온 것 아니에요, 라고 대답하려던 재원이 입을 다물었다. 재원의 시선이 돌아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는 할아버지의 어깨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왔다. 병원의 로고가 그려진 난잡한 환자복을 따라 마지막에 시선이 닿은 곳은 손목이었다. 앙상하게 뼈가 드러난 손목 위에 도드라진 굵직하고 긴 흉터. 병원에 입원한 그 날에 생긴, 할아버지 자신에게 지울 수 없는 지난날의 기억들이었다.

“이제 퇴원하셔도 되잖아요. 한 달 동안 충분히 쉬셨고….”

재원은 더는 할 말이 없어 멀거니 서서 병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재원은 할아버지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면 그 날은 몇 번이고 되살아났다. 재원은 자신의 가슴을 달구는 불길이 달갑지 않았다. 옆자리 환자의 코 고는 소리와 창밖의 소음, 티브이가 떠들어대는 소리만 들려오는 적막한 공간. 하얀 벽에 걸린 거라곤 각진 시계밖에 없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시계의 초침과 분침은 멈춰 있었다. 티브이의 화면이 갑작스레 바뀌었다. 바닥에서 더운 열이 올라오는 사막이 아닌, 보기만 해도 시원한 폭포였다. 아래에서 위로 물이 쏟아지는 광경, 쏴- 귀를 따갑게 울리는 소리에 내레이션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내려앉는다. 할아버지가 침대에서 일어나 티브이의 전원을 눌렀다. 티브이에서 폭포가 사라졌다. 한순간 조용해진 병실 안에 할아버지의 거친 숨소리가 가득했다. 할아버지는 조용히 침대로 돌아와 재원을 등지고 누웠다. 할아버지의 각질이 일어난 입술이 몇 번 달싹였다.

“여기서 나가도 집엔 안 간다.”

잇새로 흘러나온 소리는 금세 흩어졌다. 하지만 그 말 속에 숨은 단호한 뜻은 재원에게 확실히 전달되었다. 재원은 망설임 없이 발길을 돌렸다. 떠나는 재원의 뒤에 다 닦아내지 못한 물방울들이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재원은 꿈을 꾸었다. 어두웠고, 더웠다. 마치 불길이 아주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곳에서 탈출하기 위해 재원은 안간힘을 썼다. 그때 어딘가에서 빛이 느껴졌다. 빛은 밝았고 시원했다. 어른거리는 시야 사이로 어렴풋이 여자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보였다. 깡마른 그 손가락에는 이리저리 베인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어 누군가를 떠오르게 했다. 재원은 애타게 불렀다. 눈앞에 다가온 손을 잡으려 더 손을 뻗었다. 끝내 만나지 못한 두 손은 서서히 멀어졌다. 이내 빛이 수그러들고, 재원은 어둠 속에서 그 이름을 계속 불렀다.

“학생, 종점이야.”

재원은 자신의 어깨를 쥐고 흔드는 손길에 잠에서 깼다. 재원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주위를 살폈다. 종점. 재원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버스에서 내렸다. 비가 내린 것으로 조금 시원해졌으면 좋으련만 오히려 더 후덥지근해졌다. 재원이 옷깃을 팔락이며 밤길을 걸었다. 알고 있다. 자신이 꿈에서 그렇게 부르짖은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재원의 얼굴이 댐의 물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향했다. 지금은 댐 아래에 잠겼을 그곳. 불길에 휩싸였던, 지금은 재로만 남아있을.

 

*

 

