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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크리스마스에 뭐 할거니?
작가 : 문지효 날짜 : 2008.06.03

 




글 / 문지효


PART 1.

크리스마스이브, 그녀의 이야기



 "크리스마스에 뭐 할 거야?"

 교문을 나서며 은순이 물었다. 크리스마스는 나흘 남아있었고 서울에 머무를 날은 일주일이 남았다. 엄마와 아빠는 한 달 전 이혼했다. 그래서 나는 고2 겨울방학이 시작되는 즈음 엄마를 따라 영국으로 갈 예정이다.

 "그냥 집에서 정리나 할 거야."

 "짐 정리 다 했다고 그러지 않았어? 옷도 다 싸버려서 입을 코트가 하나뿐이랬잖아?"

 은순은 정확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조사 하나, 동선 하나 빠뜨리지 않고 오래 기억하는 능력. 우리 반 아이들 중 하나는 은순의 이런 기억력이 못마땅해 저주받을 기억력이라며 퍼부어댄 적도 있다.

 "야 그러지 말고 스키장 가자."

 "니네 가족이랑?"

 "응."

 "고맙지만 사양할게."

 은순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건 나쁘지 않다.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인데도 은순의 가족과는 잘 지내왔고 또 그들은 모두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그들과 같이 크리스마스를 보내면 나는 각자의 길로 갈라선 엄마, 아빠가 생각날 것이고 그럼 또 울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섭섭해서 그래. 너 언제 한국 들어올지도 모르는데."

 "5년 후에는 돌아올 거야. 엄마하고 약속했어."

 "알았어."

 은순은 경쾌하게 박수를 두 번 쳤다. 무슨 일이든 결정이 났다 싶으면 은순은 습관처럼 '박수 두 번'이다. 영국에 가면 이런 은순의 습관까지 그리워져 마음이 아플지도 모르겠다. 익숙한 것들과 이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크리스마스에 눈 올 거래."

 "기상예보 안 믿잖아?"

 "레비에선 안 올 거랬는데 우리 삼촌은 올 거래."

 은순의 둘째 삼촌은 기상청에 근무한다. 잦은 지각과 불성실한 업무 태도로 상관에게 엄청나게 찍혀있는 기상청의 불량 예보관. 하지만 예감 하나는 타고났는지 기상관측 자료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상 예보를 척척 맞춰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물론 방송이나 신문에는 삼촌이 예감한 날씨 정보는 나갈 수가 없지만 말이다.

 "크리스마스에 눈 오면 좋을 텐데. 몇 년째 허탕이잖아."

 "또 내기 했어?"

 "응." 

 은순이 영화반 친구들과 내기를 할 정도면 그만큼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대한 확신이 있다는 얘기다. TV에서는 이번 크리스마스에 눈을 보기가 어렵겠다고 했지만.

 "눈 같은 거, 와도 좋고 안 와도 좋아. 그냥 크리스마스 같은 거 건너뛰어도 상관없어. 그냥 내일 아침에 눈떴을 때 일주일이 지나있었으면 좋겠어."

 "이봐요, 이봄님 학생, 나 지금 무지 섭섭해."

 나는 은순에게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미안해도 사실은 사실. 나는 크리스마스가 싫다. 지금껏 즐거웠던 기억이 별로 없다. 나에게 크리스마스는 엄마, 아빠와 화려한 레스토랑에서 비싼 식사를 하는 날일뿐이다. 애정도 다정함도 교감도 없는 크리스마스 저녁식사.

 "근데 너 이대로 가버릴 거야?"

 "무슨 말이야?"

 "너, 좋아하는 애 있다고 했잖아. 고백 같은 거 안 해? 하기야 니 성격에 고백씩이나 할 수 있겠냐만."

 유일한 단짝인 은순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 시즌이 싫은 또 한 가지 이유다. 내 폭풍 같은 마음. 2년째 그 애를 바라만 봐왔는데 이젠 그것마저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영국에 가면 더 이상 그 애를 볼 수 없고 내 짝사랑도 조용히 닫힐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마음속에서 쌩 하고 찬바람이 분다.

 은순과 헤어져 집으로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렀다. 고구마칩, 어니언링, 이온 음료를 노란색 바구니에 챙겨 넣고, 막 녹차 아이스크림을 집어 드는데 누군가 불쑥 다가서는 게 느껴졌다.

 돌아보니 커다란 키의 남자아이가 내려다보고 있다. 아버지가 멀티플렉스 극장을 몇 개나 소유하고 있다는 3반의 김지필이다. 나는 귀에서 이어폰을 떼어내며 조금씩 두근거리는 가슴을 정리하려 애쓴다. 그리고 천천히 구석에 있는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생각대로 거기엔 유인이 있었다. 송유인. 내 오래된 짝사랑의 대상. 그리고 부잣집 도련님들.

 "24일날 뭐해?"

 지필과 마지막으로 말을 한 게 언제였더라. 작년 같은 반이었을 때에도 별로 얘기다운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

 "그건 왜?"

 지필의 갑작스런 질문도, 도련님들의 시선도 모두 불편하다. 특히 무심한 듯 보이지만 왠지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유인 때문에 어쩔 줄을 모르겠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제발 얼굴이 담담해지기를 기도했다.

 "무슨 약속 있어? 그날?"

 "그냥 집에 있을 거야."

 "그럼 나랑 데이트 할래?"

지필이 눈웃음을 치며 살짝 웃는다. 여학생들을 숨넘어가게 만드는 지필의 눈웃음이지만 나는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의 눈웃음도, 데이트 제안도. 얼굴이 화끈거릴 뿐이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다시 유인의 시선이 눈에 들어온다.

