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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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서로의 얼굴을 닮은 공장

매캐한 희망을 내뿜는 우리들의 폐

밤이면 표정을 지우고 같은 얼굴들을 생산해냈다

 

하늘에 걸린 무수한 별들 사이로

그들의 검은 손을 숨긴 채

우리는 하나의 매니큐어로 굳어간다

 

데칼코마니의 형상처럼

우리는 깊은 감정까지 옮았다

 

함께 맞잡은 손은 사실 감전의 위험이 있었고

결국 까맣게 타서 공중에 흩날리겠지

 

어딘가에서 뿌리를 내리며 살아갈 씨앗들

그 속엔 아직 잠재우지 못한 우리의 영혼이

고작 이 정도로는 끄떡없다는 지조의 결말이

활짝 날갯죽지를 편 채 박혀있었다

 

폐렴에 걸린 새가

기침하듯 날다 꼬꾸라진다

그것이 곧 우리의 형상인지 모른 채

묵묵히 발끝으로 구멍만 파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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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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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난 시계추들이 일제히,

그러나 제각각 움직이면

나는 너의 눈을 가리고 호흡을 가다듬는 일

 

기침으로 비누를 삼킨다

딸꾹, 딸꾹.

불안정한 입술로 거품을 속삭인다

나는 그렇게 아팠다

 

페인트로 얼룩진 마음을 칠할때면

소리없는 울음이 우산을 찾곤 했다

푸른 벽지로 감정을 포장해

당신에게 선물할께요

나는 얼굴이 없으므로

조용히 열던지 한겹씩 자르던지

알아서 하십시오

 

나지막한 손톱으로 울어주세요

반달의 흰 슬픔을 삼키고

차오르는 달보다 나는 더 울었다

 

흐려지는 직선의 경계를 본다

그 뒤로 넘실거리는 수평선을 본다

머리부터 천천히 잠기어.

뒤집힌 발끝이 둥둥 떠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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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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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조립한다

색을 잃은 너는 어딘가 고장났다

일렁이는 빛깔들은 점점

소멸점으로 곤두박질치는 중

무채색의 흐름의 굳고

그들은 결국 심해로 파고들었다

태양을 피해서,

그들은 더 깊이 잠기었다

 

도망치는 것이다

빨리, 더 빨리.

그들은 헐어버린 눈빛에 질식해

태초로 거슬러 가는 중

연어의 비늘을 눈동자에 욱여넣고

그렇게 다시 은빛으로 죽어가자

 

색이 없는 이의 설움이다

그들은 어젯밤

자신들을 푸르게 물들였다

 

푸르게 부푼 혈관들 사이로

심해어가 뻐끔거린다

눈은 어느새 방향감각을 상실해,

푸른 혈액은 채도가 높은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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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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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조금

익사할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늘상 무서워서

손목에 찍은 손톱 자국

초승달 닮은 모습이 꼭

아가미 같아 숨통이 트였습니다

 

나는 오롯이

당신으로 구축된 바다에서 살아갑니다

당신에게 푹 잠길때면

아가미 따위는 없어도 되는 것입니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더 키워

그리고 문드러진 나를 안아주세요

 

나는 유일하게

당신의 품에서만

등을 구부리지 않고 잘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 모습이 꼭 초승달 같다고,

당신이 그랬습니다

 

당신이 바다라면,

만약 당신이 바다라면

영원히 익사한대도 좋습니다

 

혹시 괜찮다면

당신의 밑바닥에라도 날 가둬주세요

나는 당신을 갉아먹는 물고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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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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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당신은 아름다웠습니다

 

눈물로 얼룩진 손을 감추며

언제나처럼 환하게 웃어주던 당신

 

세월이 갈수록

하나씩 늘어가던 당신의 주름처럼

나는 딱 그 정도만 슬퍼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차마 내뱉지 못했던

불멸의 언어들 속에 파뭍혀 울었던 나는

사실 지금도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오독함과 갖은 모순이 낳은 결과입니다

그 누구도 탓할수 없었던 나의 무능함에 절망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을 증오했습니다

 

나는 서서히 죽어갑니다

잔인한 혀끝에 눌려 죽어가고 있어요

 

영영 돌아오지 못할 이별을 그리며

외로운 가슴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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