  2012.8.27

  노인은 둥그런 시계탑 위에 서 있었다. 노인이 자신의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이 시계탑 아래 광장에 모여 노인을 올려다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시계탑에 수직으로 걸린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였다. 시청은 당장 댐 건설 계획을 중지하라! 우리의 고향, 우리가 지킨다! 노인이 확성기를 들고 현수막에 적힌 문구를 계속해서 읊고 있었다. 노인의 목소리에는 그 나잇대 답지 않은 강인함이 실려 있었다. 노인의 확성기에 맞서 구청에서도 스피커로 뭐라 방송을 했다. 노인은 지지 않겠다는 듯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그러는 사이 노인이 몇 번 발을 헛디뎠고, 그때마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가슴을 졸였다. 노인이 시위하는 동안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리더니 시계탑이 있는 광장으로 동네에 딱 하나뿐인 구급차와 사다리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계탑 아래에 도착한 소방관들은 빠르게 구조 그물을 설치하고 사다리를 꺼냈다. 사다리에 오른 소방관이 확성기를 들고 진정하고 일단 내려오라며 말을 건넸다. 노인은 들은 척도 않았다. 노인과 소방관의 대치가 얼마나 이뤄졌을까, 아래에서 대기 중이던 소방관들이 갑작스레 철수 준비를 했다. 사다리가 접히고, 구조 그물은 미처 걷지도 못한 채로 소방관들이 급히 차에 탔다. 노인도 무슨 일인가 싶어 시계탑 위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앞을 막아선 인파 때문에 소방차가 광장을 빠져나가는 것은 아주 느렸다. 노인을 말리려고 들었던 확성기를 꺼낸 소방관이 인파를 향해 외쳤다. 긴급사태입니다.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길을 비켜주십시오-. 사람들이 노인의 뒤쪽을 가리키며 웅성거렸다. 그 때문에 소방차가 빠져나가는 것이 더 늦어졌다. 노인은 자신의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매캐한 냄새를 느끼고 뒤를 돌았다. 노인은 보았다. 자신의 며느리와 아내가 다니던 공장에서 시커먼 연기가 치솟는 것을. 곧이어 시뻘건 불길이 공장의 모습을 뒤덮는 것을 노인은 모두 시계탑 위에서 보고 있었다.

 

*

 

집에 돌아와서 잠이 든 재원은 새벽녘부터 들려온 물소리에 어렴풋이 눈을 떴다. 눈을 뜨고도 한동안 잠이 든 것 같았다. 자고 있는 건지, 아니면 깨어난 건지 알 수 없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소리라고는 물소리와 시계 소리, 보이는 거라곤 어렴풋한 방 안의 풍경. 재원은 그사이 어딘가에서 헤매었다. 문득 눈앞에 현재의 것이 아닌 것들이 어른거렸다. 그 날의 연기처럼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것들. 매캐한 연기와 공장을 뒤덮었던 불길. 뒤늦게 도착해 불길을 진압하느라 쩔쩔매던 소방관들. 입을 벌린 채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많은 사람. 그중의 한 명이었던 자신, 그리고 할아버지. 재원은 그 날을 분명히 똑똑히 기억한다. 재원의 입술에서 신음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엄마…. 그토록 부르고 싶었던, 화마 속에 잠긴 이들. 할머니…. 그 날의 어둠을 가르고 빛이 재원에게 다가온다. 베인 상처가 많은 손, 다정하게 자신을 불러오는 목소리. 재원아. 엄마…. 재원의 손이 빛을 향해 다가간다. 이번에는 제대로 그 빛에 닿을 수 있었다. 뜨거워. 빛이 사라진다. 재원은 눈을 감는다.

 

*

  2012.9.16

  어르신 문 좀 열어주십시오- 노인은 문을 두들기는 요란한 소리에 눈을 떴다. 희미하게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다가가는 노인의 행동은 아주 느렸다. 노인의 발바닥이 닿는 곳마다 바닥이 삐거덕 소리를 내며 울었다. 마침내 현관문을 열자, 여러 쌍의 눈동자가 노인을 향했다. 어르신, 시청에서 댐 건설 계획을 당긴답니다. 계속 집 안에만 계시지 마시고 저희에게 힘을 좀 보태주세요. 노인은 남자의 손에 들린 팻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불과 몇 주 전까지 자신이 들고 있었던 팻말이었다. 이대로 댐이 건설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하셨던 건 어르신이잖습니까. 그래…. 그랬지.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분명히 몇 주 전까지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자신은 왜 댐 건설을 반대했더라.