 "농담하지 마."

 나는 겨우 말을 했다.

 "아, 데이트는 아닌가. 실은 그날 우리 집에서 애들 모여서 노는데 여자 애들도 오고 그럴 거거든. 거기 오라고."

 아, 크리스마스 파티. 지필의 집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파티가 굉장하다는 건 많이 들어서 알고 있다.

 "왜 나한테 오라 그러는 건데?"

 "너 사진반이지?"

 "응."

 "와서 사진 좀 찍어 주라. 작년에 잘 안 나와서 말이야. 근데 일단은 내 파트너로 와야 한다. 파트너 동반이거든."

 "누구누구 가는데?"

 내가 궁금한 건 유인이 거기 갈 거냐는 것.

 "저기 있는 놈들하고 몇 더 있어. 어때?"

 나는 덥석 오케이를 하고 싶지만 망설이는 척을 한다.

 "야, 같은 반도 했었는데 부탁 좀 들어 주라. 사진만 찍어주면 되고, 같이 재미있게 놀자는 건데 어려울 거 없잖아?"

 내 착각인지도 모르지만 지필의 어조는 꽤 절박하게 들렸다. 나는 검은색 단화로 몇 번 바닥을 비비다가 고개를 들었다. 

 "알았어."

 "야, 이봄님, 고맙다."

 지필이 내 어깨를 툭 치고는 환하게 웃으며 좋아한다.

 "이거 내 전화번호거든. 그날 전화해."

 지필은 내 핸드폰에 자신의 번호를 빠른 속도로 입력한 후 테이블로 돌아갔다. 지필의 과장된 표정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의심하지 않기로 한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유인을 가까이서 볼 기회가 생겼으니까.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고 편의점을 나서기 전에 슬쩍 돌아보니 지필과 준, 시명이 하이파이브를 하며 떠들어대고 있다. 하지만 유인은 친구들의 이야기에 관심도 없다는 듯 영화잡지를 읽고 있을 뿐이다.

 아파트로 향하는 동안 바람이 세게 불었지만 나는 어깨를 움츠리지 않았다. 두근대는 가슴이 뜨거워서 추운 줄도 모르겠다. 나는 웃고 있다. 요 몇 달을 통틀어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이렇게 가벼웠던 적이 없었다.

 어쩌면 이건, 비극적으로 한국을 떠나는 나를 위한 하늘의 마지막 선물일지도 모른다. 행복했다. 상상만으로도. 그리고 나흘 후에 있을 크리스마스이브의 추억만으로 오래도록 몇 배로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은순처럼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유인과 같은 버스를 탄 적이 있다. 유난히 사람이 많았던 버스였는데 내가 오르자마자 운전사 아저씨가 급하게 출발하는 바람에 나는 손잡이를 놓치고 몸의 중심을 잃었다. 바닥에 흉하게 쓰러질 뻔한 나를 누군가 뒤에서 잡아주었는데 그 아이가 바로 송유인이었다.

 그때의 두근거렸던 마음을 아직도 기억한다. 내 등에 닿았던 유인의 체온. 찰나의 순간에 찾아온 깊은 안도감.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있다는 고마운 느낌.

 얼굴이 빨개져 뒤를 돌아본 나는 시큰둥한 표정과 마주하게 되었다. 같은 교복을 입고 있어서 그 아이가 우리 학교 학생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 이후 학교에서 유인을 스칠 때마다 나는 가슴이 설레었다. 그렇게 조금씩 설레던 마음은 1년이 지나고 또 2년이 지나면서 어느새 간절한 짝사랑으로 커져 있었다.

 파티에 느지막이 나타난 유인은 혼자가 아니었다. 4반 옥진경. 유인과 사귄다는 소문이 도는 여자아이와 함께였다. 나는 나란히 앉아있는 그들을 보자마자 우울해져 버리고 말았다. 아무 의욕도 없이 기계적으로 아이들의 사진을 찍고 있는데 진경이 불쑥 뷰파인더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도 좀 찍어 줄래?" 하고는 진경은 나의 손을 잡아끌고 구석 소파로 데리고 갔다. 거기엔 느슨하게 몸을 기대고 앉아있는 유인이 있었다.

 "유인아, 우리도 사진 찍자."

 진경이 유인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싫어."

 "왜? 우리 같이 찍은 사진 없잖아?"

 "찍으려면 혼자 찍어."

 유인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다지 강경한 어조는 아니었다. 진경은 유인의 팔짱을 끼고 카메라를 보며 웃었다. 나는 천천히 카메라를 들어 뷰파인더 안에 담겨진 유인의 표정을 관찰했다. 진경의 환한 웃음과는 달리 무심하고 귀찮은 듯한 얼굴.

 학교에서도 늘 반쯤은 저런 표정인 아이다. 잘생긴 얼굴인데 눈에 힘을 주면 조금 무서워 보이기도 하고 오만해 보이기도 한다. 꼭 할 말만 하고 실없는 농담 같은 건 취미에 없다. 비스듬한 웃음은 보았지만 한 번도 크게 활짝 웃는 모습을 본 적은 없다. 

 결국 두 사람의 사진은 조금 흐릿하게 찍혀버렸다. 진경이 지분대는 게 마음이 아파 나는 테라스로 나가 난간에 몸을 기대고 어둑한 정원을 바라보았다. 어제 은순과 같이 산 니트 원피스만 입고 나와 조금 추웠다.

 "안 춥냐?"

 놀라 돌아보니 거짓말처럼 유인이 서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내게 건넨 말이었다. 무표정한 표정에 어울리는 무표정한 말투.

