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전화

여섯 시 삼십 분, 계절 탓인지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았다. 숨이 헐떡이며 목구멍을 막았다. 들썩이는 어깨가 간신히 진정될 때 쯤에서야 입가에 작은 미소가 스쳤다. 이 정도면 낮이라 우길 수 있겠지. 숨을 고르고 부스 안으로 들어간다. 사용하지 않은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받침대에 먼지가 한가득 쌓여 있다. 주머니를 뒤적여 동전 하나를 찾아 넣는다. 반대편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하게 접힌 메모지를 꺼내 핀다. 미처 외우지 못한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그 밑에 작게 써 있는 이름 세 글자를 보니 괜히 심장이 쿵쿵거린다. 숫자를 하나 누르고 메모지를 보고, 다시 숫자 하나를 누르고 메모지를 보는 행동을 몇 번 반복하다 마침내 열한 개의 숫자를 다 누르니 곧바로 수신 연결음이 들린다. 천천히 눈을 감는다.

그 애와 나는 친했다 회상하기엔 애매한 사이. 같은 학년이니 이름과 얼굴 정도만 아는 사이었는데, 초등학교 6학년이 되고 처음으로 같은 반으로 만나 우연히 짝이 되었다. 다른 사람에게 그닥 관심 없어 보이는 그 애와 달리 어색한 공기를 못 견뎌하는 내가 일부러 과장되게 말을 걸었었지. 그 애가 처음엔 조금 낯설어하나 싶더니 어느덧 적응이 됐는지 중간중간 고개도 끄덕여주고 먼저 말을 걸어 오기도 했다. 내 말 때문에 그 애 입가에 피어난 웃음을 보았을 때는 괜시리 뿌듯했다. 그런 일이 다르지 않게 반복되던 중, 학원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혼자 아파트 단지 놀이터 그네에 앉아 있는 그 애를 본 어느 날이었다. 거리의 가로등이 하나 둘 켜져가는 어둑어둑한 저녁이었다. 학원 다녀오는 길인가, 생각했지만 가방이 없는 걸로 보아 그러진 않은 듯했다.

" 야, 거기서 혼자 뭐 해? "
" 그네 타는데. "
" 그걸 몰라서 물어본 건 아니고…이 시간에 놀러 나온 거냐? "
" 그냥, 심심해서. "
" 심심할 것도 많다. "

자연스럽게 그 애의 옆 그네에 앉아 대화했던 시간. 짧았지만 우린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곧 학예회인데 긴장되지 않느냐, 나는 단소 소리가 안 나서 미치겠다는 식의 쓸데없는 일상 이야기. 잠자코 듣기만 하던 그 애가 입을 열었다. 집안 이야기였다. 어쩌다 갑자기 그 얘기가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 애의 집안 사정을 대충 알게 되었다. 아빠가 걸핏하면 술을 마시고 들어와서 엄마에게 화를 내고 집안 물건을 깬다는, 그닥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

" 그래서 나와 있는 거야 지금. 아빠 보기 싫어서… "

평소에 말도 없던 애가 왜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할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혼자 말할 데도 없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 아무 대꾸 없이 이야기를 들었다. 하늘이 보랏빛에서 검은 빛으로 물들고, 삐그덕거리는 낡은 그네 소리가 정겨워질 때 쯤 우리는 헤어졌다. 내일 보자, 형식적인 인삿말과 함께. 우리의 대화처럼 자연스러운 헤어짐. 집에 돌아오고 나서 그 애와 있었던 일을 친구들에게 전했다. 그냥 조용한 애인 줄 알았더니 이런 사정이 있었더라 하며, 정말이지 철없던 나는 그게 그 애에게 어떤 상처를 주는지도 모르고. 다음 날 학교 아이들은 모두 그 애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고 나는 더 이상 그 애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그 뒤로 졸업할 때까지 그 애와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차라리 따로 불러 화를 내거나 엉엉 울거나 씩씩거리며 내게 주먹을 한 방 날렸더라면 그렇게까지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 애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고 아무런 반응도 없었으며 이제 나에게 아무런 말도 걸지 않았다. 가끔가다 보이던 웃음도 볼 수 없었고 짝 바꾸는 날이 돌아왔으며 짝이 아니니 더 이상 엮일 일도 없었다. 마음에 생긴 응어리가 컸으나, 그 애는 나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 역시 서서히 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말 그렇게 했다. 시간은 허무하게 흘러 졸업도 다가왔다. 그 애와 나는 다른 중학교에 배정받았다. 졸업식 전날 마지막으로 쓴 롤링 페이퍼에도 그 애는 잘 지내라는 한 마디만 남겼다. 나 역시 그랬다.
허나 내 착각이었다.
아이들이 쓰지 않은 롤링 페이퍼 뒷면에 작은 글씨가 써 있었다. 졸업식까지 끝난 후에야 발견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애의 글씨체. 어딘가 삐뚤빼뚤하지만 나름 귀여운. 그 글씨체를 보자마자 깨달았다. 잊었다 생각한 응어리가 사실 잊히지 않았음을.