어르신네가 처한 사정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더 가족 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해야지요! 노인은 사람들이 뭐라 떠드는 것을 들으며 고개를 숙였다. 낮아진 시야에 검은색의 해진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옆에 선 자신의 발과 비교하면 한참이나 작은 크기였다. 오른쪽 구두의 장식 술은 반쯤 떨어져 나가 있었고, 왼쪽 구두의 뒤축은 가죽 부분이 너덜거렸다. 아내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넨 적 없던 노인이, 아내의 생일에 처음으로 장만해 준 구두였다. 그게 언제 적이었더라. 어르신, 저희 얘기 듣고 계십니까? 남자의 목소리에 노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노인의 눈동자에 빨갛게 실핏줄이 일어나 있었다. 난 이제 안 나가네. 노인이 그 말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바깥에서 사람들이 문을 두들기며 뭐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노인은 개의치 않았다. 천천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은 노인은 두 손으로 신발을 안아 들었다. 그 순간 위태롭게 달려있던 장식 술이 끊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노인은 구두를 조심스레 가슴에 품었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노인의 어깨에 흰 머리카락이 몇 가닥 붙어 있었다. 문 바깥도 조용해졌다. 어딘가에서 불어온 바람이 노인의 어깨에 붙은 머리카락을 날려 보냈다. 노인의 어깨가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

 

병원에 입원한 후, 노인의 일과는 전보다 느리고 평이하게 흘러갔다. 노인은 하루의 대부분을 허공을 바라보며 지냈다. 같은 병실에 있는 환자들이 말을 건네도 거의 반응하지 않았다. 그런 노인이 유일하게 입을 여는 순간은 누군가가 노인의 침대 옆 블라인드를 건드리려 할 때였다. 누군가 창문에 다가서기만 해도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그 쪽은 손대지 말아주게, 라고 말했다. 노인이 있는 병실의 환자는 대게 가벼운 질병으로 입원한 환자들이 많았고, 그 때문에 병실 안의 사람들은 수시로 바뀌었다.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도 꽤 되었는데 노인은 그들 중 누구와도 친해지려 하지 않았다. 그들과 자신은 기본적으로 처지가 다르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노인 반대편 침대의 남자가 퇴원하는 날이었다. 가족들이 와 짐을 꾸리고 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아이 둘이 남자를 부축해 나가는 것을 노인은 멍하니 지켜보았다.

“아빠, 집으로 가요.”

집, 하고 작게 소리 내어 뱉은 후 노인의 입술은 전보다 굳게 다물린다. 퇴원을 하려면 자신이 돌아갈 집이 있어야 했다. 아니, 돌아갈 ‘곳’이 있어야 했다. 노인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노인의 집은 더 이상 노인이 머무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노인이 병실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블라인드를 걷었다. 지기 시작한 햇빛이 창문을 통과해 들어오며 노인의 환자복에 자잘하게 내려앉았다. 노인은 자신이 빛 앞에 서 있는 것이 불경하게 여겨진다. 손목의 상처가 아려오고, 빨리 블라인드를 내리고 싶었다. 한여름의 햇빛은 막 지고 있는 것이라도 뜨거워서, 노인의 피부가 금방 달아오른다. 노인은 자리에 주저앉는다. 몸을 웅크려도 햇빛은 몸 곳곳에 닿아온다. 뒷목 언저리에 닿는 햇빛이 서서히 목을 죄여오는 것 같았다. 노인은 이번 여름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아버지가 건넨 한마디였다. 아버지는 필요한 서류를 챙겨 할아버지의 시신을 확인하러 곧 나갈 거라며 안방으로 향했다. 재원은 방에 들어가려는 아버지를 붙잡고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 했다. 뒤돌아선 아버지와 눈이 마주친 재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재원은 붙잡았던 아버지의 팔을 놓아주었다. 아버지의 그런 눈동자를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인 것은 아니었다. 4년 전 아버지에게는 어머니와 아내를 함께 보냈어야 했던 날,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울려 퍼질 때도 아버지는 그런 눈을 하고 조용히 조문객을 맞았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사진 양옆으로 다른 이들의 사진이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할아버지는 합동 분향소 한구석에 가만히 서 있었다. 사람들은 할아버지에게 몰려갔다. 할아버지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손찌검과 욕설을 아무 말 없이 받았다. 전부 내 탓이오. 할아버지는 이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잠을 자면서도 전부 내 탓이오, 하고 중얼거렸다.