 "추워."

 "추우면 들어가. 안 그래도 지필이가 찾던데."

 유인은 담배를 물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는 유인이 신기해서 나도 모르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야 너, 왜 계속 쳐다보냐?"

 "도너츠 만들 줄 알아?"

 "뭐?"

 "담배로 이렇게 도너츠?"

 나는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그가 한심하다는 듯 쳐다본다.

 "촌스럽게 요즘 누가 그런 걸....... 야, 너 나 보지 마. 불편한 거 딱 질색이야."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춥다면서 안 들어가냐?"

 "이제 괜찮아졌어."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는 다급한 마음이 되었다. 유인과 나란히 서 있는 이 시간이 황홀하면서도 이렇게 마냥 보내버리는 건 왠지 나에게 다가온 행운을 낭비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충동적으로 카메라를 들어 그의 옆모습을 찍었다. 번쩍 플래시가 터졌다.

 "뭐야?"

 "사진 찍는 건데."

 "우리 말 몰라? 그거 싫다고 했잖아?"

 "미안해."

 유인의 시선이 다시 정원을 향했다. 담배연기가 피어났다 사라진다.

 "웃어 볼래?"

 나는 다시 용기를 냈다.

 "뭐?"

 "웃어... 보라고... 사진 찍게."

 "지필이가 너한테 찍으라고 시켰냐?"

 "어? 응."

 나는 거짓말을 했다.

 "난 안 웃어."

 "웃을 줄 몰라?"

 유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번만 크게 활짝 웃어보지. 그럼 좋을 텐데......."

 나는 중얼거렸다. 그는 나와 상대하지 않겠다는 듯 말없이 담배만 피웠다.

 "저기 내 이름 아니?"

 유인이 담배를 다 피우고 테라스를 빠져나가기 전, 내가 물었다. 그가 돌아보았다.

 "아니."

 그럴 줄은 알았지만 쓸쓸한 마음이 되었다.

 "난 이봄님이야."

 "그래서?"

 "내일 뭐 할 거야?"

 그가 우습다는 듯 삐딱하게 나를 보았다.

 "그냥 니들은 어떻게 노나 궁금해서"

 "알고 싶으면 지필이한테 물어봐."

 "크리스마스에 제일 갖고 싶은 건 뭐야?"

 그가 피식 비스듬히 웃었다. 그 반쪽자리 웃음이 너무 멋져서 나는 순간 행복해져버렸다.

 "왜 니가 사주게?"

 "그냥 궁금해서."

 "음......."

 그는 조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낯선 여자와의 하룻밤."

 유인은 다시 피식 웃어주며 사라졌고 나는 멍하게 그의 마지막 말을 되돌리며 서있었다. 혼자 남은 공간은 다시 찬바람이 감돌았고 유인의 진담 같은 농담에 나는 조금씩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


 나는 울고 싶었다.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것이 있다면 바로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파티에 초대된 아이들을 앞에 두고 혼자 무대의 한가운데 서 있다.

 8시가 넘어서자 지필이 아이들을 가라오케 시설이 있는 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이번 파티의 이벤트가 여자 파트너를 대상으로 노래 콘테스트를 하는 것이라며 여자아이들에게 노래 책을 쥐어주며 눈웃음을 날렸다.

 사진 찍는 명목으로 참석하긴 했지만 지필의 파트너로 온 나 역시 불행하게도 노래를 불러야 할 상황이었다. 만약 이런 상황이 펼쳐질 줄 알았다면 아무리 유인을 만날 수 있다 해도 절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소문난 음치니까.

 당장이라도 집에 가고 싶었지만 지필은 옆에 꼭 붙어 앉아 살살 녹이는 미소를 지으며 노래를 정하는 데 열심이다. 그렇게 결국 내 순서가 왔다. 후들후들 떨리는 건 다리뿐만이 아니었다. 가슴속에선 온갖 요동이 친다. 구석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있는 유인이 보였다.   

 "자, 다음은 이봄님 양의 노래가 되겠습니다."

 시명이 마이크를 쥐어주었다. 반주가 나오기 시작했고 지필이 옆에 서서 응원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찬바람이 불면 내가 떠난 줄 아세요. 스쳐가는 바람 뒤로 그리움만 남긴 채......."

 그나마 멜로디가 단순하고 고음이 없어서 부르기 쉽다고 생각하는 노래를 골랐다. 하지만 여지없이 네 소절이 지나기도 전에 여기저기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제멋대로 춤을 췄고 음정은 반주와는 상당 동떨어져 사경을 헤매고 있다.

 나는 절망적으로 마이크를 잡고 겨우 노래하며 유인을 슬쩍 보았다. 유인도 내 노래를 듣고 피식대며 웃고 있었다. 나는 조금씩 굳어지고 있었고 더 이상 노래를 할 수가 없었다.

 "잠깐만."

 나는 1절을 다 부르고 간주가 나오자 마이크를 지필에게 주고 황급히 방을 빠져 나왔다. 욕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당장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아직도 지필이 집이야?"

 왠지 다급한 것 같은 은순의 목소리였다.

 "응."

 "야, 너 빨리 거기 나와."

 "왜?"

 "그거 도그 파이트래!"

 "도그 파이트?"

 "단편 때문에 우리 서클 재인이하고 통화했는데....... 아참, 너 그 영화 모르지. ‘도그 파이트’라고 리버 피닉스 나온 영화 있어. 여자 데리고 내기하는......."

 순간 쿵하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알아. 그 영화."

 "알아?"

 "샌프란시스코의 하룻밤."