' 살갑게 말 걸어 줘서 고마웠어. 처음으로 나한테 친구가 생겼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생각하게 해 줘서 고맙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지금은 별로 하고 싶지도 않고 내가 말을 잘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서 그냥 연락처 남길게. 심심할 때 한 번 전화나 해 주면 고맙겠다. 웬만하면 낮에 해 줘. 저녁에는 아빠가 있어서 받기 힘들거든. 진짜 안녕. '

그것을 본 뒤로 삼 년, 나는 한 번도 그 애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어제, 학원 가는 길 건너편 인도에서 그 애를 우연히 보았다. 그때와 다름없이 구부정한 어깨와 초점 없는 눈, 길지도 짧지도 않은 단발머리에 키만 조금 컸구나. 단번에 그 애임을 알아차렸으나 나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학원에 도착하고 나는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그 애와 같은 중학교에 진학한 친구에게 그 애를 봤노라 말했다. 친구의 표정에서 읽힌 약간의 당혹감. 이어져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 걔 요즘 학교 안 나오잖아. 뭔 일 있나 했는데, 전학 간다고 하더라고. 집에 문제가 좀 생겼나 봐. 차압 딱지가 잔뜩 붙었다던데, 연락도 안 된대. 애초에 걔 번호 아는 사람도 없고. "

그 말을 듣고 나는 수업을 내팽개치고 집으로 뛰었다.

뛰다가 문득 생각해 보니 시간이 늦었다. 저녁이었다. 그 애에게 연락할 수 없는 시간. 기필코 내일은 학교가 끝나자마자 연락하리라 마음 먹었음에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왜 하필 학급 단체 청소는 오늘일까. 어젯밤 롤링 페이퍼를 옮겨 적은 메모지를 수없이 만지작대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학교 밑 공중전화로 향했다. 휴대폰으로 전화를 거는 일은 어쩐지 망설여졌다. 그 애가 나와 인연을 이어갈 생각이 있는지도 모르는데다 무엇보다 잘못해서 그 애의 가족 일에 휩싸이게 된다면, 상상하기 싫었다. 어쨌든 아직 해는 떠 있으니 낮일 것이다. 그러니 그 애는 전화를 받을 테고. 전화를 받으면 무슨 말이든 하겠지. 그때 왜 그랬냐고, 나는 이사를 간다고. 정체 모를 불안감이 어서 없어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초조하게 연결음이 끊기길 기다린다. 허나 수신 연결음은 도통 끊기질 않는다. 지금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주세요. 지금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주세요. 지금 고객님이… 똑같은 여자의 말을 세 번 더 듣고 나서야 남은 동전이 없음을 깨닫고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뭔진 모르겠으나 무언가를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그 무언가가 도무지 뭔지 모르겠는 허한 느낌이 나를 가득 채웠다. 벌써 이사를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제 바로 이 동네에서 그 애를 봤기 때문이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어쩌면 야반도주를 했을지도 모르고. 오늘 아침에 떠났을 수도 있겠다. 어쩌면 평생 그 애는 전화를 받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공중전화 번호라 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 휴대폰으로 하면 받을지도. 멍청하게 주머니를 더듬거려 휴대폰을 꺼냈다. 여섯 시 사십오 분, 액정에 비친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덧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저녁이다. 더 이상 전화할 수 없다. 이제는 낮이건 저녁이건 전화하지 못할 것이다. 애초에 나는 왜 그 애에게 연락하려 한 거지, 이제 와서? 용서를 구하고 싶어서? 미처 말하지 못했다던 말을 듣고 싶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걸 이제 와서야? 끝까지 이기적인 내 태도에 헛웃음이 났다. 나는 그 애가 보고 싶었나. 거짓말 하지 마, 그렇다면 학교를 빠져서라도 전화했겠지. 그깟 청소 빠지면 어떻다고. 모두 핑계다. 어떻게든 저녁이 되길 기다린 것이다, 나는. 그 애에게 연락했으나 다시 닿을 수 없던 이유가 내가 아닌 그 애 때문이라고.

천천히 부스를 빠져나왔다. 거리의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질 정도로 어둑어둑한, 빼도 박도 못할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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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이 헐떡이며 목구멍을 막았다." – "숨이 찼다." : 쓰신 문장의 주어는 '숨'입니다. '숨'은 찰 수는 있지만 '목구멍'을 막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숨이 자기 마음대로 목구멍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지요. 이런 건 잘 쓰고자 하는 욕심에서 비롯된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문장을 어깨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간 문장이라고 부릅니다. 편하고 자연스러운 게 가장 좋은 문장입니다. * "가끔가다 보이던 웃음도 볼 수 없었고 짝 바꾸는 날이 돌아왔으며 짝이 아니니 더 이상 엮일 일도 없었다." – "가끔가다 보이던 웃음도 볼 수 없는 채로 짝을 바꾸는 날이 돌아왔지만 그애와는 짝이 되지 못했다. 더 이상 엮일 일이 없어진 셈이었다." * 잘 읽었습니다. 시간의 변화에 따라… 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