 

재원은 침대에 앉아 참치가 그려진 박스를 노려보았다. 통조림 공장 화재 사건의 피해자들 집에 참치 회사가 보낸 것이었다. 재원은 집으로 배달 온 참치 통조림을 버릴 수도,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도 없었다. 배달원에게서 받아든 박스는 아주 묵직해서 오래 들고 있기 힘들었다. 4년이 지난 지금도 묵직한 참치 통조림 한 박스는 재원의 방 한 편에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재원이 박스로 손을 뻗었다. 박스에 붙여진 테이프 끄트머리를 손톱으로 갉작거렸다. 그 손길에 힘이란 것은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아, 사실상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한참을 꾸물거리던 손가락이 멈추었다. 할아버지의 짐을 정리하러 병원에 가야 한다는 것이 어렴풋이 생각났다. 거실에 나온 재원은 마치 습관처럼 어항으로 다가갔다. 어쩐지 금붕어가 조금 비실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얘도 더위를 먹나.

고민한다고 해서 알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재원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먹이를 한 번 더 뿌려주는 일 뿐이었다. 먹이가 수면에 닿아 물이 조금 흔들리자, 금붕어가 수초 사이로 들어갔다. 먹이통을 내려놓고 재원이 일어섰다. 어항을 뒤로하고 재원이 집을 나섰다. 어항 속 수초의 흔들림이 서서히 멎었다.

*

 

지금 노인의 발아래에는 재원의 눈동자를 닮은 것이 있다. 검고 깊어서, 그 끝을 알 수 없는 것. 바라보고 있으면 영원히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은 어둠. 그것이 노인의 발밑에 웅크리고 있었다. 노인은 재원을 떠올린다. 재원을 구성했던 많은 것들을, 떠올린다. 마침내 자신에게서 돌아선 재원의 등이 떠올랐을 때, 노인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자신은 뒤돌아선 재원을 다시 돌려세울 수 없었다. 아마도 평생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후줄근한 환자복 아래로 드러난 손등에 억지로 주삿바늘을 빼다 역류한 피가 굳어 있었다. 어두운 시야에 한 사람이 들어온다. 재원을 닮은, 재원이 닮은 아내. 노인이 아내가 내미는 손을 붙잡았다. 한 발짝, 두 발짝 내딛는 노인은 그 어느 때보다 홀가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지막 한 발을 떼기 직전, 노인은 자신의 아들을 생각한다. 4년 전 자신의 잘못에도 아무 말 않던 아들이 병원에 찾아 와 지었던 표정, 그 원망스러웠던 눈길을 생각한다. 적어도 아들에게는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로써 몇 년 동안 지고 왔던 빚을 갚을 수 있을 거라고 노인은 생각한다. 이제 그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고. 노인은 눈을 감는다. 풍덩- 고요한 저수지에 조용히 파문이 일었다.

 

*

 

재원은 할아버지의 병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이번이 세 번째다. 재원은 처음 이 문 앞에 섰을 때를 기억한다. 할아버지의 상태를 보고 오라는 아버지의 부추김에 못 이겨 왔었다. 그 날은 몹시 더웠었다. 어쩌면 며칠 전보다, 오늘보다 더. 재원은 그날의 온도, 습도, 그 외의 모든 것들을 기억한다.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에 묻은 지문이나 간호사들의 무료한 표정까지도. 힘겹게 걸음을 옮겨 이 병실 앞에 도착했을 땐, 이미 많이 지쳐 있었다. 재원이 문을 열었을 때, 한 걸음을 채 떼기도 전에 날아든 것은 할아버지의 쉬어빠진 목소리였다. 미안하다. 다 내 탓이다. 네 어미도, 할미도. 전부…. 내가, 내가…. 할아버지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턱에 맺혔다. 할아버지는 얼굴을 감싸 안고 차마 들지 못했다. 재원은 멍하니 병실 문 앞에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고통스러워하는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괜찮다는 말을 건넬 수도 없었다. 한 발짝, 어쩌면 두 발짝이면 되었을까. 하지만 그때의 재원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재원이 현관문 앞에 커다란 봉투를 내려놓았다. 한 달 동안 할아버지가 병원에서 쓰던 물건을 정리해 온 것이었다. 가장 먼저 어항을 살펴보러 간 재원은 우뚝 그 자리에 멈춰 선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어항의 수면에 금붕어가 배를 까뒤집은 채 떠다니고 있었다.

왜, 왜…?