 나는 유령처럼 중얼거렸다.

 리버 피닉스와 친구들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하기 전날 샌프란시스코에서 파티를 연다. 그리고 '도그 파이트'라는 내기를 하는데 가장 못생긴 여자를 데리고 오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내가 그렇게 못생겼니?"

 "그건 너무 식상하니까 다른 걸로 내기를 했나봐. 제일 노래 못 부르는 애를 파트너로 데리고 간 사람이 이기는 걸로. 그러니까 지필이가 널......."

 눈물이 핑 돌았다.

 "봄님아, 거기서 지금 나와. 아직 노래 안 불렀지?"

 은순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내 노래를 들으며 웃던 유인의 얼굴만 떠올랐다. 절망적이고 비참했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울다가 빨갛게 부어있는 눈과 마주했다. 거울을 보며 눈두덩을 가만히 만져보았다. 울음을 쏟아내서 그런지 마음은 깊은 바다처럼 차분해졌다. 나는 깨끗한 타일 벽에 기대 고민했다. 이대로 집으로 가는 것과 상황을 역전시키는 것. 두 가지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이거 무효야, 걔 노래 다 안 불렀잖아......."

 욕실을 나와 가라오케 방으로 향하는데 방 앞에 서 있는 지필과 준이 보였다.

 "그래도 1절은 다 불렀잖아."

 그들의 대화를 들으니 갑자기 전투의지가 샘솟는다.

 "다시 부를게. 그럼 되지?"

 쿨하게 말하고는 그들을 스쳐 방으로 들어섰다. 무대에선 진경이 올라가지 않은 고음에 애를 먹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진경을 보면서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인이 진경을 데리고 온 건 다 내기 때문이었던 거다.

 진경의 노래가 끝나고 나는 자진해서 다시 앞으로 나갔다.

 "근데 여기서 이기면 뭐 주는 건데?"

 나는 부어오른 빨간 눈을 하고 태연하게 물었다.

 "뭐?"

 지필이 당황한 듯 되물었다.

 "콘테스트라며? 당연히 상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남자아이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유인은 달랐다. 착각인지도 모르지만 재미있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보고 있다.

 "어, 그렇지. 상이 있어야지."

 지필이 마지못해 인정했다.

 "아직 안 정했으면 내가 제안해도 돼?"

 "뭐 그러지......."

 지필과 남자아이들이 마지못해 동조했다.

 "1등 하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걸로 크리스마스 선물 주기, 어때?"

 내 말을 단순하게 이해한 아이들은 모두 찬성했고 나는 다시 노래를 불렀다. 이번엔 내 음치 실력이 완전히 드러나는 엄청나게 어려운 노래를 골랐다. 처음부터 키득키득 웃어대던 아이들은 결국 폭소하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도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노래를 끝마쳤다.

 결국 남자아이들의 투표로 나는 1등으로 뽑혔다. 지필은 기분이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이었고 여자아이들은 어째서 제일 노래를 못한 내가 1등이 되었는지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럼 이봄님 양이 원하는 선물이 뭔지 들어보겠습니다."

 "니들 중 한 사람이 내일 하루 내 노예가 되는 거."

 "뭐?"

 내 말이 아이들을 조금 놀라게 했나보았다. 아이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우리들 중 누구?"

 지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송유인."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있던 유인이 약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눈을 삐딱하게 치켜뜬다.

 "웃기네."

 그렇게 말하곤 유인은 나가 버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나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웃겨도 할 수 없어. 약속이니까."

 다시 시작된 파티를 뒤로하고 나는 가방을 챙겨들었다.

 "그러지 말고. 내가 니 노예 해줄게. 나 그런 거 엄청 잘해."

 지필이 내 앞을 막아서며 사정했다.

 "너 소질 있는 거 아는데, 미안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송유인이야."

 "야, 넌 오늘 내 파트너잖아. 그러니까......."

 "니들이 시작한 거고 약속했어. 변명하는 거 좀 그렇다. 안 멋있어."

 "저기... 봄님아."

 "초대해 줘서 고마워. 내일 3시, 유인이한테 잊지 말라고 해."

 나는 쿨한 뒷모습을 보여주고는 지필의 집을 나섰다.



PART 2.

크리스마스, 그의 이야기


 이봄님이라고 했다.

 지필에 의하면 6반에서 가장 수학을 잘하는 아이였고 또 제일 노래를 못하는 아이였다. 

 "나올 줄 몰랐어."

 봄님이 담담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두꺼운 갈색 안경, 겨자색 더플코트를 걸친 봄님은 어제완 조금 달라 보였다. 어제는 잔뜩 얼어있었는데 오늘은 여유로운 분위기가 풍겼다.

 "안 나가면 지필이가 죽인대서."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 우리들은 이번 크리스마스 파티에 뭔가 특별한 놀이가 없을까 고심했다. 고민 끝에 도그 파이트를 생각해낸 건 지필이었고 준과 시명도 좋은 아이디어라면서 호응을 했다. 뭐,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녀석들의 흥을 깨고 싶지 않아 응해주었다.

 하지만 하루 동안의 노예 노릇은 계획에 없던 일이다. 그냥 집에서 늦잠이나 자며 빈둥댈 생각이었는데 지필이 나가달라고 통사정했고 또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평소의 신조 때문에 광화문으로 봄님을 만나러 나선 것이다.

 "니 노예로서 오늘 뭐 하면 되냐?"

 "일단 영화 보자."

