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속의 슬픔, 일상 밑의 비일상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중 '어느 늦은 저녁 나는'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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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연작 중편소설 ‘채식주의자’는 여러 가지로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극단적이고 기괴한 소설 속 상황들은 깨끗한 접시처럼 단란한 문체에 담겨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작품은 소설의 첫 부분을 맡은 ‘채식주의자’였는데, 꿈속에서 목격한 장면들 때문에 고기를 먹지 않게 된 여자의 극단적 행위를 인상적으로 그려내었다. 나는 거기에서 한강의 문장 속에 내포된 뒤틀린 감정들을 읽을 수 있었다. 우리가 흔히들 말하곤 하는 그로테스크함이나 기괴함에 가까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건 일종의 슬픔이었다.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 수록된 시들 역시 전반적으로 그런 분위기를 표명하고 있다. 함축적이고 짧은 문장 속에 폭력과 슬픔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특징인 한강의 시들은 읽을 때마다 느껴지는 불투명한 오묘함이 있었다. ‘피 흐르는 눈’이나 ‘해부 극장’ 등의 시들은 한강 특유의 매력이 가득 풍겼다. 희망보다는 절망에 가깝고, 쾌락보다는 고통을 더 많이 논하는 시들이었다.

 

특히 내가 인상적으로 읽었던 시는 시집 맨 첫 페이지에 실려 있는 ‘어느 늦은 저녁 나는’이었다. 상당히 단조로운 서술로 이루어진 이 시는 어쩌면 단순한 일상의 나열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특히 ‘밥을 먹어야지//나는 밥을 먹었다’라는 시의 마지막 서술은 얼핏 보기엔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하는 건방진 의구심을 들게 하기에 충분한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내가 이 시를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 역시 바로 그 부분이었다. 이 시의 독특한 감정선을 읽기 위해서는 마지막 구절들과 맞물려 돌아가야 할 톱니바퀴 역할의 구절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시 5행~8행의 ‘그때 알았다/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지금도 영원히/지나가버리고 있다고//’ 구절인 것이다. 시 속 화자는 밥을 먹고 있거나 밥을 먹기 직전의 상태다. 이는 시 속 서술로써 알 수 있는 정보에 불과하다. 하지만 바로 다음 행에서 시인은 흰 밥공기 위로 김이 피어올라오는 현상에서 어떤 감정을 감지한다. 무미건조한 일상 속에서 비일상적인 발상을 떠올린 것이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는 상상은 곧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는 생각으로 확장된다. 화자는 유순히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세월이든, 어떤 소모적인 감정이든, 그 어떤 것이든) 무엇인가를 놓쳐버렸다는, 지금도 놓치고 있다는 상실감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이후 화자는 ‘밥을 먹어야지’라고 말한다. 밥은 1행~4행에서 일상을 묘사하는 데에 쓰인 소품이다. 이러한 밥이라는 사물을 어떤 상실감의 감지 후 갑자기 떠올렸다는 것은 우리에게 일상 속으로의 순응으로 받아들여진다.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회의감과 상실감을 느꼈음에도 화자는 결국 이 일상에 순응하여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연과 연이 벌어지는 간격 속에서, 화자가 어떠한 심경의 변화를 겪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그 미묘한 공백 속에서 화자가 겪었던 감정들을 상상하고 공감해보며 그 공허함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밥을 먹었다’고 말하며 일상으로의 순응을 완료한 화자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이 작품을 이 시집의 가장 인상적인 시로 꼽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사고의 흐름과 변화가 연과 연 사이로, 짧고 단조로운 문장들 사이로 물 흐르듯이 진행되고, 독자들이 이 감정을 공유 받을 수 있을 만큼 소통의 통로를 열어두었다는 데에 있다. 또한 이 시의 마무리는 일상으로서의 순응이 아니라 앞으로 남은 일상을 겪어내겠다는 단단한 각오로 읽힐 수 있다는 점에 더욱 인상적이다. ‘어느/늦은 저녁 나는/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김이 피어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그때 알았다/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지금도 영원히/지나가버리고 있다고//나는 밥을 먹어야지//나는 밥을 먹었다’라는 짧은 본문 속에서 시인은 삶의 긍정성과 부정성을 한꺼번에 그려낸 것이다.

 

이 시 외에도 ‘여름날은 간다’에서 느낄 수 있는 서늘함이나 ‘저녁의 소묘’에서 풍겨오는 인상은 한강 특유의 세계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침보다 저녁을 더 많이 끌어오는 한강의 시들을 정말 좋아한다. 특히 그녀가 무엇보다 세밀하고 예리하게 그려낸 시 속의 고통들은 마치 내가 겪은 것처럼 아프다. 대부분의 문장들이 함축적이고 연과 연 사이의 공백이 길어 무거운 감정의 소통이 쉬운 것도 한강 시 특유의 장점이다. ‘밤을 기다리고 있’는 한강의 시들은 꼭 아침을 거부하거나 고통을 희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고통으로 해소하려는 사람들이나 위로를 사절하는 병자들에게 무엇보다도 선물하고 싶은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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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개월 23 일 전

꺄아 저 한강 광팬임돠..ㅎ 한강 왠만한 책은 다 읽어봐서 덕력이 꽤 됩니다ㅎㅎ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시는, 읽으면서 이해 안돼서 한참을 들여다봤었는데도 모르겠다!하고 넘겼었는데, 해석을 참 잘하신것 같아요. 공백이라는 말이 되게 공감이 되네요.
채식주의자 읽었을때 충격도 공감공감. 교보문고에서 읽고 나서 고개를 들었을 때 기억이 나네요ㅎㅎ

6 개월 21 일 전
여전사 캣츠걸님, 안녕하세요? 한강 작가의 시 분석한 글 잘 읽었습니다.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언급하면서, 이 작품에 나타난 “폭력과 슬픔이 공존”하는 양상을 시에 적용한 방법 흥미로웠습니다. 그중에서도 「어느 늦은 저녁 나는」을 집중적으로 해석하는 여전사 캣츠걸님의 솜씨는 전체적으로 훌륭했습니다. 꼼꼼한 읽기가 돋보였지요. 그럼 이 글에 대해 생각해볼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이후 화자는 ‘밥을 먹어야지’라고 말한다. 밥은 1행~4행에서 일상을 묘사하는 데에 쓰인 소품이다. 이러한 밥이라는 사물을 어떤 상실감의 감지 후 갑자기 떠올렸다는 것은 우리에게 일상 속으로의 순응으로 받아들여진다.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회의감과 상실감을 느꼈음에도 화자는 결국 이 일상에 순응하여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연과 연이 벌어지는 간격 속에서, 화자가 어떠한 심경의 변화를 겪었는지… Read m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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