재원은 어항을 집어 들자마자 이유를 알게 된다. 유리로 된 어항은 엄청나게 뜨거웠다. 어항에 비추던 햇빛이 문제였을까. 아마 금붕어는 너무 ‘더워서’ 죽었을 것이다. 재원은 어항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변기 속에 어항에 든 것을 모조리 들이부었다. 금붕어의 몸뚱이는 큰 저항 없이 물과 함께 변기 속으로 떨어졌다. 어항 아래에 깔려있던 자갈의 일부도 물에 함께 쓸려 내려갔다. 재원이 변기의 레버를 내렸다. 변기에 큰 소용돌이가 친다. 금붕어는 세찬 물살에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마침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빨려들었다. 변기 속의 물이 새로 차올랐다. 어항 속의 수초는 벽면에 달라붙어 기이한 모양새를 했다. 재원의 발등에 어항에서 흘러내린 물이 떨어졌다. 양말이 조금씩 젖어갔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세찬 물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아버지가 막 소방서 건물을 나오고 있었다. 방금 전 할아버지의 시신을 확인한 참이었다. 웃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생의 끝이 자살인 것이 뭐가 그리 좋아서 웃고 있었을까. 아버지의 발걸음은 집이 아닌 민원실로 향했다. 불이 꺼진 민원실을 둘러보고 있던 경비에게는 할 일이 남아 왔다고 둘러대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어 앉는다. 평소 고집스레 등허리를 펴고 앉던 것과는 상반되는 자세였다. 아버지의 자리에만 불이 켜져 있어, 아버지는 마치 독백을 연기하는 배우 같았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살아있는 모습을 봤던 건 한 달 전쯤이 마지막이었다. 그 날 새벽 할아버지는 손목을 그었고, 이를 화장실을 가려던 재원이 발견한 덕에 할아버지는 시기적절하게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오후에 깨어났었다. 할아버지가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아버지는 말했었다. 왜 그러셨냐고. 아버지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떨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조금 정신이 돌아온 듯 아버지와 눈을 맞추었다. 입을 열어 말을 하려고 했을 때 잠시 쇳소리가 나오다가, 한참 만에 아주 조금 당신의 목소리를 찾았다. 먼저 간 이들이 보고 싶었다고 하면, 믿을 테냐. 아버지는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봤었다. 회한과 슬픔, 고통 따위의 것들이 섞여 범벅이 된 주름진 얼굴을. 할아버지는 목이 말라와 숨통을 조여 오는 느낌에도 아랑곳 않고 몇 마디 말을 더 이었다. 보고 싶었다. 먼저 간 아내가, 며느리가. 나 때문에 죽어 간 많은 사람들이. 보고 싶었다.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는 자신이 있는 곳이 그 날의 병실인지 민원실인지 헷갈린다. 아버지는 자신이 디딘 곳의 바닥이 꺼지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로비 한가운데 댐의 지도와 모형이 전시되어 있는 곳으로 다가간다. 보고 싶었다. 너무도. 그 말을 하며 할아버지는 눈물을 흘렸다. 깊게 패인 주름을 따라 눈물이 고였었다. 아버지는 스물다섯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구청에 소속되어 일하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매일 자판을 치며 일을 했다. 십 오년 간 자판을 두들긴 아버지의 손가락 끝 부분은 지문이 거의 닳아 반질반질하다. 항상 민원실에 앉아 자판을 두들기던 아버지의 손이 댐의 지도를 길게 뜯어낸다. 댐의 지도가 반으로 갈라졌다. 한 번 뜯어낸 지도를 이번에는 가로로 뜯어낸다. 종이가 아버지의 손길에 이리저리 찢긴다. 걸레짝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버지의 손바닥이 날카로운 종이의 단면에 베여 빨갛게 물들었다.

“나는, 누구는.”

아버지의 입에서 몇 어절 단위의 말들이 어지럽고 두서없이 쏟아져 나온다. 완전히 문장이 되지 못한 말들은 아버지가 얼마나 흥분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지도가 여러 갈레로 찢겨져 바닥에 나뒹군 후에 아버지는 옆의 댐 모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래로 축 늘어진 팔에서 핏물이 뚝 뚝 흘렀다. 아버지의 팔이 허공을 가른다. 댐 모형이 장식된 얇은 유리는 아버지가 휘두른 팔 한 번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진다. 안의 댐 모형은 흉측한 모양으로 어그러졌다. 아버지의 입에서 몇 마디가 더 쏟아진다. 아버지의 등이 빠른 속도로 땀에 젖었다.