 봄님은 성큼성큼 걸으며 앞서갔고 나는 좀 귀찮은 마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였다. 코미디로 시작했다가 결국 멜로로 끝나는 상투적인 사랑 영화.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는데 간간이 들려오는 봄님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어제 서툴게 부르던 그녀의 노래가 생각나 나도 모르게 쿡 하고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내 웃음소리에 봄님이 나를 돌아보았고 우리는 어두운 극장 안에서 잠시 눈이 마주쳤다. 처음 느끼는 이상한 기분.

 마지막으로 갈수록 영화는 눈물을 쥐어짜고 있었고 다른 여자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봄님도 훌쩍거렸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 안에 불이 켜지자 빨갛게 젖은 눈을 한 봄님이 보였다. 다시 조금 이상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옆에 앉은 누군가 때문에 영화에 집중이 안 된 적은 처음이었다.

 극장을 나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있을 때 내가 물었다.

 "왜 나야?"

 봄님이 나를 말갛게 쳐다본다. 그런 시선이 익숙하지 않았다. 속까지 들여다보는 것 같은 깊은 눈.

 "크리스마스에 한 번도 남자친구와 지내본 적이 없어. 이번 크리스마스는 재미있게 보내고 싶었어, 남자랑."

 "그럼 나 말고 아무 남자나 되는 거 아니었냐?"

 "제일 잘생긴 남자하고 보내고 싶었거든."

 뻔뻔하게 말하고는 봄님은 나를 빤히 바라봤고 나는 당황해 헛기침을 했다. 여학생들한테 멋있다는 칭찬을 꽤나 들어보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아이처럼 당돌하게 내 눈을 쳐다보며 말하지는 못했다.

 "웃어봐."

 "뭐?"

 갑자기 봄님은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왜 또 이러냐? 잘 나가다가."

 나는 인상을 썼다. 사진 찍히는 건 질색이다. 거기다 웃어보라니.

 "잊었어? 너 오늘 내 노예야. 웃어, 빨리. 크게, 활짝."

 어이없게도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말에 따라야 했다. 조금 웃어 보았다.

 "더 크게."

 "야!"

 "왜 크게는 안 웃는데?"

 "나 웃으면 보조개 나온단 말야."

 "그게 뭐?"

 "팔려. 남자가 보조개가 뭐냐고."

 내 말에 그녀가 쿡 하고 웃었다. 에이, 다 실토해 버렸다. 오래 전 나는 웃는 얼굴 때문에 계집애 같다고 놀림을 받은 적이 있다. 어렸지만 충격이 꽤 컸다. 귀여운 소년보다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시절이었다. 그 이후론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땐 좀처럼 웃음을 자제하고 있었다.

 "좋아. 봐줬다."

 봄님은 대충 내 사진을 찍더니 카메라를 다시 가방 속에 넣었다.

 "내 이름 외웠어?"

 그녀가 물었다.

 "그렇게 특이한 이름을 안 외우고 배기냐."

 "난 내 이름 마음에 안 들어."

 "왜?"

 "가끔 나쁜 짓도 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 착하게 사는 아이라고 도장 꽝 찍히는 이름이잖아."

 "그런 면이 없지는 않겠다. 그게 싫어?"

 "싫다기보단 심각한 이율배반을 느껴. 내 이름 이렇게 지었으면 지어준 사람들도 봄이어야 하는 거잖아."

 부모들이 무슨 문제가 있나? 약간 쓸쓸해 보이는 어조에 나는 조금 신경이 쓰인다.

 "난 니 이름, 꼭 너랑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무슨... 뜻이야?"

 "니 얼굴, 좋게 말하면 봄처럼 피어나고 나쁘게 말하면 달덩이."

 "지금 얼굴 크단 말 돌려서 하는 거야? 하얘서 그렇게 보이는 거지 나 얼굴 안 커."

 흥분하는 봄님을 보고 나는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꾸 왜 웃음이 나는지 모르겠다. 

 "어, 그럼 다음 질문, 야구가 좋아? 축구가 좋아? 농구가 좋아?"

 "너 지금 인터뷰 하냐?"

 "말하기 싫어?"

 "아니 뭐 싫을 것까진 없고... 좋다, 노예니까. 셋 다 좋아해."

 "다음 질문, 너 진경이랑 사귀는 거야?"

 이 질문을 기점으로 나는 어떤 확신을 얻었다. 앞에 앉아있는 종잡을 수 없는 아이는 어쩌면.......

 "너, 나한테 관심 있냐? 그래서 오늘 나 노예 만든 거냐?"

 질문을 하고 있는 동안 약간 기분이 들뜬다.

 "아니."

 담담하게 대답하는 봄님을 보니 다시 할 말이 없어졌다. 나는 포크를 들고 음식으로 관심을 돌렸다.

 봄님은 저녁을 먹으며 쉴 새 없이 질문을 하며 재잘거렸다. 그리고 웃었다. 정말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지필은 그녀가 말이 없고 조용하며 있는 듯 마는 듯 존재감이 없는 아이라고 했다. 하지만 앞에 앉은 봄님은 전혀 수줍은 아이가 아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자꾸 나는 그녀의 말을 따라가며 조금씩 크게 웃어대고 있었다.

레스토랑을 나오니 7시가 다 되었다. 이제 오늘의 코스는 끝이겠거니 했는데.......

 "서점 가자."

 봄님은 나를 북적거리는 대형서점으로 끌고 들어갔다. 서점이란 곳에 여자와 함께 온 것도 처음이었다.

 "특별히 좋아하는 장르 있어?"

 그녀가 물었다. 여전히 질문은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말이지. 이제 겨우 열여덟이거든. 그래서 아직은 특별히 좋아하는 거 키우고 싶지 않아."

 그랬다. 아직은 특별히 좋아하는 무엇도, 특별한 누군가도, 선 그어 정해 놓고 좋아하거나 집중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구나. 그럼 나도 그래 볼까......."

 그녀가 고개까지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근데 말이야. 그거 맘대로 돼?"

 "뭐가?"

 "좋고 싫고. 그거 니 맘대로 되니?"

 "내 맘대로 안 되면?"

 "진짜 좋아하는 게 아니어서 그럴 거야. 진짜 좋아하면 생각만으론 안 되는 거거든."

 봄님이 스치듯 말하고 다시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진부한 얘기였지만 봄님이 말하자 그 말의 무게가 달라진다. 정말 이상한 아이다. 



***



 그녀의 집은 지필의 집과 같은 동네에 위치한 평범한 양옥집이었다. 하얀 색 낮은 대문 앞에 서서 봄님이 미소를 지었다.

 "오늘 고마웠어."

 "나도 너 때문에 오늘 특이한 경험했다."

 "무슨?"

 "하루 종일 누구 꽁무니 쫓아다니는 거 처음이거든."

 그녀가 다시 웃었다.

 "아아... 눈 안 올 건가 보네."

 "안 온다 그러던데."

 "오늘 눈 오면 굉장한 계획이 하나 있었는데......."

 "무슨 계획?"

 "그런 거 있어. 넌 이제 노예 끝났으니까 낯선 여자와 하룻밤 보내러 갈 거야?"

 "뭐?"

 "어제 그랬잖아?"

 "나 참. 니가 오늘 이렇게 노예로 부려먹었는데 언제 그 준비까지 하냐?"

 "그랬다면 미안."

 그녀가 조금 더 크게 웃었다.

 "저기 미안하다. 어제."

 왜 갑자기 내 입에서 사과의 말이 튀어나왔는지 잘 모르겠다.

 "어제?"

 "응."

 어제 노래를 부르던 봄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퉁퉁 부어오른 빨간 얼굴이.

 "근데 담엔 울지 마라. 너 우니까 영 아니더라."

 "넌 울고 싶을 만큼 속상할 때 어떻게 하는데?"

 "또 질문 시작이냐?"

 "응"

 "달리지. 숨이 차 가슴이 터질 때까지 달리다 보면 생각이 조금 옅어지거든. 간다. 학교에서 보자."

 "잠깐만."

 "왜 또?"

 "줄 거 있어. 잠깐만 기다려."

 봄님은 집안으로 들어갔고 금방 빨간 선물 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상자를 내밀었다.

 "뭐냐 이거?"

 "이거 옛날에 사둔 건데......."

 "나 주려고?"

 "아니. 오늘 같이 놀아주는 남자한테 주려고. 그러니까 너한테 주는 거야."

 내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손을 휘저으며 그녀가 말했다.

 "비싼 거 아냐. 그냥 목도리."

 "좋아. 그럼 부담 없이 받지 뭐."

 나는 상자를 풀었다. 선물 상자는 그 자리에서 푸는 게 예의라니까. 상자 안에는 털로 뜬 회색 목도리가 들어있었다. 봄님이 성큼 가까이 다가왔고 바짝 다가선 그녀에게서 좋은 향이 맡아졌다. 그녀는 내 목에 목도리를 감아주었다.

 "너 우냐?"

 봄님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 같아 내가 물었다.

 "아니. 아, 눈에 뭐가 들어갔나보다."

 봄님은 눈가를 쓰윽 문질러 눈물을 몰아냈다.

 "뭐 하나 부탁해도 돼?"

 "뭐?"

 "나 안 해본 거 하나 있는데 그거 해줄래?"

 "뭔데?"

 "키스."

 "뭐?"

 나는 조금 놀랐다. 아니 많이 놀랐다. 갑자기 키스라니.

 "아니다. 안 하는 게 좋겠어."

 봄님이 곧 취소해 버리자 갑자기 입 맞추고 싶어졌다. 어느새 그녀의 입술을 빤히 바라보게 된다.

 "해달라며?"

 "아니야. 안녕."

 그녀가 돌아섰다. 봄님의 뒷모습을 보는데 왜 이리 아쉬운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유인아."

 조금 걷는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봄님이 뛰어오고 있었다.

 "포옹하자. 키스보다는 그게 낫겠다. 오늘 하루 우리 친구였으니까."

 간절한 눈이었다. 나는 그 시선에 눌려 아무 말도 못하고 어색하게 그녀를 안았다.

 "안녕."

 그녀가 내 귓가에 그렇게 말하고 다시 집으로 뛰어갔다. 잠깐 멍하니 자리에 서 있던 나는 잠시 후에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가면서 오늘 하루를 정리해 보았다. 그녀는 계속 떠들었고 웃었고 행복해 보였다. 나 역시 생각했던 것보다는 괜찮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허전한 걸까.

 뭔가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그렇게 걷는데 마술처럼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


 크리스마스 이후 나는 가끔 그 애가 생각났다. 활짝 웃던 그 얼굴이, 짐짓 진지하게 여러 가지를 묻던 그녀의 목소리가....... 그리고 솔직히 말해 그 애가 보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내심 학교에서 그녀를 다시 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봄님이 한국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충격은 꽤 강해서 오랫동안 나는 멍해있는 상태였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며칠 후에 떠났다는데, 그날 왜 그 얘기를 하지 않았는지 봄님의 마음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화가 났고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며칠 후 나에게 작은 액자 하나가 배달되었다. 작게 보조개가 팬 내 웃는 얼굴이 흑백 사진 속에 찍혀 있었다.