"누구는, 그걸, 못 해서, 그래서….”

팔만으로는 부족했던지 아버지의 발이 장식대로 올라간다. 댐 모형은 어느새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일그러졌다. 유리 깨지는 소리에 놀라 들어온 경비가 아버지의 행동에 놀랄 때도 발길질은 멈추지 않았다. 보다 못한 경비가 아버지의 팔을 잡아 온몸으로 끌어냈다.

“누구는, 못 해서 그런답니까. 나도, 나도 할 수만 있다면.”

나도, 나도. 아버지의 목소리가 물에 젖었다. 같은 단어를 반복하며 울음을 토해내, 마치 어린 아이가 떼를 쓰는 것처럼 되었다.

“나도, 나도오. 나도….”

아버지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날뛰는 아버지를 온 힘으로 제압하고 있던 경비는 도리어 힘이 빠져 축 늘어지는 몸뚱이를 추스르지 못해 비틀거렸다. 아버지의 온 몸이 땀범벅이 되었다. 아버지의 입에서 짐승도 아닌, 짐승인 것만 같은 흉폭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디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의 울음소리가 민원실의 허공을 가른다.

 

*

 

화장실에서 나온 재원은 어항을 제자리에 올려놓았다. 주인을 잃은 어항은 휑하니 비어 있었다. 배고프다는 생각이 들자, 재원은 망설임 없이 방으로 들어가 통조림 박스 앞에 섰다. 재원이 박스테이프를 뜯어내고 안에 있던 통조림을 모두 꺼냈다. 재원이 통조림의 뒷면을 확인했다.

 

2016.1.12 까지. 김미옥 제조.

 

재원은 몇 달이나 지난 날짜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이름에 눈길을 빼앗겼다. 김미옥. 재원의 가슴에 잔잔한 파도가 들이쳤다. 파도의 모양에 따라 모래는 쌓이고, 깎인다. 재원은 그 손길이 제게 머무르는 것을 느꼈다. 할아버지는 그 뜨거운 여름을 삼키지 못해서 돌아가셨다. 여름은 재원의 책상 아래, 박스 안에, 통조림 속에 있었다.

  재원아.

“…알고 있어요.”

재원의 목소리에는 이제껏 없었던 결의가 서려 있었다.

참치 통조림을 따는 재원의 손길은 다급했다. 차례대로 하나씩 따서 식탁 위에 늘어놓았다. 통조림이 마침내 딱 두 개 남았을 때 재원의 손이 멈추었다. 재원은 첫 번째 통조림을 입가로 가져간다. 첫맛은, 비렸다. 비리고, 짜고, 텁텁하고, 목이 막히는 느낌. 미끄덩한 참치가 이에 짓이겨지며 비린내를 뿜었다. 입 안 가득 참치를 물었다. 고무를 씹는 것 같았다. 재원은 쉴 새 없이 입안으로 참치를 욱여넣었다. 울컥 올라오려는 것을 참고, 하나하나 천천히. 한 방울도 남기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깡통은 차갑고, 신물이 올라오는 속은 뜨거웠다. 엄마는 엄마가 없는 날을 새겨 넣었다. 이름과 함께. 몸에서 열이 나고 있었다. 이마나 턱에 맺힌 땀방울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재원의 발치에 물방울 자국이 여럿 생겼다. 여름은 재원에게서 너무 많은 것들을 앗아 갔다. 어머니도, 할머니도, 금붕어도. 그리고….

할아버지, 할아버지.

마지막 통조림을 내려놓았을 때, 재원은 온몸으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지독히 덥고, 뜨거운 날이었다.