 단 하루였는데 봄님과의 시간들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가끔 극장에 들어설 때나 서점에 갈 때 문득 문득 그녀가 생각났다.

 하지만 세월은 모든 것을 이기는 법.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고 다른 여자들을 만나면서 봄님은 점점 옛 추억으로 잊혀졌다.




PART 3.

다시 크리스마스이브, 그와 그녀의 이야기.



 10년 후 겨울, 뉴욕.

 유인은 지루했다. 크리스마스이브만 되면 파티를 여는 지필은 미국에 와서도 그 짓을 계속하고 있었고 여전히 조용히 휴가를 보낼 줄을 몰랐다. 지필에게 끌려나온 유인은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 혼자만 섬처럼 떠있었다.

 "재미없냐?"

 "재미없어서 돌아가시겠다."

 "곧 재미있어질걸. 아, 저기 왔다."

 유인은 지필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늘씬한 여자가 검정색 롱코트를 벗고 있었다. 실루엣이 아름다운 여자가 지필을 향해 활짝 웃었을 때 유인은 그녀가 누군지 깨달았다. 이봄님, 그 아이, 아니 그녀였다.

 "오랜만이다."

 지필의 손에 의해 거의 끌려오다시피 한 그녀가 유인의 앞에 서서 악수를 청했다. 연보라색 원피스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10년이 지났는데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와 메이크업이 성숙한 여자로 보이게 했지만 10년 전 얼굴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놀랐지? 며칠 전에 만났어. 그래서 내가 파티에 초대했지."

 지필이 껄껄 웃으며 말하고는 두 사람을 남겨두고 사라졌다. 유인과 봄님은 어색하게 창가에 서 있었다.

 "여기 사니?"

 유인이 그녀에게 물었다.

 "뉴욕 온 지 한 달쯤 됐어."

 "뭐 하는데?"

 "광고 일. 넌 아직 학생이라며?"

 "응. 뭐 마실래?"

 "커피."

 "아직도 커피 귀신이냐?"

 유인이 피식 웃으며 주방으로 사라졌다.

 나 커피 귀신이야....... 10년 전 그 날 봄님은 유인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 봄님은 다 잊었다 생각했는데 조금씩 가슴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사실 파티에 오기 전부터 약간은 들뜬 기분이었다. 미국에서 유인이 유학중이라는 건 은순을 통해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런던에서 뉴욕으로 온 지 한 달 만에 우연히 지필을 만나게 되고 10년 전 크리스마스처럼 파티에 초대되고 또 유인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자, 커피.”

 커피를 건네는 유인은 근사해 보였다. 헤어스타일은 조금 길어졌고 강렬하면서도 나른한 눈빛은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너 보는 거 왠지 현실 같지가 않다."

 유인이 솔직하게 말했다. 봄님과 그렇게 헤어지고 많은 날들을 그녀를 떠올리며 보냈다. 물론 옛날 일이지만. 

 "어?"

 그녀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눈을 반짝 빛냈다.

 "아직도 노래 못하냐?"

 "응."

 그녀가 수줍게 웃었다.

 "그러는 넌 아직도 안 웃니?"

 "응."

 파티가 계속되었고 지필은 봄님을 끌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인사시키느라 바빴다. 유인은 그런 그녀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느 순간 눈빛이 마주치면 유인은 일부러 그녀를 피하며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척을 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유인은 갑자기 닥쳐온 이 마음이 너무 이질적이고 급박해서 조금 두려운 기분까지 들었다. 그래서 파티 내내 일부러 그녀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다급한 마음에 이리저리 허둥대며 봄님을 찾다가 코트를 입고 아파트를 빠져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이봄님, 가는 거야?"

 봄님이 지필의 집에서 나와 눈 쌓인 거리를 걷고 있는데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돌아보니 유인이었다.

 "응. 너무 늦은 것 같아서."

 "늦은 줄은 아는데, 나하고 커피 한 잔 안 할래?"

 그녀가 시계를 보더니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하자. 커피."


***


 자정이 가까워지는 크리스마스이브, 그들은 24시간 영업하는 한적한 커피 하우스에 마주 앉았다.

 "결혼, 했니?"

 유인이 물었다.

 "아니."

 "나한테는 안 물어 보냐?"

 "넌 안 했잖아."

 "어떻게 알았어?"

 "은순이한테 가끔 동창 얘기 듣거든. 은순이라고 알지? 지필이하고 같은 영화반. 지필이하고 꽤 친하잖아."

 "알아. 그럼 만나는 사람 있어?"

 유인이 거침없이 질문을 시작했다. 10년 전 그날 봄님이 그랬던 것처럼. 사실 오늘 그녀를 일부러 피하면서도 가장 알고 싶었던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있었어. 근데 뉴욕 오기 몇 달 전에 그만뒀어."

 "왜? 아니다. 이런 거 물으면 안 되나?"

 "괜찮아. 그 사람은 멋있고 꽤 좋은 사람이었는데 문제는 나였어.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은 시간이 지나도 모두 다 내 맘대로 조정이 가능한 종류더라구. 그래서 헤어지기로 맘먹었어. 이러다간 평생 적당히 속도조절이나 하고 브레이크나 잡으면서 나도 그 사람도 속이며 살겠구나 싶어서."

 그녀는 솔직하게 대답했고 유인은 변하지 않은 그녀가 반가웠다.

 "넌? 이젠 열여덟 살이 아니니까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 생겼겠네."

 그가 피식 웃었다.

 "그걸 여태 기억하고 있냐? 그거 다 설정이야."

 "맞아. 너 그때 엄청 폼 잡는 거 좋아했었어."