 

재원의 손목에 걸린 검정 비닐봉지가 바스락거리며 허벅지에 부딪혔다. 재원은 점점 가까워지는 물소리를 느끼며, 그 물소리를 따라 걷고 있었다. 거칠었다가, 잔잔했다가 하는 물소리에 재원은 전보다 익숙해지고 있었다. 저수지 전망대로 가는 길목은 평소와 달리 한산했다. 전망대 앞에 막 도착해서야 사람이 없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전망대 앞, 돌출되어 저수지의 표면과 거의 맞닿은 부분에 노란 테이프가 둘러져 있었다. 여기였겠구나. 재원은 노란 테이프에 최대한 가까이 섰다. 난간과는 거리가 조금 있었음에도 충분히 저수지가 내려다보일 정도였다. 할아버지는 여기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할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던 날 새벽, 화장실 문을 연 재원은 그 자리에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수십 번이나 할아버지를 해하는 상상을 했다. 막상 그것이 현실이 되어 재원에게 다가왔을 때 재원은 덜컥 겁이 났다. 실은 조금쯤 그러길 바랐으면서.

“바보 같아.”

재원이 비닐봉지 안에서 참치 통조림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어머니의 흔적. 참치 통조림을 앞에 놔두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손바닥보다 작은 사진 한 장과 부엌을 뒤져 찾아낸 라이터를 꺼냈다. 할아버지의 병실에서 나온 할머니의 증명사진이었다. 서툰 손길로 라이터를 켠 재원이 사진 끄트머리를 작은 불꽃에 가져다 댔다. 사진은 가장자리부터 우그러들면서 까만 재를 흩날렸다. 아주 작은 사진 한 장은 금세 타오른다. 쥐고 있던 손가락에 열기가 훅 끼칠 때쯤 재원이 사진을 놓고 뒤로 몇 발짝 물러선다. 사진은 공중에서 남김없이 타 까만 재가 되어 바닥에 흩어진다. 그나마도 바람 때문에 금방 흔적을 감춘다. 멀리서 불어온 바람에 재원의 손가락에 위태롭게 걸려있던 비닐봉지가 공중에 올랐다. 까만 비닐봉지가 바람에 실려 날아가는 것을 멀거니 쳐다보던 재원이 곧 발길을 돌렸다. 들끓던 속이 조용하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전망대를 떠나는 재원의 뒤에서 물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할아버지의 장례식 때 아버지는 많이 울었다. 4년 전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고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 재원은 아버지에게 마지막 남은 통조림 하나를 건넸다. 아버지의 벌겋게 부어오른 눈가와 실핏줄이 일어선 눈동자를 재원이 훔쳐보았다. 아버지는 평생 울 울음을 그 3일 동안 다 운 사람처럼 어딘가 홀가분해 보였다. 아버지는 통조림의 겉면을 쓸어보다 뒤집어 보았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이름이 적힌 부분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아버지의 상체가 앞으로 숙여졌다. 재원은 창밖의 풍경을 응시한다. 매미 소리가 저번보다 작아진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더웠다. 아버지의 검은 정장은 재원이 입기에 조금 컸다. 재원은 손바닥으로 내려오는 소맷부리를 잡아 끌어당겼다. 언젠가 이 정장이 재원에게 딱 맞는 날이 올 것이었다. 창밖의 풍경은 수시로 바뀌었다. 재원이 창문을 더 많이 열었다. 미적지근한 바람이 들어와 땀으로 끈끈해진 피부에 닿았을 때 조금쯤 시원했던 것도 같았다.

아버지의 정장이 나에게 딱 맞을 때쯤이 되면 우리는 좀 덜 더울까. 땀을 조금 덜 흘릴 수 있을까.

버스가 재원의 눈에 익은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물소리가 들려왔다. 시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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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것이 부담스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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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고민은 제목에도 나와 있듯이 글 쓰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저는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고, 그래서 학교생활을 하면서도 글을 꾸준히 쓰려고 노력을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게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원래부터 글을 자주 쓸 수 있을 만한 역량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뭘 써야겠다 하면 나오는 수준이었는데 점점 꿈이 구체화가 되고,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받거나 잘 써야 된다는 압박감이 들면서부터 글 쓰는 것이 부담스러워 지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잘 쓸 필요 없다고 계속 생각은 하고 있지만 이제는 문장 하나 쓰면서도 이 문장이 맞는 건지, 이런 표현은 상투적이지는 않은지, 너무 뜬금없는 얘기가 아닌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아무것도 못 쓰게 되고, 그런 날들이 이어지니 남들보다 뒤쳐지는 게 아닐까하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슬럼프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런 고민을 겪어보셨던 분들은 어떻게 해결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도 제대로 된 글을, 한 페이지라도 좋으니 완성을 좀 시켜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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