 "그게 먹히는 나이였으니까."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의 뺨에 선명하게 보조개가 잡혔다.

 "누가 옆에 있었으면 이런 날 지필이하고 놀고 있지 않지."

 "근사한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고 있겠지."

 "야, 너!"

 "니가 한 말이야."

 "그런 건 좀 잊어라.”

 그녀는 유인이 그날 했던 말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집에 들어가 열장이 넘는 일기로 남겨두었으니까.

 "유인아, 또 웃어봐."

 눈을 빛내며 말하는 그녀를 보니 유인은 갑자기 10년 전 그날이 떠올랐다.

 "그날 왜 영국 간다고 말 안 했냐?"

 "중요한 거 아니었으니까."

 "넌 그랬는지 모르지만 난 뒤통수 맞은 느낌이었어."

 "그랬어?"

 봄님이 커피를 마시며 조심스레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가슴이 설렌다.

 "나는 그날이 자주 생각났어."

 유인이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그랬어. 그날은 특별했거든."

 봄님도 그를 깊게 보며 말을 이었다.

 "<원더풀 라이프>라는 영화에서 그러잖아? 천국으로 가기 전에 세상에서 가져갈 단 한 개의 기억을 골라보라고. 그거 보면서 생각했었어. 나라면 그날을 선택할 거라고."

 그녀의 담담한 말에 유인은 어떤 확신이 들었다. 궁금했던 그녀의 마음이 조금씩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연락 한번 없었냐?"

 "그냥 그렇게 되더라구. 지금만큼만 어른이었어도 런던에서 대학 들어갔을 때 은순이 통해서라도 너한테 연락했을 거야. 한 번쯤 쿨하게 말이야. 근데 그땐 생각도 작고 마음은 더 작았어."

 "너 그날은 대범했잖아? 날 놀라게 할 정도로."

 "그날 난 1년 동안 쓸 용기를 다 써버렸거든."

 봄님은 미소를 지으며 조근조근 얘기를 해나갔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유인은 가슴이 뜨거워졌고 그녀가 싱글인 채로 다시 이렇게 거짓말처럼 그 앞에 나타난 것이 고마웠다.

 "솔직히 불어. 너 나 좋아했었지?"

 유인이 말했다.

 "응. 좋아했어."

 그녀가 순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어떻게 알았어?"

 "다년간의 경험으로 알아차렸지."

 유인이 씩 웃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은 달랐다. 유인은 그녀의 마음이 궁금해서 오래 뒤척이는 밤을 보냈었다.

 "사실은 니가 보낸 내 사진 보고 어쩌면 하고 생각했지."

 봄님은 오래 유인을 쳐다보았다. 어쩌면 그의 마음도 지금 그녀와 같이 두근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 온다."

 유인이 말하자 그녀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와....... 정말 눈이네."

 아기처럼 좋아하는 봄님의 얼굴이 너무 예뻐서 유인은 갑자기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었다.

 "눈 오니까 고백이나 해볼까......."

 봄님이 자신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고백?"

 "실은 너 여기 있는 거 알고 있었어. 은순이가 말해줬었어. 너 뉴욕 있다고. 그래서 한국 들어갈까 하다가 여기 온 거야."

 유인은 잠깐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나 너 좋아했었어. 아주 오래오래....... 그래서 널 다시 만나서 어쩌면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몰라. 10년 전 그날도 곧 영국으로 떠날 거라서 눈이나 내린다면 한번 고백을 해볼까 했는데 결국 눈이 안 왔었어."

 "그날 눈 왔어."

 "알아. 우리가 헤어진 다음이었지."

 "그런 줄 알았으면 인공 눈이라도 뿌릴걸. 나 그날 키스하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다."

 그녀가 살며시 웃는다.

 "지금은?"

 "지금은 돌아가실 지경이고."

 유인의 말에 그녀가 다시 활짝 웃는데 그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그녀에게 입 맞췄다. 커피 맛과 와인 맛이 섞인 그들의 첫 키스였다.

 "아까 나 뭐 하러 나온 건 줄 알아?"

 "아니."

 "런닝머신 위에서 달리러 가는 중이었어. 갑자기 울고 싶어지잖아. 니가 이렇게 가까이 같은 공간에 있는데도 닿을 수가 없어서."

 "미안해. 나는 널 10년 만에 만났는데 갑자기 너무 빨리 니가 좋아져서 좀 두려웠다. 아까."

 "이제 우리 어떻게 할까?”

 "다음 크리스마스에 뭐 할 거야? 그날 나하고 데이트나 하자."

 "그리고?"

 "그날이 올 때까지 일 년 동안은 매일 데이트 연습하고."

 유인의 말에 봄님이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뺨에도 깊게 보조개가 패었다.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곧 마주앉은 그들의 두 번째 크리스마스가 시작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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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문지효


소설가


대학을 졸업하고 지난 몇 년 간 방송 구성작가와 잡지기자로 일했다.

글로 상을 받은 기억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동시가 도내 백일장에서 입상한 경험이 유일무이한데 우연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2003년 첫 소설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2003년 겨울에 『뉴스룸과 주말연속극』을 출간했고,

2006년에 『실연 세탁소』를 내놓았다.

 

<작품후기>

 

"돌이켜보면 짝사랑으로 불타올랐던 인생의 황금기는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아요.

어느 날, 씩씩했던 짝사랑이 전부였던 한 시절을 회상했어요.

그리고 복작복작 써내려갔지요.

이 글을 쓰면서 가슴은 두근두근 뛰었고 추억은 몽글몽글 귀여워졌습니다.

여러분의 짝사랑은 안녕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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